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공 씨 단독범행이며 우발적인 사건입니다.”

 

2010년 12월 9일 황운하는 디도스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당당한 발표와 달리 여론은 축소수사로 받아들였다. 정권 입맛대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디도스 사건을 검찰로 송치하자 검찰은 대규모 수사팀을 꾸려 디도스 사건을 수사한다고 보도했다. 검찰은 경찰 수사가 잘못된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

 

경찰 조직 내에서도 후폭풍이 불었다. 황운하가 경찰 조직을 위험에 빠뜨렸다며 문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불거졌다. 그러나 황운하는 2012년 말까지 수사기획관으로 일했다. 경찰청장 조현오가 흔들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믿고 일을 맡기면 간섭하지 않고 외풍도 차단하는 게 조현오 방식이었다.

 

지능수사대와 범죄정보과를 신설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현오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을 테니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해당 과장은 최대한 능력 있는 직원으로 팀을 구성했다.

 

당시 범죄정보과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작성하는 수준을 요구하지 않았다. 범죄정보과 일부 직원을 정보과 출신이 아닌 수사과 사람으로 구성한 이유다.

 

사건 첩보를 구해 수사하는 것을 ‘인지수사’라고 한다. 이른바 인지수사로 승진을 한 번 이상 했던 사람이 범죄정보과에서 일했다. 이들이 생산한 정보는 수사부서에 넘기면 바로 몇 가지 사항만 보완해 압수영장이나 계좌영장을 신청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수사부서가 압수영장을 받았다고 해서 그 결과가 모두 성공적일 수는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희팔 자금 추적 수사였다. 조희팔은 3조 5000억 원대 다단계 사기사건 주범으로 2008년 중국으로 밀항했다. 조희팔은 주로 대구에서 활동했고 이 지역에 관련 수사가 집중됐다. 당시 범죄정보과는 대구에 사는 조희팔 측근이 자금을 은닉했다는 첩보를 얻었다. 황운하는 대구지방경찰청이 아닌 경찰청 지능수사대에 수사를 지시했다.

 

경찰청장 조현오도 나름 호전적인 기질이 있는데, 수사기획관으로 황운하까지 오면서 검찰 심기를 건드리는 행보가 이어졌다. ‘밀양 경찰 검사 고소 사건’이 첫출발이었다.

 


 

이 사건은 젊은 경찰대 출신이 2011년 밀양경찰서 지능팀장으로 가면서 시작된다. 당시 경남지방청은 토착비리 수사 성과를 독려했다. 때마침 지능팀장은 지역 사이비 기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역 폐기물업체 수사로 급선회한다. 수사 대상은 업체를 비호한 공무원까지 확대된다. 사건 규모는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독려하던 검사도 태도가 달라졌다. 검사는 지능팀장을 검사실로 불러들여 ‘수사의 정도’가 아니라며 제동을 걸었다. 지능팀장이 되물었다.

 

“어떤 점에서 비 정도입니까?"

 

지능팀장은 당시 그 말을 들은 검사가 흥분해 욕설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 새끼 너 정신 안 차려. 여기가 어딘 줄 알어? 계장님 이 새끼 피신(피의자 신문조서) 받으세요. 너희 서장 내 앞에 불러봐? 너희 과장 한 번 불러봐?”

 

지능팀장은 검찰과 경찰이 협력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전과 머슴이었다. 지능팀장은 검사 말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하고 검사실을 나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굴욕감, 자괴감, 모멸감 같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지능팀장은 앞으로 처신을 고민했다. 수사기획관인 황운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당당하게 살고 싶다고 했고 검사를 폭언과 수사 축소 지시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해당 검사가 지능팀장에게 과잉수사 문제를 지적하며 적절한 수사 지휘를 했을 뿐 폭언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경찰청은 이 사건을 본청 지능범죄수사대에 즉시 배당한다. 또 혐의를 부인한 채 진술서만 내고 경찰 소환 요구를 세 차례 거부한 검사에 대해 체포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검찰은 영장을 기각했고 경찰 기소 의견도 무혐의 처리했다.

 

경찰청장 조현오는 이 과정에서 “검찰은 문제 있는 경찰을 잡아들이고 경찰도 문제 있는 검찰을 잡아들이면 두 조직이 모두 깨끗해지지 않겠느냐”라고 말해 검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검찰은 전에 없던 방식으로 경찰청 수사에 대응했다.

