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제복 20화.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

 

조현오는 경찰청장에서 물러난 지 4개월이 지난 시점에 국회 통지를 받는다. 2012년 9월 2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조현오를 쌍용자동차 청문회 증인으로 지목한다. 주변에서는 출석하지 말라며 만류했다. 말린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년 전인 2009년 4월 8일 쌍용자동차 사측은 2646명을 구조 조정하는 안을 발표했다. 사측은 희망 퇴직서를 내지 않은 976명을 정리 해고한다. 이 가운데 600여 명이 옥쇄파업에 참가한다.

 

2009년 8월 6일 파업 77일 만에 쌍용차 노사는 '쌍용자동차 회생을 위한 노사 합의서'를 내놓으며 극적으로 합의한다. 정리해고자 절반을 무급휴직자로 하되 1년이 지나면 생산 물량에 따라 순환 근무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후 회사는 휴직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구조조정 이후 자살한 노동자와 가족 수가 22명이었다. 이 같은 노사합의 이행 과정을 확인하는 것은 고용노동부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현오가 증인으로 출석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게 뻔하다는 게 주변 걱정이었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루는 언론 논조도 달라졌다. 그동안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을 '과잉진압 논란'으로 다뤘던 언론도 '과잉진압'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MBC 898회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청문회는 예상대로 조현오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조현오를 향해 사망한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에게 사죄하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정신과 박사인 정혜신은 방송과 청문회 등에서 쌍용차 희생자 발생 원인 가운데 하나로 경찰특공대 진압을 꼽았다. 당시 하에서는 헬기가 최루액을 쏟아부었다. 경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긴장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당시 쌍용자동차 사건에 투입된 정보과 형사에게 물었다. 옥상에서 저항하는 노동자를 움츠러들게 할 방법이 최루액 투하밖에 없었을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화가 가장 중요하지요. 경찰은 어떻게든 대화로 풀려고 노력했어요."

 

경찰 역할은 사회 안정이다. 경찰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노사 갈등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지역에 오래 근무한 경찰은 노동자와 서로 잘 아는 사이기도 하다.

 


 

1986년 출범한 쌍용차는 1998년 대우그룹이 인수했지만 대우그룹이 몰락하면서 1999년 함께 워크아웃됐다. 쌍용자동차 주인이 바뀌는 시점에 노사 갈등은 증폭됐다. 2004년 중국 상하이차가 쌍용자동차를 사들이자 노조는 이에 반발하며 부분·전면 파업을 했다. 쌍용자동차 경영이 나아질 기미가 없던 2008년 말에는 대주주인 상하이차가 '먹튀'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쌍용자동차 노조는 12월 5일 한상균을 10대 지부장으로 선출한다. 정보과는 '정리해고 박살'을 구호로 걸고 지부장이 된 한상균을 평소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판단했다.

 

2009년 1월 9일 상하이차는 인수 4년 만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법정관리 신청을 하며 경영권을 포기한다. 2월 6일 기업회생절차가 시작되면서 사측은 핵심 정책으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인다. 곧 정리해고자가 발표됐다. 부분파업을 벌이던 쌍용자동차 노조는 5월 22일부터 옥쇄파업을 시작했다. 이후 약 두 달 동안 정보과 형사가 조현오에게 받은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대화를 붙여서 빨리 해결하는 것이 최상이다."

 

노사 견해차는 너무 컸다. 정리해고 통보와 옥쇄파업이 맞섰고 사측은 대화 의지가 부족했다. 6월 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직원 3000여 명이 회사를 가동하겠다며 사내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공장 안에 있던 농성 노동자와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경찰력 6개 부대를 투입해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사 양측을 갈라놓았다. 당일 MBC 뉴스 보도는 이렇다.

 

“경찰은 27개 중대 2000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헬기까지 띄워 감시하고 있지만, 쌍용차 직원들 간 격한 충돌에도 개입하지 않고 주변 통제만 하고 있습니다.”

 

사측은 경기지방경찰청에 방문해 "우리 회사에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며 항의하면서 공장 진압을 재촉했다. 조현오는 공장 외곽에 경찰을 배치해 사측은 물론 그 누구도 공장을 출입할 수 없게 했다. 사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사측은 네트워크를 동원해 공권력이 뒷짐을 지고 있다며 경기지방경찰청을 압박했다. 조현오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2의 용산사태'를 언급하며 버텼다.

 

 

 

실제로 평택 쌍용자동차 도장 2공장 믹싱룸에는 인화물질이 가득했다. 자칫 폭발이라도 일으키면 대참사를 각오해야 했다.

 

정보과 형사들은 물밑에서 해고 노동자와 접촉했다. 정보과 형사는 당시 해고노동자에게 최루액 때문에 고통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노동자에게 가장 큰 관심은 '협상'이었다. 정보과 형사들은 노조 입장을 회사에 전했다. 성의를 보이지 않는 사측을 압박하고 대화장으로 끌어냈다. 다음은 경찰이 주선한 교섭 일지다. 이 모든 사항은 조현오 지시로 이뤄졌다.

 

- 5월 28일 : 경기청 정보분실장이 쌍용차 노조 한상균 지부장을 접촉하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노조 측은 기존의 ‘총고용보장’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무급휴직 안 등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다며 사측이 협상에 나서 줄 것을 촉구

 

- 6월 15일 : 경기청 정보계장과 담당정보관이 사측 박영태 사장과 노조 한상균 지부장을 쌍용차 본관 1층에서 접촉. 6월 17일 박영태 사장과 한상균 지부장이 단독 협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주선.

 

- 7월 8일 : 경기청 정보계장과 정보관 1명이 공장 내 노조사무실을 방문. 노조사무실에서 한상균 지부장을 접촉. 기존 ‘총고용 보장’ 주장에서 한발 물러나 현실성 있는 대화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회사 측이 교섭 주선 거부.

 

- 7월 중순부터는 경찰중재로 물밑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노조가 기존 입장을 철회하지 않음.

 

조현오도 직접 사측에 안을 제시했다. 정보계장을 통해 노조에도 의견을 전했다. 조현오 제안은 '독일식 일자리 나누기'였다. 각자 월급을 줄여 모두 껴안고 가자는 것이다. 노사는 모두 조현오 제안을 거절했다고 했다. 사측은 생산 효율성을 들어 반대했다. 해고 대상자가 아닌 노동자는 월급이 깎이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해고 노동자는 완전고용을 주장했다.

 

조현오는 2012년 7월 8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노사 양측을 중재하면서 잡셰어링으로 접근했는데 양쪽 다 씨도 안 먹혔다"라고 말했다.

 

7월 30일부터 8월 2일까지 교섭이 이어졌다. 사측은 정리해고자 가운데 40%만 구제하겠다는 안을 제시한다. 노조는 이 제안도 거부한다. 8월 2일 협상이 결렬되자 정보과 형사는 눈앞이 깜깜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이날 상황에 대한 노조 측 증언이 다르다. 2012년 9월 20일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한상균 지부장 말이다.

 

“우리 조합원이 모두 아는 상태에서 8월 1일 자 교섭을 정말 끝장 교섭이라고 하면서 진행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에 실질적으로 정리해고를 회피할 방법들에 대해서 근접했던, 그야말로 그래서 우리 모두 정말 아픔이 있었지만 원만히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디인지는 모르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그것들이 어느 순간 깡그리 무시되는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공권력 투입만 없었다면 노사 간 타협이 됐을 것”이라는 한상균 지부장 주장에 대해서 조현오는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강하게 받아쳤다.

 

반면 정보과 형사는 “지부장이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한상균 지부장의 고뇌를 잘 알고 있었다. 쌍용자동차는 1차 협력업체 255개, 2·3차 협력업체 1900여 개로 딸린 노동자만 약 10만여 명이었다.

 

만약 파업이 이어지면 협력업체 수만 명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경파들은 ‘완전 고용’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고를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 대상일 것은 자명했다. 당시 정보과는 강경파는 한상균 지부장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보고했다.

 

경찰은 합의점을 찾으려면 공권력으로 압박하여 강경파 입지를 좁히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도장 공장 폭파 위협’ 강경파 움직임도 정보보고로 올라왔다. 게다가 쌍용자동차 협력업체가 하나씩 부도 처리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공권력 행사를 마냥 미룰 수만은 없었다.

 


 

경찰은 8월 4일 작전을 시작했다. 12개 부대와 특공대 4개 대대를 동원해 폐수처리장 옥상을 장악했다. 5일 새벽이 되자 서울 등 타지역 부대가 속속 도착했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다. 작전 직전에 경찰청장인 강희락이 “위험하니까 작전하지 마라”라고 지시했다. 이미 인력과 장비를 모두 갖춘 상태였다. 충분히 작전 가능하다는 현장 판단이 있었다. 조현오는 청와대를 설득했다. 그리고 강희락에게 다시 작전지시를 받는다.

 

그런데 지방경찰청장이 경찰청장 지시를 무시한 것은 항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청문회에서 의원인 심상정은 “이게 어느 나라 위계질서냐”며 “강희락 경찰청장이 투입하지 말라고 했는데 조현오 청장이 찍어 눌러서 1시간 만에 지시를 번복하게 한 것 아니냐”라고 질책했다. 조현오는 이 대목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고했다.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 논리라면 부당한 지시는 언제나 따라야 하느냐? 공무원 세계에서는 상사 지시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그 상급자에게 이의신청이란 것을 할 수가 있다.”

