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 김대중은 프랑스 대혁명처럼 구체제에 대한 모순을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체제 모순 타파 가운데 하나가 경찰 수사권 독립이었다.

 

1999년 경찰청장 김광식은 수사권 독립 소신을 피력했다.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인 황운하는 오랫동안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형사 검찰 파견이었다. 정작 형사과 인력은 부족한데 경찰은 검찰 일을 거들었다. 검찰 파견 직원 관련 규정을 따르지 않는 편법 파견이었다. 파견 경찰을 철수하려면 서장 결재가 필요했다.

 

황운하는 파견 경찰 철수를 시도했다. 서장은 결제에 앞서 검찰 보복을 걱정했다. 그래도 조직에 대한 자존심은 있었다. 해보겠다고 나서는 황운하에게 힘을 보탰다. 황운하는 관련 규정을 바탕으로 '파견 경찰관 철수 복귀 협조 요청'이라는 공문을 서울중앙지검에 보냈다.

 

서울중앙지검은 반응이 없었다.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황운하는 파견 형사에게 복귀 시점을 알리면서 이를 어기면 징계하겠다고 통보했다. 형사들은 모두 예고한 시한에 맞춰 복귀했다. 황운하는 미리 방송 카메라를 불러 그 앞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이 내용은 9시 뉴스 첫 보도로 나간다.

 

1998년 검찰은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을 구속했다. 이어 1999년 경찰청 정보국장도 구속한다. 검찰이 경찰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에 맞춰 경찰이 의욕적으로 나선 수사권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황운하는 공고해 보이는 구체제 벽이 어느 순간 무너지게 돼 있다고 확신했다. 1999년 검찰 파견 경찰 철수 이후 황운하는 검찰 쪽 전화를 자주 받는다. 대부분 '두고 보자'는 내용이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경찰 수사권 독립에 호의적인 정부였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대북특검과 대선자금 수사로 요동쳤다. 황운하는 서울서부지방검찰청 수사 지휘를 받는 용산경찰서 형사과장이었다.

 

이 시기 황운하와 식사를 했던 서울지역 일간지 기자는 흥미로운 일을 접한다. 그 자리에는 한 변호사가 함께했다. 변호사는 황운하에게 괜히 일을 벌인다며 못마땅해했다. 대화에 호기심을 느낀 기자는 취재를 시작했다. 일개 경찰서 형사과장이 검찰 뒤를 캐는 전무후무한 일이 진행 중이었다. 시발점은 용산역이 주무대인 브로커 '오다리'에 대한 첩보다. 당시 오다리를 만난 형사가 전한 이야기다.

 

"처음에 용산경찰서에 가니까 오다리라는 친구가 접근을 했어. 지인이 나를 한 호텔 식당에 데리고 가더니 박 사장이라고 소개하는 거야. 그가 나에게 유능한 형사라고 익히 들었다며 친해보자네. 그때는 뭐하는 친구인지 몰랐거든. 그런데 내 앞에서 전화를 하더니 '김검, 박검' 그러면서 상대에게 야지 넣고 하는데 속으로 사기꾼인가 했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이었어! "

 

박 사장은 '오다리'로 불렸다. 다리 다섯 개는 '마당발'과 '잽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당시 역 주변에는 성매매집결지가 있었다. 용산역에도 윤락업소가 80여 곳 정도 있었다. 각종 불법영업으로 업주에게 문제가 생기면 오다리가 나섰다. 오다리는 변호사를 구해주면서 거액을 챙기곤 했다.

