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를 요약해 본다.

 

티버스 차원에서, 어벤져스 중심이 한국으로 이동했다.  그 태동 배경에는 인피니티 스톤과 함께 한국에 나타난 캡틴 아메리카가 있었다.

 

<퍼스트K어벤져>☞ 제1화. 캡틴에게 아들이 있었다.

 

<퍼스트K어벤져>☞ 제2화. 김건희가 쥴리? 그것은 바로 리얼리티 스톤!

 

캡틴은 한국에서 가정을 이뤘고,  막내아들이 성장하여 열공 K어벤져스에 합류했다.

 

그렇다면 캡틴 금쪽이는 대체 누구일까?

 

우리는 지금 입사 순으로 열공 K어벤저스 기자들을 한 명씩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

 

<퍼스트K어벤져>☞ 제3화. 채영민과 김두원 누가 캡틴 아들일까?
<퍼스트K어벤져>☞ 제4화, 윤석열, 김건희를 끌어내릴 스모킹 건을 가진 강신구.

 

드디어 마지막 한 명이 남았다. 마지막 캡틴 아들 검증 대상은 박태용 기자다. 이제 시작해 보자. 

 


 

 

 

 

박태용은 춘천MBC 기자이자 뉴스타파 창립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 후 박태용은  다른 회사(시민방송TV)를 운영한다. 

 

박태용 기자는 강신구 기자 소개로 2021년 말, 열린공감TV에 합류했다. 마침 정청수 대표가 <윤석열 X파일> 책을 탈고할 시점이었다.

 

열린공감캡쳐

 

 

박태용은 외부취재 연대기자 자격으로 열린공감TV와 손을 잡았다.

 



대표 정청수는 박태용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다. 월급은 기본이고, <윤석열 X파일> 책 수익도 분배해 줬다.

 

그러자 박태용은 이렇게 인사를 했다.

 

 

책 출판에 별 도움이 못된 거 같은데 저까지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박태용은 게다가 고급슈트도 정청수 대표로부터 얻어입게 됐다. 계기는 이렇다.

 

열린공감TV 열성 후원자 중 원(Won) 씨 할머니가 있었다.

 

이 할머니는 전화하여 방송에 열공 K어벤저스 기자들에게 슈트를 해주고 싶다는 의사를 종종 내비쳤다.

분명 수백만 원짜리일 게 뻔했고 그런 선물을 받을 K어벤저스 기자들이 절대 아니었다.

 

 


 

유튜브 캡쳐


하지만 열공 K어벤져스 기자들에 따르면 정청수 대표는 자신이 다 지불했다면서 가서 맞춰 입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박태용은 고급 슈트가 그렇게 회사 자금으로 마련된 것이라 생각했다.

 

정대표가 박태용을 위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태용에게는 PPT(프티)라는 무기가 있었다.

 

이는 채영민이 말하는 '품새', 김두원 글 쓰는 '촉새', 강신구가 가진 '스모킹 건'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기술이었다.  

 

 


정청수 대표는 대선 후 시민포털 사업을 위해 미국으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정청수는  출국 직전까지도 PPT(프티)를 보유한 박태용을 챙겼다. 

 

경영난에 처했던 시민방송TV을 위해 후원금 홍보에 나선 것이다. 

 

“간신히 숨만 붙어 있던 시민방송TV가 시민 여러분들 도움으로 기사회생하여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중략)... 그렇기 때문에 시민방송TV가 IPTV로 진출할 수 있도록 시민 여러분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중략)...... 이러한 일은 시민 여러분의 도움 없이는 이뤄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정청수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열공 K어벤져스 기자들에게 시민포털 불법 모금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옵티머스 사건 수사 중 미국으로 도피한 이혁준 씨, 그리고 강혁 기자와 어울려 다닌다는 것이었다. 

 

열공 K어벤져스 기자들을 다음과 같은 우려를 내비쳤다.

 

더 탐사 캡쳐

.. 사실은 저희가 이혁준 씨를 폄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이혁준 씨가 지금 한국에서는 기소중지 상태입니다. 저희가 그 부분이 가장 염려스러웠고 박대용 기자나 강진구 기자나 취재팀에서 이야기할 때 시민들의 깨끗한 후원금은 상관없으나 만약에 검은 자금이 들어오면 서울에 있는 열린공감tv도 위험하다. 그 부분이 가장 걱정이 됐고..)

(☞ 더 탐사 6월 19일 정천수 전 대표 거짓증언에 대한 공식대응 39분 20초경)

 


 

곧이어 열공K어벤져스 기자들에게 시민포털 설명회 영상이 입수가 됐다.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정청수는 평소 셀럽화를 경계해 왔다. 하지만 영상 속 그는  교민들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열공K어벤져스 기자들은 자신들이 알던 정청수 대표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박태용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더 탐사 방송 캡쳐

“저희도 사실 정천수 피디라는 분을 윤석열 대통령 당선 전과 후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특히 경찰조사를 받고 난 뒤에 미국으로 도피를 결심하고 미국으로 떠난 뒤에 또 한 번 바뀝니다. 저희가 참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를 겪었고, 이 변화들이 계속 언제까지 예측불가능한 상황으로 갈지 지금 저희들도 이제는 말을 좀 믿기가 어려운 상태가 됐어요. 

(☞2022년 7월 8일 긴급보도. 채널 강탈에 이어 이사회 장악 시도까지. 56분 22초경)

 

K어벤져스 기자들은  정청수가 왜 그러는지 알아야 했다. 바로 정천수를 탐사취재하기 시작했다.

 

한 번 파헤치기 시작하면 기본 30년 언저리다. 김건희는 예고편이고 정청수는 본편이었다. 정청수 과거를 파보니 허위와 의혹이 윤석열, 김건희보다 심했다.

 

 

박태용- 윤석열 X파일이 몇 개의 의혹이라고 그랬죠? 2백 몇 개? 

강신구 - 170개

박태용- 그 정도 보다 좀 더 넘을 것 같습니다.  

 

☞8월 14일 정천수 82가지 거짓말로 또 모금 시작. 3시간 16분경

 


 

대체 열린공감TV를 만든 정청수는 누구일까? 왜 이름을 ‘열린공감’이라고 한 것일까? 정천수는 형이 한 분 있다고 했다.

김두원은 그가 ‘유명세라면 환장하는 놈’이라고 장담했다. 지금 정청수는 미국 각 주를 돌아다니면서 꽃종이 휘날리는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서부에서 시작한 일정은 미국 동부인 워싱턴과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에는 ‘스타크 인더스트리 Stark Industry’ 본사가 있다. 그곳에서 어디와 열린 ‘공감’을 하려는 것일까?

 

정청수는 왜 ‘포털’을 만들려는 것일까?

 

 

이는 인류를 위협한 로키와 행보가 똑같다.  '어벤저스(2012년) 사건'이 무엇이던가.

 

로키 포스터

 

 

바로 로키가 <스타크 인터스트리> 옥상에서 포털을 열었던 사건이다. 

 

로키는 우주에서 대기하던 외계군단이 그 포털로 침입해서 뉴욕을 공격하게 했다.

 


 

 

정청수와 로키에게는 강력한 공통점, 팩트가 있었다.

 

 

바로 양쪽 다 형님이 한 분씩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K어벤저스 기자들은 신중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실확인이 우선이다. 누군가 잠입을 하여 확인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가야 하는가? 여기서 잠입자로 박태용이 선택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가 캡틴 아들일지 모른다는 확신이 강해진다. 



대체 박태용과 캡틴 사이에 어떤 부분이 겹치는 것일까? 

 

캡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약물을 주입하여 '히어로'로 거듭났다.  

 

퍼스트 어벤져 포스터

 

당시 그 실험실을 만든 게 하워드 스타크, 바로 토니 스타크(아이언맨) 부친이다.

 

캡틴 슈트와 방패를 만들어준 것도 하워드 스타크다. 캡틴이 70년 동안 가사 상태에 빠진 이유는 임무 수행 중에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했기 때문이다.

 

그때도 캡틴을 찾고자 북극해를 이 잡듯이 수색했던 것도 하워드 스타크다.

하지만 캡틴은 <시빌워>에서 하워드 스타크 외아들, 토니에게 어떻게 했던가.

 

의견이 충돌하자 그저 방패로 패버렸다.

 

시빌워 영화 포스터

 


이건 보통 사람이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히어로' 혈통만이 가능하다.

 

박태용도 마찬가지다. 돈 주고 옷 사줬다고 할지라도 대의가 더 중요했다. 더군다나 박태용은 캡틴처럼 두뇌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드디어 박태용은 2022년 5월 28일, 시애틀 공항에 도착한다.

 

박태용 미국 잠입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시애틀 공항도착 후 1차 시민포털 설명회→ 시애틀 진보연대 황 00 대표 집에 기거 대접받음.→(29일) 시애틀 진보연대 황대표 인터뷰 → 시애틀 교민 2차 시민포털 설명회 → (30일) 황대표 가이드로 스타벅스 본사 방문 → 시애틀 교민과 저녁식사 후 공항으로 이동. 오하이오 출발 8시 넘어서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도착. 교민 2명 마중 나옴......

 

 

 

 

보다시피  쳐다보는 눈들이 많은 동선이었다. 박태용은 대체 어떻게 잠입하여 임무를 수행했을까?

 


 

여기에 단서가 되는 기록이 있다. 멀티버스 차원에서 대한민국 3대 기록물, 한중록(혜경궁 홍씨),녹취록(정영학 세무사), 임성록(임무 성공 모음집/작자 미상)이 있다.

<임성록>을 보면 임인년(2022년)에 미국 교민들 가슴에 협심증을 일으킨 사건이 등장한다.

 

바로 박태용 잠입사건이다. 

 

여기에 박태용 잠입 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교포들은 박태용에 대한 분노가 가장 높다. 자신의 방송에서 이야기했듯이 잠입을 위해서 미국에 왔다고. 그럼 자기 돈 쓰고 있는 둥 없는 둥 조용히 있다가 갈 것이지 시민포털 지지한다고 설명회에서 발언도 하고 교포분들 사인도 해주고 온갖 환심은 다 사놓고, 온갖 대접 잘 받고 용돈까지 받아가 놓고.. (임성록 중 일부 발췌)

 

박태용은 캡틴이 구사했던 <하일 히드라(우리 샘샘 편)>전략을 사용했다. 

 

미교민에게 이렇게 대접받음

 

 

그렇다고 해서 박태용 기자가 그저 먹고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임무를 완수했다. 

 

박태용은 시애틀 시민포털 사업 설명회를 지켜보면서 사실확인에 들어갔다.

 

정청수, 이혁준, 강혁은 시민포털 모금행사를 진행했다. 화려한 언변에 넘어간 한 교민은 이들에게 전 재산을 기탁하기도 했다.

 

'사실확인'이라는 임무 수행은 정청수 신뢰를 얻는 전략을 사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태용은 정청수를 만나 시민방송TV 관련해 상의할 게 있다고 말하며 경계를 풀게 했다.

하지만 박태용은 이렇게 말하면 정청수가 어떻게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박태용 씨. 시민방송TV 상의할 게 있다면서 저 만나려 시애틀 오실 때 500만 원 넘는 돈으로 비행기 타고 오셨잖아요. 이거 어디 돈으로 쓰셨나요? 시민방송TV 이사장이시잖아요. 열린공감TV 사외이사시잖아요. 그런데 왜 열린공감TV 후원금을 가지고 비행기 타고 오셨나요? 500만 원 넘는 돈을 쓰면서?”