 

8월 5일 경찰은 도장2공장을 제외하고 모두 장악했다. 당시 정보과 형사들은 노동자와 접촉할 때마다 경찰이 인화물질이 가장 많은 도장2공장 안에 들어오는 일은 없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태가 벌어지면 어느 문으로 나가면 된다는 말도 전했다. 8월 5일 조현오는 6일까지 나오면 선처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물리적, 심리적 압박에 못 이겨 노조는 8월 6일 사측과 합의했다.

 

조현오는 이듬해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영전했다. 그리고 2010년 8월 23일 경찰청장 인사청문회에서 “2009년 쌍용차 사태 해결로 10만여 명의 생존권을 지켜내고 국가경제의 피해를 최소화시킨 데 많은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쌍용차 진압작전이 끝나고 나서 수많은 사람이 전화로 찬사를 보냈다. 조현오는 칭찬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에 담긴 사회적 의미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진압으로 모든 완성차 업체 임금은 한 번에 동결됐다. 완성차 업체 노동자들은 파업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금속노조 전체 판은 그렇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2009년 10월 창원 대림자동차 노조가 무너졌다. 2010년 2월 경주에 있는 발레오만도 노조도 와해했다. 발레오만도는 직원 923명 중 621명이 조합원이었고 비정규직이 없다는 게 자랑이었던 업체였다. 그런데 취임 때부터 위기감을 조장하던 새 대표이사는 느닷없이 직장폐쇄를 강행했다. 노동조합 사무실도 용역을 투입해 출입을 막았다. 경주지역 금속노조는 연대파업을 벌였으나 노조 핵심 간부들은 바로 구속됐다.

 

2010년 6월 구미 KEC 여성 기숙사에 용역이 투입된다. 경주 발레오만도에 투입됐던 그 용역이었다. 그해 8월 대구 상신브레이크, 2011년 3월 광주 금호타이어까지 노동조합 파괴는 이어진다. 경찰과 검찰은 물론 노동부도 뒷짐을 지고 모른 척했다. 그리고 2개월 뒤인 5월 충남 아산에 있는 유성기업 차례가 됐다. 2012년 7월에는 안산 SJM 노조 농성장에 용역 깡패들이 들어왔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은 ‘야만의 새벽’이라는 제목으로 이 내용을 보도했다.

 

 

 

같은 달 퇴직한 조현오는 <도전과 혁신>이란 제목으로 출판기념회를 한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1층이었다. 책에서 조현오는 여전히 업적 중 하나로 쌍용차 진압작전을 내세웠다. 출판기념회 현장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화환이 가득했다. ‘부산고등학교’ 동문이 보낸 화환과 MB 정부 시절 또 다른 공적이었던 어청수가 보낸 화환이 눈에 띄었다. 필자는 잠시 둘러보고는 서울시청까지 걸어갔다.

 

서울시청 근처 덕수궁 앞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설치한 시위 천막이 눈에 띄었다. 쌍용차 희생자 추모와 더불어 정리해고 문제를 외치고 있었다. 길가에 주차한 경찰버스가 그 앞을 가렸다. 그날 밤 SNS에는 눈 한쪽이 멍든 조현오가 표지인 책 <도전과 혁신> 사진이 욕설과 함께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다.

 


 

조현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경찰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왜 늘 국민과 부딪힐까? 연재 시작에 밝혔듯이 그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제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도전과 혁신> 책에는 없는 내용이다.

 

조현오는 1955년생이다. 전쟁 중에 몸을 다친 군인을 ‘상이군인’이라고 한다. 전쟁 후 상이군인은 국가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몇몇은 일반 서민에게 돈을 달라며 행패를 부리곤 했다. 조현오 부모 가게에도 상이군인이 찾아와 물건을 걷어차며 행패를 부렸다고 했다. 그때는 조현오가 3살이 채 안 됐는데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였다. 조현오는 상이군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사지군인 씨팔, 자지야, 보지야.”

 

 

 

그러자 어머니는 막내아들 입을 황급히 틀어막고 방문을 닫았다. 60년대는 모두 가난했다. 조현오는 형편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다가 2년 늦게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돈이 없어 산을 넘어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1969년에 개봉한 <천년호>를 단체 관람했다. 하얀 소복을 입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귀신이 날아다녔다. 영화가 끝나 집으로 갈 때는 이미 밤늦은 시각이었다. 인적 없는 산길 숲 속에는 영화처럼 연못도 있었고 달빛도 비쳤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저 멀리 진짜 머리를 풀어헤치고 흰 옷을 입은 천년호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학생 조현오는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천년호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한 손에 돌을 들었다. 그리고 천년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에 칭칭 감겨 도는 비닐이었다.

 


 

조현오는 무인 기질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어머니 교육까지 더해졌다. 어머니는 조현오가 어릴 적부터 “남자는 용맹이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 어려운 시절 조현오 모친은 배급을 받으려 줄을 설 때 새치기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조현오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은 ‘정직’이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이 훌륭했다며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칭찬을 받았는데, 사회적 상황이 변했다고 잘못이 되는 것을 조현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청문회 불참으로 ‘불똥’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현오는 천년호도 피하지 않던 청소년이었다.

 

조현오는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 건으로 문재인 등에게 고소를 당했다. 당시 문재인은 고소취하 조건으로 ‘헛소리’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했다. 단순한 조현오는 사태를 크게 만들었다. 막강한 정보력을 갖춘 임경묵에게 들은 이야기를 ‘헛소리’라고 볼 수는 없다 판단한 것이다. 조현오는 결국 사자 명예훼손 건으로 기소됐고 재판부는 조현오가 지어내서 한 말이라고 판단했다. 세상은 조현오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거짓말을 가장 싫어했던 조현오는 거짓말쟁이로 전락한 상황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2015년 5월 건설업자 정모 씨에게 5000만 원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일었고 이제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제는 그를 버티게 했던 ‘청렴’이라는 한 축마저 무너질 판이다.

 

 

그럼에도 그는 울지 않았다. 조현오는 눈물이 지닌 의미를 ‘굴복’과 ‘나약함’이라고 답하곤 했다. 한참 있다가 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울어본 적은 있다고 덧붙였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물었다. 조현오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첫사랑 차였을 때. 자기는 학교 못 가고, 나는 좋은 데 가니까 여자가 안 만난다고.”

“영화 ‘닥터 지바고’ 마지막 장면에서.”

“내 첫 경찰 보직인,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시절에 직원들과 너무 정이 들어서 헤어질 때.”

 

경찰서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경찰 이야기로 돌아갔다. ‘치안상황’으로 주제가 옮겨갔다. 요즘 사람들은 상이군인이 행패를 부리던 상황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범죄와의 전쟁’이 벌어지던 1990년대 시절도 잊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불과 20년 전 상황인데도 말이다. 한국 치안이 매우 안정된 편인 것은 경찰 노력 덕이라고 했다. 아래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 경찰 후배들을 위해서 ‘전과자’가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출세욕을 위해 산 것처럼 보이는 그는 ‘나는 지휘관으로서 상황마다 판단을 잘해야 한다’는 다짐을 거듭했다고 했다. 조현오가 이런 생각을 한 계기 중 하나는 쌍용자동차 진압작전이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터는 23만여 평이다. 8월 4~5일 진압작전을 개시할 때 그는 헬기에서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도장1공장과 조립공장 옥상을 확보하는 과정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을 전개했다. 조현오는 상공에서 무전으로 작전에 동원된 모든 부대를 지휘했다. 조현오는 아래 이야기를 하면서 몇 번이나 목이 메곤 했다.

 

“헬기 위에서 내 명령 하나에 위험한 작전구역으로 들어가는 경찰대원들을 봤을 때….”

 

 

 

 

-The End-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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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조현오가 경찰에 입문한 1990년에는 전국에 집회·시위가 많았다. 1990년 1월 22일 대통령 노태우와 민주당 총재 김영삼, 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3당 합당을 선언하며 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생긴다. 전국에서는 3당 합당 반대 시위가 잇달았다. 부산도 마찬가지였다. 조현오는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었지만 시위가 열릴 때마다 경비를 담당했다. 부산대학교 옛 정문이 조현오 담당 구역이었다.

