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제10화(최종화) MBC 파업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전라도 장흥 남포갯벌은 자연산 굴로 유명하다. 아침이면 굴을 채취하고자 장비를 챙겨 바지선을 타고 남포 갯벌로 향하는 아낙네로 붐빈다.

 

바닷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나면 본격적인 굴 따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갯벌에 발이 빠지고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험한 날씨를 감내해야 한다.

황 대표는 몇 해 전 겨울 남포 갯벌을 찾았다. 매서운 칼바람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한구석에 앉아 바닷물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황 대표는 할머니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추운데 뭐하러 나오셨어요! 이걸 해서 얼마나 번다고."
"난 이거밖에 없승게."

이곳 어머니들은 굴을 캐서 자식을 먹이고 입혔다. 굴을 따고 까서 그 알맹이를 추려내는 작업은 지난하다. 장성한 자식들은 고향을 떠나 각자 자기 앞가림을 하며 살 것이다.

 

어느덧 어머니는 노인이 됐다. 그 할머니가 지금 자식을 위하는 방법은 이렇게 굴을 보내주는 일이다. 아득한 시절부터 어머니들은 그랬다.

 


황풍년 대표는 지금 사는 사람이 자존감을 세우려면 그런 어머니들 이름과 삶을 기록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억의 중요성을 영화 <더 기버-기억전달자>에 나오는 기억전달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기억들은 과거로 치부할 게 아니라 미래를 결정짓지."
"과거 기억을 이용해 현재를 조언하는 거야. 모든 게 연결되어 균형을 이루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는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한다. '늘 같은 상태'로 기억을 통일했기 때문이다. 서로 사는 공간과 환경이 다른데 같은 기억만 존재한다는 것은 기억이 지워지고 조작됐다는 뜻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선, 그렇게 빼앗겼던 기억이 다시 돌아올 때 흑백이었던 배경이 모두 천연색으로 바뀐다.

 



사람에게 없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스스로 기억전달자가 되기로 했다. 경남 진주시 명석면에 살았던 홍순한(1921-2000년초)씨 인생을 그 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하나뿐인 면 단위 역사서 <명석면사> 덕이다. <명석면사> 근현대사 편을 보면 이 지역에서 좌익운동을 했던 홍순한 씨를 비중 있게 다룬다. <진주신문> 기자였던 김경현 씨가 1998년 취재와 집필을 맡아 완성했다.

 

 


'일제강점기 좌익운동'을 흔히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저항운동이라 일컫는데,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를 할 것이다. 이는 1917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러시아 혁명'에서 시작됐다.

 

'사람 사이의 평등'과 '외세에 대한 해방'은 조선인들을 사로잡았고, 1920년대는 지역 곳곳에 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 등이 생겨났다.

바로 이 시점인 1921년 홍순한은 진주군 명석면 계원리 홍지동에서 태어났다. 명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1942년 일본 대판공과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1942년 조선인 고학생 비밀결사이던 '통나무회'에서 활동하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해방 후 대학을 중퇴하고 1945년 9월 일본 도근현 재일본조선인연맹 사회부장을 지내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공부하던 자본주의 관련 일본어 책에는 '자본주의 모순이 뭘까?'라는 낙서가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1946년 귀국 후, 명석면 홍지동 애향청년회를 조직했다.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결성된 건국동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국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로 전환됐다. 나름 해방 공간에서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리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되는 등 혁명적 분위기를 낳았다. 그러나 해방 후 미 군정 통치가 시작됐고, 행정과 치안에 친일파를 재 등용했다.

그러자 그해 10월 미 군정에 반대하는 인민항쟁이 전국 곳곳에 터지기 시작했다. 홍순한 씨는 명석면에 있는 경찰서를 습격했고 이로 인해 진주형무소에서 1개월을 복역했다. 출소 후에는 명석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이듬해 6월 5일부터는 좌익 세력에게 전향 기회를 준다는 명분으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그리고 경찰을 시켜 좌익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키도록 했다. 당시 각 지역에 인원을 할당하여 좌익이 아닌 사람까지 강제적으로 가입시키는 분위기였지만 경찰은 홍순한 씨를 보도연맹 가입대상에서 제외했다.

 

홍순한 씨도 '경찰에게 뻔한 반공 교육을 받기 싫다'며 가입을 거절했지만 경찰도 홍 씨를 가입시켜봤자 전향할 사람이 아니라고 봤다. 오히려 반공교육을 받고 전향해야 할 보도연맹 회원을 다시 좌익 쪽으로 전향시킬 사람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여름 난리'로 불리는 전쟁이 터졌다.

 

국군과 경찰은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며 전국 각지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을 소집시켜 어디론가 데려가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북한 인민군은 물밀 듯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인민군과 북한 노동당은 각 지역에서 다시 새로운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우익인사들에 대한 숙청을 자행했다. 진양군 16개 면 중 하나인 명석면 또한 1950년 8월에 인민군이 점령한다. 이 지역 또한 새로운 인민위원회를 구성했고 명석면 행정권과 치안권을 행사할 새로운 면서기장으로 홍순한 씨를 추대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14일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졌고, 다시 국군이 반격하면서 빨치산을 모두 정리하려는 작전을 펼쳤다. 당시 국군 시각에서 홍순한 씨는 부역자였고 총살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순한 씨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홍순한씨가 마을을 너무나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대신 홍순한씨는 도민증을 빼앗기고 거주지가 제한됐다.

그 후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을 낳았고, 자유당 몰락과 함께 반공 정권에서 통제를 받던 좌익 세력도 한층 너그러워진 사회 분위기를 타고 선거에 출마를 하였다. 홍순한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홍순한 씨는 5.16이 터지면서 공민권이 박탈됐다. 요시찰 인물로 거주지가 제한됐다. 2대 중앙 정보부장 김형욱에게 사면장을 받은 후에야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홍순한은 사면되자, 바로 지역 사업에 착수했다. 어릴 적 일본 학교에서 배운 측량기술을 바탕으로 초등학교 근처 하천공사에 나선 것이다.

홍순한 씨의 아들은 아버지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60대 중반인 큰아들(52년생)에게 없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전해주기로 했다. 이 기억은 아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우선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래는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그의 시점으로 정리한 것이다.

 




1. 출생 전

우리 아버지 삶에 대해서 전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단편적인 이야기는 순간순간 들었지요. 집에는 일본 책이 많았어요. 책 속에 일본 여자와 찍은 사진을 본 적도 있고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해방된 후 고국으로 돌아와 소위 좋은데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 말하는 '좌파 물'이 들어서 고생 많이 했지요.

한국전쟁 전에 사람들 불러 들어서 오라 할 때 가면 총살시켰다 아입니까.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보도연맹 가지 말라 했는데, 아버지 말 들은 사람은 살았고. '오라 캐라' 해서 간 사람은 죽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좌익들 다 죽일 때인데 외가 시골집 보면 지붕 아래 비었거든요. 아버지는 경찰이 잡으러 올까 봐 천장 위에서 약 3년간 살았대요.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용공분자 찍혀서 고생 몇 년 하다가 잡으려고 더는 안 오고. 명예도 회복시켜줬어요. 내는 아버지가 존경스러운 것이 어쨌든 간에 시대를 살다 보면 그 당시 좌익공산주의 거기에 물든 사람은 거기가 좋으면 지리산 골짝으로 갔다가 북한으로 가는데,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거기에 계속 빠져서 그런 길로 간 게 아니라 일반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와서 생활하셨지요. 1952년에 제가 태어났어요.

 

 



2. 출생 후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기억이 많이 나요. 그때 우리 집은 농사짓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몇 달씩 나가서 측량 일을 했어요. 아버지가 일본에서 배운 측량기술로 갱남 지적도 도면 그리는 일을 했지요. 아버지는 갱남 안 돌아다닌 데가 없어요. 중학교 방학 때는 제가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지적도 도면에 번지를 쓰곤 했지요. 그때 마산도 가보고 거제도 와보고.