 

 


하지만 박태용 브레인은 더 빨랐다. 박태용은 투 트랙으로 방어했다.

 

 

(방어 1) "제가 시민방송TV 이야기를 거의 안 했죠." 
☞8월 7일 취재 후 정천수 육성 파일 “불법체류냐 멕시코냐 망명신청하면 최대 5년” (1시간 41분경)

 

(방어 2)"정청수 씨는 시민방송TV를 어떻게 살릴 수 있는지 자기가 먼저 이야기를 했어요. " 
☞8월 14일 정천수 82가지 거짓말로 또 모금 시작. 1시간 47분경

 


박태용 두 번째 잠입 임무는 '설득'이었다. 

 

박태용은 정청수에게 오하이오에서 화상 이사회를 열자고 했다. 화상 이사회에는 서울에서 강신구와 채영민, 미국에서는 박태용과 정청수가 참석했다.

 

우려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들 “당장 이혁준과 헤어지라!”, “당장 그만두라”라고 했다.

하지만 정청수는 워싱턴까지 잡힌 계획은 소화하겠다고 했다. 계속해서 미 동부로만 가겠다고 하니 ‘로키’에 대한 확신이 짙어졌다.

K어벤져스 기자들은 정청수가 ‘로키’란 단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야 했다.

 

강신구가 '로키'라는 말을 꺼냈다.  바로 멈추지 못하겠다면 ‘로키(lowkey) 행보'를 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열공 K어벤져스 기자들에 따르면 정청수는 ‘로키’란 말에 정체가 탄로 났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막장으로 치달았다고 했다. 

 



박태용은 이렇게 이사회를 열어 정청수 대표를 설득하면서 마지막 임무도 해냈다.

 

뜬금없이 채영민에게도 이사회 개최 지정 권한을 주자는 말을 꺼내 정청수 씨 허락도 얻어냈다. 

 

모든 임무를 마치고 박태용은 이튿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K어벤저스 기자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대체 누가 캡틴 아들일까? 서로 막상막하라 깊은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누가 캡틴 아들인지 정체를 아는 이가 있다는 점이다.

 

열린공감TV 캡쳐


바로 열공 K어벤져스 기자들에게 슈트를 사준 원(Won)씨 스님 할머니다.

 


 

원 씨 스님 할머니는 멀티버스 차원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인물이다. 캡틴이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 그리고 캡틴 아들이 자라나서 열린공감TV에 들어온 전 과정을 지켜봤다.

 

캡틴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피고자 원 씨 스님 할머니는 열린공감TV를 구독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대체 원 씨 스님 할머니는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살 수 있었던 것일까?

 

 

 

 

 

그건 바로   ........


 


 


 

 


 

 

그녀가 초창기 타임스톤을 수호했던 에이션트 원이기 때문이다.

 

 

 

 

유튜브 캡쳐

 

 

 

(☞ 다음 6화. 드디어 밝혀지는 진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나를 케어해줘. 연재 순서.

⦁제1화. 보험성뇌물의결말 (폭로자 김학성 시선)

⦁제2화. 제말이그말입니다 (김학성 동업자 한수찬 시선)

⦁제3화. 앞뒤좌우완벽하게 (김학성 구치소 동료 오강수 시선)

⦁제4화. 부친사망일의진실 (김학성 전 사업 파트너. 이문재 시선)

⦁제5화. 난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변호사 시선)

⦁제6화. 대검케어가최고야. (작가 시선)

 

 

 

 

 

 

 

<김형준 '스폰서 검사' 사건 재판 추적기> 제3화. 앞뒤좌우 완벽하게 - 오강수 시선.

 

2010년 김학성은 특가법위반, 사기 등으로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때 구치소에서 오강수를 알게 됐다. 오강수는 불법 다단계로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는 자금관리를 여비서에게 맡겼다.

 

 

김학성은 당시 합의금으로 거액이 필요했는데 오강수가 그 부분을 도와줬다. 김학성은 UN에 파견 나간 김형준이 돌아오면 출소 후 구명활동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2011년 9월 대검찰청 제2범죄정보담당관으로 복귀한 김형준은 김학성을 소환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범죄정보 제공이었다. 김형준은 나중에 문제 되지 않도록 대비할 필요가 있다며 요식행위로 뭐라도 하나 써낼 것을 주문했다. 김학성은 A4용지에 허위사실을 작성해 건네면서 친구인 그에게 고마움과 뿌듯함을 느꼈다. 이 검사 친구는 앞으로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학성은 총 9회에 걸쳐 대검찰청 제2범죄정보담당관실에 소환됐다.

 

아침에 가면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김형준과 이야기했다. 김형준이 보고 때문에 사무실에서 나가면 김학성은 아이패드를 만지거나 스포츠 방송을 보기도 했다.

 

▲ SBS ESPN 방송 화면 캡처

 

전화도 자유롭게 썼다. 그렇게 있다가 오후 4시쯤 다시 구치소로 돌아왔다. 김학성은 김형준에게 금전적 지원은 받은 오강수를 소개하며 그도 함께 소환해달라 부탁했다. 김형준은 김학성을 소환할 때 두 차례 오강수도 불렀다.  그 자리에서 김학성은 오강수를 잘 부탁한다며 거듭 부탁했다. 김형준은 가석방 등 김학성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다.

 

2012년 5월 6일 출소한 김학성은 오강수가 가석방될 수 있도록 돕고자 움직였다. 오강수는 가석방 대가로 금전적 도움을 제안하기도 했다.

 


 

출소하고 나서 김형준과 시작한 술자리는 6~7월에 집중됐다. 누가 봐도 향응일 수밖에 없는 접대였다. 당시 출소 직후인 만큼 별다른 수입원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술값을 낼 능력이 없어 지인 A 씨가 대신 내주기도 했다. A 씨는 나중에 법정에서 당시 술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김형준이 검사이다 보니 나중에라도 도움을 받고자 계속 접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유가 없을 때도 어쨌든 저에게 술을 먹으면서 제가 계산할 수 있게 같이 술자리를 마련한다는 자체를 봤을 때는 나중에 도움을 받겠다는 이유밖에 안 됩니다.”

 

김학성은 매달 오강수를 면회했는데 당시 오강수는 무척 곤란한 상황이었다. 2012년 6월 여비서가 자금을 횡령한 것이다.

 

오강수는 김형준에게 여비서 횡령 사건을 부탁했다. 오강수 측근은 문자를 보내며 사건 처리를 독촉했으나 김학성 집안에 복잡한 일이 있었다. 부친이 위독했던 것이다.

 

12월 14일 김형준을 만나려 했던 당일,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김형준은 만사 제치고 오겠다 했으나 거절했고 부친 유언대로 가족장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KK게임즈를 하면서 오강수를 만날 기회가 더 없어졌다. 여기까지가 김학성 진술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오강수 씨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 이름은 오강수. 나는 유사수신범행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 말 구치소에서 김학성을 알게 됐다. 함께 지내다 보면 서로 자기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 마련이다. 나는 밖에 여비서를 두고 불법다단계로 번 돈을 관리한다고 말했다. 김학성은 당시 사기죄로 구속 재판 중이었다.

 

김학성은 검사인 김형준과 친구라고 했다. 김형준이 검사가 된 직후부터 접대도 하고 용돈도 주면서 스폰서 역할을 하며 관리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런데 김형준이 UN으로 파견되는 바람에 수사 과정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김학성은 김형준이 자기 안부를 묻는 이메일 내용을 보여주며 관계를 자랑했다. 둘 사이가 가깝다는 확신이 들었다.

 

당시 나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형량이 상당히 남았기에 가석방을 받을 요건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 처지에서 검찰에 범죄정보 제공으로 공적을 쌓다보면 가석방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솔깃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검찰이 매력을 느낄만한 정보가 없었다.

 

반면 김학성에게는 굵직한 범죄정보가 제법 있다고 했다. 자기 계좌에서 수십억이 나간 흔적들을 보여줬다. 김형준 장인인 국회의원 박희태 씨에게 건넨 정치자금이 30억 원 정도 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 채널A 방송 화면 캡처

 

어느 날 김학성은 종이 한 장에 대기업 비자금 뇌물 사건, 판검사 뇌물 사건, 경찰·국세청 공무원 뇌물 사건을 적어서 보여줬다.

 

“나에게 이런 사건들이 있으니 김형준이 UN에서 돌아오면 형님이 가석방 받거나 최소한 교도소에서 편하게 지내도록 조치해주겠다”

 

김학성은 김형준만 UN에서 돌아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수차례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제가 재판을 받는 사건에 대한 합의금을 지원해 달라.”

 

나는 여비서를 시켜서 김학성에게 합의금 수억 원을 전달하도록 했다. 2011년 김형준이 대검찰청 범죄정보2담당관으로 복귀했다. 나와 김학성은 2011년부터 2012년까지 김형준이 근무하는 대검찰청에 두 차례 소환됐다. 부장검사 사무실에서 김학성은 존칭도 쓰지 않은 채 김형준을 ‘김 부장’이라고 불렀다. 김학성은 김형준과 친구인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김형준은 별 말없이 업무적인 이야기를 했다. 김형준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김학성이 나에게 말을 꺼냈다.

 

“김형준 부장이 형님을 위해 가석방을 알아봐주는 중이니까 김 부장에게 직접 들어보세요.”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 김형준이 나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외국에는 플리바게닝 제도, 즉 범죄정보제공과 관련된 가석방 제도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제도가 없습니다. 다만 수감자가 자기가 아는 고급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에는 향후 가석방에 가점 요인으로 작용하는 제도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설명을 들으면서 김학성에게 믿음이 갔다. 김형준 설명은 제대로 된 범죄정보를 제공하면 가석방을 신속하게 받도록 힘 써주겠다는 취지로 들렸다. 김형준은 고급 범죄정보 제공에 협조를 구했다. 나도 김형준에게 제공할 정보를 하나 준비했다.

 

오강수가 모 국회의원에게 향응과 함께 현금 500만 원을 줬다’.

 

김형준은 ‘좀 약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전히 나는 김학성 지시에 따랐을 뿐이었다. 소환 전에 김학성은 내게 편지를 보내 얘깃거리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날 들어보고 필요하다면 아주 간단히 김 부장 앞으로 진술서 쓸 겁니다. 모양새와 명분을 갖추기 위해서입니다. (사건화 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라도 흠 잡히지 않게 하는 조치입니다. (...) 누가 묻지도 않겠지만 혹시 흠이 있어서는 안 되는 주의이십니다. 뭘 하나 하더라도 앞뒤 좌우 완벽하게 하려 하십니다’.


 

 

김학성은 2012년 5월 6일 만기출소를 했다. 그 직후 내 비서를 시켜 김학성에게 1000만 원을 송금하도록 했다. 김학성이 가석방, 교도소 이감 등 내 수감생활 편의를 위해 움직여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김학성은 정기적으로 면회를 왔다. 그리고 김형준 이야기를 주로 했다.

 

“김형준과 맨날 술을 마신다. 용돈도 준다. 형님을 위해서 밖에서 엄청 애쓰고 있다.”

