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제10화(최종화) MBC 파업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크 종결자들>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김순재는 사람들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곤 했다.

"지금 자기 집에서 나락 농사짓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논에 나락을 심고 논농사 형상을 유지하면 정부가 직불금을 줍니까? 안 줍니까? 그런데 20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논에다 농사를 지으려고 물을 대면 뭘 냈나요? 수세를 냈지요. 농지위원회에서 물세를 받아갔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잘 살지 못하지요? 왜 그렇지요? 자기 삶이 만족하고 있나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농민은 왜 잘 살지 못할까? 1970년대 농활을 왔던 대학생들은 이 문제로 토론했다. 게을러서 못 산다는 의견도 있었다. 일을 하다가 간식을 먹는 농민을 보고 밥을 많이 먹어서 못 산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구조적 모순에서 원인을 찾는 이도 있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세웠다. '최소 투자와 최대 수익'이라는 핵심전략은 당연히 노동자 희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저임금 정책은 농촌정책까지 연계됐다.

당시 정부가 내건 농촌정책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증산'이다. 농민들은 정부가 정해주는 쌀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벼 품종을 선택했다. 농약과 비료 사용량이 덩달아 많아졌지만 철저하게 자부담이었다. 두 번째는 저곡가 정책이다. 노동자 임금을 높이기보다 쌀 가격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묶어 사회적 불만을 누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증산정책과 저곡가 정책은 농사를 지을수록 생활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1961년 박정희 정부는 농업협동조합법을 만든다. 지역별로 농민 조합원이 공동 대응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자치조직이 생긴다. 바로 농협이다. 각 지역에서 가장 큰 조직으로, 농협은 지역 네트워크로 따지면 최대 규모 민족은행이다.

하지만, 조직적인 네트워크로 농촌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선 것은 바로 농민회다. 1988년에 전국농민회가 조직됐다. 그즈음 대학을 마치고 고향인 경남 창원 동읍으로 돌아온 이가 있었다. 바로 김순재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보며 '대학 졸업해서 왜 여기 와 있지?'라고 생각했다.



김순재는 초창기 농민회에 가입하여 수세 징수 폐지 운동을 벌였다. 2000년 초, 쌀값 보장을 촉구하며 나락 적재 투쟁을 벌였다. 김순재는 창원농민회 사무국장에 이어 경남도연맹 사무처장을 맡았다. 사무처장은 살림을 책임지고 각 조직 사이 연대를 만들어내는 자리다.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국회의원 선산을 파분다고 협박해도 결국 한-칠레 FTA는 2004년 2월 16일, 국회 비준을 받는다. 농민들은 농민 출신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없는 현실에서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절감했다.

 

이는 농민들의 '정치세력화'로 나타났다. 농민회 출신들이 도전장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2004년 17대 총선에서 강기갑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강기갑과 함께 활동했던 김순재는 2010년 2월 농협 창원 동읍 조합장에 당선됐다. 지역 조합장 선거에 도전하여 실질적 모범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명도가 높지 않았다. 게다가 보수적인 동네에서 민주노동당 간판을 달고 현직 조합장을 이기는 게 과연 될지 의문이었다.




지역 헤게모니가 공고한 지역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킹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필요로 했다. 주변에서 김순재 선거운동을 돕겠다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선거운동 중반이 되자 힘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렇게 김순재가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서 상대방은 금품살포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김순재는 이런 불상사를 막으려고 한 가지 묘안을 낸다. 평소에 친하게 지낸 형들에게 농협으로 가서 수천만 원 대출 신청을 하도록 했다. 농협 직원이 물었다.

"왜 이리 많이 대출하십니까?"

"순재가 어디 쓸 건지 모르지만 빌려달라네."

동네에서는 '김순재가 총알을 수억 준비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김순재는 상대가 돈을 쓰면 자신은 더 많이 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게다가 자원봉사자들이 금품살포를 막으려고 '길목 감시조'가 됐다. 선거 나흘 전부터 현직 조합장 선거운동원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차를 대놓고 지켜보고 따라다녔다. 선거에서 표심을 잡는 방법 중 하나인 금품 살포 행위는 포착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인물 선거'로 이어졌다.

 


결국 김순재는 민주노동당 간판을 걸고 8표 차이로 2010년 창원 동읍 농협 조합장으로 당선됐다.

 


 

동읍 농민들 생활에는 당장 변화가 찾아왔다. 벼와 감을 생산하는 농가들이 한층 편해졌다는 게 공통된 여론이었다.

 

벼농사에 기본이 되는 모판 재배와 농약 치기는 농협에 신청만 하면 해결됐다. 벌레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감나무를 코팅하는 재료인 유황합제 제조 또한 농협이 책임졌다. 그간 유황합제 제조는 개인이 석회와 유황을 넣고 끓이다가 조금이라도 몸에 튀면 흉터가 생기는 등 갖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 같은 정책은 농민에게 호응을 얻었다. 창원 동읍 변화는 지역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같은 생활권인 대산면과 북면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동읍과 자기 지역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지역에서 김순재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하지만, 김순재는 조합장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2016년, '농민대통령'이라 불리는 농협중앙회 회장 선거에 도전한다. 현 상황에서 농협중앙회 개혁 없이는 지역 농협 변화에는 한계가 있고, 더 나아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농업협동조합 구조를 살펴보자.

조합원들이 출자하여 각 지역 농협을 세웠다. 그런데 각 지역 농협들이 서울에 있는 정부를 상대하기가 어렵기에, 각 지역농협이 출자하여 자회사인 농협중앙회를 세웠다. 즉, 농협중앙회는 지역농협을 돕고자 만들어진 자회사이며, 2선 조직이다.