부친이 사면장을 받을 때는 제가 객지 생활을 했어요. 당시 <경남일보> 신문을 누가 갖다 주더군요. 사면됐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그 후에 아버지는 지역사회 일을 많이 하셨어요. 계원초등학교 앞에 개울이 있는데, 개울이 3개로 분리돼 물이 차면 차도 못 오고 아무것도 못 와요. 비가 오면 사람이 죽기도 해서 공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빨갱이 아들' 손가락질받은 적이 있는지를 묻자) 그런 적 한번 없습니다. 내가 고등학교를 진주시내로 다녔는데, 버스 타고 동네를 수십 개 거쳐 가거든요. 내가 기억하기에는 "누구 아들이냐?" 물어봐서 답하면, 다들 "아 그렇습니까?" 하고.

그런데 ○씨라고 있었어요. 사사건건 부딪혔어요. 부모님은 이야기 안 하는데, 살다 보면 혹시 적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지요. ○씨 아들은 저보다 한 살 많은데 학교도 같이 다니고, 마주쳐도 그런 이야기 안 해요. 서로 인사하지요. 사실 그 아들도 자기 아버지가 이야기를 안 하면 모르겠지요.

우리 부친은 그 지역에서 가장 똑똑하다 해서, 다들 물어보러 왔어요. 선거에 나가고 싶은 사람도 와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물어봤고, 예전에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될 때도, 평화통일 자문회의. 그거 할 사람도 와서 "내가 하면 되겠느냐?" 물어보러 오고, 옛날에는 촌에 차가 안 다녔을 때라 집 앞에 지프차가 오면 누가 인사하러 온 거죠. 경찰 서장이나 진양 군수가 바뀌면 인사하러 왔어요.

 

 


 


3. 사회주의와 진주 서부경남 정서의 만남

(부모님 금슬은 어땠는지?) 옛날에는 금슬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사는 거지요. 예전에 어머니가 마루에 아버지 밥상을 갖다 줬는데 밥이 설익어서, 아버지가 조그만 나무 상을 들어서 마당으로 던져버렸어요. 밥상과 그릇이 다 깨졌지요. 그래도 어머니는 밥상을 다시 차려서 갖다 줘야 했어요.

 

아버지가 일본 유학을 갔다 왔다 해도 유교사상은 안 바뀐 거죠. 내가 고등학교 될 때까지 엄마와 밥상을 같이 안 썼어요. 동네에 부부가 겸상하는 집 없었어요. 아버지와 저만 따로 밥 먹었어요. 나머지는 상 없이 먹었고요.

우리 마누라가 시집을 왔을 때, 동네에 아버지 4형제가 살았다는 거 아입니까. 새 애기가 시집오면 아침마다 큰 백부 둘째 백부 순으로 문안인사를 하거든요. 내가 1월 4일 결혼했으니 한겨울인데. 얼마나 춥겠습니까. 3일간 가니까 큰 백부가 "애야 됐다. 고만 와라" 하니까 그만했지요.

 

결혼해서 3년까지는 집에 가서 아버지를 보게 되면 마당이면 마당, 바로 그 자리에서 큰절을 해야 해요. 서부경남이 심하지요. 억수로 많이 예의 따지고요. 아버지는 큰아들인 제게는 억수로 엄했는데, 제가 군대 갔다 오니까 어른 대우를 해주더군요 같이 술 한 잔도 하시고.

아버지 환갑잔치를 제가 해 드렸어요. 시골집에서 동네 사람들 다 오게 해서. 아버지는 농사철 외에는 집안에 매이지 않고 각종 모임에 참석하셨어요. 그 당시 향교, 종친회도 가고, 진주문인들 모임에도 간 모양이에요. 돌아가시기 전에 나 보고 그러더라고. "비석문은 누구누구에게 부탁하면 써줄 것이다"라고.

90년 초에 아래채를 수리하시다가 낙상해서 골반을 다치셨어요. 진주의료원에서 응급조치했는데, 그 후로 10년 있다가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아침까지 말씀하시다가 낮 12시쯤 돼 돌아가셨지요. "아버지"라고 부르면 고개 끄덕끄덕하고.

(부친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묻자) 아버지가 나이가 들었을 때 또래들 모이면 서로 안 된 이야기를 한다 아입니까.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제일 행복하다. 내 앞에 먼저 자식이 죽었나, 마누라가 죽었나. 땅이 없어서 빌어먹으러 가나. 내는 하고 싶은 대로 살았고, 내가 제일 행복하다."

 



아래는 홍 씨 아들에게 <명석면사> 기록을 전해준 것이다.

 


- 부친이 4.19 후, 해방공간에서 선거에 출마한 적 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버지는 나간 적 없는 걸로 아는데요. 뭘 했습니까? 아버지 정치 이야기 거의 안 하셨는데… (기록을 보여주니까) 아…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선거운동을 어떻게 하면 이긴다. 이런 말을 해줬구나."

-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조직 활동을 하신 것은 아는지요? 일본 유학생 시절에 통나무회.
"아, 그때부터 했구나."

-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학교 선생님을 했는데 혹시 아세요?
"음…"

- 6.25 시절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면서기장 경력은?
"모르는데… 그런 경력들은 잘 모르는데…"

- 거주지 제한은?
"몇 년 제한됐습니까?"

아들은 <명석면사>에 적힌 아버지 기록을 읽고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지금 보니까 이렇게 아버지 스펙이 화려한지도 몰랐지만 이렇게 고생한지도 몰랐어요"

 

 

(다음 마지막 화 -  MBC 파업 네트워킹)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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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제10화(최종화) MBC 파업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크 종결자들>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김순재는 사람들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곤 했다.

"지금 자기 집에서 나락 농사짓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논에 나락을 심고 논농사 형상을 유지하면 정부가 직불금을 줍니까? 안 줍니까? 그런데 20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논에다 농사를 지으려고 물을 대면 뭘 냈나요? 수세를 냈지요. 농지위원회에서 물세를 받아갔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잘 살지 못하지요? 왜 그렇지요? 자기 삶이 만족하고 있나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농민은 왜 잘 살지 못할까? 1970년대 농활을 왔던 대학생들은 이 문제로 토론했다. 게을러서 못 산다는 의견도 있었다. 일을 하다가 간식을 먹는 농민을 보고 밥을 많이 먹어서 못 산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구조적 모순에서 원인을 찾는 이도 있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세웠다. '최소 투자와 최대 수익'이라는 핵심전략은 당연히 노동자 희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저임금 정책은 농촌정책까지 연계됐다.

당시 정부가 내건 농촌정책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증산'이다. 농민들은 정부가 정해주는 쌀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벼 품종을 선택했다. 농약과 비료 사용량이 덩달아 많아졌지만 철저하게 자부담이었다. 두 번째는 저곡가 정책이다. 노동자 임금을 높이기보다 쌀 가격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묶어 사회적 불만을 누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증산정책과 저곡가 정책은 농사를 지을수록 생활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1961년 박정희 정부는 농업협동조합법을 만든다. 지역별로 농민 조합원이 공동 대응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자치조직이 생긴다. 바로 농협이다. 각 지역에서 가장 큰 조직으로, 농협은 지역 네트워크로 따지면 최대 규모 민족은행이다.

하지만, 조직적인 네트워크로 농촌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선 것은 바로 농민회다. 1988년에 전국농민회가 조직됐다. 그즈음 대학을 마치고 고향인 경남 창원 동읍으로 돌아온 이가 있었다. 바로 김순재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보며 '대학 졸업해서 왜 여기 와 있지?'라고 생각했다.



김순재는 초창기 농민회에 가입하여 수세 징수 폐지 운동을 벌였다. 2000년 초, 쌀값 보장을 촉구하며 나락 적재 투쟁을 벌였다. 김순재는 창원농민회 사무국장에 이어 경남도연맹 사무처장을 맡았다. 사무처장은 살림을 책임지고 각 조직 사이 연대를 만들어내는 자리다.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국회의원 선산을 파분다고 협박해도 결국 한-칠레 FTA는 2004년 2월 16일, 국회 비준을 받는다. 농민들은 농민 출신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없는 현실에서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절감했다.

 

이는 농민들의 '정치세력화'로 나타났다. 농민회 출신들이 도전장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2004년 17대 총선에서 강기갑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강기갑과 함께 활동했던 김순재는 2010년 2월 농협 창원 동읍 조합장에 당선됐다. 지역 조합장 선거에 도전하여 실질적 모범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명도가 높지 않았다. 게다가 보수적인 동네에서 민주노동당 간판을 달고 현직 조합장을 이기는 게 과연 될지 의문이었다.