 

김학성에게 김형준을 만나면 잘 이야기해달라는 취지로 부탁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에는 내가 변호사법 위반, 사기 등으로 고소할까봐 면회를 충실히 왔던 것 같다. 나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학성 태도를 보면, 김학성이 김형준을 내세워 구치소에서 저와 한 돈거래에 대해서 문제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저도 실제로 김학성 친구가 김형준이라는 점 때문에 변호사법 위반 등으로 고소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2년 7월이 됐을 때 김형준에게 부탁할 일이 추가됐다. 내 여비서가 돈을 모두 들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나는 비서를 횡령으로 고소했고, 김형준이 이 사건을 잘 챙길 수 있도록 김학성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2012년 말 김학성 부친이 사망하면서 내 아쉬운 얘기만 할 수 없었다. 김학성이 면회 오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2015년으로 넘어가자 사업이 바쁘다며 면회 오지 않았다.

 


 

그래도 오강수 처지에서는 건넨 돈을 고급 범죄정보와 맞바꿨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오강수는 김학성이 건넨 고급 범죄정보를 손에 쥐었다. 오강수는 2010년 말부터 7년 동안 김학성이 종이에 써준 범죄정보 내용을 여러 장 복사해 서울중앙지검을 비롯한 여러 검찰청에 근무하는 검사들과 담당 수사관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정보를 바탕으로 실제 수사가 시작된 적은 없었다.

 

2017년 말 오강수가 재판 증인으로 나왔을 때 김형준 변호인은 그 이유를 알려줬다.

 

“저거 가짜라는 말 안 하던가요? 김학성은 다 거짓말로 썼대요.”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김학성이 오강수 구명활동을 위해 애를 쓴 것은 분명하다. 김학성은 오강수 구명을 위해서 김형준에게 돈을 건넸다고 말했다. 2012년 11월 15일에서 12월 14일 전으로 날짜도 특정 가능했다. 그 이후에 건넨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012년 12월 14일에는 김학성 부친이 돌아가셨고 두 친구는 한 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나왔다.

 

“김학성 부친 사망일은 2013년 10월 21일. 내 기억에.”

 

이 증언을 한 사람은 KK인터네셔널 대표이사였던 이문재다. 이문재도 김학성 소개로 김형준과 술자리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김학성은 왜 이 시점에 부친 사망이라는 카드를 꺼내야 했을까? 이제 이문재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음 4화- 부친사망일의 진실-이문재 시선)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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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케어해줘. 연재 순서.

⦁제1화. 보험성뇌물의결말 (폭로자 김학성 시선)

⦁제2화. 제말이그말입니다 (김학성 동업자 한수찬 시선)

⦁제3화. 앞뒤좌우완벽하게 (김학성 구치소 동료 오강수 시선)

⦁제4화. 부친사망일의진실 (김학성 전 사업 파트너. 이문재 시선)

⦁제5화. 난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변호사 시선)

⦁제6화. 대검케어가최고야. (작가 시선)

 

 

 

 

 

 

<김형준 스폰서 검사 사건 재판 추적기> 제2화 제 말이 그 말 입니다. (한수찬 시선)

 

 

나는 한수찬이다. 나와 김학성, 김형준은 고교 동창이다. 그러나 이들을 가까이할 기회가 없었다. 김형준은 총동문동창회에서 몇 번 보기만 했다. 보통 45~50명 정도 모이므로 김형준은 나를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김형준은 동창회에 잠시 있다가 밀린 업무 처리 때문에 검찰 차량을 타고 돌아갔다.

 


 

가까이서 김형준을 접한 것은 김학성 덕분이다. 내가 김학성과 얽힌 것은 2015년 1월부터다. 김학성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면서 나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권했다.

 

 

 

당시 김학성은 KK인터내셔널에 다니고 있었다. KK인터네셔널 대표이사 이문재가 경영을 못해 망할 것 같다며 회사 게임사업부만 빼내 새로운 법인을 설립할 것이라고 했다. 그게 바로 KK게임즈다.

 

이후 나는 KK게임즈 대표이사가 됐지만 등기만 했을 뿐 회사 전반적인 업무는 김학성이 총괄했다. 나도 김학성 지시대로 움직였다. 김학성이 단골 술집 여직원에게 빌려 준 돈을 회수하는 일도 했다.

 

KK게임즈는 중국 샤오밍 전자 제품을 국내 거래처에 판매하면서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김학성은 샤오밍 전자제품을 국내에서 가장 싸게 팔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국내 업체를 상대로 영업하고 계약하는 일을 담당했다. 국내 거래처에서 현금이 들어오자 매출은 늘었다. 덩달아 직원 회식도 잦았다. 결제는 언제나 김학성 몫이었다.

 

 

직원들 모두 김학성 인맥과 재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김학성은 처가 재산도 상당했다. 한 달에 두 번 용돈을 받는데 한 번에 2000만 원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 번은 회식 중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나왔다. 정치인 김무성이 나오자 김학성이 한마디 했다.

 

“아, 우리 6촌 형님.”

 

김학성은 김무성이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6촌 형님’이라고 불렀다. 직원들도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삼성 이재용, 신세계 정용진을 언급할 때도 항상 ‘형님’ 호칭을 썼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하루는 김학성이 내게 재벌 2세들과 9인회 모임이 있다며 동행을 권했다. 그런데 바로 김학성 일정이 바뀌었다. 모임이 파기됐고 김형준과 셋이 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평소 김학성은 김형준을 매우 가까운 사이로 내세웠다.

 

술집에서 보니 둘은 정말 친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대화에 깊이 끼어들지 못했던 나는 술 몇 잔 마시고 먼저 일어났다. 다음 날 김학성은 술값을 자신이 냈다고 말했다.

 


 

2016년 2월 KK게임즈 사무실 근처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던 김학성은 이런 얘기도 했다.

 

“김형준이 여자랑 사랑에 빠졌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줬다.”

 

김학성은 김형준 뿐 아니라 고교 동창에게도 중국에 있는 큰 기업을 언급하며 회사 매출이 100억 원을 넘는다고 자랑했다. 모임에서는 항상 자신이 술값을 계산하려 했다. 동창들도 술값이 김학성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동창 모임을 연 술집이 자신이 투자해 설립했다며 반은 자기 것이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2015년 말부터 2016년 초까지 김학성은 회사 자랑에 끝이 없었다. 하지만, 나타나는 현상은 달랐다. 2015년 중반부터 거래업체에서 물품 납품 지연 항의가 들어왔다. 9월 들어 납품일자에 물품을 받지 못한 거래업체가 선수금 반환을 요구했다. 거래업체 대표가 사무실에 찾아와 항의하면 김학성은 자리를 피하면서 나에게 떠넘겼다.

 

2015년 12월부터 나는 거래업체 관계자와 회사 근처에서 만나며 계속 이야기했다.

 

번은 김학성에게 돈을 서둘러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김학성은 돈을 벌어야 갚는 것 아니냐며 오히려 영업을 독촉했다.

 

2016년 1월 납품이 장기간 지연되자 업체들 항의가 거세졌다. 김학성은 중국 명절 기간 공백 등을 내세우며 상황을 넘겼다. 2016년 2월 들어서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김학성에게 물품 입고 일정을 계속 물었다. 김학성은 중국 쪽 문제든 국내 통관 절차 문제든 항상 이유는 설명했다. 나는 그 해명을 거래 업체 관계자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김학성은 오히려 거래 업체에 끌려다니지 않는 당당한 영업을 강조했다.

 

“그 사람들이 매일 찾아와서 괴롭히면 업무방해로 고소해라. 뒤에서 형준이가 봐주는데 넌 왜 그리 겁이 많니?”

 

2016년 3월 14일 김학성은 다시 내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 형준이하고는 통화했다. 만일 일이 발생하면 서부지검에 업무방해등으로 형사 고소하고 처벌해버리자. 형준이가 나 건드리면 죽여버리자고 한다.

 

직원들도 회사가 어렵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직원들은 나중에라도 김학성이 회사에 자기 자금을 투여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학성 또한 자기 재산을 거론하며 일부만 대출받아도 해결된다고 큰소리쳤다.

 

실제 3월 중순부터 거래처 항의가 거세지자 김학성은 거래처 환불 문제를 개인 돈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대신 대표이사인 내가 일처리 잘못으로 회사에 피해를 입힌 모양새를 갖추자고 했다. 김학성은 이사회를 열어 형식적인 권한정지를 결의할 테니 잠시 피해 있으라고 했다.

 


 

3월 18일 KK게임즈 이사회가 열렸고 이후 나는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당시 나는 김학성이 잠시 사용하라며 건넨 휴대폰이 있었다. 휴대폰은 로그인이 된 상태였다. 나는 휴대폰으로 김학성 계정 이메일을 볼 수 있었다. 이메일에는 KK게임즈 회사 지출 및 자금 현황 보고서가 있었다. 그 자료를 열어본 순간 나는 김학성이 그려놓은 큰 그림을 알게 됐다.

 

그 보고서 거래업체에 납품이 지연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김학성은 국내에는 샤오밍 제품을 수입 가격보다 더 싸게 판매하도록 지시했다. 초기에는 외형적으로 회사 매출이 증가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오래 운영할 수 없다.

 

그러나 13~15개 거래업체에서 30억 원이 넘는 현금을 당길 수 있었다. 김학성은 이 가운데 20억 원 이상을 횡령해 유흥비로 썼다. 김학성은 이 모든 짓을 덮어 씌울 상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제안한 것도 큰 그림 안에 들어 있지 않았을까.

 

보고서를 보다가 ‘김형준 대여금’으로 두 군데 찍힌 항목이 눈에 띄었다. 2월 4일 500만 원, 3월 8일 1000만 원 등 총 1500만 원이 김형준에게 흘러갔다. 김학성이 김형준에게 돈을 해줬다는 말을 들은 게 2월 초였다. 그 내용을 서류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나는 3월 26일 이 자료를 들고 피해 규모가 가장 큰 업체인 아스트라를 찾아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는 아스트라에 김학성 고소를 위임했다. 아스트라는 법무법인 로얄에 일을 맡겼다. 일을 진행하면서 김형준 부분은 뺐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스트라는 단호했다.

 

4월 15일 아스트라와 나는 각각 서부지검에 김학성을 사기와 횡령으로 고소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학성은 자료를 회수하려 아스트라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니 돈을 갚으려면 선수금 더 내라.”

 

6월 3일 나는 서부지검에 출석해 고소인 조사를 받았다. 주임검사가 김형준과 관련된 부분을 물어봤다. 나는 김학성에게 들은 대로 간단하게 진술했다.

 

▲ 발로 뛰는 김희란 변호사 블로그 사진 인용

 

당시 김학성은 김형준 검사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식으로 소문을 냈다. 거래업체에서도 김학성이 뒤에 검찰이 있다는 이야기를 흘리고 다닌다고 했다. 급기야 김형준이 김학성을 위해 서부지검 검사들과 식사를 한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이 당시 나는 극도로 두려운 상태였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기자들에게 언론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했을 정도로 내 방어책이 필요했다.