 

오다리는 판검사와 친분을 과시했다. 물론 경찰도 유착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 경찰은 형사들이 잘못해 검찰에 불려 다니면 오다리가 나서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오다리에게 신세를 진 경찰이 제법 있었다. 황운하는 초기에 오다리를 수사할 적임자를 구하지 못했다. 마침 형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2001년 유명 연예인 마약 사건을 인지 수사한 젊고 유능한 형사였다. 2003년 3월 17일 진술서를 확보하고 오다리를 변호사법 위반으로 긴급 체포했다. 하지만, 구속영장을 검찰이 기각한다. 경찰은 오다리 사건 관련 영장을 다섯 번 신청한다. 압수영장 세 번, 구속영장 두 번이다. 검찰은 모두 기각한다. 언론은 '다섯 번 영장 기각'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오다리는 2003년 5월 27일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오다리 통화기록을 확보한다. 최근 3개월 동안 검사, 변호사, 판사 50여 명과 150통 이상 통화한 내용이었다. 절반 이상이 서울중앙지검 서부지청 검사들이었다. 6월 들어 대검은 현직 검사 22명을 상대로 감찰을 시작했다. 계좌추적에서 금품을 받은 것이 드러난 검사들은 법무부 검사징계위원회로 넘어갔다. 이 가운데 한 명은 법무부 소속으로 당시 법무부 장관인 강금실이 총애하는 인물이었다. 검사 징계위원장은 법무부 장관이다.

 

2003년 10월 4일 <경향신문>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끝내 자기 오기를 관철했다고 보도했다. 법무부 소속 검사는 무혐의로 벗어났고 이후 순탄한 길을 걸었다. 오다리 보도로 막상 피해를 입은 쪽은 강남경찰서 형사과장인 황운하였다. 총경 승진을 앞두고 직위해제당한 것이다.

 

언론과의 마찰이 징계 배경이었지만 2003년 6월 20일 <한국일보>는 "그간 자주 물의를 빚어 온 점 등도 감안됐다"는 고위 간부 말을 인용하면서 ‘'트러블메이커'에 대한 시범 징계 가능성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고 전했다.

 

황운하는 이후 소청심사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듬해 황운하는 총경으로 승진했다.

 


 

황운하를 중용한 첫 번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다. 외무고시 출신 허준영은 2005년 1월 취임했다. 그는 청문회에서부터 경찰 수사권 소신을 거듭 밝혔다.

 

수사권이 있는 검찰은 챔피언이었고 경찰은 도전자였다. 도전자는 계속 시합을 요구했고 챔피언은 웬만해서는 도전자를 피하려 했다. 2004년 9월부터 검·경 수사권 조정협의체 회의가 수차례 열렸다. 2005년 중반 국회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진행은 갈수록 지지부진했다. 참여정부는 검찰·경찰 중재, 국회 입법, 총리실 조정 등을 거치며 결론을 내려했지만 실패했다.

 

경찰청장 허준영은 수사구조개혁팀을 꾸려 황운하 총경을 팀장으로 불렀다. 황운하 행보는 다시 대외적인 충돌을 가져왔다. 황운하가 허준영에게 보고 없이 전결로 하달한 공문이 문제가 됐다. 모두 두 번이었는데 검찰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 공문은 검찰 강제인치 등 잘못된 관행을 거부하라는 지시였다.

 

수사지휘권을 앞세운 검찰이 저지르는 나쁜 관행 가운데 '피의자 면담제도'가 있다. 법원 영장실질심사제도를 흉내 낸 이 제도는 법적 근거가 없다. 만약 경찰이 긴급체포를 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을 때 검찰이 피의자를 면담하고 싶다면 화상통신을 하거나 검사가 경찰서로 찾아오면 된다. 법원이 피의자를 면담하는 제도인 영장실질심사도 피의자 신청이 없으면 할 수 없는데, 검찰은 경찰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피의자 뜻과 무관하게 검찰청으로 데려오게 했다. 기관이 다른데도 공문도 없었다. 경찰은 피의자를 검찰청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경찰서로 데려왔다.

 

황운하는 전국 경찰서에 '피의자 면담을 위한 검사면전 강제인치거부'를 내용으로 담은 공문을 하달한다. 충남지방경찰청과 강릉경찰서 두 곳이 검찰과 맞붙었다. 청와대도 황운하 행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청와대 공직기강 비서관실이 나서 허준영에게 인사조치를 요구했다. 허준영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 문제로 허준영과 청와대는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허준영은 왜 자신에게 보고도 없이 행동한 황운하를 오히려 감쌌을까? 한 경찰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내용은 청장에게 보고해도 그 누구도 보내라고 할 수 없어요. 거기서 황운하의 과단성이 나오는 거죠.”

