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제복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2005년 1월 27일 경찰청장 허준영은 조현오를 경무관으로 승진시켜 경찰청 외사관리관으로 발령 낸다. 외사관리관실은 1과에서 3과까지 있다. 외사1과는 외사기획 국제협력, 2과는 외사정보, 3과는 외사수사로 나뉜다. 허준영은 2월 3일 총경 인사를 단행하며 외사1과장 자리를 잠시 비워두라고 지시한다. 그 자리는 2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와 법정투쟁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는 총경 몫이라고 했다. 그 총경이 이철규였다.

 


 

강원도 출신인 이철규는 1981년 간부 후보 29기 출신으로 입학, 졸업을 수석으로 장식한 인재였다. 하지만 경찰 공직 생활은 자괴감과 함께 출발했다. 나이 든 경찰간부들이 젊은 검사를 모시는 모습을 접했고, 검찰은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힘든 요구를 하며 경찰을 통제했다. 1997년 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때 이철규는 혜화경찰서 정보과장이었다.

 

경정 신분인 이철규는 정권인수위원회에 파견된다. 당시 김대중이 내세운 공약 중에는 '경찰 수사 독자성 보장'도 있었다. 경찰청이 ‘경찰수사의 독자성 보장’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는 걸 검찰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경찰 지휘부가 과거와 달리 강력하게 추진하자, 얼마 후 경찰청 정보국장인 박희원과 특수수사과장인 박정원이 검찰에 구속된다. 경찰은 '수사권독립 요구에 대한 표적수사'라고 반발했으나 추진동력은 이내 소멸됐다.

 


 

이철규는 1998년 총경으로 승진했고, 2002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안산경찰서장에서 자리를 옮겨 분당경찰서 서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즈음 참여정부가 법무부 장관으로 강금실을 임명하자 검찰은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2003년 3월 9일 평검사들은 대통령 노무현과 공개토론에서 맞짱을 떴다. 그리고 검찰총장 김각영은 그날 대통령 비난 성명을 내고 사퇴한다.

 

3월 17일 검찰은 '권력형 비리 전담 수사기구'를 신설을 발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30일 분당경찰서장 이철규가 수뢰혐의로 구속된다. 2001년 안산서장 때 공사 비리 관련 진정이 들어온 사건을 2000만 원을 받고 무마했다는 혐의였다. 검찰은 뇌물을 주었다는 심 모씨 진술 말고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심 씨는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다. 당시 서울대병원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경찰서장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허위자백을 강요받고 2번 졸도하면서 사람을 못 알아보는 증상이 재발하였다'.

 

 

이처럼 검찰에서 허위자백만 받아내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참여정부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통해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하지만, 검찰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형사소송법 개정은 흐지부지됐다.

 


 

이철규는 2005년 5월 10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을 받고 사흘 뒤 경찰청 외사1과장으로 복귀한다. 당시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몇 가지 과제를 맡겼다. 그중에 하나가 외사관리관실을 외사국으로 승격시키고 20명인 해외 주재관을 50명으로 증원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주재관은 계급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경찰 계급은 전 세계가 비슷하다. 계급에 대한 존중도 마찬가지다. 직급이 있는 경찰이 외국으로 나가야 그 나라에서 직급이 있는 경찰을 만날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만큼 쉽게 풀 수 있다는 것이다.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가 김선일 씨를 살해하면서 해외 교민과 여행객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외국민보호'처럼 문서에나 채울 논리가 아니다. 바로 결정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이다. 외사국 증원 1차 관문은 ‘외교부 영사국’이었다. 외교부가 필요성을 동의해야 행정자치부, 기획재정부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 행정자치부는 공무원 정원을 결정하며 기획재정부는 예산을 편성한다. 물론 행정자치부와 기획재정부 역시 만만찮다. 두 부처 모두 습관적인 칼질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철규 과장은 조현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훗날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철규처럼 못한다"고 회상했다. 조현오는 이철규가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마당발'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이철규를 곁에서 지켜본 직원들은 그가 중앙부처를 드나들면서 관련 공무원 설득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한 공무원 아버지가 경주에 산다는 얘기를 들은 이철규는 그 지역 서장에게 따로 부탁했다. 그러면 서장은 공무원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이 경찰을 위해 애써 주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또 이철규는 또 부모님이 일찍 사망해 형에게 키워졌다는 기재부 공무원 얘기도 듣는다. 마침 그 형은 경찰공무원이고, 기재부 공무원은 전경 출신이었다. 이철규는 기재부 담당공무원이 전경으로 근무했던 부대장 신상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 부대장과 함께 찾아가 설득하기도 했다.

 

조현오는 허준영이 이철규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철규는 상관이 원하는 부분을 해결 할 줄 알았다. 허준영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외교관 출신이 느끼는 갈증이 있었다. 어느 날 이철규가 허준영에게 말했다.

 

"앨빈 토플러가 한국에 왔는데 경찰청으로 방문하도록 할 테니 한 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경찰청에 외빈이 오는 일은 많지가 않다. 리언 러포트 사령관이 허준영을 용산 미국기지에 공식 초청한 것에 대한 답례로 경찰청이 리언 러포트 사령관을 초대한 적은 있었다. 조현오는 리언 러포트 사령관 앞에서 PPT 화면을 가리키며 경찰업무를 영어로 브리핑했다.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앨빈 토플러 부부가 경찰청에 오니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앨빈 토플러는 이미 8일 동안 한국 방문 일정을 빽빽하게 짜 놓았다. 하지만, 이철규는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앨빈 토플러가 출국 직전 경찰청을 방문하도록 일정을 변경시켰다.

 

 

2005년 9월 중국 북경에서 허준영과 중국 공안부장 저우융캉이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3일 앞두고 중국이 일방적으로 회담 일정을 변경했다. 공안부장이 바쁘니 공안부 상무부부장을 만나라는 것이다. 연유를 알아보니 일정 탓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기관에서 중국 측에 한국 경찰청장은 차관급이라 중국의 부총리급인 공안부장이 직접 대화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고 훼방을 놓았다는 말이 나돌았다.

 

한국은 경찰청이 행정자치부 소속이다. 법무부 장관이 지휘하는 검찰총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지만, 경찰청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허준영과 조현오는 중국에 구걸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면담은 이뤄져야 했다. 주한중국대사를 통해 중국 공안에 항의를 전하도록 했고 비공식 라인으로 등소평 장남인 덩푸팡과 접촉했다. 이철규는 덩푸팡을 잘 아는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허준영은 한국 경찰청장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공안부장과 회담하고 공안부 주관으로 조어대에서 만찬을 한다.

 

조어대는 금나라 장종 황제가 낚시를 즐겼다는 곳으로 지금은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외국 국빈 공식 연회장이다. 허준영은 또 그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인터폴 국제회의에서 대표 발표를 한다. 그때 허준영을 수행한 조현오는 2010년 8월 경찰청장이 됐다.

 


 

그동안 이철규는 경무관으로 승진해 강원도 차장 등을 지냈고, 2010년 초 치안감으로 승진해 충북청장으로 있었다. 조현오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열정과 여야를 설득할 수 있는 정보국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충북청장이던 이철규를 정보국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2011년 6월 경찰의 수사개시, 진행권을 보장한 형사소송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

 

2011년 초 검경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을 무렵 부산저축은행을 비롯한 여러 저축은행들이 한꺼번에 영업정지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대로 된 심사 과정 없이 부동산 등 위험 부담이 큰 사업에 무분별한 대출을 해주다가 부실채권을 떠안으면서 사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관련 기관 감독이 소홀해 이 같은 부실을 키웠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조현오는 정보국장에게 진상 파악을 지시했다. 국회는 저축은행 사태 의혹을 파헤치겠다며 '저축은행 국정조사특위'를 구성했다. 국세청, 감사원 등 기관장들이 불려 나왔다. 경찰도 예외일 수 없었다. 보통 국회의원이 다그치면 기관장은 저자세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오히려 검찰 수사지휘를 문제 삼았다.

 

"2005년 10월 부산저축은행에서 발생한 575억 원 규모 부당 대출을 수사했는데 경찰은 관련자 8명을 전원 구속 의견으로 보냈지만 검찰이 1명만 구속의견으로 송치하도록 했다. 또 2007년 12월에도 검찰은 보해저축은행 부당대출 건을 불기소하라고 수사지휘를 했다."

 

저축은행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2011년 9월 18일 제일, 프라임, 에이스, 토마토, 파랑새 등 저축은행들이 잇달아 영업정지를 당한다. 여론은 빠르게 악화했다. 검찰은 9월 22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을 꾸린다. 그리고 10월 14일 제일저축은행 회장인 유동천을 구속 기소한다.

 

유동천은 강원도 출신으로 이철규 고향 중, 고교 선배였다. 검찰은 파랑새저축은행 대표, 토마토저축은행 대주주, 에이스은행 차주, 프라임 저축은행 대표 등을 잇달아 잡아들인다. 이철규는 11월 11일 치안정감인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2월 말, 검찰은 유동천에게 4000만 원을 받고 경찰 수사를 무마한 혐의로 이철규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한다. 이철규는 3월 1일 구속됐다. 2012년 10월 19일 1심 법원은 이철규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검찰은 바로 항소했다. 이철규는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13년 초, 검찰청 출입기자에게 연락을 받는다.

 

“이철규 청장님 혹시 (강원도) 원주 별장에 가본 적 있습니까?”

 

기자는 검찰청 기자실에 검사가 들어와 먼저 말을 꺼냈다고 했다. 강원도 원주별장 성접대 사건은 2013년 1월에 시작됐다. 김학의 당시 법무부 차관이 건설업자 윤중천 소유인 원주 별장에서 성접대를 받았는데 이를 촬영한 동영상이 있다는 첩보를 경찰이 입수한 것이다. 바로 조현오가 만든 경찰청 범죄정보과였다.