 

내가 고소한 이 사건은 결국 두 동창생을 뇌물공여와 뇌물수수로 재판에 서게 했다. 그런데 각각 주장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김학성은 오랫동안 검사 친구 스폰서 노릇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김형준은 과장이라고 받아쳤다. 김형준은 ‘김형준 대여금’으로 표시된 1500만 원도 뇌물이 아니라 빌린 돈이며 갚았다고 주장했다. 둘 사이에 현금이 오간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이 사건을 차분하게 되짚었다.

 

김학성은 나에게 일시를 정해서 김형준과 함께 만나자고 한 적이 없었다. 늘 당일 갑자기 가자고 했다. 회사 직원들도 나처럼 갑자기 합석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혹시 우리 회사는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김형준 변호인은 김학성이 말하는 뇌물 부분이 거짓이며 향응 횟수도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나는 김형준 측 주장에 동감하며 회사 자료를 그쪽에 건네줬다. 증거자료 제출에 KK게임즈 회사 직원도 도왔다. 나는 법정에서 자료를 건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김학성은 몇 월 몇 일 몇 시에 김형준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날은 저랑 같이 있던 날이거든요. 그런데도 김형준을 만났다고 하니까.”

 

나는 김형준 변호인에게 김학성이 오랫동안 단골로 다니던 유흥주점 <달> 사장 장미희도 소개했다. 변호인은 장미희에게 장부를 제공받았다. 김학성이 술 마신 날짜와 액수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기에 김형준에게 유리한 자료들이었다. 변호인은 법정에서 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2016년 6월 김형준에게 빌려줬던 1500만 원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있다고 가족을 위해 최대한 마련해야 한다고 하면서까지 그 돈을 받아냅니다. 김학성이 술집 여직원에게도 법무팀 운운하며 돈을 회수할 정도인데 만약에 김학성이 김형준에게 뇌물로 건넨 다른 돈이 있다면 언급을 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변호인 말에 동의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내 기억에 김학성은 입이 무거운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나와 술을 마시다가 대리비 5만 원을 건넨 적이 있었는데 이튿날이면 직원들이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김학성도 가만있지 않았다. 변호인에게 자료를 넘겨준 것을 문제 삼아 나를 서부지검에 고소했다. 유흥주점 <달> 관할 기관에 장부 사본을 근거로 이 주점이 여성 접대부 등을 두고 영업한다고 고소했다. 종업원들이 팁을 받은 내용이 적힌 장부 한 장을 첨부해 종업원들 처벌을 요구했다.

 

물론 김학성은 KK게임즈 이전부터 김형준에게 향응과 뇌물을 제공했다고 했다. 교도소에서 만난 오강수 씨 구명활동을 위해서다.

 

당시 둘 사이 일은 나(한수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오강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음 제3화, 앞뒤좌우 완벽하게(오강수 시선)으로 이어집니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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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암투

 

2011년 6월 20일 아침 조현오는 청와대에서 급한 호출을 받는다. 청와대 조정회의에 출석하라는 것이었다. 조현오는 수행자 없이 청와대에 갔다. 회의에는 대통령실장 임태희, 민정수석 권재진, 법무부장관 이귀남, 검찰총장 김준규 등이 참석했다.

 

김준규는 검찰총장을 하면서 큰 위기를 두 번 맞는다. 2010년 4월 MBC 수첩>이 ‘검사와 스폰서’를 방영한다. 부산에 한 건설업자가 25년 동안 검사에게 금품과 향응, 성접대 등을 제공한 내용이었다. ‘스폰서 검사’ 파문으로 김준규는 대국민 사과에 이어 자체 개혁안을 발표한다. 개혁안 가운데 하나가 비리 검사를 수사하는 ‘특임검사제’ 도입이었다.

 

이 특임검사가 임용된 첫 사건이 바로 2010년 11월 ‘그랜저 검사’ 사건이다. 한 건설업자가 검사에게 사건을 부탁하면서 승용차 구입비를 대납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위기가 바로 청와대 조정회의였을 테다. ‘형사소송법 196조’를 개정하고자 국정 운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날 열린 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평검사회의는 검찰 근간을 흔드는 긴급 현안이 있을 때마다 열린다. 2003년 참여정부가 검찰 출신이 아닌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할 때도 평검사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법률 개정은 검사 작성 조서가 지닌 증거 능력을 제한하는 쪽으로 진행됐다. 검찰이 자백만 받으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컸다. 하지만, 검찰은 평검사회의를 열어 반발하며 형사소송법 312조를 지켜낸다.

 

 

법률 개정은 국회의원 입법, 정부 제출 등 다양한 통로로 이뤄진다. 형사소송법 196조 법률 개정 논의는 2010년 2월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가 시작했다. 그해 10월 법원과 검찰 제도 개혁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으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압수수색을 진행한다. 검찰을 향한 정치권 반감은 깊어졌다.

 

사법제도개혁특위는 특별소위원회를 구성해 2011년 3월 10일 여야 합의안을 발표한다. 주요 개혁안으로 경찰수사권 독립이 있었다. 이 발표는 검찰 출신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이 주도한다. 검찰 출신이 경찰을 돕는 상황이지만, 조직 입장에서는 검찰과 경찰이 붙는 모양새가 됐다. 세력이 막강한 검찰에 맞대응하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다. 경찰 안에서는 차라리 수사권 독립을 차기 대선 공약에 집어넣는 게 낫다는 계산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현오 생각은 달랐다.

 


 

본격적으로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변경을 위한 특별소위원회가 가동됐다. 경찰과 검찰이 벌이는 신경전은 언론을 탔다. 조현오는 5월 26일 전국 지방청장 화상회의에서 총경 이상 간부에게 “직을 건다는 자세로 임하라”라고 말했다.

 

김준규 검찰총장이 주재한 검사장급 이상 간부회의에서 즉각 반응했다. 대검 차장인 박용석은 “조직을 위해 직을 건다는 것은 조폭이나 하는 말”이라고 받아쳤다.

 

5월 31일 검사인 윤대해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경찰 수사개시권 명문화와 관련해 깊은 우려와 분노를 금할 수 없다”라고 적었다. 그동안 특별소위원회 단위에서 논의가 진행됐지만 조문 합의안은 나오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동료 의원 반대가 심하다. 그 배후에는 법원과 검찰이 있다. 국회의원을 조종하고 협박하고….”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작업은 총리실로 넘어간다. 총리실에서 검찰과 경찰 수사권 조정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경찰은 수사구조개혁 팀원이, 검찰은 검사들이 참석했는데 윤대해 검사도 눈에 띄었다.

 

논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6월 19일 서울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개시권 명문화 반대 분위기를 조성한다.

 

6월 20일 청와대에 국정운영자들이 모였다. 6월 14일 대통령 이명박은 총리실이 적극적으로 조정에 나설 것을 지시한다. 이명박은 “경찰이 법적 근거도 없이 수사하는 현실을 개선하라”라고 말했다. 김준규는 평검사회의 견해를 되풀이했다.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은 결코 고칠 수 없으며 경찰 수사개시권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정회의를 마친 조현오는 경찰청으로 돌아와 말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BH(청와대) 최종 합의안에 서명하고 왔다.”

 

조현오는 196조 조항에 ‘경찰의 수사개시와 진행권’을 확보했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가 합의한 내용에는 ‘경찰은 모든 수사에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는 조항도 있었다. 게다가 검사 지휘에 관한 사항은 ‘법무부령’으로 정하기로 했다. 조현오는 ‘모든 수사’에 경찰 내사가 포함되지 않고 법무부령 제정도 경찰과 합의하기로 국정운영자와 약속했다고 내세웠다. 조현오는 그 약속을 실제 믿었다. 하지만, 경찰은 ‘순진한 발상’이라며 비난했다.

 


 

합의안을 발표한 이튿날인 6월 21일 검찰 반응에 경찰 내부 분위기가 격앙됐다. 대검 기획조정부장 홍만표는 “조 청장 주장대로라면 구두합의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후 국무조정회의에 참석한 대통령실장 임태희, 안전행정부장관 맹형규, 법무부장관 이귀남은 국회에서 내사는 수사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확인해준다. 국회도 청와대 조정안에 나온 ‘모든 수사’에 대한 해석을 제한한다. 민주당 의원인 박지원은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모든’을 삭제하고 검사 지휘는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 근거가 돼야 한다는 게 여야 공통의견이라고 밝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찰청 나름대로 애쓴 결과였다.

 

6월 30일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법무부령’은 ‘대통령령’으로 바뀌었다. 검찰은 잇달아 자리에서 물러나며 개정안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대검 기획조정부장 홍만표를 비롯한 검사장들이 먼저 물러났다. 검찰총장인 김준규도 사표를 냈다. 후임 검찰총장이 바로 한상대다.

 

 

한상대 검찰총장에게 경찰과 ‘대통령령’을 만드는 작업을 맡겨졌다. 그 해 12월 27일 대통령령이 시행되기까지 검찰에 비난 여론은 계속됐다. ‘벤츠 여검사’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11월 30일 이창재 안산지청장을 특임검사로 임명했다. ‘그랜저 검사’ 이후 2번째다.

 

여검사 A씨는 모 변호사 부탁을 받고 다른 검사에게 사건을 청탁한 의혹이 있었다. A씨는 내연관계였던 모 변호사에게 벤츠 승용차 등을 받아 ‘벤츠 여검사’로 불렸다. “국산차는 이제 저리 가라”라는 비난이 인터넷을 달궜다. 여검사 A씨는 12월 7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된다.

 


 

이듬해 검찰수사가 시작된다. 2012년 2월 28일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가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경찰청 정보국장으로 국회의원 설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날 검찰은 한나라당 의원 주성영을 ‘성매매 의혹’으로 소환 통보한다.

 

주성영은 사법개혁을 주도한 자신에게 검찰이 앙갚음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현오가 4월 퇴임하자 검찰 조사가 시작됐다.

 


 

조현오는 경찰청장 재직 당시 경찰청 범죄정보과와 지능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검찰로서는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경찰에 ‘김광준 검사’ 사건이 걸려든다. 한 기자는 ‘김광준 검사 사건’을 두고 “유사 이래 경찰이 검찰을 향해 날린 최고의 빙엿”으로 표현했다.

 

이 사건은 2008년 12월 9일 금융다단계를 하던 조희팔이 회사 돈을 챙겨 중국으로 밀항한 데서 시작된다. 당시 투자자가 3만여 명 피해액은 4조 원 정도로 추정됐다. 오래전부터 금융감독원이 유사수신행위를 포착하고 수사당국에 정보를 줬으나 수사에 진척이 없었다. 오히려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수사당국과 조희팔 사이 유착관계였다. 뇌물 혐의로 수많은 경찰이 사법처리됐고, 조희팔을 비호하는 세력으로 권력층 이름이 나돌기 시작했다.

 

수사는 두 갈래로 진행됐다. 중국에 있는 조희팔을 잡아들이는 것과 조희팔이 국내에 숨겨둔 자금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범죄정보과에서 조희팔 관련 정보를 넘겨받아 수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검사 김광준이었다. 서울고검 검사인 김광준의 차명계좌를 발견한 것이다. 자금줄은 조희팔 측근이었다.

 

김광준은 중앙지검 특수3부장 검사였다. 특수부는 청와대가 맡긴 사건을 담당하는데 당시 환경재단 최열을 수사하고 있었다. 당시 최열은 MB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사업에 걸림돌이었다. 여론은 당연히 ‘표적 수사’를 의심했다. 검찰은 최열과 주변인 계좌를 샅샅이 뒤졌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최열은 주변에 차명계좌가 뭔지 묻곤 했다. 그런데 오히려 김광준이 차명계좌로 검은돈을 받았다는 정황을 경찰이 포착한 것이다.

