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

 

마지막 제8화 생활의 발견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 <생활의 발견>

 

 

 

조현오는 감옥에 있을 때부터 경찰 간부를 소개해줬다. 맨 처음 소개받은 경찰이 바로 민갑룡이다.

 

민갑룡은 어느 청장이 오나 상사에게 듬뿍 사랑받았다. 박학다식했고 업무 열정이 남달랐다.

 

그에게 차명계좌 발언 재판기록을 요청했을 때 주변에서는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민갑룡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치적 논란을 걱정했다.

 

이 같은 반대에 내 생각은 간단했다. 화해하면 될 것 아닌가.

 

민갑룡은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며 내 시도를 부정적으로 봤다.

 

이후 이른바 친노 그룹으로 불리는 인사를 만났다. 관용과 화해를 역설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깍듯했다.

 


 

2014년 12월 나는 조현오와 함께 봉하마을에서 참배를 진행했다.

(☞조현오 전 청장,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몰래' 참배)

 

그리고 2015년 초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추진했다.

 

인터뷰 당일 아침까지 민갑룡은 반대했다. 당시 캐나다 유학 중이던 그는 이메일까지 보내며 인터뷰를 말렸다.

 

하지만 나중에 인터뷰 내용을 확인한 민갑룡은 흐뭇해했다. (☞ 조현오 오마이뉴스 인터뷰)

 

 

조현오와 글 작업을 진행하면서 제목을 <구겨진 제복>으로 정했는데 바로 민갑룡 아이디어다.

 

그는 나중에는 꼭 제복을 펴달라고 부탁했다.

 


 

정권이 바뀌었다. 황운하도 민갑룡도 다 승승장구했다.

 

2018년 봄, 경찰청에 댓글 관련 특별수사팀이 설치됐다.

 

조현오가 타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연합뉴스 tv 인용

 

경찰 댓글 실무는 중간급 계장들이 담당한다. 당시 보안, 정보, 홍보마다 이 사건과 관련된 계장들이 있었다.

 

이 사건 피의자로 바뀔지 모를 간부들은 당시 계장들에게 전화해 원망했다. 조직 내 분위기는 추락했다.

 


 

경찰청장 민갑룡은 두 가지 큰 원칙을 세워서 이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민갑룡 경찰청장. ytn인용

 

첫째 처벌 대상을 당시 경무관급 이상으로 제한했다. 즉 총경 이하는 제외되는 것이다.

 

둘째 경찰청 차장 임호선에게 수사지휘를 맡기고 특별수사단 수사 보고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조현오가 불같이 화를 냈던 게 기억난다.

 

“이게 작은 사안이야? 전임 청장 국장 수사하는 내용 보고를 왜 안 받아? 청장이 모든 수사보고를 받고 책임을 져야지! 나는 디도스 수사도 내가 다 보고 받고 챙겼어. 어디 책임을 회피하려고!”

 


 

경찰 조직은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조현오가 정부를 옹호하는 댓글 작업을 지시했다면 이는 경찰청 국관회의(일일회의)에서만 가능하다.

 

연합뉴스 인용

 

청장 지시를 각 부서에 전파하는 역할은 기획조정담당관(총경)이 맡는다.

 

그래서 당시 청장 지시가 범죄라면 기획조정담당관도 공범이라 보는 게 자연스럽다.

 

물론 경찰청장 민갑룡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총경은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을 밝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조현오가 경찰청장 당시 기획조정담당관은 민갑룡이었다.

 

연합뉴스tv 인용

 

하지만 조현오는 민갑룡 이름을 그대로 묻었다. 

 

아마 경찰청장으로서 책임과 고뇌를 잘 이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한 시사주간지에 실린 조현오 입장문 마지막 구절(아래)처럼 경찰조직에 대한 애정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경찰이 되고 싶었고 외교관이 돼서도 경찰이 너무 좋아서 외교관을 포기하고 경찰관을 택했다. 지금은 내가 평생 사랑했고 자부심을 느꼈던 경찰에게 처벌받는 처지가 됐다. 그래도 경찰 조직이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사회 질서 유지라는 본연의 역할을 해나갔으면 하는 마음은 변함없다.”

 


 

조현오는 그렇게 경찰에게 처음 구속되는 경찰청장이 됐다. 조현오가 남대문경찰서에 수감되고 일주일 동안 보강수사가 진행됐다.

 

조현오에게 이명박 대통령 지시를 받아 댓글 작업을 했다는 진술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노컷뉴스 인용

 

어떤 기자는 조현오에게 이 시국에 책임을 떠넘겨야 빠져나가지 자기가 무슨 장세동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시간 국정감사가 열렸다.

 

유투브 이재정 tv 인용

 

이재정(여당) 의원이 모 시사주간지에 실린 <조현오 전 경찰청장 입장문>을 들고 나와서 경찰청장 민갑룡을 다그쳤다.

 

이에 경찰청장 민갑룡은 조현오와 분명히 선을 그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조현오는 민갑룡 이름을 덮는다면서, 왜 굳이 입장문 인터뷰에 아래처럼 민갑룡 이름을 들먹였는가?

 

‘민갑룡 청장이 이러한 (청와대) 수사 가이드라인에 항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찰청장의 의지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대목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고백하자면, 이 입장문은 바로 내가 썼다.  (☞  조현오 입장문 "직무범위 벗어난 지시는 전혀 없었다" )

 

조현오는 당시 경황이 없었고 구속을 앞둔 조현오는 내게 전권을 줬다. 전권을 주면 간섭하지 않는 게 조현오 방식이다.

 

 

여기서 내가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당시 시사주간지는 내 의도와 다르게 오히려 여당 의원이 조현오를 두들겨 패기 좋게끔 기사를 써댔다.

 

당시 국정감사에 배석한 경찰 간부 중 김상경(가명)이 있었다.

 

이데일리 인용

 

김상경은 내가 한 짓을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당 의원이 이 기사를 근거로 조현오를 난타하는 현장을 지켜봤다. 국정감사가 끝나자 김상경은 문자를 보냈다.

 

“너무 가슴 아팠어.”

 

나는 김상경에게 ‘미친년’ 소리를 들을 각오가 돼 있었다. 그는 연이어 문자를 보냈다.

 

“난 마지막 구절이 너무 좋더라.”

 

 

그 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조현오 구속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기자 때문인가? 당시 기사를 보고 항의하자 기자는 비아냥거렸다.

 

“아이고. 서 작가님. 조 청장님 위하는 것은 알겠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마십시오.”

 

이 눈물은 기자에게 당했기 때문도 아니다.

 

아! 정말이지 고백할 게 너무나 많다.

 

적폐 청산 광풍이 부는 시기에 조현오에게 언론 접촉은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매력적인 언론 선배가 부탁해오면 마음이 약해져 오히려 조현오에게 취재에 응해주라고 몰아쳤다. (☞ PD수첩 장자연 건) 

 

필자가 조현오를 팔아넘긴 순간

 

하찮은 이해관계 때문에 조현오를 팔아넘겼다는 그 사실이 매일 나를 괴롭혔다.

 


 

이 기간 주변에 왜 이 고통과 불행이 일어났는지 물었다. <한겨레> 보도에서 시작한 ‘우연’이라는 카오스적 설명은 허망하게 다가왔다.

 

연합뉴스 인용

 

친노 진영에 찍혀 손 보고 싶은 인물이었다는 코스모스적 설명도 있었다. 내가 손을 놓든 필사적으로 들쑤시고 다니든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듯하다.

 


 

며칠 후, 여전히 침울한 저녁에 전화가 울렸다. 친노 인사 어르신이다. 기분이 좋은 듯 그는 조현오 욕을 시작했다.

 

온갖 듣기 민망한 말을 조현오에 갖다 붙였다.

 

한참 지나자 내 인내심은 한계를 넘었다.

 

 

 

“술 먹었냐?”

 

이 어르신은 내 비아냥거림에 불같이 화를 내며 끊었다. 내 마음도 굳어졌다.

 

조현오가 10여 년 전 차명계좌 발언을 했을 때도 이렇게 마음을 다쳤을 것이다.

 


 

나는 박근혜 정부 시절, 이 분에게 화해와 관용에 대해 수없이 강조했다. 권력을 쥔 자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을 그대로 내가 돌려받을 때 비로소 보인다.

 

민갑룡 말처럼, 화해와 관용은 어려운 것이다. 며칠 뒤 진영 단감 다섯 상자가 도착했다. 발신 주소는 봉하마을 근처였다.

 

2018년에 보낸 단감

 


 

예전에 친노 정치인 A에게 어떻게 해야 조현오를 용서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답은 똑같았다.

 

진정한 사과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봉하 참배나 인터뷰로 밝힌 사과 정도는 진심이 안 느껴진다고 했다.

 

과연 진심이면 될까. 상대 진심을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않으려는 이들에게 그 진심은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그래서 그 친노 어르신이 전화로 단감 잘 받았느냐고 물어볼 때까지 입도 뻥끗 안 했다.

 

이제는 권력 중심에서 멀어진 늙고 외로운 노친네 심정을 헤아리고 싶지 않다.

 


 

당시 남대문 경찰서에 수감된 조현오를 면회하러 한걸음에 달려온 이는 칠순을 바라보는 허준영이었다.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후배를 바라본 허준영 심정은 어땠을까. 광경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처럼 한쪽으로 쏠린 내 슬픔은 양쪽 진영이 만나 화해하는 게 너무 먼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관용을 더 넓은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당시 일을 추진할 때 그 취지를 깊이 이해하고 도와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친노 진영 인사를 만날 때 도움을 줬다. 그리고 조현오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던 주변 지인도 시간이 흐르면서 양쪽을 이해하는 완충지대로 들어와 있었다. 이들이 휴머니스트인 것이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 화해 분위기를 탄다.

 

Jtbc 인용

 

필자는 문재인 정부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해나가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관용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그 완충지대 넓이와 두께에 달려 있다고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진영 논리에 갇혀 우리가 드러내는 사고나 습관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글이 당신과 함께 산 사람들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품는데 소소한 영향을 끼치기를 바란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적폐 청산 광풍이 불 때는 완충지대는 다시 얇아지며 "휴머니스트는 개뿔"이 된다.

 

 


 

다시 2019년 댓글 재판으로 돌아가자. 공소사실은 정보·홍보·보안 분야에 걸쳐 있었기에 증인이 수백 명에 달했다.

 

2019년 한 해 내내 법정에 앉아 증인 진술을 들었다. 공소사실에 걸쳐 있는 2010~2012년 당시를 차분히 되돌아봤다.

 

그 당시 필자도 광화문 촛불집회나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동참했다.

 

김주완 블로그 제공

 

집회에서 내가 기억하는 모든 장면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경찰 대응은 분명히 필요했다.

 


 

그 당시 경찰이 했던 대응 상당수가 ‘여론조작’이라는 검사 주장이 수없이 나왔다.

 

이에 증인으로 나온 한 경찰이 반박했다.

