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목차.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수사관 P는 1993년 순경으로 들어왔다. 1998년 인천에 있는 한 경찰서 조사계(현 경제팀)에서 처음 수사를 접했다.
수사관 P에게 첫 구속사건이 간통이었다. 2015년 2월 간통법 폐지 전까지 간통은 경찰수사에서 대표적인 구속사건이다. 당시 조사계에 간통 전문가가 두 명 있었다. 그들이 신입 P에게 자백 받는 방법을 알려줬다. 수사관 P는 가르쳐 준 대로 잡힌 남성을 조사했다.
“몇 년 만났습니까?”
“2년 만났습니다.”
“그러면 1년에 50번, 2년이면 100번 했네요. 100번이면 엄청나게 많이 살아요. 딱 한 번만 인정하고 그것만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합시다.”
“아이고, 형사님 감사합니다.”
남성은 자백했고 수사관 P는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자 나이 지긋한 50대 검사가 불렀다. 이혼심판청구소송 확인하고 영장을 신청했는지 물었다. 수사관 P는 오히려 이혼심판청구소송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간통죄는 이혼을 전제로 성립하므로 이혼 절차를 밟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경찰 조사계 내 간통 전문가들이 P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다.
검사는 불법체포와 감금을 언급했다. 수사관 P는 업무를 맡은 지 한 달밖에 안 됐다며 사정했다. 이후 P는 수사가 ‘무섭고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공부벌레가 됐다.
그 후 실력을 인정받아 선임들 추천으로 2004년 인천지방경찰청 수사2계로 들어왔다. 수사2계는 뇌물수수 같은 수사나 특별법 관련 범죄를 다룬다. 당시 4개 반마다 쌓인 수사기록 높이를 보고 P는 기획수사 의미를 알게 됐다. 당시 경장이던 P는 큰 사건을 해결해 경사로 특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곳에서 김헌기 계장을 만났다.
목이 길고 키가 크며 몹시 마른 황새 같은 외모였다. 김헌기 계장은 모든 기록을 살폈고 빠진 부분을 메모해 회의에서 안건으로 다뤘다. 사건을 진행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P는 '굴비 상자 2억 원' 사건으로 김헌기 계장을 처음 겪었다.
2004년 8월 30일 안상수 인천시장이 클린센터에 현금 2억 원을 신고한 내용이 보도됐다. 근처 사는 여동생 집에 전해달라며 2억 원이 든 굴비상자가 왔는데 안상수는 누군지 모르겠다며 찾아가라고 신고했다는 것이다. 이 보도에 김헌기 계장 주재로 수사회의가 열렸다. 수사과장과 김헌기 수사계장, 수사2계 직원들이 참석했다.
"시장에게 돈 2억 보냈으면 뇌물 아냐?"
이런 의심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현금 추적에 대한 수사 성과를 확신하기는 어렵다. 현직 시장과 관련돼 정치적 사안으로 번질 수 있는 민감한 문제다. 당시 수사2계 직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도 간이 큰 편인데 그때 경대 출신들이 이건 명백한 불법 아니냐면서 그걸 손대자는 거야. 과장이 용단을 내리고 계장도 가자고 하는데, 당시 현역 시장이 엄청나게 셌거든요. 감히 말도 못 붙일 때야. 수사하는 과정에서 하자가 없는 게 있겠어요? 그거 걸고 날리면 다 날아가는 거지."
수사관에게 '험한 세상에 다리'가 돼 줄 이는 오직 상사뿐이다. 당시 인천경찰청장(이하 인천청장)도 힘을 보탰다.
"야, 이 돈 성격만 규명해 봐."
인천청장은 수사과에 특진도 약속했다. P도 특진이 걸렸다는 말에 마음이 설렜다. 이튿날 경찰은 굴비상자 2억 원에 대한 수사를 착수한다. 4개 반이 모두 붙었다.