 

허준영은 2005년 12월 WTO 쌀협상 비준반대 시위에서 농민 두 명이 사망하면서 경찰청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새로 청장으로 취임한 이택순은 황운하를 경찰청 밖으로 내보냈다.

 


 

황운하는 대전서부서장으로 가서도 '수열모'라는 모임을 만든다. '수사구조개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검찰이 주도하는 형사소송법 체제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깨우쳐야 했다. 그 지점에서 구체제 모순을 뒤바꾸는 에너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모임을 꾸리고 몇 달이 지난 2006년 9월 5일 대전서부서는 대전지검에서 온 전화를 받는다. 한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데려오게 했다. 대전서부서 직원은 수열모 모임에서 배운 내용이 생각나서 서장 황운하에게 바로 보고한다. 대전서부서는 검찰 요구를 거부하는 사유를 적어 공문으로 보냈다. 피의자를 면담하고 싶으면 검사가 경찰서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검사는 직접 경찰서로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9월 15일 검사가 다시 인치 요구를 했다. 황운하는 또 거절했다. 대전지역 언론은 당시 검·경 갈등을 '살얼음판', '초유의 신경전', '폭풍전야' 같은 표현으로 묘사했다.

 

검찰 안에서는 황운하를 겨냥해 절대 묵과할 수 없다며 '인권옹호직무명령불준수죄'로 기소하자는 의견이 쏟아졌다. 하지만, 종전 같은 기소처리는 없었다. 2006년 9월 26일 대전 CBS 정보보고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 본인이 희생양이 되겠다고 덤벼드는데 우리도 사실 겁난다.

 

검찰만 황운하가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경찰 수뇌부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이미 경찰청은 이런 문제를 검찰에 협조하기를 바랐다. 경찰청장 이택순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황운하를 소리 지르는 노점상에 빗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황운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택순은 9월 25일 황운하를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보낸다. 누가 봐도 문책성 인사였다. 황운하는 26일 이임식에서 검찰을 향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요, 사법개혁의 방해 세력이고, 강력한 인권침해 집단이다."

 

검찰개혁을 바라는 대다수가 공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들도 검찰개혁 방법으로 경찰 수사권에 힘을 보태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경찰이 중요한 순간마다 국민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한 예다.

 

게다가 국민은 경찰이 어떤 수사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경찰이 존재감을 알리려면 관심을 끌 수 있는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므로 대기업, 정치인 수사는 대부분 검찰 몫이다.

 

황운하는 형사과장 시절 마약사건을 중요하게 다뤘다. 검찰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수사해서 이목을 끌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연예인 마약 문제였다. 2007년 황운하가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 시절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사건이 터진다.

 


 

2007년 3월 8일 한화그룹 회장인 김승연이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직접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보복 폭행 사건'이다. 수사 결과도 깔끔했다. 일선 경찰서가 처음으로 재벌 회장을 구속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 초기 경찰이 은폐를 시도하면서 늑장수사를 한 사실이 밝혀진다. 이 과정에 한화 쪽 로비가 있었고, 전 경찰청장 최기문이 역할을 했다. 5월 25일 경찰청 감찰 이후 서울청장 사퇴와 서울청 수사부장, 형사과장, 남대문경찰서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경찰청장 이택순이 자기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일이 벌어진다. 경찰이 검찰에? 황운하는 5월 26일 이택순 퇴진을 요구한다. 일선에서는 경찰청장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경찰을 수사기관도 없는 조직으로 만들었다고 분개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같은 달 28일 경찰청에서 열린 전국경찰지휘부회의에서 국장급 일부가 사퇴를 건의했다. 이 모든 것은 조직 발전을 위한 충정으로 이해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가 이택순에게 힘을 보태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사퇴를 건의했던 국장 및 청장들은 인사 조치되거나 회의 때마다 면박을 당했다.