 

경찰이 김광준을 조사했다는 사실은 11월 8일 보도된다. 당시 검찰총장 한상대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검 중수부장인 최재경이 이미 보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상대는 김광준 검사와 통화해 사정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11월 8일 일부 매체 기자가 김광준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 김광준은 중수부장인 최재경에게 기자 대응 요령을 묻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최재경은 강하고 단호하게 실명을 보도하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대처할 것을 조언한다. 이튿날 한상대는 경찰 반발에도 특임검사 카드를 꺼낸다.

 

황운하는 당시 특임검사인 김수창이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는 점은 동의했다. 당시 검찰은 경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찰이 김광준 사건 조사 과정에서 소홀한 부분이 있다면 경찰이 파고들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11월 중순 서울 동부지검 성추문 검사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동부지검에서 실무수습 중이던 검사가 여성 피의자를 검사실로 불러 성관계를 한 것이다.

 

검사인 윤대해는 24일 내부 게시판에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기소배심제, 검찰 직접 수사 자제, 상설특검도입 같은 검찰 개혁안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은 모두 대검 지침으로 가능했다. 지침으로 가능한 일을 개혁안이라고 들고 나왔으니 한쪽에서는 ‘위장 개혁’이라는 빈정거림이 불거졌다. 끓는 기름에 불을 붙인 것은 윤대해가 동료에게 보내려던 문자메시지였다.

 

‘○○아. 대해다... 내가 올린 글이 벌써 뉴스에 나오고 있구나.... 우선 어떤 방안이든 검찰이 조용히 있다가 총장님이 발표하는 방식은 그 진정성이 의심받는다... 내가 올린 개혁방안도 사실 별거 아니고 우리 검찰에 불리할 것도 별로 없다..... 언론에서 그런 평검사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고 이후 일선 청에서 평검사회의를 개최하고 서울중앙은 극적인 방식으로 평검사 회의를 개최하고.... 이런 분위기 속에 총장님이 큰 결단을 하는 모양으로 가야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받은 이는 언론사 기자였다. 예정된 서울중앙지검 평검사 회의는 이 사건 여파로 취소된다.

 

검사들은 오히려 총장 집무실로 몰려가 사퇴를 촉구했다. 한상대가 중수부장인 최재경을 감찰한 게 발단이었다. 한상대는 김광준과 최재경이 주고받은 문자 내용을 문제 삼는다. 한상대는 검찰 위기를 중수부 폐지 카드로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최재경은 반대파였다. 결국, 한상대는 2012년 11월 30일 최재경을 손보려다 축출당하는 모양새로 사표를 냈다. 하지만, 한상대는 자기 임기 동안 검사가 경찰서에 출두해 조사받는 것은 막았다.

 

‘카톡’

 

스마트폰 카카오톡에 한 여성 사진이 올라왔다. 성추문 검사 사건 피해 당사자였고 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 추적 결과 검사 10명을 포한한 검찰 수사관이 해당 전산망에 접속한 게 확인됐다. 검찰도 더는 여론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해 마지막 날, 현직 검사가 최초로 경찰서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는다.

 

 

경찰 구성원이 검경 관계를 다시 인식한 계기는 형사소송법 법률 개정보다 검찰과 경찰이 다투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찰 조직에서 조현오가 추진해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황운하는 어떤 견해를 드러냈을까. 그는 2011년 6월 20일 조현오가 청와대 합의안에 서명을 했을 때도, 경찰이 만족하지 못하는 대통령령을 만든 직후에도 조현오 퇴진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런 황운하에게 왜 이택순 퇴진은 요구해놓고 조현오는 그냥 두느냐는 질문을 하는 이도 있었다.

 

“조현오는 최선을 다해 진일보한 조정안을 만들려는 과정에서 문제가 비롯됐고 내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의견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나가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경찰은 황운하 발언 배경에는 조현오식 조직 관리법이 있다고 했다. 조현오는 조직 내 비판 세력을 항상 곁에 둬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그러면서 비판 세력 상당수를 자기편으로 돌아서도록 했다. 황운하 기용도 결국 조현오식 ‘포퓰리즘’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분석은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파퓰리즘 전략으로 조직을 장악했다는 조현오가 정작 경찰 직원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다음 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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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인사정의 실현, 전·의경 가혹행위 근절, 경찰과 업주 통화 금지, 성과주의 등 개혁과제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전국으로 확대했다. 조직 정비에 해당하는 일이다. 물론 경찰청장 업무가 안으로 향하는 조직 정비만 있는 게 아니다. 밖으로는 조직 처지를 적절하게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경찰은 밖으로 견해를 드러낼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내무부 직속기관이었던 경찰이 독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은 것은 1991년 경찰청으로 승격되면 서다. 이때부터 경찰은 치안에 대해 자율권을 보장받는다. 경찰 조직 위상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수사권이다. 조현오는 수사권에 대해 어떤 견해를 밝혔고 대응했을까. 그보다 먼저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기 전까지 경찰과 검찰 관계는 어땠을까.

 


 

젊고 자부심 강한 경찰대 출신 수사과장이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피의자는 검찰 출신이었고 피해자는 일반 서민이었다. 경찰은 구속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담당 검사는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것을 지시했다. 수사과장이 거부하자 부장검사가 불렀다. 연륜이 풍부한 형사팀장이 걱정이 돼 수사과장과 부장검사실로 동행했다.

 

당시 형사소송법 제196조(사법경찰관리) 제1항에는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었다. 부장검사는 수사과장에게 반성문 제출을 요구하며 ‘잘못’이라는 문구를 넣도록 지시했다. 부장검사와 수사과장 사이에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사팀장은 점점 불안해졌다.

 

경찰에 대한 검찰 특권 중에는 일반적인 수사 지휘권과 더불어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구속하는 유치장에 대한 감찰권이 있다. 만약 경찰이 검찰 눈 밖에 나면 유치장 감찰을 핑계로 경찰서에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형사팀장이 나섰다.

 

“부장님. 우리 과장님은 수사가 처음입니다. 비록 과장이지만 수사를 잘 모르십니다. 제가 반성문을 쓰겠습니다.”

“그럼 과장 대신 팀장이 쓸 겁니까?”

“네. 쓰겠습니다. 과장님 나가게 해주십시오.”

 

수사과장이 나가고 부장검사와 단둘이 남게 된 팀장은 살며시 물었다.

 

“부장님. 도대체 이게 왜 필요합니까?”

“주임검사가 반성문을 못 받아왔으니 내가 받아놓아야 다른 검사에게 ‘이런 것도 못 받는 너희들이 무슨 검사냐’라고 질타할 때 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릴게요. 검사들에게는 사경(사법경찰관) 불러다가 혼냈더니 잘못했다고 말하더라고 교육하면 되잖아요.”

 


 

조현오는 1990년 경찰서 과장으로 입문했다. 하루는 검사와 면담 약속을 했다. 그렇게 검찰청으로 찾아간 조현오를 검사는 방 밖에서 한 시간 기다리게 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갔더니 검사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반면 유치장 감찰을 온 검사는 수사과장 자리에 앉았다. 수사과장 중에는 당연한 듯 자리를 내주는 이도 있었다. 한 경찰은 ‘형사소송법 망령’이라고 한탄했다.

 

경찰과 검찰은 서로 다른 기관이지만 검사는 경찰에게 협의 공문 없이 지시했다.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보고 싶으면 경찰서로 오면 된다. 하지만, 검찰은 굳이 경찰에게 피의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이를 ‘피의자 신병인치’라고 한다. 경찰은 검찰이 지원을 요구할 때마다 업무를 제쳐두고 가야 했다. 검찰에 파견된 경찰은 검사가 미행이나 단속을 지시하면 수행하는 일을 맡았다.

 

형사과장이던 조현오는 검찰과 부딪히기보다는 자기 일에 신경 쓰자는 쪽이었다. 권위적인 모습으로 따지면 경찰 조직도 검찰과 다를 바 없었다. 경찰서 생활안전과장도 일선 파출소에 가면 파출소장 자리에 앉는 일이 허다했다.

 


 

경기지방경찰청 시절 조현오에게 참모 역할을 하는 형사과장이 이런 질문을 했다.

 

“오락실 업주와 물 한 잔도 마시지 말라는 등 강경 조치를 펴는 이유가 뭡니까?”

 

“경찰 부패를 도려내면 국민이 경찰을 지지할 것이고 그런 여론을 바탕으로 수사권을 가져올 거야.”

 

형사과장 생각은 달랐다. 경찰 조직에 힘을 실을 방법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직 부패를 도려내는 것보다 첩보가 들어오는 큰 사건에 바로 달려들어 국민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사권 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1999년 DJ 정부 때다. 그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며 행동으로 옮긴 이는 황운하였다. 서울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이던 황운하는 검찰에 파견된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렸다.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를 고려하면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반란이었다. 그 후 집중 논의 끝에 경찰청장 김광식은 검찰에 파견된 전국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린다.

 

그 후에 검찰은 정보국장인 박희원을 수사했다. 이후 경찰청장을 지낸 이무영, 이팔호, 최기문은 수사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다음 경찰청장이 외교관 시절부터 조어 능력이 탁월했던 허준영이다. 허준영은 경찰청에 수사권 문제만 전담하는 ‘수사구조개혁팀’을 만든다. 허준영이 하는 말은 종종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지구 상에 없는 게 두 가지, 다케시마와 대한민국 경찰 수사권.”

 

“지금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권검책경(權檢責警), 권한은 검찰에 있고 책임은 경찰이 진다인데, 이제는 권경책경(權警責警), 즉 수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경찰이 질 테니까 그에 따른 권한도 경찰에 줘야 한다.”

 

2005년 9월 8일 허준영은 한 손님이 청장실로 오는데 외사관리관 조현오에게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청장실로 들어온 손님은 세계적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와 그의 아내였다. 허준영은 유창한 영어로 “한국 경찰 최대 현안이 수사권 조정”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찰에게 수사권이 없다는 말에 앨빈 토플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라고 답했다.

 

 

 

당시 수사권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경찰청 차장인 최광식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최광식은 검찰 수사로 불명예 퇴진한다. 허준영도 퇴임하고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으나 때마침 선거법 위반으로 수사를 받으면서 공천을 받지 못한다. 이후 경찰청장인 이택순, 어청수, 강희락은 수사권에 대해 별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2010년 8월 30일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조현오 목표는 형사소송법 196조 개정이었다. 법을 개정하려면 국회의원 도움이 필요했다. 이 같은 작업은 경찰 모든 조직 부분에서 노력해야 했지만, 특히 정보 파트 역할이 중요했다. 경찰청과 서울지방경찰청은 모두 정보 분실을 운영한다. 정보 형사들을 정부기관, 사회단체, 지역별 담당구역을 정하고 배치해서 정보 수집 기능을 수행한다.

 

조현오는 충북청장이던 이철규를 2010년 9월 7일 정보국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2010년 12월 3일 서울청 정보과장인 김성근을 경무관으로 승진시키고 서울청 정보관리부장을 맡긴다.