지역 헤게모니가 공고한 지역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킹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필요로 했다. 주변에서 김순재 선거운동을 돕겠다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선거운동 중반이 되자 힘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렇게 김순재가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서 상대방은 금품살포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김순재는 이런 불상사를 막으려고 한 가지 묘안을 낸다. 평소에 친하게 지낸 형들에게 농협으로 가서 수천만 원 대출 신청을 하도록 했다. 농협 직원이 물었다.

"왜 이리 많이 대출하십니까?"

"순재가 어디 쓸 건지 모르지만 빌려달라네."

동네에서는 '김순재가 총알을 수억 준비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김순재는 상대가 돈을 쓰면 자신은 더 많이 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게다가 자원봉사자들이 금품살포를 막으려고 '길목 감시조'가 됐다. 선거 나흘 전부터 현직 조합장 선거운동원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차를 대놓고 지켜보고 따라다녔다. 선거에서 표심을 잡는 방법 중 하나인 금품 살포 행위는 포착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인물 선거'로 이어졌다.

 


결국 김순재는 민주노동당 간판을 걸고 8표 차이로 2010년 창원 동읍 농협 조합장으로 당선됐다.

 


 

동읍 농민들 생활에는 당장 변화가 찾아왔다. 벼와 감을 생산하는 농가들이 한층 편해졌다는 게 공통된 여론이었다.

 

벼농사에 기본이 되는 모판 재배와 농약 치기는 농협에 신청만 하면 해결됐다. 벌레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감나무를 코팅하는 재료인 유황합제 제조 또한 농협이 책임졌다. 그간 유황합제 제조는 개인이 석회와 유황을 넣고 끓이다가 조금이라도 몸에 튀면 흉터가 생기는 등 갖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 같은 정책은 농민에게 호응을 얻었다. 창원 동읍 변화는 지역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같은 생활권인 대산면과 북면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동읍과 자기 지역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지역에서 김순재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하지만, 김순재는 조합장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2016년, '농민대통령'이라 불리는 농협중앙회 회장 선거에 도전한다. 현 상황에서 농협중앙회 개혁 없이는 지역 농협 변화에는 한계가 있고, 더 나아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농업협동조합 구조를 살펴보자.

조합원들이 출자하여 각 지역 농협을 세웠다. 그런데 각 지역 농협들이 서울에 있는 정부를 상대하기가 어렵기에, 각 지역농협이 출자하여 자회사인 농협중앙회를 세웠다. 즉, 농협중앙회는 지역농협을 돕고자 만들어진 자회사이며, 2선 조직이다.

그런데 지금 지역 풍경은 2선 조직이 장사하겠다고 1선 조직 구역을 침해한다. 한 길목에 농협은행(중앙)과 각 지역농협이 마주 보고 영업하는 것이다.

 


하지만, 힘이 한 곳으로 집중되면 그것은 선순환 구조 형태를 띠지 못한다. 힘을 가진 쪽이 싹쓸이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점포수에서는 지역 농협 수가 앞선다.

물론, 지역농협과 농협중앙회 관계도 예전과는 많이 변했다고 다들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역방송국보다는 서울방송국을 선호하는 것처럼, 농협도 '이왕이면 농협중앙회가 더 좋겠지'라며 쏠려버리면 지역은 없어진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2016년 1월 12일 농협중앙회장 선거가 다시 간선제 방식으로 치러졌다. 이날 참석한 농협중앙회 대의원과 농협중앙회장 등 선거인 289명의 표 중 김순재는 '5표'를 받았다. 김순재가 도전할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김순재가 과연 바꿀 수 있느냐는 의문을 표했다.

강기갑은 첫 발을 내딛지 않으면 두 번째, 세 번째를 내디딜 수 없다고 말했다. 비가 많이 올 때 가만 놔두면 빗물이 사방으로 흩어지지만 고랑만 살살 긁어주면 그 방향으로 빗물이 흘러가는 원리를 설명했다. 그렇게 빗장만 열어주면 거대한 물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김순재 도전 역시 거대한 물길의 빗장을 여는 첫 발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우리 역사에도 거대한 물결이 있었다. 학자들은 우리 역사에는 가장 위대한 저항운동이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일제강점기 좌익운동이다.

 

(다음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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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촌에서 쪼끄만 신문사 다닌다고 서울 사람들이 내를 무시하는데…"

2008년 초 그가 처음 나에게 한 말이다. 겨울 광화문 근처, 누가 문을 열면 바깥 한기가 안으로 들이닥치는 술집이었다. 그는 민간인 학살 관련 각종 세미나로 서울에 온다고 했다. 얼굴은 검었고 광대뼈 아래로 살이 움푹 패어 들어갔다. 끊임없이 피워대는 담배를 잡은 손마디는 투박했다. 그는 자신이 서울 사람들에게 무시당한 일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서울 사람들이 그에게 준 상처는 무엇이었을까.


 

이름은 김주완. 그는 1964년 남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학교에서 용모 검사를 한다기에 하얘지기 위해서 씻다가 살결이 상하기도 했다. 청소년 시절은 부산에서 보냈다. 1979년 고등학교 시절은 팝송에 빠져 지냈다. 긴 파마머리가 찰랑거리는 레드 제플린 멤버들을 직접 그려 벽에 붙여두었다. 부산 MBC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 엽서를 보내 경품도 종종 받았다.

1983년 김주완은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진주는 서부경남 중심지로 남강이 도시를 관통하여 흐른다.

▲ 진주 남강. ⓒ 서형


진주는 경남을 대표하는 교육도시이기도 하다. 경상대를 비롯해 연암공전, 진주교대, 진주농업전문대, 진주전문대 등이 있었다. 규모는 경상대가 가장 컸고, 그만큼 운동권 학생도 많았다.

김주완도 집회에 항상 참여했다. 당시 학교 안에서는 운동권 학생과 비운동권 학생들 사이 갈등이 빈번했다. 비운동권 학생 중에는 운동권 학생을 견제하려고 폭력서클을 조직하는 이들도 있었다.

집회가 벌어질 때면 교내로 진입하는 경찰에 맞서기 위해 조직한 사수대가 가장 앞줄에 섰다. 전남대 '오월대', 조선대 '녹두대' 등 학교마다 사수대에 독특한 이름을 붙였다. 경상대는 인근에 지리산이 있어서 '지리산 결사대'라고 지었다.

한편 1991년 4월 26일에는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살해됐다. 그리고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분신이 잇달았다. 노태우 정권은 궁지로 몰렸다. 학생운동의 기세를 꺾을 계기가 필요했다. 1991년 10월 10일 '지리산 결사대' 사건이 적당한 기회가 됐다.

이날은 진주전문대학(현 한국국제대) 학생회장 선거 날이었다. 진주·충무지역 총학생회협의회는 이 학교 운동권 후보의 요청으로 부정선거 및 선거 폭력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경상대 학생 40여 명을 진주전문대로 보냈다. 개표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강의실에 대기 중이던 학생들은 패배가 확실해진 비운동권 측 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무차별 폭행당했다.

하지만 뒤늦게 출동한 경찰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서 발표했다. 비운동권에게 습격당한 경상대 학생들을 전대협의 사주를 받고 결성된 극렬운동권으로 조작해 언론에 발표했다. 지역 언론을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이 사실 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경찰의 일방적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관련기사: '지리산 결사대사건' 재조사 필요하다)

 

▲ 지리대 결사대 조작보도

 


이 사건으로 학생 19명이 기소됐다. 폭력 및 집시법 위반 혐의였다. 학생들은 부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 도움을 청했다. 이 사건을 맡은 변호사가 문재인이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한 실상은 <한겨레>와 <부산일보>가 보도했다.

하지만 창간 초기였던 <한겨레>는 여전히 유통망이 약했다. 김주완도 자신이 근무하는 지역신문에 기사를 썼지만 사건 진상은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유통 파워를 체감한다. 그리고 고민 끝에 마산에 있는 지역 일간지 수습기자로 자리를 옮긴다.

 



중앙 언론의 '특종 도둑질'에 네트워킹으로 맞서다

김주완이 지역일간지 기자로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1997년 훈 할머니 고향 찾기 관련 보도다. 훈 할머니는 1997년까지 캄보디아에 살았는데 <한국일보>가 초청해 고향과 혈육 찾기에 나섰다.

