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제8화 생활의 발견
조현오는 감옥에 있을 때부터 경찰 간부를 소개해줬다. 맨 처음 소개받은 경찰이 바로 민갑룡이다.
민갑룡은 어느 청장이 오나 상사에게 듬뿍 사랑받았다. 박학다식했고 업무 열정이 남달랐다.
그에게 차명계좌 발언 재판기록을 요청했을 때 주변에서는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민갑룡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치적 논란을 걱정했다.
이 같은 반대에 내 생각은 간단했다. 화해하면 될 것 아닌가.
민갑룡은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며 내 시도를 부정적으로 봤다.
이후 이른바 친노 그룹으로 불리는 인사를 만났다. 관용과 화해를 역설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깍듯했다.
2014년 12월 나는 조현오와 함께 봉하마을에서 참배를 진행했다.
(☞조현오 전 청장,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몰래' 참배)
그리고 2015년 초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추진했다.
인터뷰 당일 아침까지 민갑룡은 반대했다. 당시 캐나다 유학 중이던 그는 이메일까지 보내며 인터뷰를 말렸다.
하지만 나중에 인터뷰 내용을 확인한 민갑룡은 흐뭇해했다. (☞ 조현오 오마이뉴스 인터뷰)
조현오와 글 작업을 진행하면서 제목을 <구겨진 제복>으로 정했는데 바로 민갑룡 아이디어다.
그는 나중에는 꼭 제복을 펴달라고 부탁했다.
정권이 바뀌었다. 황운하도 민갑룡도 다 승승장구했다.
2018년 봄, 경찰청에 댓글 관련 특별수사팀이 설치됐다.
조현오가 타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경찰 댓글 실무는 중간급 계장들이 담당한다. 당시 보안, 정보, 홍보마다 이 사건과 관련된 계장들이 있었다.
이 사건 피의자로 바뀔지 모를 간부들은 당시 계장들에게 전화해 원망했다. 조직 내 분위기는 추락했다.
경찰청장 민갑룡은 두 가지 큰 원칙을 세워서 이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첫째 처벌 대상을 당시 경무관급 이상으로 제한했다. 즉 총경 이하는 제외되는 것이다.
둘째 경찰청 차장 임호선에게 수사지휘를 맡기고 특별수사단 수사 보고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조현오가 불같이 화를 냈던 게 기억난다.
“이게 작은 사안이야? 전임 청장 국장 수사하는 내용 보고를 왜 안 받아? 청장이 모든 수사보고를 받고 책임을 져야지! 나는 디도스 수사도 내가 다 보고 받고 챙겼어. 어디 책임을 회피하려고!”
경찰 조직은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조현오가 정부를 옹호하는 댓글 작업을 지시했다면 이는 경찰청 국관회의(일일회의)에서만 가능하다.
청장 지시를 각 부서에 전파하는 역할은 기획조정담당관(총경)이 맡는다.
그래서 당시 청장 지시가 범죄라면 기획조정담당관도 공범이라 보는 게 자연스럽다.
물론 경찰청장 민갑룡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총경은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을 밝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조현오가 경찰청장 당시 기획조정담당관은 민갑룡이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민갑룡 이름을 그대로 묻었다.
아마 경찰청장으로서 책임과 고뇌를 잘 이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한 시사주간지에 실린 조현오 입장문 마지막 구절(아래)처럼 경찰조직에 대한 애정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경찰이 되고 싶었고 외교관이 돼서도 경찰이 너무 좋아서 외교관을 포기하고 경찰관을 택했다. 지금은 내가 평생 사랑했고 자부심을 느꼈던 경찰에게 처벌받는 처지가 됐다. 그래도 경찰 조직이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사회 질서 유지라는 본연의 역할을 해나갔으면 하는 마음은 변함없다.”
조현오는 그렇게 경찰에게 처음 구속되는 경찰청장이 됐다. 조현오가 남대문경찰서에 수감되고 일주일 동안 보강수사가 진행됐다.
