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제2화. 밤의 집회에서 혼자

 

 

수사관 X는 2010년경 서울 종로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이하 지능팀) 소속이었다.

 

수사관 X는 힘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요청을 받으면 자기 이름부터 올렸다. 그가 스폴(SPOL) 팀에 가입한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았고 영어로 뭐라 하는데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들어보니 꽤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었다.

 

“내 이름 넣어라.”

 

 


수사관 X는 법정에서 조현오 청장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분’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검찰은 수사관 X가 ‘틱스님’이라는 아이디로 댓글을 다수 작성했다고 말했다.

 

집회 시위자를 비난하여 시위 동력을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었다. 이는 조현오 청장 지시를 따른 것이고 더 나아가 이명박 대통령 국정 방향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노컷뉴스 인용

 

그런데 틱스님은 자발적 댓글이었다고 주장했다. 수사부서는 ‘댓글 평가’ 자체가 없다고 덧붙였다.

 


틱스님이 속한 지능팀은 집회 관련 수사도 담당한다. 2010년은 집회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집회가 격렬해져 체포 상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현장에서 대기하는 동안에는 여유가 있다.

 

동영상을 보기도 하고 기사를 읽고 심심풀이로 댓글을 쓰기도 한다. 시위가 밤을 넘겨 진행되면 지능팀 수사관도 야외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김주완 블로그 제공

 

2011년 6월 대학생 반값 등록금 시위 때도 현장에 있었다.

 

대기 중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데 검경 수사권 조정 논란이 한창이었다. 틱스님은 한 뉴스에 댓글을 달았다.

 

<조삼모사, 검찰의 보복이 무서운 것인지! 경찰이 힘이 없는 건지! 나 원 참! 검찰 개혁한다는 말은 몇 년 전부터 들었지만...... 나미 아미타불> (수사권 옹호 범죄 댓글)

 

집회가 격렬해지면서 불법 행위자가 나오자 현장에서 체포를 진행한다. 수갑을 채우자 시위대는 경찰에게 항의한다. ‘인권 침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틱스님은 자기 집에서 도둑을 잡으면 수갑을 채우지 않고 친절하게 안내하라는 말인가 묻고 싶지만 묵묵히 할 일만 했다.

 

김주완 블로그 제공

 

시위대는 ‘폭력 경찰’ 구호를 반복한다. 오히려 맞는 쪽은 경찰인데 말이다. 틱스님은 집회에서 받은 짜증을 댓글로 풀었다.

 

<차 밀려 죽겠는데 너희들 뭐 하는 짓이야? 니네 집 앞에서 해라.> (집회시위 비난 댓글)

 

반값 등록금 시위에 대학생이 몰려나왔다. 몇몇 취한 듯한 대학생은 욕설을 쏟아냈다. 틱스님은 또 댓글을 달았다.

 

<등록금 비싼 것 사실임. 나도 대학생 곧 생김. 그래서 집회 현장 갔더니 인신 비난에 입에 담지 못 할 저질 언행...... 매우 중요한 정책의 장임에도, 이런 저질 난장판이 없었습니다. 목적이 모욕인지 등록금인지. 대학생인지 주정뱅이 싸움장인지 헷갈립니다.>(집회시위 비난 댓글)

 

당시 틱스님은 그때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10년이 흐르면서 사회 인식을 전환할 수 있는 사건(대한항공 땅콩 회향 사건)이 벌어지고, 문제 행위를 규정할 개념과 용어가 생겨난다.

 

방송화면캡처

 

틱스님은 법정에서 2011년 전후로 감정적인 댓글을 올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집회 현장에서는 경찰이 ‘을’이었거든요. ‘아주 처참한 을!’. 그 사람들로부터 당한 갑질, 지금 말하면 갑질이지요. 그리고 또 다른 경찰관들이 당하는 상황을 봤을 때 당장 내 눈앞에서 보이는 저 짜증 나는 상황, 저 갑질을 보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올렸다.”

 

 


 

필자는 지금 이 사건이 터무니없는 수사였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런 점이 의문이다.


 

 

이 사건은 2010년 8월에서 2012년 4월 사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조현오가 서울지방경찰청장과 경찰청장을 지낸 시절이다. 당시 모든 서울지역 일선 경찰서에는 스폴팀원이 있었다. 

 

서울강북경찰서도 예외일 수 없다. 2010년 6월 채수창 서울강북서장이 조현오 식 ‘성과주의’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댓글 공작 활동 언급은 없었다. 

 

노컷뉴스 인용

 

경찰 댓글 공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는 ‘수사권 조정’이었다. 경찰청이 주도한 이 작업은 전체 범죄 댓글 중 20%를 차지했다.

 

2011년 6월 황정인 경찰청 경정은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수사권 조정 합의를 주도한 조현오 청장을 거세게 비난했다.

 

한겨레기사.

 

하지만 이 인터뷰에서도 댓글 작업 관련 언급은 없다. 조현오에게 큰 약점이 될 사건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물론 댓글 공작은 이들 언급 여부와 상관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지난 10여 년간 아무런 소문도 없이 묻힐 수 있었을까?

 

혹시 경찰 조직 명령체계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조현오 청장은 와일드애니멀이나 틱스님 둘 다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일선 직원에게 명령을 전달하려면 체계가 있어야 한다. 즉 조현오에게는 공모자가 필요하다.

 

공모자를 알아내려면 일선 직원부터 조사해야 한다. 하기 싫었는데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진술이 쌓인다. 이들을 피해자라고 부른다.

 

아시아투데이 인용

 

이러한 피해자가 누구에게 명령을 받았는지 선을 타고 올라간다.

 

경찰청 정보국 조직도를 살펴보자. 조현오 경찰청장 아래로 차장-정보국장-정보심의관-정보2과장-계장 순서다.

 

경찰청은 실무가 계장 중심으로 돌아간다. 서로 각기 다른 기능을 맡은 계장끼리 스스로 협조하고 판단하는 부분까지 상급자가 신경 쓸 틈이 없다.

 

하지만 댓글 공작 지시라면 윗선에서 계장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MBN 방송 인용

 

전에 모시던 상사를 데려다가 강도 높게 다그치는 수사는 어느 조직이든 재미도 없거니와 쉽지도 않다.

 

한마디로 경찰 조직을 들쑤실 수사를 하지 않는 한 밝히기 어렵다.

 

강도 높은 적폐 청산을 주문한 청와대와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경찰 조직 기강을 바로 세우겠다는 이철성·민갑룡 경찰청장 의지가 받쳐 줘야 한다.

 

민갑룡(좌)-이철성(우) 경찰청장. 뉴스1 인용

 

여기서 조현오 청장과 스폴팀 운영 공모자로 걸려든 이는 당시 정용선 정보심의관이다.

 

정용선은 경찰대 3기 수석 졸업생으로, 필자도 조현오로부터 정용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2015년 1월 9일 권기선 부산경찰청장이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보고서를 늦게 제출한 과장에게 욕설을 한 게 문제가 됐다.

 

MBN방송 인용

상사는 직원 업무 능력을 어떻게 파악할까. 조현오는 업무 관련 질문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업무를 어느 정도 꿰고 있는지 안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조현오가 보기에 정용선은 업무 능력이 탁월했다. 청장이 바뀌어도 정용선이 늘 승승장구한 이유다.

 

물론 정용선이 상사 취향을 잘 맞추기도 했을 테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상사 댓글 취향까지 추가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용선 심의관은 언제 어느 시점에 만나서 조현오 청장 댓글 지시에 ‘무조건 따봉’이라고 외쳤을까?

 


 

첫 번째 가능성은 오전 8시 전, 경찰청장 보고 시간이다.

 

7시 50분쯤 경찰청장 집무실 앞은 보고를 앞둔 과장들이 줄을 서 있다. 본청 과장은 총 45명 정도 되기 때문에 보고뿐만 아니라 결재도 오전에 받는다. 아침에 많을 때는 20~30명이 대기한다.

 

뉴시스 인용

조현오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오전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명했다. 하지만 과장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자주 봐야 정이 쌓이고 눈도장도 찍는다. 승진이나 좋은 보직을 위해서는 사소한 보고라도 들고 가야 한다.

 

과장 보고가 끝나면 맨 마지막 정보심의관 보고가 기다린다. 정보심의관이 마지막 순번인 것도 관행이다.

 

바로 이때 조현오가 정용선에게 이슈를 정해주고 댓글 지시를 내렸다는 진술이 나왔다. 정용선이 청장 보고 후 다시 사무실에 들러서 계장에게 사이버 대응 지시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에 정용선은 이렇게 답했다.

 

“시간도 안 되고, 말도 안 되고, 예의도 아니고…”

 

이유는 이렇다. 정보심의관 보고가 끝나면 바로 8시 30분 경찰청장 주재 국관회의가 시작된다.

 

노컷뉴스 인용

회의실은 경찰청장 직무실 바로 옆에 있다. 그곳에는 이미 국장과 주요 과장이 앉아 회의를 기다리고 있다. 보고가 끝난 정보심의관이 바로 국관회의실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바로 청장이 입장한다.