이 과정에 대부분 언론이 따라붙었다. 한국어를 잊은 훈 할머니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단어 중에는 '진동'이 있었다. 김주완은 훈 할머니가 말한 '진동'을 마산 진동으로 확신하고 집중 취재했다. 옥편과 1리터짜리 환타를 들고 면사무소 호적등본 보관 창고에 앉아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인근 동네를 돌면서 노인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수소문했다.

1997년 6월 18일 김주완이 쓴 기사는 "훈 할머니 가족 찾았다"라는 제목으로 1면에 게재됐다. 그런데 그는 1997년 훈 할머니 고향 찾기 보도에서 보인 중앙매체들의 모습에서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대부분 자신들이 취재한 것처럼 말하더라는 것이다.

 

중앙에서 당한 무시는 김주완을 화나게 했다. 그 분노는 콘텐츠 생산은 물론 콘텐츠 유통까지 고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김주완은 2008년 봄이 되면서 바빠졌다. 블로그를 시작했다며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덩달아 자랑도 많아졌다. 그가 쓴 글은 다음 베스트 뉴스 첫 화면에 노출됐다.

김주완은 블로그라는 새로운 콘텐츠 생산 도구를 발견했고 더불어 이를 유통하는 전략에 대한 감각도 생겼다. 김주완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서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쓴 글은 이미 위력을 발휘했다. 소위 시사 분야 '파워 블로거'가 된 것이다.

거대 언론사들이 정보를 독점했던 때와 견주면 1인 미디어 등장 이후 공론장에 다양한 목소리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 다양성은 사회적 의제 설정 기능을 할 수 있을 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의제 설정은 이슈를 선택하고 거르는 작업을 거쳐 늘 주목받을 수 있어야 한다. 주목을 받을 통로를 만드는 것, 그게 저널리즘에 입각한 조직화 작업이다.

김주완은 '갱상도 블로거'를 조직해 인터넷에서 지역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그는 어떻게 '갱상도 블로거' 모임을 운영했을까. 그는 먼저 가까운 지인에게 권유하기 시작했다. 지역신문에 제보하는 것보다 블로그 활동이 훨씬 파급력이 좋다고 선전했다. 듣는 사람이 귀찮게 여길 정도였다.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함께 했던 박만순도 그중 한 명이다. 김주완은 기사를 쓰게 하고 출고된 기사를 다듬고 제목도 뽑아줬다. 박만순이 쓴 "한국에서 하나뿐인 경찰관 공덕비"라는 기사 제목도 김주완 작품이었다. 김주완은 박만순에게 '다음 블로거 뉴스' 머리에 노출된 것을 보게 하면서 위력을 느끼도록 했다.

김주완을 시작으로 <충청투데이> 홍미애, <중부매일> 김정미 등이 블로거 조직화에 열을 올렸다.

경남지역 블로거 모임인 '갱상도 블로그'와 충남 블로거 모임인 '따블뉴스' 등이 이런 고민을 통해 만들어졌다. 특히 김정미 기자가 지역에 쏟아부은 노력은 헌신적이었다. 청주 <중부매일> 기자인 김정미는 2009년 '충청도 블로그'라는 메타블로그를 구축하면서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SNS 강의를 진행했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 <충청투데이> 홍미애 기자 영향이었다.

 



2012년 말까지 김정미 기자에게 강의를 들은 수강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사무처장인 김용직도 교육을 통해 SNS 가능성을 알게 됐다.

SNS 네트워킹, 파업현장에도 활기를


이명박 정부 등장은 금속노조 전체판 정리를 예고했다. 2009년 8월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옥쇄파업이 경찰에 진압되면서 완성차 업체 노동자들은 파업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2009년 10월 창원 대림자동차 노조가 무너졌고, 2010년 2월 경주에 있는 발레오만도 노조도 와해했다. 경주지역 금속노조는 연대파업을 벌였으나 노조 핵심 간부들이 바로 구속됐다. 2010년 6월 구미 KEC에서는 여성 기숙사에까지 사측이 고용한 용역이 투입돼 부분 파업에 돌입한 조합원들을 끌어냈다. 그해 8월 대구 상신브레이크, 2011년 3월 광주 금호타이어까지 노동조합 탄압이 이어졌다.

그리고 두 달 후, 5월 18일 유성기업 사태가 벌어졌다. "밤에는 잠 좀 자자"며 주야 맞교대를 주간연속 2교대제(8시간 근무)로 바꾸자는 게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였다. 이날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회사는 직장폐쇄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사측은 용역을 고용해 조합원들의 출입을 막고 폭력을 행사했다.

직장폐쇄 이후 들어온 용역을 몰아내고 조합원이 다시 공장을 점거한 게 19일이었다. 이날 유성기업의 원청인 현대자동차의 총괄이사가 공장 안에 있는 차를 꺼내 달라며 키를 건넨다. 키를 받은 조합원은 그의 자동차 조수석에 있는 노란 봉투를 발견한다.

봉투에는 40페이지에 이르는 '노조 파괴 시나리오'가 있었다. 불법파업 유도 후 직장폐쇄 그리고 용역 동원, 공장 봉쇄와 폭력 유발로 공권력 투입, 결국은 노조 파괴까지 이르는 내용이었다. 조합원은 이 모든 내용을 캠코더에 담았다. 노조는 또 용역 차량도 발견했다. 차량 안에는 뇌물 리스트가 적힌 수첩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5월 30일 KBS라디오 주례연설에서 유성기업 사태를 거론하며 "연봉 7000만 원을 받는 근로자들의 불법파업"이라고 못 박았다. 거대 언론은 이 말을 그대로 받아썼다.

김용직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사무처장은 블로그에 "유성기업 용역깡패 동원 노조원 13명 차로 밀어붙여", "유성기업 사태의 배후 현대자동차(?)", "유성기업이 불법파업이라 공권력을 투입한다고?" 같은 글을 올렸다. 그가 쓴 글은 <중부매일> 지면에 실렸고, 트위터로 끊임없이 리트윗 됐다. 김용직을 자신의 '리스트'에 올리는 트위터 사용자들이 많아졌다. 유성기업 투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김용직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훗날 유성기업 조합원 500명은 직장폐쇄로 인근 논밭 하우스 안에서 살았다. 식사 반찬은 고추장과 김치가 전부였다. 조합원들은 후식으로 달달한 커피가 먹고 싶다는 넋두리를 하곤 했다. 김용직은 SNS를 통해 커피믹스를 후원받는 방법을 생각하고 별 기대 없이 시도한다.

일주일이 지나자 하우스에 택배 차량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커피를 비롯해 생수, 쌀, 감자 같은 식재료가 쌓였다. 유성기업 조합원은 SNS 위력을 체감하게 된다.

 



유성기업 조합원들은 대구KEC, 경주 발레오만도 같은 기업의 노조원들이 자신들처럼 SNS를 활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경주 발레오만도 조합원에게 왜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를 이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지역에서 잘 안 보는 매체"라고 답했다. 물론 이들이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포항MBC처럼 평소 익숙한 매체에만 한정됐다.

네트워킹만 활발했어도 '김형태 당선'은 막았을 텐데...

대구에서 활동하는 한 블로거는 2011년 7월 창원시가 개최한 전국 파워 블로거 간담회에 참석했다. 당시 창원시는 SNS로 간담회를 생중계했다. 이 대구 블로거는 박완수 창원시장은 만나봤지만 대구시장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지역 정치색으로 따지면 대구와 다를 바 없는 경남에서 이 같은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한 부산지역 신문사 기자가 경남에 발령을 받은 첫날 창원상공회의소를 찾았다. 창원상공회의소에서 그는 60대 대의원들이 행사 기획을 하면서 K-POP 가수 초청을 고민하는 모습을 본다.

"큰 기업이나 공단이 드문 부산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지요. 창원에 젊은 사람들이 많으니 60대가 행사를 기획해도 젊은 사람 수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나 봐요."


