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9화 '고흥판 살인의 추억' 편

 

 

 

 

강남석 검사가 광주지검 순천지청으로 부임한 것은 2009년 2월 9일이다. 광주지검 순천지청은 순천경찰서, 여수경찰서, 광양경찰서, 고흥경찰서 등을 지휘한다.

 


 

강남석 검사는 2009년 5월경 고흥경찰서 유치장 감찰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경찰을 상대로 검찰이 휘두를 수 있는 권한 중에는 수사 지휘권과 더불어 유치장 감찰권이 있다. 경찰서를 방문한 검사는 경찰 범죄사건 등재부, 미제 사건철 등을 살펴봤다.

강 검사는 감찰 중에 2001년 벌어진 미제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다. 이 사건은 유력한 용의자가 있는데도 당시 경찰이 해결하지 못했다.

 

사건 내용은 대략 이렇다.

▲ 전라도 농촌마을

2001년 1월 14일경 전남 고흥군에 있는 한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65세 할머니가 집 대나무밭에서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할머니는 예리한 물건으로 몇 차례 찔린 상태였다. 사건 현장에는 담배꽁초와 우산이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담배꽁초는 평소 알고 지내던 김태용(가명)이 피워서 버린 것이었고 우산 주인은 박용근(가명)이었다.

경찰은 피해자 행적을 추적했다. 1월 9일 오후 8시경 할머니는 자기 집에서 김태용, 박용근과 술을 마시고 놀았다. 할머니 집에서 나온 김태용과 박용근은 김철준(가명)이 운전하는 렌터카를 타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김철준은 먼저 김태용을 데려다주고 나서 박용근을 데려다줬다. 김태용과 박용근 모두 알리바이가 확보됐다. 렌터카를 운전한 김철준이 증인이었다.

경찰은 당시 할머니를 찌를 때 사용한 칼을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자백을 받으면 직접 증거인 칼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백을 이끌어내지도 못했고 칼도 찾지 못했다.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강남석 검사는 경찰 수사기록을 모조리 가져왔다. 검찰은 먼저 용의자 범죄경력을 조회했다. 박용근 기록에 전과가 있었다. 검찰은 광주지검 순천지청에 있는 당시 사건기록을 받았다. 판결문 내용을 보니 할머니를 죽인 수법과 같았다. 강남석 검사는 판결문을 제시하며 박용근을 추궁했고 결국 자백을 받았다. 렌터카를 운전했던 김철준도 검찰 조사에서 본인이 착각한 채 진술했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박용근은 렌터카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에 내렸다고 한다.

수사를 맡았던 검찰 관계자는 경찰 수사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당시 경찰 수사기록에는 판결문 같은 자료가 편철돼 있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 관계자가 쓴 수기를 보면 검찰은 사건 조사 전에 고흥경찰서 관계자를 불러 범인을 검거할 기회를 줬다. 하지만, 경찰은 다른 혐의점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경찰은 왜 이런 중요한 단서를 놓쳤을까. 2001년과 2009년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을 수사한 최관호(가명) 형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건을 기록한 검찰 수기를 읽은 최관호 형사는 강남석 검사를 먼저 칭찬했다. 자신은 그런 배짱 있는 검사와 일하는 게 좋았다고 했다. 해마다 검사가 유치장 감찰을 나올 때마다 형사는 미제사건을 설명했다. 하지만, 사건에 관심을 보인 검사는 드물었다고 한다. '한 번 해보자'며 의욕을 보인 검사는 강남석뿐이었다.

형사 역시 검찰이 판결문을 입수한 점을 칭찬했다. 분명히 경찰이 놓친 증거였다. 경찰도 2001년 당시 박용근 범죄경력을 조회했다. 하지만, 전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검찰과 경찰이 쓰는 조회 시스템이 달랐기 때문이다. 최관호 형사는 특진이 걸린 사건을 조사하면서 전과를 알았다면 경찰이 가만히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경찰이 풀지 못한 강력사건을 검찰이 해결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검찰이 7월 30일 고흥 '살인의 추억' 사건 용의자를 구속하고 20일이 안 된 8월 18일, 순천경찰서는 백희정에 대한 강간과 강제추행 사건을 순천지청에 넘긴다.

 


강남석 검사는 이 사건에 흥미를 보였다.

 

 

당시 검찰 관계자가 쓴 기록을 보면 사건 서류를 받은 나흘째인 8월 21일 오전, 강남석 검사는 사건 해결 의지를 살짝 드러낸 것으로 돼 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검찰은 백 씨 부녀에게 자백을 받아냈다.


 

어느 기자는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검찰 기자회견장에서 자백 말고 물증이 있는지 물었다. 그 기자는 2009년 9월 2일 검찰이 지휘한 범행 현장검증을 보면서 2009년 2월 1일 경기경찰청이 지휘한 강호순 사건 현장검증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강호순 사건 현장검증에서는 경찰이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대부분 강호순에게 재현을 맡겼다.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현장검증 분위기는 달랐다. 백희정은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검찰이 먼저 물으면 그저 "네"라고 답할 뿐이었다. 언론은 검찰이 사건을 무리하게 수사했다고 몰아붙였다.

 


상황은 더 나빠져만 갔다.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재판 진행 중에 고흥 '살인의 추억' 피고인 박용근이 1심에서 무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2009년 12월 2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검찰은 당황했다. 박용근은 재판에서도 범행을 순순하게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용근이 자백했으나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지고 객관적 증거도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대체 재판부는 어떤 모순을 찾아낸 것일까? 박용근은 당시 범행도구와 옷을 시신 근처에 버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8년 전 수사기록에는 범행도구는 없었고 옷도 10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돼 있었다. 고흥 '살인의 추억' 사건 용의자가 무죄를 선고받자 언론은 재판 결과를 보도했다.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1심 재판도 끝나는 시점이었다.

강남석 검사는 1심 재판부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009년 12월 11일 검찰은 세 가지 자료를 제출할 것이라고 했다.

 

이 가운데 한 가지가 7월 2일 백경환 이동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CCTV 자료였다. 압수한 화면 4800장 가운데 백경환이 운전한 차량번호가 있는지 확인 중이라며 1월 말까지 제출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백경환이 오이 농사에 청산가리를 썼다는 증거가 될 만한 자료도 제출했다. 오이 농사를 하는 동네 사람 4명이 청산가리를 사용한 적이 있다는 진술이었다.

 


2010년 2월 18일 1심 재판부는 백 씨 부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이 검찰에 한 자백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강남석 검사는 1심 판결에 불복하며 항소장을 냈다. 고흥 '살인의 추억' 사건도 이미 항소장을 제출한 상태였다.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은 검찰 항소로 광주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강남석 검사는 2010년 광주지검으로 발령이 났다. 광주지검에 있던 강남석 검사는 항소심 재판에서 출석하여 두 사건 모두 유죄를 입증해야 했다.

그리고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에서 최선을 다해 유죄 판결을 받아낸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검찰 자백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강남석 검사는 재판부 마음을 어떻게 움직였을까.

 



먼저,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부터 살펴보자.

고흥 사건을 처음부터 수사했던 최관호 형사는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고 어느 날 강남석 검사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강남석 검사는 형사에게 검찰 증인으로 나와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항소심 법정에서 최관호 형사는 칠판에 써가면서 4시간 넘게 설명했다. 사건 발생부터 사건 송치까지 모든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항소심 재판에서 유죄로 확정,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2010년 9월 3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왜 검사는 '고흥 살인의 추억' 사건 1심 재판에서 변호인 측이 주장하는 진술에서 드러난 모순점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을까? 최관호 형사 의견은 이렇다.

2001년 범행 현장은 2009년 이미 재개발로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2009년에야 이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검사가 현장을 챙기는 게 가능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서 검찰은 어느 정도 현장을 챙겼을까.

8월 18일 백희정에 대한 강간과 강제추행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고 20일 백희정에 대한 첫 조사가 있었다.

당시 경찰은 백 씨 부녀가 아닌 다른 용의자도 수사했다고 한다. 검찰도 당시 경찰이 다른 용의자를 수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송 순대국밥집주인이 7월 5일경 백경환 씨 부부가 아닌, 다른 손님 부부에게 작은 막걸리를 판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 수기를 보면 검찰은 8월 21일 점심을 먹고 바로 대송 순대국밥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수기 내용은 실제 식당 주인 기억과도 같았다.

