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나는 <구겨진 제복>(조현오), <풍운아 황운하>(황운하)에 이어 다시 경찰 한 명을 만난다. 주인공 이름은 김헌기다. 황운하와 김헌기는 경찰대 선후배 사이다. 2011년 조현오 경찰청장 시절 김헌기는 지능범죄 수사과장이었고 황운하 수사기획관은 직속 상사였다.

 

황운하는 자신이 ‘검경수사권 역사’라고 자부할 만큼 치열하게 살았다. 황운하 활약은 여러 차례 언론이 다뤘으며 숱하게 화제가 됐다. 반면 김헌기는 철저한 실무형이다. 나는 김헌기 수사 인생을 담은 매뉴얼을 만들어 후배 경찰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2020년 1월 13일 국회는 검경수사권 조정안을 처리했다. 경찰 수사 재량이 더 확대했다. 그 후 경찰청은 ‘수사 역량 강화’를 목표로 많은 정책을 내놓았다. 특히 실무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을 키워야 했다. 이 글은 앞으로 경찰이 당면한 과제, 수사역량 상향평준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유능한 선배 인생에서 자극을 받는 것도 하나의 동기부여가 된다. 물론 이러한 대의명분이 이 글을 쓰게 된 유일한 원동력은 아니다.

 

 

필자가 취재를 시작한 시기는 2006년이다. 노래방 사장들 피해 사례를 블로그에 올린 게 출발점이다. 손님이 노래방에 몰래 술을 가지고 와서 마시다가 적발돼도 업주가 처벌받는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법 사각을 노린 부작용이 생긴다. 노래방을 골라 돈을 뜯고 무전취식하는 사람, 자기가 소개하는 도우미를 쓰지 않는다고 신고하는 사람도 있다. 노래방 업주는 도우미를 쓰는 위법행위 때문에 금품을 갈취당해도 신고를 꺼렸다.

 

이런 상황을 언론에 제보해도 보도하는 매체는 많지 않았다. 노래방 사장들은 블로그를 기반으로 취재 활동을 했던 나에게 연락했다. 뜻있는 노래방 사장들은 법 개정만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고 자비를 털어 신문을 창간했다. 하지만 유흥주점 로비를 뚫고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몇 년 후 이 문제를 해결한 이가 김헌기다.

 

김헌기는 2014년 본청 강력과장이 되자 신고 활성화를 위해 노래방 업주는 처벌을 면해주는 ‘피해자 면책제도’를 만들었다. 강신명 경찰청장이 취임하고 ‘동네 조폭 특별단속기간’을 정해 동네 조폭들을 입건했다.

 

지금 생각해도 경찰이 진작 해결했어야 할 일이다. 경찰이라면 누구나 민생범죄 문제를 고민해야 하고 해결하는 게 당연하다. 특별히 칭송받을 일까지는 아니다. 필자가 김헌기를 취재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가 2018년 인천지방경찰청 3부장으로 재직할 때다.

 


 

3부장은 크게 정보과와 보안과를 아우른다. 그런데 얼마 후 112 상황실을 관리하는 2부장 소관에서 사건이 터진다. 인천 송도신도시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서 한 여성이 고급 승용차를 세워놓고 가로막는 일이 벌어졌다. 아파트 주차위반 단속에 항의하겠다고 다른 차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당연히 112 신고가 접수됐다. 그러나 출동한 경찰은 몇 시간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사유지라 주차위반 단속도 아니고 견인대상도 아니지요. 차량 압수는 재산권 침해 때문에 어렵고요.”

 

그러자 주민들이 차주를 비난하는 내용을 적은 포스트잇을 차량에 닥지닥지 붙이기 시작했다.

 

▲ YTN뉴스 방송 캡쳐

 

주민들은 합심하여 차량을 옆으로 옮겨 놨다. 이 사건은 외국까지 크게 대서특필됐다. 김헌기는 이 사건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 경찰관들을 지휘하는 체계가 있다. 경찰서 112 상황실과 상급기관인 지방경찰청 상황실 조직으로 올라간다. 김헌기는 지방청 회의에서 시스템 문제를 지적했다.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상황에서 현장 경찰에게 뭔가 지침을 줘야 할 거 아닙니까. 선제적으로 지원을 해줘야지, 경찰 조직이 이래서 되겠습니까. 경찰서와 지방청 조직은 대체 뭐하는 조직이냐 이거지요.”