창원은 대구와 달리 공장과 기업이 밀집된 지역이다. 전국에서 몰려온 젊은 층이 인구 구성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블로그를 비롯한 SNS는 누가 할까. 제주를 사례로 살펴보자. 제주는 자연 풍광과 올레길 열풍으로 젊은 층 유입이 늘어나는 곳이다. 제주에서 SNS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주민이다. 제주 토박이들은 이미 연결망이 탄탄하기 때문에 SNS를 활용할 이유가 별로 없다.

2012년 4월 11일 19대 총선에서 경북 포항에 출마한 새누리당 후보 김형태가 제수씨 성폭행 미수 논란에도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새누리당 강세 지역이라는 설명만으로 납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한겨레> 기사 "새누리 김형태 후보 제수씨 성폭행 시도 파문…'성누리 끝판왕'"이 트위터를 통해 끝없이 확산되며 김형태 낙선을 예고했다. 하지만 김 후보는 당선됐다.


포항시민 대부분은 4·11 총선이 끝나고 '제수씨 성폭행 미수 논란'이 불거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포항지역에서 활동하는 한 기자는 시민들이 정보를 접할 시간이 촉박했다고 지적했다. 성추문 의혹이 제기된 것은 총선 3일 전이었다. 이날 김형태 후보의 제수인 최아무개 씨가 포항에 있는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 자리에는 대구·경북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매일신문>을 비롯한 언론사들과 포항MBC를 포함한 방송사들이 참석했다.

다음날 지역언론이 이 소식을 전했지만, 포항은 수도권과 달리 SNS 영향력이 약했다. 정보가 퍼지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더뎠다. 김형태 당선 소식이 전해지자 온라인에는 그 지역구 유권자를 비난하는 글들이 도배됐다.

이와 같은 편견 어린 중앙발 시각은 지역 주민에 대한 경멸과 무시로 이어진다. 즉, 네트워킹을 한정 짓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서울 지식인들은 교양과 학식이 넘쳤다. 사회 양극화, 노동자 문제, 경제민주화, 복지·교육 등을 언급할 때마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더 진보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들도 서울 밖 세상에 대한 생각은 비슷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우리나라는 KTX로 3시간이면 땅 끝까지 가는 좁은 땅덩어리를 가졌다."
"우리나라는 어디나 마트와 백화점이 소비문화의 중심이다."
"어디든지 아파트라는 거주문화가 비슷하다."
"이런 시대에 지역성과 지역담론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방기자들은 사이비이며 지역 토호다."

이러한 서울 중심의 시각은 전국으로 퍼진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밝혔지만 우리가 얼마나 갇혀서 생각하는지 스스로 알 길은 없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길을 따라서 전국을 떠나보기로 한다.

 

(다음 제5화 강릉의 위키리크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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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3화 최병성 목사

 


심규상 기자가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마지막 두 단어는 긍정과 공명이다. 공명은 강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퍼지는 현상이다. 관계에서 공명은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 사람과 함께하려는 것을 말한다.

긍정적인 요소가 공명을 일으킨다는 주장은 심규상 기자만 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칭찬, 유머, 희망 같은 긍정적인 요소를 지역에 투영하고자 노력하는 대표적인 지역신문이 <원주투데이>다.

특히 <원주투데이>가 진행한 '1004 운동'은 인상적이다. 원주시는 '모든 시민이 천사'라는 전제로 1004원 기부 운동을 펼친다. <원주투데이>는 기부자 명단은 매주 신문 광고란에 공개한다. 1004 운동은 기부가 주는 즐거움을 깨닫게 하는 선순환 구조로 유지된다.

 


심규상 기자가 대전·충남지역 시민기자를 움직이는 힘도 여기서 나왔다. <오마이뉴스>는 시민기자들이 자신의 사는 이야기를 뉴스로 송고할 수 있다. 심규상 기자는 결혼기념일 내용이면 전화로 축하했고, 누가 아프다면 위로했다. 관계 속에서 힘을 북돋우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박대용 <뉴스타파> 기자도 긍정과 공명 현상을 잘 이해한다. 박대용 기자는 SNS를 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느끼는 촉이 생겼다고 했다. 사람들은 좋은 정보나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내용을 제공하니 구독자가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심규상 기자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노력이 결과적으로 나를 위하는 것이며 집단으로 보면 '공익 추구'라고 했다. 하부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중앙집권적 사회구조 속에서 심규상이 제시하는 네트워킹은 특별하다. 예를 들어보자.

 


2012년 12월 대전에 있던 충남도청이 내포 신도시로 옮겨졌다. 새 청사가 생기면서 기자실이 도마에 올랐다. 일부 언론사 출입기자들이 기자실 독점을 선언했다. 심규상 기자는 다시 네트워킹을 가동한다.

우선 <오마이뉴스>에 이 문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올린다. "충남도청 새 청사 기자실은 독점-폐쇄형", "볼썽사나운 세종시청 기자실 자리다툼"이 게재됐다. 충남 지역신문도 이 기사를 그대로 게재하면서 연대했다.

충남 지역언론은 달마다 간담회를 하거나 하반기에 연수모임을 한다. 이때 심규상 기자도 모임에 참석해 고민을 듣는다. 서로에게 에너지를 꾸준히 보내는 노력은 결국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심규상 기자가 가동하는 네트워킹은 에너지를 자기중심으로 빨아들이는 게 아니다. 주변부를 강화하는 방식이다.

 



이는 MB 정부 시절 4대강 투쟁에서도 빛을 발했다.

최병성과 친구들, 네트워킹으로 4대강 사업 저격하다

 


최병성 목사는 4대강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친 블로거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유명하다. 4대강 사업은 전국에 걸친 문제였기에 투쟁을 함께 할 연결망이 필요했다.

최병성 목사는 그 연결망을 통해 자료를 입수했다. 그중 하나가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이 1983년 4월 연천군에 댐 건설 허가를 신청하면서 댐으로 인한 홍수 피해를 모두 책임지겠다고 쓴 각서다.

하지만 연천댐은 1996년 7월 31일, 경기 북부지역 폭우로 한 차례 무너졌고, 1999년 8월에 다시 붕괴된 후, 결국 철거됐다. 당시 지역주민들은 이 각서를 근거로, 현대건설로부터 보상을 받고자 했으나, 현대건설 측은 홍수 피해가 천재지변이라 주장하고 나섰다.

이 각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4대강 건설을 한다'는 명목을 비판하기 적절한 자료였다. 강에 모아둔 많은 물이 오히려 거대한 물폭탄이 되어 4대강 지역에 홍수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관련기사: '이명박 사장' 각서 쓴 연천댐도 2번 붕괴 4대강 사업 강행하면 더 큰 "물폭탄 재앙") 이 자료는 경기도 연천지역언론인 <연천닷컴>에서 제공했다.


최병성 목사는 연결망을 조직화 하는 과정에서 아쉬운 점을 발견한다.

"지금은 감각적인 시대잖아요. 아름다운 강이 파괴되는 현장을 사진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사람들이 사진을 찍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단체도 있었다. 최병성 목사는 먼저 부산지역 환경단체인 '습지와 새들의 친구'를 꼽았다. 이 단체 회원들은 2010년부터 패러글라이딩을 타며 공중에서 사진을 찍었다. <시사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 매체에서 4대강 사업을 비판하고자 낸 사진 대부분은 이 단체에서 제공했다. 2010년 금호강과 낙동강 합류지에 내려온 검은 흙탕물 사진, 2012년 강에 녹조가 퍼진 사진 등이 모두 이 단체 작품이다.


최병성 목사는 '습지와 새들의 친구'가 보인 열정을 높게 평가했다.

"낙동강 하구 새들을 관찰한 경험 덕에 생명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있어요. 그래서 분노했고 이 분노를 제대로 드러내는 방법을 찾으려는 열정이 있지요."

이와 더불어 최병성 목사는 정수근 대구환경연합 사무국장과 충남 공주에 있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김종술을 열정 있는 활동가로 꼽았다. 어떤 요소들이 이들을 4대강 사업 문제에 매달리게 만들었나? 부산, 대구, 공주 이 지역에서 네트워킹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 부분을 짚어보자.