 


(제20화 - 나흘 간의 기억 최종화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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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8화 사건 당일(7월 6일) 재구성 편

 

 


검찰에 의하면 사건 당일 백경환 씨와 백희정 씨의 당시 행적은 다음과 같다. 백희정이 오전 2시 30분에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깼다고 한다. 백희정은 일어나 어머니 최명자 씨가 자는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부엌 냉장고 채소 칸에 있던 막걸리 두 병은 마당 화단 앞에 갖다 놓고 증거를 없앴다. 면장갑과 일회용 숟가락은 종량제 봉투에 버렸고, 청산가리는 집에서 50m 떨어진 하천에 버렸다.

 


이 일을 모두 마친 후 백희정은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이렇게 하기까지 현관문을 여닫은 횟수가 네 번이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지는 않았다.

 


아침이 되자 백경환은 화단 앞에 검은 비닐봉지를 본다. 그는 백희정이 이를 갖다 놓은 것도 알았고 내용물도 알았다. 하지만, 백경환은 매듭을 풀어 막걸리 뚜껑을 확인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어이, 누가 막걸리를 가져다 놨네. 뜰 방에 올려놨네."

그리고 백경환은 트럭에 올라탔다. 백희정이 범행에 쓴 일회용 장갑을 종량제 봉투에 버릴 거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 '이심전심'으로 알아챘다고 한다. 백경환은 종량제 봉투를 마을버스 정류소 옆에 버렸다.

오전 9시 10분경 최명자 씨는 공공근로 현장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다 변을 당한다. 오전 11시에 한 친척이 남편 백경환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백희정에게는 둘째 언니가 전화로 어머니 사망 소식과 병원을 가르쳐줬다. 백희정은 조카와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로 병원에 갔다. 검찰은 이 점을 주목했다. 가족이 갑자기 죽었는데 시종일관 침착하다면 이는 의심 대상이라는 것이다.

 


백 씨 부녀는 우발적이 아닌 고의범, 즉 계획범죄로 간주되어 각각 무기징역과 실형 20년형을 받았다. 보통 사건은 범인이 자백을 하지 않아 보강증거를 깊이 파는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직접 증거 없이 검찰에서 부녀가 한 자백이 유일한 증거였다. 이제부터 검찰 주장을 현장과 대조해서 살펴보자.

 




우선 백희정은 둘째 언니 전화를 자다가 받은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부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한 흔적은 보인다. 백희정은 과자를 살 때면 구례구역으로 갔다.


 


그날도 백희정은 아침에 조카와 과자를 사려고 구례구역으로 갔다. 백희정이 어릴 적부터 과자 사는 모습을 늘 접한 온 슈퍼 아주머니는 백희정이 그날도 고심 끝에 과자 하나를 골랐다고 진술했다. 백희정은 집으로 갔고 둘째 언니 전화를 받은 것은 그 뒤였다.

 



슈퍼 아주머니는 백희정과 조카가 나가자마자 가게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 막걸리 사고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조금 전에 과자를 샀던 백희정이 조카와 함께 다시 구례구역 앞에 나타났다. 백희정은 조카와 슈퍼마켓 맞은편 버스정류장에서 서성거렸다.


슈퍼 아주머니는 백희정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물었다. 아주머니는 당시 백희정이 생생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택시가 아닌 버스를 타고 간 모습이 수상하지 않았을까?

아주머니는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라고 했다. 둘째 언니는 동생이 버스를 탄 행동에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고 경찰에 설명했다. 백희정의 친척은 오히려 버스를 탄 게 희정에게는 최선이었다고 주장했다. 어머니가 실려 간 병원으로 가는 버스가 가장 많이 다니는 곳으로 달려왔다는 얘기다.

 



사건 발생 당일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남편 백경환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올랐다. 백경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 첫 조사에서 백경환은 결코 말할 필요가 없는 얘기를 했다.

"제 처 최명자에게 '어이 누가 막걸리를 가져다 놨네. 뜰방에 올려놨네'라고 말을 하고…"

부녀는 이런 수준이었지만 경찰 수사망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검찰에서는 버텨내지 못하고 자백했다.

 


 

가족과 친척은 변호사를 구했다. 윤기수 변호사를 먼저 선임했다.

윤 변호사가 보기에는 자백 사건으로 간단해 보였다. 갇힌 백희정과 백경환을 차례로 면담했다. 당시 백희정은 범행을 인정했으나 백경환은 부인했다. 공동 피고인이 이해관계가 다르면 변호를 동시에 맡을 수 없다.

윤기수 변호사는 송현승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딸은 자백했으니 송 변호사는 법정에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송 변호사는 도와주는 셈 치고 일을 맡았다고 한다.

 

 


송현승 변호사가 백희정을 만났다. 송 변호사도 궁금한 게 있었다. 그가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 접한 살인은 언제나 동기가 있었다. 백희정도 엄마를 죽일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송 변호사는 백경환은 살인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백희정이 살인을 인정한 이유를 물었다.

백희정은 울면서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고 말했다. 당시 송 변호사 보기에 백희정은 검사를 자기편으로 인식했다. 검사가 백희정에게 '나쁜 사람은 아버지고 너는 피해자'라며 도와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반면 백희정은 가족을 적으로 인식했다. 검사가 '가족이 시켜서 이웃집 남자를 고소한 것이니 희정을 빼주겠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송 변호사는 공소장을 보여주면서 백희정 씨에게 설명했다. 검사는 '네가 죄가 있다고 판단해서 기소했고 너를 도와줄 사람은 변호사'라고 알려줬다. 백희정은 그 개념을 어려워하는 듯했다. 다만 조용히 피식 웃기만 했다. 송 변호사는 다른 사건도 확인했다. 성폭행 부분에 대해 백희정은 "성추행만 있었다"라고 했다. "그 점은 상대에게 미안하다"라고 덧붙였다.

 



10월 1일 첫 재판이 시작되자 피고인들은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백경환·백희정 부녀는 최명자 씨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백희정은 또 성폭행 건에 대해 성폭행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성추행은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으니 허위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검찰 견해는 어땠을까? 당시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을 취재하던 한 언론인은 사건을 맡은 강남석 검사가 무척 들뜬상태였다고 기억했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기자회견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순천 청산가리 사건기자회견에서도 기자들은 강남석 검사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검사님은 '살인의 추억'도 해결한 검사"라고 치켜세웠다고 한다.

강남석 검사가 광주지검 순천지청으로 부임한 것은 2009년 2월 9일이다. 그해에는 굵직한 사건이 순천지청으로 넘어왔다. 이 가운데 세 가지만 꼽으면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 '광양 살인사건' 그리고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이었다.

2001년 발생한 미제 사건,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을 2009년 강남석 검사가 해결했다. 이에 언론이 주목했고 당시 강 검사는 "'살인의 추억'은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직접 언론에 기고하기도 했다.

수사기관에서 자백하던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인하는 일은 흔하다. 피의자는 구속됐을 때 교도소에서 변호인을 만나기 때문이다. 광주지검 순천지청은 순천경찰서, 여수경찰서, 광양경찰서, 고흥경찰서 등을 지휘한다. 따라서 이 지역 지능범죄자는 모두 순천교도소로 모인다. 검찰은 피고인 백경환에게 피고인 박용근(가명)을 아는지 물었다. 강남석 검사가 언급한 박용근은 일명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 범인이었다.

 



8월 24일 긴급 체포된 백희정은 교도소에서 광양 살인사건 용의자와 함께 한방을 썼다. 검찰도 이 부분을 추궁했다. 검사는 피고인 백희정에게 이렇게 물었다.

"김혜진(가명)은 ○○○의 목을 졸라 살해를 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에서 처음에 범행을 인정했는데, 나중에 검찰 조사에서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범행을 부인하면서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아 허위로 자백하였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피고인은 이와 같은 변명과 김혜진의 변명이 일치하는데, 김혜진에게 배워서 말한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피고인 허위진술 변경 이유만 같은 게 아니었다. 재판 결과도 비슷했다.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도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과 마찬가지로 1심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는 다시 유죄가 선고됐고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다.