 

“저는 지금 이 재판이 진행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경찰의 적절한 여론 대응이 왜 이것이 재판 대상이 되는지 잘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이 일선에서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잘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중간 의사전달 과정에서 곡해될 수 있고 실제로 일을 실행하는 사람이 오버할 수 있겠지요. 그런 부분이 지금 문제로 부각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그 당시에 정말 올바른 여론대응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지,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고 저도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는 당시 대전지방경찰청장이던 황운하였다.

 

법정 복도에서 황운하를 만났다.

 

드림필드11 블로그 인용

 

황운하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황운하는 능청을 떨었다.

 

“난 기억 안 나.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모르겠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왜 기억이 안나겠는가. 내가 “그 머리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건드렸는데.

 

황운하 대전지방경찰청장. 중도일보 인용

 

그는 증언을 마치고 법원을 떠났다.

 


 

우리가 또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행보를 생각하며 떠나는 대전지방경찰청장(치안감) 황운하 뒷모습은 박근혜 정권 시절과는 달랐다.

 


 

2015년 그해 봄, 경찰대 교수부장 황운하는 치안감 승진을 포기하고 퇴직 후를 생각하던 시점이었다.

 

그때 처음 점심 식사를 같이 했던 날이 떠오른다. 황운하는 같이 밥 먹자며 친한 후배도 불렀다.

 

식당으로 가기 위해 함께 관용차에 올라탔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는데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사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조현오 이후로 경찰청장 인물이 안 나오고 있어.”

 

“그러게 말이에요.”

 

 

황운하와 후배 민갑룡(당시 경찰대 치안 연구소장)은 대화에 정신이 없다.

 

달리는 차창 안으로 햇살이 듬뿍 들어오고 있었다. 자연현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심한 듯 보인다.

 

 

The End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제7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경찰을 취재한 시기는 2013년쯤이다.

 

처음 취재 방향을 정하기 전까지 온라인에서 경찰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정보를 쌓기 시작했다.

 

경찰 조직에 아는 게 없는 나에게는 언론이 말을 옮긴 경찰부터 접촉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가장 유명한 것은 조현오 청장이었지만 조현오는 관심 밖 인물이었다. 언론이 전하는 인상도 대부분 좋지 않았다.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진압하면서 몽둥이로 노동자를 두들기는 장면에서 앞뒤 맥락이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인 조현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진보언론이 다룬 기사도 한몫했다.

 

채수창이 성과주의를 비판한 기자회견을 비롯해 2009년부터 경찰 내부망에 글을 올려 징계를 받은 경찰들 사연을 내보냈다.

 

대부분 징계받은 시기와 관할을 따지지도 않고 원인으로 조현오를 지목했다.

 


 

오히려 자기 신분과 이름을 밝히고 활동하는 다른 경찰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들에게는 나름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있었다.

 

1980년대 군사정권 후 사회 분위기가 민주적으로 바뀌면서 언론자유도 한결 보장받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하지만 이 분위기를 타고 경찰을 향해 갑질하는 기자들이 허위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인터넷이 발달하는 1998년부터 허위 기사에 반박하는 글을 올리는 경찰이 전국에서 등장한다.

 

그중에 내가 만난 이가 경찰 황운하, 황정인 등이다. 취재란 늘 그렇듯이 온라인에서 모은 풍문과 어설픈 추측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황운하는 2013년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경무관이었다. 경무관 계급정년은 6년이며, 통상 4년 이내에 치안감 승진을 노린다.

 

황운하. 중도일보 인용

 

당시 황운하는 경무관 2년 차로 수사연수원장이었고 아직 망한 단계가 아닌 만큼 절실함도 없었다.

 

주변에 언론계 인맥이 풍부해 굳이 나와 작업할 이유도 없었다.

 

필자는 보기에는 아주 외향적이고 밝은 성격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아주 슬프고 우울함을 많이 가진 사람이다. 헤어질 때 황운하는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말했고 서운함을 느꼈다.

 


 

두 번째로 황정인을 만났을 때 경찰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더 관심이 갔다.

 

내부통신망에 상부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징계를 당하자 ‘표적 감찰’을 주장하던 경찰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황정인도 거침없이 상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한겨레기사 캡쳐

 

 

황정인은 자기도 허위사실이나 명예훼손에 걸리는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고 했다.

 

황정인 글 쓰기 비법은 양극단을 짚는 것이다.

 

황정인이 조현오를 비판하는 글을 쓸 때는 ‘조현오 청장이 헌법정신을 중시 여긴다’는 점을 드높이면서 시작한다. 비판에 칭찬을 덧붙인다는 것이다.

 

그에게 조현오가 진짜 헌법정신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평소 국관회의에서 헌법 준수를 자주 강조한다고 했다.

 


 

이런 황정인도 감찰을 받을 뻔했다.

 

2011년 6월 8일 반값 등록금 집회를 옹호하는 글을 올렸는데 당시 그는 경찰청 수사구조개혁 팀장이었다. 물론 그는 징계를 피했다.

 

황정인 말을 그대로 옮긴다.

 

황정인이 블로그에 쓴 글은 많은 언론이 인용했다. 오전 국관회의에 참석했는데 감찰부서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노컷뉴스 인용

 

쫄면서 앉아 있는데 조현오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더니 황정인부터 찾았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은 글 썼던데!”

 

이 한마디로 감찰은 없던 일이 됐다. 황정인은 조현오 카리스마를 직접 겪었다.

 

황정인과 대화하면서 조현오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상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모른다는 것을 확인할 때 관심은 높아지는 법이다. 언론이 띄운 인물을 만나고 나니 취재 대상이 확고하게 정해졌다.

 

바로 조현오 전 청장이다.

 


 

조현오는 2012년 4월 5일 퇴직했다. 2013년 가을 고 노무현 대통령 사자명예훼손으로 구속된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에게 황정인 씨 덕에 호감을 얻게 됐다고 털어놨다.

 


 

만날 일이 없다던 황운하는 그 후로 해마다 만났다.

 

경무관 4년 차이던 2015년에 우연히 만났다. 당시 대전지방경찰청 부장이었다. 여전히 승진 희망이 있었는지 절실함은 그다지 없어 보였다.

 

헤어질 때 황운하는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황운하는 2016년 경무관 5년 차에 경찰대 교수부장으로 갔다. 그때부터 위로를 빙자한 밥과 술로 자주 접촉했다.

 

그때 필자가 쓴 글이 바로 <풍운아 황운하>다.

 

일 년 후 경찰 조직을 나가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자 지나간 경찰 생활을 정리한 글을 쓰고 싶다며 필자에게 상담했다. 나 또한 조직에서 망해가는 황운하를 위로해주고자 시작된 글 작업이었다.

 

 

 

어쩌다가 황운하가 이렇게 추락하게 됐을까?

 

황운하를 처음 중용한 경찰청장은 허준영이다.

 

 

 

2005년 참여정부 시절이다. 총경이던 황운하를 경찰청 수사구조개혁 팀장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수사구조개혁팀 계장은 민갑룡이었다. 경찰 측 자문 위원 중에는 조국 서울대 교수가 있었다.

 

이후 황운하를 중용한 이가 조현오다. 2011년 경무관으로 승진을 시켜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내정했다.

 

 

조현오가 물러나자 박근혜 정부에서 황운하는 수사와 관련 없는 부서를 떠돌았고 권력형 수사는 막힌다. 더불어 인사도 망가졌다.

 

황운하는 탄식하곤 했다.

 

“조 청장님이었다면 이렇게 조직이 망가지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됐다. 경찰 수사권 조정에 유리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황운하는 치안감으로 승진하며 울산지방경찰청장으로 부임한다.

 

민갑룡 경찰청장 내정자. ytn인용

 

민갑룡은 민정수석 조국이 강력하게 추천해 경찰청장이 됐다.

 

(☞조국과 친분 묻자…민갑룡 “청문회에서 말하겠다”)

 

적폐청산은 국정과제였다. 민정수석 조국은 적폐 청산 콘트롤 타워를 자처했다.

 


 

2018년 봄, 경찰청에 댓글 관련 특별수사팀이 설치됐다.

 

경찰 조직 안에서는 이 수사를 곱지 않게 보는 눈이 있었다. 하지만 적폐 청산 명분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울산지방청장 황운하에게 나는 민감한 부분을 대놓고 찔렀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우리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물론 경찰청 내부망에 자신을 드러내고 비판한 경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글은 조현오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경찰 댓글 특별수사팀은 이 글을 조현오 구속영장청구 명분으로 활용했다.

 

경찰청 특별수사팀은 조현오가 친한 경찰을 동원해 조직 내 여론 조작을 한다고 주장했다.

 

 

조현오는 2018년 10월 5일 구속됐다.

 


 

구속 기간 경찰청 국정감사가 열렸다. 경찰청장 민갑룡을 향한 국회의원 질문이 쏟아졌다.

 

야당 소식인 윤재옥 의원이 물었다.

 

윤재옥 의원과 민갑룡 경찰청장.시사포커스tv인용

 

 

윤재옥 위원: “청장으로서 전직 경찰총수를 경찰이 수사해서 최초로 구속시킨 사건이라고 보도됐는데 소회나 입장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경찰청장 민갑룡: “법과 원칙에 따라 행위에 따라 엄정하게 수사하고 처리해나가겠습니다.”

 

 


 

 

이재정 의원(여당)은 시사저널 단독 기사를 띄웠다. (☞  조현오 입장문 "직무범위 벗어난 지시는 전혀 없었다" )

 

 

 

조현오 입장문을 담은 인터뷰 내용이었다.

 

이재정 위원: “(여기에) 민갑룡 청장을 운운했습니다. ‘민갑룡 청장이 이러한 수사 가이드라인에 항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찰청장의 의지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대목이다. " 하면서 뻔뻔한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증거가 현격한데요....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다고 이야기하고 경찰청장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문에 몇 번이나 언급을 하는데 경찰청장님한테 뭐 소통된 게 있습니까? 이것 보는 경찰청장님 입장은 어떻습니까?"

 

민갑룡은 이 질의에 “그 분은 그분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즉 그 생각은 조현오 ‘당신의 것(Yours)’일 뿐이다.

 

그런데 이채익 위원은 이러한 민 청장 답변을 ‘당신 자신의 것(Yourself)’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채익 의원과 민갑룡 경찰청장.연합뉴스 인용

 

이채익 위원 : “울산 남구갑 이채익 위원입니다. 오늘 오전 존경하신 윤재옥 위원의 질의에 민갑룡 경찰청장의 답변을 들으면서 본 위원은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오늘 위원들의 각종 질의에는 그토록 신중하고 애매모호한 답변을 하던 청장이 경찰청의 대선배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구속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하고 정확한 답변을 했습니다. “법치국가에서 죄를 지었으면 구속은 당연하다. 또한 모든 것은 법과 원칙에 따라 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만약 조현오 청장이 무죄가 되면 오늘 이 답변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경찰청장 민갑룡 : 수사 과정을 통해서 불법이 있다는 걸 규정을 했고요. 현재 영장실질심사 과정까지 거쳐서 법원에서도 그렇게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답변을 드린 겁니다.