 


두 번째 댓글 지시 가능성은 바로 국관회의를 통해서다.

 

회의에는 각 국장들이 그날 그 주에 해야 할 일이나 문제가 된 사안을 청장에게 순차적으로 보고한다.

 

연합뉴스 인용

청장은 보고한 사안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는 취지로 말한다. 이어 차장이 당부 사항이 있으면 말을를 하고 마친다. 국관회의에는 기획조정과 직원도 참석한다. 그날 청장 발언을 기록해 경찰 내부망에 공유한다.

 

이 내용은 현직 경찰관은 누구나 조회할 수 있다. 이 기록은 모두 남아 있는데 여기에 정보심의관에게 지시한 내용은 없다.

 


 

마지막은 따로 불러서 은밀히 지시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다. 공문과 지시가 서로 다르면 13만 경찰 조직을 이끌 수 없다.

 

국관회의에서 청장 지시 사항을 받고 국장회의, 과장 회의, 계장과 실무진 회의를 통해서 각 기능 업무를 진행한다. 한 마디로 경찰은 시스템에 의해서 운영되는 조직이다. 

 

경찰청 주요 실무진은 계장이다. 당연히 댓글 업무 실무도 계장이 담당한다. 그러나 당시 정보국 계장 진술을 보면 정용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익명의 댓글 대응과 관련해서. 제가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이슈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가족들도 댓글을 달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기에 ”업무적인 지시에 가족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라고 문제 제기했던 기억은 난다. 가족들에게 댓글을 달라는 말이 무슨 말이겠는가. 경찰관임을 밝히지 않고 일반인이 마치 경찰에 우호적인 댓글을 작성하고 있는 그런 의미인 것이지요.”

 

반면 정용선은 이렇게 기억했다.

 

“그때 인터넷에서 수사권 관련해서 <옳다/아니다.>라는 라이브폴(Live Poll)이 있었어요. 계장들 다 잔뜩 있는 자리에서 어떤 계장이 “그거 했다.”라고 하니까 다른 계장이 “나도 했다.” “나도 찬성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제가 농담조로 “너는 가족도 없냐. 가족 이름으로 한 명 더 하면 되지”라고 말했던 거죠. 왜냐하면 (live poll은) 실명으로 하기에 한 번 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농담조로 “너는 가족도 없냐.”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 저렇게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와전된 게 아닌가.. "

 

이처럼 10년 전 기억은 서로 어긋나고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당시 공문 내용이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청 특별수사단은 압수수색을 통해 문서를 잔뜩 파헤치기 시작했다.

 

연합뉴스 인용

 

한편 퇴직한 정용선도 다시 업무를 재개했다. 

 

 

(다음 3화. 참여정부가 댓글에 빠진 날)

 

 


 

P.S) 위 제목은 홍상수 감독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차용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나를 케어해줘. 연재 순서.

⦁제1화. 보험성뇌물의결말 (폭로자 김학성 시선)

⦁제2화. 제말이그말입니다 (김학성 동업자 한수찬 시선)

⦁제3화. 앞뒤좌우완벽하게 (김학성 구치소 동료 오강수 시선)

⦁제4화. 부친사망일의진실 (김학성 전 사업 파트너. 이문재 시선)

⦁제5화. 난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변호사 시선)

⦁제6화. 대검케어가최고야. (작가 시선)

 

 

 

 

 

 

 

 

 

<김형준 '스폰서 검사' 사건 재판 추적기> 제4화. 부친 사망일의 진실 – 이문재 시선.

 

 

내 이름은 이문재다. 김학성과 나는 2000년쯤부터 돈거래를 했다. 김학성이 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김형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말만 하면 김형준이 불법 소프트웨어를 단속해주기 때문에 용산에서 내게 잘못 보이면 큰 일 난다. 내가 여기를 꽉 잡고 있다.”

 

 


 

김학성은 2012년 5월 출소하고 나서 나에게 투자를 요청했다. 이때도 김형준 이야기를 꺼냈다.

 

“김형준 검사가 한국에 있었으면 내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형준 검사가 외국에서 돌아와서 억울한 이야기를 듣고 해결해 줘서 나왔다.”

 

2012년 7월쯤 한 술자리에서 김형준을 소개받았다. 김학성이 김형준에게 고마워서 대접하는 자리 정도로 짐작했다. 물론 김학성은 검사 친구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테다.

 

나는 출소한 김학성과 사업을 함께 운영했다. 2012년 7월 ‘KK인터네셔널컨퍼런스’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나는 대표이사로서 투자와 차용을, 김학성은 사업을 도맡았다.

 

출소 직후 김학성은 사업자 이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나에게 사업자등록과 투자를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이 이것은 다 가지고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우리는 사업을 하겠다.”

 

회사를 설립하자 김학성에게 법인카드를 내줬다. 김형준과 술자리를 함께 할 때도 김학성은 술값을 법인카드로 계산했다. 불쾌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결국, 내 돈으로 술값을 계산하면서 온갖 생색은 김학성이 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김학성에게 술값을 법인카드로 결제하는 것은 자제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김학성은 나와 돈거래 중 일부가 김형준 뇌물로 흘러갔다고 했다.

 


 

나는 법정에서 김학성과 돈거래 부분을 증언해야 했다. 증언 당시 법정에서 장부를 공개했다. 빌려준 돈 사용처를 꼼꼼하게 적어둔 장부였다.

 

"김학성과 김학성 처 딸, 휴대폰 통신비, 쌀값, 병원비, 학원비, 아파트 관리비, 보험료, 생활비, 졸업비"

 

빌려준 내역이 계속 나열됐다.

 

"2013.4.15. 70만 원 김학성 부친 병원비, 2013.7.25. 54만 원 김학성 부친 간병비."

 

이어진 내 발언에 법정이 소란스러워졌다. 김학성은 분명 2012년 12월 14일 김형준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형준아. 아버님이 가셨다. 당신 유언대로 고향에서 조용히 장례 치르고 마지막 길 가신다. 나중에 보자. 통화하자’.

 

 

김학성은 생존해 있는 아버지를 왜 돌아가신 분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김학성이 이 문자를 보냈던 시기 정황을 보자.

 


 

2012년 5월 막 출소한 김학성은 생활비도 없었다. 하루는 연체된 카드대금청구서와 휴대전화 문자를 내(이문재)게 보여줬다. 강제집행이 예정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학성은 전 처 이름으로 카드를 사용했는데 반드시 막아야 한다며 통사정을 했다. 당시 나도 힘들었던 시기여서 돈이 없었다. 그래서 대출을 받아 2012년 10월 15일 김학성에게 1000만 원을 송금했다. 통장에는 마이너스 1155만 원이 찍혔다.

 

검찰 조사에서 김학성은 이렇게 빌린 1000만 원 중 500만 원을 오강수 가석방 청탁을 위해 김형준에게 줬다고 했다. 상상도 못 한 일이다. 1000만 원 용도는 당연히 연체된 카드 대금 결제였다.  물론 김학성은 재판에서 카드 연체 이유를 김형준 접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1000만 원을 빌린 김학성은 이틀 뒤 술집 통채를 빌려 생일파티를 열었다. 그 비용을 누가 지불했는지도 이 사건에서 쟁점이 됐다. 법정에서 김형준 쪽 변호인이 물었다.

 

“그런데 이틀 뒤, 2010년 10월 17일 김학성은 <업타운걸>이라는 술집을 빌려서 생일파티를 하였고 200만 원 정도 비용이 소요됐어요. 이문재 씨가 김학성을 위해서 마련해준 것으로, 결재도 이문재 씨가 하였다고 했는데 김학성 진술이 사실인가요?”

 

나는 사실이 아니라고 답했다.

 

 

 

이처럼 김학성은 출소 후에도 경제적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고급술집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  당연히 술값 독촉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김학성은 내게서 빌린 1000만 원 중 500만 원을  김형준에게 줬다고 했다. 장소와 날짜도 특정했다.  비긴어게인이라는 고급 술집에서 2012년 11월 15일에서 12월 14일 사이라고 진술했다.

 

재판에서 김형준 변호인 측은 이를 탄핵하기 시작했다.

 

우선 김학성은 2012년 11월 1일 ‘비긴어게인’에서 외상으로 술을 마셨다. 12월 14일에는 김형준과 바로 이 술집에서 만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비긴어게인 사장은 11월 13일부터 12월 12일까지 술값 결제를 독촉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기간 동안 김학성은 “언제 처리해주겠다”라는 답변을 하며 다른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당시는 오강수도 김학성에게 사람을 보내서 여비서 횡령 문제를 김형준에게 처리해 달라고 재촉하던 시기다.

 

2012년 12월 14일 오전 10시 김학성은 문자 메시지 하나를 받는다. 읽어보니 은행이 보낸 카드 연체 내용이었다. 그날 김학성은 김형준에게 부친 사망 사실을 전했다.