취재 중 접한 기자들은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도 진범에 대해 확신이 안 선다고 했다. 1심에서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인정했는데도 진술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경찰과 검찰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을 만나기 전 단계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당시 검찰과 경찰이 겪었던 일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앞서 겪은 사건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고 수사관으로서 어떻게 발전했을까? 이는 검찰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서 보여준 수사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제19화 - '고흥판 살인의 추억'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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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7화 넷째 날(7월 5일) 재구성 편

 

 

 

날이 밝았다. 아침 고향 집에는 아버지, 어머니, 손자만 있었다.

 

오전 7시경 이들 부부는 기상했다. 당시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는 부엌 냉장고 채소 칸에 있었다.

 

백희정은 전날(7월 4일)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안방에 들어갔다. 당시 아버지는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다. 백희정은 잠을 자던 아버지에게 "막걸리를 넣어놨다"라고 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만약 잠결에 얼핏이라도 들었다면, 아버지는 냉장고 야채칸 박스에 막걸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전 7시 반경, 아침을 먹기 위해서 어머니는 부엌 냉장고 문을 열었을 것이다. 반찬을 먹고 나서 다시 냉장고를 열어 집어놨을 것이다. 손자가 우유를 찾자 어머니 최명자 씨는 냉장고를 또 열었을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들 부부는 논으로 나가서 약 2시간 동안 농약을 쳤다. 그리고 오전 11시경 돌아와 샤워한 후, 점심을 먹었다. 이때도 최명자 씨는 부엌 냉장고를 열어봤을 것이다.

만약 야채칸을 봤다면 최명자 씨가 제일 좋아하는 막걸리를 놓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명자 씨 시선은 야채칸을 한 번도 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명자 씨는 점심을 먹고 반찬을 다시 냉장고에 집어놨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 모두 낮잠을 잤다. 오후 3시쯤, 이들 부부와 손자는 봉고 트럭을 타고 땔감 나무를 줍고자 곡성으로 떠났다.


오후 6시경, 둘째 딸 부부가 막내아들을 데리러 순천에서 집으로 왔다. 저녁은 가족들이 모두 근처 식당에서 외식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최명자 씨만 둘째 딸 식구들과 함께 자가용으로 먼저 출발했다. 아버지는 씻고 나중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백희정 씨 행적을 살펴보자. 당일 백희정은 오전 9시경 부산에서 만난 남자와 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백희정은 순천으로 가지 않고 경남 창원으로 향했다. 그날 오후 6시 11분경, 경남 창원시 동읍 근방에서 백희정이 전화한 기록이 나왔다.

검찰은 항소이유서에서 "부산에서 순천행 버스에 승차하였음에도 순천으로 오지 아니하고 도중에 내려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산-창원 일대에서 배회하였다는 것"은 백희정 씨가 집에 오기 싫은 사정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백희정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창원으로 갔던 것이 아니다. 그냥 부산에서 만난 남자가 부산 사상터미널에 내려주자, 거기서 창원 버스를 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저녁에는 순천으로 돌아왔다. 순천에서 33번 버스를 타고 다시 고향 집으로 향했다.

경찰 진술로 추정한 부녀의 범행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백희정 씨는 형부 차와 마주쳤다. 당시 차 안에는 엄마, 둘째 언니 부부, 조카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백희정 씨에게 '식당으로 오라'라고 하고 먼저 출발했다. 그리고 그날 온 가족이 식당에 모여서 'KBS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식사했다.

 

순천 둘째 딸은 친정에 맡겼던 3살짜리 막내아들을 데리고 순천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막내아들은 싫다고 칭얼거렸고, 결국 다시 고향집에 맡기고 둘째 딸 부부는 순천으로 떠났다.

 



사건 기록을 살펴본 전직 형사과장은 둘째 딸과 아버지의 경찰 진술만 놓고 보면 이들 부녀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어떤 진술일까?

아버지의 경찰 초기 진술을 들어보자.

20:00경, 사위, 작은 딸, 손주, 안식구와 함께 산골마을(가명)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당에 있으니 막내딸이 순천에서 버스를 타고 식당 앞에 내려 들어와 함께 저녁을 먹고... - 백경환 경찰 진술조서 2회. 2009.7.7.

그런데 둘째 딸은 경찰에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씻고 식당으로 오겠다고 뒤에 출발하셨는데 저희들이 식당에 도착한 후 약 20~30분 정도 지나서 식당으로 혼자 오셨습니다. (중략) 백희정은 아버지가 식당에 오고 10분 정도 지나자 들어왔습니다. - 둘째 딸 경찰 진술조서 2회. 2009.7.12

 


둘째 딸 진술을 보면, 가족들이 먼저 식당에 도착하고 나서 아버지가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백희정 씨가 왔다. 전직 형사과장은 이때 부녀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가능성을 점쳤다. 하지만 그날 저녁 가족들 외식 분위기에서 이상한 낌새는 없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오후 10시경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백희정은 조카와 함께 잤다. 백희정 씨 자백에 따르면 당시 어머니는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백희정은 잠을 자다가 이날 자정 무렵에 일어났다. 그리고 엄마가 자는 거실을 지나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백희정 씨는 잠을 자는 아빠를 조용히 깨워 "새벽에 막걸리를 화단 앞에 가져다 놓을 테니 아빠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을 건넸다. 9월 2일 검찰 현장검증에서 수사관이 "아빠가 들은 것 같으냐"라고 묻자 백희정은 "잠결에 들은 것 같다"라고 했다.

백희정 씨는 안방을 나와 거실을 지나서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을 청했다. 가족들은 이 점을 납득하지 못했다. '1박 2일간 놀다가 왔으면 지쳤을 터인데 어떻게 일찍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시계에 알람을 맞춰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백희정 씨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이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제18화 - '사건 당일 재구성'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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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6화 셋째 날(7월 4일) 재구성 편

 

 

7월 4일 토요일 아침이 됐다.

 

백희정이 일어났을 때는 아버지 백경환 씨는 곡성으로 일을 떠난 후였을 것이다. 어머니 최명숙 씨에게는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막내딸과 세 살짜리 외손자에게 아침밥을 차려줬다.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외손자에게 건넸다. 백희정은 오전에 조카와 놀았다.


오후가 됐다.

백희정은 인터넷 채팅으로 부산에 사는 어느 남자와 약속을 잡는다. 부산 남자는 백희정에게 '부산으로 올 수 없느냐'라고 물었고 백희정은 '차비 2만 원을 통장으로 보내달라'라고 한다.

이제부터 검찰의 주장을 들어보자. 백희정은 폰뱅킹을 확인하고 나서 옥상에 올라가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탔다고 한다.

 


백희정은 7월 4일 오후 8시경 면장갑과 일회용 플라스틱 수저, 막걸리, 청산가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지문이 남지 않도록 면장갑을 양손에 끼고 캄캄한 옥상에서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탔다. 어두운 데서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막걸리를 흔들어댔다.

백희정은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를 포함해 총 2병을 부엌 냉장고 채소 칸에 비스듬히 눕혀서 넣었다. 이 막걸리는 앞으로 이틀 동안 이 상태로 냉장고 안에 있었을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백희정은 당시 "아빠는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라고 했다.

백희정은 안방에서 잠을 자던 백경환에게 "막걸리를 넣어놨다"라고 말했다. 백경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희정은 부산으로 떠났다. 백희정이 부산 남자를 만난 때는 7월 5일 오전 1시 30분 경이라고 한다.

검찰 주장대로라면 백희정은 옥상에서 처음으로 청산가리를 보았다. 백희정은 청산가리가 "흰색 분말이 깨알만 한 동그란 알갱이로 만들어졌다"라고 표현했다. 이를 두고 검찰은 '백희정이 청산가리를 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백희정이 표현한 청산가리 모양은 진술의 임의성을 뒷받침한다고 했고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검찰 주장에 문제점이 있다.

바로 백희정이 자백한 2009년 8월 25일은 벌써 사건이 발생한 지 50일이 훨씬 지난 후였다.