 

황운하에게는 중징계가 예고됐다. 8월 29일 경찰청 중앙징계위원회에 황운하가 소환됐다. 황운하가 차에서 내려 경찰청 정문으로 들어갔다. 황운하는 징계위원을 향해 징계받을 일을 한 게 없다고 반박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인용하기도 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당시 민중들이 변화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사건인데 그 구체제 모순에 맞선 사람들을 범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징계위원장이 황운하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야, 너무 세게 이야기하지 마! 무섭다고!”

 

 

(다음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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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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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황운하' 연재를 시작하면서

 

법을 아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 위에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배우 박중훈이 주연을 맡은 OCN 방영 드라마 <나쁜녀석들-악의도시>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이 사회 법 위에 있는 사람들의 적나라한 악행들을 펼쳐 보입니다.

 

처음에는 돈 많은 기업인인가 싶더니 권력과 부에 미친 검찰 지검장 악행이 드러나지요. 이들이 구속되자 착한 권력으로 보이는 새 지검장이 들어섭니다. 그다음 ‘나쁜 녀석들’로 강력계 형사들이 급부상하지만 이 역시 검찰 조직이 뒤를 봐줬다는 게 드러납니다. 결국 착한 권력으로 생각했던 새로운 지검장도 ‘조직 보호’ 논리 앞에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국정원과 검찰 권력 견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적폐청산이라는 명분으로 검찰 조직도 인사 물갈이가 이뤄졌습니다.

 

드라마 <나쁜 녀석들>은 검사장 한 명 바뀐다고 해서 썩을 대로 썩은 검찰 조직 개혁이 쉽게 이뤄지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한 가지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경찰이 수사권을 가지면 된다고 합니다.

 

경찰 수뇌부가 보기에 통제가 안 되는 아주 ‘나쁜 녀석’이 이런 주장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바로 경찰 황운하입니다. 상대가 악이라고 생각하면, 발언 수위가 자기 상사든 대통령이든 거침이 없습니다. 저자는 오랫동안 경찰 수사권 독립 역사와 궤를 같이 한 이 인물을 눈여겨보고 취재했습니다.

 

이 연재는 경찰 황운하(현 울산경찰청장)의 인생을 통해 검경 수사권 조정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서형>

 

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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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황운하가 펼친 거악 척결 행보는 1992년 형사계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태우 정부 시절 '파친코'라고 불리던 불법 슬롯머신 영업이 전국에 만연했다. '파친코 망국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당시 대전역 인근 파출소에 이 지역 호텔 내 오락실 업자가 112 신고로 잡혀 들어왔다. 조사하니 '바지사장'이었다. 황운하는 오락실 지분 정보를 넘기라며 업자를 설득했다. 업자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특수부 검사도 파헤치겠다고 나서다가 날아갔는데 일개 형사계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황운하는 기어이 지분 정보를 얻어냈다. 투자자 명단에는 경찰 고위간부가 있었다. 주변에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수사를 진행하면 경찰로서 앞길이 막힐 게 뻔했다. 황운하는 오히려 담담했다.

 

"조직을 위해서는 저런 사람들이 없어져야 한다. 나는 해야겠다."

 

하지만, 황운하에게 돌아온 것은 수사 지원이 아니라 전보 인사였다. 경찰은 황운하를 청양경찰서 방범과장으로 보냈다. 충남에서 가장 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유명했다. 황운하가 청양경찰서로 발령 나자 오락실 업자가 찾아왔다.

 

“내가 날아간다고 했지 않느냐. 힘을 써서 발령 취소하고 복귀시켜주겠다.”

“경찰 우습게 보지 말고 돌아가시라.”