매일 회의가 열렸고 수사 실무 총괄은 김헌기 수사2계장 몫이었다. 계장은 수사해야 할 사안을 항목별로 나눠줬다. 수사는 만 원권을 묶은 띠지에서 출발했다. 그 띠지에 찍힌 도장이 어느 은행 직원 것인지 금감원을 통해 파악했다. 또 그 현금다발에서 전달자 것으로 추정되는 지문도 찾아냈다.
돈다발은 어떻게 인천 안상수 여동생 집까지 굴러갔을까. 통신수사, CCTV, 카드 명세 등을 분석해 전달자 동선도 확인했다.
이제 여동생이 굴비상자를 받은 경위를 알아낼 차례다. 그런데 여동생이 갑자기 사라졌다. 출국 가능성도 있었고 체포영장을 받을 시간은 촉박했다. 수사2계 직원을 여러 팀으로 나눠 시장 여동생이 갈만한 장소로 흩어지게 했다. 당시 P 직속 상사는 Q 반장이다. 순경에서 시작한 Q는 김헌기 계장보다 연배가 훨씬 많았다.
Q는 중요한 사건 피의자를 검거 중에 놓친 적이 있었다. 피의자 차량이 국도에서 총알처럼 질주해버렸기 때문이다. 김헌기 계장은 그 소식을 듣고 Q에게 잡을 때까지 올라오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김헌기 계장 성격을 모두 잘 안다.
P는 이른 아침부터 어느 아파트 앞에 잠복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했다.
‘제발 내 앞에만 나타나지 마라’
눈앞에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는 일행 중에 한 여성이 보였다. 안상수 시장 여동생이었다. P는 차에서 바로 내려 다가갔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이런저런 설명을 하면서 같이 인천경찰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러한 임의동행도 상대가 거부하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장 여동생이 나타났다는 P 보고에 Q 반장은 긴급체포해서라도 놓치면 안 된다며 광분했다.
P는 여동생이 올라타려는 차량 문 앞에서 실랑이했다. 결국, 여동생은 출석했고 한나라당은 P가 강압수사를 했다며 진정을 넣었다. P는 경위서를 한 장 썼다. 굴비상자 현금 2억 원 수사는 두 달 안에 모두 끝냈다. 경찰은 10월 20일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다.
인천청장은 돈 성격만 규명해도 특진시켜준다고 약속했다. 수사진은 금전 성격 파악은 물론 돈을 건넨 업체 대표를 구속시키고 안상수 시장까지 기소되도록 했다. 수사 목표는 초과 달성했지만 특진은 없었다. 수사 기간 인천경찰청장실은 '야당 탄압'이라고 외치는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북새통이었다. 수사 주체 승진 강행은 부담스러웠을 테다.
이듬해 2005년 P는 모 업체를 압수 수색을 하다가 고위직 주소가 모두 영종도에 있는 한 빌라인 것을 발견한다. 전입 날짜도 비슷했다. P는 영종도로 향했다. 그곳은 유령도시였다. 빌라에는 유리창이 없고 빌라 지하는 물로 차 있었다. P는 반장 Q와 김헌기 계장에게 보고했다. 반장과 계장이 수사를 승낙하자 P는 영종도에 눌러앉아 조사를 시작했다.
김헌기 계장은 첩보 보고를 받으면 수사 방향과 적용 법리 등을 제시한다. P는 전입자 명단을 뽑아 주소지 수도와 전기요금 내역서를 살펴봤다. 수도와 전기를 사용한 게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모두 위장전입으로 입건했다.
경제특구인 영종도 부동산 투기위장전입 사건 수사는 상부에서도 주목했다. 경찰 계급은 순경에서 시작해 경장, 경사, 경위로 나간다. 인천청은 경찰청에 경사 특진이 아닌 경위 특진을 올린다. 수사2계 모 경사가 P에게 인사했다.
"P야, 너 때문에 내가 특진했다. 고맙게 생각한다."