 

 


 


최병성 네트워크의 핵심, 카메라

 

▲ 탐조 활동 중인 습지와 새들의 친구

도로를 닦는 토건사업 대부분은 관급공사다. 관급공사는 현금 확보에 가장 유리한 사업이다. 그리고 관급공사 인·허가권은 대부분 시·군 자치단체장 몫이다. 대구 MBC는 2004년 신년 보도특집 '도로 공화국'에서 재원 배분이 항만이나 철도가 아닌 도로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현실을 드러낸 바 있다. 이런 개발을 가장 비판하는 목소리는 환경단체에서 나왔다.

1993년 부산에서는 낙동강 하구를 가로지르는 을숙도대교 사업이 추진됐다. 사업이 발표되자 환경단체들이 반발했다. 하굿둑이나 낙동강대교가 있는데 굳이 자연을 파괴하면서 을숙도대교를 건설할 이유가 없다고 맞섰다.

이 과정에서 환경단체들은 개발논리에 맞서려면 더 치밀한 연구·조사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2000년 결성된 '습지와 새들의 친구'는 그런 고민이 낳은 단체였다. 2002년부터 이들은 매월 낙동강 하구를 탐사하며 철새 사진을 찍었다.

식생 변화나 지형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사진이었다. 이 같은 활동 경력은 4대강 사업 반대 활동에서도 빛을 발한다.

'습지와 새들의 친구' 결성 배경은 부산지역 난개발이었다. 부산과 가까운 경남 양산시는 2003년 3월 스님 지율이 단식 투쟁으로 맞섰다.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공사 노선 변경과 환경영향평가 재실시를 요구한 것이었다.

 



이제 대구로 가보자. 훗날 대구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하는 정수근은 2005년 대구를 대표하는 앞산에서 진행하는 터널공사를 반대하는 움직임을 주도했다. 대구가 교통이 열악한 지역이 아니라는 게 반대 이유였다.

경남 양산시에 살던 스님 지율도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2008년 연말부터 낙동강 답사를 시작한 것이다. 천성산 도롱뇽 투쟁이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4대강 개발이 진행될 낙동강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로 이때 정수근은 낙동강을 답사하는 스님 지율을 만나게 됐다.

 

▲ 출처 프레시안


지율은 큰 카메라를 둘러매고 다녔다.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하면서 낙동강 사진을 찍었다. 정수근은 지율을 차에 태워 낙동강을 함께 다녔다. 지율은 사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4대강 사업 전후 사진을 찍어 비교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2011년 대구환경녹색연합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정수근은 블로그에 대구 주변 낙동강 사진을 올렸다.

4대강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친 최병성 목사도 그랬다. 2000년 초반 강원도 영월 서강 근처에 쓰레기 매립장이 생기는 것을 반대하면서 서강을 돌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언론에 제공하면서 꾸준히 이슈를 만들어 매립장 계획을 백지화시켰다. 2007년 4대강 사업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 습관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제 금강이 파괴되는 과정을 사진으로 남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김종술로 넘어가 보자. 전라도 장성 출신인 그는 충남 공주에 살고 있다. 김종술은 공주에서 <백제신문>이라는 지역신문을 할 때 심규상을 만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가입했다.

그가 쓴 가장 유명한 기사 시리즈 중 하나는 '금강 물고기 떼죽음 13일간의 기록'이었다. 4대강 사업으로 금강에서 60만 마리가 넘는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고 이를 관찰한 것이다.

금강에서 물고기가 죽기 시작한 것은 2012년 10월 18일이었다. 김종술은 10월 21일부터 취재를 시작했고, 심규상 기자와 보도 방향을 의논했다. <오마이뉴스>에 "금강서 136cm 초대형 메기도 죽었다"는 기사가 떴을 때는 심규상은 김종술에게 메기 사진을 저작권 주장 없이 모든 언론에 제공하자고 제안한다. 10월 26일 이후 방송과 <한겨레>, <경향신문> 등에 이 사진이 보도된다.

▲ 대형 메기의 죽음-김종술 제공


보다시피 네트워킹은 어느 순간 중앙이 요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지속적으로 그 공간 안에서 사람들 간 교류와 성장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축척된 지역 에너지가 중앙과 결합하면서 폭발력이 생긴다. 선순환 구조를 갖추려면 반드시 중앙 에너지는 다시 하방으로 흘러들어 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 정치·경제·문화 등을 지배하는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바로 '중앙집권적 체제'이다. 이러한 순환 구조에 대한 개념은 약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나의 네트워킹이 얼마나 선순환적인 흐름을 갖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됐다. 우선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즐길 줄 몰랐다는 생각이 앞섰다. 사법피해자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어느 순간 황폐해진다는 느낌만 더했다. 하지만 사법피해자는 사법개혁 과정에서 첨병이 되는 귀한 차원이다. 심규상 기자를 보면서 인맥이 공공성을 갖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회에서 알게 된 사람은 개인 소유가 아니라 사회 소유였다. 마침 그 시점에 '정보공개청구강의'를 하러 다니는 박대용 기자를 알게 됐다. 박대용 기자는 사법피해자에게 정보공개청구 방법을 강의하고자 했다.

곧 서울에 있는 지역 MBC 노조 숙소를 빌려서 강의를 진행했다. 이후 '정보 비대칭성'을 극복하고자, 사법피해자를 위해 법원에 탄원서를 냈던 언론인에게 재능기부를 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이강택 KBS PD가 강의했다. 한 사법피해자가 물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왜 뉴스에 안 나오나요?"
"중앙집권주의라서 그렇지요."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시스템


자기가 사는 공간이나 주변에 관심을 두고 문제가 생기면 언론에 널리 알리고 해결하기에 지금같은 중앙집권적 시스템은 버겁다. 언론이 서울 발 목소리만 담아내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변화를 만들려면 좋은 기사만 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잘 유통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지역 목소리를 담을 수 있었던 <오마이뉴스> 시스템이 몰고 온 영향은 크다.

 


 

또 다른 조짐이 있다.

2003년 네이버가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개인이 콘텐츠를 생산하는 영역이 부쩍 넓어진다. 미디어 산업은 생산과 유통을 구분해야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블로그는 생산 수단이며 뒤에 등장하는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콘텐츠를 유통하는 역할을 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등장하기 전 미디어다음은 시사성이 짙은 블로그 콘텐츠를 한 곳에 모아 유통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2004년 통신원 제도로 시작한 작은 게시판은 2005년 '블로거 뉴스'(나중에 '다음뷰')로 발전한다.

블로거 뉴스를 대중이 인식한 계기는 '미디어몽구'(필명)가 만들었다. 미디어몽구는 2005년 뉴스에서 황우석 박사 입원 소식을 접한다. 황우석 박사가 입원한 서울대병원은 미디어몽구가 사는 동네와 가까웠다. 미디어몽구는 산책 삼아 병원으로 간다.

그리고 휴대전화로 병원 입구에 늘어선 방송 중계차를 찍어 블로그에 올렸다. 미디어몽구가 올린 동영상을 흥미롭게 여긴 다음 편집자는 이 콘텐츠를 첫 화면에 노출한다. 동영상 조회 기록은 10만 회를 넘긴다. 미디어몽구는 며칠 뒤 특종 상금으로 10만 원을 받았다. 포털이 제공한 유통 공간에서 블로거는 콘텐츠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이른바 '파워블로거'가 출연한 것이다. 그중 한 명이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기자다. 그는 처음 웹 개발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저질렀다. 블로그를 처음 만든 웹 개발자는 개인이 자유롭게 떠들다 보면 그 안에서 저절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완성할 것으로 기대했다.

따지고 보면 인터넷에서 지역성을 찾기는 어렵다. 국내에서 지역 담론은 그다지 응집력이 없다. 초창기 웹 설계자 역시 지역성을 고민하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사는 지역성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김주완은 '갱상도 블로거'라는 조직화를 통해 인터넷에서 지역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

그뿐 아니다. 2011년 말 사이판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 사이판을 관광하던 경상도 사람이 총격을 당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이가 없었다. 중앙매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김주완 기자는 인터넷에서 '동맹 블로거'를 조직해 이 사건을 이슈화했다.