그 50일 사이에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8월 1일 내보낸 '두 마을의 끝없는 공포-청산가리 살해 미스터리' 프로그램에서도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타는 재연 장면이 나온다. 이 방송에 나온 청산가리가 '흰색 분말'이었다.

막내딸의 '청산가리' 묘사, 결정적 증언이라기엔...

 


그리고 8월 20일과 24일 사이에 경찰 부탁으로 이모는 백희정과 함께 이웃집 아주머니를 찾아가 청산가리에 관해 들었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건 이후 유가족 중에는 '청산가리'가 궁금해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는 이도 있었다. 이처럼 백희정이 한 진술은 이미 오염 가능성이 있었다.

 

 



검찰은 백희정을 '치밀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백희정이 책을 자주 보고 이야기를 연구했으며 시리즈를 즐겨보는 것도 근거로 내세웠다.

 


검찰은 백희정이 부산으로 떠난 이유가 알리바이 조작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같은 해에 일어났던 보령 청산가리 독극물 사건 예를 들었다.

 


 

2009년 4월에 일어난 보령 청산가리 사건은 죽은 정 씨 할머니 남편이 범인이었다.

남편은 부인이 쓰러졌다며 112에 신고했는데, 신고 시점이 4월 29일 밤 11시 39분이었다. 남편은 외출했다가 밤늦게 돌아와 보니 부인이 쓰러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형사는 남편에게 그 사이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

남편은 알 낳는 닭을 구경했고 개와 장난치다가 왔다고 진술했다. 형사는 4월 29일 밤은 쌀쌀했다고 기억했다. 그런 날씨에 73세 노인이 3시간 반 동안, 개와 놀았다는 게 경찰관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됐다고 했다.

검찰은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서 보여준 백희정 씨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했다. 7월 4일 부산으로 간 이유가 데이트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검찰이 그렇게 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부산 남자는 백희정을 숙소로 데려갔다. 그는 "숙소에서 옷을 벗겼더니 팬티가 남루하고 생리를 하고 있어 (성관계를) 그만뒀다"라고 했다.

검찰은 26세 젊은 여성이 남루한 팬티를 입고 있었다는 게 증거라고 했다. 젊은 여성이면 남자를 만날 때 속옷도 신경 써서 입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속옷에 신경 쓰지 않았던 걸 보면, 부산 방문은 데이트가 아니라 알리바이 조작'이라고 본 셈이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변호인은 백희정이 치밀한 편이라는 검찰 주장에 반박했다. 백희정은 사건 발생 전까지 마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 변호인은 백희정이 읽은 책이 있었다면 검찰이 증거로 제출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다못해 백희정이 작성한 도서관 대출목록이라도 제출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희정은 마을 도서관 컴퓨터로 '노는' 것을 좋아했다.

수사 과정에서 백희정이 한 인터넷 채팅 내용이 밝혀졌을 때 가족과 주변 사람이 받은 충격도 상당했다. 백희정 씨가 채팅으로 남자를 만났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김밥집 사장 김미순 씨도 당시 충격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사건 전 백희정이 '오빠 만나러 다녀왔다'라고 말할 때마다 김미순 씨는 '만났다는 오빠'를 '모두 같은 사람'으로 여겼다고 했다. 김 씨는 인터넷 채팅으로 백희정이 남자를 만나는 것이 상상이 안 된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희정이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희정은 세수하거나 머리 감는 것을 귀찮아했다. 김밥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여름철에 백희정의 냄새에 못 견뎌서 가게 뒤편 수돗가에 샴푸를 갖다 놓기도 하고, 속옷을 사서 백희정에게 갈아입으라고 성화를 냈던 적도 있었다.

김미순 씨는 백희정을 자기가 목욕시킨 것이 여러 번이라며 백희정을 만나는 남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채팅하는 남자들 또한 여성을 만나보기 전까지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7월 4일 백희정은 검찰 주장처럼 오후 8시경 집 옥상에서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탔던 것일까? 그런데 이 사건 1심 10회 공판에서 백희정은 검찰 공소사실을 모두 뒤집을 수 있는 증언을 한다.

부산으로 '채팅남' 만나러 갔다는 용의자

 


검사 문 : 피고인(백희정)이 폰뱅킹을 한 시간대에 비추어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희석한 시간은 2009.7.4.19:30경에서 20:00경 사이로 보이는데 어떠한가요.
백희정 답 : 아닙니다. 저는 그 시간대에 버스 안에 있었고, 버스 안에서 계속 전화를 하면서 갔는데, 버스 안에 있는 CCTV에 찍혔을 것입니다.

즉 백희정이 검찰에서는 "구례역에서 출발했고, 오후 8시 45분에 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갔다"라고 진술했지만, 법정에서는 "구례역에서 출발했고, 오후 7시 20분에 버스를 타고 갔다"라고 증언한 것이다. 만약 백희정의 법정 진술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공소사실'은 무너지게 돼 있다.

 


이 사건 발생 후 경찰은 백경환만 의심한 게 아니었다. 막내딸 백희정 역시 유력한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경찰이 드라마 CSI처럼 현장 증거를 분석해 백희정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형사는 사건 현장에서 어떤 '감'을 따라 스토리를 연상한다. 이후 나오는 증거를 보고 감으로 연상한 스토리를 확인하게 된다. 이 과정이 일반적인 강력 사건 수사 방법이다.

 



백경환을 용의자로 보는 형사는 7월 3일 백 씨가 일하다 점심때를 틈타 순천에서 막걸리를 사 올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하지만 곡성 일터에는 당시 백경환 씨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목격자가 10명이 넘었다.

이렇게 막히면 형사는 다른 스토리를 연상했다. 백희정을 용의자로 넣은 '감'은 어떻게 나왔을까. 한 형사는 '둘째 언니 진술에서 감이 왔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둘째 언니가 진술한 내용은 뭐였을까.

 


"제가 집에 오면 엄마와 희정이가 여러 번 다퉜거든요. 서로 악을 쓰면서 싸웁니다. 그러면 옆에서 제가 희정이를 혼냅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아침에 제가 희정이 휴대전화로 전화를 해서 엄마가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가셨다고 구례병원으로 막내 조카 데리고 가보라고 하니까, 희정이가 자고 일어난 목소리로 알았다고 했고 제가 조금 후에 전화를 하니까,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2009.7.23. 2회 진술조서)

게다가 둘째 언니는 사건 전날, 길목에서 마주친 동생이 '어떤 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했다. 형사들은 그 가방에 막걸리가 들었던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래서 형사들은 백희정씨의 당시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만약 백희정 씨가 버스를 타거나 편의점에 들렀다면 형사는 해당 장소에 설치된 CCTV를 모두 확인했다.


한 형사는 '백희정이 채팅에서 만난 남자를 부추겨 엄마를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고 했다.

형사들은 백희정이 만난 '채팅남'을 찾으러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렇다면, 검찰로 송치한 경찰 수사기록에 '7월 4일 백희정이 탔던 버스 CCTV'에 대한 보고는 없던 것일까?

하지만 검찰은 백희정씨의 주장에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제17화 – 나흘간의 기억 중 '넷째 날' 재구성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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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5화 둘째 날(7월 3일) 재구성 편

 

 


7월 3일 당시 백희정 씨는 오전 0시 18분에도 휴대전화로 게임에 접속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부모가 모두 일터로 떠나 집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백희정은 엄마가 차려놓고 간 아침 밥상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날 엄마는 오후 5시경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백희정이 검찰에 자백한 내용을 살펴보자. 아버지는 오후 6시 10분경 일을 마치고 오자마자 아내 최명자 씨가 있는 부엌으로 갔다. 아버지는 냉장고에서 막걸리 두 병을 꺼냈다. 막걸리를 창고에 가져다 놓고 막내딸 방으로 들어와 작은 목소리로 백희정 씨에게 속삭였다.

"희정아, 창고에 가봐라."

 

 


백희정은 이 말을 듣고 방을 조용히 나갔다고 했다. 백희정은 창고 문을 열어봤다. 당시 백희정 씨는 창고 안 구석에 청산가리 봉지와 검정 비닐봉지에 담긴 막걸리 2병을 보았다고 했다. 백희정은 지문이 남을까 봐 막걸리병을 만져보지 않고 그대로 창고 문을 닫았다.