 


일반적으로 경찰청이 하는 수사는 특정 관할 사건이 아니다. 가령 조희팔 은닉자금 추적 수사는 피해자가 전국에 걸친 전국단위 수사였다. 검찰은 그런 경찰청 수사 사건들을 관할로 이첩을 요구하면서 방해하기 시작했다.

 

즉, 서울중앙지검은 조희팔 은닉자금 추적 수사를 대구지검으로 넘기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이 사건은 경찰청 지능수사대가 아니라 대구지방경찰청이 맡게 된다. 그러나 대구지역 경찰관은 조희팔 세력과 유착이 됐다는 의혹 때문에 수사를 맡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든 수사는 수사관 의지에 달렸다. 경찰청은 지능범죄수사대 수사관을 대구지방청 수사계 소속으로 보냈다. 공문으로 진행하는 이 인사 과정은 검찰도 파악했다. 하지만 검찰은 경찰이 신청하는 각종 통신 허가와 계좌추적 압수수색 영장 신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공문에는 조희팔 은닉 재산 추적과 유착된 경찰을 잡겠다는 명분이 있었다.

 

대구로 간 수사팀은 조희팔 측근 거주지 아파트까지 특정해냈다. 하지만, 아파트를 압수수색하니 첩보 내용과 달리 측근은 빈곤하게 살고 있었다. 아파트를 뒤지면서 조희팔 사망을 암시하는 간접증거도 나왔다. 경찰청 지능수사대는 2012년 5월 조희팔 사망을 발표한다. 이 발표는 디도스 수사 발표만큼 언론에 집중포화를 맞는다.

 

처음 첩보와 수사 내용이 다르면 수사팀은 철수 지시를 바라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부는 사람이 죽어도 돈은 있을 것이라며 은닉자금 추적을 지시했다. 불법 다단계 업자들은 통상 차명계좌를 사용한다. 모든 단서는 조희팔 주변인 진술에서 시작된다.

 

“내가 통장 빌려서 준 적 있다.”

 

수사팀은 본인 동의를 받아서 계좌들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장을 받아서 상대 계좌를 다시 열어본다. 수사팀은 대구에서 계좌추적 영장을 수십 차례 받아내며 자금 흐름을 추적했다. 조희팔 계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금이 흘러 들어간 계좌 가운데 한 검사 이름이 등장한다. 검사는 조희팔 쪽에서 넘어온 자금으로 유진기업 주식을 샀는데 그 계좌에 입금한 사람들은 모두 특수 3부 검사였다. 이 가운데 한 명이 조희팔 쪽 수표를 검사 계좌에 입금한 것이다. 그 검사 이름이 김광준이다.

 

김광준은 고교 동창이면서 조희팔 측근인 강태용에게 받은 수표로 주식 투자를 한 것이다. 조희팔 자금 일부가 부장검사인 김광준 차명계좌로 흘러간 것이다. 수사관 30여 명이 차명계좌에 입금 한 사람들을 동시 조사하고자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경찰 수사 정보가 언론에 새 나가면서 검찰이 직접 수사하겠다고 나섰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김수창 특임검사를 지명했다. 특임검사제도는 2010년 이른바 스폰서 검사 사건이 불거지자 당시 김준규 검찰총장이 검찰이 자정 능력을 강화하겠다며 들고 나온 개혁(?) 조치다.

 

검찰은 무엇보다 검사가 경찰에게 조사받는 선례를 남기지 않는 게 중요했다. 특임검사팀은 김광준 검사를 구속시키면서, 총 10억 원대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김광준 검사 개인 비리 차원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들은 황운하가 수사기획관이었기에 타깃이 김광준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릴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청 광역수사대 진행하는 ‘윤우진 용산세무서장 뇌물 수수 의혹’ 사건 또한 황운하가 뒤를 받쳐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사건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이 모 교수와 관련된 뇌물 첩보에서 시작된다. 당시 학과 학생 절반이 이 교수에게 불법 레슨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 비리 사건을 수사하면서 다른 첩보를 얻는다. 바로 이 교수에게 돈을 바친 학부모 김 모 씨가 윤우진 세무서장에게 뇌물을 건넨 정황을 잡아낸 것이다.