 

범죄정보과가 수집한 정보는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특수수사과, 각 지방경찰청 수사과 등에 이첩돼 내사 또는 수사로 이어지게 된다. 김광준 검사 비리 사건에 이어 두 번째였다.

 

박근혜 정부 초대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은 3월 21일 사퇴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카카오톡과 트위터에 성접대 리스트가 나돌았다. 김학의 전 법무차관을 비롯해 실명 10명이 적혀 있었다. 리스트에는 대한민국 마당발인 이철규도 모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건설업자 윤중천이었다.

 

리스트 10명 중 4명은 모두 강원도에서 근무했던 경찰 전직 수뇌부급들이었다. 네티즌들은 성접대 명단 중 다수를 차지하는 경찰을 비난했다. 이철규처럼 강원지방경찰청 차장을 지냈던 허준영은 “사실이면 할복자살하겠다”라고 받아쳤다.

 

이철규는 이를 유포한 네티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정보국장 출신인 이철규가 보기에 이러한 명단은 네티즌이 유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에게 쏠리는 비난을 경찰에 돌려서 초점을 흐리게 하려는 것으로 판단됐다. 경찰은 리스트를 최초 생산한 사람은 못 찾아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다.

 

검찰은 성접대 동영상 속 인물을 특정하지도 못했다. 검찰은 동영상 화질이 좋지 않아 알아볼 수가 없다며 김학의 등을 무혐의 처분한다. 얼마 뒤에 원주 별장 성접대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이 나서서 성폭력 혐의로 김학의를 고소했지만 검찰은 김학의를 다시 무혐의 처분한다.

 

2013년 10월 31일 대법원은 제일저축은행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 이철규에 대해 무죄를 확정한다. 하지만 이 뉴스는 ‘원주 별장 성 접대 리스트’에 묻힌다. 법원은 제일저축은행 회장인 유동천이 한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의심스러운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2008년 서울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에서 조현오, 이철규와 식사를 했다는 부분이 있다. 2008년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이었는데, 통상 자기 관할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다. 조현오는 이철규에게 2008년 서울에 온 적이 없다는 확인서를 하나 써준다.

 

 

 

하지만 조현오는 유동천보다 더한 ‘대한민국 거짓말쟁이’로 전락했다.

 


 

조현오는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해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이던 임경묵에게 그 내용을 들었다고 지목했다. 하지만 임경묵은 재판에 나와서 조현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임경묵이 한 진술을 받아들여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을 지어낸 것으로 판단했다. 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서울구치소에 재구속됐다. 조현오 재판에 참석했던 전직 형사과장은 판결에 유감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노인네들이 만나면 무슨 이야기 하겠어요? 학교 다닐 때 영어단어 외우던 이야기를 하겠어요? 시국 이야기만 합니다. 그거 해야 재미있고. 임경묵 씨가 서울청장을 만나려면 그 이상 정보가 있어야 대화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개연성을 고려해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조현오는 지휘관 시절 관할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부산청장 시절에는 서울로 온 적이 없었고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도 서울 땅을 밟은 적이 없다고 했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주변 사람들은 차기 경찰청장이 되려면 서울에서 권력층을 만나야 한다며 조현오에게 서울 방문을 권했지만 원칙을 지켰다고 했다. 조현오가 서울지방청장이 돼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임경묵이다.

 

 

자기 정보력을 화려한 언변으로 펼쳐놓는 사람을 늘 봤다면 허풍과 과장을 솎아낼 감각이 있을 테지만 초보자 조현오는 마냥 귀가 솔깃했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을 모조리 기억에 새기고자 했다. 이와 비슷한 감탄은 1998년 경남지방청 경비과장 시절에도 있었다.

 

(다음 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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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인사정의 실현, 전·의경 가혹행위 근절, 경찰과 업주 통화 금지, 성과주의 등 개혁과제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전국으로 확대했다. 조직 정비에 해당하는 일이다. 물론 경찰청장 업무가 안으로 향하는 조직 정비만 있는 게 아니다. 밖으로는 조직 처지를 적절하게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경찰은 밖으로 견해를 드러낼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내무부 직속기관이었던 경찰이 독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은 것은 1991년 경찰청으로 승격되면 서다. 이때부터 경찰은 치안에 대해 자율권을 보장받는다. 경찰 조직 위상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수사권이다. 조현오는 수사권에 대해 어떤 견해를 밝혔고 대응했을까. 그보다 먼저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기 전까지 경찰과 검찰 관계는 어땠을까.

 


 

젊고 자부심 강한 경찰대 출신 수사과장이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피의자는 검찰 출신이었고 피해자는 일반 서민이었다. 경찰은 구속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담당 검사는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것을 지시했다. 수사과장이 거부하자 부장검사가 불렀다. 연륜이 풍부한 형사팀장이 걱정이 돼 수사과장과 부장검사실로 동행했다.

 

당시 형사소송법 제196조(사법경찰관리) 제1항에는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었다. 부장검사는 수사과장에게 반성문 제출을 요구하며 ‘잘못’이라는 문구를 넣도록 지시했다. 부장검사와 수사과장 사이에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사팀장은 점점 불안해졌다.

 

경찰에 대한 검찰 특권 중에는 일반적인 수사 지휘권과 더불어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구속하는 유치장에 대한 감찰권이 있다. 만약 경찰이 검찰 눈 밖에 나면 유치장 감찰을 핑계로 경찰서에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형사팀장이 나섰다.

 

“부장님. 우리 과장님은 수사가 처음입니다. 비록 과장이지만 수사를 잘 모르십니다. 제가 반성문을 쓰겠습니다.”

“그럼 과장 대신 팀장이 쓸 겁니까?”

“네. 쓰겠습니다. 과장님 나가게 해주십시오.”

 

수사과장이 나가고 부장검사와 단둘이 남게 된 팀장은 살며시 물었다.

 

“부장님. 도대체 이게 왜 필요합니까?”

“주임검사가 반성문을 못 받아왔으니 내가 받아놓아야 다른 검사에게 ‘이런 것도 못 받는 너희들이 무슨 검사냐’라고 질타할 때 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릴게요. 검사들에게는 사경(사법경찰관) 불러다가 혼냈더니 잘못했다고 말하더라고 교육하면 되잖아요.”

 


 

조현오는 1990년 경찰서 과장으로 입문했다. 하루는 검사와 면담 약속을 했다. 그렇게 검찰청으로 찾아간 조현오를 검사는 방 밖에서 한 시간 기다리게 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갔더니 검사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반면 유치장 감찰을 온 검사는 수사과장 자리에 앉았다. 수사과장 중에는 당연한 듯 자리를 내주는 이도 있었다. 한 경찰은 ‘형사소송법 망령’이라고 한탄했다.

 

경찰과 검찰은 서로 다른 기관이지만 검사는 경찰에게 협의 공문 없이 지시했다.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보고 싶으면 경찰서로 오면 된다. 하지만, 검찰은 굳이 경찰에게 피의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이를 ‘피의자 신병인치’라고 한다. 경찰은 검찰이 지원을 요구할 때마다 업무를 제쳐두고 가야 했다. 검찰에 파견된 경찰은 검사가 미행이나 단속을 지시하면 수행하는 일을 맡았다.

 

형사과장이던 조현오는 검찰과 부딪히기보다는 자기 일에 신경 쓰자는 쪽이었다. 권위적인 모습으로 따지면 경찰 조직도 검찰과 다를 바 없었다. 경찰서 생활안전과장도 일선 파출소에 가면 파출소장 자리에 앉는 일이 허다했다.

 


 

경기지방경찰청 시절 조현오에게 참모 역할을 하는 형사과장이 이런 질문을 했다.

 

“오락실 업주와 물 한 잔도 마시지 말라는 등 강경 조치를 펴는 이유가 뭡니까?”

 

“경찰 부패를 도려내면 국민이 경찰을 지지할 것이고 그런 여론을 바탕으로 수사권을 가져올 거야.”

 

형사과장 생각은 달랐다. 경찰 조직에 힘을 실을 방법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직 부패를 도려내는 것보다 첩보가 들어오는 큰 사건에 바로 달려들어 국민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사권 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1999년 DJ 정부 때다. 그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며 행동으로 옮긴 이는 황운하였다. 서울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이던 황운하는 검찰에 파견된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렸다.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를 고려하면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반란이었다. 그 후 집중 논의 끝에 경찰청장 김광식은 검찰에 파견된 전국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린다.

 

그 후에 검찰은 정보국장인 박희원을 수사했다. 이후 경찰청장을 지낸 이무영, 이팔호, 최기문은 수사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다음 경찰청장이 외교관 시절부터 조어 능력이 탁월했던 허준영이다. 허준영은 경찰청에 수사권 문제만 전담하는 ‘수사구조개혁팀’을 만든다. 허준영이 하는 말은 종종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지구 상에 없는 게 두 가지, 다케시마와 대한민국 경찰 수사권.”

 

“지금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권검책경(權檢責警), 권한은 검찰에 있고 책임은 경찰이 진다인데, 이제는 권경책경(權警責警), 즉 수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경찰이 질 테니까 그에 따른 권한도 경찰에 줘야 한다.”

 

2005년 9월 8일 허준영은 한 손님이 청장실로 오는데 외사관리관 조현오에게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청장실로 들어온 손님은 세계적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와 그의 아내였다. 허준영은 유창한 영어로 “한국 경찰 최대 현안이 수사권 조정”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찰에게 수사권이 없다는 말에 앨빈 토플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라고 답했다.