김주완 기자는 이런 네트워킹을 어떻게 생각해낸 것일까? 김주완 기자 삶 속에서 네트워킹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4화-김주완 네트워킹)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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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2화 심규상 네트워킹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는 대전과 충남 지역을 담당한다. 심 기자가 네트워킹을 활용하는 방법을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을 통해 살펴보자.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홍콩 선적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 호'와 삼성물산 소속 '삼성 1호'가 충돌했다. 유조선 탱크에 있던 원유는 태안 해역으로 유출됐다. 신문웅 <태안신문> 편집국장은 해안에서 검은 기름이 육지를 삼킬 듯 밀려오는 모습을 보고 '절망'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됐다고 했다.

 

정부는 12월 11일 충남 태안군, 보령시, 서천군, 서산시, 홍성군, 당진군(현 당진시) 등 6개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현장에는 각 언론사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오마이뉴스>는 심규상 기자에게 취재팀장을 맡겼다. 심규상은 대전에서 태안으로 가야 했다. 대전~당진 고속도로는 2009년 개통됐다. 2007년 당시 대전에서 태안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거리였다. 심규상 기자는 사건이 발생하고 4개월 동안 태안에 세 번 갔다. 처음은 자원봉사자, 두 번째는 취재 중반 점검, 마지막은 격려 차원이었다.

하지만 당시 기사 생산 수는 <오마이뉴스>가 다른 매체를 압도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심규상 기자는 서산, 태안, 당진, 보령, 홍성 등에 있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활용했다.

각 지역 시민기자는 취재 요청에 헌신적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기 지역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하지만 애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이 있다. 결국 시간과 비용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심 기자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 비결이 궁금해 그에게 '네트워킹'을 주제로 강의를 요청했다. 2012년 겨울이었다.

 

 


이 다섯 단어만 기억하라


심 기자는 자기 삶을 풀어 네트워킹을 5개 단어로 정의했다. 운명, 접속, 관계, 긍정, 공명 등이다. 그는 삶 속에서 네트워킹을 구체화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 운명

심규상 기자는 충북 영동 두메산골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6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이를 맡을 사람이 없어 일을 하지 못하던 아버지가 교장에게 사정해 떠넘기다시피 입학을 밀어붙였다.

중·고등학교는 전라북도 설천면으로 다녔는데 텃새에 시달리곤 했다. 가난한 부모는 담배 수확을 늘려 자식 학비를 마련하고자 했다. 심규상 기자는 1986년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 입학한다. 가난과 학교 생활 모두 그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② 접속

1986년은 양담배를 처음 수입한 해다. 대학생들은 '양담배 수입 개방 저지' 데모를 했다. 부모가 담배를 재배하는 심규상에게 양담배 문제는 곧 학비 문제였다. 데모에 참석한 심규상은 다른 학생에게 물었다.

"담배 농사 몇 단 지어요?"

그 학생 집은 담배를 키우지 않았다. 담배 농가를 대신해 싸운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심규상은 동료들에게 자기가 데모에 참여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심규상은 학생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 급기야 교도소까지 가게 된다.

1990년 노태우 정권은 김영삼·김종필과 함께 민자당을 만든다. 이른바 '3당 합당'이다. 당시 서울에 있는 민자당 중앙당을 점거한 대학생 중에는 심규상도 있었다. 재판 당일 아버지가 서울구치소를 찾아왔다.

"오늘 판사님 앞에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해라. 안 그러면 호적에서 빼낸다."

그날 방청석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법정에서 구호를 외치고 판사에게 대들다가 사지가 들려나가는 막내아들을 봤다. 심규상은 반성문을 쓰지 않아 안동교도소에서 2년 6개월 만에 만기 출소했다. 심규상은 복역 기간 매주 한 통씩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적었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1992년 여름, 부모님은 출소하는 아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심규상은 고향인 충청도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큰절을 올리는 아들을 외면한 채 집 밖으로 나갔다.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밀려들었다. 어머니가 밥상을 내밀었다. 상에는 수육 한 접시가 수북하게 올라 있었다. 무심히 대문 쪽을 바라본 심규상은 조금 전까지 뛰던 개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개를 잡았던 것이다. 심규상은 눈물을 삼키면서 수육을 먹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아들을 이해했다. 심규상 기자는 '접속'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1993년부터 심규상은 재야단체에서 활동한다. 전교조 대전지부, 전교조 충남지부, 전국농민회 충남도연맹 등 30여 개 시민단체를 관리하는 대전충남연합 조직부장을 맡는다. 몇 년 뒤 '접속'은 충남 지역신문으로 이어진다.

 



③ 관계

충청남도에 두루 뻗은 차령산맥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런 지형은 마을 공동체 의식을 키운다. 특히 '리아스식 해안'으로 유명한 태안군은 불가사리 모양 지형이 특색이다. 이곳에서 지역신문은 마을 소식을 접하는 매개체로 유용했다. 이 지역 신문은 대부분 <한겨레> 창간 이후에 생겼다.


<당진시대> <태안신문> <홍성신문> <뉴스서천> <예산무한정보> <충남시사> 등 형편이 제각각인 충남지역 21개 지역신문들은 협회를 꾸렸다. 그리고 1998년 대전에 주재기자를 두기로 결정한다.

대전은 도청·교육청·도의회 등 충남지역 주요 행정기관이 밀집된 곳이다. 하지만 당진, 서천, 태안 등에 있는 지역신문사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대전으로 취재를 오는 것이 물리적으로 버거웠다.

협회는 원하는 취재를 대전에 거주하는 기자에게 부탁해 기사를 공유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협회는 이 같은 고민을 지역 시민단체와 공유하며 적임자를 찾았다. 그렇게 찾아낸 이가 심규상이었다.

심규상은 시민단체 업무가 끝나는 오후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작성한 기사는 21개 신문사에 팩스로 전송했다. 충남도청에 대한 비판 기사는 월요일에 발행하는 지역신문에 먼저 게재됐다. 그런데 같은 기사가 협회에 소속된 신문에 게재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각자 신문 발행주기에 따라 한 번 출고된 기사는 길면 2개월 뒤에도 게재되곤 했다.

공무원들 사이에서 비판 기사가 한 번 게재되기 시작하면 끝날 줄 모른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규상이 출고한 기사 대부분은 다른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이었다. 도지사 지시가 이행되지 않았다거나, 상급기관이 도청에 지적한 문제점 등이 심규상이 주로 다룬 소재였다.

심규상은 기사 쓰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시민단체에서 내는 보도자료를 기사로 작성해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다. '모든 시민은 기자'라고 선언하며 지난 2000년 출범한 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가입해 활동했다.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오마이뉴스>는 성장세를 탔다. 이때 대전참여연대를 비롯한 13개 시민사회단체가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를 창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연합뉴스>가 초창기 했던 것처럼 <오마이뉴스> 안에 '지역판'을 넣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오마이뉴스> 사이트에 '대전충남' 카테고리가 생긴다. 2004년 심규상은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주재기자를 제안받는다.

네트워킹이 없었다면 지역판도 없었다


심규상 혼자 대전, 충남을 모두 취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규상은 시작부터 네트워킹을 짜들어갔다.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취재와 기사 작성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가입하게 한다.

지역신문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중복 게재를 허용하는 <오마이뉴스> 정책은 이럴 때 장점으로 작용한다. 심규상은 주재기자로 활동하면서 풀뿌리 지역신문 기자들과 성심성의껏 소통하며 관계를 형성했다. 이때부터 '연락 체계'를 가동한다.

시·군별로 1·2연락처를 정하고 어떤 사안이 생길 때 제1연락처에게 취재를 부탁하는 형식이다. 1연락처가 사건을 챙길 수 없으면 제2연락처에게 전화한다. 취재 내용은 곧 정보가 됐고 시스템은 자리매김했다.


 

2004년 1월 27일 MBC 은 '친일파는 살아있다'를 방영한다. 사회적으로 과거사 문제가 불거졌다. <뉴스서천> 대표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대표인 양수철에게 한 가지 제보가 들어온다. 충남 예산 충의사 현판을 박정희가 썼다는 내용이었다.

1967년 건립한 충의사 본전에는 윤봉길 의사 영정이 봉안돼 있다. 현판은 박정희가 윤 의사 의거일에 맞춰 1968년 4월 29일에 내걸었다. 양수철은 2005년 3월 1일 새벽, 박정희가 쓴 현판을 직접 철거하기 위해 충의사로 갔다. 그러면서 심규상에게 취재를 부탁했다.