 

김 씨는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서 육류 수입 가공업자로 일했다. 매출이 큰 사업체는 세금을 줄이기 위해 자기 사업체를 나누는 방식으로 매출을 줄이기도 한다. 이런 편법 사용 여부를 관할 세무서가 모를 리가 없다. 이를 눈감아달라는 뜻에서 관할 세무서장에게 로비를 할 이유가 생긴다. 김 모 씨는 윤우진 세무서장이 골프를 칠 때, 본인 카드로 비용을 결제를 해줬고 검사들도 함께 했다는 진술을 받았다.

 

범죄정보과에서 생산한 정보를 바탕으로 경찰청이 수사할지 지방청으로 보내야 할지 판단하는 주체가 수사기획관이다. 이 정보는 서울청 광역수사대로 넘어간다.

 

김모 씨 카드 결제 내역을 살펴보면 언제 골프를 쳤는지 알 수 있다. 보통 자기 이름으로 예약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시각 골프 부킹 명단과 골프장 내 CCTV만 확인하면 된다.

 

간단한 사건이다. 하지만 검찰은 골프장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다. 명분은 인권 보호였다.

 

경찰은 당시 윤우진 세무서장 통화기록을 갖고 있었다. 골프 치는 당일, “지금 누가 먼저 도착했어?”와 같은 대화가 전화로 오갔을 것이다. 기지국 위치를 근거로 톨게이트를 통과했을 차량을 특정해냈다. 그러나 차량 번호로 정확한 부킹 명단을 확인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해 검찰은 골프장 압수수색 영장을 6차례나 기각했다.

 

서울청 광역수사대는 여름에 윤우진을 불러 조사를 했다.

 

수사관은 조사를 끝마칠 즈음 외국에 나갈 계획이 있는지 확인했다. 윤우진 세무서장은 성실히 수사에 응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사관은 당부했다.

 

“혹시 외국으로 나가려면 사전에 저희에게 꼭 말씀해야 합니다.”

 

2012년 8월 30일, 윤우진 세무서장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해외로 도망친 것이다. 도피 전, 윤우진 세무서장은 대포폰으로 검사 여러 명과 수시로 통화를 하곤 했다. 누군가로부터 코치를 받은 흔적이 짙었다.

 

윤우진이 해외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경찰 쪽에 쓴 '빽'이 황운하로 인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 사건 수사 관계자는 이를 “황운하 공이 크다”라고 표현했다.

 

윤우진 세무서장은 사회 전방위 분야에 힘 있는 인맥을 갖고 있었다. 경찰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당시 수사기획관인 황운하도 ‘빽’ 쓰는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황운하는 그럴수록 서울청 광역수사대 실무진을 경찰청으로 불러들여 윤우진 수사 상황을 챙기기 시작했다. 진행 상황을 자세히 듣고 부족한 사항은 보완을 지시했다.

 

윤우진은 친한 경찰 고위직 인맥을 통해서 수사에 힘을 빼려는 시도가 먹히지 않는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윤우진 입장에서는 시간을 끌 수 있는 방법으로 해외도피를 택했을 것이다. 시간을 끌면 경찰 인사철이 다가올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2012년 11월 황운하는 결국 수사기획관에서 물러났고, 수사와 상관없는 보직으로 밀려났다. 당시 경찰청장 김기용은 황운하에게 부담스러운 심경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2012년 말,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2013년 3월 김학의 별장 성접대 동영상 사건이 터졌다. 정권은 권력층 수사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 수사에 관여한 경찰들은 수사부서에서 배제됐다. 인사가 조직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경찰 수사기능은 그렇게 와해됐다.

 

황운하 수사기획관이 떠난 후, 박근혜 정권 하에서 권력층 비리 수사를 이어갔던 한 경찰은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조직에서, 저에게 전화해서 열심히 하라고 끝까지 격려해준 사람은 황운하와 조현오. 나머지 대부분은 전화해서 뭐라 하고 욕하고…”

 

(마지막 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글쓴이 : 서형 seohyung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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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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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외시 출신 경찰청장

 

2003년, 황운하는 서랍을 정리하다가 누렇게 된 대학노트를 발견했다. 20년 전 경찰대 재학 시절 사용했던 노트에는 경찰관으로서 목표 세 가지가 적혀 있었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 경찰 수사권 독립, 경찰기구 독립이다. 경찰은 수사권 독립을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전제로 여긴다.