 

 

 

당시 수사권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경찰청 차장인 최광식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최광식은 검찰 수사로 불명예 퇴진한다. 허준영도 퇴임하고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으나 때마침 선거법 위반으로 수사를 받으면서 공천을 받지 못한다. 이후 경찰청장인 이택순, 어청수, 강희락은 수사권에 대해 별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2010년 8월 30일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조현오 목표는 형사소송법 196조 개정이었다. 법을 개정하려면 국회의원 도움이 필요했다. 이 같은 작업은 경찰 모든 조직 부분에서 노력해야 했지만, 특히 정보 파트 역할이 중요했다. 경찰청과 서울지방경찰청은 모두 정보 분실을 운영한다. 정보 형사들을 정부기관, 사회단체, 지역별 담당구역을 정하고 배치해서 정보 수집 기능을 수행한다.

 

조현오는 충북청장이던 이철규를 2010년 9월 7일 정보국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2010년 12월 3일 서울청 정보과장인 김성근을 경무관으로 승진시키고 서울청 정보관리부장을 맡긴다.

 

 

비슷한 시기에 검찰 수사가 시작된다. 2010년 10월 5일 국회의원 11명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된다. 이른바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이다.

 

청목회(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는 2003년 결성된 단체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청원경찰이 회원인데, 이들은 처우 개선을 목표로 청원경찰법 개정안 통과를 추진했다. 회원이 낸 특별회비로 6억 5000만 원을 만들어 2008년 말부터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를 시작했다.

 

청목회 회원 가족과 친지 이름으로 진행한 ‘쪼개기 후원’을 통해 국회의원에게 전달된 돈은 500만~3000만 원 정도였다. 2009년 4월 발의된 청원경찰법 개정안은 2009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다.

 

검찰 수사에 여야 국회의원은 깊은 반감을 드러냈다. 당시 국회에서는 검찰이 국회의원을 옥죄려고 힘없는 사람들이 낸 소액 후원금까지 정치자금법으로 묶어서 건드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고 한다.

 

2011년 6월 30일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재석 의원 200명 가운데 찬성 175명, 반대 10명, 기권 15명이었다. 이 같은 압도적인 표차는 경찰청이 국회 내 반 검찰 정서 분위기를 잘 파고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형사소송법 개정안 내용을 보자.

 

형사소송법 196조 2항에 ‘사법경찰관은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인식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사실과 증거에 관하여 수사를 개시·진행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경찰도 수사 주체로 인정을 받았기에 수사에 들어가면 검사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

 

이 조항만 보자면 경찰에게 매우 유리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3항은 ‘사법경찰관리는 검사의 지휘가 있는 때에는 이에 따라야 한다.’ 고 나온다. 경찰에 수사개시권이 있더라도 검사 지휘를 따라야 하므로 경찰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현오는 3항에 ‘검사의 지휘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기 때문에 대통령령을 잘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도 3항에 크게 반발했다.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령과 법무부령 차이는 만드는 주체다. 대통령령은 대통령 주재로 각 부처 장관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만든다. 반면 법무부령은 법무부가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 검찰 입장에서는 법무부 장관은 통상적으로 검찰 출신이라 법무부령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현오는 ‘검사의 지휘에 관한 형사소송법 시행령(대통령령)’ 제정을 앞두고 다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협상 테이블에 나갈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전남 곡성서장인 장하연과 전북 정읍서장인 진교훈이 뽑혔다.

 

국무총리실 주재로 경찰과 검찰 측에서 대표들이 나와 논쟁이 시작됐다. 한쪽에서 문구를 수정하면 다른 한쪽에서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됐다. 경찰 쪽에서는 제2조(수사지휘의 원칙)에 ‘검사는 사법경찰관을 존중하고’라는 문구를 원하면 검찰은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제5조(수사지휘의 방식)로 넘어가자 경찰은 검사가 사건 지휘를 할 때는 서면 또는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검찰은 “긴급한 경우에는 전화나 구두로 지휘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경찰이 다시 “그렇게 전화나 구두 상으로 지휘할 때 다시 서면이나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는 방식으로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받아쳤다.

 

국무총리실은 경찰과 검찰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 강제 조정안을 내놓았고 대통령령은 12월 27일 시행됐다. 의욕적으로 진행한 법률 개정이었지만 경찰 조직 안에서 평가는 박했다.

 


 

2012년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첫 번째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였다. 혐의는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였다. 두 번째는 ‘룸살롱 황제’ 이경백이었다. 이경백은 1심 판결 전까지 자신과 유착한 경찰을 불지 않았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자신과 유착된 경찰을 불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2012년 3월 말부터 이경백과 유착한 현직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18명이 옷을 벗었다. ‘비리 경찰’ 뉴스가 언론을 장식했고, 이경백은 2012년 7월 17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

 

조현오는 퇴직하고 나서 차명계좌 발언으로 재판을 받았다. 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을 받고 서울구치소로 들어갔다.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사자 명예훼손죄’에서 8개월 실형이 타당한 양형인지 제기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조현오가 간 곳에는 이경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경백은 2013년 5월 11일 집행유예 기간에 불법 사설 카지노를 운영한 혐의로 구속됐다. 조현오는 구치소 안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 무작정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는데 조현오는 해고 노동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루는 면회 대기 중 옆에서 누군가 조현오를 불렀다. 고개를 돌렸더니 누군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김광준 검사입니다.”

 

(다음 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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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공개

 

조현오는 2010년 1월 27일 서울청 참모회의에서 경정급 직원 이름 16명을 공개하면서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조현오는 “승진할 수 있는 보직으로 가고자 외부 인사 청탁을 한 경찰관”이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빽’을 통해 인사 청탁을 하면 명단을 공개하겠다던 경찰 간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한 사람은 조현오가 처음이었다.

 

 

경찰은 경위 계급이라 해도 정보 쪽 분야에서 일한다면 지역 국회의원을 비롯해 막강한 실세들과 인맥을 구축할 수 있다.

 

2014년 기준 전국 경찰 가운데 경정은 2171명이며 총경은 507명이다. 총경 승진이 안 된 경정은 14년 근무를 마치고 퇴직해야 한다. 이를 ‘계급정년’이라고 한다. 총경 이상 인사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지방청장은 경정 이하 인사권만 있는데 왜 지방청장에게 총경 인사 청탁이 들어올까?

 

총경 승진 과정을 살펴보자. 승진 1단계는 인사고과를 잘 받아야 한다. 업무 능력을 증명해야 승진 후보 대상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아무래도 업무 능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보직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보직 청탁이 생기는 이유다. 또 지방청장이 예상 밖 인물을 승진시키는 게 불가능하지도 않다. 지휘관이 평가 점수를 매길 때 특정인에게 최고 점수를 몰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현오는 경찰 생활을 시작하면서 인맥을 동원하면 경찰 기강이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자기 경험이 근거였다. 생활안전과장으로서 성과를 냈지만 형사과장으로 가지 못했던 조현오는 보안과장 시절 외부 인사 청탁으로 형사과장이 되면서 부조리를 느꼈다. 이 같은 관행을 막고자 들고 나온 방법이 외부 인사 청탁자 명단 공개였다.

 

조현오는 첫 보직인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시절 파출소장에게 청탁을 받곤 했다. 경위 이하 인사권은 경찰서장에게 있지만 생활안전과장(경정) 추천이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이다. 파출소장은 유흥업소가 밀집된 파출소로 가고 싶어 했다. 조현오는 이런 직원을 살짝 불러 무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울산남부서에서는 외부 인사 청탁 전화를 두 번 받았다. 조현오는 해당 직원에게 선택권을 강요했다. 옷을 벗든지 울산을 떠나 다른 경찰서에서 근무할 것인지 고르라고 했다. 조현오는 한 명은 다른 지역으로 보냈고 다른 한 명은 울산 내 다른 경찰서로 보냈다.

 

“직원 부인이 서장실로 찾아와서 남편과 함께 무릎 꿇고 빌더라. 아이를 등에 업은 부인이 애원하니까 차마 울산 밖으로 보내지 못했지.”

 


 

2008년 부산청장이 됐을 때도 외부 청탁을 받았다. 조현오는 해당 직원을 불러 혼내는 정도로 넘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기자들과 회식 중에 총경 승진 후보자 이야기가 나왔다. 기자들은 경찰관 한 명을 지목해 승진 가능성을 물었다. 조현오는 승진 연도가 늦다며 인사는 원칙과 공정성을 담보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들은 노무현 정부 때 승진한 총경을 거론하며 형평성을 따졌다. 누구는 이상득·이재오 등을 언급하며 ‘빽’을 거론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향신문>은 조현오 부산청장이 고위직 승진을 원하면 이재오·이상득 의원을 통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기자는 <경향신문> 기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조현오 청장 발언 취지는 ‘안 된다’는 뜻이었어요. 만약 문제 있는 발언이었다면 다른 기자들이 왜 후속 기사를 안 썼겠어요?”

 

부산에서 한 지인을 만났을 때 조현오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부산청장이던 조현오에게 술자리에서 인사 청탁을 했다. 조현오는 단호하게 거부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청탁을 거부하겠다면 자신을 밟고 지나가라며 출입구 앞에 드러눕고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아무 반응이 없어 살며시 눈을 뜨니 조현오가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안 됩니다.”

 

지인에게는 그 상황이 매우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2009년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이 된다. 이때부터 외부 인사 청탁이 들어오면 해당 과장을 참모회의에 불렀다. 참모회의 참석자는 20여 명이다. 조현오는 당사자를 세워놓고 다그치곤 했다.

 

“인사 청탁하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청장 지시가 잘못인가?”

“잘못 없습니다.”

“지시가 정당하면 왜 불복하느냐? 지시를 위반한 이유가 뭐냐?”

 

당시 직원들은 이를 ‘인민재판’, ‘자아비판’이라고 표현했다.