2006년이 됐다. 인천에 한 장애인협회가 있다. 이곳 대표 B는 일당을 받은 장애인을 동원해 공사 못하게 떼를 쓰는 게 주특기다. 그리고 기업에 장애인 협회에 돈을 기부하도록 유도한다. 이 장애인협회에서 활동하는 비장애인 K가 있다. K는 P를 따랐다. K 처지에서는 험한 세상에서 인천지방경찰청 경장이라도 알아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게다가 P는 K에게 술도 사줬다. 어느 날 P는 K에게 전화를 받는다.
"형사님, 어마어마한 첩보가 있어요."
K는 대표 B 모르게 자료를 입수한 듯했다. 정치인이 돈으로 장애인을 당원 가입시켰는데 명단이 꽤 된다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형사님, 500만 원 빌려주세요."
"일단 내용이나 보고 이야기합시다."
P는 이 내용을 김헌기 계장과 반장에게 보고했다. P는 K를 횟집에 데려갔다. K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냈다.
"형사님, 이게 뭔지 아십니까? 이게 장애인 당비 대납한 사람들 명단입니다."
"아 그래요?"
P는 궁금했지만 오히려 관심 없는 듯 안주만 더 시켰다. K가 술에 잔뜩 취하자 P가 대뜸 말했다.
"그거 뭐예요. 조금 봐 봅시다. 주머니에 있는 거 줘 봐요."
종이에는 당비 대납 명단과 금액이 나와 있었다. P는 별거 아닌 듯 K에게 되돌려줬다. K는 내심 500만 원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한 듯했다. 하지만 500만 원은커녕 술만 들이켜는 P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우정 변치 맙시다."
K는 딸 장래희망이 경찰관이라고 했다. P에게 자기 딸이 인천지방경찰청을 구경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P는 증거를 확보하고 김헌기 계장에게 전화했다. 김헌기 계장은 술을 마셔도 일할 때 빈틈이 있거나 허술한 것을 질색했다. P는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어쩔 수 없이 술 좀 먹게 됐습니다."
"야, 괜찮아. 괜찮아! 고생했다. 고생했어! 잘했다."
P는 K 씨 딸에게 인천지방경찰청 모든 층을 구경시켜줬고 K는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K가 장애인 협회 대표 B와 멀어진 이유를 알게 됐다. B는 다리를 못 쓴다. K는 장애인이 살기 험한 세상을 바꾸려는 협회에서 B를 대신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런데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B는 독차지했다. B는 결국 구속됐다.
2007년 P는 경사로 특진했고 일선 경찰서로 나갔다. 김헌기 계장도 2007년 초 총경으로 승진해 인천지방경찰청 수사과장이 됐다. 몹시 좋았던 순간들이다. 김헌기와 함께 서초서 조사계에 근무했던 W도 어느덧 승진하여 인천으로 와 반가움을 더했다. 그러나 햇살은 사건과 함께 구름 속으로 사라져갔다.
2007년 3월 송도초등학교 유괴 사건이 벌어진다. 마침 2007년 2월 '이형호 유괴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그놈 목소리>(주연 설경구)가 개봉해 충격이 더 컸다. 수사본부를 꾸렸고 인천 모든 경찰서가 투입됐다.
유괴범은 나흘 만에 잡았으나 아이는 유괴 당일 살해됐다. 뒤늦은 검거에 비난이 쏟아졌다. 청장 주재 회의가 열렸다. 인천청장과 과장들이 모두 참석한 회의에 일선 경찰서 과장들도 모두 모니터 앞에 앉았다.
형사과장 W는 그날 회의를 이렇게 돌이켰다.
"제 기억으로 그때 청장이 김헌기 수사과장을 박살냈어요. 네가 그렇게 지휘해서 사람이 죽었다면서. 사실 청장 자신이 책임져야 하거든요. 청장이 보고를 다 받고 최종지휘를 한 거잖아요. 그때 속으로 공개적으로 고생한 과장에게 저렇게 뭐라 하나 생각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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