 

조현오는 당시 전·의경이 불편한 군화를 신는 것이 이상했다. 집회·시위를 관리하려면 움직이기 편한 운동화가 더 낫지 않느냐고 물었다. 주변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냥 경찰청에서 주는 거 입고 먹고 할 것이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당시 경찰 경비 복장은 대나무 진압복과 방석모, 알루미늄 방패였다. 방석모는 1963년 미제 군용 헬멧이다. 헬멧에 얼굴을 보호하는 철망을 붙였고 머리 뒷부분에 보호덮개를 붙였다. 1996년 눈 부위만 철망 대신 투명판으로 바꿨으나 쓰기에 여전히 무거웠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경찰이 사용하는 알루미늄 방패는 시위자에게 위협적이었다. 경찰청도 이를 개선하고자 휘어지면서 방어 기능을 할 수 있는 소재로 방패를 개발하려 했다. 하지만 부품 생산부터 시작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2006년이 되자 '안전방패'가 출시됐다. 청장은 이택순이었고 조현오는 감사관을 할 때였다. 그런데 국회의원 정두언이 안전방패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신제품은 본체와 손잡이를 나사 두 개로 연결해서 고정했다. 그런데 일정한 압력을 주자 손잡이가 분리됐다. 정두언은 불량을 지적하며 국정감사에서 유착 의혹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뉴스가 나오자 방패 개발을 담당했던 직원을 대상으로 경찰청 자체 감사가 시작됐다. 개발 과정에서 유착이 없더라도 사소한 실수가 지적돼 물의를 일으키면 경찰 위신이 떨어질 게 뻔했다. 이것만으로 인사 조치나 문책이 따르는 사안이었다. 이런 감찰 결과는 경찰청장에게 보고된다. 청장도 실무에서 올라온 의견에 이견이 없으면 결제할 것이다.

 

보고 계통이라는 게 이렇다. 경찰청장에게 보고는 실무 책임자인 과장(총경) 몫이다. 업무를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청장 처지에서도 계급 차이가 나는 과장에게 지시하는 게 편한 면이 있다. 그런데 이택순에게 보고서를 들고 나타난 이는 감사관인 조현오였다.

 

조현오는 비리가 없는데 문책을 하면 누가 적극적으로 장비 개발에 나서겠느냐고 되물었다. 정두언을 설득하는 것도 책임지겠다고 했다.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조현오는 정두언에게 조사 결과 문제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안전 방패는 나사를 2개에서 3개로 늘려 약점을 없앴고 지금도 잘 쓰고 있다.

 


 

2007년 경비국장이 된 조현오는 전·의경을 포함한 경찰관 부상자 통계를 접한다. 2005년 893명, 2006년 817명이었다. 조현오가 경찰이 되고 17년이 지났지만 장비는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조현오는 장비 개발을 서둘렀다. 경찰청 장비과에서 맡는 일이지만 모든 장비를 개발하도록 맡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통 경비·교통 분야는 장비를 자체 개발하는 편이다.

 

2008년 프랑스에서 접한 진압복을 참고한 신형 진압복 보급에 매진했다. 또 전·의경이 신는 군화를 운동화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2007년 10월에는 신형 방석모를 개발했다. 철망을 모두 제거한 자리에는 투명 플라스틱판을 부착했다. 그래도 조현오가 보기에는 부족했다. 여름철 집회·시위를 관리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장비였다. 조현오는 방석모 안에 소형 선풍기를 설치하든, 냉매를 부착하든 아이디어를 내라고 재촉했다.

 

살수차를 본격적으로 보급한 것도 이 시기다. 살수차는 생산은 예전부터 했지만 현장에 투입하지는 못했다. 살수차 투입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한 경찰은 집회·시위 관리에서 조현오가 아주 질색하는 장면 두 가지를 꼽았다. 먼저 현장 폴리스라인에 여경을 배치하는 것이다. 집회·시위 참석자가 움츠러들게 해야 하는데 여성을 내세우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뭘까.

 

"명박산성? 조현오는 그런 거 안 좋아해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을 아주 싫어하지요. 막아놓고 기다릴 게 아니라 그 단계로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쪽이에요."

 

 

 

물론 집회·시위를 관리할 때 시민과 경찰이 모두 다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경찰이 집회 참석자를 상대로 무리하게 대응한다는 비판은 언론이 단골로 다루는 내용이었다. 조직 상부를 비롯해 청와대에서 나오는 검거 지시에 맞추려면 변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서로 피해를 줄이면서 검거할 방법으로 개발한 게 채증이다. 조현오는 경비국장을 하면서 채증 장비와 인원을 대폭 늘린다.

 

조현오는 직원에게 안전하게 시위자를 검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물을 던지면 시위자가 잡히는 그물을 개발해보라고 한 것이다. <수호지>를 읽다가 떠오른 생각이라는데 당시 지시를 받은 직원은 무모한 아이디어에 당황했다고 한다. 그물이 서로 피해 없이 시위 참가자를 검거하는 방법으로는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경찰봉을 잘못 휘둘러도 폭력으로 규정하는 분위기에서 그물망으로 시위자를 검거하는 방법이 용납될 리가 없었다. 당시 기자실에서 기자와 얘기하는 것을 즐겼던 조현오는 장비 개발 이야기도 꺼냈다. 그 직원은 조현오가 그물망 이야기를 불쑥 꺼내자 “이건 아이디어다, 스케치하는 차원이다, 절대 개발하지 않는다, 계획에 없다”며 뒷말을 막느라 혼을 뺐다.

 

조현오는 이런 아이디어도 냈다. 2007년 <황우화>(장예모 감독)가 개봉됐다. 황제(주윤발)를 몰아내고자 황후(공리)와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내용이었다. 영화 후반부 모든 것을 꿰뚫었던 황제는 반란군이 궁 안으로 쳐들어오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차벽으로 진입을 막고 화살로 반란군을 몰살한다. 이 영화를 본 조현오는 바로 집회 현장에 적용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온 게 '차벽 트럭'이다.

 

 

스위치를 켜면 트럭에 접혀 있던 방호벽이 작동하면서 폭 8.6미터, 높이 4.1미터 '이동식 장벽'으로 변신한다. 이 방호벽은 쇠 파이프나 대형 망치로 내리쳐도 손상이 없었다.

 

조현오 경비국장 시절, 2007년 연말, 대통령 선거를 치뤘다. 당선자는 이명박이었다. 이명박은 노동자보다 기업 이익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금속노조 전체 판을 예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시작이 쌍용자동차 사태다. 2009년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이 된다. 2009년 5월 22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총고용 보장, 정리해고 불가와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정상화 등을 요구하며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경찰과 해고 노동자 양쪽 모두 총역량을 쏟아부었다. 우선 노동자부터 살펴보자.

 

금속노조는 핵심사업장인 쌍용차 지부를 지원하는 투쟁에 들어간다. 1998년 현대자동차 사태, 2001년 대우자동차 사태를 거치면서 학습한 게 있었다. 현대자동차 사태는 강성 투쟁으로 사측을 압박해 정리해고 인원을 줄일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우자동차가 공권력에 밀린 원인은 도장 공장을 점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됐다. 쌍용차 지부에는 모든 투쟁 전술이 전수됐다. 쌍용차 노조는 2009년 5월 21일 총파업 선언, 22일부터 공장 점거 농성에 들어갔고 8월 6일까지 77일 동안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 쪽을 보자. 경찰은 2005년 오산 철거민 망루 시위에 대응하면서 배운 게 있었다. 농성이 54일 동안 진행되면서 철거민은 옥상에서 경찰을 향해 새총을 쏘고 골프공을 날렸다. 그러자 경찰도 똑같이 새총을 만들어 철거민을 향해 쐈다. 한 소대장은 골프채를 갖고 와서 철거민이 던진 골프공을 놓고 샷을 했다. 그 일로 소대장은 승진하지 못한다. 법이 규정한 장비를 쓰지 않으면 승진이 막힌다는 사실이 경찰 조직에 각인됐다.

 

2009년 1월 19일 용산사태가 벌어졌다. 망루 시위 하루 만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됐고 철거민 5명과 경찰관 한 명이 사망했다. 경찰 작전이 무리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경찰은 작전을 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명분과 여론을 등에 업는 게 중요했다.

 

쌍용차 노동자는 경찰과 대치하면서 볼트총을 쏘고 화염병을 던졌다. 경찰은 불법행위로 규정했지만 여론은 '밥그릇 지키고자 하는 행동'이라며 동정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경찰 지휘부는 경찰이 피해를 당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노동자에게 최루액을 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인체에 유해하다', '한 해 소비량 90%를 쏟아부었다'며 비판했다. 경찰은 최루액은 경찰관 직무집행법 장비 관련 규정에 근거한 장비이며 그해에는 최루액을 쏠 다른 시위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경찰도 지키고 작전 수행에도 효과적이며 언론 비판도 피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했다. 첫 장비가 바로 조현오가 ‘트로이목마’에서 착안한 '방패막'이었다. 방패막은 상단은 투명판, 하단은 철판을 부착하고 방패 아래에 바퀴를 부착해 이동할 수 있었다. 경찰은 볼트총과 화염병 공격에도 방패막을 움직이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장비만으로 안전한 집회·시위 관리가 가능하지는 않았다. 전·의경도 시위자가 휘두르는 쇠 파이프에 대응하다 보면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다. 경찰봉으로 시위자를 때리고 발로 밟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현장에서는 무엇보다 부대원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중요했다. 경비국장 시절 조현오는 집회·시위 현장에서 지휘관을 소대원 앞에 세웠다. 부대원 30명 정도는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조현오는 부대 운영을 계속 고민했다. 1997년 한양대 한총련 사태 때 경험에서도 얻은 게 있었다. 조현오는 당시 고립된 부대를 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조현오는 부대장을 모아놓고 따라오라 지시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니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게다가 현장에 도착하니 고립된 부대가 없었다. 혼자 실컷 돌만 맞은 조현오는 부대장들에 지방청에 보고하겠다며 화를 냈다. 물론 말뿐이었다. 부대장 처지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에서 부대가 모였는데 현장에서 만난 부대장과 격대장은 처음 보는 사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충성심이 생기기는 어려웠다. 조현오는 경비국장 시절 격대장과 단위 부대장은 서로 신뢰하는 사람을 묶어 부대 배치를 하도록 했다.