 

김형준 변호인들은 김학성 부친 기일이 언제인지 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명예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못 드립니다.”

 

급기야 재판장이 당시 “살아계셨는지 사망한 상태였는지 그 사실관계를 확인해”달라고 요구 했다. 김학성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상태”라고 짧게 답했다. 재판장은 “살아계신 상태였습니까?”라고 재차 물었다.

 


 

내(이문재) 기억에도 김학성 부친 사망일은 2013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2014년 7월 김학성은 나를 회사에서 쫓아냈다.

 

당시 김학성이 사업을 하면서 KK인터네셔널컨퍼런스가 거래처 문제로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됐다. 나는 대표이사였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김학성은 대표이사가 없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나에게 2015년 2월까지만 피해달라고 했다. 나중에 문제가 해결되면 내가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놓겠다고 했다.

 

그 사이 김학성이 KK게임즈를 만들었는데 나는 전혀 관여하지 못했다. 그래도 김학성을 사기죄로 고소하지 못했다. 김학성이 부장검사를 친구로 뒀다는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사업가에게 검사 친구는 어떤 의미일까?

 

김학성은 구속 기간 대검찰청에 소환돼 김형준이 성공한 모습을 봤다. 김학성은 2012년 5월 2일 만기 출소하고 열흘 뒤부터 2개월 동안 김형준을 10회 만났다.

 

김학성은 재판에서 부장검사 친구인 김형준에게 잘 보여 사업 재개 과정에서 도움을 받고 싶었던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시인했다. 김형준 주변에는 좋은 인맥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변에 부장검사 친구인 김형준 얘기를 자주 한 것도 투자를 끌어내려는 의도였다고 인정했다. 부장검사와 친구 관계를 유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출소 후 고교 동창생들 인맥 복원에도 도움이 됐다. 김형준은 동기들 중에 가장 우수한 친구였다. 그래서 동창생들은 형준이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자리에서 김학성은 김형준과 친근하게 통화하며 옆에 있는 동기를 바꿔주기도 했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2016년 9월 김학성이 오랫동안 김형준 스폰서 노릇을 하면서 수 억 원 여치 술도 사주고 돈도 줬다는 기사가 신문과 방송에 나왔다. 이 뉴스에 동창들 사이 전화통에 불이 났다. 한진우, 김형준. 김학성 모두 고교 동창이기 때문이다. 법정에도 동창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필자는 본의 아니게 김형준⦁김학성 동창들과 안면을 트게 됐다.

 


 

그중 대기업에 다니던 K가 증인으로 나왔다. K도 동창회에서 김학성을 알게 됐다. 김학성은 동창 K에게 사업 관련하여 K 인맥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K는 김학성이 평소에 술자리에서 계산하는 것을 많이 봤다. 김학성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선산과 주식이 있어 돈이 많다는 건 평소에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김학성이 김형준에게 뇌물로 술을 사줬는지 궁금했다. 동창 K는 김학성이 구속되자 면회를 갔다.

 

“네가 뇌물이라고 줬다는데 맞냐?”

“내가 5억 8000만 원 넘게 술을 사줬는데 형준이 생각해서 줄이고 줄여서 5800만 원이 된 것이다.”

 

김학성이 이렇게 큰 소리를 친 반면, 당시 김형준 검사는 공황 상태였으며 기억을 잘 못했다. 변호인들이 “사실이 뭐냐?”라고 물어보자 김형준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술 마신 것은 맞다. 그런데 둘이 간 적 없고 여러 명 있었다. 돈 받은 것은 없었다.”

 

김형준은 둘이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가보면 꼭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당황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체 진실이 무엇일까? 이제 김학성에게 다시 자세히 물어볼 차례다. 그런데 피고인 신문에서 김학성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재판장에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재판장님, 제가 위증했습니다.”

 

김학성은 공소장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며 사실대로 털어놓겠다고 나섰다. 내용은 이랬다.

 

김학성이 체포 될 당시 알코올 중독자처럼 매일 술을 마셨다. 그런 상태에서 긴급 체포돼 대검찰청에서 매일 새벽 2~3시까지 조사받았다. 검찰이 김형준 비위를 무마하고자 자기를 구속했다고 확신했다. 검찰과 김형준을 향한 적개심으로 가득했기에 대검찰청 특감팀 수사 의도에 맞춰 진술했다는 것이다.

 

“김수천 부장검사와 진경준 검사는 억 단위인데, 김형준과 저는 해봐야 몇 천만원이다. 금액을 올려야 한다. 다른 거 없느냐”

 

김학성은 검찰 압박을 고스란히 느꼈다고 했다. 피고인 신문에서 김학성이 자백한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  술 먹은 사실은 맞다. 향응접대는 아니다.

●  지금까지 김형준에게 17년 동안 구체적인 청탁 한 적 없다.

●  김형준에게 보낸 돈은 계좌로 보낸 500만 원과 1000만 원 이외는 없다.

●  증거인멸 관련해서 휴대폰 초기화는 박수종 변호사 지시다.

 

검찰과 변호인 모두 하필이면 1심 재판을 마무리하는 날 이런 자백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김학성은 이렇게 답했다.

 

“7월 9일 박수종 변호사가 와서 증언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형준이와 저는 박수종 변호사 농간에 놀아난 것입니다. 아마 형준이는 몰랐을 것입니다. 형준이도 박수종 변호사가 하자는 대로 했을 것입니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오른쪽이 박수종 변호사

 

김학성은 박수종 변호사가 핸드폰 초기화를 지시했고 김형준과 자기 사이에 끼어서 사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제 박수종 변호사를 만나봐야겠다. 박수종은 검찰 출신이다. 김학성은 김형준이 그를 ‘형사사건의 베스트’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수종은 법정에 나와 정반대 증언을 한다. 박수종 증언 내용을 요약해보면 ‘형사사건 베스트’는 오히려 김학성이었다.

 

(다음 5화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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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2화 심규상 네트워킹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는 대전과 충남 지역을 담당한다. 심 기자가 네트워킹을 활용하는 방법을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을 통해 살펴보자.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홍콩 선적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 호'와 삼성물산 소속 '삼성 1호'가 충돌했다. 유조선 탱크에 있던 원유는 태안 해역으로 유출됐다. 신문웅 <태안신문> 편집국장은 해안에서 검은 기름이 육지를 삼킬 듯 밀려오는 모습을 보고 '절망'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됐다고 했다.

 

정부는 12월 11일 충남 태안군, 보령시, 서천군, 서산시, 홍성군, 당진군(현 당진시) 등 6개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현장에는 각 언론사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오마이뉴스>는 심규상 기자에게 취재팀장을 맡겼다. 심규상은 대전에서 태안으로 가야 했다. 대전~당진 고속도로는 2009년 개통됐다. 2007년 당시 대전에서 태안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거리였다. 심규상 기자는 사건이 발생하고 4개월 동안 태안에 세 번 갔다. 처음은 자원봉사자, 두 번째는 취재 중반 점검, 마지막은 격려 차원이었다.

하지만 당시 기사 생산 수는 <오마이뉴스>가 다른 매체를 압도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심규상 기자는 서산, 태안, 당진, 보령, 홍성 등에 있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활용했다.

각 지역 시민기자는 취재 요청에 헌신적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기 지역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하지만 애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이 있다. 결국 시간과 비용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심 기자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 비결이 궁금해 그에게 '네트워킹'을 주제로 강의를 요청했다. 2012년 겨울이었다.

 

 


이 다섯 단어만 기억하라


심 기자는 자기 삶을 풀어 네트워킹을 5개 단어로 정의했다. 운명, 접속, 관계, 긍정, 공명 등이다. 그는 삶 속에서 네트워킹을 구체화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 운명

심규상 기자는 충북 영동 두메산골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6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이를 맡을 사람이 없어 일을 하지 못하던 아버지가 교장에게 사정해 떠넘기다시피 입학을 밀어붙였다.

중·고등학교는 전라북도 설천면으로 다녔는데 텃새에 시달리곤 했다. 가난한 부모는 담배 수확을 늘려 자식 학비를 마련하고자 했다. 심규상 기자는 1986년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 입학한다. 가난과 학교 생활 모두 그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② 접속

1986년은 양담배를 처음 수입한 해다. 대학생들은 '양담배 수입 개방 저지' 데모를 했다. 부모가 담배를 재배하는 심규상에게 양담배 문제는 곧 학비 문제였다. 데모에 참석한 심규상은 다른 학생에게 물었다.

"담배 농사 몇 단 지어요?"

그 학생 집은 담배를 키우지 않았다. 담배 농가를 대신해 싸운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심규상은 동료들에게 자기가 데모에 참여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심규상은 학생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 급기야 교도소까지 가게 된다.

1990년 노태우 정권은 김영삼·김종필과 함께 민자당을 만든다. 이른바 '3당 합당'이다. 당시 서울에 있는 민자당 중앙당을 점거한 대학생 중에는 심규상도 있었다. 재판 당일 아버지가 서울구치소를 찾아왔다.

"오늘 판사님 앞에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해라. 안 그러면 호적에서 빼낸다."