 

황운하는 1984년, 4학년이 됐을 무렵 경찰 조직이 떠안은 숙제 해결을 경찰이 존재하는 이유로 삼겠다고 생각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벌어지고,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1988년 1월 28일, 경찰대 졸업생 및 재학생들이 모여 성명을 발표한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천명하는 ‘경찰중립화선언’이었다. 황운하를 포함한 주동자들은 서울지방경찰청장실에 모두 불려 갔다. 더는 집단행동을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황운하는 이듬해 1989년 종암서 장암파출소장으로 부임한다. 80년대 학생들은 전두환 사퇴를 외치며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곤 했다. 1980년대 파출소에는 시위자를 검거하려는 주재형사가 상주했다. 당시 황운하와 함께 근무한 주재형사는 지금 어느덧 노인이다. 그도 황운하가 전 해에 큰일을 벌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찰 고위층은 파출소장 찾는 전화를 종종 걸었다. 주재형사는 이런 명령도 받았다.

 

"소장 다른데 못 나가게 붙잡아두세요."

 

당시 황운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경찰 조직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좋지도 않았지만, 이 조직에서 성장한다는 느낌도 없었다.

 

주재형사도 당시 20대 황운하는 경찰 선택을 조금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린 황운하에게 사주를 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잘 아는 철학관에 미리 가서 이렇게 당부했다.

 

“내일 파출소장 모시고 올 테니까 사주에 관운이 붙었다고 이야기해주라.”

 

주재형사는 황운하가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황운하를 포함한 경찰대 1기생들이 1987년부터 경찰에 유입되면서 조직 청렴지수가 높아졌다. 수사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은 1990년대에는 경찰대 졸업생을 대거 조사계에 투입하면서 청렴성을 요구하는 사회 흐름과 맞물리게 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조직이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기존 문화와 타성에 젖은 상사가 있기 마련이다.

 

황운하가 형사과장이던 시절 야간에 신고가 들어오면 직접 출동하는 서장이 있었다. 서장은 자신이 출동할 때마다 형사과장도 호출했다. 황운하는 호출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일은 야간 당직 반장 담당입니다. 낮에 정신을 집중해 사건 기록을 검토해야 하니 못 나갑니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서장은 과장들이 다 모인 오전 회의에서 불편한 마음을 내비쳤다.

 

“형사과장, 어제 서장이 나오라고 한 지시 전달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전달받았습니다."

 

“왜 안 나왔나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나갈 사건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낮에 일을 못합니다.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지 중요하지도 않은 일까지 쇼맨십 부리 듯하면 일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나와 일 못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과장들이 황운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서장은 즉시 서울지방경찰청에 황운하가 항명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황운하는 곧 다른 경찰서 형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처럼 참모로서 황운하를 내켜하지 않는 서장도 있었지만, 어떤 서장은 황운하를 '경찰대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제1호'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경찰대 출신들이 조직을 위해 목소리를 낼 때마다 그 중심에 황운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황운하는 경찰대 총동문회장을 지냈다.

 

당시 정치권은 대우부평자동차 진압 사태 책임을 경찰청장인 이무영에게 물어 퇴진을 요구했다. 경찰대 총동문회장이었던 황운하는 회의를 열고 최종 견해를 언론에 밝혔다. 정국 수습을 노린 청장 퇴진 요구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보도는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확산됐다. 언론은 경찰청장을 보호하고자 경찰대 출신이 나섰다고 봤다. 보도가 확대되자 황운하가 수습해야 할 상황이 됐다. 경찰청장 관련 사안인 만큼 경찰 고위간부는 모두 언론사로 총출동해 읍소했다. 언론이 갑이고 경찰이 을이었던 시절에도 기자에게 대드는 경찰은 황운하뿐이었다.

 

당시는 기자들이 사건 특종을 놓치면 경찰에 화풀이하는 관행이 있었다. 용산법조브로커 오다리 사건이 <중앙일보> 단독으로 보도되자 다른 언론과 형사과장 황운하는 불편한 관계가 됐다. 그렇다고 황운하가 기자들을 따로 챙기지도 않았다.

 


 

황운하가 강남서에서 형사과장으로 근무하던 즈음 SBS 뉴스가 시청률을 높이려고 사건 보도 비중을 늘리는 편성을 했다. 2003년 6월 17일 MBC가 강남 6인조 연쇄납치 강도 사건을 특종 보도한다. SBS는 다음날부터 8시 뉴스로 강남경찰서를 비난하는 기사로 맞대응했다. 경찰은 서둘러 수사 책임을 물어 황운하 등을 직위 해제했다.