 

112 상황실은 김헌기 소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칠 수도 없었다. 이듬해 2019년 봄, 계속해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참모로 내정됐다. 다행스럽게도 2부장이었다. 김헌기는 여기로 오자마자 112 코칭 시스템을 바로 시행했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다양한 현장을 접한다. 거기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애매하면 종합상황실에서 코칭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이 전국으로 확대될 것을 확신했다.

 

사명감과 열정이 돋보이는 사례다. 물론 이 정도 소명의식은 다른 경찰 간부에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김헌기와 다른 경찰들 사이 차이가 더 명확하게 보인다. 그 차이가 ‘김헌기 수사 인생 매뉴얼’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다. 이런 경험이 있었다.

 


 

2020년 봄, 대학병원 주차장에서 후진 중에 뒤 차량 번호판을 툭 건드렸다. 뒤에 있는 차량 운전자 상태를 확인했다. 운전자는 중년 여성이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서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차량 엔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보험회사에 전화해 달라.”

 

보험회사 직원을 기다리는 동안 중년 여성은 이렇게 뒤로 차를 치면 차 엔진이 망가진다고 했다. 그 주장을 그냥 듣기만 했다. 도착한 보험회사 직원이 차 엔진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해주고 사건 접수는 취소됐다.

 

보험회사 직원이 떠나자 운전자는 다시 차량 문짝이 이상하다며 고쳐야겠다고 주장했다. 보험회사는 다시 그 여성에게 전화해 차 구조상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설명했다. 운전자는 공업사에 가서 차량 점검을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났다.

 

운전자에게 전화가 왔다. 차량 이야기는 전혀 없이 목이 너무 아파 엑스레이를 찍어야겠다며 보험회사에 대인 접수를 부탁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교통과 경찰에게 상담을 청했다. 대부분 의견은 같았다. ‘똥 밟은 셈 치라’는 것이다.

 

한 경찰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 도로에서 차량 접촉으로 상대에게 20만 원가량 차량 수선비를 물어줬는데 병원비로 350만 원을 청구했다며 누구인지도 말해줬다.

 

“우리 위층에 사는 여자야!”

 

내가 사는 지역 관할 서장은 경찰청(본청) 교통과에서 총경 승진을 했다. 그는 내가 주인이고 보험회사가 종이라며 주인이 종을 부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너 대리인이 누구야? 이런 일 하라고 비싼 보험 드는 것 아니야? 물론 너 보험료 약간은 올라가겠지만 보험회사 보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 너 그 여자 또 만날래?”

 

대다수 의견을 받아들여 대인접수를 했지만 찝찝했다. 2006년에 만난 노래방 업주도 금품갈취를 당하는 현실을 하소연하고 싶어서 나에게 취재를 요청했을 테다. 김헌기에게 전화했다. 사고 상황을 설명하니 며칠 전 인천 골목길 사고를 이야기해줬다.

 

한 운전자가 운전 중 차량 사이드미러에 부딪혔다. 상대방 차량 운전자는 현장에서는 괜찮다고 했다가 나중에 뺑소니 신고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나보다 더 나쁜 상황을 접하면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김헌기는 이야기를 끝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 교통사고 악성 피해자에 대한 경찰의 대비책! 그래서 국민이 교통사고 악성 피해자에게 시달리지 않게 내가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 교통사고 악성 피해자가 억지 주장할 때 경찰 대처를 보니 믿음이 간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겠네. 좋은 아이디어네. 오케이!”

 

가능성이 있는 계획일까?

 

“쉬운 것은 누구나 다 하지. 이건 기준이 모호하니까 잘 만들어야지. 나는 내가 백 프로 하려고 안 해요. 내가 시작의 반이야. 항상 그런 생각을 하지. 내가 다 하려고 하지 않아. 난 그런 능력 없어.”

 

김헌기는 담당 계장에게 교통사고 악성 피해자를 걸러내는 시스템을 만들어보자고 말했다. 그에게 받은 문자 메시지다.

 

‘인천에서 시작해보겠다. 나이롱 교통사고 피해자를 거르는 장치를 마련하겠다. 이런 나이롱 교통사고 피해자가 설치지 않도록 고민 또 고민해보겠다’

 

순간 영화 <와일드카드>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교통사고 악성 피해자들이 아무리 쇼하듯 뒹굴어도 김헌기 앞에서는 어림없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고 북쪽에는 60만 대군이 버티고 서있다.

 

(다음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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