 

이채익 위원 : 구속은 됐지만 아직까지 확정되지는 않았잖아요.
경찰청장 민갑룡 : 예 그렇습니다.
이채익 위원 : 그런데 경찰청장이 그렇게...
경찰청장 민갑룡 : 현재까지 사법적인 판단까지 거친...

 

이채익 위원 : “경찰청장이 이런 답변을 그렇게 예단해서 미리 얘기할 수 있어요? 내가 1998년도부터 2000년도까지 울산 남구 구청장을 할 때 조현오 청장이 당시 남부경찰서장을 했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조현오 청장을 두둔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 이후에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전화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만났던 조현오 청장은 국가관이 뚜렷하고 공과 사가 분명한, 너무 공과 사가 분명해서 불편할 정도로 제가 봤을 때는 참경찰상이다, 그렇지만 대민 관계에 좀 더 유연성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할 정도로 너무 국가관이 뚜렷한 경찰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다 보니까 조현오 청장도 이제 영어의 신세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모셨던 전 경찰청장이 경찰의 손에 의해서 구치소에 들어가고 구치가 되고 최초로 경찰청에 의해서 구속된 전 청장에 대해서 구속은 당연하다. 법과 원칙에 따라 했으니까 아무 문제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민갑룡은 이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 민갑룡이 느꼈을 두려움은 어느 정도였을까? 아마 민갑룡은 나에게 자기를 아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민갑룡 경찰청장 ytn인용

 

 

그렇다면 자신은 누군가처럼 직을 걸고 맞설 그런 용기가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고 스치듯 말했던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민갑룡 쌍둥이인가? 2013년이다.

 


 

조현오도 그 시절 순탄하지 못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2013년 가을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4년 봄 그를 면회했다. 조현오는 감옥에 있을 때부터 필자에게 후배 경찰을 소개해줬다.

 

조현오는 가장 먼저 소개해주고 싶은 이가 있다며 경찰 조직 ‘넘버 원’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름을 들었는데 촌스럽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민갑룡”

 

(마지막 화. 생활의 발견.)

 
 

 

P.S) 위 제목은 홍상수 감독 영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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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부하를 다루는 방식

 

조현오에게 현장검증 3차 장소는 청담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다. 길게 나 있는 복도 양편에 모든 공간이 룸으로 돼 있다. 조현오도 출소 후 이곳이 궁금해 처음 와봤다고 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수백 명이 면회를 왔고 대부분 경찰이었다.

 

조현오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향해 '자기 사람 잘 챙긴다'는 비판을 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걸핏하면 "경찰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얼핏 보면 규칙과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자기 사람 챙기면서 겉으로만 대의를 외친 듯하다.

 


 

실제 한국 경찰 정체성에 관심을 보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었다. 2005년 허준영은 한국 경찰 주체성을 파고들면서 수사권 독립을 강하게 외쳤다. 한국 경찰 마크로 참수리를 쓴 게 이때다. 그동안 한국 경찰 상징은 미국 흰머리 독수리였다. 게다가 참수리는 독수리와 달리 죽은 시체를 건들지 않는다. 이게 당시 경찰이 상징을 독수리에서 참수리로 바꾼 이유였다.

 

 

 

허준영에 이어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된다. 두 번째 외무고시 출신이다. 조현오는 회의시간에 경찰이 왜 존재하는지를 자주 물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보자.

 


 

2011년 12월 20일 대구에서 한 중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유서에는 그동안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학교 폭력으로 말미암은 자살이 잇달아 터지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됐다.

 

보통 이런 사건이 터지면 교육 당국이 대책을 세우고 경찰도 대책에 맞춘 대응 방안을 내놓곤 한다. 하지만, 조현오는 학교폭력 문제는 경찰이 주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러자 사회적으로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교권 침해를 비롯해 학교 폭력 해결 주체는 교사, 학생, 부모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더 큰 목소리를 냈다.

 

부정적인 것은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일선 경찰서에 올라오는 불만 중에는 주취자 신고를 112로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주취자, 노숙자 등에 대한 조치는 지방자치단체 몫이다. 경찰은 '범법행위'가 발생해야 나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조현오는 한국 경찰 구조가 이런 사고 방식을 만들어냈다고 판단했다.

 


 

조현오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 있다. "한국 경찰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한탄이었다. 한국에서는 경비작전은 국방부, 수사는 검찰, 정보는 국가정보원, 경호는 경호실에서 주도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경찰은 눈치를 보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을 하기 마련이다.

 

조현오는 "경찰이 왜 존재하냐"고 물었다. 자살하는 아이들 인권은 누가 지킬 것인지 따졌다.

 

교사가 성인 조직과 연계된 일진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조현오는 경찰청에 학교폭력전담TF팀을 만들어 대책을 만들도록 했다. TF조직은 행정학상 비정규 조직이다. 어느 한 기능이 담당하기 부적절하거나 일정 기간 특정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경우 TF조직을 만든다.

 

경찰청은 전국에 퍼져 있는 정보망을 통해 학교폭력 현장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경찰청 종합대책은 2012년 1월 26일, 정부 종합대책이 2월 7일에 나왔다. 조현오는 16개 지방청에 다니며 토론회 등으로 학교 폭력 문제를 중요 이슈로 만들었다. 경찰은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가 따라오도록 수레바퀴를 돌리는 동력을 만들었다. 경찰이 앞장서자 학교폭력 피해경험률이 2012년 초반 9.5%에서 2013년 하반기에는 1.8%까지 떨어진다.

 

 

경찰청에 여성청소년과가 생긴 것은 2005년이다. 그해 부산청장이던 어청수는 여성청소년과 업무로 학교전담경찰관(스쿨폴리스)을 운영한다. 하지만, 한 경찰이 맡는 학교 수가 너무 많아 세심한 관리는 버거웠다.

 

조현오는 스쿨폴리스 인력 확충과 동시에 학교폭력예방상담사 교육을 통해 스쿨폴리스가 학교폭력 문제에 전문성을 갖추도록 했다.

 

조현오는 일진 불량서클 해체만큼 선도에도 신경을 썼다. 제대로 훈방조치가 되는지 학교폭력점검대응반이 이를 점검했다. 2012년 경찰서부터 여성청소년과가 신설됐고, 2013년에는 각 지방청에도 여성청소년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13년 서울청장인 김용판이 서울경찰 100여 명을 스쿨폴리스로 전환했다. 여성청소년 업무가 발전하면서 경찰 인력자원이 몰리기 시작했다. 경찰 치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물꼬를 튼 것이 조현오다.

 


 

한 경찰은 조현오가 이슈가 생기면 문제 근본을 건드리는 데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경찰과 같은 계급 조직에 이 같은 문제 해결 방식과 호불호가 강한 성격이 결합하자 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현오가 물었다.

 

"경무과, 수사과, 정보과, 보안과 이런 것은 뭐 때문에 나눕니까?"

 

궁극적으로 경찰업무를 잘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어느 조직이나 칸막이 행정이 될수록 일이 바로 가기 어렵다. 다른 경찰 간부 역시 칸막이 행정에 대한 문제의식은 조현오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달랐다.

 


 

다른 이들은 칸막이 행정은 책임 문제만 정확하게 선을 긋고 종합적인 의견을 모아 일을 추진하면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울산남부서장을 할 때는 업무 분담과 상관없이 수사과장을 불렀다. 살인사건 현장은 보통 형사과장이 책임을 진다. 사건 원인 파악부터 대책 마련은 정보과와 경비과가 맡는다. 하지만, 조현오는 수사과장을 불러냈다.

 

물론 시간이 촉박한 사안이라면 가장 업무역량이 뛰어난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업무 능력이 부족한 직원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경찰 간부들은 일을 주기 전에 사람 능력에 따라 방향을 정하기도 하며,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에게는 간단한 일을 하나 맡겨놓고 어려운 일을 맡길 때 간단한 일을 핑계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조현오는 어땠을까.

 

고시계장 시절 조현오는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을 처음에는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나 불성실한 업무 태도와 실수가 되풀이되면 조현오는 아예 결제 라인에서 뺐다. 면박과 무안을 주는 정도는 보통보다 강했다.

 

울산남부서장일 때 조현오는 아침마다 참모회의를 열었다. 과장에게 업무 관련 질문을 했다. 질문은 알고 던지기도 했고 논리적으로 궁금하면 물어보기도 했다. 막힘없이 답하는 것은 업무를 잘 챙긴다는 뜻이다.

 

보통 서장들은 대답을 잘 못하는 과장에게 다음부터 잘하라고 넘기고 나서 담당 계장에게 내용을 확인한다. 반면 조현오는 과장에게 들어오지 말라 하고 계장을 보내라 했다. 이 광경을 본 직원은 '권위적 리더십의 전형'이라고 했다.

 

'조현오 방식'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찰은 계급 조직인만큼 수평 질서와 수직 질서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사회는 보고, 의전, 모양새, 형식 등을 유난히 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관직은 사유물이 아닌 만큼 업무를 모른다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직원들은 첫인상부터 '독일병정' 같은 조현오가 업무 역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리니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직원은 사람 좋은 것도 필요 없고 공무원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게 조현오 철학이라고 말했다.

 

 

 

 

서울종암경찰서장 시절에도 업무에는 칸막이가 없었다.

 

교인 헌금으로 지은 한 교회가 있었다. 목사가 명의를 자기 앞으로 돌려놓으면서 일반 신도와 목사 쪽 신도가 충돌했다. 주말에 양측에서 서로 예배를 보겠다며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런 일은 경비과장이 대책을 세우고 진압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형사계장에게 권한을 전폭적으로 위임했다. 형사계장이 경비과 전의경 100여 명과 정보과, 형사과 인원을 이끌고 지휘했다.

 

조현오는 지방청장이 돼서도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은 ‘없는 사람’ 취급했다. 대부분 지방청장은 참모인 과장을 의식해 무난하게 결제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조현오는 경비 지휘를 할 때조차 정보과장에게 작전을 맡겼다.

 


 

조현오 이미지 형성에 가장 영향을 미친 시기는 경찰청장 때다. 조현오는 인사정의, 부패척결 등을 내세우며 '7대 개혁과제'를 내놓았고 전담 TF팀을 구성했다. 한 고위간부는 TF팀이 해당 과에서부터 낮은 단계 협의가 이뤄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나온 내용을 국장이 청장에게 보고하는 체계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개혁’을 원했다. 하지만 계급이 높아질수록 변화를 싫어하는 성향을 보인다. 경찰이라는 계급조직 하에서 눈치 안 보고 개혁을 밀어붙일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적임자를 TF팀장 자리에 앉혔다. 조현오는 국장이 결제한 보고서가 맘에 안 들면 TF팀과 협의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조현오가 경찰 조직 질서를 수평과 수직 모두 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장 결제를 받은 보고서를 검토할 TF팀장 직위가 경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호불호가 강한 조현오 성격도 한몫을 했다.

 

관리자 한마디는 격려든 질책이든 조직 안에서 더 큰 의미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조직 안에서 불만이 번지기 시작했다. 경찰청 국장(치안감)이나 부장(경무관)에게서 나오는 한마디는 힘이 실려 더욱 퍼졌다.