검찰에서 백희정은 '막걸리와 청산가리를 확인하지 못한 게 지문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말 그 이유 때문일까? 그날 백희정 씨의 동선을 살펴보면 버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날 백희정은 저녁에 순천 시내로 가야만 했다. 이 마을에서 순천 시내로 가는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꼴이다.

 


매시간 구례구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10분 후, 백희정이 사는 마을에 도착한다. 오후에는 백희정네 집 인근 버스정류장에 4시 10분경, 5시 15분경, 6시 15분경, 7시 30분경, 8시 55분경에 순천 가는 버스가 선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약 100m 정도 떨어져 있다. 넉넉잡아서 버스 도착 예상 시간 10분 전에 집에서 출발하면 충분하다.

그날 둘째 언니의 기억에 따르면 '그녀가 백희정을 순천에서 저녁에 만났다'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희정은 아마도 오후 6시 15분쯤 버스를 탔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백희정은 아버지가 '창고에 가보라'라고 말하자 창고로 가서 범행도구들을 대충 본 후에 버스정류장까지 달려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날 백희정에게는 대체 어떤 다급한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그토록 시간이 없었을까?

 



이날 백희정은 순천 둘째 언니 집에서 조카들과 피자와 사이다를 먹었다.

 


왜 둘째 언니는 백희정을 순천 집으로 오게 했을까? 그건 막내아들을 친정에 데려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피자와 사이다를 실컷 먹은 후, 백희정은 막내 조카를 데리고 언니 집을 나섰다. 둘째 언니는 막내아들이 좋아하는 우유를 여덟 개 정도를 검은 비닐봉지에 넣었다.

둘째 언니는 주말이었던 7월 5일, 막내아들을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막내아들이 먹을 만큼 우유를 넉넉히 넣었다고 한다. 훗날 검찰 현장검증 때 백희정이 냉장고를 여는데, 7월 3일 밤 냉장고 안에 놔뒀다가 사건이 터진 후 방치된 우유가 보였다.

 


여기서 둘째 언니 진술을 다시 살펴보자. 당시 둘째 언니는 막내아들이 좋아하는 우유 여덟 개를 검은 비닐봉지에 넣었다고 했다. 사건 발생 후, 경찰은 당시 백희정 씨가 우유를 담은 검은 비닐봉지 안에 막걸리를 함께 놔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확인 작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검찰 수사를 보면 경찰 예측이 틀렸다. 이미 막걸리는 아버지가 구입했고 그 시간대에 막걸리는 창고 안에 있었다.

 

 


여기까지가 백희정씨 자백이다. 하지만 아버지 백경환 씨 진술은 막내딸과 정반대다.

 


 

아버지인 백경환 씨 증언에 따르면, 그는 7월 3일 오후 6시~7시 사이에 집에 도착했다. 당시 백희정은 외출하고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후 8~9시경 백경환 씨가 부엌 냉장고에서 막걸리 2병을 모두 꺼내서 마당 아래 창고에 가져다 놓았다. 여기까지 보면 아버지 진술이 막내딸 진술보다는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아버지는 순천에서 막차를 타고 온 막내딸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즉, 아버지가 막내딸에게 "창고에 가보라"라고 알려주었던 때는 막내딸 옆에 외손자도 함께 있었다. 검찰은 두 엇갈리는 진술을 공소장에 이렇게 소화해냈다.

'백경환은 2009. 7. 3. 18:00경 냉장고에서 꺼낸 막걸리 2병과 약 17년 전에 이강춘으로부터 얻어다가 하얀 비닐봉지와 신문지 조각으로 감싼 채 창고 선반 위에 보관하고 있던 청산염을 꺼내 창고 바닥에 놓아두고 피고인 백희정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7월 3일 막차를 타고 돌아온 백희정은 가방에서 우유들을 꺼내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살인계획을 떠올리며 조카 옆에 누워 새벽에 게임 접속을 한다.

 


(제16화 - 나흘간의 기억 중 '셋째 날' 재구성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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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4화 첫째 날(7월 2일) 재구성 편

 

 

 

 

검찰은 백희정 씨가 사건 발생 3개월 전부터 살해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당시 백희정 씨가 부모를 모두 살해하려고 했다는 얘기다. 대체 부모와 자식 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엄마는 막내딸이 집안일도 돕지 않고 밖으로 돌아다닌다며 야단을 쳤다고 한다. 백희정 씨가 엄마에게 말대꾸하자 아빠는 '엄마에게 대든다'며 백희정 씨 뺨을 한 대 때렸다.

 


백희정 씨는 눈물을 흘리며 아빠에게 소리쳤다.

 

"잘해준 것도 없는데 왜 때려!"

그리고 백희정 씨는 곧장 집 밖으로 뛰쳐나와 부모를 죽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꿔 엄마만 살해하기로 했다. 백희정 씨는 아빠는 간섭하지 않아 죽일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고 했다. 엄마는 술을 마실 때마다 '막내딸이 남자를 만난다'며 모욕을 주곤 했다.

 



2009년 4월, 어느 날 밤 백희정 씨는 살해 도구로 병이나 칼을 떠올렸다. 지문이 남지 않도록 장갑도 마련해야 했다. 백희정 씨는 다음날 순천에 있는 한 문구점에서 면장갑을 샀다. 당시 구매한 면장갑은 부엌 찬장 위쪽 칸에 숨겼다.

백희정 씨가 아버지에게 범행 공모를 제안한 것은 다음 달인 5월이었다. 백 씨는 아버지가 있는 안방에 들어가 이렇게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지 않으냐?"

엄마를 죽일 생각이 없는지 떠본 것이다.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6월 중순이 되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날씨가 무더웠던 평일 오후 2시쯤 백희정 씨를 안방으로 불러들여 엄마를 죽이자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반대로 백희정 씨가 소극적이었다. 백희정이 제안은 받았으나 거절했고 아버지는 이후에도 뜻을 물으며 재촉했다. 당시 백희정 씨는 어쩔 수 없이 '마지 못 해' 동의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이 대목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내를 죽일 거면 혼자서 하지, 왜 딸을 끌어들여? 뭐가 좋은 일이라고?"

정작 당시 둘은 서로 마음이 통하기 시작했다. 막내딸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막걸리와 청산가리를 어디서 구할 수 없느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창고에 오랫동안 보관한 청산가리가 있다는 말을 이때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행동 개시' 날짜가 7월 2일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공소장에 나온 범행 첫날, 7월 2일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백경환 씨는 곡성에 있는 산림청 하청 작업장으로, 최명자 씨는 자전거를 타고 희망근로 사업장으로 떠났다. 백희정 씨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부모는 집에 없었다.

검찰은 백경환 씨가 일을 마치고 오후 6시쯤 집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 최명자 씨를 데리고 순천 아랫시장에 있는 장원 식당에 갔다. 차를 타면 집에서 40분 정도 거리다. 백경환 씨는 살해 전 '아내가 좋아하는 국밥을 사주고 싶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이 '최후의 만찬'을 위해 순천 아랫시장을 찾은 셈이다. 아랫시장에 장이 열리는 날은 끝자리가 2일과 7일이다. 당시 백경환 씨 부부는 장원 식당에서 국밥을 먹고 막걸리 3병을 샀다. 백경환 씨는 구입한 막걸리 3병 중 2병을 냉장고에 보관했고 한 병은 부부가 함께 마셨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검찰 주장이다.

 

이제부터 의문점을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국밥을 먹고 국밥 가게에서 막걸리 3병을 구매하는 게 흔한 일일까? 국밥 가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손님이 수육 같은 음식을 포장할 때 막걸리를 같이 사 가는 경우는 흔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국밥을 먹고 나서 막걸리만 3병을 사는 일은 드물다'라고 했다.

그보다 앞서 이들 부부가 트럭을 타고 집에서 40여 분 걸리는 순천으로 가기는 했을까? 이들 부부가 순천으로 간 것을 증명하는 CCTV 자료는 찾아내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 친척들도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만약 아내에게 국밥을 사준다면 더 맛있고 거리가 가까운 '괴목 국밥집'이 있었다. 괴목 국밥집은 전국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다. 게다가 순천 아랫시장에서 국밥을 사준다면 장원식당 옆에 있는 금봉 식당(가명)이 더 유명하다.

