구겨진 제복 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인사정의 실현, 전·의경 가혹행위 근절, 경찰과 업주 통화 금지, 성과주의 등 개혁과제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전국으로 확대했다. 조직 정비에 해당하는 일이다. 물론 경찰청장 업무가 안으로 향하는 조직 정비만 있는 게 아니다. 밖으로는 조직 처지를 적절하게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경찰은 밖으로 견해를 드러낼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내무부 직속기관이었던 경찰이 독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은 것은 1991년 경찰청으로 승격되면 서다. 이때부터 경찰은 치안에 대해 자율권을 보장받는다. 경찰 조직 위상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수사권이다. 조현오는 수사권에 대해 어떤 견해를 밝혔고 대응했을까. 그보다 먼저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기 전까지 경찰과 검찰 관계는 어땠을까.
젊고 자부심 강한 경찰대 출신 수사과장이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피의자는 검찰 출신이었고 피해자는 일반 서민이었다. 경찰은 구속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담당 검사는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것을 지시했다. 수사과장이 거부하자 부장검사가 불렀다. 연륜이 풍부한 형사팀장이 걱정이 돼 수사과장과 부장검사실로 동행했다.
당시 형사소송법 제196조(사법경찰관리) 제1항에는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었다. 부장검사는 수사과장에게 반성문 제출을 요구하며 ‘잘못’이라는 문구를 넣도록 지시했다. 부장검사와 수사과장 사이에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사팀장은 점점 불안해졌다.
경찰에 대한 검찰 특권 중에는 일반적인 수사 지휘권과 더불어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구속하는 유치장에 대한 감찰권이 있다. 만약 경찰이 검찰 눈 밖에 나면 유치장 감찰을 핑계로 경찰서에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형사팀장이 나섰다.
“부장님. 우리 과장님은 수사가 처음입니다. 비록 과장이지만 수사를 잘 모르십니다. 제가 반성문을 쓰겠습니다.”
“그럼 과장 대신 팀장이 쓸 겁니까?”
“네. 쓰겠습니다. 과장님 나가게 해주십시오.”
수사과장이 나가고 부장검사와 단둘이 남게 된 팀장은 살며시 물었다.
“부장님. 도대체 이게 왜 필요합니까?”
“주임검사가 반성문을 못 받아왔으니 내가 받아놓아야 다른 검사에게 ‘이런 것도 못 받는 너희들이 무슨 검사냐’라고 질타할 때 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릴게요. 검사들에게는 사경(사법경찰관) 불러다가 혼냈더니 잘못했다고 말하더라고 교육하면 되잖아요.”
조현오는 1990년 경찰서 과장으로 입문했다. 하루는 검사와 면담 약속을 했다. 그렇게 검찰청으로 찾아간 조현오를 검사는 방 밖에서 한 시간 기다리게 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갔더니 검사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반면 유치장 감찰을 온 검사는 수사과장 자리에 앉았다. 수사과장 중에는 당연한 듯 자리를 내주는 이도 있었다. 한 경찰은 ‘형사소송법 망령’이라고 한탄했다.
경찰과 검찰은 서로 다른 기관이지만 검사는 경찰에게 협의 공문 없이 지시했다.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보고 싶으면 경찰서로 오면 된다. 하지만, 검찰은 굳이 경찰에게 피의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이를 ‘피의자 신병인치’라고 한다. 경찰은 검찰이 지원을 요구할 때마다 업무를 제쳐두고 가야 했다. 검찰에 파견된 경찰은 검사가 미행이나 단속을 지시하면 수행하는 일을 맡았다.
형사과장이던 조현오는 검찰과 부딪히기보다는 자기 일에 신경 쓰자는 쪽이었다. 권위적인 모습으로 따지면 경찰 조직도 검찰과 다를 바 없었다. 경찰서 생활안전과장도 일선 파출소에 가면 파출소장 자리에 앉는 일이 허다했다.
경기지방경찰청 시절 조현오에게 참모 역할을 하는 형사과장이 이런 질문을 했다.
“오락실 업주와 물 한 잔도 마시지 말라는 등 강경 조치를 펴는 이유가 뭡니까?”
“경찰 부패를 도려내면 국민이 경찰을 지지할 것이고 그런 여론을 바탕으로 수사권을 가져올 거야.”
형사과장 생각은 달랐다. 경찰 조직에 힘을 실을 방법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직 부패를 도려내는 것보다 첩보가 들어오는 큰 사건에 바로 달려들어 국민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사권 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1999년 DJ 정부 때다. 그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며 행동으로 옮긴 이는 황운하였다. 서울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이던 황운하는 검찰에 파견된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렸다.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를 고려하면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반란이었다. 그 후 집중 논의 끝에 경찰청장 김광식은 검찰에 파견된 전국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린다.
그 후에 검찰은 정보국장인 박희원을 수사했다. 이후 경찰청장을 지낸 이무영, 이팔호, 최기문은 수사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다음 경찰청장이 외교관 시절부터 조어 능력이 탁월했던 허준영이다. 허준영은 경찰청에 수사권 문제만 전담하는 ‘수사구조개혁팀’을 만든다. 허준영이 하는 말은 종종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지구 상에 없는 게 두 가지, 다케시마와 대한민국 경찰 수사권.”
“지금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권검책경(權檢責警), 권한은 검찰에 있고 책임은 경찰이 진다인데, 이제는 권경책경(權警責警), 즉 수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경찰이 질 테니까 그에 따른 권한도 경찰에 줘야 한다.”