심규상은 현장까지 2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판단했다. 바로 예산지역 제1연락처에게 취재를 맡겼다. 그는 전교조 충남지부 회원이었다. 이날 <오마이뉴스>에 "박정희 친필 더 이상은 못 참아" 삼일절에 세 조각 난 충의사 현판이라는 기사가 게재됐다. 양수철 씨는 실형 6개 월을 선고받았다. 그가 대표로 있던 <뉴스서천>에는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화기를 들면 욕설이 쏟아졌다.

반면 과거사 청산의 일환이라며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사건이 알려진 후 예산군청 홈페이지는 각각 복원과 교체를 주장하는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의견으로 들끓었다. 한 달여 후 예산군은 박정희의 친필을 그대로 복원한 현판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내걸었다.

이 사건을 통해 충남 지역신문은 <오마이뉴스>와 기사 네트워킹이 시너지를 발휘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급한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올리면 댓글을 통해 반응을 보고 다시 보충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사는 객관성을 더욱 갖췄다. 이러한 협업은 2년 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도 빛을 발했다.

이런 네트워킹 구성은 <오마이뉴스> 본사가 요구한 게 아니었다. 심규상은 언론으로 지역을 바꾸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규상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즉 '긍정'과 '공명'이 네트워킹에서 핵심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다음 3화는 최병성 네트워킹입니다.)

 

 

※ 2016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글입니다.

 


 

서형작가 다른 연재물 ☞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서형작가 다른 연재물 ☞ 풍운아 황운하

 

서형작가 다른 연재물 ☞ 구겨진 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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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1화 나의 네트워킹

 

 

한 출판사에 초대받아 직원들과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출판사는 '나는 왜 진보(보수)가 되었나'를 주제로 인터뷰한 내용을 엮어 책을 내고자 했다. 내부 회의에서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 수 있는 작가로 내가 거론됐나 보다. 고마운 평가였다.

 

또 진보와 보수는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눠 생각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관심 밖이 됐다. 대신 그 자리를 '네트워킹'이라는 주제가 채웠다.

사회 구성원은 누구나 네트워킹을 한다. 돈을 빌리고, 어울려 놀고, 일을 맡기고 모두 네트워킹이다. 시민단체가 정부를 상대로 현안에 대한 연대 성명을 내는 것도 이른바 '사회적 네트워킹'이다.


내 첫 작품인 <부러진 화살>은 2007년 1월 발생한 '석궁 사건'이 배경이다. 당시 이 사건이 터지자 인권운동사랑방, 구속노동자후원회, 교수노동조합 등 단체들이 모였다. 이후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 단체들은 모였다.

이들을 지켜보면서 생긴 의문은 '확장성'이었다.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같은 소셜네트워크 (Social Network Service) 기반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확장성을 보장한다. 이런 네트워킹 기반은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운동이 확장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이는 기술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문제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어느 순간 네트워킹을 한정하는 게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매트릭스> 주인공 네오처럼 삶에서 불쑥 의문은 들지만 우리가 얼마나 갇혀서 생각하는지는 스스로 알 길이 없다. 네오도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을 삼키고서야 진실을 마주하게 됐다. 나는 이 글이 독자에게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석궁 사건'의 숨겨진 이야기

▲ 1인 시위 중인 강내희 교수

 

이야기는 네트워킹에 눈을 뜨게 된 경험부터 시작한다. 2008년 6월 석궁 사건 항소심이 기각되자 원고 쪽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당시 민교협 원로였던 김세균 교수는 선고하는 날까지 대법원 앞에서 교수들이 릴레이 1인 시위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점심때 한 시간 정도 피켓을 들다가 가는 일이었지만, 먼 지역에 있는 교수에게는 하루를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잘 이어지던 1인 시위는 17일째에 고비를 맞는다.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로 모든 이슈가 몰리던 때였다. 시위에 동참할 교수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울지역 교수 1000명에게 연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교수 두 명에게 답장을 받았다.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답변을 읽고 생각했다. 이런 고민은 처음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제안할 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바로 동참할까?'

특정 사안에 대한 관심이 높다면 동참이 쉬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모든 분야에 관심을 두지 못한다. 답은 김세균 교수에게 있었다. 당시 17일 동안 시위를 끌고 온 것은 김세균 교수 인맥이었다.

1인 시위가 이어지는 동안 매일 시위에 나선 교수와 얘기를 했는데 정작 '석궁 사건' 당사자인 김명호 교수와 친한 사람은 없었다. 평소 존경하는 김세균 교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세균 교수(왼쪽)

이처럼 상대가 나를 좋아하면 연대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음 고민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것인지로 넘어갔다. 경청, 존중, 이해 같은 덕목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사람들을 만나는 태도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석궁 사건'을 거치면서 깨달은 것은 이 정도다.

 



'석궁 사건'을 계기로 2009년 서민들이 벌이는 소송 전쟁으로 관심사가 넘어갔다. 이는 두 번째 작품 <법과 싸우는 사람들> 배경이 됐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이 주제에 매달렸는데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당시 취재원은 임정자(1943년생)씨다. 힘은 없지만 신념 하나는 강한 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은 현실에서 파멸로 향하는 기차였다. 힘없는 그녀가 강하게 부딪히는 상대는 현실에서 힘을 쥔 사람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A는 법을 어겨도 검찰에 가면 벌금 백만 원에 그쳤고, 그걸 또 정식재판청구를 하여 법원에 가면 무죄를 받았다. 그 판결문을 다시 지상파 뉴스가 받아주며 A의 기세를 높였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시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검찰이 항소한 상태였다. 나는 언론사를 찾아다녔는데, 기사 거리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언론은 서울대 출신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범한 억울한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론과 연대는 기대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확인한 네트워킹의 위력

이 상황에서 법원에 제대로 된 판결을 해달라는 신호를 보낼 방법은 뭘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터 5부까지 부장검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말도 안 되는 사안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검사님! 부패검사의 실력을 보여줍시다'라고 썼다.

그랬더니 검찰이 반응을 했다. A의 항소심에 내가 보낸 편지를 추송서(재판과 관련된 일체의 추가 서류)로 제출한 것이다.

 


내가 검찰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검찰은 이를 추송서로 법원에 넘겼다.

 

 

 


결국 A는 항소심에서 50만 원 벌금형을 받았다.

세상에 '악의 축'은 없었다. 사안에 따라서 누구와도 네트워킹이 가능했다. 그걸 더욱 절감하게 된 계기가 영화 <부러진 화살>이다. 당시 저작권 문제로 나는 마음 고생이 심했다.

사법부를 비판하는 영화인데, 영화사와 갈등을 못 풀어 이 문제를 법원으로 끌고 간다면 나는 대중에게 욕먹게 돼 있었다. 밤새 고민하다가 법조계 관련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미 책 <부러진 화살>을 읽어본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유리한 답변을 했는데, 그들 중에는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판사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답변을 모아서 영화사에 보냈다.

 



2011년에는 다른 일도 많았다. 2011년 6월 <법과 싸우는 사람들> 주인공 임정자씨가 법정 구속됐다. 신념 하나로 살아온 그는 재판장 앞에서도 절대 굽히지 않았다. 무거운 형량이 선고됐다.

당시 임씨는 사선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인은 구치소 접견에서 임 씨 신념을 이해해줬지만, 임씨는 그를 해임했다. 왜 그랬을까? 막상 변호인이 쓴 항소이유서 내용이 딴 판이었기 때문이다. 항소이유서에는 임정자 씨가 구치소 내에서 반성하고 있고,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 가득했다. 사법피해자 경험을 들으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실 대다수 사람은 감형을 받으려면 선처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을까? 나는 당시 임정자씨가 신념을 지키면서 집행유예로 나올 방법을 고민했다. 통상 법원은 여론에 민감하다고 한다. 그래서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언론인들 탄원서를 모아서 왕창 집어넣었다.


탄원서 내용에는 '잘못했다'는 구절이 들어 있지 않았다. 연로한 사람을 감옥에 두는 건 가혹하니 다른 방안을 강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임정자 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2012년 여름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몹시 지쳤다. 약 5년간 피해자들만 만나다 보니, 더는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 해 동안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서 대한민국 네트워킹 대가들을 만나게 된다. 우선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주재 기자인 심규상을 소개한다.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다음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  2016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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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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