 

경찰 조직은 계급정년제가 있다. 경정에서 총경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경정 14년 차에 경찰을 그만둬야 한다. 황운하는 이후 소청심사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해 경찰청장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 박종희는 경찰청장 최기문에게 이 문제를 따진다. 언론사와 갈등을 해소하려는 무리한 징계라고 지적했다.

 

"그러니까 경찰의 징계가 다분히 감정적이고 이 사건을 호도하려는 의미가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멀쩡한 사람들에게 그런 혐의를 씌워 수사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해 가지고 소청심사위원회에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까지 받았겠습니까?"

 

총경 인사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그러나 경찰청장이 국정감사 지적을 받는 상황에서 경찰청 분위기가 원인 제공자인 황운하에게 호의적일 리 없었다. 그러나 최기문은 황운하를 2004년 총경으로 승진시킨다. 황운하는 훗날 최기문 경찰청장으로부터 승진한 이유를 전해 들었다. 당시 경찰청장 최기문에게 한 참모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찰 조직에서 황운하에 대한 평가가 갈리지만 조직에 있어야 된다는 여론이 훨씬 많습니다. 만약 황운하가 총경이 안 돼 조직을 나간다면 경찰 역사에 두고두고 오점을 남기는 청장이 될 것입니다."

 

황운하를 중용한 첫 경찰청장은 허준영이었다. 그는 청문회에서부터 경찰 수사권 소신을 거듭 밝혔다. 당시 검찰총장인 김종빈이 "검찰이 가진 것은 수사권밖에 없다"라고 하자 "경찰은 묵비권밖에 없다"고 받아칠 정도였다. 허준영은 황운하를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장으로 불렀다.

 

2005년 12월, 허준영이 물러나자 청와대는 신임 청장으로 이택순을 낙점했다. 2006년 이택순은 바로 황운하를 대전서부서장으로 내보냈다. 인사규정에 따르면 황운하는 서울에서 총경으로 승진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근무해야 했다. 하지만, 대전중부경찰서장, 대전청 생활안전과장을 지냈다. 당시는 경무관 승진은 서울에서 근무한 총경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임 경찰청장인 어청수, 강희락도 황운하에게 서울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2009년 황운하와 함께 근무한 대전지방경찰청 직원들은 '황운하도 여기서 끝'이라며 안타까워했다.

 


 

2009년 황운하는 전혀 친분이 없던 서울청장에게 전화를 받는다. 바로 조현오다. 조현오는 황운하에게 서울지방경찰청 과장으로 오라고 부탁했다.

 

당시 서울청장 조현오가 황운하에게 건넨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경무관 승진 1순위 보직인 서울청 형사과장을 맡기겠다고 한 것이다.

 

대체 조현오는 어떠한 생각으로 이런 제의를 한 것일까? 조현오를 잠시 살펴보자.

 

조현오는 허준영과 마찬가지로 외무고시 출신이다. 외교부에서 10년 근무하다가 1990년 경찰서 과장급인 ‘경정’으로 특별 채용됐다. 조현오는 경찰에 입문한 형사과장 시절부터 성과를 중시했다.

 

조현오는 관운이 돋보였다. 선배 허준영 덕에 경무관으로 승진하여 외사관리관을 맡는다. 당시 경무관 5대 보직 중 하나다.

 

이어 치안 비서실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택순은 청장이 되고 2006년 조현오를 경찰청 경비국장, 즉 치안감으로 승진시켰다. 경비국장은 경찰청 내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매일 오전 회의에서 경찰청장을 대면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안가 이택순 청장에게 위기를 안겨준 한화 폭행사건이 터졌다.

 

이택순은 자기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전국지휘관회의에서 고위간부(치안감) 다섯 명이 이택순에게 청장 사퇴를 건의했다. 그 명단에는 조현오와 김석기가 있었다.

 

이택순은 황운하를 징계한 것처럼 그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아침 회의 때마다 조현오는 이택순에게 “시저를 찌른 부루터스”라며 면박을 당했다.

 

경찰종합학교장 김석기는 조현오를 위로하곤 했다. 이때 조현오는 김석기와 ‘수사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신뢰가 쌓였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때 김석기는 경찰청장으로 내정됐다가 용산참사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경찰청장 내정자로서 단행한 인사에서 조현오를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승진 발령한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조현오는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으로 청와대를 만족하게 했다.