 

 

조현오는 이듬해 TF팀장도 총경으로 승진시킨다. 조직 내 비판 세력은 이 역시 조현오가 챙긴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조현오에게 중요한 것은 업무 적합성이었다. 보직에는 그 업무에 맞는 사람을 앉혀놓으려 했다.

 

황운하를 경무관을 승진시키고 나서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배치한 것도 한 예다. 수사 기획관은 그 자리가 주는 무게로 봐서는 경무관 3년 차 정도가 어울리는 자리라고 보통 생각한다. 조현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경찰이기 때문에 그 업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현오가 좋아하는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 업무 역량 뛰어난 사람이었고 인사권을 쥐자 그런 사람들을 그 자리에 꽂았다.

 

그렇다면, 조현오가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업무역량이 얼마나 뛰어난 것일까?

 

먼저 2010년 정보국장을 지낸 이철규를 보자. 그는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자 충북청장에서 정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11년 말 조현오 체제에서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조현오와 3차 현장검증을 한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이 바로 이철규와 깊게 얽힌 곳이기도 하다.

 

(다음 16화-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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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암투

 

2011년 6월 20일 아침 조현오는 청와대에서 급한 호출을 받는다. 청와대 조정회의에 출석하라는 것이었다. 조현오는 수행자 없이 청와대에 갔다. 회의에는 대통령실장 임태희, 민정수석 권재진, 법무부장관 이귀남, 검찰총장 김준규 등이 참석했다.

 

김준규는 검찰총장을 하면서 큰 위기를 두 번 맞는다. 2010년 4월 MBC 수첩>이 ‘검사와 스폰서’를 방영한다. 부산에 한 건설업자가 25년 동안 검사에게 금품과 향응, 성접대 등을 제공한 내용이었다. ‘스폰서 검사’ 파문으로 김준규는 대국민 사과에 이어 자체 개혁안을 발표한다. 개혁안 가운데 하나가 비리 검사를 수사하는 ‘특임검사제’ 도입이었다.

 

이 특임검사가 임용된 첫 사건이 바로 2010년 11월 ‘그랜저 검사’ 사건이다. 한 건설업자가 검사에게 사건을 부탁하면서 승용차 구입비를 대납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위기가 바로 청와대 조정회의였을 테다. ‘형사소송법 196조’를 개정하고자 국정 운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날 열린 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평검사회의는 검찰 근간을 흔드는 긴급 현안이 있을 때마다 열린다. 2003년 참여정부가 검찰 출신이 아닌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할 때도 평검사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법률 개정은 검사 작성 조서가 지닌 증거 능력을 제한하는 쪽으로 진행됐다. 검찰이 자백만 받으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컸다. 하지만, 검찰은 평검사회의를 열어 반발하며 형사소송법 312조를 지켜낸다.

 

 

법률 개정은 국회의원 입법, 정부 제출 등 다양한 통로로 이뤄진다. 형사소송법 196조 법률 개정 논의는 2010년 2월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가 시작했다. 그해 10월 법원과 검찰 제도 개혁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으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압수수색을 진행한다. 검찰을 향한 정치권 반감은 깊어졌다.

 

사법제도개혁특위는 특별소위원회를 구성해 2011년 3월 10일 여야 합의안을 발표한다. 주요 개혁안으로 경찰수사권 독립이 있었다. 이 발표는 검찰 출신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이 주도한다. 검찰 출신이 경찰을 돕는 상황이지만, 조직 입장에서는 검찰과 경찰이 붙는 모양새가 됐다. 세력이 막강한 검찰에 맞대응하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다. 경찰 안에서는 차라리 수사권 독립을 차기 대선 공약에 집어넣는 게 낫다는 계산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현오 생각은 달랐다.

 


 

본격적으로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변경을 위한 특별소위원회가 가동됐다. 경찰과 검찰이 벌이는 신경전은 언론을 탔다. 조현오는 5월 26일 전국 지방청장 화상회의에서 총경 이상 간부에게 “직을 건다는 자세로 임하라”라고 말했다.

 

김준규 검찰총장이 주재한 검사장급 이상 간부회의에서 즉각 반응했다. 대검 차장인 박용석은 “조직을 위해 직을 건다는 것은 조폭이나 하는 말”이라고 받아쳤다.

 

5월 31일 검사인 윤대해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경찰 수사개시권 명문화와 관련해 깊은 우려와 분노를 금할 수 없다”라고 적었다. 그동안 특별소위원회 단위에서 논의가 진행됐지만 조문 합의안은 나오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동료 의원 반대가 심하다. 그 배후에는 법원과 검찰이 있다. 국회의원을 조종하고 협박하고….”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작업은 총리실로 넘어간다. 총리실에서 검찰과 경찰 수사권 조정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경찰은 수사구조개혁 팀원이, 검찰은 검사들이 참석했는데 윤대해 검사도 눈에 띄었다.

 

논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6월 19일 서울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개시권 명문화 반대 분위기를 조성한다.

 

6월 20일 청와대에 국정운영자들이 모였다. 6월 14일 대통령 이명박은 총리실이 적극적으로 조정에 나설 것을 지시한다. 이명박은 “경찰이 법적 근거도 없이 수사하는 현실을 개선하라”라고 말했다. 김준규는 평검사회의 견해를 되풀이했다.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은 결코 고칠 수 없으며 경찰 수사개시권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정회의를 마친 조현오는 경찰청으로 돌아와 말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BH(청와대) 최종 합의안에 서명하고 왔다.”

 

조현오는 196조 조항에 ‘경찰의 수사개시와 진행권’을 확보했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가 합의한 내용에는 ‘경찰은 모든 수사에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는 조항도 있었다. 게다가 검사 지휘에 관한 사항은 ‘법무부령’으로 정하기로 했다. 조현오는 ‘모든 수사’에 경찰 내사가 포함되지 않고 법무부령 제정도 경찰과 합의하기로 국정운영자와 약속했다고 내세웠다. 조현오는 그 약속을 실제 믿었다. 하지만, 경찰은 ‘순진한 발상’이라며 비난했다.

 


 

합의안을 발표한 이튿날인 6월 21일 검찰 반응에 경찰 내부 분위기가 격앙됐다. 대검 기획조정부장 홍만표는 “조 청장 주장대로라면 구두합의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후 국무조정회의에 참석한 대통령실장 임태희, 안전행정부장관 맹형규, 법무부장관 이귀남은 국회에서 내사는 수사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확인해준다. 국회도 청와대 조정안에 나온 ‘모든 수사’에 대한 해석을 제한한다. 민주당 의원인 박지원은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모든’을 삭제하고 검사 지휘는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 근거가 돼야 한다는 게 여야 공통의견이라고 밝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찰청 나름대로 애쓴 결과였다.

 

6월 30일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법무부령’은 ‘대통령령’으로 바뀌었다. 검찰은 잇달아 자리에서 물러나며 개정안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대검 기획조정부장 홍만표를 비롯한 검사장들이 먼저 물러났다. 검찰총장인 김준규도 사표를 냈다. 후임 검찰총장이 바로 한상대다.

 

 

한상대 검찰총장에게 경찰과 ‘대통령령’을 만드는 작업을 맡겨졌다. 그 해 12월 27일 대통령령이 시행되기까지 검찰에 비난 여론은 계속됐다. ‘벤츠 여검사’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11월 30일 이창재 안산지청장을 특임검사로 임명했다. ‘그랜저 검사’ 이후 2번째다.

 

여검사 A씨는 모 변호사 부탁을 받고 다른 검사에게 사건을 청탁한 의혹이 있었다. A씨는 내연관계였던 모 변호사에게 벤츠 승용차 등을 받아 ‘벤츠 여검사’로 불렸다. “국산차는 이제 저리 가라”라는 비난이 인터넷을 달궜다. 여검사 A씨는 12월 7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된다.

 


 

이듬해 검찰수사가 시작된다. 2012년 2월 28일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가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경찰청 정보국장으로 국회의원 설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날 검찰은 한나라당 의원 주성영을 ‘성매매 의혹’으로 소환 통보한다.

 

주성영은 사법개혁을 주도한 자신에게 검찰이 앙갚음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현오가 4월 퇴임하자 검찰 조사가 시작됐다.

 


 

조현오는 경찰청장 재직 당시 경찰청 범죄정보과와 지능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검찰로서는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경찰에 ‘김광준 검사’ 사건이 걸려든다. 한 기자는 ‘김광준 검사 사건’을 두고 “유사 이래 경찰이 검찰을 향해 날린 최고의 빙엿”으로 표현했다.

 

이 사건은 2008년 12월 9일 금융다단계를 하던 조희팔이 회사 돈을 챙겨 중국으로 밀항한 데서 시작된다. 당시 투자자가 3만여 명 피해액은 4조 원 정도로 추정됐다. 오래전부터 금융감독원이 유사수신행위를 포착하고 수사당국에 정보를 줬으나 수사에 진척이 없었다. 오히려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수사당국과 조희팔 사이 유착관계였다. 뇌물 혐의로 수많은 경찰이 사법처리됐고, 조희팔을 비호하는 세력으로 권력층 이름이 나돌기 시작했다.

 

수사는 두 갈래로 진행됐다. 중국에 있는 조희팔을 잡아들이는 것과 조희팔이 국내에 숨겨둔 자금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범죄정보과에서 조희팔 관련 정보를 넘겨받아 수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검사 김광준이었다. 서울고검 검사인 김광준의 차명계좌를 발견한 것이다. 자금줄은 조희팔 측근이었다.

 

김광준은 중앙지검 특수3부장 검사였다. 특수부는 청와대가 맡긴 사건을 담당하는데 당시 환경재단 최열을 수사하고 있었다. 당시 최열은 MB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사업에 걸림돌이었다. 여론은 당연히 ‘표적 수사’를 의심했다. 검찰은 최열과 주변인 계좌를 샅샅이 뒤졌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최열은 주변에 차명계좌가 뭔지 묻곤 했다. 그런데 오히려 김광준이 차명계좌로 검은돈을 받았다는 정황을 경찰이 포착한 것이다.

 

경찰이 김광준을 조사했다는 사실은 11월 8일 보도된다. 당시 검찰총장 한상대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검 중수부장인 최재경이 이미 보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상대는 김광준 검사와 통화해 사정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11월 8일 일부 매체 기자가 김광준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 김광준은 중수부장인 최재경에게 기자 대응 요령을 묻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최재경은 강하고 단호하게 실명을 보도하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대처할 것을 조언한다. 이튿날 한상대는 경찰 반발에도 특임검사 카드를 꺼낸다.

 

황운하는 당시 특임검사인 김수창이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는 점은 동의했다. 당시 검찰은 경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찰이 김광준 사건 조사 과정에서 소홀한 부분이 있다면 경찰이 파고들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11월 중순 서울 동부지검 성추문 검사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동부지검에서 실무수습 중이던 검사가 여성 피의자를 검사실로 불러 성관계를 한 것이다.