2005년 9월 8일 허준영은 한 손님이 청장실로 오는데 외사관리관 조현오에게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청장실로 들어온 손님은 세계적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와 그의 아내였다. 허준영은 유창한 영어로 “한국 경찰 최대 현안이 수사권 조정”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찰에게 수사권이 없다는 말에 앨빈 토플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라고 답했다.
당시 수사권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경찰청 차장인 최광식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최광식은 검찰 수사로 불명예 퇴진한다. 허준영도 퇴임하고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으나 때마침 선거법 위반으로 수사를 받으면서 공천을 받지 못한다. 이후 경찰청장인 이택순, 어청수, 강희락은 수사권에 대해 별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2010년 8월 30일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조현오 목표는 형사소송법 196조 개정이었다. 법을 개정하려면 국회의원 도움이 필요했다. 이 같은 작업은 경찰 모든 조직 부분에서 노력해야 했지만, 특히 정보 파트 역할이 중요했다. 경찰청과 서울지방경찰청은 모두 정보 분실을 운영한다. 정보 형사들을 정부기관, 사회단체, 지역별 담당구역을 정하고 배치해서 정보 수집 기능을 수행한다.
조현오는 충북청장이던 이철규를 2010년 9월 7일 정보국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2010년 12월 3일 서울청 정보과장인 김성근을 경무관으로 승진시키고 서울청 정보관리부장을 맡긴다.
비슷한 시기에 검찰 수사가 시작된다. 2010년 10월 5일 국회의원 11명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된다. 이른바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이다.
청목회(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는 2003년 결성된 단체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청원경찰이 회원인데, 이들은 처우 개선을 목표로 청원경찰법 개정안 통과를 추진했다. 회원이 낸 특별회비로 6억 5000만 원을 만들어 2008년 말부터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를 시작했다.
청목회 회원 가족과 친지 이름으로 진행한 ‘쪼개기 후원’을 통해 국회의원에게 전달된 돈은 500만~3000만 원 정도였다. 2009년 4월 발의된 청원경찰법 개정안은 2009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다.
검찰 수사에 여야 국회의원은 깊은 반감을 드러냈다. 당시 국회에서는 검찰이 국회의원을 옥죄려고 힘없는 사람들이 낸 소액 후원금까지 정치자금법으로 묶어서 건드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고 한다.
2011년 6월 30일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재석 의원 200명 가운데 찬성 175명, 반대 10명, 기권 15명이었다. 이 같은 압도적인 표차는 경찰청이 국회 내 반 검찰 정서 분위기를 잘 파고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형사소송법 개정안 내용을 보자.
형사소송법 196조 2항에 ‘사법경찰관은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인식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사실과 증거에 관하여 수사를 개시·진행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경찰도 수사 주체로 인정을 받았기에 수사에 들어가면 검사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
이 조항만 보자면 경찰에게 매우 유리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3항은 ‘사법경찰관리는 검사의 지휘가 있는 때에는 이에 따라야 한다.’ 고 나온다. 경찰에 수사개시권이 있더라도 검사 지휘를 따라야 하므로 경찰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현오는 3항에 ‘검사의 지휘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기 때문에 대통령령을 잘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도 3항에 크게 반발했다.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령과 법무부령 차이는 만드는 주체다. 대통령령은 대통령 주재로 각 부처 장관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만든다. 반면 법무부령은 법무부가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 검찰 입장에서는 법무부 장관은 통상적으로 검찰 출신이라 법무부령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현오는 ‘검사의 지휘에 관한 형사소송법 시행령(대통령령)’ 제정을 앞두고 다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협상 테이블에 나갈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전남 곡성서장인 장하연과 전북 정읍서장인 진교훈이 뽑혔다.
국무총리실 주재로 경찰과 검찰 측에서 대표들이 나와 논쟁이 시작됐다. 한쪽에서 문구를 수정하면 다른 한쪽에서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됐다. 경찰 쪽에서는 제2조(수사지휘의 원칙)에 ‘검사는 사법경찰관을 존중하고’라는 문구를 원하면 검찰은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제5조(수사지휘의 방식)로 넘어가자 경찰은 검사가 사건 지휘를 할 때는 서면 또는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검찰은 “긴급한 경우에는 전화나 구두로 지휘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경찰이 다시 “그렇게 전화나 구두 상으로 지휘할 때 다시 서면이나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는 방식으로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받아쳤다.
국무총리실은 경찰과 검찰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 강제 조정안을 내놓았고 대통령령은 12월 27일 시행됐다. 의욕적으로 진행한 법률 개정이었지만 경찰 조직 안에서 평가는 박했다.
2012년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첫 번째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였다. 혐의는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였다. 두 번째는 ‘룸살롱 황제’ 이경백이었다. 이경백은 1심 판결 전까지 자신과 유착한 경찰을 불지 않았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자신과 유착된 경찰을 불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2012년 3월 말부터 이경백과 유착한 현직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18명이 옷을 벗었다. ‘비리 경찰’ 뉴스가 언론을 장식했고, 이경백은 2012년 7월 17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
조현오는 퇴직하고 나서 차명계좌 발언으로 재판을 받았다. 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을 받고 서울구치소로 들어갔다.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사자 명예훼손죄’에서 8개월 실형이 타당한 양형인지 제기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조현오가 간 곳에는 이경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경백은 2013년 5월 11일 집행유예 기간에 불법 사설 카지노를 운영한 혐의로 구속됐다. 조현오는 구치소 안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 무작정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는데 조현오는 해고 노동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루는 면회 대기 중 옆에서 누군가 조현오를 불렀다. 고개를 돌렸더니 누군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김광준 검사입니다.”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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