 

 

비슷한 시기에 검찰 수사가 시작된다. 2010년 10월 5일 국회의원 11명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된다. 이른바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이다.

 

청목회(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는 2003년 결성된 단체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청원경찰이 회원인데, 이들은 처우 개선을 목표로 청원경찰법 개정안 통과를 추진했다. 회원이 낸 특별회비로 6억 5000만 원을 만들어 2008년 말부터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를 시작했다.

 

청목회 회원 가족과 친지 이름으로 진행한 ‘쪼개기 후원’을 통해 국회의원에게 전달된 돈은 500만~3000만 원 정도였다. 2009년 4월 발의된 청원경찰법 개정안은 2009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다.

 

검찰 수사에 여야 국회의원은 깊은 반감을 드러냈다. 당시 국회에서는 검찰이 국회의원을 옥죄려고 힘없는 사람들이 낸 소액 후원금까지 정치자금법으로 묶어서 건드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고 한다.

 

2011년 6월 30일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재석 의원 200명 가운데 찬성 175명, 반대 10명, 기권 15명이었다. 이 같은 압도적인 표차는 경찰청이 국회 내 반 검찰 정서 분위기를 잘 파고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형사소송법 개정안 내용을 보자.

 

형사소송법 196조 2항에 ‘사법경찰관은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인식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사실과 증거에 관하여 수사를 개시·진행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경찰도 수사 주체로 인정을 받았기에 수사에 들어가면 검사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

 

이 조항만 보자면 경찰에게 매우 유리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3항은 ‘사법경찰관리는 검사의 지휘가 있는 때에는 이에 따라야 한다.’ 고 나온다. 경찰에 수사개시권이 있더라도 검사 지휘를 따라야 하므로 경찰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현오는 3항에 ‘검사의 지휘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기 때문에 대통령령을 잘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도 3항에 크게 반발했다.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령과 법무부령 차이는 만드는 주체다. 대통령령은 대통령 주재로 각 부처 장관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만든다. 반면 법무부령은 법무부가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 검찰 입장에서는 법무부 장관은 통상적으로 검찰 출신이라 법무부령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현오는 ‘검사의 지휘에 관한 형사소송법 시행령(대통령령)’ 제정을 앞두고 다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협상 테이블에 나갈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전남 곡성서장인 장하연과 전북 정읍서장인 진교훈이 뽑혔다.

 

국무총리실 주재로 경찰과 검찰 측에서 대표들이 나와 논쟁이 시작됐다. 한쪽에서 문구를 수정하면 다른 한쪽에서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됐다. 경찰 쪽에서는 제2조(수사지휘의 원칙)에 ‘검사는 사법경찰관을 존중하고’라는 문구를 원하면 검찰은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제5조(수사지휘의 방식)로 넘어가자 경찰은 검사가 사건 지휘를 할 때는 서면 또는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검찰은 “긴급한 경우에는 전화나 구두로 지휘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경찰이 다시 “그렇게 전화나 구두 상으로 지휘할 때 다시 서면이나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는 방식으로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받아쳤다.

 

국무총리실은 경찰과 검찰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 강제 조정안을 내놓았고 대통령령은 12월 27일 시행됐다. 의욕적으로 진행한 법률 개정이었지만 경찰 조직 안에서 평가는 박했다.

 


 

2012년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첫 번째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였다. 혐의는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였다. 두 번째는 ‘룸살롱 황제’ 이경백이었다. 이경백은 1심 판결 전까지 자신과 유착한 경찰을 불지 않았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자신과 유착된 경찰을 불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2012년 3월 말부터 이경백과 유착한 현직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18명이 옷을 벗었다. ‘비리 경찰’ 뉴스가 언론을 장식했고, 이경백은 2012년 7월 17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

 

조현오는 퇴직하고 나서 차명계좌 발언으로 재판을 받았다. 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을 받고 서울구치소로 들어갔다.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사자 명예훼손죄’에서 8개월 실형이 타당한 양형인지 제기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조현오가 간 곳에는 이경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경백은 2013년 5월 11일 집행유예 기간에 불법 사설 카지노를 운영한 혐의로 구속됐다. 조현오는 구치소 안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 무작정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는데 조현오는 해고 노동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루는 면회 대기 중 옆에서 누군가 조현오를 불렀다. 고개를 돌렸더니 누군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김광준 검사입니다.”

 

(다음 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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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서울과 경기는 스케일이 다르다. 연쇄살인이나 토막살인 사건 같은 강력 사건이 아니라면 경기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미디어 관심을 끌기 어렵다. 반면, 서울에서는 작은 사건과 집회도 어떻게 엮이느냐에 따라 정치적 이슈로 발전하기도 한다.

 

조현오는 2010년 1월 8일 서울지방청장으로 부임한다. 조현오는 바로 역대 서울청장 리더십 분석·평가한 내용을 접한다. 직원 여론과 불만을 수렴해 정책을 추진한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조현오가 밝힌 소감은 이렇다.

 

“다 좋은데… 이렇게 가자니 시간이 어디 있냐?”

 

보통 참모를 비롯해 지휘관 임기는 1년이다. 외사관리관, 감사관, 경비국장, 부산청장, 경기지방청장 등 조현오가 거친 곳에서는 어김없이 직원들 곡소리가 났다.

 

 

처음 3개월 동안 새로운 틀을 짜고 나머지 기간 강하게 추진해 그 틀을 정착하는 게 조현오 방식이었다. 조현오가 조직에 심고자 한 틀은 당연히 ‘성과주의’였다

 


 

조현오는 인사 과정에서 주관적인 지휘관 평가를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통상 인사는 심사위원회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서울청장으로 취임한 조현오는 바로 승진하고 싶은 직원을 강당에 모이도록 했다. 경정·경감 승진 대상자 225명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7시간 남짓 면접이 이어졌다.

 

“자기가 승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봐라.”

 

조현오는 그 자리에서 담당 과장에게 면접한 직원마다 성과를 확인했다. 몇몇 직원은 승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약을 받기도 했다. 성과를 봤을 때 승진이 어려운 직원에게는 그 자리에서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면접에서 탈락이 확정된 직원은 ‘빽’을 쓸 기회조차 사라졌다.

 

당시 직원들이 가장 힘들었던 게 이 같은 인사 방식이었다. 조현오는 2~3개월에 한 번씩 성과 우수자를 내부에 공개해 승진 인사에 반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경쟁에 내몰린 직원들은 안팎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2014년 기준 부산은 경찰서가 15개, 경기도는 41개, 서울은 31개가 있다. 지역이 넓으면 지방청장이 일일이 챙길 수 없으므로 각 경찰서 서장이 치안을 책임져야 한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경찰서 단위로 평가를 진행했다. 성과가 좋은 경찰서는 혜택을 받았고 성적이 나쁜 경찰서는 집중감찰을 받았다. 조현오가 서울지방청을 맡은 시기에는 이 같은 평가 시스템이 무르익는 단계였다. 조현오는 평가 시스템을 적용하기 전에 개념을 구체화하고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서장들과 회의를 했다.

 

“방배경찰서는 치안 수요가 적은 곳인데, 우리는 성과를 많이 낼 수 없어요.”

“종로경찰서와 남대문경찰서는 경호와 행사가 빈번해 실적을 많이 올릴 수 없습니다.”

 

조현오는 불평·불만을 끝장토론, 공청회, 간담회로 돌파하고자 했다. 통상 서울지방청 직원은 2만 3000여 명, 경기지방청 직원은 2만여 명이다. 이 정도 규모면 아무리 청장이라도 직원 공감 없이 일을 추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선 경찰서 정도 규모면 서장이 직원을 마음먹은 대로 끌고 갈 수 있다. 실적을 내지 못하면 집중감찰 대상이 된다. 서장부터 일선 경찰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북경찰서장인 채수창도 이 같은 압박에 시달렸다. 조현오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채수창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도 실적주의에서 살아남으려고 제 직원이 검거 실적을 올리도록 굉장히 독려하고 채찍질을 했습니다.”

 

인사에 대한 불만과 성과주의로 말미암은 피로는 경찰 조직에 꾸준히 누적됐다. 2010년 6월 23일 서울 양천경찰서 소속 경찰관 4명이 구속된다. 피의자에게 고문·가혹행위를 했다는 혐의였다. 이 사건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는 2009년 8월에 시작된다. 조현오 인사청문회 위원인 정수성은 증인으로 참석한 채수창에게 이 점을 확인한다.

 

“증인은 양천경찰서 고문 의혹 사건에 조 청장 책임도 있다며 동반 사퇴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양천서 피의자 고문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생긴 일이고 조현오 내정자는 올해 1월 서울청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양천서 고문 사건과 조현오 실적주의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양천경찰서 고문 의혹 사건은 결과적으로 조현오식 성과주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통로가 된다.

 


 

역풍을 맞게 된 조현오에게 악재가 이어졌다. 강남 룸살롱 업주 유착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가출한 여학생 A양을 서초경찰서 실종팀이 성매매 업소에서 찾아내면서 시작된다. 가수 지망생인 A양은 미성년자였다. 업소 사장 이름은 이경백이었다. 웨이터 출신인 이경백은 2000년 북창동에서 룸살롱을 개업하고 강남 일대에서 유흥업소를 기업형으로 운영했다. ‘룸살롱 업계의 스티브 잡스’, ‘룸살롱의 황제’ 등으로 불리게 된 비결은 다방면에 비호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 단속반에 뇌물도 잘 바쳐야 했다.

 

경찰 단속을 비롯한 유흥업계 정보는 이경백을 거쳤다. 2006년 한화 회장 김승연이 폭행을 저지른 것을 경찰에 흘린 것도 이경백이었다. 경찰은 이경백과 단단히 엉켰고 조직은 점차 곪아 들어갔다. 이경백을 수사한다는 것은 경찰 조직의 종기를 도려내는 일이었다. 그전에 경찰은 이미 이경백에게 농락당한 적도 있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혐의를 포착해 이경백을 수사하려 했을 때 그는 오히려 수사관이 접대받은 내용을 확보해 수사팀을 엎었다.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원래 미성년자 성매매 사건은 생활안전과 소관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형사과에 이 사건을 맡긴다. 당시 형사과장은 황운하 총경이었다.

 

통화기록 분석부터 시작했다. 이경백이 지난 1년 동안 휴대 전화 두 대로 통화한 기록은 몇 만 건이었다. 등록된 사람만 1500명이 넘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검찰과 적잖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검찰은 경찰이 긴급 체포한 이경백을 풀어줬는데, 수사를 이끈 황운하는 언론 브리핑에서 검사 실명을 거론하며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말한다.

 

 

이경백도 만만찮았다. 구속되면 그동안 바친 뇌물 내용을 모두 검찰에 불겠다며 맞섰다. 조현오는 오히려 이경백이 검찰에 뇌물 관련 내용을 불기를 기대했다. 검찰 수사이긴 하지만 경찰 비리를 도려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이경백과 통화 기록이 있는 경찰관 63명이 적발됐다. 조현오는 이미 취임할 때부터 업주 관계자와 공무 외에 전화 한 통, 물 한잔도 하지 말 것을 지시한 상태였다. 통화 내용을 소명하지 못한 경찰은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39명이 징계를 받았고 이 가운데 6명은 파면됐다.

 

“조현오가 범서방파 행동대장 출신과 의형제라더라.”