 

검사인 윤대해는 24일 내부 게시판에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기소배심제, 검찰 직접 수사 자제, 상설특검도입 같은 검찰 개혁안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은 모두 대검 지침으로 가능했다. 지침으로 가능한 일을 개혁안이라고 들고 나왔으니 한쪽에서는 ‘위장 개혁’이라는 빈정거림이 불거졌다. 끓는 기름에 불을 붙인 것은 윤대해가 동료에게 보내려던 문자메시지였다.

 

‘○○아. 대해다... 내가 올린 글이 벌써 뉴스에 나오고 있구나.... 우선 어떤 방안이든 검찰이 조용히 있다가 총장님이 발표하는 방식은 그 진정성이 의심받는다... 내가 올린 개혁방안도 사실 별거 아니고 우리 검찰에 불리할 것도 별로 없다..... 언론에서 그런 평검사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고 이후 일선 청에서 평검사회의를 개최하고 서울중앙은 극적인 방식으로 평검사 회의를 개최하고.... 이런 분위기 속에 총장님이 큰 결단을 하는 모양으로 가야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받은 이는 언론사 기자였다. 예정된 서울중앙지검 평검사 회의는 이 사건 여파로 취소된다.

 

검사들은 오히려 총장 집무실로 몰려가 사퇴를 촉구했다. 한상대가 중수부장인 최재경을 감찰한 게 발단이었다. 한상대는 김광준과 최재경이 주고받은 문자 내용을 문제 삼는다. 한상대는 검찰 위기를 중수부 폐지 카드로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최재경은 반대파였다. 결국, 한상대는 2012년 11월 30일 최재경을 손보려다 축출당하는 모양새로 사표를 냈다. 하지만, 한상대는 자기 임기 동안 검사가 경찰서에 출두해 조사받는 것은 막았다.

 

‘카톡’

 

스마트폰 카카오톡에 한 여성 사진이 올라왔다. 성추문 검사 사건 피해 당사자였고 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 추적 결과 검사 10명을 포한한 검찰 수사관이 해당 전산망에 접속한 게 확인됐다. 검찰도 더는 여론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해 마지막 날, 현직 검사가 최초로 경찰서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는다.

 

 

경찰 구성원이 검경 관계를 다시 인식한 계기는 형사소송법 법률 개정보다 검찰과 경찰이 다투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찰 조직에서 조현오가 추진해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황운하는 어떤 견해를 드러냈을까. 그는 2011년 6월 20일 조현오가 청와대 합의안에 서명을 했을 때도, 경찰이 만족하지 못하는 대통령령을 만든 직후에도 조현오 퇴진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런 황운하에게 왜 이택순 퇴진은 요구해놓고 조현오는 그냥 두느냐는 질문을 하는 이도 있었다.

 

“조현오는 최선을 다해 진일보한 조정안을 만들려는 과정에서 문제가 비롯됐고 내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의견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나가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경찰은 황운하 발언 배경에는 조현오식 조직 관리법이 있다고 했다. 조현오는 조직 내 비판 세력을 항상 곁에 둬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그러면서 비판 세력 상당수를 자기편으로 돌아서도록 했다. 황운하 기용도 결국 조현오식 ‘포퓰리즘’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분석은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파퓰리즘 전략으로 조직을 장악했다는 조현오가 정작 경찰 직원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다음 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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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서울과 경기는 스케일이 다르다. 연쇄살인이나 토막살인 사건 같은 강력 사건이 아니라면 경기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미디어 관심을 끌기 어렵다. 반면, 서울에서는 작은 사건과 집회도 어떻게 엮이느냐에 따라 정치적 이슈로 발전하기도 한다.

 

조현오는 2010년 1월 8일 서울지방청장으로 부임한다. 조현오는 바로 역대 서울청장 리더십 분석·평가한 내용을 접한다. 직원 여론과 불만을 수렴해 정책을 추진한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조현오가 밝힌 소감은 이렇다.

 

“다 좋은데… 이렇게 가자니 시간이 어디 있냐?”

 

보통 참모를 비롯해 지휘관 임기는 1년이다. 외사관리관, 감사관, 경비국장, 부산청장, 경기지방청장 등 조현오가 거친 곳에서는 어김없이 직원들 곡소리가 났다.

 

 

처음 3개월 동안 새로운 틀을 짜고 나머지 기간 강하게 추진해 그 틀을 정착하는 게 조현오 방식이었다. 조현오가 조직에 심고자 한 틀은 당연히 ‘성과주의’였다

 


 

조현오는 인사 과정에서 주관적인 지휘관 평가를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통상 인사는 심사위원회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서울청장으로 취임한 조현오는 바로 승진하고 싶은 직원을 강당에 모이도록 했다. 경정·경감 승진 대상자 225명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7시간 남짓 면접이 이어졌다.

 

“자기가 승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봐라.”

 

조현오는 그 자리에서 담당 과장에게 면접한 직원마다 성과를 확인했다. 몇몇 직원은 승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약을 받기도 했다. 성과를 봤을 때 승진이 어려운 직원에게는 그 자리에서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면접에서 탈락이 확정된 직원은 ‘빽’을 쓸 기회조차 사라졌다.

 

당시 직원들이 가장 힘들었던 게 이 같은 인사 방식이었다. 조현오는 2~3개월에 한 번씩 성과 우수자를 내부에 공개해 승진 인사에 반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경쟁에 내몰린 직원들은 안팎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2014년 기준 부산은 경찰서가 15개, 경기도는 41개, 서울은 31개가 있다. 지역이 넓으면 지방청장이 일일이 챙길 수 없으므로 각 경찰서 서장이 치안을 책임져야 한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경찰서 단위로 평가를 진행했다. 성과가 좋은 경찰서는 혜택을 받았고 성적이 나쁜 경찰서는 집중감찰을 받았다. 조현오가 서울지방청을 맡은 시기에는 이 같은 평가 시스템이 무르익는 단계였다. 조현오는 평가 시스템을 적용하기 전에 개념을 구체화하고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서장들과 회의를 했다.

 

“방배경찰서는 치안 수요가 적은 곳인데, 우리는 성과를 많이 낼 수 없어요.”

“종로경찰서와 남대문경찰서는 경호와 행사가 빈번해 실적을 많이 올릴 수 없습니다.”

 

조현오는 불평·불만을 끝장토론, 공청회, 간담회로 돌파하고자 했다. 통상 서울지방청 직원은 2만 3000여 명, 경기지방청 직원은 2만여 명이다. 이 정도 규모면 아무리 청장이라도 직원 공감 없이 일을 추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선 경찰서 정도 규모면 서장이 직원을 마음먹은 대로 끌고 갈 수 있다. 실적을 내지 못하면 집중감찰 대상이 된다. 서장부터 일선 경찰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북경찰서장인 채수창도 이 같은 압박에 시달렸다. 조현오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채수창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도 실적주의에서 살아남으려고 제 직원이 검거 실적을 올리도록 굉장히 독려하고 채찍질을 했습니다.”

 

인사에 대한 불만과 성과주의로 말미암은 피로는 경찰 조직에 꾸준히 누적됐다. 2010년 6월 23일 서울 양천경찰서 소속 경찰관 4명이 구속된다. 피의자에게 고문·가혹행위를 했다는 혐의였다. 이 사건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는 2009년 8월에 시작된다. 조현오 인사청문회 위원인 정수성은 증인으로 참석한 채수창에게 이 점을 확인한다.

 

“증인은 양천경찰서 고문 의혹 사건에 조 청장 책임도 있다며 동반 사퇴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양천서 피의자 고문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생긴 일이고 조현오 내정자는 올해 1월 서울청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양천서 고문 사건과 조현오 실적주의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양천경찰서 고문 의혹 사건은 결과적으로 조현오식 성과주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통로가 된다.

 


 

역풍을 맞게 된 조현오에게 악재가 이어졌다. 강남 룸살롱 업주 유착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가출한 여학생 A양을 서초경찰서 실종팀이 성매매 업소에서 찾아내면서 시작된다. 가수 지망생인 A양은 미성년자였다. 업소 사장 이름은 이경백이었다. 웨이터 출신인 이경백은 2000년 북창동에서 룸살롱을 개업하고 강남 일대에서 유흥업소를 기업형으로 운영했다. ‘룸살롱 업계의 스티브 잡스’, ‘룸살롱의 황제’ 등으로 불리게 된 비결은 다방면에 비호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 단속반에 뇌물도 잘 바쳐야 했다.

 

경찰 단속을 비롯한 유흥업계 정보는 이경백을 거쳤다. 2006년 한화 회장 김승연이 폭행을 저지른 것을 경찰에 흘린 것도 이경백이었다. 경찰은 이경백과 단단히 엉켰고 조직은 점차 곪아 들어갔다. 이경백을 수사한다는 것은 경찰 조직의 종기를 도려내는 일이었다. 그전에 경찰은 이미 이경백에게 농락당한 적도 있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혐의를 포착해 이경백을 수사하려 했을 때 그는 오히려 수사관이 접대받은 내용을 확보해 수사팀을 엎었다.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원래 미성년자 성매매 사건은 생활안전과 소관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형사과에 이 사건을 맡긴다. 당시 형사과장은 황운하 총경이었다.

 

통화기록 분석부터 시작했다. 이경백이 지난 1년 동안 휴대 전화 두 대로 통화한 기록은 몇 만 건이었다. 등록된 사람만 1500명이 넘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검찰과 적잖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검찰은 경찰이 긴급 체포한 이경백을 풀어줬는데, 수사를 이끈 황운하는 언론 브리핑에서 검사 실명을 거론하며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말한다.

 

 

이경백도 만만찮았다. 구속되면 그동안 바친 뇌물 내용을 모두 검찰에 불겠다며 맞섰다. 조현오는 오히려 이경백이 검찰에 뇌물 관련 내용을 불기를 기대했다. 검찰 수사이긴 하지만 경찰 비리를 도려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이경백과 통화 기록이 있는 경찰관 63명이 적발됐다. 조현오는 이미 취임할 때부터 업주 관계자와 공무 외에 전화 한 통, 물 한잔도 하지 말 것을 지시한 상태였다. 통화 내용을 소명하지 못한 경찰은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39명이 징계를 받았고 이 가운데 6명은 파면됐다.

 

“조현오가 범서방파 행동대장 출신과 의형제라더라.”

“조현오가 유흥업소에 10억 원을 투자해 월 2500만 원씩 배당금을 받는다.”

 

그즈음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조현오가 조폭과 의형제이며, 조현오 서울청장 비서실장도 연루됐다는 식으로 소문은 점점 덩치를 키웠다. 인터넷에서도 조현오가 강남 유흥가 조폭과 수십 차례 통화했다는 글이 돌았다. 민정수석실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조현오는 그를 옥죄는 의혹에 정면 대응하는 후속 조치를 발표했다.

 

“비서실장을 감찰해서 비위 사실이 있으면 엄하게 처벌할 것이고, 내 휴대전화 통화내역까지 모두 공개하겠다.”

 

조현오는 자신도 수사 대상에 넣었다. 서울청 수사부장인 박상용에게 자기 계좌열람동의서도 전달했다.