그날 방청석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법정에서 구호를 외치고 판사에게 대들다가 사지가 들려나가는 막내아들을 봤다. 심규상은 반성문을 쓰지 않아 안동교도소에서 2년 6개월 만에 만기 출소했다. 심규상은 복역 기간 매주 한 통씩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적었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1992년 여름, 부모님은 출소하는 아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심규상은 고향인 충청도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큰절을 올리는 아들을 외면한 채 집 밖으로 나갔다.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밀려들었다. 어머니가 밥상을 내밀었다. 상에는 수육 한 접시가 수북하게 올라 있었다. 무심히 대문 쪽을 바라본 심규상은 조금 전까지 뛰던 개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개를 잡았던 것이다. 심규상은 눈물을 삼키면서 수육을 먹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아들을 이해했다. 심규상 기자는 '접속'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1993년부터 심규상은 재야단체에서 활동한다. 전교조 대전지부, 전교조 충남지부, 전국농민회 충남도연맹 등 30여 개 시민단체를 관리하는 대전충남연합 조직부장을 맡는다. 몇 년 뒤 '접속'은 충남 지역신문으로 이어진다.

 



③ 관계

충청남도에 두루 뻗은 차령산맥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런 지형은 마을 공동체 의식을 키운다. 특히 '리아스식 해안'으로 유명한 태안군은 불가사리 모양 지형이 특색이다. 이곳에서 지역신문은 마을 소식을 접하는 매개체로 유용했다. 이 지역 신문은 대부분 <한겨레> 창간 이후에 생겼다.


<당진시대> <태안신문> <홍성신문> <뉴스서천> <예산무한정보> <충남시사> 등 형편이 제각각인 충남지역 21개 지역신문들은 협회를 꾸렸다. 그리고 1998년 대전에 주재기자를 두기로 결정한다.

대전은 도청·교육청·도의회 등 충남지역 주요 행정기관이 밀집된 곳이다. 하지만 당진, 서천, 태안 등에 있는 지역신문사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대전으로 취재를 오는 것이 물리적으로 버거웠다.

협회는 원하는 취재를 대전에 거주하는 기자에게 부탁해 기사를 공유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협회는 이 같은 고민을 지역 시민단체와 공유하며 적임자를 찾았다. 그렇게 찾아낸 이가 심규상이었다.

심규상은 시민단체 업무가 끝나는 오후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작성한 기사는 21개 신문사에 팩스로 전송했다. 충남도청에 대한 비판 기사는 월요일에 발행하는 지역신문에 먼저 게재됐다. 그런데 같은 기사가 협회에 소속된 신문에 게재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각자 신문 발행주기에 따라 한 번 출고된 기사는 길면 2개월 뒤에도 게재되곤 했다.

공무원들 사이에서 비판 기사가 한 번 게재되기 시작하면 끝날 줄 모른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규상이 출고한 기사 대부분은 다른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이었다. 도지사 지시가 이행되지 않았다거나, 상급기관이 도청에 지적한 문제점 등이 심규상이 주로 다룬 소재였다.

심규상은 기사 쓰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시민단체에서 내는 보도자료를 기사로 작성해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다. '모든 시민은 기자'라고 선언하며 지난 2000년 출범한 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가입해 활동했다.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오마이뉴스>는 성장세를 탔다. 이때 대전참여연대를 비롯한 13개 시민사회단체가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를 창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연합뉴스>가 초창기 했던 것처럼 <오마이뉴스> 안에 '지역판'을 넣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오마이뉴스> 사이트에 '대전충남' 카테고리가 생긴다. 2004년 심규상은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주재기자를 제안받는다.

네트워킹이 없었다면 지역판도 없었다


심규상 혼자 대전, 충남을 모두 취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규상은 시작부터 네트워킹을 짜들어갔다.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취재와 기사 작성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가입하게 한다.

지역신문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중복 게재를 허용하는 <오마이뉴스> 정책은 이럴 때 장점으로 작용한다. 심규상은 주재기자로 활동하면서 풀뿌리 지역신문 기자들과 성심성의껏 소통하며 관계를 형성했다. 이때부터 '연락 체계'를 가동한다.

시·군별로 1·2연락처를 정하고 어떤 사안이 생길 때 제1연락처에게 취재를 부탁하는 형식이다. 1연락처가 사건을 챙길 수 없으면 제2연락처에게 전화한다. 취재 내용은 곧 정보가 됐고 시스템은 자리매김했다.


 

2004년 1월 27일 MBC 은 '친일파는 살아있다'를 방영한다. 사회적으로 과거사 문제가 불거졌다. <뉴스서천> 대표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대표인 양수철에게 한 가지 제보가 들어온다. 충남 예산 충의사 현판을 박정희가 썼다는 내용이었다.

1967년 건립한 충의사 본전에는 윤봉길 의사 영정이 봉안돼 있다. 현판은 박정희가 윤 의사 의거일에 맞춰 1968년 4월 29일에 내걸었다. 양수철은 2005년 3월 1일 새벽, 박정희가 쓴 현판을 직접 철거하기 위해 충의사로 갔다. 그러면서 심규상에게 취재를 부탁했다.

심규상은 현장까지 2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판단했다. 바로 예산지역 제1연락처에게 취재를 맡겼다. 그는 전교조 충남지부 회원이었다. 이날 <오마이뉴스>에 "박정희 친필 더 이상은 못 참아" 삼일절에 세 조각 난 충의사 현판이라는 기사가 게재됐다. 양수철 씨는 실형 6개 월을 선고받았다. 그가 대표로 있던 <뉴스서천>에는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화기를 들면 욕설이 쏟아졌다.

반면 과거사 청산의 일환이라며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사건이 알려진 후 예산군청 홈페이지는 각각 복원과 교체를 주장하는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의견으로 들끓었다. 한 달여 후 예산군은 박정희의 친필을 그대로 복원한 현판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내걸었다.

이 사건을 통해 충남 지역신문은 <오마이뉴스>와 기사 네트워킹이 시너지를 발휘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급한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올리면 댓글을 통해 반응을 보고 다시 보충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사는 객관성을 더욱 갖췄다. 이러한 협업은 2년 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도 빛을 발했다.

이런 네트워킹 구성은 <오마이뉴스> 본사가 요구한 게 아니었다. 심규상은 언론으로 지역을 바꾸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규상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즉 '긍정'과 '공명'이 네트워킹에서 핵심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다음 3화는 최병성 네트워킹입니다.)

 

 

※ 2016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글입니다.

 


 

서형작가 다른 연재물 ☞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서형작가 다른 연재물 ☞ 풍운아 황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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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1화 나의 네트워킹

 

 

한 출판사에 초대받아 직원들과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출판사는 '나는 왜 진보(보수)가 되었나'를 주제로 인터뷰한 내용을 엮어 책을 내고자 했다. 내부 회의에서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 수 있는 작가로 내가 거론됐나 보다. 고마운 평가였다.

 

또 진보와 보수는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눠 생각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관심 밖이 됐다. 대신 그 자리를 '네트워킹'이라는 주제가 채웠다.

사회 구성원은 누구나 네트워킹을 한다. 돈을 빌리고, 어울려 놀고, 일을 맡기고 모두 네트워킹이다. 시민단체가 정부를 상대로 현안에 대한 연대 성명을 내는 것도 이른바 '사회적 네트워킹'이다.


내 첫 작품인 <부러진 화살>은 2007년 1월 발생한 '석궁 사건'이 배경이다. 당시 이 사건이 터지자 인권운동사랑방, 구속노동자후원회, 교수노동조합 등 단체들이 모였다. 이후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 단체들은 모였다.

이들을 지켜보면서 생긴 의문은 '확장성'이었다.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같은 소셜네트워크 (Social Network Service) 기반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확장성을 보장한다. 이런 네트워킹 기반은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운동이 확장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이는 기술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문제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어느 순간 네트워킹을 한정하는 게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매트릭스> 주인공 네오처럼 삶에서 불쑥 의문은 들지만 우리가 얼마나 갇혀서 생각하는지는 스스로 알 길이 없다. 네오도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을 삼키고서야 진실을 마주하게 됐다. 나는 이 글이 독자에게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석궁 사건'의 숨겨진 이야기

▲ 1인 시위 중인 강내희 교수

 

이야기는 네트워킹에 눈을 뜨게 된 경험부터 시작한다. 2008년 6월 석궁 사건 항소심이 기각되자 원고 쪽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당시 민교협 원로였던 김세균 교수는 선고하는 날까지 대법원 앞에서 교수들이 릴레이 1인 시위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점심때 한 시간 정도 피켓을 들다가 가는 일이었지만, 먼 지역에 있는 교수에게는 하루를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잘 이어지던 1인 시위는 17일째에 고비를 맞는다.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로 모든 이슈가 몰리던 때였다. 시위에 동참할 교수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울지역 교수 1000명에게 연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교수 두 명에게 답장을 받았다.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답변을 읽고 생각했다. 이런 고민은 처음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제안할 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바로 동참할까?'