 

부대 사이 의사소통도 중요했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무선망을 복수로 운영한다. 한총련 사태 때 고립은 결국 단일 회선에서 무선을 남발하며 소통이 막힌 게 원인이었다. 조현오는 총경이 사용하는 망은 따로 운영했다.

 

이렇게 축적된 경험은 쌍용차 진압작전에 총투입됐다. 조현오는 1998년 현대자동차 사태도 겪었다. 여기에 2006년 평택 미군기지 이전 작전에 투입됐던 참모도 뒤를 받쳤다. 계획을 세울 때 현장을 답사해 거리 계산, 도로 상황 파악, 이동 방법, 차단 방법, 장애 요인 등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쌍용차는 워낙 공장이 크고 공간도 복잡해 더 많은 분석과 판단이 필요했다.

 

(다음 20화. 최종화-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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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부하를 다루는 방식

 

조현오에게 현장검증 3차 장소는 청담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다. 길게 나 있는 복도 양편에 모든 공간이 룸으로 돼 있다. 조현오도 출소 후 이곳이 궁금해 처음 와봤다고 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수백 명이 면회를 왔고 대부분 경찰이었다.

 

조현오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향해 '자기 사람 잘 챙긴다'는 비판을 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걸핏하면 "경찰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얼핏 보면 규칙과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자기 사람 챙기면서 겉으로만 대의를 외친 듯하다.

 


 

실제 한국 경찰 정체성에 관심을 보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었다. 2005년 허준영은 한국 경찰 주체성을 파고들면서 수사권 독립을 강하게 외쳤다. 한국 경찰 마크로 참수리를 쓴 게 이때다. 그동안 한국 경찰 상징은 미국 흰머리 독수리였다. 게다가 참수리는 독수리와 달리 죽은 시체를 건들지 않는다. 이게 당시 경찰이 상징을 독수리에서 참수리로 바꾼 이유였다.

 

 

 

허준영에 이어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된다. 두 번째 외무고시 출신이다. 조현오는 회의시간에 경찰이 왜 존재하는지를 자주 물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보자.

 


 

2011년 12월 20일 대구에서 한 중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유서에는 그동안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학교 폭력으로 말미암은 자살이 잇달아 터지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됐다.

 

보통 이런 사건이 터지면 교육 당국이 대책을 세우고 경찰도 대책에 맞춘 대응 방안을 내놓곤 한다. 하지만, 조현오는 학교폭력 문제는 경찰이 주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러자 사회적으로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교권 침해를 비롯해 학교 폭력 해결 주체는 교사, 학생, 부모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더 큰 목소리를 냈다.

 

부정적인 것은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일선 경찰서에 올라오는 불만 중에는 주취자 신고를 112로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주취자, 노숙자 등에 대한 조치는 지방자치단체 몫이다. 경찰은 '범법행위'가 발생해야 나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조현오는 한국 경찰 구조가 이런 사고 방식을 만들어냈다고 판단했다.

 


 

조현오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 있다. "한국 경찰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한탄이었다. 한국에서는 경비작전은 국방부, 수사는 검찰, 정보는 국가정보원, 경호는 경호실에서 주도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경찰은 눈치를 보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을 하기 마련이다.

 

조현오는 "경찰이 왜 존재하냐"고 물었다. 자살하는 아이들 인권은 누가 지킬 것인지 따졌다.

 

교사가 성인 조직과 연계된 일진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조현오는 경찰청에 학교폭력전담TF팀을 만들어 대책을 만들도록 했다. TF조직은 행정학상 비정규 조직이다. 어느 한 기능이 담당하기 부적절하거나 일정 기간 특정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경우 TF조직을 만든다.

 

경찰청은 전국에 퍼져 있는 정보망을 통해 학교폭력 현장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경찰청 종합대책은 2012년 1월 26일, 정부 종합대책이 2월 7일에 나왔다. 조현오는 16개 지방청에 다니며 토론회 등으로 학교 폭력 문제를 중요 이슈로 만들었다. 경찰은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가 따라오도록 수레바퀴를 돌리는 동력을 만들었다. 경찰이 앞장서자 학교폭력 피해경험률이 2012년 초반 9.5%에서 2013년 하반기에는 1.8%까지 떨어진다.

 

 

경찰청에 여성청소년과가 생긴 것은 2005년이다. 그해 부산청장이던 어청수는 여성청소년과 업무로 학교전담경찰관(스쿨폴리스)을 운영한다. 하지만, 한 경찰이 맡는 학교 수가 너무 많아 세심한 관리는 버거웠다.

 

조현오는 스쿨폴리스 인력 확충과 동시에 학교폭력예방상담사 교육을 통해 스쿨폴리스가 학교폭력 문제에 전문성을 갖추도록 했다.

 

조현오는 일진 불량서클 해체만큼 선도에도 신경을 썼다. 제대로 훈방조치가 되는지 학교폭력점검대응반이 이를 점검했다. 2012년 경찰서부터 여성청소년과가 신설됐고, 2013년에는 각 지방청에도 여성청소년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13년 서울청장인 김용판이 서울경찰 100여 명을 스쿨폴리스로 전환했다. 여성청소년 업무가 발전하면서 경찰 인력자원이 몰리기 시작했다. 경찰 치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물꼬를 튼 것이 조현오다.

 


 

한 경찰은 조현오가 이슈가 생기면 문제 근본을 건드리는 데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경찰과 같은 계급 조직에 이 같은 문제 해결 방식과 호불호가 강한 성격이 결합하자 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현오가 물었다.

 

"경무과, 수사과, 정보과, 보안과 이런 것은 뭐 때문에 나눕니까?"

 

궁극적으로 경찰업무를 잘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어느 조직이나 칸막이 행정이 될수록 일이 바로 가기 어렵다. 다른 경찰 간부 역시 칸막이 행정에 대한 문제의식은 조현오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달랐다.

 


 

다른 이들은 칸막이 행정은 책임 문제만 정확하게 선을 긋고 종합적인 의견을 모아 일을 추진하면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울산남부서장을 할 때는 업무 분담과 상관없이 수사과장을 불렀다. 살인사건 현장은 보통 형사과장이 책임을 진다. 사건 원인 파악부터 대책 마련은 정보과와 경비과가 맡는다. 하지만, 조현오는 수사과장을 불러냈다.

 

물론 시간이 촉박한 사안이라면 가장 업무역량이 뛰어난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업무 능력이 부족한 직원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경찰 간부들은 일을 주기 전에 사람 능력에 따라 방향을 정하기도 하며,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에게는 간단한 일을 하나 맡겨놓고 어려운 일을 맡길 때 간단한 일을 핑계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조현오는 어땠을까.

 

고시계장 시절 조현오는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을 처음에는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나 불성실한 업무 태도와 실수가 되풀이되면 조현오는 아예 결제 라인에서 뺐다. 면박과 무안을 주는 정도는 보통보다 강했다.

 

울산남부서장일 때 조현오는 아침마다 참모회의를 열었다. 과장에게 업무 관련 질문을 했다. 질문은 알고 던지기도 했고 논리적으로 궁금하면 물어보기도 했다. 막힘없이 답하는 것은 업무를 잘 챙긴다는 뜻이다.

 

보통 서장들은 대답을 잘 못하는 과장에게 다음부터 잘하라고 넘기고 나서 담당 계장에게 내용을 확인한다. 반면 조현오는 과장에게 들어오지 말라 하고 계장을 보내라 했다. 이 광경을 본 직원은 '권위적 리더십의 전형'이라고 했다.

 

'조현오 방식'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찰은 계급 조직인만큼 수평 질서와 수직 질서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사회는 보고, 의전, 모양새, 형식 등을 유난히 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관직은 사유물이 아닌 만큼 업무를 모른다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직원들은 첫인상부터 '독일병정' 같은 조현오가 업무 역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리니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직원은 사람 좋은 것도 필요 없고 공무원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게 조현오 철학이라고 말했다.

 

 

 

 

서울종암경찰서장 시절에도 업무에는 칸막이가 없었다.

 

교인 헌금으로 지은 한 교회가 있었다. 목사가 명의를 자기 앞으로 돌려놓으면서 일반 신도와 목사 쪽 신도가 충돌했다. 주말에 양측에서 서로 예배를 보겠다며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런 일은 경비과장이 대책을 세우고 진압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형사계장에게 권한을 전폭적으로 위임했다. 형사계장이 경비과 전의경 100여 명과 정보과, 형사과 인원을 이끌고 지휘했다.

 

조현오는 지방청장이 돼서도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은 ‘없는 사람’ 취급했다. 대부분 지방청장은 참모인 과장을 의식해 무난하게 결제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조현오는 경비 지휘를 할 때조차 정보과장에게 작전을 맡겼다.