 

 

1년 뒤 조현오는 서울지방청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서울은 ‘빽’ 수준과 체급이 달랐다. 참모회의에서 직원을 불러 질책하는 정도로는 효과가 없었다. 작심하고 외부 인사 청탁을 한 경정 16명을 실명 공개했다. 한 경찰은 당시 실명 공개 파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방청장이 회의 중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언급하면 그날 지방청 화두는 그 사람이에요. 청장이 한 사람을 칭찬하면 승진 대상자라며 시끌시끌하지요. 청장은 누구를 딱 집어서 질책도 잘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받는 정신적 충격이 상당하니까요.”

 

조현오식 실명 공개는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실명을 공개하고 나서 조현오가 받은 충격도 상당했다.

 

“그렇게 실명을 공개했는데도 ‘빽’을 쓰는 사람이 있는 거야.”

 

조현오는 외부 인사 청탁을 한 경정을 참모회의에 불렀다. 서울청 참모회의 참석자 규모는 30~40명 정도다. 그 자리에서 조현오는 경정을 호되게 질책하며 몰아붙였다. 이후 조현오는 분위기가 잡혔다고 판단했다.

 


 

2010년 8월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경찰청장은 감찰권과 총경 이상 인사권을 행사한다. 외부 인사 청탁에 대한 자기 관점과 대응은 조직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됐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조현오는 스스로 최악이라고 할 만한 인사 청탁을 받게 된다. 인사 청탁 자체도 혐오스러운 것이었지만 하필 청탁한 외부인이 검찰 출신이었다. 당시는 수사권 조정 문제로 경찰과 검찰이 첨예하게 맞붙던 시기였다. 조현오는 당장 감찰 조사를 지시했다.

 

조현오는 경정급 외부 인사 청탁은 명단 공개로 대응했다. 경무관급 이상 인사 내막은 ‘경찰청장 지휘’에서 다룰 것이다. 지금까지 조현오에게 청탁을 했다는 외부 인사는 누굴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했다는 경찰은 MB 정부 시절 어떤 인물을 동원했을까. 조현오는 몇 명을 언급했지만 이들을 밝히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외부 인물 가운데 한 명은 MB 정부 때 언론에 자주 등장한 종교인이다. 그는 조현오가 ‘경찰청장 이너서클’에서 온갖 루머와 견제로 시달릴 때 두둔해줬다고 한다.

 

조현오가 ‘빽’을 공개하는 방식은 정당했을까? 동의하지 않는 시선이 많았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었다면 조현오가 선례를 만든 만큼 계속 이어지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면 굳이 명단을 공개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조현오는 왜 주변에 적을 만드는 방식을 택했을까.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장 시절 훗날 법조 브로커로 유명해진 K 씨를 알게 된다. K 씨는 어떤 회사와 관련된 사건 수사가 마무리되자 서장실을 찾아와 조현오에게 봉투를 건넸고 조현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K씨는 청렴한 조현오에게 호감을 보였다.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에서 거둔 성과와 상관없이 3급지인 사천경찰서장으로 발령받는다. 그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K 씨는 사천경찰서에 찾아와 조현오에게 원하는 보직을 물었다. 조현오는 원하는 보직을 말했지만 이뤄지지는 않았다. 조현오가 돈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후 조현오가 거친 보직은 썩 좋지 않았다.

 

소식이 뜸하던 K 씨가 허준영이 경찰청장이 되자 연락이 왔다. K 씨는 경찰청 간부를 다 아는데 허준영만 모른다며 조현오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조현오는 알겠다고 답해놓고 허준영을 찾아가 오히려 K씨가 위험한 사람이니 가까이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며칠 뒤 K씨는 전화로 조현오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이후 연락이 끊긴 K 씨와 다시 연결된 것은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으로 감옥에 있을 때였다. K 씨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청렴한 사람을 판검사가 구속했다며 면회를 오겠다고 했다. 조현오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조현오는 K 씨가 사천경찰서로 찾아와 원하는 보직을 말하라고 했을 때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K 씨에게 기대려 했던 자신이 굴욕스러웠다. 이후 직급이 오를수록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사 기준 마련은 조현오에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외부 인사 청탁도 막고 주관적인 지휘관 평가도 뺀다면 승진 기준은 뭐가 돼야 할까. 조현오는 ‘성과’ 말고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다음 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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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경찰청장까지)

 

 

외사 수사과(당시 외사3과)는 인터폴에 보내는 공문을 담당한다. 외국으로 도망간 피의자 범죄 내용은 외사과로 들어온다. 외사과 직원은 영어로 사건 개요를 작성해 피의자가 도망간 국가로 보낸다. 조현오가 외사3과장일 때 좋은 소식이 들렸다. 2004년 4월 선배인 허준영이 경찰청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허준영은 2005년 1월 경무관 인사를 단행했다. 조현오도 인사 대상이었다. 경무관이 되면 보통 지방청 차장급으로 출발한다. 당시 경무관 ‘3대 보직’은 정보심의관, 외사관리관, 감사관이었다. 여기에 서울청 경무부장과 정보관리부장까지를 ‘5대 보직’이라고 한다.

 

조현오는 외사관리관이 됐다. 관리관, 심의관, 기획관 등 ‘관’이 붙는 직책은 기관 고유 업무가 아닌 기관장 보좌 역할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당시는 업무성격과 관계없이 주로 ‘국’은 치안감이 ‘관’급 부서는 경무관이 맡는 식으로 구분됐다.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몇 가지 과제를 맡겼다. 외사국 승격과 더불어 주재관 인원수를 30명 늘리라고 지시했다. 당시 교통관리관실도 교통국으로 승격하고자 애썼다. 먼저 움직인 교통관리관실을 제치고 외사관리관실이 승격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거니와 모양새도 나빴다. 주재관 인원을 갑자기 30명이나 늘리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조현오는 모두 해낸다. 2006년 외사관리관실은 외사국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정작 일을 시킨 허준영은 그 전에 경찰청장에서 물러난다. 2005년 11월 15일 여의도에서 한미FTA 반대 집회 중 농민 두 명이 사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2006년 2월 10일 이택순이 경찰청장으로 취임한다. 이택순은 조현오에게 ‘감사관’을 맡기고자 했다. 감사관은 감사·감찰 업무를 맡는다. 주변 압력을 견뎌내야 하고 뒷거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택순은 신중하게 적임자를 수소문했고 조현오를 선택한다.

 

2006년 말 조현오는 치안감으로 승진한다. 보직은 경비국장이었다. 2007년 4월 한화 회장인 김승연이 보복 폭행을 저질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5월 한화 고문과 이택순이 통화한 사실이 드러난다. 경찰청장 로비 의혹이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이택순은 자기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맡길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다. 경찰청장이 경찰 치부에 대한 수사를 검찰에게 맡긴다는 건 조직 안에서 용납되기 어려웠다. 경찰대 1기 출신인 황운하 총경은 경찰 내부 게시판에 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고 징계를 당했다.

 

경찰 내부 논의체인 전국지휘관 회의에서도 같은 의견이 나왔다. 전국지휘관 회의에는 지방청장, 국관, 본청 직속 기관장 등이 참석한다. 치안감 급은 대부분 참석한다고 보면 된다. 이 회의에서 이택순에게 퇴진을 권한 사람은 네 명이었고 그중 한 명이 조현오였다.

 

하지만, 네 명 가운데 이택순과 매일 마주치는 사람은 조현오뿐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근무지가 서울 밖이었다. 이택순은 조현오를 ‘시저를 찌른 브루투스’라고 빗대며 섭섭함을 드러냈다.

 

 

경찰청 직원은 청장 눈치 때문에 조현오를 멀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현오를 다독인 사람은 종합경찰학교장 김석기였다. 적어도 김석기는 조현오를 인정했다.

 

2008년 2월 11일 어청수 경찰청장이 취임한다.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보직을 옮긴다. 그해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집회가 열린다. 광화문 집회가 길어지면서 전국 전·의경 200개 중대가 집회에 투입된다. 청와대 바로 앞인 내자동 로터리가 뚫리자 어청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청수는 7월 22일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김석기에게 맡긴다.

 

2009년 1월 18일 서울지방경찰청장인 김석기는 차기 경찰청장으로 내정됐다. 김석기는 1월 29일 어청수가 퇴임하자 청장 역할을 맡는다. 공식 임명은 되지 않았지만 경찰청 수장 자리를 비워둘 수 없었다. 김석기는 치안정감 명단에 조현오를 넣는다.

 

<서울지방경찰청장 주상용. 경찰대학장 김정식, 경찰청 차장 이길범. 경기지방경찰청장 조현오>

 

하지만, 김석기는 2월 10일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한 달 뒤에 사퇴하면서 경찰청장에 오르지 못했다. 다음 청장 후보군에 눈길이 쏠렸고 조현오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그러나 치안정감이 되고 갓 일주일을 넘긴 조현오는 준비되지 않았다.

 


 

2009년 2월 15일 새 경찰청장에 해경청장인 강희락이 임명된다. 이후 조현오는 강희락 청장에게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쌍용자동차 노조 진압으로 청와대 인정을 받았다. ‘용산참사’처럼 사망자 없이 정리했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조현오는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임명된다.

 

조현오는 당시 서울청장 자리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 경비통이 필요했다. 2010년 11월 11일 G20 서울정상회의를 앞두고 경찰은 요인 보호를 위한 시뮬레이션을 끝없이 반복한다. 그 책임자가 조현오였다.

 

2010년 8월 9일 조현오는 청와대 측으로부터 경찰청장으로 내정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인사청문회를 앞둔 8월 14일, KBS는 5개월 전 조현오가 서울경찰청 기동대 지휘관 내부 강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를 언급했다고 보도한다. 8월 18일 변호사 곽상언(노무현 전 대통령 사위)은 ‘사자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한다.