특정 사안에 대한 관심이 높다면 동참이 쉬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모든 분야에 관심을 두지 못한다. 답은 김세균 교수에게 있었다. 당시 17일 동안 시위를 끌고 온 것은 김세균 교수 인맥이었다.

1인 시위가 이어지는 동안 매일 시위에 나선 교수와 얘기를 했는데 정작 '석궁 사건' 당사자인 김명호 교수와 친한 사람은 없었다. 평소 존경하는 김세균 교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세균 교수(왼쪽)

이처럼 상대가 나를 좋아하면 연대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음 고민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것인지로 넘어갔다. 경청, 존중, 이해 같은 덕목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사람들을 만나는 태도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석궁 사건'을 거치면서 깨달은 것은 이 정도다.

 



'석궁 사건'을 계기로 2009년 서민들이 벌이는 소송 전쟁으로 관심사가 넘어갔다. 이는 두 번째 작품 <법과 싸우는 사람들> 배경이 됐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이 주제에 매달렸는데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당시 취재원은 임정자(1943년생)씨다. 힘은 없지만 신념 하나는 강한 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은 현실에서 파멸로 향하는 기차였다. 힘없는 그녀가 강하게 부딪히는 상대는 현실에서 힘을 쥔 사람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A는 법을 어겨도 검찰에 가면 벌금 백만 원에 그쳤고, 그걸 또 정식재판청구를 하여 법원에 가면 무죄를 받았다. 그 판결문을 다시 지상파 뉴스가 받아주며 A의 기세를 높였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시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검찰이 항소한 상태였다. 나는 언론사를 찾아다녔는데, 기사 거리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언론은 서울대 출신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범한 억울한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론과 연대는 기대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확인한 네트워킹의 위력

이 상황에서 법원에 제대로 된 판결을 해달라는 신호를 보낼 방법은 뭘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터 5부까지 부장검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말도 안 되는 사안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검사님! 부패검사의 실력을 보여줍시다'라고 썼다.

그랬더니 검찰이 반응을 했다. A의 항소심에 내가 보낸 편지를 추송서(재판과 관련된 일체의 추가 서류)로 제출한 것이다.

 


내가 검찰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검찰은 이를 추송서로 법원에 넘겼다.

 

 

 


결국 A는 항소심에서 50만 원 벌금형을 받았다.

세상에 '악의 축'은 없었다. 사안에 따라서 누구와도 네트워킹이 가능했다. 그걸 더욱 절감하게 된 계기가 영화 <부러진 화살>이다. 당시 저작권 문제로 나는 마음 고생이 심했다.

사법부를 비판하는 영화인데, 영화사와 갈등을 못 풀어 이 문제를 법원으로 끌고 간다면 나는 대중에게 욕먹게 돼 있었다. 밤새 고민하다가 법조계 관련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미 책 <부러진 화살>을 읽어본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유리한 답변을 했는데, 그들 중에는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판사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답변을 모아서 영화사에 보냈다.

 



2011년에는 다른 일도 많았다. 2011년 6월 <법과 싸우는 사람들> 주인공 임정자씨가 법정 구속됐다. 신념 하나로 살아온 그는 재판장 앞에서도 절대 굽히지 않았다. 무거운 형량이 선고됐다.

당시 임씨는 사선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인은 구치소 접견에서 임 씨 신념을 이해해줬지만, 임씨는 그를 해임했다. 왜 그랬을까? 막상 변호인이 쓴 항소이유서 내용이 딴 판이었기 때문이다. 항소이유서에는 임정자 씨가 구치소 내에서 반성하고 있고,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 가득했다. 사법피해자 경험을 들으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실 대다수 사람은 감형을 받으려면 선처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을까? 나는 당시 임정자씨가 신념을 지키면서 집행유예로 나올 방법을 고민했다. 통상 법원은 여론에 민감하다고 한다. 그래서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언론인들 탄원서를 모아서 왕창 집어넣었다.


탄원서 내용에는 '잘못했다'는 구절이 들어 있지 않았다. 연로한 사람을 감옥에 두는 건 가혹하니 다른 방안을 강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임정자 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2012년 여름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몹시 지쳤다. 약 5년간 피해자들만 만나다 보니, 더는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 해 동안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서 대한민국 네트워킹 대가들을 만나게 된다. 우선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주재 기자인 심규상을 소개한다.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다음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  2016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글입니다.

 


서형작가 다른 연재물 ☞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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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작가 다른 연재물 ☞ 구겨진 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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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9화 '고흥판 살인의 추억' 편

 

 

 

 

강남석 검사가 광주지검 순천지청으로 부임한 것은 2009년 2월 9일이다. 광주지검 순천지청은 순천경찰서, 여수경찰서, 광양경찰서, 고흥경찰서 등을 지휘한다.

 


 

강남석 검사는 2009년 5월경 고흥경찰서 유치장 감찰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경찰을 상대로 검찰이 휘두를 수 있는 권한 중에는 수사 지휘권과 더불어 유치장 감찰권이 있다. 경찰서를 방문한 검사는 경찰 범죄사건 등재부, 미제 사건철 등을 살펴봤다.

강 검사는 감찰 중에 2001년 벌어진 미제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다. 이 사건은 유력한 용의자가 있는데도 당시 경찰이 해결하지 못했다.

 

사건 내용은 대략 이렇다.

▲ 전라도 농촌마을

2001년 1월 14일경 전남 고흥군에 있는 한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65세 할머니가 집 대나무밭에서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할머니는 예리한 물건으로 몇 차례 찔린 상태였다. 사건 현장에는 담배꽁초와 우산이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담배꽁초는 평소 알고 지내던 김태용(가명)이 피워서 버린 것이었고 우산 주인은 박용근(가명)이었다.

경찰은 피해자 행적을 추적했다. 1월 9일 오후 8시경 할머니는 자기 집에서 김태용, 박용근과 술을 마시고 놀았다. 할머니 집에서 나온 김태용과 박용근은 김철준(가명)이 운전하는 렌터카를 타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김철준은 먼저 김태용을 데려다주고 나서 박용근을 데려다줬다. 김태용과 박용근 모두 알리바이가 확보됐다. 렌터카를 운전한 김철준이 증인이었다.

경찰은 당시 할머니를 찌를 때 사용한 칼을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자백을 받으면 직접 증거인 칼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백을 이끌어내지도 못했고 칼도 찾지 못했다.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강남석 검사는 경찰 수사기록을 모조리 가져왔다. 검찰은 먼저 용의자 범죄경력을 조회했다. 박용근 기록에 전과가 있었다. 검찰은 광주지검 순천지청에 있는 당시 사건기록을 받았다. 판결문 내용을 보니 할머니를 죽인 수법과 같았다. 강남석 검사는 판결문을 제시하며 박용근을 추궁했고 결국 자백을 받았다. 렌터카를 운전했던 김철준도 검찰 조사에서 본인이 착각한 채 진술했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박용근은 렌터카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에 내렸다고 한다.

수사를 맡았던 검찰 관계자는 경찰 수사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당시 경찰 수사기록에는 판결문 같은 자료가 편철돼 있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 관계자가 쓴 수기를 보면 검찰은 사건 조사 전에 고흥경찰서 관계자를 불러 범인을 검거할 기회를 줬다. 하지만, 경찰은 다른 혐의점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경찰은 왜 이런 중요한 단서를 놓쳤을까. 2001년과 2009년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을 수사한 최관호(가명) 형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건을 기록한 검찰 수기를 읽은 최관호 형사는 강남석 검사를 먼저 칭찬했다. 자신은 그런 배짱 있는 검사와 일하는 게 좋았다고 했다. 해마다 검사가 유치장 감찰을 나올 때마다 형사는 미제사건을 설명했다. 하지만, 사건에 관심을 보인 검사는 드물었다고 한다. '한 번 해보자'며 의욕을 보인 검사는 강남석뿐이었다.

형사 역시 검찰이 판결문을 입수한 점을 칭찬했다. 분명히 경찰이 놓친 증거였다. 경찰도 2001년 당시 박용근 범죄경력을 조회했다. 하지만, 전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검찰과 경찰이 쓰는 조회 시스템이 달랐기 때문이다. 최관호 형사는 특진이 걸린 사건을 조사하면서 전과를 알았다면 경찰이 가만히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경찰이 풀지 못한 강력사건을 검찰이 해결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검찰이 7월 30일 고흥 '살인의 추억' 사건 용의자를 구속하고 20일이 안 된 8월 18일, 순천경찰서는 백희정에 대한 강간과 강제추행 사건을 순천지청에 넘긴다.

 


강남석 검사는 이 사건에 흥미를 보였다.

 

 

당시 검찰 관계자가 쓴 기록을 보면 사건 서류를 받은 나흘째인 8월 21일 오전, 강남석 검사는 사건 해결 의지를 살짝 드러낸 것으로 돼 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검찰은 백 씨 부녀에게 자백을 받아냈다.