조현오에게 이명박 대통령 지시를 받아 댓글 작업을 했다는 진술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어떤 기자는 조현오에게 이 시국에 책임을 떠넘겨야 빠져나가지 자기가 무슨 장세동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시간 국정감사가 열렸다.
이재정(여당) 의원이 모 시사주간지에 실린 <조현오 전 경찰청장 입장문>을 들고 나와서 경찰청장 민갑룡을 다그쳤다.
이에 경찰청장 민갑룡은 조현오와 분명히 선을 그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조현오는 민갑룡 이름을 덮는다면서, 왜 굳이 입장문 인터뷰에 아래처럼 민갑룡 이름을 들먹였는가?
‘민갑룡 청장이 이러한 (청와대) 수사 가이드라인에 항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찰청장의 의지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대목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고백하자면, 이 입장문은 바로 내가 썼다. (☞ 조현오 입장문 "직무범위 벗어난 지시는 전혀 없었다" )
조현오는 당시 경황이 없었고 구속을 앞둔 조현오는 내게 전권을 줬다. 전권을 주면 간섭하지 않는 게 조현오 방식이다.
여기서 내가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당시 시사주간지는 내 의도와 다르게 오히려 여당 의원이 조현오를 두들겨 패기 좋게끔 기사를 써댔다.
당시 국정감사에 배석한 경찰 간부 중 김상경(가명)이 있었다.
김상경은 내가 한 짓을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당 의원이 이 기사를 근거로 조현오를 난타하는 현장을 지켜봤다. 국정감사가 끝나자 김상경은 문자를 보냈다.
“너무 가슴 아팠어.”
나는 김상경에게 ‘미친년’ 소리를 들을 각오가 돼 있었다. 그는 연이어 문자를 보냈다.
“난 마지막 구절이 너무 좋더라.”
그 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조현오 구속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기자 때문인가? 당시 기사를 보고 항의하자 기자는 비아냥거렸다.
“아이고. 서 작가님. 조 청장님 위하는 것은 알겠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마십시오.”
이 눈물은 기자에게 당했기 때문도 아니다.
아! 정말이지 고백할 게 너무나 많다.
적폐 청산 광풍이 부는 시기에 조현오에게 언론 접촉은 좋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매력적인 언론 선배가 부탁해오면 마음이 약해져 오히려 조현오에게 취재에 응해주라고 몰아쳤다. (☞ PD수첩 장자연 건)
하찮은 이해관계 때문에 조현오를 팔아넘겼다는 그 사실이 매일 나를 괴롭혔다.
이 기간 주변에 왜 이 고통과 불행이 일어났는지 물었다. <한겨레> 보도에서 시작한 ‘우연’이라는 카오스적 설명은 허망하게 다가왔다.
친노 진영에 찍혀 손 보고 싶은 인물이었다는 코스모스적 설명도 있었다. 내가 손을 놓든 필사적으로 들쑤시고 다니든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듯하다.
며칠 후, 여전히 침울한 저녁에 전화가 울렸다. 친노 인사 어르신이다. 기분이 좋은 듯 그는 조현오 욕을 시작했다.
온갖 듣기 민망한 말을 조현오에 갖다 붙였다.
한참 지나자 내 인내심은 한계를 넘었다.
“술 먹었냐?”
이 어르신은 내 비아냥거림에 불같이 화를 내며 끊었다. 내 마음도 굳어졌다.
조현오가 10여 년 전 차명계좌 발언을 했을 때도 이렇게 마음을 다쳤을 것이다.
나는 박근혜 정부 시절, 이 분에게 화해와 관용에 대해 수없이 강조했다. 권력을 쥔 자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을 그대로 내가 돌려받을 때 비로소 보인다.
민갑룡 말처럼, 화해와 관용은 어려운 것이다. 며칠 뒤 진영 단감 다섯 상자가 도착했다. 발신 주소는 봉하마을 근처였다.