 

경찰 안에서는 조현오가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조현오 사퇴를 요구하는 야당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조현오는 8월 30일 청와대에서 경찰청장 임명장을 받는다.

 

조현오에게 ‘빽’은 자신을 인정하고 등용한 상사였다. 하지만, 조현오가 자신을 인정한 상사 힘만 빌려 경찰청장이 될 수는 없었다. 역시 ‘관운’이 받쳐줘야 한다. 그렇다면, 그 ‘관운’이라는 게 과연 뭘까.

 


 

허준영, 김석기가 자신을 아낀 것처럼 조현오도 ‘차기 경찰청장’ 후보를 키우고자 했다. 조현오는 2011년 11월 능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차기 경찰청장 후보들을 치안정감으로 전진 배치했다. 그는 그 치안정감 중에서 경찰청장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종준 경찰청 차장, 이강덕 서울지방경찰청장, 이철규 경기지방경찰청장, 강경량 경찰대학장, 서천호 부산지방경찰청장>

 

조현오가 기대했던 미래 청장들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경찰청 차장인 박종준은 2011년 12월 말 사퇴한다. 2012년 총선 출마를 위해서였다. 이철규(간부후보 29기)는 2012년 2월 29일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 건으로 구속된다.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귀는 할 수 없었다. 이철규가 구속되면서 경기지방경찰청장은 서천호가 맡는다. 하지만, 불과 1개월 뒤에 ‘오원춘 사건’이 터졌다. 조현오는 이 사건 책임을 지고 4월 9일 기자회견을 열어 사퇴 뜻을 밝혔다. 하지만, 서천호에게 ‘오원춘 사건’은 악재로 작용했고 그 역시 경찰대학장으로 경력을 마감한다. 이강덕, 강경량 모두 경찰청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조현오가 자진사퇴를 했다면 봉하 쪽에서 차명계좌 발언을 더 문제 삼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누구보다 경찰청장이 되고 싶었다. 인사청문회에 나선 조현오는 의원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존경하는 위원님, 저에게 경찰청장이라는 중책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하여 경찰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겠습니다.”

 

참모는 지휘관과 달리 자기 색을 드러낼 수 없다. 조현오가 참모시절 건의를 하면 경찰청장들은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며 한 가지 충고를 덧붙였다.

 

“나 혼자 잘 되려고 이러는 줄 아느냐?”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너는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다.”

 

조현오는 전임자 조언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경찰청장 해보니까 다 뻥이야.”

 

경찰 조직에서 가장 큰 권한인 인사권과 감찰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한 경찰은 조현오를 ‘황야의 무법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자기 하고 싶은 것은 원 없이 다 누렸다는 얘기다.

 

 

다음에는 조현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전·의경 가혹행위 근절’ 과정을 짚어보겠다.

 

(다음 5화-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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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3화. 조현오의 관운(경정에서 총경까지)

 

 

조현오가 처음 맡은 직무는 부산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다.

 

생활안전과 주 업무는 범죄 예방과 검거로 파출소와 지구대가 하는 일을 떠올리면 된다. 1990년 말은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때다. 범죄가 잦은 유해업소 단속이 생활안전과 주요 업무였다.

 

주당 80~100시간을 근무하던 때다. 경찰은 야간 근무도 해야 했다. 같은 여건 속에서도 성실하게 근무하는 직원이 있었고 순찰 시간에 산자락이나 주유소 뒤편에 운전석을 뒤로 젖혀 자는 직원도 있었다. 조현오는 교육과 순시를 병행하며 조직을 다그쳤다.

 

 

 

경찰 지휘부가 단속 실적을 다음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조현오가 원하는 보직은 형사과장이었다. 경찰서 형사과장은 그가 외무부 생활과 바꿀 만한 ‘로망’이었다.

 

경찰서 과장이 현장을 챙기니 파출소장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해 조현오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실적과 성과를 낸다. 하지만, 그 대가는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조현오는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당시 대공과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보안과는 공안 업무, 즉 안보 분야를 담당한다. 이른바 간첩을 잡는 곳인데, 조현오가 가장 원하지 않는 보직이었다.

 

조현오는 좌절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주변에서는 ‘돈’과 ‘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쑥덕거렸다. 결국 조현오는 경찰 고위급을 잘 아는 지인을 통해 빽을 썼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부산동부경찰서 형사과장에 발탁된다. 그런데 조현오는 빽을 쓰면 돈을 갖다 줘야 하는 당시 관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냥 고맙다는 전화 한 통만 넣었는데, 인사성이 없다는 말 뜻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경정 6-8년차가 되면 조현오도 ‘경찰의 꽃’이라는 총경 승진을 눈앞에 둘 것이다. 문제는 총경 이후였다. 총경까지는 부산에서 승진할 수 있지만 경무관으로 승진하려면 서울에서 근무해야 한다. 하지만, 서울에서 승진 경쟁을 벌일 계장들이 조현오가 서울로 오는 것을 반길 리 없다. 조현오는 총경까지가 한계라는 생각에 서울 근무를 포기했다.

 


 

1995년 1월 느닷없이 사건이 터졌다. 누군가 경찰 승진시험 문제지를 몰래 유출하다 적발당한 것이다. 문제점을 보완해 시험 관리 방식을 완전히 뒤바꿔야 했다. 경찰은 경무국장, 교육과장, 고시계장 등을 교체하면서 적임자를 찾아야 했다. 당시 박일룡 경찰청장은 전국을 뒤져 가장 청렴한 고시 출신 선발을 지시했다. 형사과장 시절 수사비 전횡을 끊어낸 조현오가 눈에 띄었다. 조현오는 경찰청 고시계장으로 근무하면서 시험 과목, 응시 방식, 채점 방식 등을 모두 전산화했다.

 

 

1996년 조현오는 치안비서실 근무를 맡는다. 이때 이택순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형사정보를 담당했다. 신참인 조현오는 교통, 외사, 보안, 해경 등 잡다한 영역을 맡았다. 상사는 빈번하게 조현오 업무 능력을 문제 삼았다. 조현오 역시 정보업무가 힘들었다.

 

치안비서관과 경찰청 정보국장이 모두 승진 대상이면 알력이 생길 수 있다. 알력이 생기면 정보 제공이 수월하지 않다. 또 정보 분야는 인적 네트워크가 뒷받침돼야 한다. 당시 경찰 조직은 간부후보생이 잡고 있었다. 경찰대 1기 출신은 1985년 경위로 시작해 1996년 경정으로 승진, 경찰청 계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조현오는 상사에게 구박받으면서 이택순과 가까워졌다.

 

1997년 조현오는 총경으로 승진했다. 총경으로 승진하면 보통 지방청 참모를 1년 정도 하고 서장으로 나간다. 일반적으로 처음 나가는 지역은 ‘3급지’인데 경찰서 직원은 100명 정도다.

 


 

조현오가 총경이 되면서 맡은 첫 직무는 경남지방경찰청 경비과장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던 당시 울산 현대자동차에 불어 닥친 구조조정 바람은 심상찮았다. 1998년까지 울산은 경남지방경찰청 담당 지역이었다. 당시 조현오는 상황을 주시하며 경비 대책을 마련했다. 현대자동차 직원이 태화강 둔치에 수만 명이 모여서 궐기대회를 열었고 조현오는 집회 현장에 나갔다.

 

당시 울산 지역 경찰서는 모두 ‘1급지’로 서장들은 조현오보다 나이가 많았다. 주변에서는 신참 경비과장인 조현오가 나이가 많은 서장에게 무전 점호하는 것을 말렸다. 누가 봐도 욕먹을 짓이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업무와 관련된 일에 대해 양보가 없었다. 이런 당찬 모습을 눈여겨본 전병용 경남지방경찰청장은 김세옥 경찰청장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1급지’인 울산남부경찰서장에 조현오를 적극적으로 추천한 것이다.

 

울산은 1997년 광역시로 승격됐다. 도시가 커지면 그만큼 치안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외지에서 온 사람이 많고 유흥업소가 밀집한 도시에는 살인, 강도, 성폭력 사건 발생이 잦다. 대가를 받고 오락실이나 룸살롱 등 업주를 봐주는 경찰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울산은 경남지방경찰청이 있는 창원과 멀었다.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장악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조현오가 울산으로 오기 전날인 6월 30일, 현대자동차 사측은 노동자 수천 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은 울산동부경찰서 관할이다. 현대자동차 집회는 대치만 있었을 뿐 격렬한 상황은 아니었다. 조현오 서장은 경비를 담당했다. 그 사이 당 노사정지원특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노무현 국민회의 부총재가 7·8월 울산을 방문했다. 8월 말 277명을 정리해고하는 것으로 최종 노사 합의안이 나왔다.

 

현대자동차 사태가 진정되자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해고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찰 안에서 바로 소문이 돌았다.

 

“야, 너 조현오 서장 알아?”

“네, 좋으신 분입니다.”

 

“야! 조 서장이 다 자르고 있어.”

“돈을 먹었으니까 잘리겠지요. 그 분은 돈 먹는 거 봐주지 않아요.”

 

“야, 그래도 너무 캐더라.”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장으로 근무하면서 부패와 비리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조현오가 근무하는 1년 동안 음주운전 사망자는 120명에서 70명으로 줄었다. 게다가 울산남부서 관할 3개 검문소 실적이 경남 전체 25개 검문소 가운데 1·2·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3급지인 사천경찰서장으로 발령받는다.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울산남부서에서 거둔 성과는 아무리 봐도 3급지 발령 근거가 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현오는 이번 인사가 청탁을 하지 않아 생긴 결과라는 말을 듣게 된다.