백경환 씨는 왜 굳이 국밥을 먹으러 먼 순천 아랫장까지 간 것일까? 백경환 씨는 '동네 슈퍼에서 막걸리를 사면 들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이용한 장원 식당 또한 내부에 CCTV를 설치한 곳이다. 백경환 씨가 검찰에서 자백했을 때는 범행으로부터 50일 이상 지났기 때문에 식당 내 CCTV 자료도 남아있지 않았다.

당시 백경환 씨는 검찰 자백에서 '아내와 막걸리 3병을 사고 아랫시장에 가서 반찬거리를 사 왔다'라고 했다. 하지만 검찰은 반찬가게에 대한 탐문수사는 건너뛰었다.

 



이번에는 당시 통화기록을 통해 부부 행적을 살펴보자. 이날 최명자씨와 순천 둘째 딸 사이에 통화한 기록이 있다. 둘째 딸이 오후 6시 4분경에 엄마에게 전화했다. 대화는 14초 정도였다. 그날 밤 엄마는 둘째 딸에게 오후 8시 30분경에 전화한다. 총 통화시간은 53초였다.

막내딸에게 전화했더니 다른 남자가 받았다?

 


당시 어떠한 이야기를 했을까? 먼저 순천 둘째 딸이 엄마에게 전화한 이유를 살펴보자. 순천 둘째 딸은 엄마에게 전화해서 동생 희정을 찾았다. 엄마는 집에 없다고 답했다. 14초 동안 이뤄진 대화다.

그 후 언니는 백희정 씨에게 전화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동생 휴대전화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라고 했다. 언니는 동생 휴대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누군지 묻고 "왜 동생 휴대전화를 갖고 있느냐"라고 물었다. 상대는 "백희정 동네 후배"라고 했다. 언니는 상대에게 위치를 물었다. 동네 후배라는 남자는 "순천의료원 근방"이라고 답했다. 언니는 "휴대전화를 찾으러 가겠다"며 차를 몰아서 순천 의료원 로터리(교차로)로 갔다.

 


도착하니 그 '동네 후배'는 없었다. 다시 희정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더니 전화를 받은 남자는 "마을로 돌아가고 있다"라고 했다. 순천에서 마을로 가는 33번 버스 종착지는 구례구역이다.

그날 밤, 최명자씨는최명자 씨는 둘째 딸에게 저녁 8시 30분 55초경 전화했다. 당시 통화시간은 53초다. 엄마는 과연 둘째 딸에게 순천에 다녀왔다는 말을 했을까? 이때 최명자 씨는 "희정이 휴대전화를 찾으려고 구례구역으로 갔는데 '그 후배가 없다'는 말을 했다"라고 한다.

 



통화 내용상 당시 오후 6시 4분에서 오후 8시 30분 사이 부부 행적에 단서가 될 만한 통화기록은 없다. 물론 부부가 순천 시내를 다녀왔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둘째 딸은 이 가능성을 부정했다. 순천에 사는 둘째 딸은 맞벌이 부부이며 어린 두 아들이 있다.


그들은 맞벌이 부부라 당시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며칠 전부터 친정 엄마에게 전화해 애를 맡기려 했지만, 부모님 역시 일 때문에 지쳐서 순천까지 가서 외손자를 데려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7월 2일, 부모님은 순천에 왔다가 둘째 딸에게 연락도 없이 돌아갔다. 이튿날, 금요일에도 부부 모두 일을 나가야 하니 외손자를 봐줄 수가 없어서 연락을 못했을 수도 있다.

검찰은 부부가 구입한 막걸리 3병 중 2병을 그대로 부엌 냉장고 안에 보관했고 한 병은 거실에서 꺼내 함께 마셨다고 한다. 즉, 부부가 막걸리를 마시는 와중에 어머니 최명자 씨는 막내딸 휴대전화를 찾으러 자전거를 타고 구례구역으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구례구역까지는 자전거로 5분 거리다. 그리고 어머니 최명자씨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백희정 씨가 엄마에게 8시 49분 24초경 전화한다. 당시 통화가 연결된 기지국은 순천시 조곡동이었다. 백희정이 순천시에서 휴대전화를 찾아 전화한 것이다. 그 후 오후 9시 42분 29초에도 다시 전화하는데, 기지국은 순천시 황전면 수평리였다. 백희정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전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날 밤 백희정은 10시 46분경 게임에 접속한다.

(제15화 - '둘째 날(7월 3일) 재구성'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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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3화 마지막 목격자.

 

 

 

백경환·백희정 부녀는 2009년 8월 24일과 26일 검찰에 의해 긴급 체포된다. 그들은 2010년 2월 8일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출소했다. 그 후 부녀는 일 년 반 동안 일상생활을 하다가 2011년 11월 10일 항소심에서 다시 법정 구속됐다.

정말 이들 부녀가 범인이었을까? 부녀가 1심 무죄 판결 후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동안 이들을 접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1심 판결 이후, 목격자들의 증언

 

 


첫 번째는 가족이다. 가족은 1심 무죄를 받고 아버지와 막내가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검찰에서 왜 그런 내용으로 자백했는지 궁금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검찰이 말을 '베베 꼬면서', '슬슬 놀려가면서' 질문했다고 답했다. 아들은 왜 아니라고 말 못 했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아버지는 욱하면서 검찰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화를 냈다. 그리고 눈물만 흘렸다. 아들은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고 했다.

 

백경환은 집에서 농사를 짓고 다른 사람 일을 해줬다. 고물을 줍기도 했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백 씨가 힘이 없어 보였다고 했다. 큰딸이 종종 집에 와서 아버지를 살폈다. 방안에 휴지가 뒹굴었고 책상 위에는 성경책과 돋보기가 놓여 있었다.

 



두 번째 목격자는 김밥집 여주인 김미순 씨다. 출소 후 백희정은 김미순 씨를 가끔 찾아왔다. 김미순 씨도 백희정이 한 자백이 사실인지 궁금했다. 나만 알면 안 되겠느냐며 계속 유도했지만 백희정은 범행을 부인했다.

백희정을 약 2~3년 가까이서 관찰했던 김미순 씨도 백 씨가 어머니를 살해할 그런 악질은 아니라고 여긴다. 하지만, 백희정은 검찰 현장검증 때도 범행을 명백히 시인했다. 당시 백희정은 옥상에서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타면서 범행을 재연했다. 청산가리를 넣고 나서, 막걸리 병을 흔들어댔다. 당시 검찰이 왜 흔드느냐고 묻자 백희정은 "잘 녹으라고"라고 대답했다. 검찰은 이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재연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미선 씨는 백희정에게 독특한 버릇이 하나 있다고 했다. 물을 마셔도 그냥 마시지 않고 컵을 돌린다는 것이다. 백희정은 항상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맥주를 마실 때나 뭘 마시든 항상 잔을 돌려서 마신다고 했다. 김미선 씨는 이런 버릇이 게임 중독 때문에 생기는 불안 증상이라 여겼다. 백희정은 가만히 있을 때는 휴대전화를 부단히 만지작거렸다.

 



세 번째 목격자는 백희정 씨 둘째 언니가 다니는 순천 ○○교회 목사다. 부녀가 1심 재판을 받을 때마다 목사는 법정에서 방청하곤 했다. 당시 목사는 백희정에게도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옷도 깨끗하지 않고 냄새도 나는데 인터넷 채팅으로 남자를 만나러 다녔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재판장은 법정 한쪽에 슬라이드를 켜고 백희정 씨에게 OHP 필름 위에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피고인석에 섰던 백희정은 피의자로 지목된 마을 아저씨 집 내부 구조를 그리기 시작했다. 목사는 백희정이 그림 그리는 광경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백희정은 법정에서 그림 속 방을 가리키며 성추행 장면을 '웃으면서' 묘사했다.