 

어느 기자는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검찰 기자회견장에서 자백 말고 물증이 있는지 물었다. 그 기자는 2009년 9월 2일 검찰이 지휘한 범행 현장검증을 보면서 2009년 2월 1일 경기경찰청이 지휘한 강호순 사건 현장검증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강호순 사건 현장검증에서는 경찰이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대부분 강호순에게 재현을 맡겼다.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현장검증 분위기는 달랐다. 백희정은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검찰이 먼저 물으면 그저 "네"라고 답할 뿐이었다. 언론은 검찰이 사건을 무리하게 수사했다고 몰아붙였다.

 


상황은 더 나빠져만 갔다.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재판 진행 중에 고흥 '살인의 추억' 피고인 박용근이 1심에서 무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2009년 12월 2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검찰은 당황했다. 박용근은 재판에서도 범행을 순순하게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용근이 자백했으나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지고 객관적 증거도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대체 재판부는 어떤 모순을 찾아낸 것일까? 박용근은 당시 범행도구와 옷을 시신 근처에 버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8년 전 수사기록에는 범행도구는 없었고 옷도 10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돼 있었다. 고흥 '살인의 추억' 사건 용의자가 무죄를 선고받자 언론은 재판 결과를 보도했다.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1심 재판도 끝나는 시점이었다.

강남석 검사는 1심 재판부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009년 12월 11일 검찰은 세 가지 자료를 제출할 것이라고 했다.

 

이 가운데 한 가지가 7월 2일 백경환 이동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CCTV 자료였다. 압수한 화면 4800장 가운데 백경환이 운전한 차량번호가 있는지 확인 중이라며 1월 말까지 제출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백경환이 오이 농사에 청산가리를 썼다는 증거가 될 만한 자료도 제출했다. 오이 농사를 하는 동네 사람 4명이 청산가리를 사용한 적이 있다는 진술이었다.

 


2010년 2월 18일 1심 재판부는 백 씨 부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이 검찰에 한 자백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강남석 검사는 1심 판결에 불복하며 항소장을 냈다. 고흥 '살인의 추억' 사건도 이미 항소장을 제출한 상태였다.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은 검찰 항소로 광주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강남석 검사는 2010년 광주지검으로 발령이 났다. 광주지검에 있던 강남석 검사는 항소심 재판에서 출석하여 두 사건 모두 유죄를 입증해야 했다.

그리고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에서 최선을 다해 유죄 판결을 받아낸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검찰 자백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강남석 검사는 재판부 마음을 어떻게 움직였을까.

 



먼저,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부터 살펴보자.

고흥 사건을 처음부터 수사했던 최관호 형사는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고 어느 날 강남석 검사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강남석 검사는 형사에게 검찰 증인으로 나와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항소심 법정에서 최관호 형사는 칠판에 써가면서 4시간 넘게 설명했다. 사건 발생부터 사건 송치까지 모든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항소심 재판에서 유죄로 확정,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2010년 9월 3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왜 검사는 '고흥 살인의 추억' 사건 1심 재판에서 변호인 측이 주장하는 진술에서 드러난 모순점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을까? 최관호 형사 의견은 이렇다.

2001년 범행 현장은 2009년 이미 재개발로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2009년에야 이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검사가 현장을 챙기는 게 가능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서 검찰은 어느 정도 현장을 챙겼을까.

8월 18일 백희정에 대한 강간과 강제추행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고 20일 백희정에 대한 첫 조사가 있었다.

당시 경찰은 백 씨 부녀가 아닌 다른 용의자도 수사했다고 한다. 검찰도 당시 경찰이 다른 용의자를 수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송 순대국밥집주인이 7월 5일경 백경환 씨 부부가 아닌, 다른 손님 부부에게 작은 막걸리를 판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 수기를 보면 검찰은 8월 21일 점심을 먹고 바로 대송 순대국밥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수기 내용은 실제 식당 주인 기억과도 같았다.

 


(제20화 - 나흘 간의 기억 최종화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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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8화 사건 당일(7월 6일) 재구성 편

 

 


검찰에 의하면 사건 당일 백경환 씨와 백희정 씨의 당시 행적은 다음과 같다. 백희정이 오전 2시 30분에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깼다고 한다. 백희정은 일어나 어머니 최명자 씨가 자는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부엌 냉장고 채소 칸에 있던 막걸리 두 병은 마당 화단 앞에 갖다 놓고 증거를 없앴다. 면장갑과 일회용 숟가락은 종량제 봉투에 버렸고, 청산가리는 집에서 50m 떨어진 하천에 버렸다.

 


이 일을 모두 마친 후 백희정은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이렇게 하기까지 현관문을 여닫은 횟수가 네 번이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지는 않았다.

 


아침이 되자 백경환은 화단 앞에 검은 비닐봉지를 본다. 그는 백희정이 이를 갖다 놓은 것도 알았고 내용물도 알았다. 하지만, 백경환은 매듭을 풀어 막걸리 뚜껑을 확인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어이, 누가 막걸리를 가져다 놨네. 뜰 방에 올려놨네."

그리고 백경환은 트럭에 올라탔다. 백희정이 범행에 쓴 일회용 장갑을 종량제 봉투에 버릴 거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 '이심전심'으로 알아챘다고 한다. 백경환은 종량제 봉투를 마을버스 정류소 옆에 버렸다.

오전 9시 10분경 최명자 씨는 공공근로 현장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다 변을 당한다. 오전 11시에 한 친척이 남편 백경환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백희정에게는 둘째 언니가 전화로 어머니 사망 소식과 병원을 가르쳐줬다. 백희정은 조카와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로 병원에 갔다. 검찰은 이 점을 주목했다. 가족이 갑자기 죽었는데 시종일관 침착하다면 이는 의심 대상이라는 것이다.

 


백 씨 부녀는 우발적이 아닌 고의범, 즉 계획범죄로 간주되어 각각 무기징역과 실형 20년형을 받았다. 보통 사건은 범인이 자백을 하지 않아 보강증거를 깊이 파는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직접 증거 없이 검찰에서 부녀가 한 자백이 유일한 증거였다. 이제부터 검찰 주장을 현장과 대조해서 살펴보자.

 




우선 백희정은 둘째 언니 전화를 자다가 받은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부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한 흔적은 보인다. 백희정은 과자를 살 때면 구례구역으로 갔다.


 


그날도 백희정은 아침에 조카와 과자를 사려고 구례구역으로 갔다. 백희정이 어릴 적부터 과자 사는 모습을 늘 접한 온 슈퍼 아주머니는 백희정이 그날도 고심 끝에 과자 하나를 골랐다고 진술했다. 백희정은 집으로 갔고 둘째 언니 전화를 받은 것은 그 뒤였다.

 



슈퍼 아주머니는 백희정과 조카가 나가자마자 가게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 막걸리 사고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조금 전에 과자를 샀던 백희정이 조카와 함께 다시 구례구역 앞에 나타났다. 백희정은 조카와 슈퍼마켓 맞은편 버스정류장에서 서성거렸다.


슈퍼 아주머니는 백희정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물었다. 아주머니는 당시 백희정이 생생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택시가 아닌 버스를 타고 간 모습이 수상하지 않았을까?

아주머니는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라고 했다. 둘째 언니는 동생이 버스를 탄 행동에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고 경찰에 설명했다. 백희정의 친척은 오히려 버스를 탄 게 희정에게는 최선이었다고 주장했다. 어머니가 실려 간 병원으로 가는 버스가 가장 많이 다니는 곳으로 달려왔다는 얘기다.

 



사건 발생 당일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남편 백경환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올랐다. 백경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 첫 조사에서 백경환은 결코 말할 필요가 없는 얘기를 했다.

"제 처 최명자에게 '어이 누가 막걸리를 가져다 놨네. 뜰방에 올려놨네'라고 말을 하고…"

부녀는 이런 수준이었지만 경찰 수사망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검찰에서는 버텨내지 못하고 자백했다.

 


 

가족과 친척은 변호사를 구했다. 윤기수 변호사를 먼저 선임했다.

윤 변호사가 보기에는 자백 사건으로 간단해 보였다. 갇힌 백희정과 백경환을 차례로 면담했다. 당시 백희정은 범행을 인정했으나 백경환은 부인했다. 공동 피고인이 이해관계가 다르면 변호를 동시에 맡을 수 없다.

윤기수 변호사는 송현승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딸은 자백했으니 송 변호사는 법정에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송 변호사는 도와주는 셈 치고 일을 맡았다고 한다.

 

 


송현승 변호사가 백희정을 만났다. 송 변호사도 궁금한 게 있었다. 그가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 접한 살인은 언제나 동기가 있었다. 백희정도 엄마를 죽일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송 변호사는 백경환은 살인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백희정이 살인을 인정한 이유를 물었다.