 

형사과장 황운하는 결국 이경백을 탈세와 성매매 혐의로 6월에 구속한다. 조현오는 이경백이 구속되고 두 달 후인 2010년 8월 경찰청장이 된다. 하지만, 이경백도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으며 유유히 빠져나온다.

 

(다음 9화 –조현오, 경검 수사권 조정 어떻게?)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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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2010년 6월 23일 서울 양천경찰서 경찰관 4명이 구속됐다. 이들은 피의자에게 자백을 받고자 가혹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수갑을 채워 팔을 꺾어 올리는 이른바 ‘날개 꺾기’ 같은 폭력을 행사했다는 게 사회적으로 충격을 줬다.

 

6월 29일 강북경찰서장인 채수창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무리한 성과주의가 양천경찰서 고문을 부추겼다며 서울청장인 조현오가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경찰청장인 강희락과 조현오는 불편한 사이였다. 하지만, 경찰 조직에서 하극상에 대한 대응은 단호했다. 강희락은 조현오 퇴진 요구를 기강 문란 행위로 규정하고 채수창을 직위 해제한다. 이후 채수창이 제기한 성과주의 비판은 일선 경찰서 직원도 공감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보직과 승진 인사 기준은 오직 성과’. 조현오가 내세운 ‘성과주의’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언론은 조현오가 MB 정부와 코드를 맞추려고 갑자기 실적 위주 평가를 도입한 것처럼 접근했다. 물론 MB 정부가 행정 효율성을 유난히 강조했고 ‘성과주의’는 그 방향을 잘 따른 방침처럼 보이기는 했다. 조현오는 그저 정부 기조를 잘 따랐을 뿐일까.

 


 

경찰 조직에서 실적에 집착하는 관행은 이전부터 있었다. 조현오가 형사과장일 때는 ‘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대부분 경찰서 형사과장실에는 각 팀별 실적을 표시하는 막대그래프가 걸려있었다. 당시 전체 수사 활동비로 지급하던 돈이 430만 원 정도였는데 조현오는 수사비 절반은 형사 수만큼 나눴고 나머지 절반은 한 달 동안 팀별 성과에 맞춰 지급했다.

 

 

 

조현오가 성과를 강조한 것은 울산남부서장 때부터 도드라진다. 경정 이하 인사는 시험과 심사로 승진을 결정한다. 심사는 경찰서장의 주관적인 판단과 ‘빽’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구조였다. 조현오는 심사 과정에서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고자 했다. 한 번은 승진 대상자를 모아놓고 이런 말도 했다.

 

“자신이 왜 승진해야 하는지 설명해봐라. 조직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자기 업무를 어떻게 열심히 했는지 증명해봐라.”

 

순위는 모두 보는 앞에서 성과를 중심으로 결정됐다.

 


 

조현오는 2003년 서울종암서장 때도 여전히 성과를 중시했다. 당시 종암서 형사과 실적은 서울지역 31개 경찰서 중 상위권이었다. 조현오는 형사과에 자주 들러 형사들을 격려하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조현오가 생활안전과장에게 서울종암서 관할 파출소 직원 200여 명을 대상으로 1년 동안 성과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검거 실적이 전혀 없는 직원이 70여 명이었다.

 

해마다 경찰청은 다양한 치안 관련 통계를 내놓는다. 범죄 발생을 월, 요일, 시각, 장소, 기상 등으로 구분해 통계를 낸다. 이는 치안 수요에 맞게 인력을 배치하는 참고 자료가 된다. 70여 명이 1년 동안 실적이 없다는 것은 인력 배정이 문제 거나 직원이 일을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게 조현오 판단이었다. 조현오는 형사계장에게 일주일 동안 재교육 운영을 지시했다. 소매치기 식별 요령부터 수배자 검거 방법까지 전반적인 교육이 진행됐다. 재교육 성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최근에도 경찰청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화가 있다. 2007년 조현오가 경비국장일 때 일이다. 이때도 승진 기준은 성과였고 순위는 공개한다는 게 인사 원칙이었다. 경비국 회의실에서 조현오는 참석자에게 ‘우리가 합의한 내용’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승진 순위를 밝혔다. 이 순번은 조현오가 보직 이동을 한 뒤에도 어김없이 지켜진다. 조현오가 떠났을 때 ‘빽’이 개입할 틈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조현오도 이를 의식했는지 이듬해 부산청장으로 옮기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순번을 어기는 사람은 내가 경찰청장이 되면 가만 안 두겠다.”

 


 

2008년 조현오는 부산청장으로 부임한다. 오랜 참모 생활을 마무리하고 지휘관으로서 이력이 시작됐다. 부산에서는 지금도 조현오를 두고 ‘추진력은 최고’라는 평가가 많다.

 

조현오는 오전 6시 30분쯤이면 출근했다. 간밤에 주요 수배자 검거 소식을 들으면 즉시 검거 직원이 있는 경찰서로 향했다. 조현오가 움직이면 지방청 인사계에서도 함께 움직였다.

 

 

 

부산지방청에서 가장 먼 부산강서경찰서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조현오는 언제나 8시 전에 도착해 공을 세운 경찰을 격려했다. 인사계에서 준비한 상과 상품도 함께 전달됐다. 낮에도 주요 검거 소식이 들리면 경찰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조현오는 경찰 사기를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2007년 말 혜진이, 예슬이 사건, 2008년 3월 일산 엘리베이터 초등학생 납치 미수 사건 등으로 경찰은 거센 비난을 받고 있었다.

 

2014년 기준으로 부산에는 경찰서 15개, 파출소 40개, 지구대가 50개 있다. 조현오는 치안 체계를 점검하고자 각 팀별로 실적 통계를 내라고 지시한다. 그 결과 최고 실적과 최저 실적 차이는 1224배나 됐다. 조현오는 당장 성과를 근거로 인력을 배정하고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내부 게시판에서는 성과주의를 향한 불만이 쏟아졌다. 조현오 역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토론하고 싶은 사람은 당장 다 와라. 결론 나올 때까지 토론하자. 내가 잘못했으면 깨끗이 거두겠다. 내가 맞으면 내 방침을 따라라.”

 

끝장 토론으로 불평·불만을 돌파하는 방식은 일선 경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듯하다. 최근에도 그 일화를 떠올리는 경찰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이 같은 대응을 두고 실적을 바탕으로 차기 경찰청장 자리를 노린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한 경찰 취재기자 생각은 달랐다.

 

“청장으로 와서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부류가 있어요. 그런 정책이 인기를 얻으면 차기로 가는 디딤돌이 되지요. 하지만,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자 다양한 정책을 통해 인기를 얻고자 하지는 않았어요. 그보다 자기 권한으로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겠다는 쪽이었지요.”

 

조현오는 권한이 커질수록 징계 수위도 높였다. 비리를 도려내겠다는 의지는 분명했다. 경찰 조직 안에서는 1985년부터 경찰대 출신들이 입문하면서 조직을 깨끗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이처럼 아래에서는 ‘경찰개혁의 첨병’이라는 자부심으로 뭉친 젊은 피가 수혈되고 있었고 위로는 모든 청장이 유착 근절을 부르짖었다.

 

조현오도 부패 경찰 척결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과격했다. 일반적으로 유착에 대한 징계는 ‘사후 조치’였다. 경찰이 업주에게 돈을 받은 게 나와야 징계로 이어졌다. 하지만, 조현오는 단속 대상자인 업주와 업무 외 전화를 아예 금지했다. 물 한 잔도 얻어먹지 말라는 지시를 어긴 경찰에게는 여지없이 징계가 떨어졌다.

 

 

이 같은 조치에 대해 한 기자가 내린 평가는 박했다. 단순 통화는 통신 자유에 해당하며 설사 지시를 어겨 징계를 하더라도 행위에 비례하는 문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현오가 징계한 직원 중 일부는 소청심판이나 행정소송을 거쳐 살아나기도 했다. 조현오가 내세운 ‘일벌백계’는 명료했지만 분명히 지나친 면도 있었다.

 

지방청장은 경정 이하 승진과 전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보통 경찰서 간 전보 인사는 인근 경찰서로 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성과를 기준으로 인력 배정을 진행한 조현오에게 관례는 관례일 뿐이었다. 해운대경찰서에서 강서경찰서로 옮기게 된 직원들 불만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해운대와 강서는 부산에서 경찰서 사이 거리가 가장 먼 곳으로 이동하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 2009년 경기지방청장으로 부임한 조현오는 징계 차원에서 평택에 근무하는 직원을 포천으로 보내기도 했다.

 


 

2010년 서울청장 때는 비리 온상으로 지목된 강남경찰서 수사팀을 뒤엎었다. 당시 강남 유흥업계가 단속을 돈으로 무마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조현오는 업주와 엮인 경찰을 서슴없이 징계하기 시작했다.

 

한 언론은 조현오가 차기 경찰청장 임명을 앞두고 ‘자기 관리’에 들어갔다고 분석했다. 강력한 내부 비리 척결로 청와대 관심을 끌고자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현오가 청와대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맞다. 민정수석실도 나름 움직이기 시작한 듯했다.

 

(다음 8화-조현오, ‘룸싸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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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경찰인재개발원(과거 경찰종합학교)은 경찰 공무원과 경찰간부 후보생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다. 김헌기가 경찰종합학교 교무과장으로 온 것은 2007년 7월이다. 송도 모 초등학교 유괴사건이 일어난 지 몇 달 후였다.

 

대전서부서장을 하고 있어야 할 황운하 선배(경찰대 1기)가 이미 총무과장으로 와 있었다. 당시 이택순 경찰청장이 황운하를 소위 날려버린 것이다.

 

황운하 총무과장은 사무실에서 많은 시간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업무를 포기한 듯 보였는데 그럴 만도 했다. 김헌기가 교무과장으로 왔을 때 경찰청이 황운하에 대한 징계 절차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황운하가 이택순 청장 퇴진 요구 글을 경찰청 게시판에 올렸기 때문이다.

 

사건 발단은 이렇다.

 

송도초등학교 유괴사건이 벌어진 2007년 3월,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이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보복 폭행한 사건도 벌어졌다.

 

폭행이 벌어진 날 112 신고가 접수돼 남대문 경찰서에서 출동하자 한화건설 고문이면서 전 경찰청장인 최기문은 전방위 로비에 나섰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시 경찰청장 이택순이 개입했는지 여부였다.

 

이택순은 결백을 주장하며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카드를 꺼낸다. 2007년 5월 경찰청 게시판에는 이택순 청장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왔다.

 

퇴진 요구는 황운하만이 아니었다. 전국지휘관 회의에서 고위간부(치안감) 다섯 명이 이택순에게 청장 사퇴를 건의했다.

 

 

그중 한 명이 당시 경찰종합학교장이던 김석기다. 이택순은 황운하를 징계한 것처럼 그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김석기는 더 이상 좌천될 자리가 없었다.