 

 

1심 무죄판결 후, 부녀는 출소했고, 가족들은 주말이 되면 순천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둘째 딸이 아버지와 막내를 모두 교회로 데려왔다. 목사는 그때부터 백경환과 자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목사는 백 씨에게서 특이점을 한 가지 발견했다. 대

화를 해보니 백경환 씨는 똑같은 상황을 이야기해도 '어제 누구와 만나서 국을 먹었다'라고 하다가 잠시 있다가는 '자장면을 먹었다'는 등 다르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목사가 보기에 백경환은 '디테일'에 약했다.

 



마지막 목격자는 광양 식당 사장이다.

백희정은 출소한 지 몇 달 후 광양에 있는 식당에 취직했다. 목사가 같은 교회 신도였던 식당 사장에게 백희정을 부탁한 것이다.

 

식당 사장은 희정에게 냄새도 나고 옷차림새도 지저분했지만 신앙 차원에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사장은 식당 옥상에 있는 집에 백희정이 살 곳을 마련했다. 백희정의 짐을 가지고 온 사람은 백경환이었다. 식당 사장은 교회에서 백경환을 본 적이 있었다. 고향 마을에서 트럭에다가 경운기를 싣고서는 교회 밭을 갈아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백경환은 "희정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희정은 평일에는 식당일을 하다가 주말에는 교회로 나갔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꼴로 광주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에 참석했다.

식당 사장은 백희정이 식당에서 쓸 재목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밥을 먹다가 손님이 오면 일어나 맞이하지 않았다. 행동도 늦고 식탁을 닦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신앙 차원에서 받아들였기에 백희정을 따뜻하게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백희정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당사자였다는 걸 알았을 때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사장은 일절 정보를 주지 않았던 목사에게 몹시 맘이 상했다고 한다.

"섭섭했어. 무죄를 받았든 어쨌든, 우리는 먹는 음식을 하는 업이야. 우리가 지저분하다, 냄새난다며 심하게 구박하거나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한다면 해코지할 수도 있다는 거지. 사전에 정보를 줬으면 우리가 조심도 하고 더 잘해주려고 했겠지요."

그런데 식당 사장은 백희정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당사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바로 백희정이 직접 털어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식당 사장은 백희정을 해고하지 않았다. 사장은 백희정이 누구를 죽일 만큼 그런 악질로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사장은 오히려 "교도소에 살아보니 좋더라"라고 말하는 백희정을 '부족하다'라고 봤다. 보통 사람이라면 응당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잘해준다고 털어놓는 백희정이 안쓰러웠다고 했다. 숨기지 않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희정이 인터넷 채팅을 한다는 사실도 사장 귀에 들어왔다. 아주머니들이 잘해준다고 희정이 털어놓은 모양이었다. 사장은 '백희정이 물 마실 때 잔을 흔드느냐'는 질문에도 '그렇다'라고 답했다.

식당 사장은 백희정이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당사자라고 털어놓자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고 했다. 식당 사장은 광주고등법원 재판 전날에는 항상 백희정을 순천 언니 집 근처까지 태워다 줬다. 백경환은 순천에서 백희정을 기다렸다. 희정은 언니 집에서 묵을지 아버지를 따라 고향 집에 가서 머물지를 선택했다. 식당 사장은 부녀 관계가 사건 쟁점인 만큼 유심히 관찰했다.


식당 사장은 백희정이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백희정이 식당에 머무는 동안 백경환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백희정이 머문 옥상 집으로 가는 계단은 실내에 있다. 낯선 사람이 계단을 지나가면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11년 11월 10일 광주고등법원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희정은 본인이 무죄로 나올 것처럼 이야기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선고 날 아침 순천에서 광주로 출발했다. 아버지는 교회 목사에게 "판사님이 빨리 끝내줘야 할 텐데"라며 걱정을 내비쳤다. "빨리 돌아와서 OO댁 하우스 일을 해주기로 했다"라고 덧붙였다. 그 품삯을 받아 농약을 사서 밭에 약을 칠 계획이었다.

그날 광양 식당 사장은 법원이 백경환에게 무기징역, 백희정에게 20년형을 선고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장은 그때야 희정이 살던 방으로 올라가 봤다. 이불은 개지 않았고, 바닥은 담배 재와 먼지로 뒤엉켜 있었다. 백희정이 구속된 후 식당 가게로 우편물이 날라 왔다. 그것은 게임 접속 비용 등을 포함한 백희정 휴대전화 요금 통지서였다. 백경환은 그 후로 농사를 짓지 못해 농협 대출 담보로 잡혀 있던 집터는 경매로 넘어갔다. 백희정 씨 언니들은 '결혼 후에도 나물이며 채소를 갖다 먹곤 했던 고향 집이 없어졌다'며 한탄했다.

 



한 가족이 파국을 맞이한 것이다. 이 모든 비극은 부녀 성관계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검찰 항소이유서는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경환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세 딸을 모두 건드렸다는 자백이었다.

'피고인 백경환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백희정을 성추행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고, 또한 조사과정에서 언니들인 백○○, 백○○에 대한 성추행 사실도 일부 시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백○○, 백○○은 현재 결혼을 한 상태이므로 이 부분에 대한 조서는 남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검찰 항소이유서 77p

검찰 주장대로라면 세 딸을 모두 성추행한 것은 마을 아저씨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 백경환이었다. 하지만, 취재 중 큰딸은 아버지를 이야기하면서 몇 번이나 목이 메었다. 1심 무죄를 받고 출소한 아버지를 걱정해 고향 집을 자주 찾곤 했다. 둘째 딸은 결혼 후 아이를 낳으려고 친정 집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출소한 아버지를 자신이 다니는 교회로 데려왔다. 필자가 백경환을 면회하고자 순천교도소를 갈 때는 둘째 딸과 동행했다. 그때 부녀 풍경은 '성추행'이란 단어와 멀어 보였다.

무엇보다 두 딸이 아버지 결백을 주장한다.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이들은 검찰 주장대로 아버지와 막내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은폐에 가담하는 것일까? 이제부터 우리는 검찰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 하나씩 따져보겠다.

 

검찰 공소장을 기반으로, 당시 통화기록, 주변 진술을 바탕으로 나흘간 기억을 재구성해보자. 우선 2009년 7월 2일부터 시작한다.

(제14화 – '첫째 날 재구성'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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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추적기> 제12화 경찰 입장

 

 

 

이번에는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 대한 경찰의 입장을 들어보자. 존속살인 사건을 수사한 전직 형사과장은 검찰의 논리에 의문을 제기했다.

전직 형사과장이 지적한 것은 바로 백희정 씨가 용의자로 지목된 과정이다. 검찰은 '백희정이 경찰 수사를 피하고자 수사에 혼선을 주려 했다'라고 말했다. 그 방법은 '동네 아저씨' 장영환을 성폭행으로 고소한 것을 뜻한다.

 

 

 

검찰은 성폭력 사건 조사를 통해 백희정 씨가 '무고'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를 백희정 씨의 의도적인 위증으로 파악한다. 검찰은 백희정 씨가 이웃집 남자를 강간으로 고소해 수사 방향을 그쪽으로 틀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범인이 심리적 압박을 받으면 수사 방향에 혼선을 주려고 시도하는 일은 간혹 있다. 2012년 발생한 제주 올레길 살인사건이 그런 예다. 지난 2012년 7월 12일, 제주 올레길에서 40대 여성 관광객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이에 수색견·헬기·군 특공대 등을 투입한 대규모 수색이 진행됐다. 사건 발생 20일이 지나 올레길에서 멀리 떨어진 버스정류장에 신발과 함께 절단한 손목이 발견됐다.

언론은 '엽기적인 사건'으로 사안을 다뤘다. 하지만 형사들은 범인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꾸민 짓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결과적으로 '절단된 손목'을 다른 현장에 둔 시도는 범인이 저지른 최대 패착이었다. 사체를 찾기 전까지 이 사건은 실종 사건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손목이 발견되면서 경찰이 살인 사건으로 수사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도 백희정씨가 고소만 하지 않았다면 '완전 범죄'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정 씨는 고소를 통해 순천경찰서를 속였다. 검찰은 '백희정 씨가 조사 때 이웃집 구조까지 그림으로 그리며 진술했기에 경찰도 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검찰은 백희정 씨가 위증을 위해 작정한 것으로 봤다.