 

 

조현오는 경남 사천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경무관으로 승진하려면 서울 근무가 반드시 필요했다. 경찰청이나 서울지방경찰청 수사과장, 형사과장, 정보과장 등이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조현오는 그런 자리로 자신을 끌어줄 인맥이 부족했다.

 

2002년 1월 조현오는 경찰청 입성에 성공한다. 그가 맡은 일은 ‘사이버테러대응센터장’이었다. 당시 조현오는 경찰청 내 총경 가운데 딱히 아는 얼굴이 없었다. 서울 근무 경험도 적었고 고시 출신 중에서도 아주 드문 외무고시 출신이었다. 조현오가 인사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같은 외무고시 출신인 허준영이었다.

 

조현오는 다음 보직을 기다렸다. 그는 곧 서울지역 경찰서장을 맡게 되는 순서였다. 총경 인사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조현오는 당시 최기문 경찰청장이 자신을 탐탁잖게 여겼다고 했다. 2003년 4월 조현오는 서울종암서장으로 부임한다. 아무도 견제하는 이가 없는 자리였다. 경쟁자들이 선호하는 보직은 종로서, 강남서, 서초서, 영등포서, 남대문서, 중부서, 송파서 서장이었다. 경무관 승진은 좋은 보직을 거쳐 실력을 인정받아야 했다.

 


 

서울종암서장 부임 1년째가 되자 조현오는 다음 보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소식이 들렸다. 허준영 치안비서관이 승진해 2004년 1월 서울경찰청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이어 서울경찰청 형사과장을 직위공모한다는 공지도 떴다. 조현오는 당장 신청했고 허준영도 거들었다. 하지만, 최기문 경찰청장은 승낙하지 않았다.

 

 

조현오는 그 사이 특수수사과 면접도 했다. 당시 특수수사과는 청와대 조직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청와대가 원하는 수위에서 사건을 조사하고 멈췄다. 면접 장소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었다. 승진이 급했던 조현오는 최대한 충성심을 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특수수사과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조현오는 최근에도 낙방 이유를 알지 못했다. 취재 과정에서 다른 경로를 통해 당시 조현오가 탈락한 이유를 들었는데, 청와대 말을 잘 듣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연달아 떨어진 조현오는 허준영에게 체념하듯 말했다.

 

“기동대장으로 갈까요?”

“그러지 말고 다음 인사 때 움직여라.”

 

당시 경비 담당인 기동대장(지금은 기동단장)은 총경 승진을 바로 한 사람이 가는 자리였다. 조현오가 서울종암경찰서에서 1년 반을 보내자 경찰청 외사수사과장(당시 외사3과장) 직위 공모가 공지됐다. 누가 뭐래도 조현오는 외무고시 출신이다. 그가 외사수사과장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004년 7월 조현오는 경찰청 외사수사과장(당시 외사3과)이 돼 미근동으로 돌아왔다. 현재 경찰청 과장(총경)은 모두 46명이다. 경찰청도 사람 사는 동네라 경찰청 안에서 유명한 사람은 곧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특히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장이 주요 비난 대상이었다.

 

조현오는 그런 쪽으로 포함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식당에서 조현오 과장이 지나가면 직원들은 “자장면을 시켜먹어도 독상을 받을 분”이라고 소곤거리곤 했다. 그만큼 권위적이고 편하게 다가가기는 어려운 상관이었다.

 

 

(다음 4화-조현오의 관운, 경무관에서 경찰청장까지)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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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제4화. 외시 출신 경찰청장

 

2003년, 황운하는 서랍을 정리하다가 누렇게 된 대학노트를 발견했다. 20년 전 경찰대 재학 시절 사용했던 노트에는 경찰관으로서 목표 세 가지가 적혀 있었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 경찰 수사권 독립, 경찰기구 독립이다. 경찰은 수사권 독립을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전제로 여긴다.

 

황운하는 1984년, 4학년이 됐을 무렵 경찰 조직이 떠안은 숙제 해결을 경찰이 존재하는 이유로 삼겠다고 생각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벌어지고,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1988년 1월 28일, 경찰대 졸업생 및 재학생들이 모여 성명을 발표한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천명하는 ‘경찰중립화선언’이었다. 황운하를 포함한 주동자들은 서울지방경찰청장실에 모두 불려 갔다. 더는 집단행동을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황운하는 이듬해 1989년 종암서 장암파출소장으로 부임한다. 80년대 학생들은 전두환 사퇴를 외치며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곤 했다. 1980년대 파출소에는 시위자를 검거하려는 주재형사가 상주했다. 당시 황운하와 함께 근무한 주재형사는 지금 어느덧 노인이다. 그도 황운하가 전 해에 큰일을 벌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찰 고위층은 파출소장 찾는 전화를 종종 걸었다. 주재형사는 이런 명령도 받았다.

 

"소장 다른데 못 나가게 붙잡아두세요."

 

당시 황운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경찰 조직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좋지도 않았지만, 이 조직에서 성장한다는 느낌도 없었다.

 

주재형사도 당시 20대 황운하는 경찰 선택을 조금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린 황운하에게 사주를 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잘 아는 철학관에 미리 가서 이렇게 당부했다.

 

“내일 파출소장 모시고 올 테니까 사주에 관운이 붙었다고 이야기해주라.”

 

주재형사는 황운하가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황운하를 포함한 경찰대 1기생들이 1987년부터 경찰에 유입되면서 조직 청렴지수가 높아졌다. 수사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은 1990년대에는 경찰대 졸업생을 대거 조사계에 투입하면서 청렴성을 요구하는 사회 흐름과 맞물리게 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조직이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기존 문화와 타성에 젖은 상사가 있기 마련이다.

 

황운하가 형사과장이던 시절 야간에 신고가 들어오면 직접 출동하는 서장이 있었다. 서장은 자신이 출동할 때마다 형사과장도 호출했다. 황운하는 호출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일은 야간 당직 반장 담당입니다. 낮에 정신을 집중해 사건 기록을 검토해야 하니 못 나갑니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서장은 과장들이 다 모인 오전 회의에서 불편한 마음을 내비쳤다.

 

“형사과장, 어제 서장이 나오라고 한 지시 전달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전달받았습니다."

 

“왜 안 나왔나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나갈 사건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낮에 일을 못합니다.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지 중요하지도 않은 일까지 쇼맨십 부리 듯하면 일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나와 일 못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과장들이 황운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서장은 즉시 서울지방경찰청에 황운하가 항명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황운하는 곧 다른 경찰서 형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처럼 참모로서 황운하를 내켜하지 않는 서장도 있었지만, 어떤 서장은 황운하를 '경찰대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제1호'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경찰대 출신들이 조직을 위해 목소리를 낼 때마다 그 중심에 황운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황운하는 경찰대 총동문회장을 지냈다.

 

당시 정치권은 대우부평자동차 진압 사태 책임을 경찰청장인 이무영에게 물어 퇴진을 요구했다. 경찰대 총동문회장이었던 황운하는 회의를 열고 최종 견해를 언론에 밝혔다. 정국 수습을 노린 청장 퇴진 요구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보도는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확산됐다. 언론은 경찰청장을 보호하고자 경찰대 출신이 나섰다고 봤다. 보도가 확대되자 황운하가 수습해야 할 상황이 됐다. 경찰청장 관련 사안인 만큼 경찰 고위간부는 모두 언론사로 총출동해 읍소했다. 언론이 갑이고 경찰이 을이었던 시절에도 기자에게 대드는 경찰은 황운하뿐이었다.

 

당시는 기자들이 사건 특종을 놓치면 경찰에 화풀이하는 관행이 있었다. 용산법조브로커 오다리 사건이 <중앙일보> 단독으로 보도되자 다른 언론과 형사과장 황운하는 불편한 관계가 됐다. 그렇다고 황운하가 기자들을 따로 챙기지도 않았다.

 


 

황운하가 강남서에서 형사과장으로 근무하던 즈음 SBS 뉴스가 시청률을 높이려고 사건 보도 비중을 늘리는 편성을 했다. 2003년 6월 17일 MBC가 강남 6인조 연쇄납치 강도 사건을 특종 보도한다. SBS는 다음날부터 8시 뉴스로 강남경찰서를 비난하는 기사로 맞대응했다. 경찰은 서둘러 수사 책임을 물어 황운하 등을 직위 해제했다.

 

경찰 조직은 계급정년제가 있다. 경정에서 총경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경정 14년 차에 경찰을 그만둬야 한다. 황운하는 이후 소청심사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해 경찰청장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 박종희는 경찰청장 최기문에게 이 문제를 따진다. 언론사와 갈등을 해소하려는 무리한 징계라고 지적했다.

 

"그러니까 경찰의 징계가 다분히 감정적이고 이 사건을 호도하려는 의미가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멀쩡한 사람들에게 그런 혐의를 씌워 수사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해 가지고 소청심사위원회에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까지 받았겠습니까?"

 

총경 인사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그러나 경찰청장이 국정감사 지적을 받는 상황에서 경찰청 분위기가 원인 제공자인 황운하에게 호의적일 리 없었다. 그러나 최기문은 황운하를 2004년 총경으로 승진시킨다. 황운하는 훗날 최기문 경찰청장으로부터 승진한 이유를 전해 들었다. 당시 경찰청장 최기문에게 한 참모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찰 조직에서 황운하에 대한 평가가 갈리지만 조직에 있어야 된다는 여론이 훨씬 많습니다. 만약 황운하가 총경이 안 돼 조직을 나간다면 경찰 역사에 두고두고 오점을 남기는 청장이 될 것입니다."