 


 

4년 뒤 1996년 황운하는 인천서부경찰서 형사과장이 됐다. 경찰서에 여중생 실종사건이 접수됐다. 소재 파악을 시작하자 곧 경기도 파주 용주골에 여중생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국내 최대 규모로 알려진 성매매 집결지였다. 황운하는 직원을 통해 포주에게 '아이를 돌려보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업주는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관례는 파주경찰서로 사건을 넘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운하는 오래전부터 성매매 업자와 관할지 경찰 사이 유착을 의심했다. 황운하는 미성년자 성매매만큼 경찰을 우습게 보는 꼴도 참을 수 없었다. 곧 직원에게 지시가 떨어졌다.

 

"내가 불러 주는 대로 압수수색영장 바로 쳐. 압수수색 사유는 납치돼서 강제로 성매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의심된다고 쓰고 압수수색 대상은 파주 용주골 일원, 번지수 싹 적어라. 전체를!"

 

황운하가 신청한 '포괄 영장'은 발부됐다. 황운하는 새벽에 형사를 비상소집해 인천에서 파주로 향했다. 파주에 도착한 형사들은 바로 영장을 집행했다. 집창촌 상가 문이 잠겼으면 모두 부수고 들어갔다. 성매매자, 포주, 아가씨를 감시하는 삼촌까지 모두 버스에 태웠다.

 

"왜 인천에서 파주까지 와서 데려가냐!"

 

거친 항의가 튀어나오자 황운하는 공중으로 권총을 쐈다. 인천서부경찰서 5층 대강당에서 100여 명이 조사받았다. 이 과정에서 감금당했던 여성은 집으로 돌아갔다.

 

 


 

전남 군산에 있는 집창촌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은 6년 뒤인 2002년이다. 사망자 대부분이 감금당했던 성매매 여성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공분을 샀다. 이는 2004년 3월 '성매매방지법' 제정으로 이어진다.

 

집창촌은 여전히 존재했다. 대전 중구 유천동에 있는 유흥가를 보자. 이곳은 특이하게도 도심 대로변을 끼고 67개 업소가 유흥주점으로 허가받아 몰래 성매매를 했다. 영업 방식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한 번 들어간 여성은 자기 의지로 절대 나올 수 없어 '인생 막장'으로 불리는 곳이다. 업주들은 조직폭력배를 끼고 여성을 협박과 폭력으로 통제했다. 여성을 감금한 방에는 특수키를 설치했다. 당시 이곳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여성을 도왔던 한 활동가 증언이다.

 

"제가 성매매 여성을 구조하는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관계가 경찰이에요. 껄끄럽지만 그렇다고 척지고 살 수 없는 관계, 파트너면서 신뢰하기 어려운 관계였지요."

 

여성단체에 구조 요청이 들어오면 실무자는 경찰과 함께 출동한다. 현장에 도착하면 대부분 가게 문이 닫혀 있었다. 오늘 영업하지 않는다는 업자에게는 여유가 느껴졌다. 어떤 업주는 허가받고 장사하는데 왜 영업을 방해하느냐며 큰소리쳤다. 업주들은 경찰을 우습게 봤다. 여성단체 활동가에게 현장은 법과 공권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그들만의 세계'였다. 여성단체는 해마다 대전중부경찰서, 중구청, 시장,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며 해결책을 요구했다.

 

2008년 황운하가 대전중부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 여성단체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황운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활동가들은 경찰을 향해 불신을 쏟아냈다. '업주와 유착한 경찰', '못 믿을 경찰'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자 황운하가 말했다.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면 대화 못 합니다."

 

황운하는 경찰을 단속에 투입하는 만큼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경찰은 계속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분명했다. 이 상태로는 경찰 자존심을 세울 수 없었다. 단속보다 단속 대상을 아예 없애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황운하는 간부회의에서 집창촌 해체 구상을 밝혔다. 간부들은 일제히 업주에게 역풍을 당한다며 반대했다. 업주들이 유착 경찰관 리스트를 폭로할 것이고, 이는 경찰 위상 약화와 서장 비난으로 이어져 득 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업주들과 유착이 단속을 망설이는 이유라는 게 황운하 자존심을 건드렸다.