 


 

조현오 이미지 형성에 가장 영향을 미친 시기는 경찰청장 때다. 조현오는 인사정의, 부패척결 등을 내세우며 '7대 개혁과제'를 내놓았고 전담 TF팀을 구성했다. 한 고위간부는 TF팀이 해당 과에서부터 낮은 단계 협의가 이뤄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나온 내용을 국장이 청장에게 보고하는 체계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개혁’을 원했다. 하지만 계급이 높아질수록 변화를 싫어하는 성향을 보인다. 경찰이라는 계급조직 하에서 눈치 안 보고 개혁을 밀어붙일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적임자를 TF팀장 자리에 앉혔다. 조현오는 국장이 결제한 보고서가 맘에 안 들면 TF팀과 협의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조현오가 경찰 조직 질서를 수평과 수직 모두 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장 결제를 받은 보고서를 검토할 TF팀장 직위가 경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호불호가 강한 조현오 성격도 한몫을 했다.

 

관리자 한마디는 격려든 질책이든 조직 안에서 더 큰 의미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조직 안에서 불만이 번지기 시작했다. 경찰청 국장(치안감)이나 부장(경무관)에게서 나오는 한마디는 힘이 실려 더욱 퍼졌다.

 

 

조현오는 이듬해 TF팀장도 총경으로 승진시킨다. 조직 내 비판 세력은 이 역시 조현오가 챙긴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조현오에게 중요한 것은 업무 적합성이었다. 보직에는 그 업무에 맞는 사람을 앉혀놓으려 했다.

 

황운하를 경무관을 승진시키고 나서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배치한 것도 한 예다. 수사 기획관은 그 자리가 주는 무게로 봐서는 경무관 3년 차 정도가 어울리는 자리라고 보통 생각한다. 조현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경찰이기 때문에 그 업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현오가 좋아하는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 업무 역량 뛰어난 사람이었고 인사권을 쥐자 그런 사람들을 그 자리에 꽂았다.

 

그렇다면, 조현오가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업무역량이 얼마나 뛰어난 것일까?

 

먼저 2010년 정보국장을 지낸 이철규를 보자. 그는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자 충북청장에서 정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11년 말 조현오 체제에서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조현오와 3차 현장검증을 한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이 바로 이철규와 깊게 얽힌 곳이기도 하다.

 

(다음 16화-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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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2011년 10월 22일 오전 조현오는 전날 밤 인천 길병원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을 보고받는다. 장례식장 앞에서 조직폭력배끼리 단순 충돌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일 저녁 SBS 뉴스는 전혀 다른 영상을 내보냈다. 화면에서는 인천 조폭 130여 명이 도심 한복판에서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조현오는 허위·축소 보고를 받은 것이다.

 

격노한 조현오는 감찰과장에게 바로 전화했다. 경찰청 감찰팀은 인천남동경찰서 사무실 CCTV를 면밀하게 살폈다. 112 신고 접수가 되자 경찰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파악했다. 조사가 끝난 23일 인천남동경찰서장이 직위 해제됐다. 남동서 형사과장, 강력3팀장, 상황실장, 지구대 순찰팀장 등도 중징계를 받았다.

 

조현오는 “경찰이 조폭에게 위축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질책했다. 이에 현장에 출동한 강력3팀장이 반박하는 글을 내부 게시판에 올린 게 외부로 공개됐다.

 

‘저는 사무실에 있다가 상황실 연락을 받고 테이저건 등 장비를 챙겨 장례식장 앞에 도착했습니다. (중략) 저는 현장 책임자로서 동료 직원과 더불어 흉기를 소지한 범인을 제압하고 피해자를 구조 후송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하 생략)

 

경찰 주장은 이렇다. 상황실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했고 조폭이 집결하자 경고 방송을 보냈다. 형사 5명이 칼부림을 한 가해자를 제압했고 집결한 조폭과 대치했다. 칼에 찔린 피해자를 후송하고 사건 현장을 채증 했다. 그런데 SBS가 형사를 조폭으로 잘못 보도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에 경찰청 감찰팀이 반박했다. 경찰이 아무리 활약했다 해도 초동 대응 실패를 덮을 수 없다고 했다. 2011년 10월 21일 현장 상황은 어땠을까.

 


 

인천 폭력조직인 크라운파 조직원 부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빈소가 인천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이어 빈소에 인천 조직폭력배들이 문상을 오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신간석파 K 씨와 크라운파 L 씨가 만났다. L 씨가 K 씨를 향해 빈정거린 게 발단이었다. 각자 자기 조직원을 소집하면서 장례식장이 소란스러워졌다.

 

 

10시 18분 1차 112신고가 접수됐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장례식장 엘리베이터 앞에 몰려 있다는 내용이었다. 인천남동경찰서 강력반과 상황실이 동시에 신고를 접수했다. 조폭은 지구대 파출소 경찰은 겁을 내지 않는다. 조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경찰은 강력계 조폭 담당 형사다. 하지만, 최초 신고 당시 강력팀 형사는 출동하지 않았다. 현장에 먼저 도착한 쪽은 구월지구대 순찰차였다. 순찰차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며 그냥 사태를 지켜보기로 한다.

 

10시 51분 조폭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싸운다는 2·3차 신고가 들어온다. 순찰차가 추가로 도착했다. 지구대 순찰팀장은 조폭끼리 싸움에 지나치게 관여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 현장에서 순찰차 두 대가 철수한다.

 

11시 18분 조폭들이 싸우니 빨리 와 달라는 4차 신고가 접수된다. 11시 45분에 출동한 인천남동경찰서 형사 5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미 100여 명이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K 씨가 L 씨를 흉기로 찔렀고 형사들이 K 씨를 제압했다.

 

조현오는 사건 현장에 형사 5명만 있었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집단폭력 대처 매뉴얼에는 사건 발생 즉시 관할 서장에게 보고해 초기에 경찰을 집중 투입하여 전원 검거하도록 돼 있다. 출동 인원만으로 제압하기 어렵다면 상황실에 기동타격대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관할 경찰서 인력으로 진압이 어렵다면 지방청에 요청할 수도 있다.

 

지방청은 폭력계와 광역수사대를 운영한다. 폭력계는 폭력조직을 수사·관리하며, 광역수사대는 경찰서 2개 이상이 관련된 사건을 처리하고자 만든 것이다. 조현오는 활용 가능한 경찰력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 채 공권력이 무력한 모습을 보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대대적인 감찰이 진행됐다. 감찰 결과 강력3팀장은 형사과장에게 보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팀장이 과장에게 상황 보고를 했다면 맡은 임무는 다한 것이다. 강력3팀장에 대한 징계는 일단 거두게 된다.

 


 

조현오는 폭력조직과 전쟁을 선포한다. 조폭에게 인권은 고려하지 않겠다고 했고 조폭이 폭력을 행사하면 총기라도 과감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겨레>는 10월 30일 자 ‘조현오 경찰청장의 처신 경박하고 무책임했다’는 사설을 통해 조현오가 ‘조폭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여론을 의식한 조치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1990년대 형사과장 시절부터 총기 사용 발언을 했다.

 

조현오는 1990년 부산에서 경찰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은 해운대와 항만이 있다. 항만은 마약이 들어오는 통로이며 마약과 조폭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여름 치안 로드맵 중심에는 해운대가 있다.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에도 조폭은 있다. 부산 최대 폭력조직은 ‘칠성파’였다.

 

조현오가 형사과장이던 때도 ‘조직 폭력과 전쟁’은 한참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형사들 사이에는 총을 던져서 범인을 검거한다는 한탄이 떠돌았다. 검거 과정에서 총을 쏘면 손해배상과 감찰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칠성파 두목 이강한을 비롯해 간부급 조폭이 구속된다. 그렇다고 조직이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이강한은 1999년에 출소한다. 그 사이 신흥 조직인 ‘신20세기파’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칠성파와 영역 다툼이 본격화됐다. 유흥업소 등을 놓고 벌인 주도권 다툼은 1992년 7월 칠성파 조직원이 20세기파 간부를 살해하면서 불거졌다.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가 소재로 삼은 사건이다.

 

2006년 1월 신20세기파가 보복에 나섰다. 부산 내 반 칠성파 세력을 규합해 60여 명이 흉기를 들고 칠성파가 모인 부산 영락공원 장례식장에 난입했다.

 


 

이 사건 이후 2년이 흐른 2008년 조현오가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온다. 조현오는 경찰에게 조폭 검거 과정에서 위협을 느끼면 과감하게 쏘라고 지시한다. 일선 경찰에게는 놀라운 발언이었다. 한 경찰관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누가 책임지겠다고 하나요? 주변에 다 책임 안 지려는 사람들뿐인데….”

 

당시 이강한이 부산에 있는 한 호텔 사우나에서 목격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현오는 부산지역 사우나에 조폭 출입을 금지했다. 전신 문신은 일반 시민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어서 경범죄 처벌 사유가 됐다. 형사들은 목욕탕에서 나오는 조폭에게 5만 원 과태료 스티커를 건네며 사우나에 오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사우나에 조폭을 출입금지 하는 조치는 이전 부산 청장들도 했던 단속 방법이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총기 사용과 더불어 조직 자금줄을 추적해 차단한 것이다. 조폭은 오락실 수익금 상납금을 바탕으로 조직을 관리했다. 다른 자금 확보 방법으로는 백일잔치, 돌잔치, 환갑잔치, 고희연, 생일잔치 등을 활용했다.