“조현오가 유흥업소에 10억 원을 투자해 월 2500만 원씩 배당금을 받는다.”

 

그즈음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조현오가 조폭과 의형제이며, 조현오 서울청장 비서실장도 연루됐다는 식으로 소문은 점점 덩치를 키웠다. 인터넷에서도 조현오가 강남 유흥가 조폭과 수십 차례 통화했다는 글이 돌았다. 민정수석실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조현오는 그를 옥죄는 의혹에 정면 대응하는 후속 조치를 발표했다.

 

“비서실장을 감찰해서 비위 사실이 있으면 엄하게 처벌할 것이고, 내 휴대전화 통화내역까지 모두 공개하겠다.”

 

조현오는 자신도 수사 대상에 넣었다. 서울청 수사부장인 박상용에게 자기 계좌열람동의서도 전달했다.

 

형사과장 황운하는 결국 이경백을 탈세와 성매매 혐의로 6월에 구속한다. 조현오는 이경백이 구속되고 두 달 후인 2010년 8월 경찰청장이 된다. 하지만, 이경백도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으며 유유히 빠져나온다.

 

(다음 9화 –조현오, 경검 수사권 조정 어떻게?)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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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김헌기를 알게 된 것은 2016년 7월 31일이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이 이야기는 2012년 상황부터 설명해야겠다.

 


 

2012년 당시는 조현오 청장 시절이다. 김헌기는 본청 지능범죄수사과장(현재 수사과장)이었고 지능수사대를 지휘했다. 직속상관이 황운하 수사기획관이다.

 

당시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신경전이 극에 달했다. 조현오 경찰청장도 나름 호전적인데, 수사기획관에 황운하까지 오면서 검찰 심기를 건드리는 행보가 이어졌다. ‘밀양 경찰 검사 고소 사건’이 출발이다.

 

이 사건은 젊은 경찰대 출신이 2011년 밀양경찰서 지능팀장으로 가면서 시작된다. 당시 지능팀장은 지역 폐기물업체 수사를 하고 있었다. 며칠 후 밀양지청 박 모 검사가 지능팀장을 불러 ‘수사의 정도’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지능팀장은 반문했다.

 

"어떤 점에서 비정도입니까?"

 

검사는 흥분하면서 일어나 욕설을 했다. 지능팀장이 주장하는 검사 발언이다.

 

"이 새끼 너 정신 안 차려.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계장님 이 새끼 피신(피의자신문조서)받으세요. 너거 서장 내 앞에 불러봐? 너거 과장 한 번 불러봐?"

 

검사 말이 다 끝나자 지능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하고 나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굴욕감, 자괴감, 모멸감 같은 단어가 스쳤다.

 

사무실로 돌아와 앞으로 대처를 고민했다. 지능팀장은 경찰대 동문 게시판에 사연을 올리면서 검사를 고소할 계획을 밝혔다. 황운하에게도 면담을 요청했다.

 

경찰청은 검사 고소 사건 지휘를 김헌기 수사과장에게 맡겼다. 본청 지능범죄수사대에 배당해 경찰 소환 요구를 세 차례 거부한 박 모 검사에 대해 체포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검찰은 체포영장을 기각했고 경찰 기소 의견도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은 전에 없던 방식으로 경찰청 수사에 대응했다. 경찰청 수사 대부분은 특정 관할 사건이 아니다. 가령 조희팔 은닉 자금 추적 수사도 피해자가 전국에 걸친 전국단위 수사다. 조희팔은 3조 5000억 원대 다단계 사기사건 피의자로 2008년 중국에 밀항했다. 조희팔 주요 활동 무대는 대구였고, 대구에 조희팔 관련 수사가 집중됐다. 당시 범죄정보과는 대구에 사는 조희팔 측근이 자금을 은닉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보고를 받은 황운하는 대구지방경찰청이 아닌 경찰청 지능수사대에 수사를 지시했다. 조희팔을 수사했던 대구지역 경찰과 유착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중앙지검은 조희팔 은닉 자금 추적 수사도 대구지검에 이송지휘를 내린다. 그렇게 되면 사건은 경찰청 지능수사대가 아닌 대구지방경찰청이 맡는다. 모든 수사는 수사관 의지로 결정된다.

 

김헌기 수사과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지능범죄수사대 수사관을 대구지방청 수사계 소속으로 인사이동을 시켜 수사하게 한 것이다.

 

 

이때 수사관 X가 파견된다. 이런 과정은 공문으로 진행되므로 검찰도 파악 가능했다. 그러나 검찰은 경찰이 신청하는 각종 통신 허가와 계좌추적 압수수색 영장 신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공문에 적인 발령 이유가 조희팔 은닉 재산 추적과 유착 경찰을 잡겠다는 명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사 명분과 결과가 같을 보장은 없다.

 

당시 첩보에는 조희팔 측근이 거주하는 주소나 연락처가 없었다. 그래서 대구로 갔던 수사팀은 주변인 전화번호를 추적해 대포폰을 특정했다. 그 대포폰에 나오는 세탁소, 택시 번호를 추적해 다시 거주지인 아파트를 특정했다. 하지만 아파트를 압수 수색하니 첩보와 달리 살림이 빈곤했다. 대신 아파트를 뒤지면서 조희팔 사망을 알리는 간접증거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찰청 지능수사대는 2012년 5월 조희팔 사망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 발표는 디도스 수사 발표만큼 언론에 집중포화를 맞는다.

 

수사관 X는 처음 첩보와 다른 수사 결과가 나왔기에 김헌기 과장이 철수 지시를 내리길 바랐다. 하지만 김헌기는 사람이 죽어도 돈은 어디 있을 것이라며 은닉 자금 추적을 지시했다. 김헌기가 수사지휘를 끊임없이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 친구들에게 지시하면 진척이 나오니 시키지. 못하겠다, 안 되겠다 하면 어떻게 시켜. 기본적으로 수사 역량과 의지, 나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봐.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수사관 X가 그런 게 대단해. 내가 시키지 않은 것도 현장에서 판단해 성과를 내더라고."

 

불법 다단계 업자들은 통상 차명계좌를 사용한다. 대구에서 수사팀은 계좌추적 영장을 수십 차례 받아내며 자금 흐름을 추적했다. 그리고 조희팔 오른팔인 강태용에게 받은 자금 일부가 김광준 차명계좌로 흘러간 것을 포착한다. 강태용은 이미 2008년 말 조희팔과 중국으로 도피한 상태였다.

 

대구로 파견된 지능수사대 수사팀은 끈질길 수사를 바탕으로 정제된 보고서를 완성했다. 이때까지  김헌기는 황운하에게 보고를 잘하지 않았다. 김헌기는 황운하와 달리 철저한 실무형이다. 황운하가 언론에 터트릴까 봐 수사 기밀은 극도로 신경 썼다.

 

하지만 결국 검찰은 이 사건을 가로챈다. 한상대 총장은 11월 9일 김수창 특임검사를 지명해 김광준 검사를 검찰에서 수사하도록 지시했다.

 

 

 

2011년 11월 19일 김광준은 구속됐다. 이튿날 11월 20일 황운하 또한  수사연수원장으로 날아갔다. 당시는 조현오 청장이 물러난 후였다. 조현오 청장처럼 호전적인 뒷배가 아니면 조자룡의 칼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김헌기는 계속 수사과장으로 남아 검찰 수사를 지켜봤다. 2012년 말에는 대선이 있었다. 대선 직전에 터진 부패 검사 사건 때문에 각 대선 후보 측에서 검찰개혁, 수사권 조정 공약들이 나왔다. 그렇게 이 사건은 잊혀갔다.

 


 

그 후로 4년 이 지났다.

 

2015년 12월 15일,  7년 동안 도피하던 강태용이 국내에 소환되면서 제2막이 올랐다. 2016년 봄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광준에게 편지를 받았다.

 

 

김광준은 법원에서 뇌물수수로 징역 7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대구지검에서 조사받던 강태용이 김광준에게 돈을 빌려줬고 돌려받았다고 진술했다. 김광준은 편지에 2016년 1월 2일 자 강태용 피의자 신문 조서를 첨부했다. 뇌물이 아닌 새로운 증거라면서 재심을 원했다.

 

그러나 재심 신청이 어려운 시기였다. 2016년 검찰은 홍만표·진경준 사건으로 비난받는 시기다. 김광준에게 정공법을 권했다. 언론에 사죄하는 인터뷰를 하고 그래도 억울한 점이 있으니 재심을 요청하겠다고 하면 분위기가 훨씬 더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광준은 억울한 사정을 맞장구 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필자가 황운하를 섭외했을 때 김광준은 기절초풍했다.

 

 

2016년 황운하는 충남 아산에 있는 경찰대 교수부장이었다. 당시 <풍운아 황운하>를 집필하면서 그를 만났다. 황운하는 사무실에서 김광준이 보낸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당시 언론에 피의사실 공표를 했다며 황운하를 욕한 부분도 있었다.

 

황운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약해."

 

그래도 황운하는 ‘특임검사는 눈속임 쇼’라는 제목으로 인터뷰를 해줬다.

 

"김 전 검사가 특임검사를 통해 탈탈 털린 것은 맞다. 되는 것 안 되는 것 깡그리 탈탈 털렸다.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한 인터넷 매체에는 김광준 편지 전문이 나가기도 했다. 김광준 처지에서는 자기 억울한 부분만 부각했을 것이다. 어느 날 한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경찰청 김헌기 수사기획관에게 기사 항의 메일을 받았다며 내용도 보내줬다.

 

<이런 부정부패범 의견을 그대로 수용해 사실인양 대변해주고 있다는 것에 큰 실망과 더불어 분노를 금치 못한다.>

 

수습하고자 나섰다. 만나기 전에 한 직원이 필자에게 귀띔해줬다.

 

“원래 에어컨에서 냉난방은 한 기계잖아요. 김헌기 씨는 냉방은 잘 되는데 난방이 잘 안 돼요.”

 

처음 김헌기 수사기획관을 만난 날, 꼬장꼬장한 황새 아우라가 그대로 느껴졌다.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눈빛에서 드러나는 분노가 얼굴 전체로 출렁이며 퍼졌다. 김헌기는 파렴치한 부정부패사범이라는 구체적 근거들은 수사사항이라 말할 수 없다며 답답해했다. 필자는 김광준 인터뷰가 경찰에게 유리했다는 점을 들어 다독였다.

 

김광준은 그해 재심청구를 했으나 기각됐다. 당시 김헌기는 끝까지 항의했고 기사에 자신의 주장을 반영시켰다.

 


 

정권이 바뀌고 김헌기는 2018년 인천지방경찰청 3부장으로 재직했다 3부장은 크게 정보과와 보안과를 아우른다. 이 시기 김헌기는 난방 기능을 향상하려고 애썼다. 직원들을 기쁘게 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은 인천3부장실을 방문했는데 김헌기는 책상에서 직원 이름으로 삼행시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2018년 12월 1일, <노컷뉴스>에 기사가 뜬다.

 

"1천만 원 인출 시 경찰 출동"... 사생활 침해 논란

 

각 은행은 경찰과 업무협약이 돼 있다. 고객이 찾아와 1000만 원 이상 현금으로 인출하면 은행 직원은 무조건 112 신고를 한다. 신고를 접수하면 즉시 경찰이 긴급 출동해 현장에서 휴대전화 통화 내용 등을 살펴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범죄 연관성을 확인한다. 김헌기가 기사에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은 딱 하나다.