백희정은 울면서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고 말했다. 당시 송 변호사 보기에 백희정은 검사를 자기편으로 인식했다. 검사가 백희정에게 '나쁜 사람은 아버지고 너는 피해자'라며 도와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반면 백희정은 가족을 적으로 인식했다. 검사가 '가족이 시켜서 이웃집 남자를 고소한 것이니 희정을 빼주겠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송 변호사는 공소장을 보여주면서 백희정 씨에게 설명했다. 검사는 '네가 죄가 있다고 판단해서 기소했고 너를 도와줄 사람은 변호사'라고 알려줬다. 백희정은 그 개념을 어려워하는 듯했다. 다만 조용히 피식 웃기만 했다. 송 변호사는 다른 사건도 확인했다. 성폭행 부분에 대해 백희정은 "성추행만 있었다"라고 했다. "그 점은 상대에게 미안하다"라고 덧붙였다.

 



10월 1일 첫 재판이 시작되자 피고인들은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백경환·백희정 부녀는 최명자 씨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백희정은 또 성폭행 건에 대해 성폭행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성추행은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으니 허위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검찰 견해는 어땠을까? 당시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을 취재하던 한 언론인은 사건을 맡은 강남석 검사가 무척 들뜬상태였다고 기억했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기자회견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순천 청산가리 사건기자회견에서도 기자들은 강남석 검사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검사님은 '살인의 추억'도 해결한 검사"라고 치켜세웠다고 한다.

강남석 검사가 광주지검 순천지청으로 부임한 것은 2009년 2월 9일이다. 그해에는 굵직한 사건이 순천지청으로 넘어왔다. 이 가운데 세 가지만 꼽으면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 '광양 살인사건' 그리고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이었다.

2001년 발생한 미제 사건,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을 2009년 강남석 검사가 해결했다. 이에 언론이 주목했고 당시 강 검사는 "'살인의 추억'은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직접 언론에 기고하기도 했다.

수사기관에서 자백하던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인하는 일은 흔하다. 피의자는 구속됐을 때 교도소에서 변호인을 만나기 때문이다. 광주지검 순천지청은 순천경찰서, 여수경찰서, 광양경찰서, 고흥경찰서 등을 지휘한다. 따라서 이 지역 지능범죄자는 모두 순천교도소로 모인다. 검찰은 피고인 백경환에게 피고인 박용근(가명)을 아는지 물었다. 강남석 검사가 언급한 박용근은 일명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 범인이었다.

 



8월 24일 긴급 체포된 백희정은 교도소에서 광양 살인사건 용의자와 함께 한방을 썼다. 검찰도 이 부분을 추궁했다. 검사는 피고인 백희정에게 이렇게 물었다.

"김혜진(가명)은 ○○○의 목을 졸라 살해를 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에서 처음에 범행을 인정했는데, 나중에 검찰 조사에서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범행을 부인하면서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아 허위로 자백하였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피고인은 이와 같은 변명과 김혜진의 변명이 일치하는데, 김혜진에게 배워서 말한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피고인 허위진술 변경 이유만 같은 게 아니었다. 재판 결과도 비슷했다.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도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과 마찬가지로 1심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는 다시 유죄가 선고됐고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다.

취재 중 접한 기자들은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도 진범에 대해 확신이 안 선다고 했다. 1심에서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인정했는데도 진술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경찰과 검찰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을 만나기 전 단계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당시 검찰과 경찰이 겪었던 일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앞서 겪은 사건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고 수사관으로서 어떻게 발전했을까? 이는 검찰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서 보여준 수사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제19화 - '고흥판 살인의 추억'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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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7화 넷째 날(7월 5일) 재구성 편

 

 

 

날이 밝았다. 아침 고향 집에는 아버지, 어머니, 손자만 있었다.

 

오전 7시경 이들 부부는 기상했다. 당시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는 부엌 냉장고 채소 칸에 있었다.

 

백희정은 전날(7월 4일)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안방에 들어갔다. 당시 아버지는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다. 백희정은 잠을 자던 아버지에게 "막걸리를 넣어놨다"라고 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만약 잠결에 얼핏이라도 들었다면, 아버지는 냉장고 야채칸 박스에 막걸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전 7시 반경, 아침을 먹기 위해서 어머니는 부엌 냉장고 문을 열었을 것이다. 반찬을 먹고 나서 다시 냉장고를 열어 집어놨을 것이다. 손자가 우유를 찾자 어머니 최명자 씨는 냉장고를 또 열었을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들 부부는 논으로 나가서 약 2시간 동안 농약을 쳤다. 그리고 오전 11시경 돌아와 샤워한 후, 점심을 먹었다. 이때도 최명자 씨는 부엌 냉장고를 열어봤을 것이다.

만약 야채칸을 봤다면 최명자 씨가 제일 좋아하는 막걸리를 놓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명자 씨 시선은 야채칸을 한 번도 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명자 씨는 점심을 먹고 반찬을 다시 냉장고에 집어놨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 모두 낮잠을 잤다. 오후 3시쯤, 이들 부부와 손자는 봉고 트럭을 타고 땔감 나무를 줍고자 곡성으로 떠났다.


오후 6시경, 둘째 딸 부부가 막내아들을 데리러 순천에서 집으로 왔다. 저녁은 가족들이 모두 근처 식당에서 외식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최명자 씨만 둘째 딸 식구들과 함께 자가용으로 먼저 출발했다. 아버지는 씻고 나중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백희정 씨 행적을 살펴보자. 당일 백희정은 오전 9시경 부산에서 만난 남자와 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백희정은 순천으로 가지 않고 경남 창원으로 향했다. 그날 오후 6시 11분경, 경남 창원시 동읍 근방에서 백희정이 전화한 기록이 나왔다.

검찰은 항소이유서에서 "부산에서 순천행 버스에 승차하였음에도 순천으로 오지 아니하고 도중에 내려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산-창원 일대에서 배회하였다는 것"은 백희정 씨가 집에 오기 싫은 사정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백희정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창원으로 갔던 것이 아니다. 그냥 부산에서 만난 남자가 부산 사상터미널에 내려주자, 거기서 창원 버스를 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저녁에는 순천으로 돌아왔다. 순천에서 33번 버스를 타고 다시 고향 집으로 향했다.

경찰 진술로 추정한 부녀의 범행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백희정 씨는 형부 차와 마주쳤다. 당시 차 안에는 엄마, 둘째 언니 부부, 조카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백희정 씨에게 '식당으로 오라'라고 하고 먼저 출발했다. 그리고 그날 온 가족이 식당에 모여서 'KBS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식사했다.

 

순천 둘째 딸은 친정에 맡겼던 3살짜리 막내아들을 데리고 순천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막내아들은 싫다고 칭얼거렸고, 결국 다시 고향집에 맡기고 둘째 딸 부부는 순천으로 떠났다.

 



사건 기록을 살펴본 전직 형사과장은 둘째 딸과 아버지의 경찰 진술만 놓고 보면 이들 부녀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어떤 진술일까?

아버지의 경찰 초기 진술을 들어보자.

20:00경, 사위, 작은 딸, 손주, 안식구와 함께 산골마을(가명)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당에 있으니 막내딸이 순천에서 버스를 타고 식당 앞에 내려 들어와 함께 저녁을 먹고... - 백경환 경찰 진술조서 2회. 2009.7.7.

그런데 둘째 딸은 경찰에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씻고 식당으로 오겠다고 뒤에 출발하셨는데 저희들이 식당에 도착한 후 약 20~30분 정도 지나서 식당으로 혼자 오셨습니다. (중략) 백희정은 아버지가 식당에 오고 10분 정도 지나자 들어왔습니다. - 둘째 딸 경찰 진술조서 2회. 2009.7.12

 


둘째 딸 진술을 보면, 가족들이 먼저 식당에 도착하고 나서 아버지가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백희정 씨가 왔다. 전직 형사과장은 이때 부녀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가능성을 점쳤다. 하지만 그날 저녁 가족들 외식 분위기에서 이상한 낌새는 없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오후 10시경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백희정은 조카와 함께 잤다. 백희정 씨 자백에 따르면 당시 어머니는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백희정은 잠을 자다가 이날 자정 무렵에 일어났다. 그리고 엄마가 자는 거실을 지나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백희정 씨는 잠을 자는 아빠를 조용히 깨워 "새벽에 막걸리를 화단 앞에 가져다 놓을 테니 아빠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을 건넸다. 9월 2일 검찰 현장검증에서 수사관이 "아빠가 들은 것 같으냐"라고 묻자 백희정은 "잠결에 들은 것 같다"라고 했다.

백희정 씨는 안방을 나와 거실을 지나서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을 청했다. 가족들은 이 점을 납득하지 못했다. '1박 2일간 놀다가 왔으면 지쳤을 터인데 어떻게 일찍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시계에 알람을 맞춰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백희정 씨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이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제18화 - '사건 당일 재구성'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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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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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6화 셋째 날(7월 4일) 재구성 편

 

 

7월 4일 토요일 아침이 됐다.

 

백희정이 일어났을 때는 아버지 백경환 씨는 곡성으로 일을 떠난 후였을 것이다. 어머니 최명숙 씨에게는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막내딸과 세 살짜리 외손자에게 아침밥을 차려줬다.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외손자에게 건넸다. 백희정은 오전에 조카와 놀았다.