 

 

 

잔치는 보통 호텔에서 열렸고 조폭은 관할 구역 영업소 사장에게 초대장을 돌렸다. 형사들은 하객을 대상으로 참석 경위와 강압 여부를 조사했다. 조현오는 조폭 행사는 경찰이 확실하게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

 

호텔에서 행사를 하더라도 민간인처럼 조용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 건장한 남자가 깍두기 머리에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매고 90도 각도로 절하는 모습은 위협적이었다. 조현오는 조폭들이 위력을 과시하면 공권력을 발휘했다.

 

행사에는 부산지방청 광역수사대, 강력수사계, 폭력수사계, 기동대, 관할 경찰서 강력팀 형사 등을 배치했다. 조현오는 조폭을 상대하면서 일선 경찰서, 지방경찰청 단위로 분산된 형사 인력으로 효율적인 관리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경찰 조직 내 최강 부대인 경찰 특공대를 호텔 행사장에 투입했다. 경찰특공대는 일선 경찰관들이 버거워하는 일들, 가령 조폭이 집단으로 흉기를 휴대해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 지방청장 허가를 받아 출동한다. 조현오 지시를 받고 출동한 특공대원은 어떤 일을 했을까.

 

경찰특공대는 조폭이 타고 온 차를 검문하기 시작했다. 차 안에 칼이나 야구방망이 같은 흉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경찰직무집행법에 따르면 도검류는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된 도검류에는 레이저로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다.

 

 

조현오는 다른 청장에게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언행이 있었다. 한 참여정부 인사는 경찰청장 시절 조현오 언행을 언급하며 ‘또라이’라고 비난했다. 2011년 1월 불거진 ‘함바 비리’ 사건에서 조현오가 취했던 방법도 이전 경찰청장들과는 전혀 달랐다.

 

(다음 14화-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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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조현오는 서울구치소 안에서 이경백과 마주쳤다. 구속된 김광준 검사도 거기 있었다. 조현오 구속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 중에 황운하도 있다. 그는 경찰 안에서 ‘수사권의 상징’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경백, 김광준과 관련이 깊다.

 


 

황운하는 경찰대 1기 출신으로 1985년 입문했다. 2003년 용산경찰서 형사과장일 때 경찰이 검찰 비리를 직접 수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른바 법조브로커 ‘오달이’ 사건이다. 수사는 체포, 압수수색 등 강제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인신구속, 압수, 수색에는 반드시 법원 영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찰은 법원에 영장을 신청할 수 없다. 반드시 검찰 힘을 빌려야 한다.

 

수사권 핵심은 경찰이 피의자를 구속하거나 증거물을 압수하기 위해 영장청구권을 갖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황운하가 신청한 ‘오달이’ 계좌 추적 영장을 수차례 기각했다.

 

2005년 경찰청장인 허준영은 황운하를 경찰청 수사권개혁팀장으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이 공약했던 경찰수사권은 국회 입법화 과정에서 지지부진했다. 그동안 경찰이 부당함에 스스로 맞서야 한다는 주문도 불거졌다.

 

황운하는 2005년 전국 경찰에 공문을 보낸다. 공문에는 검찰과 잘못된 관행을 14개 항목으로 정리하고 앞으로 거부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중에는 ‘검사 면전 인치 요구 거부’도 있었다. 공문은 수사구조개혁팀장 이름으로 뿌렸다. 청장인 허준영에게 보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공문을 받고 일선에서 나설 사람이었다. 누가 총대를 멜 것인가.

 

충남지방경찰청 소속 경감 한 명이 시발점이 됐다. 대전지방검찰청이 전화로 긴급체포한 용의자를 데려오라고 하자 거부한 것이다. 경감은 피의자 인적사항에 검찰 관련자가 눈에 띌 때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마침 경찰청에서 온 공문도 힘이 됐다. 검사 요구를 거부한 그는 검찰에 직무유기 등으로 기소됐고 재판에 넘겨졌다.

 

2006년 9월 5일 대전서부경찰서 서장이 두 번째였다. 그는 2006년 이택순이 경찰청장으로 부임하면서 경찰청 수사권개혁팀장에서 대전서부경찰서 서장으로 자리를 옮긴 황운하였다. 그는 다시 경찰·검찰 사이 갈등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좌천된다.

 

 

2007년 4월 한화 회장인 김승연이 보폭 폭행을 저지른다. 이후 한화 고문과 경찰청장인 이택순이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고, 이택순은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맡기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황운하는 경찰 내부 게시판에 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고 다시 징계를 당했다.

 


 

2010년 대전지방경찰청 생활안전과장이던 황운하를 서울청 형사과장으로 발탁한 이는 조현오였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자 황운하를 경무관으로 승진 인사하고 경찰청 수사기획관에 전진 배치한다.

 

수사기획관은 수사국이 맡는 중요 사건에 대해 수사 업무를 챙기는 자리였다. 당시 대검찰청도 중수부장이 수사기획관을 거느렸다. 경찰청 수사기획관은 지능수사대와 범죄정보과 등을 지휘한다. 모두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면서 만든 새로운 기능이다. 조현오는 검찰 중수부와 범죄정보과 역할을 맡을 부서가 경찰에도 있어야 서로 감시·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능범죄수사대는 고위공무원 비리, 경제사범과 같은 대형 사건을 인지해 직접 수사한다. 범죄정보과 역시 검사 등 비리 공직자 범죄 정보를 캐내고자 만든 기구다.

 


 

황운하가 수사기획관으로 처음 맡은 사건이 이른바 ‘디도스 사건’이다. ‘디도스 사건’은 2011년 10월 26일 보궐선거 당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와 서울시장 후보 박원순 홈페이지가 사이버테러를 당한 사건이다. 사건 당일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에서 수사에 들어갔다. <나꼼수>는 10월 29일 26회 방송에서 이 내용을 짚었다. 선관위 홈페이지 전체가 마비된 것이 아니라 일부 메뉴만 작동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단순 사이버테러가 아니라 선관위 내부자 공모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경찰은 12월 1일 디도스 공격을 한 강 씨와 일당 3명, 이를 지시한 공현민을 검거했다. 공현민은 한나라당 국회의원 최구식의 수행비서관이었다. 형사소송법을 보면 경찰은 피의자 구속 열흘 안에 사건을 검찰에 송치해야 한다. 이쯤이면 누구나 예상하는 앞날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는 경찰과 검찰이 ‘수사권 조정’을 놓고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경찰 수사 허점을 놓칠 리 없었다.

 

 

선거 부정 관련 사건은 여야가 날카롭게 맞설 수밖에 없고 언론도 중요하게 다루는 사안이었다. 만약 경찰 수사 결과가 각종 의혹을 잠재울 만큼 명확하지 않으면 야당은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요구한다.

 

경찰은 2011년 12월 6일 국회의장인 박희태의 전 비서 김태경을 소환한다. 공현민과 김태경은 분명히 돈거래가 있었다. 사건 발생 전에 1000만 원, 사건 발생 후 9000만 원 등 모두 1억 원이 오갔다. 김태경은 사건 관련성을 모두 부인했다. 경찰은 사건 이후 오간 9000만 원은 범죄와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사건 직전에 건넨 1000만 원은 충분히 의심을 살만 했다. 그러나 공모 증거가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황운하는 이를 ‘대가성’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이제 수사 결과를 발표해야 한다. 민감한 사안 이인만큼 누구를 비호한다는 인상을 줘도 안 된다.

 

황운하는 12월 9일 자신감 있게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시간제한이 있었던 점을 상기하거나 미흡한 부분은 검찰 수사에 넘기는 출구 같은 것을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다.

 

“공 씨 단독범행이며 우발적인 사건입니다.”

 

이 발표가 나가자 여론은 경찰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한다고 몰아붙였다. 경찰과 다른 검찰 판단도 축소·은폐 비난 여론을 부추겼다. 검찰로 사건이 송치되자 서울중앙지검은 첨단범죄수사2부를 주축으로 40여 명이 참여하는 수사팀을 꾸린다. 검찰은 2011년 12월 30일 박희태의 전 비서인 김태경을 구속한다. 당시 <나꼼수>는 32회 방송에서 이 내용을 언급하며 경찰 수사를 비판한다.

 

“검찰이 특별수사팀을 꾸렸을 때 이미 뭔가 잡은 것이 있다. 1억은 검찰이 거둔 쾌거.”

 

하지만, 황운하가 예상한대로 검찰이 기소한 김태경은 2013년 3월 29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그때는 사건에 대한 관심이 이미 사라진 시기였다.

 

당시 언론은 12월 16일 조현오가 준비한 기자간담회를 주목했다. 보도를 보면 조현오가 기자간담회에서 함께 앉은 황운하를 질책했다고 나온다. 조현오가 배후를 거론하며 단독범행이 아닐 가능성을 열어두려 하자 황운하는 경찰 수사가 옳다고 받아친다. 조현오는 “가만 좀 있어봐라”며 황운하를 면박했다. 이를 언론은 ‘극단적 언쟁’, ‘적전 분열 양상’ 등으로 정리했다.