 

황운하를 중용한 첫 경찰청장은 허준영이었다. 그는 청문회에서부터 경찰 수사권 소신을 거듭 밝혔다. 당시 검찰총장인 김종빈이 "검찰이 가진 것은 수사권밖에 없다"라고 하자 "경찰은 묵비권밖에 없다"고 받아칠 정도였다. 허준영은 황운하를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장으로 불렀다.

 

2005년 12월, 허준영이 물러나자 청와대는 신임 청장으로 이택순을 낙점했다. 2006년 이택순은 바로 황운하를 대전서부서장으로 내보냈다. 인사규정에 따르면 황운하는 서울에서 총경으로 승진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근무해야 했다. 하지만, 대전중부경찰서장, 대전청 생활안전과장을 지냈다. 당시는 경무관 승진은 서울에서 근무한 총경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임 경찰청장인 어청수, 강희락도 황운하에게 서울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2009년 황운하와 함께 근무한 대전지방경찰청 직원들은 '황운하도 여기서 끝'이라며 안타까워했다.

 


 

2009년 황운하는 전혀 친분이 없던 서울청장에게 전화를 받는다. 바로 조현오다. 조현오는 황운하에게 서울지방경찰청 과장으로 오라고 부탁했다.

 

당시 서울청장 조현오가 황운하에게 건넨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경무관 승진 1순위 보직인 서울청 형사과장을 맡기겠다고 한 것이다.

 

대체 조현오는 어떠한 생각으로 이런 제의를 한 것일까? 조현오를 잠시 살펴보자.

 

조현오는 허준영과 마찬가지로 외무고시 출신이다. 외교부에서 10년 근무하다가 1990년 경찰서 과장급인 ‘경정’으로 특별 채용됐다. 조현오는 경찰에 입문한 형사과장 시절부터 성과를 중시했다.

 

조현오는 관운이 돋보였다. 선배 허준영 덕에 경무관으로 승진하여 외사관리관을 맡는다. 당시 경무관 5대 보직 중 하나다.

 

이어 치안 비서실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택순은 청장이 되고 2006년 조현오를 경찰청 경비국장, 즉 치안감으로 승진시켰다. 경비국장은 경찰청 내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매일 오전 회의에서 경찰청장을 대면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안가 이택순 청장에게 위기를 안겨준 한화 폭행사건이 터졌다.

 

이택순은 자기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전국지휘관회의에서 고위간부(치안감) 다섯 명이 이택순에게 청장 사퇴를 건의했다. 그 명단에는 조현오와 김석기가 있었다.

 

이택순은 황운하를 징계한 것처럼 그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아침 회의 때마다 조현오는 이택순에게 “시저를 찌른 부루터스”라며 면박을 당했다.

 

경찰종합학교장 김석기는 조현오를 위로하곤 했다. 이때 조현오는 김석기와 ‘수사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신뢰가 쌓였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때 김석기는 경찰청장으로 내정됐다가 용산참사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경찰청장 내정자로서 단행한 인사에서 조현오를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승진 발령한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조현오는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으로 청와대를 만족하게 했다.

 

조현오는 2010년 8월 경찰청장에 내정됐다. 하지만, 그 직전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대 내부 강연에서 당시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 사실이 공개되면서 여론 반대에 부딪혔다. 청문회에서 야당도 거세게 반대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확고했다. 이미 믿고 일을 맡길 사람으로 여겼고 2010년 8월 경찰청장 임명장을 전한다.

 

조현오에 대한 경찰 조직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이다. '조 파면'이라는 별명을 거론하며 독재자로 보는 시선이 있지만, 그런 비난에도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카리스마를 칭찬하는 평판도 있다.

 

조현오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은 차명계좌 발언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큰 줄기는 바르게 잡으려고 노력했고 사명을 회피하는 청장은 아니었다는 목소리도 있다.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2008년), 경기지방경찰청장(2009년), 서울지방경찰청장(2010년)을 두루 거쳐 경찰청장이 됐다. 조현오와 역대 다른 청장들과 차이점을 한 기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방청장으로 와서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부류가 있어요. 그런 정책이 인기를 얻으면 차기로 가는 디딤돌이 되지요. 하지만,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자 다양한 정책을 통해 인기를 얻으려 하지는 않았어요. 그보다 자기 권한으로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겠다는 쪽이었지요.”

 

조현오는 인사 기준은 성과를 따른다는 인식을 안착하고자 했다. 부산, 경기, 서울을 거쳐 경찰청장이 되면서 성과주의를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그 과정에서 인사 청탁 금지 지시를 어기고 빽을 쓰려는 직원이 있었다. 부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는 그런 직원을 불러서 조용히 혼을 냈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는 모든 참모들이 참가하는 회의에 불려서 인민재판까지 감행했다.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되자, 인사 청탁 금지 지시를 어기고 빽을 쓰려는 직원은 바로 명단을 공개했다.

 

왜 그랬을까. 조 청장은 서울은 백 ‘수준과 급’이 달랐다고 말했다. 경무관 승진 1순위인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장은 그만큼 보직 경쟁이 치열했다.

 

물론 황운하 경력은 충분했지만 통상 서울청 형사과장 자리는 서울에서 서장을 거쳐야 가능한 보직이었다. 그러나 조현오는 업무능력이 탁월하면 과감하게 등용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수평과 수직 질서를 흔드는 인사였다.

 

형사과장 자리를 제안받은 황운하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저는 서울청 수사과장이나 서울청 광역수사대장을 하고 싶습니다."

 

당시 서울청 광역수사대가 맡은 대표 사건은 2009년 12월 14일 벌어진 KBS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장 폭행사건이다. 연예인 강병규는 촬영 현장에서 제작진이 이병헌을 고소한 캐나다 동포 여성 배후가 자신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주장하다가 몸싸움을 벌였다. 심지어 조직폭력배까지 동원됐다. 논란이 된 이 사건은 서울청 광역수사대가 2009년 12월 17일 수사를 시작해 2010년 1월 9일, 강병규 등 4명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깔끔하게 처리했다.

 

황운하는 오랫동안 경찰 수사력을 과시하면서 위상을 높일 수사를 하고 싶었다. 서울청 수사과장과 광역수사대는 수사 인력이 풍부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청장은 그 자리에 황운하를 앉히는 것은 힘들다는 견해를 전했다고 한다.

 

결국 황운하가 맡게 된 형사과는 강력계, 폭력계, 과학수사계, 마약계로 나뉜다. 주로 강력범죄와 마약, 폭력사건을 다룬다. 2010년 2월 10일 112 신고가 들어왔다.

 

불법 오락실을 신고한 사람을 그 오락실 업주가 찾아내 폭행한 사건이었다. 오락실 업자가 신고자를 어떻게 알았을까? 뇌물을 받고 뒤를 봐주는 경찰이 있다는 추정으로 이어졌다.

 

조현오는 자존심 면에서 황운하와 비슷했다. 비리를 도려내 경찰 조직을 혁신하겠다는 의지도 분명했다 조현오는 황운하를 불러 오락실 업자와 유착된 경찰관들을 모조리 잡아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오락실 업자는 이미 잠적했다.

 

황운하는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청 폭력계 형사들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수사 실력이 너무 좋아."

 

(다음 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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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 김대중은 프랑스 대혁명처럼 구체제에 대한 모순을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체제 모순 타파 가운데 하나가 경찰 수사권 독립이었다.

 

1999년 경찰청장 김광식은 수사권 독립 소신을 피력했다.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인 황운하는 오랫동안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형사 검찰 파견이었다. 정작 형사과 인력은 부족한데 경찰은 검찰 일을 거들었다. 검찰 파견 직원 관련 규정을 따르지 않는 편법 파견이었다. 파견 경찰을 철수하려면 서장 결재가 필요했다.

 

황운하는 파견 경찰 철수를 시도했다. 서장은 결제에 앞서 검찰 보복을 걱정했다. 그래도 조직에 대한 자존심은 있었다. 해보겠다고 나서는 황운하에게 힘을 보탰다. 황운하는 관련 규정을 바탕으로 '파견 경찰관 철수 복귀 협조 요청'이라는 공문을 서울중앙지검에 보냈다.

 

서울중앙지검은 반응이 없었다.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황운하는 파견 형사에게 복귀 시점을 알리면서 이를 어기면 징계하겠다고 통보했다. 형사들은 모두 예고한 시한에 맞춰 복귀했다. 황운하는 미리 방송 카메라를 불러 그 앞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이 내용은 9시 뉴스 첫 보도로 나간다.

 

1998년 검찰은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을 구속했다. 이어 1999년 경찰청 정보국장도 구속한다. 검찰이 경찰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에 맞춰 경찰이 의욕적으로 나선 수사권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황운하는 공고해 보이는 구체제 벽이 어느 순간 무너지게 돼 있다고 확신했다. 1999년 검찰 파견 경찰 철수 이후 황운하는 검찰 쪽 전화를 자주 받는다. 대부분 '두고 보자'는 내용이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경찰 수사권 독립에 호의적인 정부였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대북특검과 대선자금 수사로 요동쳤다. 황운하는 서울서부지방검찰청 수사 지휘를 받는 용산경찰서 형사과장이었다.

 

이 시기 황운하와 식사를 했던 서울지역 일간지 기자는 흥미로운 일을 접한다. 그 자리에는 한 변호사가 함께했다. 변호사는 황운하에게 괜히 일을 벌인다며 못마땅해했다. 대화에 호기심을 느낀 기자는 취재를 시작했다. 일개 경찰서 형사과장이 검찰 뒤를 캐는 전무후무한 일이 진행 중이었다. 시발점은 용산역이 주무대인 브로커 '오다리'에 대한 첩보다. 당시 오다리를 만난 형사가 전한 이야기다.