오후가 됐다.

백희정은 인터넷 채팅으로 부산에 사는 어느 남자와 약속을 잡는다. 부산 남자는 백희정에게 '부산으로 올 수 없느냐'라고 물었고 백희정은 '차비 2만 원을 통장으로 보내달라'라고 한다.

이제부터 검찰의 주장을 들어보자. 백희정은 폰뱅킹을 확인하고 나서 옥상에 올라가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탔다고 한다.

 


백희정은 7월 4일 오후 8시경 면장갑과 일회용 플라스틱 수저, 막걸리, 청산가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지문이 남지 않도록 면장갑을 양손에 끼고 캄캄한 옥상에서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탔다. 어두운 데서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막걸리를 흔들어댔다.

백희정은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를 포함해 총 2병을 부엌 냉장고 채소 칸에 비스듬히 눕혀서 넣었다. 이 막걸리는 앞으로 이틀 동안 이 상태로 냉장고 안에 있었을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백희정은 당시 "아빠는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라고 했다.

백희정은 안방에서 잠을 자던 백경환에게 "막걸리를 넣어놨다"라고 말했다. 백경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희정은 부산으로 떠났다. 백희정이 부산 남자를 만난 때는 7월 5일 오전 1시 30분 경이라고 한다.

검찰 주장대로라면 백희정은 옥상에서 처음으로 청산가리를 보았다. 백희정은 청산가리가 "흰색 분말이 깨알만 한 동그란 알갱이로 만들어졌다"라고 표현했다. 이를 두고 검찰은 '백희정이 청산가리를 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백희정이 표현한 청산가리 모양은 진술의 임의성을 뒷받침한다고 했고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검찰 주장에 문제점이 있다.

바로 백희정이 자백한 2009년 8월 25일은 벌써 사건이 발생한 지 50일이 훨씬 지난 후였다.

그 50일 사이에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8월 1일 내보낸 '두 마을의 끝없는 공포-청산가리 살해 미스터리' 프로그램에서도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타는 재연 장면이 나온다. 이 방송에 나온 청산가리가 '흰색 분말'이었다.

막내딸의 '청산가리' 묘사, 결정적 증언이라기엔...

 


그리고 8월 20일과 24일 사이에 경찰 부탁으로 이모는 백희정과 함께 이웃집 아주머니를 찾아가 청산가리에 관해 들었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건 이후 유가족 중에는 '청산가리'가 궁금해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는 이도 있었다. 이처럼 백희정이 한 진술은 이미 오염 가능성이 있었다.

 

 



검찰은 백희정을 '치밀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백희정이 책을 자주 보고 이야기를 연구했으며 시리즈를 즐겨보는 것도 근거로 내세웠다.

 


검찰은 백희정이 부산으로 떠난 이유가 알리바이 조작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같은 해에 일어났던 보령 청산가리 독극물 사건 예를 들었다.

 


 

2009년 4월에 일어난 보령 청산가리 사건은 죽은 정 씨 할머니 남편이 범인이었다.

남편은 부인이 쓰러졌다며 112에 신고했는데, 신고 시점이 4월 29일 밤 11시 39분이었다. 남편은 외출했다가 밤늦게 돌아와 보니 부인이 쓰러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형사는 남편에게 그 사이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

남편은 알 낳는 닭을 구경했고 개와 장난치다가 왔다고 진술했다. 형사는 4월 29일 밤은 쌀쌀했다고 기억했다. 그런 날씨에 73세 노인이 3시간 반 동안, 개와 놀았다는 게 경찰관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됐다고 했다.

검찰은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서 보여준 백희정 씨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했다. 7월 4일 부산으로 간 이유가 데이트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검찰이 그렇게 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부산 남자는 백희정을 숙소로 데려갔다. 그는 "숙소에서 옷을 벗겼더니 팬티가 남루하고 생리를 하고 있어 (성관계를) 그만뒀다"라고 했다.

검찰은 26세 젊은 여성이 남루한 팬티를 입고 있었다는 게 증거라고 했다. 젊은 여성이면 남자를 만날 때 속옷도 신경 써서 입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속옷에 신경 쓰지 않았던 걸 보면, 부산 방문은 데이트가 아니라 알리바이 조작'이라고 본 셈이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변호인은 백희정이 치밀한 편이라는 검찰 주장에 반박했다. 백희정은 사건 발생 전까지 마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 변호인은 백희정이 읽은 책이 있었다면 검찰이 증거로 제출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다못해 백희정이 작성한 도서관 대출목록이라도 제출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희정은 마을 도서관 컴퓨터로 '노는' 것을 좋아했다.

수사 과정에서 백희정이 한 인터넷 채팅 내용이 밝혀졌을 때 가족과 주변 사람이 받은 충격도 상당했다. 백희정 씨가 채팅으로 남자를 만났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김밥집 사장 김미순 씨도 당시 충격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사건 전 백희정이 '오빠 만나러 다녀왔다'라고 말할 때마다 김미순 씨는 '만났다는 오빠'를 '모두 같은 사람'으로 여겼다고 했다. 김 씨는 인터넷 채팅으로 백희정이 남자를 만나는 것이 상상이 안 된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희정이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희정은 세수하거나 머리 감는 것을 귀찮아했다. 김밥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여름철에 백희정의 냄새에 못 견뎌서 가게 뒤편 수돗가에 샴푸를 갖다 놓기도 하고, 속옷을 사서 백희정에게 갈아입으라고 성화를 냈던 적도 있었다.

김미순 씨는 백희정을 자기가 목욕시킨 것이 여러 번이라며 백희정을 만나는 남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채팅하는 남자들 또한 여성을 만나보기 전까지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7월 4일 백희정은 검찰 주장처럼 오후 8시경 집 옥상에서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탔던 것일까? 그런데 이 사건 1심 10회 공판에서 백희정은 검찰 공소사실을 모두 뒤집을 수 있는 증언을 한다.

부산으로 '채팅남' 만나러 갔다는 용의자

 


검사 문 : 피고인(백희정)이 폰뱅킹을 한 시간대에 비추어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희석한 시간은 2009.7.4.19:30경에서 20:00경 사이로 보이는데 어떠한가요.
백희정 답 : 아닙니다. 저는 그 시간대에 버스 안에 있었고, 버스 안에서 계속 전화를 하면서 갔는데, 버스 안에 있는 CCTV에 찍혔을 것입니다.

즉 백희정이 검찰에서는 "구례역에서 출발했고, 오후 8시 45분에 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갔다"라고 진술했지만, 법정에서는 "구례역에서 출발했고, 오후 7시 20분에 버스를 타고 갔다"라고 증언한 것이다. 만약 백희정의 법정 진술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공소사실'은 무너지게 돼 있다.

 


이 사건 발생 후 경찰은 백경환만 의심한 게 아니었다. 막내딸 백희정 역시 유력한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경찰이 드라마 CSI처럼 현장 증거를 분석해 백희정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형사는 사건 현장에서 어떤 '감'을 따라 스토리를 연상한다. 이후 나오는 증거를 보고 감으로 연상한 스토리를 확인하게 된다. 이 과정이 일반적인 강력 사건 수사 방법이다.

 



백경환을 용의자로 보는 형사는 7월 3일 백 씨가 일하다 점심때를 틈타 순천에서 막걸리를 사 올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하지만 곡성 일터에는 당시 백경환 씨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목격자가 10명이 넘었다.

이렇게 막히면 형사는 다른 스토리를 연상했다. 백희정을 용의자로 넣은 '감'은 어떻게 나왔을까. 한 형사는 '둘째 언니 진술에서 감이 왔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둘째 언니가 진술한 내용은 뭐였을까.

 


"제가 집에 오면 엄마와 희정이가 여러 번 다퉜거든요. 서로 악을 쓰면서 싸웁니다. 그러면 옆에서 제가 희정이를 혼냅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아침에 제가 희정이 휴대전화로 전화를 해서 엄마가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가셨다고 구례병원으로 막내 조카 데리고 가보라고 하니까, 희정이가 자고 일어난 목소리로 알았다고 했고 제가 조금 후에 전화를 하니까,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2009.7.23. 2회 진술조서)

게다가 둘째 언니는 사건 전날, 길목에서 마주친 동생이 '어떤 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했다. 형사들은 그 가방에 막걸리가 들었던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래서 형사들은 백희정씨의 당시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만약 백희정 씨가 버스를 타거나 편의점에 들렀다면 형사는 해당 장소에 설치된 CCTV를 모두 확인했다.


한 형사는 '백희정이 채팅에서 만난 남자를 부추겨 엄마를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고 했다.

형사들은 백희정이 만난 '채팅남'을 찾으러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렇다면, 검찰로 송치한 경찰 수사기록에 '7월 4일 백희정이 탔던 버스 CCTV'에 대한 보고는 없던 것일까?

하지만 검찰은 백희정씨의 주장에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제17화 – 나흘간의 기억 중 '넷째 날' 재구성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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