 

황운하가 '집결지 해체'를 내세웠지만 주변에서는 불가능한 목표로 봤다. 그런데 그 첫 단계가 공청회라니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황운하는 경찰, 학계, 시민사회, 업주 대표를 한자리에 모았다.

 

특히 단속 대상인 업주를 대화 상대로 앉힌 것이 충격이었다. 여성단체도 바로 반발했다. '선량한 자영업자'라고 주장하는 업주와 한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황운하는 공청회를 강행했고, 대전중부경찰서는 유천동 집결지 해체 종합대책을 곧 발표한다. 공청회 효과는 서서히 드러난다.

 

시민단체도 정책 추진 과정에서 행정기관끼리 협력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적과 성과 때문에 한 기관이 주도하면 다른 기관이 들러리 서기를 꺼렸다.

 

황운하가 유천동 집창촌을 말살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수요를 차단해 영업을 안 되게 하는 것이다. 지하철이나 기차역 전광판에 유천동 일대 단속을 알렸다. 67개 업소가 최근 3개월 동안 발행한 카드전표를 조사해 남성들을 소환했다. 택시 회사에는 유천동 업소에 승객을 내려 준 기사까지 공범으로 처벌하겠다며 압박했다. 이제 행정기관을 동원해 전방위로 압박해야 할 단계였다.

 

대전중부경찰서에서는 소방서, 중구청 등 행정기관이 참여하는 합동회의가 매주 열렸다. 업소를 압박할 수 있는 모든 법이 동원됐다. 소방서는 비상구 계단에 맥주 상자를 쌓아놓은 것도 소방법 위반으로 걸었다. 규격을 따르지 않은 간판은 대부분 위법이었다. 관계 기관 협조를 끌어내려면 여론 형성이 중요했다. 집창촌 해체가 곧 시민 뜻이어야 공권력 행사에도 힘이 붙을 수 있었다. 여론이 형성되면 구청, 소방서, 교육청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청회는 이 같은 여론을 만드는 첫 발판이었다.

 

법조계도 여론 부담을 피할 수 없었다. 악덕 업주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업주는 대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전관 변호사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잘 나가는 변호사는 여론 부담 때문에 업주를 피했다.

 

한 명이 구속되자 다른 업주들은 기가 죽었다. 황운하가 유천동 집결지 해체를 선언하고 3개월 만에 이 지역 상가는 불이 꺼졌다.

 

집창촌 해체는 당시 사회적 요구를 받아들인 흐름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늘 연쇄살인 같은 강력사건을 주목했다. 이런 사건은 당연히 대중적인 관심을 끌었다. 범인을 검거하면 혜택은 뚜렷했다. 일한 만큼 보람도 있는 게 강력사건이다. 경찰서 처지에서 강력사건에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다.

 


 

2010년 송파경찰서장이 된 황운하는 한 사건에 꽂힌다. 언론도 관심 없고, 범인 구속도 어렵고, 일한 만큼 보람도 없는 일이었다. 이른바 '거마대학생 사건'이라는 다단계업 사건이다. '거마대학생'은 다단계업에 빠지면서 월세가 싼 거여동, 마천동 재개발지역에 있는 집에서 합숙하던 지방에서 온 대학생을 의미했다. 당시 거여파출소에는 다단계에 빠진 자녀를 찾아달라는 부모들이 종종 찾아왔다. 이 시기 소장으로 근무했던 분이 전한 내용이다.

 

"부모와 함께 학생들을 찾으면 2명 정도가 잘 만한 좁은 방에서 남녀가 섞여 6명이 칼잠을 자고 있었다. 아침에 강남이나 가락동 쪽에 있는 교육장으로 출근해 밤에 돌아오는데 숙식이 힘들어 공원에서 늦게까지 놀다 보니 소음과 쓰레기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세뇌된 학생들은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10명 가운데 3명 정도만 부모를 따라갔다. 당시 파출소장은 다단계를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했지만 늘었으면 늘었지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송파서장으로 부임한 황운하에게 정보보고가 올라왔다. 송파 관내에 다단계에 빠진 거마대학생이 인생을 망치는데 경찰은 손 놓고 있으며 현황도 파악하지 못한다는 여론이었다. 또 황운하 자존심을 건드렸다. 황운하는 송파에서 다단계를 뿌리 뽑겠다고 다짐했다.