 

 

 

김헌기는 이런 유배지 같은 직장 분위기 속에서도 업무를 챙기기 시작했다. 김헌기 과장이 맨 처음 한 일은 교수 '군기잡기'다. 형식적으로 진행하던 교수평가제를 매달 진행했다. 하위 점수를 받은 교수는 학교장 앞에서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다.

 

인자한 미소를 띠는 김석기 학교장 옆에서 김헌기는 허리 꼿꼿한 자세로 앉아 뚫어지게 교수들을 쳐다보며 설명을 들었다. 게다가 김헌기 과장은 직접 형사들 수업시간에 들어갔다.

 

송도초등학교 어린이 유괴사건에서 경찰이 수사지휘를 잘못한 부분도 수업 시간에 짚었다. 자신과 관련된 내부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당시 범인을 잡은 형사에게도 전화했다.

 

이 형사는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했다.

 

“그때 김헌기 과장님이 신임 형사 교육에 인질사건 교육을 넣어야겠다면서 와서 교육시키라고 그랬어요. 이렇게 사회적으로 공분을 일으킨 큰 유괴나 인질 사건에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면서.”

 

이 형사는 현재 인천 일선 경찰서 형사과장이다. 그런데 그는 경찰이 이 사건에서 엉터리였다고 여기는 김헌기와 생각이 달랐다.

 

"당시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 범인이 공중전화로 전화할지 모르니까 길거리에서 빵과 김밥 먹으면서 3~4일 동안 잠 한 숨 안 자면서 움직였어요. 지금처럼 실시간 위치 추적하는 것도 아닌데 범인을 사흘 만에 잡은 것은 엄청 빨리 해결했다고 생각해요."

 

당시는 CCTV가 드물었고 실시간 위치추적 시스템은 없었다. 유괴범은 첫날 아이를 죽이고 공중전화로 녹음기를 틀어 아이 목소리를 들려줬다. 결과적으로 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아이는 이미 죽었다. 경찰 잘못으로만 몰아갈 수 있을까. 당시 범인을 잡은 형사 시각에서 2007년 3월 송도초등학교 어린이 유괴사건을 살펴보자.

 

 

<영화 그놈 목소리 2007년>

 

“이형호 어린이 유괴사건을 다룬 영화 <그놈 목소리>가 2007년 2월 1일에 나왔어요. 그런데 그 유괴범이 공중전화로 똑같이 흉내 냈어요. 공중전화 추적시스템을 설명하면... 유괴범이 공중전화로 전화를 해요. 그때 감청 중이니 전화국에 번호가 뜨지요. 그러면 그 전화번호를 형사지원팀에 무전으로 불러줘요. 그럼 어느 공중전화인지 다 나와요. 해당 공중전화 담당 형사를 보내지요.

 

유괴범은 인천, 부천, 시흥 등을 옮겨 다니면서 전화했어요. 유괴범이 돈가방을 어디로 들고 오라고 해서 가면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다른 부서 경찰들이 나타났지요. 당시 인천 경찰을 대부분 동원해서 모두 무전기를 듣고 있으니 다른 과에서 특진 욕심에 덤벼들곤 했지요.

 

결국 유괴범을 잡은 결정적 단서는 7차 협박 전화였어요. 그곳은 당시 김헌기 수사과장님 사는 아파트 단지 근처였는데 제가 거기 공중전화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다 회수했고 그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가서 담배를 산 사람과 인상착의 등을 물었지요. 슈퍼 주인이 알려준 단서를 김헌기 수사과장에게 보고했습니다."

 

김헌기는 처지에 따라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전체적으로 시스템을 관리하는 쪽에서 이 사건을 보는 것이고 형사들은 추적하는 처지에서 고생한 게 가장 크겠지요."

 

그럼에도 김헌기는 송도초등학교 유괴사건 수사를 '쪽팔리다'며 박하게 평가했다. 그리고 수사본부에서 감청을 들으면서 유괴범 전화가 걸려오면 즉시 현장에 무전을 치면서 '개지랄' 떨었던 사흘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제야 모두 16번에 걸친 협박 전화에도 범인을 빨리 잡지 못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간 경찰은 개인역량에 좌우되는 조직이었다. 그러다보니 경험을 쌓기가 힘들고 평상시 실전형 현장 훈련, 즉 FTX(Field Traning Exercise)가 부재했던 것이다.

 

유괴사건은 매우 드물게 발생하지만 사회적 여파는 매우 크다. 그런데 경찰이 평상시에 이러한 사건을 가정하여 훈련을 받은 게 없다. 협박전화는 감청을 통해서 추적해야 한다.

 

감청영장을 받아와서 전화국에다가 감청기 설치하고 들어야 발신지를 추적할 수 있다. 감청영장은 신청 상황은 너무 급하기 때문에 재빨리 내준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요?"

 

영장 갖고 집행을 하니 엉뚱한 전화국이었다. 그래서 재영장신청을 해야 했다. 범인은 당시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범인이 어느 공중전화를 이용할지 모르기 때문에 당시 수사본부는 자료에 근거해서 인천 전 지역 공중전화에 경찰들을 잠복시켰다.

 

한 전철역 광장에 설치된 공중전화는 열 개인데 형사 10명이 배치됐다. 그런데 그 공중전화는 나란히 붙어 있는 상태였다.

 

공중전화가 이미 없어진 곳에도 형사는 배치됐다. 수사본부에서는 전화가 오면 감청을 해서 들었다. 번호가 뜨면 빨리 인상착의를 파악하라고 지시하려고 공중전화 담당 직원에게 무전을 친다. 무전을 받은 담당 직원은 밥 먹는 중이라고 보고했다.

 

 

범인은 계속 돈을 요구하는 전화를 했다. 한 지역 공영주차장에 현금을 갖다 놓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경찰이 따라붙으면 애를 죽이겠다고 경고했다.

 

수사본부는 형사를 택시기사로 변장시켰다. 택시 뒷좌석에도 형사가 드러누웠다. 피해자는 돈가방을 들고 접선지로 갔다. 나머지 경찰은 범인이 접근했다 도망갈 길목에 배치했다.

 

그런데 그곳을 지켜야 할 경찰들이 특진 욕심에 모두 공영주차장으로 몰려왔다. 김헌기 수사과장은 무전기에 대고 소리 질렀다.

 

"지금 뭐하는 거야! 빨리 원위치!"

 

유괴범은 사흘 만에 잡혔지만 이 모든 수사 과정은 김헌기 가슴에 시리게 남았다. 유괴사건, 인질 사건이 발생하면 아주 뛰어난 형사가 해결하면 다행이나 그렇지 못하면 사회적 여파가 너무 크다.

 

협상 요원이 있다면 유괴범이 전화할 때 옆에서 피해자에게 메모를 건네서 코치할 수 있다. 그런 시스템 필요성은 같은 시공간에서 우후죽순처럼 자랐다.

 

정신적 문제, 사회 불만, 충동 범죄, 보복 범죄 등 다양한 원인으로 형사 인질사건이 벌어졌다. 이런 사건들은 지역별로 빈번하게 벌어졌고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가는 남성이 담배 피며 욕설을 내뱉는 고등학생 머리를 툭 쳤다가 폭행죄로 불구속 입건되는 현실이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질극이 제대로 벌어지면서 장시간 대치하는 상황이 생기고 언론사가 몰려와 취재하면서 인질 대응 필요성이 부각됐다. 대표적인 게 2010년 7월 24일 서울 중랑구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결혼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여자 친구를 인질로 붙잡은 사건이다. 여자 친구 어머니는 흉기로 살해됐기에 사회적 여파가 컸다.

 

인질 대응 기구는 2014년 구체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체계 구축을 밀어붙일 지휘관도 나타났다. 바로 경찰청 강력범죄수사과장(현 형사과장) 김헌기다.

 

강력범죄, 폭력, 마약, 조직 관련 업무를 총괄하며 소관업무와 관련된 기사들을 예의 주시한다. 그 해 1월 23일 부정 승차하는 20대를 붙잡은 교사가 폭행 혐의로 체포되는 기사가 나왔다. 경찰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이런 크고 작은 폭행뉴스들은 그 해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에 침몰당한다. 바로 유병언 추적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는 비상시국으로 전환됐다. 김헌기 과장이 있는 강력범죄수사과는 주무부서였다.

 


2014년 7월 21일 저녁 김헌기 과장 사무실에 전화가 울렸다. 국과수 원장 서중석이었다.

 

6월 12일 전남 송치재 휴게소 인근 매실밭에서 심하게 부패된 시신이 발견됐는데, 서중석 원장은 이 변사체 유전자를 검사하니 유병언 씨로 보인다고 했다. 당시 경찰은 단순 변사사건으로 처리했다. 당연히 경찰청 보고는 없었다.

 

김헌기와 서중석 사이에 DNA 결과를 보완할 수 있는 자료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이후 40일이 지난 7월 23일 DNA 확인을 거치고 유병언 시신으로 확정된다.

 

그때서야 검찰은 경찰과 정보공유를 하지 않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수사과정에서 잘못된 일이 있었다면 지휘관인 본인 책임”이라며 최재경 인천지검장에 이어 이성한 경찰청장도 부실 수사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2014년은 김헌기가 경무원 승진을 도전하는 해였다. 얼마 후 민정수석실에서 전화가 왔다. 인사검증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들려온 모양이다.

 

“김헌기 씨가 유병언 변사처리 업무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에게 그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성한 경찰청장이 그 책임을 지고 나갔지 않습니까?”

 

김헌기는 그에 견줄 만한 업무성과를 내세웠다. 특히 정당행위 체크리스트를 강조했다.


학생을 훈계하는 과정에서 어깨나 머리를 툭 친 것도 그간 폭행 혐의로 입건할 수 밖에 없었다. 피해자가 진단서까지 제출하는 상황에서 형사 개인이 법리적 반박과 더불어 커지는 수사 범위와 민원을 감당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이는 분명 사회통념에 배치되는 결과다. 경찰청 강력범죄수사과장인 김헌기는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풀고자 전문가를 모았다. 판례를 모두 뒤져서 정당행위 판단 항목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마침내 ‘정당행위 검토서’ 체크리스트가 완성됐다. 사건이 벌어지면 각 경찰서 형사과장이 위원회를 열어 정당행위 판단 항목에 해당하는지 살펴보고 검찰에 송치하도록 했다.

 

김헌기는 그동안 업무성과로도 승진을 자신했지만 확실한 굳히기가 필요했다.

2014년 12월 4일 팔달산 토막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등산로에서 한 등산객이 토막 난 시신이 담긴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경기지방경찰청에 수사본부를 차렸으나 일주일 동안 수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김헌기 과장은 범인 잡을 방법을 궁리했다. 그리고 뭔가 딱 떠올랐다.

 

김헌기는 11일 출근과 동시에 경찰청장에게 보고했다. 승인이 떨어지자 경찰 신고포상금 최고액 5000만 원을 언론에 알렸다. 범인은 12시간 만에 잡혔다.

 

당시 대다수 언론은 공개수사 전환을 ‘신의 한 수’라고 극찬했다. 김헌기 경무관 승진 인사 3일 전이었다.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제1부는 여기서 마칩니다.  2부는 2020년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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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제3화. 미스터 계장들

 

2011년 12월 22일 김헌기는 경찰청(이하 본청) 지능범죄 수사과장이 됐다. 직속 계장이 보고했다.