하지만 기록을 검토한 전직 형사과장의 의견은 달랐다. 검찰이 만약에 경찰 수사 과정을 지켜봤다면, 검찰도 분명 경찰이 장영환 씨를 의심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라 했다. 경찰이 장영환을 캐기 위해서는 구속수사가 필요했다. 장영환을 의심하게 되면서, 경찰은 백희정 씨에게 최근 6개월 이내에 당한 날짜를 찍어 보라고 했다. 성인인 경우 고소 요건을 맞추기 위해서다. 그래서 결국 장영환을 긴급 구속할 수 있었고, 압수영장을 발부받아 집 안의 여러 물건을 뒤질 수 있었다.

즉 "왜 백희정씨가 '무고'를 저질렀을까를 생각할 때, 이건 검찰처럼 '백희정의 뜻'으로 볼 게 아니라 '경찰의 뜻'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고 느껴야 맞다고 본다"는 뜻이다.

 

 




사건기록 본 어느 형사 과장 "이해가 안 된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기록을 살펴본 한 형사과장은 '검찰이 원점에서 수사하기 어려웠던 이유로, 경찰 수사를 문제 삼은 게 가장 이해가 안 된다'라고 했다. 당시 검찰은 이렇게 주장했다.

"경찰에서 50일 이상 수사가 진행됐는데 그중에서 단 하나의 단서를 잡지도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사가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2010.12.2. 항소심 2회 기일)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은 당시 수사본부가 설치된 사건이다.

 


전쟁 시 군 부대에 중대·대대·연대·사단 단위 전투가 있듯이, 수사본부 또한 경찰서 자체로만 수사하기 힘들 때는 상급기관의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이 들어간다. 충남 보령 청산가리 독극물 사건은 충남 보령경찰서 형사들과 충남지방청 광역수사대 인력이 더해졌다. 지방청 차장을 본부장으로 하여 수사본부를 차렸다. 매일 한 번 회의를 개최하고 수사내용을 점검해야 했다. 4월 29일 발생한 보령 청산가리 독극물 사건은 9월 10일 용의자를 대전지검 홍성지청으로 구속 송치했다.

수사가 가장 길었던 사건은 강호순 검거일 것이다. 경기지방경찰청은 여성 실종 사건이 접수되자 2007년 1월 3일 수사에 착수했다. 그중 실종자 3명의 휴대전화가 모두 경기도 화성시에서 꺼진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시체 은닉 장소로 화성을 지목했고 화성 연쇄살인이 재현됐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전경 부대가 화성 일대에 투입돼 시체 은닉 장소를 찾았고 이 같은 수색은 주민에게 심리적 압박을 줬다. 민원이 빗발치자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4월 화성에 서부경찰서를 하나 더 짓게 했다. 강호순은 서부경찰서가 세워진 후인 2009년 1월 24일 긴급 체포됐고 2009년 2월 3일 수원지검 안산지청으로 송치됐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을 두고 지방청장이 수사본부 사건 보고를 받고 진척이 없느냐며 재촉했다. 그러자 한 경찰 간부는 수사본부가 꾸려진 사건은 기본적으로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고 한다. 즉, 수사본부가 설치된 사안에서 '50일' 경과 시점을 문제 삼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백희정씨에게서 자백을 받았어도 다시 원점에서 하나씩 따져 들어가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검찰은 그러지 못했다.

 



항소심에서 변호인은 검찰을 향해 7월 2일 백경환 씨의 이동 경로를 입증할 CCTV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그러자 검찰은 "백경환 씨가 다른 차를 운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증거로써 의미가 없어서 제출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런데 백경환씨는 '절대 다른 차를 운전하지 않는다'라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만약 다른 차로 운전했다면 그 차량을 찾아내는 것이 과연 어려운 것일까? 검찰은 항소심 마지막 기일에서 'CCTV가 뇌우에 맞았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해당 사건 관련 형사들은 '그런 기억이 없다'라고 했다. 만약 CCTV가 뇌우에 맞았다면 수사보고에 첨부돼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검찰은 계속 경찰의 기억과 다른 주장을 이어나간다. 바로 살해 동기인 '부녀 성관계' 문제 부분이다. 경찰은 당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했지만 단서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 검찰은 항소 이유서에서 놀라운 고백을 한다. 검사는 경찰 제보로 부녀 성관계에 대해 수사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급기야 항소심 3회 공판에서 검찰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전남지방청 소속 김옥빈 경위가 55일 넘게 경찰수사를 하다가 마을 사람들 제보에 의해 피고인들 간에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부분에 대해서 수사를 하게 되었는데…."

55일 이후라면 2009년 8월 29일 이후를 말한다. 당시 백희정 씨가 검찰에서 자백한 날이 8월 24일이다. 이튿날인 25일 검찰은 순천경찰서에 전화하여 경찰 수사기록 일체를 검찰로 넘기라고 지휘했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순천경찰서 살인사건 수사팀이 허리까지 닿는 분량의 수사서류를 가져왔다. 그 후에 검찰로 경찰 제보가 들어왔다고 한다.

 

 


이에 김옥빈 경위는 펄쩍 뛰었다. 자신은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과 전혀 관련 없는 부서에서 근무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한 검찰 관계자도 김옥빈 경위는 그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미 검찰이 부녀에게 자백을 받았기에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였다.

 



'개 짖는 소리' 안 들렸다는 증언, 당사자 만나보니

2009년 7월 6일,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경찰은 현장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반면 검찰이 현장에 나타난 것은 8월 26일, 백경환 씨를 긴급 체포할 때였다. 검찰이 두 번째 현장을 찾은 것은 검찰 현장검증 때다. 당시 마당에 땔감 나무는 마침 다 써버려 넓은 공간이 드러난 상태였다. 검찰은 그 넓은 마당을 두고 좁은 입구에 백 씨가 주차했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백경환 씨네 아랫집 아주머니가 7월 9일 경찰 조사에서 '6일 새벽에 개 짖는 소리를 못 들었다'라고 했다.

이를 근거로 검찰은 사건이 '내부자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왜 이런 부분을 놓쳤던 것일까? 백경환씨 집과 이웃집 구조를 살펴보자. 당시 백경환 씨 집 개 두 마리는 정문에서 바라볼 때 왼편 끝, 텃밭 구석에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창고가 있고, 그 뒤로 백경환 씨 집에 높은 담이 있고, 그 옆에는 아랫집 담이 둘러싸여 있다.

 

이제 아랫집 아주머니를 만나보자. 아랫집 아주머니는 필자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집 안에 있을 때는 (바깥소리를) 잘 못 들어!"

아랫집 아주머니는 집 안에 있을 때는 '개소리'만이 아니라 지나가는 '차 소리'도 안 들리고, 윗집 부부싸움도 안 들린다고 했다. 왜 그럴까? 당시는 7월 6일이었고, 여름이라고 해도 새벽에는 쌀쌀해서 창문을 닫아놨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후, 형사들이 아주머니 집을 찾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형사들은 대문을 등에 지고 마당에서 아주머니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그때 아주머니 시야에 대문 밖 도로로 차가 지나갔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형사들에게 "방금 차 지나갔는데 그 소리 들었어요?"라고 물었다고 했다. 형사들도 못 들었다고 답했다. 아주머니는 여기는 비탈길이라서 차가 소리 없이 '쓱' 내려간다고 설명했다. 아주머니는 형사들에게 "이렇게 마당에서도 소리가 안 들리는데 집 안에서 차 소리가 들리겠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아랫집 아주머니 진술을 검찰이 내부자 소행을 뒷받침하는 보강증거로 사용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부녀는 9월 2일 검찰 현장검증 때도 범행을 시인했다. 당시 백희정씨는 옥상에서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타는 시연을 했다.

 


백희정 씨는 청산가리를 넣고 나서 막걸리 병을 흔들어댔다. 검찰이 "왜 흔드느냐"라고 묻자 백희정 씨는 "잘 녹으라고요"라고 답했다. 검찰은 이를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다면 재연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검찰의 주장을 반박하는 목격자도 있다.

 


(제13화 – '마지막 목격자'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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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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