 

"처음에 용산경찰서에 가니까 오다리라는 친구가 접근을 했어. 지인이 나를 한 호텔 식당에 데리고 가더니 박 사장이라고 소개하는 거야. 그가 나에게 유능한 형사라고 익히 들었다며 친해보자네. 그때는 뭐하는 친구인지 몰랐거든. 그런데 내 앞에서 전화를 하더니 '김검, 박검' 그러면서 상대에게 야지 넣고 하는데 속으로 사기꾼인가 했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이었어! "

 

박 사장은 '오다리'로 불렸다. 다리 다섯 개는 '마당발'과 '잽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당시 역 주변에는 성매매집결지가 있었다. 용산역에도 윤락업소가 80여 곳 정도 있었다. 각종 불법영업으로 업주에게 문제가 생기면 오다리가 나섰다. 오다리는 변호사를 구해주면서 거액을 챙기곤 했다.

 

오다리는 판검사와 친분을 과시했다. 물론 경찰도 유착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 경찰은 형사들이 잘못해 검찰에 불려 다니면 오다리가 나서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오다리에게 신세를 진 경찰이 제법 있었다. 황운하는 초기에 오다리를 수사할 적임자를 구하지 못했다. 마침 형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2001년 유명 연예인 마약 사건을 인지 수사한 젊고 유능한 형사였다. 2003년 3월 17일 진술서를 확보하고 오다리를 변호사법 위반으로 긴급 체포했다. 하지만, 구속영장을 검찰이 기각한다. 경찰은 오다리 사건 관련 영장을 다섯 번 신청한다. 압수영장 세 번, 구속영장 두 번이다. 검찰은 모두 기각한다. 언론은 '다섯 번 영장 기각'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오다리는 2003년 5월 27일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오다리 통화기록을 확보한다. 최근 3개월 동안 검사, 변호사, 판사 50여 명과 150통 이상 통화한 내용이었다. 절반 이상이 서울중앙지검 서부지청 검사들이었다. 6월 들어 대검은 현직 검사 22명을 상대로 감찰을 시작했다. 계좌추적에서 금품을 받은 것이 드러난 검사들은 법무부 검사징계위원회로 넘어갔다. 이 가운데 한 명은 법무부 소속으로 당시 법무부 장관인 강금실이 총애하는 인물이었다. 검사 징계위원장은 법무부 장관이다.

 

2003년 10월 4일 <경향신문>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끝내 자기 오기를 관철했다고 보도했다. 법무부 소속 검사는 무혐의로 벗어났고 이후 순탄한 길을 걸었다. 오다리 보도로 막상 피해를 입은 쪽은 강남경찰서 형사과장인 황운하였다. 총경 승진을 앞두고 직위해제당한 것이다.

 

언론과의 마찰이 징계 배경이었지만 2003년 6월 20일 <한국일보>는 "그간 자주 물의를 빚어 온 점 등도 감안됐다"는 고위 간부 말을 인용하면서 ‘'트러블메이커'에 대한 시범 징계 가능성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고 전했다.

 

황운하는 이후 소청심사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듬해 황운하는 총경으로 승진했다.

 


 

황운하를 중용한 첫 번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다. 외무고시 출신 허준영은 2005년 1월 취임했다. 그는 청문회에서부터 경찰 수사권 소신을 거듭 밝혔다.

 

수사권이 있는 검찰은 챔피언이었고 경찰은 도전자였다. 도전자는 계속 시합을 요구했고 챔피언은 웬만해서는 도전자를 피하려 했다. 2004년 9월부터 검·경 수사권 조정협의체 회의가 수차례 열렸다. 2005년 중반 국회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진행은 갈수록 지지부진했다. 참여정부는 검찰·경찰 중재, 국회 입법, 총리실 조정 등을 거치며 결론을 내려했지만 실패했다.

 

경찰청장 허준영은 수사구조개혁팀을 꾸려 황운하 총경을 팀장으로 불렀다. 황운하 행보는 다시 대외적인 충돌을 가져왔다. 황운하가 허준영에게 보고 없이 전결로 하달한 공문이 문제가 됐다. 모두 두 번이었는데 검찰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 공문은 검찰 강제인치 등 잘못된 관행을 거부하라는 지시였다.

 

수사지휘권을 앞세운 검찰이 저지르는 나쁜 관행 가운데 '피의자 면담제도'가 있다. 법원 영장실질심사제도를 흉내 낸 이 제도는 법적 근거가 없다. 만약 경찰이 긴급체포를 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을 때 검찰이 피의자를 면담하고 싶다면 화상통신을 하거나 검사가 경찰서로 찾아오면 된다. 법원이 피의자를 면담하는 제도인 영장실질심사도 피의자 신청이 없으면 할 수 없는데, 검찰은 경찰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피의자 뜻과 무관하게 검찰청으로 데려오게 했다. 기관이 다른데도 공문도 없었다. 경찰은 피의자를 검찰청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경찰서로 데려왔다.

 

황운하는 전국 경찰서에 '피의자 면담을 위한 검사면전 강제인치거부'를 내용으로 담은 공문을 하달한다. 충남지방경찰청과 강릉경찰서 두 곳이 검찰과 맞붙었다. 청와대도 황운하 행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청와대 공직기강 비서관실이 나서 허준영에게 인사조치를 요구했다. 허준영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 문제로 허준영과 청와대는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허준영은 왜 자신에게 보고도 없이 행동한 황운하를 오히려 감쌌을까? 한 경찰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내용은 청장에게 보고해도 그 누구도 보내라고 할 수 없어요. 거기서 황운하의 과단성이 나오는 거죠.”

 

허준영은 2005년 12월 WTO 쌀협상 비준반대 시위에서 농민 두 명이 사망하면서 경찰청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새로 청장으로 취임한 이택순은 황운하를 경찰청 밖으로 내보냈다.

 


 

황운하는 대전서부서장으로 가서도 '수열모'라는 모임을 만든다. '수사구조개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검찰이 주도하는 형사소송법 체제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깨우쳐야 했다. 그 지점에서 구체제 모순을 뒤바꾸는 에너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모임을 꾸리고 몇 달이 지난 2006년 9월 5일 대전서부서는 대전지검에서 온 전화를 받는다. 한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데려오게 했다. 대전서부서 직원은 수열모 모임에서 배운 내용이 생각나서 서장 황운하에게 바로 보고한다. 대전서부서는 검찰 요구를 거부하는 사유를 적어 공문으로 보냈다. 피의자를 면담하고 싶으면 검사가 경찰서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검사는 직접 경찰서로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9월 15일 검사가 다시 인치 요구를 했다. 황운하는 또 거절했다. 대전지역 언론은 당시 검·경 갈등을 '살얼음판', '초유의 신경전', '폭풍전야' 같은 표현으로 묘사했다.

 

검찰 안에서는 황운하를 겨냥해 절대 묵과할 수 없다며 '인권옹호직무명령불준수죄'로 기소하자는 의견이 쏟아졌다. 하지만, 종전 같은 기소처리는 없었다. 2006년 9월 26일 대전 CBS 정보보고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 본인이 희생양이 되겠다고 덤벼드는데 우리도 사실 겁난다.

 

검찰만 황운하가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경찰 수뇌부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이미 경찰청은 이런 문제를 검찰에 협조하기를 바랐다. 경찰청장 이택순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황운하를 소리 지르는 노점상에 빗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황운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택순은 9월 25일 황운하를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보낸다. 누가 봐도 문책성 인사였다. 황운하는 26일 이임식에서 검찰을 향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요, 사법개혁의 방해 세력이고, 강력한 인권침해 집단이다."

 

검찰개혁을 바라는 대다수가 공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들도 검찰개혁 방법으로 경찰 수사권에 힘을 보태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경찰이 중요한 순간마다 국민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한 예다.

 

게다가 국민은 경찰이 어떤 수사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경찰이 존재감을 알리려면 관심을 끌 수 있는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므로 대기업, 정치인 수사는 대부분 검찰 몫이다.

 

황운하는 형사과장 시절 마약사건을 중요하게 다뤘다. 검찰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수사해서 이목을 끌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연예인 마약 문제였다. 2007년 황운하가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 시절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사건이 터진다.

 


 

2007년 3월 8일 한화그룹 회장인 김승연이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직접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보복 폭행 사건'이다. 수사 결과도 깔끔했다. 일선 경찰서가 처음으로 재벌 회장을 구속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 초기 경찰이 은폐를 시도하면서 늑장수사를 한 사실이 밝혀진다. 이 과정에 한화 쪽 로비가 있었고, 전 경찰청장 최기문이 역할을 했다. 5월 25일 경찰청 감찰 이후 서울청장 사퇴와 서울청 수사부장, 형사과장, 남대문경찰서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경찰청장 이택순이 자기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일이 벌어진다. 경찰이 검찰에? 황운하는 5월 26일 이택순 퇴진을 요구한다. 일선에서는 경찰청장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경찰을 수사기관도 없는 조직으로 만들었다고 분개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같은 달 28일 경찰청에서 열린 전국경찰지휘부회의에서 국장급 일부가 사퇴를 건의했다. 이 모든 것은 조직 발전을 위한 충정으로 이해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가 이택순에게 힘을 보태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사퇴를 건의했던 국장 및 청장들은 인사 조치되거나 회의 때마다 면박을 당했다.

 

황운하에게는 중징계가 예고됐다. 8월 29일 경찰청 중앙징계위원회에 황운하가 소환됐다. 황운하가 차에서 내려 경찰청 정문으로 들어갔다. 황운하는 징계위원을 향해 징계받을 일을 한 게 없다고 반박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인용하기도 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당시 민중들이 변화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사건인데 그 구체제 모순에 맞선 사람들을 범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징계위원장이 황운하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야, 너무 세게 이야기하지 마! 무섭다고!”

 

 

(다음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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