 

“조현오 청장님께서 그 의경 사망 사건에 대해서 독회를 하신답니다.”

 

2011년 7월 말 의정부 동두천에서 의경이 사람을 구하려다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다. 그 후로 이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가 진행됐다. 경찰청장이 배석한 상태에서 주무담당과장이 단상에 올라가 사건을 보고한다. 그 후에 쟁점을 두고 서로 토론하는 것을 독회라고 한다. 김헌기는 본청 경험이 없어 ‘독회’ 뜻을 몰랐다. 하지만 담당 계장은 김헌기 과장이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료를 챙겨주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자 옆에 앉은 강신명 수사국장이 발표하라며 김헌기를 툭툭 쳤다. 당연히 매끄럽게 될 리가 없었다. 조현오 청장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소리쳤다.

 

“과장 내려가. 담당자 올라오라고 해!”

 

김헌기는 본청 생활을 그렇게 시작했다. 만약 경찰종합학교장을 했던 김석기가 2009년 경찰청장이 됐다면 본청 경험을 일찍, 좀 더 수월하게 했을 것이다.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석기는 2009년 용산참사로 2월 10일 물러났다. 김석기는 경찰청장 내정자 기간 경찰 인사를 단행했다. 그때 조현오를 치안정감으로 승진시켜 경기지방경찰청장에 내정한다.

 

이 둘은 이택순 청장이 엄청 괴롭혔던 대상이다. 김석기는 본청에서 이택순 청장을 매일 마주하는 조현오를 위로하면서 수사권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자 몇 가지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수사국은 수사국장(치안감) 아래에 새롭게 수사기획관(경무관)을 뒀다. 그 밑에 지능범죄수사대와 범죄정보과를 신설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담당할 수사구조개혁팀은 경무관이 단장인 수사구조개혁단으로 크게 몸집을 키웠다.

 

조현오 청장 시절에는 연줄보다 해당 분야에 가장 유능한 인재를 뽑는 인사 흐름이 있었다. 강신명 수사국장은 지능범죄 수사과장에 김헌기를 추천했다. 김헌기는 인천지방청 수사 2계장 시절 안상수 굴비사건 수사로 각인됐다.

 

 

 

공무원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게 조현오 청장 소신이다. 일을 제대로 못하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당시 민갑룡 기획조정담당관은 조 청장이 가장 대접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도승지 역할이었고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대통령령을 정할 때 검찰과 실무협상에 나가기도 했다.

 

조현오 청장은 능력이 탁월하면 수직과 수평 질서를 흔들어도 중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황운하다. 조 청장이 민정수석 반대를 무릅쓰고 승진시켜 2011년 말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내정했다. 믿고 맡기면 일절 간섭하지 않고 외풍을 차단해주는 게 조현오 청장 방식이다. 수사국에 속한 지능범죄수사과(현 수사과), 강력범죄수사과(현 형사과), 수사구조개혁단 등 수사부서들은 모두 본청 5층에 있다.

 

경찰청 내에는 계장급 경정이 150여 명이 근무하고 총경 승진 할당량도 경찰청이 가장 많다. 수사국은 매년 계장 두 명 정도가 총경 승진을 한다. 승진에 유리한 보직들이 있다. 계장이 총경으로 승진 후 자리가 비면 수평이동을 할 우선권은 주로 같은 국이나 과 계장에게 주어진다. 당시 수사구조개혁단에는 김헌기가 예전에 함께 근무를 했던 W가 있었다. 김헌기 수사과장은 사무실 복도에서 W를 만나면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랑 같이 근무하는 계장으로 와야 해."

"네, 알겠습니다."

 

 


 

2013년은 이성한 경찰청장 시절이다.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 직전 국정원 댓글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국정원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인터넷에 게시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급기야 민주당 쪽에서 국정원 직원이 작업하는 오피스텔을 급습하고 경찰에 고발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선거 후 김헌기 수사과장도 이 사건으로 국회로 불러 다녔다. 직속 계장들은 따라다니며 뒤에 앉아 지켜봤다. 그 당시 계장 눈에 비친 김헌기는 어땠을까? 한 계장은 김헌기 과장에 대한 인상 깊은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경찰 수사는 정신없이 진행됐다. 김헌기 과장은 회의 때 검찰에서 공소제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수사할 시간(2개월)을 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선거법 공소시효는 6개월이다. 검찰은 사건 발생 6개월 내에 공소제기를 해야 한다.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알아도 수사에 집중하다 보면 모를 수가 있어요. 지혜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요?”

 

박근혜 정부는 불량식품 근절을 국정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정부시책에 경찰은 어느 정도 업무성과를 내야 했다. 불량식품 관련 법규는 식품위생법 위반 특별법이다. 특별법 업무 소관은 지능과가 맡는다.

 

본청 계장들 역할은 무엇일까?

 

계장들은 여러 가지 총괄 계획서를 작성한다. 계획서에는 단속 배경과 대상, 방법, 인력, 적용 법 조항 등이 들어간다. 불량식품 단속은 경찰도 생소해 소집교육도 시키고 매뉴얼도 제공한다. 이후 단속 사항이 올라오면 수사 지도를 한다. 성과를 언론에 홍보하는 것까지 본청이 관리한다.

 

동물 사료용 폐닭, 폐기용 돼지 부산물 등이 시중에 유통되다 경찰 수사에 적발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 업무를 관리했던 담당 직원은 당시에 순대와 통닭을 도저히 먹지 못했다고 했다. 원래 식품사범은 구청 소관업무다. 이게 경찰업무로 들어오자 일선 경찰은 불만을 드러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작용도 나타났다.

 

하루는 경찰청에 토종닭협회 전화가 걸려왔다. 야산에 닭을 삼삼오오 키우는데 그게 무허가라 경찰 단속을 받은 모양이다.

 

 

 

“경찰 때문에 서민경제가 다 죽는다.”

 

토종닭협회는 강경하게 나왔다. 경찰청이 있는 서대문 사거리에 2000명이 모여 생존권 투쟁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경찰청 앞에서 닭들이 파드닥거리며 휘젓고 다닐 모습이 그려졌다. 이미 언론도 경찰이 무분별하게 단속한다는 기사를 내고 있었다.

 

본청에서는 저인망식 수사 자제를 지시했지만 영세업자 기준을 분명하게 정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이처럼 실무에서 혼선이 있을 때 김헌기는 명확히 기준을 잡아준다. 함께 일했던 한 계장은 풍부한 수사업무 경험에서 생긴 감각이라고 설명했다.

 

김영란법 매뉴얼을 만들 때 일화도 들려줬다.

 

당시 경찰 대응 방향을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다.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이 김영란법을 위반했다며 112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김헌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112 신고에 나가면 안 되는 거지. 나가면 안 되는 거야. 이게...”

 

김헌기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영란법의 약점은 국민들의 세세한 일상까지 법에 규정해버린 것이다. 선물부터 관혼상제. 일상생활과 밀접한 것을 법으로 규정했다. 그게 부패방지를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법에 의존하는 사회가 될수록 112 출동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또한 이건 현장에서 증거를 잡아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도 쉽지 않다.”

 

김헌기는 김영란법 신고 관련 대응 방향은 서면 신고를 받는 것으로 정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경찰은 112 신고에 출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헌기는 일선 서에 부담을 줄이고 명확한 지침을 내리고자 했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조현오 청장이 물러나면서 쫒겨났던 황운하는 그 해 여름, 경무관 6년 차에 기적같이 승진했다. 반면 김헌기는 원하던 보직과 멀어졌다. 수사연수원장으로 첫 부임하고 나서도 한동안 맥이 빠지고 마음이 우울했다.

 

어느 날 아침 9시 모르는 전화가 왔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을 고교 동창이라고 소개했다. 전화한 용건을 털어놨다.

 

“이웃집은 강아지 3마리를 키운다. 강아지는 다리가 짧고 험상궂게 생겼다. 자기 부인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는데 충격을 받아 출근도 못했다.”

 

이 대목에서 그 고교 동창은 강아지 사진을 김헌기에게 보냈다.

 

 

납작한 얼굴을 가진 새까만 강아지였다. 김헌기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교 동창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112 신고를 했는데 경찰이 와서는 이건 경찰에서 할 수 없는 것이라며 돌아갔다. 부인이 무서워하고 스트레스받는데 어떻게 경찰이 안 해주냐”

 

김헌기는 가슴에서 열불이 확 올라왔다. 겨우 진정하고 공동주택에서 애완견 키우는 건은 경찰이 처리할 수 없다고 답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꼼꼼하고 깔끔한 김헌기 방식이 아니었다. 김헌기는 인터넷을 검색해 고교 동창에게 오피스텔 관리회사 공동주택 관리규약과 대응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내용을 문자로 보냈다.

 


 

시간이 흘러 해가 또 바뀌었다. 2018년 민갑룡은 새로운 경찰청장이 됐다. 조국 민정수석이 추천했다고 한다. 조국은 이미 2005년 민갑룡 경정이 수사구조개혁팀 근무할 당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알았던 사이다. 민갑룡은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수사나 경비와 아닌 기획 계통으로 근무했고 지휘 경험이 없어 꼬투리 잡힐 게 그다지 없었다. 민갑룡 경찰청장 후보자는 무난하게 인사청문회를 통과했다.

 

경찰청은 연말이 되면 승진인사 발표한다. 경무관은 승진이 안 되면 6년째 그만둬야 한다. 2018년 송무빈 경무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아직 기간이 남았는데도 사의를 표명했을 때 누군가에게는 그 해를 기회로 여기고 은근히 기대했을 테다. 서로 가족처럼 생각해도 결국 한 명이라도 옷을 벗고 나가기를 바란다. 늘 승자는 소수다.

 

어느 날 김헌기는 전화를 받는다. 아끼던 본청 직원 J가 입원했다는 것이다.

 

김헌기는 본청에서 4년 동안 지능범죄 수사과장(현 수사과장), 강력범죄 수사과장(현 형사과장), 수사기획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계장을 경험했다. 김헌기가 수사과장일 때 계장으로 오라 했던 W는 형사과 계장으로 도망갔지만 이듬해 김헌기가 강력범죄 수사과장(현 형사과장)으로 가서 다시 만났다. W는 뚝심이 있고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면이 있다. 결국 W는 형사과에서 총경 승진을 했다.

 

반면 J는 우직하게 일만 했다. 병세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됐다. 그런데 입원하자니 인사를 앞두고 있어 주위 시선이 걸린 모양이었다. 승진에서 떨어지자 병이 더욱 깊어졌고 병원으로 실려 오게 됐다. 김헌기가 급히 병원을 찾아갔다. 병상에 누워 수혈하는 J를 보고 김헌기는 눈물을 흘렸다. 어느새 둘이 껴안고 엉엉 울었다.

 

“일만 시키고 내팽개치니까 조직이 원망스럽다.”

 

(다음 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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