 

조현오는 2010년 8월 경찰청장에 내정됐다. 하지만, 그 직전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대 내부 강연에서 당시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 사실이 공개되면서 여론 반대에 부딪혔다. 청문회에서 야당도 거세게 반대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확고했다. 이미 믿고 일을 맡길 사람으로 여겼고 2010년 8월 경찰청장 임명장을 전한다.

 

조현오에 대한 경찰 조직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이다. '조 파면'이라는 별명을 거론하며 독재자로 보는 시선이 있지만, 그런 비난에도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카리스마를 칭찬하는 평판도 있다.

 

조현오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은 차명계좌 발언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큰 줄기는 바르게 잡으려고 노력했고 사명을 회피하는 청장은 아니었다는 목소리도 있다.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2008년), 경기지방경찰청장(2009년), 서울지방경찰청장(2010년)을 두루 거쳐 경찰청장이 됐다. 조현오와 역대 다른 청장들과 차이점을 한 기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방청장으로 와서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부류가 있어요. 그런 정책이 인기를 얻으면 차기로 가는 디딤돌이 되지요. 하지만,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자 다양한 정책을 통해 인기를 얻으려 하지는 않았어요. 그보다 자기 권한으로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겠다는 쪽이었지요.”

 

조현오는 인사 기준은 성과를 따른다는 인식을 안착하고자 했다. 부산, 경기, 서울을 거쳐 경찰청장이 되면서 성과주의를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그 과정에서 인사 청탁 금지 지시를 어기고 빽을 쓰려는 직원이 있었다. 부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는 그런 직원을 불러서 조용히 혼을 냈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는 모든 참모들이 참가하는 회의에 불려서 인민재판까지 감행했다.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되자, 인사 청탁 금지 지시를 어기고 빽을 쓰려는 직원은 바로 명단을 공개했다.

 

왜 그랬을까. 조 청장은 서울은 백 ‘수준과 급’이 달랐다고 말했다. 경무관 승진 1순위인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장은 그만큼 보직 경쟁이 치열했다.

 

물론 황운하 경력은 충분했지만 통상 서울청 형사과장 자리는 서울에서 서장을 거쳐야 가능한 보직이었다. 그러나 조현오는 업무능력이 탁월하면 과감하게 등용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수평과 수직 질서를 흔드는 인사였다.

 

형사과장 자리를 제안받은 황운하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저는 서울청 수사과장이나 서울청 광역수사대장을 하고 싶습니다."

 

당시 서울청 광역수사대가 맡은 대표 사건은 2009년 12월 14일 벌어진 KBS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장 폭행사건이다. 연예인 강병규는 촬영 현장에서 제작진이 이병헌을 고소한 캐나다 동포 여성 배후가 자신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주장하다가 몸싸움을 벌였다. 심지어 조직폭력배까지 동원됐다. 논란이 된 이 사건은 서울청 광역수사대가 2009년 12월 17일 수사를 시작해 2010년 1월 9일, 강병규 등 4명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깔끔하게 처리했다.

 

황운하는 오랫동안 경찰 수사력을 과시하면서 위상을 높일 수사를 하고 싶었다. 서울청 수사과장과 광역수사대는 수사 인력이 풍부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청장은 그 자리에 황운하를 앉히는 것은 힘들다는 견해를 전했다고 한다.

 

결국 황운하가 맡게 된 형사과는 강력계, 폭력계, 과학수사계, 마약계로 나뉜다. 주로 강력범죄와 마약, 폭력사건을 다룬다. 2010년 2월 10일 112 신고가 들어왔다.

 

불법 오락실을 신고한 사람을 그 오락실 업주가 찾아내 폭행한 사건이었다. 오락실 업자가 신고자를 어떻게 알았을까? 뇌물을 받고 뒤를 봐주는 경찰이 있다는 추정으로 이어졌다.

 

조현오는 자존심 면에서 황운하와 비슷했다. 비리를 도려내 경찰 조직을 혁신하겠다는 의지도 분명했다 조현오는 황운하를 불러 오락실 업자와 유착된 경찰관들을 모조리 잡아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오락실 업자는 이미 잠적했다.

 

황운하는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청 폭력계 형사들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수사 실력이 너무 좋아."

 

(다음 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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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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