 

조현오와 황운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당시 경찰 조직 안에서는 황운하를 인사 조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미숙한 발표가 조직에 너무 큰 부담을 줬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도 조현오는 황운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황운하는 자신이 발표한 수사 내용 근거를 더 설명하려는 듯했다. 길게 얘기해봤자 부작용이 더 커질 듯했고 조현오는 말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여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오히려 화살은 조현오를 겨누기 시작했다. 조현오가 경찰 수사 발표 전인 12월 7일 청와대 정무수석인 김효재와 나눈 두 차례 전화통화를 문제 삼은 것이다. 경찰은 행정안전부 소속이고 행정안전부는 정무수석 소속이므로 김효재가 조현오에게 전화한 게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기가 문제였다. 당장 청와대가 돈거래 부분을 발표하지 못하도록 압박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청와대 압력을 받은 조현오가 황운하에게 지시했고 막판에 혼자 살겠다고 황운하에게 모든 책임을 씌웠다는 해석이 나왔다. <나꼼수> 32회 방송 내용이다.

 

 

“경찰이 수사를 잘 해놓고 마지막 발표를 하는 데 있어서 망가지고 있습니다.”(주진우)

“조현오 청장 때문이야. 청와대에서 오더가 왔어도 조현오 청장이 막았어야지.”(김어준)

 

그러나 황운하 예상대로 검찰 수사도 경찰과 차이가 없었다. 2012년 3월 26일 디도스 특검이 출범한다. 특검보 3명과 파견검사 10명을 비롯해 100여 명이 특검에 참여했다. 특검도 윗선이 수사 과정에 개입했는지 파악하고자 4월 19일 사이버테러대응센터 직원 2명을 불러 조사했다. 그리고 5월 21일 수사국장 강신명과 수사기획관 황운하, 마지막으로 5월 23일 조현오를 불러 조사한다.

 

조사 순서에는 의도가 있다. 우선 수사진을 조사한 내용은 상급자를 캐는 데 활용된다. 조사는 계단식으로 진행됐지만 언론이 원하는 건더기는 나오지 않았다. 특검은 2012년 6월 21일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먼저 김효재를 불구속 기소했다. 수사 상황을 국회의원인 최구식에게 알려줬다는 혐의였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의혹 무마용’, ‘혈세 낭비’라는 비난이 특검을 향했다.

 

당시 사건 관계자는 여전히 디도스 사건을 ‘공현민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단독범행’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당시 <나꼼수>가 의혹을 제기한 근거가 됐던 증언들은 어떻게 봐야할까? 일반적으로 수사 담당자는 ‘진술’보다 과학을 우선했다. 예를 들어보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물속으로 가라앉은 후에도 탑승한 학생에게 전화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하지만, 경찰이 통신기록을 조회한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전 세모그룹 회장인 유병언이 변사체로 발견된 시점을 둘러싼 의혹도 떠올려보자. 유병언 변사체가 6월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발견됐다는 진술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경찰 수사를 불신하는 목소리는 높아졌다. 하지만, 경찰은 전산으로 남은 112 신고 시각과 사건 처리 기록을 바탕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디도스 사건에서 <나꼼수>가 선거관리위원회 내부 공모 의혹을 제기한 근거가 된 진술을 보자. 이용자는 인터넷으로 홈페이지 서버에 접속한다. 화면에서 늘 같은 부분은 홈페이지 서버에 저장돼 있고, 바뀌는 부분은 데이터베이스 서버에서 가져와 화면에 표시된다. 당시 <나꼼수>는 디도스 공격 중에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화면 일부(데이터베이스 서버에서 가져오는 ‘투표소 정보’ 부분)만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누군가 홈페이지 서버와 데이터베이스 서버 연결을 차단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가 분석한 결과는 홈페이지 서버와 데이터베이스 서버 사이 통신은 정상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검찰수사와 특검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됐다.

 

<나꼼수>가 ‘선관위 내부 공모’를 의심한 것은 일부 화면은 보이고 일부 화면은 보이지 않았다는 진술이 ‘진실’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경찰이 말하는 과학수사를 바탕으로 검토하면 거꾸로 그런 진술이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공현민을 비롯해 몇 명이 모여 벌인 일이 여야 정쟁, 종편 출연 같은 변수를 맞으며 순식간에 정국에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황운하에게는 권력을 비호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경찰 수사에서 윗선으로 지목된 박희태, 최구식 모두 디도스 사건과 관련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황운하조차도 생각한 그림이 아니었다. 황운하가 첩보를 입수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수사가 바로 ‘김광준 검사’ 사건이다.

 

(다음 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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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황운하>는 제가 2018년에 쓴 연재물입니다.

 

 

 

 

법을 아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 위에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배우 박중훈이 주연을 맡은 OCN 방영 드라마 <나쁜 녀석들-악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이 사회 법 위에 있는 사람들의 적나라한 악행들을 펼쳐 보입니다.

 

처음에는 돈 많은 기업인인가 싶더니 권력과 부에 미친 검찰 지검장 악행이 드러나지요. 이들이 구속되자 착한 권력으로 보이는 새 지검장이 들어섭니다. 그다음 ‘나쁜 녀석들’로 강력계 형사들이 급부상하지만 이 역시 검찰 조직이 뒤를 봐줬다는 게 드러납니다. 결국 착한 권력으로 생각했던 새로운 지검장도 ‘조직 보호’ 논리 앞에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국정원과 검찰 권력 견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적폐청산이라는 명분으로 검찰 조직도 인사 물갈이가 이뤄졌습니다.

 

드라마 <나쁜 녀석들>은 검사장 한 명 바뀐다고 해서 썩을 대로 썩은 검찰 조직 개혁이 쉽게 이뤄지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한 가지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경찰이 수사권을 가지면 된다고 합니다.

 

경찰 수뇌부가 보기에 통제가 안 되는 아주 ‘나쁜 녀석’이 이런 주장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바로 경찰 황운하입니다. 상대가 악이라고 생각하면, 발언 수위가 자기 상사든 대통령이든 거침이 없습니다. 저자는 오랫동안 경찰 수사권 독립 역사와 궤를 같이 한 이 인물을 눈여겨보고 취재했습니다.

 

이 연재는 경찰 황운하(현 울산경찰청장)의 인생을 통해 검경 수사권 조정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서형>

 

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2012년 말 경찰과 검찰이 첨예하게 맞붙은 사건이 있었다. 이를 두고 한 기자는 유사 이래 경찰이 검찰에게 날린 최고 ‘빅엿’이라는 표현을 썼다. 바로 ‘김광준 검사’ 사건이다.

 

수조 원 단위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이 숨긴 자금을 추적하던 경찰은 자금 일부가 검찰 특수부 출신 검사 김광준이 만든 차명계좌로 흘러간 단서를 포착했다. 경찰은 디데이를 정하고 김광준 차명계좌 관련자를 전원 조사하고자 전국으로 흩어졌다. 이 가운데 차명계좌 주소지 조사를 위해 한 지역에 모인 경찰들은 주변 장소가 무척 낯익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 어디서 봤던 데 아냐?”

 

그곳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년) 촬영 장소였다. 영화는 1996년 인천서부경찰서 형사들 활약을 소재로 했다. 1980~1990년대 수사는 잠복과 탐문에 의존했다. CCTV나 블랙박스 도움은 받을 수 없었다. 여죄를 밝히는 과정에서 영화처럼 용의자를 폭행하기도 했다. 주연 배우 박중훈은 당시 인천서부경찰서 형사 박재인이 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 했다.

 

“눈에 힘 빼.”, “맞았다고 변호사 대. 그런 거 무서우면 형사 안 해.”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보고 자란 세대 일부가 직업으로 경찰을 선택했다. 그리고 2012년 경찰 수사에서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경찰청 지능수사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낸 최대 결과물이 ‘김광준 사건’이다.

 

여기서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김광준 사건을 관통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경찰 황운하다. 영화 배경인 1996년 당시 인천서부서 형사과장을 지냈으며 2012년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김광준 사건을 지휘하기도 했다.

 

‘검찰 저격수’, ‘싸움닭’, 이라는 황운하를 수식하는 말처럼 그는 상명하복 관계로 인식됐던 검찰과 부딪히는 상황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2011년 경찰은 조희팔 계좌추적을 하다가 어떤 최〇〇씨 계좌를 발견했다. 하지만 은행 CCTV를 통해서 그 계좌를 이용한 사람은 최〇〇씨가 아니라 김광준 검사임을 확인한다.

 

경찰은 조용히 그 차명계좌에 입금한 사람들을 조사했고 정제된 보고서를 완성했다. 주 타깃은 김광준 검사였는데 황운하 수사기획관이 뒤를 받쳐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검찰이 눈치채고, 김광준 사건을 자신들이 수사하겠다고 나서자, 경찰은 사건 빼앗기라며 반발했다.

 

이에 부담을 느낀 경찰 수뇌부는 황운하를 수사연수원장으로 보낸다. 이후 검찰이 사건을 가져가 김광준 검사를 기소했고 법원에서 뇌물수수로 징역 7년형을 받았다.

 

2012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그 후로 황운하는 수사 부서를 맡진 않았지만 언론 노출이 잦았다. 박근혜 정권 들어 무너진 경찰 인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렇게 튀는 언행으로는 아예 승진이 물 건너간다는 주변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 못한 박근혜 탄핵 후,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황운하는 치안감 승진을 하며 새롭게 비상을 했다.