 

'이 지침은 2016년 3월부터 이어졌다'

 

김헌기가 착안해서 전국으로 뿌리내린 이 제도를 겨냥해 기사는 '사생활 침해'를 지적하며 경찰 내부 의견을 인용한다. 분노 지수가 최고치를 경신한 김헌기는 계장에게 바로 지시한다.

 

"내가 글을 써야 하니까 통계 좀 갖다 줘!"

 

한해 총 1854건, 피해액 200억 원이 넘는 인천지역 통계를 바탕으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보이스피싱 피해의 심각성을 알면 사생활 침해 운운하지 못한다'

 

김헌기는 페이스북 글을 복사해서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다음 제3화. 미스터 계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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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풍운아 황운하 마지막 화. 백 한 번째 프로포즈

 

1983년 경찰대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황운하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입실 시각은 오후 6시. 친구들과 헤어진 황운하는 6시가 약간 지나 학교에 도착했다. 황운하를 부른 지도관은 흡연과 음주 여부도 확인했다. 황운하는 모두 인정했다. 오히려 당황한 지도관이 되물었다.

 

“왜 이렇게 다 인정하느냐?”

“거짓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술·담배를 하다 적발된 경찰대 학생에게는 퇴교조치가 내려졌다. 황운하는 그를 아낀 한 교수 덕에 구제받을 수 있었다. 황운하는 경찰대 생활에 몰입이 어려웠다. 스스로 자신이 경찰 조직에 있어야 할 동기를 찾아야 했다. 졸업 즈음 자신이 경찰에 있어야 할 이유로 찾은 게 경찰 조직 숙원 해결이었다. 그중 하나가 수사권 독립이다. 이 정도 구조 변화를 꾀하려면 형사소송법 체제를 바꿔야 한다.

 

황운하는 경찰 조직에서 경정 직급인 형사과장 시절, 형사들에게 수사국장이 되어 이러한 큰 틀을 바꾸는데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경정에서 총경, 그리고 경무관을 거쳐서 치안감으로 승진해야 수사국장이라는 보직을 받을 수 있다.

 


 

황운하에게 2002년 총경 승진 기회가 찾아온다. 2001년 한 경찰대 동기가 서울청 홍보계장을 지냈다. 총경 승진 1순위라 인기가 많은 보직이었다. 그 동기는 총경으로 승진하면서 자기 후임으로 황운하를 추천했다. 당시 동기는 두터운 경찰청장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황운하를 밀어주는 것은 가능했다.

 

황운하는 이렇게 거절했다.

 

"기자들 상대는 체질에도 안 맞고, 일선 형사과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만약 황운하가 서울청 홍보계장으로 갔다면 2002년에 총경 승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운하는 일선 형사과장을 택했다. 그리고 2004년 강남서 형사과장 시절 경찰 수뇌부에 찍혀 직위해제를 당했다. 집에서 놀다가 소청심사로 강동서 생활안전과장으로 복직됐다.

 

주변에서는 황운하 총경 승진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우선 승진 가능성이 높은 보직이 아니었다. 심사 기준에는 근무 기간도 포함된다. 황운하가 복직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그 짧은 기간을 가지고 심사받아 승진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그 경찰대 동기는 집에서 놀고 있는 황운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지금 최기문 청장하고 있어. 너는 모르는 채 하고 여기로 와. 그럼 내가 인사시킬 테니까 여기 와.”

 

물론 황운하는 가지 않았다. 그 시절에 황운하를 챙겨준 동기생은 그 친구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 박종희는 경찰청장 최기문에게 황운하 직위해제 문제를 따진다. 언론사와 갈등을 해소하려는 무리한 징계라고 지적했다.

 

경찰청장이 국정감사 지적을 받는 상황에서 최기문 청장이 황운하에게 호의적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한 참모가 경찰청장에게 “황운하를 승진 안 시키면 경찰 역사에 두고두고 오점을 남기는 경찰청장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황운하는 총경 승진 후, 2005년 수사구조개혁팀장을 맡으면서, 수사권 독립은 '수사 구조'를 개혁하는 시도라는 걸 알리고자 했다. 지금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사람들은 지금 구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눈앞에 제시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검찰이 부패하다고요? 경찰도 부패하잖아요. 검찰이 부당한 지시를 하듯 경찰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릴 수도 있잖아요.”

 

그걸 보여주는 사건은 언제나 존재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2006년 한화그룹 회장 보복폭행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수사권 독립 토대로 삼으려 했다. 경찰이 재벌 회장을 구속한 첫 사례였고 마무리도 깔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후 늑장수사와 은폐 의혹으로 이런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남대문서장이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될 때까지 현장에 나간 형사들을 철수해 수사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대문서장이 수사를 지연시킨 것은 눈앞에 명백히 드러난 상황이다. 현장에 나간 형사들을 철수해 수사를 막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사가 수사를 지휘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다.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에 앞서 문제점을 먼저 드러내야 한다면 검찰 권력 독점은 바꾸기 어렵다. 애초에 오류를 드러낼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를 바꾸고자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섰던 이는 조현오 청장이었다. 2009년 서울지방경찰청장이던 조현오는 황운하에게 서울청 형사과장 자리를 제안한다.

 

조현오 청장은 ‘조파면’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내부 비리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조현오 생각은 이랬다. “경찰 부패를 도려내면 국민이 경찰을 지지할 것이고 그런 여론을 바탕으로 수사권을 가져올 거야.”

 

조현오 청장이 업주 접촉 지시를 어긴 직원을 숙청하듯 날려버려도, 경찰은 ‘비리 경찰’ 이미지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이경백 사건이 단적인 예였다.

 

2010년 6월 황운하가 구속한 이경백은 곧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경백은 1심 판결 전까지 자신과 유착한 경찰을 불지 않았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자신과 유착된 경찰을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경백은 2012년 7월 17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

 

서울 중앙지검 강력부는 2012년 3월 말부터 이경백과 유착한 현직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18명이 옷을 벗었다. ‘이경백 부실 수사’ 여론이 일자 조현오 경찰청장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반면, 조현오는 경찰청장 시절에 ‘황운하를 승진시킨 것’을 가장 잘 한 일로 여긴다고 했다.

 

조현오는 2011년 말 황운하를 경무관으로 승진시킬 때 청와대 민정수석이 강하게 반대했다고 했다.

 

통상 경찰 고위직 인사는 청와대 정무수석과 비서실장, 민정수석, 인사비서관과 경찰청장이 논의한다. 민정수석은 승진자 적격 여부를 검증한다. 보통 민정수석은 검찰과 접촉이 잦아 검찰 출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그래서 경찰은 검찰 눈 밖에 나면 승진하기 어렵다.

 

황운하가 승진하려면 배짱 두둑한 상사가 받쳐 줘야 했다. 황운하는 2011년 경무관으로 승진했고 수사기획관이 됐다. 2002년부터 황운하가 힘들 때 도와주려 했던 경찰대 동기 친구는 앞서 2009년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2011년 베이징 주재관을 지냈다.

 

수사기획관 황운하가 범죄정보과에게 받았던 첫 보고는 베이징 주재관, 즉 경찰대 동기생이 저지른 범죄행각이었다. 2012년 3월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경무관 박병국에 대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옛 고마웠던 생각들이, 괴로움으로 번졌을 황운하 고통은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물러난 후, 황운하를 과감하게 기용한 상사는 없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과거 황운하가 수사했던 사건에 관계된 검사 일부가 박근혜 정권 핵심으로 포진됐다. 황운하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승진과는 더욱 멀어졌다.

 


 

2016년 황운하는 경찰대학교 교수부장이 됐다. 황운하가 경찰 생활을 시작한 지 29년째인 해이자, 경무관 5년 차였다. 경찰은 계급정년 제도가 있다. 승진을 못하면 경무관은 6년 차에 경찰 조직을 떠나야 한다. 황운하는 박근혜 정권과 경찰 인사에 대한 강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내 역할을 해야 경찰로서 존재해온 살아온 이유와 명분이 있는 것인데, 만약에 내 잘못으로 치안감 승진에서 밀려난다면 오케이지만. 우병우 민정수석이 훼방 놓고, 정치권 실세들이 치안감 자리를 땅따먹기 하듯이 하니까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 내가 그런 걸 바꿔보려고 살아왔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치안감으로 승진이 안 되니까 승질이 나지.”

 

치안감으로 승진이 되지 않아 불만을 쏟아낸다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 고위직에 있는 경찰대 후배는 그가 박근혜 정권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모습에 탄복했다.

 

"운하 형 대단해. 털어서 먼지 안 나나 봐.”

 

아직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조직에서 나가라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또한, 다가오는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운하는 2016년 4월, 경찰대학교로 출근하면서,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어 본 소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25년 전, 나도 경감 초임 시절에 경찰 선배들에게 도대체 뭐하느라 이렇게 형편없는 경찰 조직을 만들었냐며 당돌하게 따진 적이 있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은 경찰 조직에서 지금껏 실제로 별 이루어놓은 것이 없이 벌써 퇴직할 시점이 다가왔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럽다. 무엇보다도 앞으로도 별 이루어놓을 자신이 없는 것이 또 부끄럽고 또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내게 주어진 어쩌면 마지막 미션일 수도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나마 마음의 무거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를 비롯한 선배들의 실패사례를 후배들은 반복하지 않도록 올바르게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을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공격을 내가 받는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부끄럽다면 적어도 나보다 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을 것이지만 그대로 난 몹시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걸 아는 사람은 덜 부끄럽다지만 그대로 난 몹시 부끄러웠다." (출처 황운하 블로그. 2016년 4월 25일 쓴 ‘경찰대학에 출근하다’ 글 중에서)

 


 

에필로그

 

2017년 연말은 황운하 경찰 퇴직 예상 시점이었다. 그런 경우, 누구나 평생 몸 담았던 경찰 생활을 담은 자서전 한 권 정도는 소장하고 싶기 마련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게 될 황운하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서 필자가 써주고 싶다고 자청했다.

 

취재는 2016년 여름에 시작했다. 2016년 경찰 조직 내 황운하 관련 취재는 어려웠다. 황운하가 박근혜 정부와 경찰 수뇌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인사를 앞둔 고위직들은 그와 가깝다는 인상이 줄까 봐 취재를 꺼려했다. (바쁜 시간 쪼개서 취재에 응해준 분들께는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017년 초, 황운하는 수사구조개혁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무관 6년 차 임기를 그렇게 보냈다. 수사권 독립을 위해 멀리서 손 놓고 있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그 뒤로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2016년 연말,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열렸고 이듬해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황운하는 치안감으로 승진하여 울산지방청장으로 부임했다.

 

경력 30년 경찰 황운하가 경찰 조직 발전에 얼마나 보탬이 됐을까? 확신하기 어렵다. 그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호소력을 갖는다면, 그것은 수사권이라는 주제 안에서 보이는 통렬한 일관성 덕분일 것이다.

 

나 또한 황운하를 겪은 지금, 그가 한국사회에 끊임없이 던져온 '경찰 수사권 독립'이라는 프로포즈를 다시 장기적 과제로 밀어내며, 외면하는 주장을 하지는 못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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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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