예전에 친노 정치인 A에게 어떻게 해야 조현오를 용서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답은 똑같았다.
진정한 사과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봉하 참배나 인터뷰로 밝힌 사과 정도는 진심이 안 느껴진다고 했다.
과연 진심이면 될까. 상대 진심을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않으려는 이들에게 그 진심은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그래서 그 친노 어르신이 전화로 단감 잘 받았느냐고 물어볼 때까지 입도 뻥끗 안 했다.
이제는 권력 중심에서 멀어진 늙고 외로운 노친네 심정을 헤아리고 싶지 않다.
당시 남대문 경찰서에 수감된 조현오를 면회하러 한걸음에 달려온 이는 칠순을 바라보는 허준영이었다.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후배를 바라본 허준영 심정은 어땠을까. 광경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처럼 한쪽으로 쏠린 내 슬픔은 양쪽 진영이 만나 화해하는 게 너무 먼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관용을 더 넓은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당시 일을 추진할 때 그 취지를 깊이 이해하고 도와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친노 진영 인사를 만날 때 도움을 줬다. 그리고 조현오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던 주변 지인도 시간이 흐르면서 양쪽을 이해하는 완충지대로 들어와 있었다. 이들이 휴머니스트인 것이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 화해 분위기를 탄다.
필자는 문재인 정부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해나가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관용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그 완충지대 넓이와 두께에 달려 있다고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진영 논리에 갇혀 우리가 드러내는 사고나 습관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글이 당신과 함께 산 사람들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품는데 소소한 영향을 끼치기를 바란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적폐 청산 광풍이 불 때는 완충지대는 다시 얇아지며 "휴머니스트는 개뿔"이 된다.
다시 2019년 댓글 재판으로 돌아가자. 공소사실은 정보·홍보·보안 분야에 걸쳐 있었기에 증인이 수백 명에 달했다.
2019년 한 해 내내 법정에 앉아 증인 진술을 들었다. 공소사실에 걸쳐 있는 2010~2012년 당시를 차분히 되돌아봤다.
그 당시 필자도 광화문 촛불집회나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동참했다.
집회에서 내가 기억하는 모든 장면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경찰 대응은 분명히 필요했다.
그 당시 경찰이 했던 대응 상당수가 ‘여론조작’이라는 검사 주장이 수없이 나왔다.
이에 증인으로 나온 한 경찰이 반박했다.
“저는 지금 이 재판이 진행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경찰의 적절한 여론 대응이 왜 이것이 재판 대상이 되는지 잘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이 일선에서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잘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중간 의사전달 과정에서 곡해될 수 있고 실제로 일을 실행하는 사람이 오버할 수 있겠지요. 그런 부분이 지금 문제로 부각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그 당시에 정말 올바른 여론대응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지,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고 저도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는 당시 대전지방경찰청장이던 황운하였다.
법정 복도에서 황운하를 만났다.
황운하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황운하는 능청을 떨었다.
“난 기억 안 나.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모르겠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왜 기억이 안나겠는가. 내가 “그 머리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건드렸는데.
그는 증언을 마치고 법원을 떠났다.
우리가 또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행보를 생각하며 떠나는 대전지방경찰청장(치안감) 황운하 뒷모습은 박근혜 정권 시절과는 달랐다.
2015년 그해 봄, 경찰대 교수부장 황운하는 치안감 승진을 포기하고 퇴직 후를 생각하던 시점이었다.
그때 처음 점심 식사를 같이 했던 날이 떠오른다. 황운하는 같이 밥 먹자며 친한 후배도 불렀다.
식당으로 가기 위해 함께 관용차에 올라탔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는데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사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조현오 이후로 경찰청장 인물이 안 나오고 있어.”
“그러게 말이에요.”
황운하와 후배 민갑룡(당시 경찰대 치안 연구소장)은 대화에 정신이 없다.
달리는 차창 안으로 햇살이 듬뿍 들어오고 있었다. 자연현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심한 듯 보인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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