 

방법을 고민했다. 지역에 흩어진 거마대학생을 관리하기는 어려웠다. 효과적인 방법은 다단계 조직을 직접 겨냥하는 것이었다. 5월부터 9월까지 수사가 진행됐다. 지능 3개 팀 8명을 모두 다단계 사건에만 투입했다. 수백 명에 이르는 피해자 진술을 확보했고 여론 형성과 관계 기관 동원도 진행했다.

 

9월이 되자 불법 다단계 주모자 수십 명이 구속됐다. 거여지역 파출소장도 다단계 색출을 체감했다. 언제부터인가 112 신고가 줄었다. 학생들이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사건에 투입됐던 경찰은 이 같은 성과가 황운하 식 '수사 마인드' 덕이라고 평가했다. 수사팀이 사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기능을 동원하면서 외압을 철저하게 막았다고 했다. 황운하와 함께 일한 형사들은 수사 때마다 한 가지 원칙만 요구받는다고 했다. 그 일관된 원칙이 뭘까.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다. 수사권은 수사종결권, 수사지휘권, 영장청구권을 아우른다. 1986년 경찰이 된 황운하는 형사들이 수사 중에 검찰에게 사사건건 묻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자존심 상한 황운하는 형사들에게 늘 강조했다.

 

"결정은 검찰이 하지만 그런 수사지휘 요청을 보내서 왜 경찰 스스로 의사결정 능력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가. 우리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거나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닌가."

 

과장이었던 황운하와 함께 근무했던 한 강력반장은 판례를 뒤지는 등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황운하는 왜 스스로 노력하지 않느냐고 형사들을 귀찮을 정도로 다그쳤다.

 

 


 

2007년 5월 28 경찰 총수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경찰청장 이택순이다. 사건은 2007년 3월 8일 한화그룹 회장인 김승연이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다시 폭행하는 이른바 '보복 폭행'에서 시작한다.

 

사건 발생 후 한화건설 고문이면서 전 경찰청장이었던 최기문은 전방위 로비에 나섰다. 한화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이 벌어진 날 112 신고가 접수돼 남대문경찰서에서 출동하자 최기문은 장희곤 서장에게 전화하여 이에 대한 수사를 막았다. 그러는 사이 이 사건을 서울청 광역수사대에서 수사를 시작하자 최기문은 사건을 자신의 로비가 통하는 남대문경찰서로 이첩시키고자 했다.

 

'한화 보복폭행 사건'이 터지자 경찰 수사 지휘선인 남대문경찰서와 서울지방경찰청 간부들이 직위해제 또는 사법 처리됐다.

 

더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경찰청장인 이택순과 관련성이 도마에 올랐다. 이택순은 사건과 관련해 한화 쪽과 어떤 만남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화증권 고문과 골프를 쳤고 사건 이후 통화한 사실도 드러났다. 경찰 앞에는 '최대 위기', '최대 수치'라는 수식이 붙기 시작했다. 이택순이 선택한 카드는 검찰 수사 의뢰였다. 이 선택은 또 황운하 자존심을 건드린다.

 

'스스로 수사할 수도 없는 기관이 무슨 수사권 독립인가.'

 

경찰도 엄연히 수사기관이다. 경찰청장이 떳떳하면 계좌나 휴대전화 내용 수사를 맡기며 경찰 스스로 밝히려는 의지를 드러내야 했다. 수사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검찰에 넘기면 될 일이다. 총경이었던 황운하는 이택순 퇴진을 주장하면서 나섰다. 경찰청은 복무규율 위반으로 황운하를 징계한다. 경찰청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8월 29일 경찰청 입구에 처음으로 포토라인이 세워졌다.

 

(다음 제3화. 서부지검 이상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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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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