 

이렇게 거칠 것이 없기에, 황운하는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대부분 관심은 황운하 입을 향했다. 정작 인간 황운하, 경찰 황운하를 향한 접근은 없었다. 그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황운하가 드러낸 언행이 경찰 조직에 발전을 가져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확인할 수 있는 건, 검찰 권력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일관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저항이 가능했던 것은 황운하에게 흐르는 반골기질 때문이라 본다.

 

필자는 이런 기질이 어디서 시작하여 촉발됐는지 궁금했다. 이야기는 경찰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황운하가 겪은 삶부터 시작한다.

 

황운하는 196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내려와 정착했다. 황운하는 아버지가 경로당에서 다른 노인과 신념 문제로 자주 부딪혔다고 기억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고집만 세운다며 나무라곤 했다. 어머니는 슬기로운 분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고등학생 황운하는 우등생이었다. 황운하는 서울 명문대에 입학해 과외를 하면서 학비를 벌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이상한 지점에서 틀어졌다. 1980년 전두환은 과외를 금지하는 ‘730 교육개혁 조치’를 단행한다. 서울 명문대에 다니겠다는 꿈은 꺾였고 다른 대학보다 차라리 경찰대 입학이 낫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경찰이 되면 뭔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황운하는 1985년 경찰에 입문해 소대장, 중대장, 부대장을 지냈다. 경찰은 계급에 따라 일정 기간 돌아가며 집회·시위를 담당하는 기동대장, 중대장·소대장을 맡는다. 이 시기를 함께 했던 직원들은 황운하가 부하 직원을 잘 포용하는 상관이었다고 기억했다. 한 후배는 술에 취해 황운하가 사는 자취방을 찾아갔던 일화를 들려줬다.

 

“한참 자다가 배가 고파 깼는데 냉장고에 얼린 떡이 있더라고요. 녹여서 먹으려고 프라이팬에 떡을 놓고 식용유를 두른다는 게 그만 꿀을 부었지요. 떡은 탔고 술에 취해서 그냥 그대로 잤어요.”

 

 

 

타는 냄새에 잠을 깬 황운하는 뒤처리를 해놓고도 전혀 후배를 나무라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아량 넓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황운하 특징으로 ‘배포’를 기억하는 직원도 있었다. 1989년 황운하가 종암경찰서 파출소장 시절이다. 관내 시장에서 신고가 들어왔는데, 한 정육점 주인이 칼과 칼갈이를 들고 소동을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파출소 직원 두 명과 의경 등 세 명이 출동했다.

 

현장에서 정육점 주인은 칼과 칼보다 더 긴 칼갈이를 들고 시장 포목점에서 천을 자르며 난동을 피웠다. 출동한 파출소 직원이 정육점 주인을 향해 가스총을 쐈다. 하지만, 정육점 주인은 순간적으로 피했고 반대쪽에 있던 다른 파출소 직원이 가스를 맞았다.

 

 

경찰 한 명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른 한 명을 현장을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황운하가 도착했다. 황운하는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흥분한 정육점 주인이 소리쳤다.

 

“당신 누구야?”

 

“내가 여기 장암파출소 소장 황운하다. 대화를 하자."

 

황운하는 거리를 두고 정육점 주인을 설득했다. 결국 황운하는 정육점 주인에게 수갑을 채웠다. 이렇듯 황운하와 함께 했던 직원들은 그를 가리켜 이 ‘포용력’과 ‘배포’를 가진 덕장이라고 평했다.

 

그런데 다른 증언은 전혀 뜻밖에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경찰이라는 계급 조직에서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1993년 대통령 김영삼이 당선 직후 서울 신당동에 있는 중대를 방문했을 때 일화다. 당시 이 현장에 있었던 한 직원은 이렇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기동대는 대통령 맞이 예행연습을 했지요. 황운하 중대장이 맨 앞에 서 있었고, 대통령이 악수를 하면 각자 신고를 하는 연습이었습니다. 기동본부장이 대통령 역할을 했지요. 악수를 하던 기동본부장은 황운하 중대장에게 시계를 풀라고 했어요. 당시는 경찰이 부정부패 이미지 때문에 고급 차를 몰거나 고급 시계를 못 차는 분위기였거든요. 황운하는 롤렉스를 차고 있었어요.”

 

기동본부장이 시계를 가리키며 지시했다.

 

“빼.”

 

황운하는 느릿느릿한 말투로 뺄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 하지만, 기동본부장은 단호했다.

 

“무슨 소리 하고 있어? 경찰관이 롤렉스를 차면 안 되는 거 몰라? 빼!”

 

황운하는 조근조근 다시 설명했다.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이튿날 다시 예행연습이 반복됐다. 기동본부장은 여전히 황운하 손목에 있는 시계를 발견했다.

 

“어제 빼라고 했는데?”

 

이 일화를 전한 이는 황운하가 그때도 다시 조근조근 말대꾸를 했다고 기억했다. 이후 기동본부장은 전체 지휘관 회의에서 황운하를 겨냥해 거칠게 비난하기도 했다.

 

황운하는 왜 그랬을까? 황운하는 기동대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경찰이 집회·시위 현장에 과잉 동원되는 게 자존심 상했다. 직업 경찰에게 동원 수당을 준다면 저렇게 작전을 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외부 위문·격려 물품이 경비 계통에 들어오는 것도 못마땅했다. 경찰이 거지도 아닌데 왜 위문을 받고 라면과 빵을 받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없어 보이는 경찰이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황운하는 당시 매형이 하고 있던 롤렉스 시계를 달라고 하여 손목에 차고 다녔던 것이다.

 

1985년 경찰이 된 황운하는 1995년 경찰서 과장(경정)으로 승진하기까지 13년 동안 썩 바라지 않는 보직을 거쳤다. 종암경찰서 형사 반장, 대전동부경찰서 형사계장 경험으로 서울에서도 거악과 맞설 수 있는 형사계장으로 가고 싶다고 편지도 썼으나 소용없었다.

 

이 시기 직원들이 보기에 황운하는 고집이 셀뿐 평범했다. 당시 직원들이 기억하는 ‘황고집’은 주로 인사에서 발휘됐다. 19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경찰서 계장 자리는 여러 경로로 뇌물을 받을 수 있어 인기가 좋았다. 경찰서 인사는 서장이 지시해도 해당 부서 과장이 승인해야 한다. 1995년 황운하는 서장이 추천한 직원을 부패하다는 평이 있다며 거절했다.

 

거절 직후 주말에 황운하는 직원들과 치악산에 놀러 갔다. 서울에서 치악산까지 가는 길에 휴대전화가 내내 울렸지만 황운하는 서장 전화를 끝내 받지 않았다. 이러한 황운하의 자존심이 고집과 결합하면서 상사를 애먹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질들은 수사를 만나며 황운하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황운하는 1995년 경정으로 승진한 후, 인천서부경찰서(1996년)를 서울 중랑경찰서(1998년), 성동경찰서(1999년), 마포경찰서(2000년), 용산경찰서(2001~2003년), 강남경찰서(2003년)를 돌며 형사과장을 지냈다.

 

황운하가 경찰 수사권 아이콘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99년 성동경찰서 형사과장 이후다.

 

당시 형사들은 형사과장에게 자기 반에 형사 한 명 더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다른 인원이 없어 쩔쩔매는데 형사들은 검찰에 파견 나가서 검찰 수사를 돕고 있었다. 황운하는 이 시기에 검찰 파견 경찰을 모두 철수시킨다. 고집과 배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보는 1996년부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전면 철수가 아니라 실력 있는 형사를 반드시 복귀시키는 정도였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배우 박중훈이 연기한 형사 박재인도 당시 인천검찰청에 파견됐는데 황운하가 인천서부경찰서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해 ‘김포토박이파’를 검거하는 쾌거를 거둔다. 당시 관내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진 행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의자가 이미 수배를 내린 김포토박이파 소속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또 감청을 통해 용의자가 한 호텔 지하 룸살롱에 있다는 정보도 입수한다. 황운하는 형사들과 룸살롱을 급습했다.

 

“다들 벽을 향해 돌아서!”

 

한 명이라도 뻣뻣하게 나오면 바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경찰서에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형사 반장이 과장실로 황급하게 들어왔다.

 

“잘못 데려왔는데요.”

 

반장은 지금 데려온 20대 초반 젊은이들이 난리를 치고 있다는 보고도 했다. 형사들도 상황을 수습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황운하는 씩씩거리는 20대들을 모두 과장실로 불렀다. 그리고 다짜고짜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벌써 룸살롱에서 술이나 처먹고 다녀? 부모님들에게 연락해서 무슨 돈으로 술 먹었는지 다 조사해야겠다!”

 

그들은 더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시 황운하에게 상황을 보고했던 반장은 어느덧 노인이 됐지만 경험도 적고 나이도 어렸던 과장 황운하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당시 인천서부경찰서 형사들은 ‘파주 용주골 사건’을 가장 잊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황운하가 전 형사들을 동원해 다른 관할지인 파주에 있는 집창촌 용주골을 쓸어버린 사건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본격적인 막을 올렸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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