그런데 지금 지역 풍경은 2선 조직이 장사하겠다고 1선 조직 구역을 침해한다. 한 길목에 농협은행(중앙)과 각 지역농협이 마주 보고 영업하는 것이다.

 


하지만, 힘이 한 곳으로 집중되면 그것은 선순환 구조 형태를 띠지 못한다. 힘을 가진 쪽이 싹쓸이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점포수에서는 지역 농협 수가 앞선다.

물론, 지역농협과 농협중앙회 관계도 예전과는 많이 변했다고 다들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역방송국보다는 서울방송국을 선호하는 것처럼, 농협도 '이왕이면 농협중앙회가 더 좋겠지'라며 쏠려버리면 지역은 없어진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2016년 1월 12일 농협중앙회장 선거가 다시 간선제 방식으로 치러졌다. 이날 참석한 농협중앙회 대의원과 농협중앙회장 등 선거인 289명의 표 중 김순재는 '5표'를 받았다. 김순재가 도전할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김순재가 과연 바꿀 수 있느냐는 의문을 표했다.

강기갑은 첫 발을 내딛지 않으면 두 번째, 세 번째를 내디딜 수 없다고 말했다. 비가 많이 올 때 가만 놔두면 빗물이 사방으로 흩어지지만 고랑만 살살 긁어주면 그 방향으로 빗물이 흘러가는 원리를 설명했다. 그렇게 빗장만 열어주면 거대한 물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김순재 도전 역시 거대한 물길의 빗장을 여는 첫 발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우리 역사에도 거대한 물결이 있었다. 학자들은 우리 역사에는 가장 위대한 저항운동이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일제강점기 좌익운동이다.

 

(다음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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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2화 심규상 네트워킹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는 대전과 충남 지역을 담당한다. 심 기자가 네트워킹을 활용하는 방법을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을 통해 살펴보자.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홍콩 선적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 호'와 삼성물산 소속 '삼성 1호'가 충돌했다. 유조선 탱크에 있던 원유는 태안 해역으로 유출됐다. 신문웅 <태안신문> 편집국장은 해안에서 검은 기름이 육지를 삼킬 듯 밀려오는 모습을 보고 '절망'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됐다고 했다.

 

정부는 12월 11일 충남 태안군, 보령시, 서천군, 서산시, 홍성군, 당진군(현 당진시) 등 6개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현장에는 각 언론사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오마이뉴스>는 심규상 기자에게 취재팀장을 맡겼다. 심규상은 대전에서 태안으로 가야 했다. 대전~당진 고속도로는 2009년 개통됐다. 2007년 당시 대전에서 태안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거리였다. 심규상 기자는 사건이 발생하고 4개월 동안 태안에 세 번 갔다. 처음은 자원봉사자, 두 번째는 취재 중반 점검, 마지막은 격려 차원이었다.

하지만 당시 기사 생산 수는 <오마이뉴스>가 다른 매체를 압도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심규상 기자는 서산, 태안, 당진, 보령, 홍성 등에 있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활용했다.

각 지역 시민기자는 취재 요청에 헌신적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기 지역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하지만 애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이 있다. 결국 시간과 비용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심 기자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 비결이 궁금해 그에게 '네트워킹'을 주제로 강의를 요청했다. 2012년 겨울이었다.

 

 


이 다섯 단어만 기억하라


심 기자는 자기 삶을 풀어 네트워킹을 5개 단어로 정의했다. 운명, 접속, 관계, 긍정, 공명 등이다. 그는 삶 속에서 네트워킹을 구체화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 운명

심규상 기자는 충북 영동 두메산골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6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이를 맡을 사람이 없어 일을 하지 못하던 아버지가 교장에게 사정해 떠넘기다시피 입학을 밀어붙였다.

중·고등학교는 전라북도 설천면으로 다녔는데 텃새에 시달리곤 했다. 가난한 부모는 담배 수확을 늘려 자식 학비를 마련하고자 했다. 심규상 기자는 1986년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 입학한다. 가난과 학교 생활 모두 그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② 접속

1986년은 양담배를 처음 수입한 해다. 대학생들은 '양담배 수입 개방 저지' 데모를 했다. 부모가 담배를 재배하는 심규상에게 양담배 문제는 곧 학비 문제였다. 데모에 참석한 심규상은 다른 학생에게 물었다.

"담배 농사 몇 단 지어요?"

그 학생 집은 담배를 키우지 않았다. 담배 농가를 대신해 싸운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심규상은 동료들에게 자기가 데모에 참여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심규상은 학생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 급기야 교도소까지 가게 된다.

1990년 노태우 정권은 김영삼·김종필과 함께 민자당을 만든다. 이른바 '3당 합당'이다. 당시 서울에 있는 민자당 중앙당을 점거한 대학생 중에는 심규상도 있었다. 재판 당일 아버지가 서울구치소를 찾아왔다.

"오늘 판사님 앞에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해라. 안 그러면 호적에서 빼낸다."

그날 방청석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법정에서 구호를 외치고 판사에게 대들다가 사지가 들려나가는 막내아들을 봤다. 심규상은 반성문을 쓰지 않아 안동교도소에서 2년 6개월 만에 만기 출소했다. 심규상은 복역 기간 매주 한 통씩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적었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1992년 여름, 부모님은 출소하는 아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심규상은 고향인 충청도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큰절을 올리는 아들을 외면한 채 집 밖으로 나갔다.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밀려들었다. 어머니가 밥상을 내밀었다. 상에는 수육 한 접시가 수북하게 올라 있었다. 무심히 대문 쪽을 바라본 심규상은 조금 전까지 뛰던 개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개를 잡았던 것이다. 심규상은 눈물을 삼키면서 수육을 먹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아들을 이해했다. 심규상 기자는 '접속'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1993년부터 심규상은 재야단체에서 활동한다. 전교조 대전지부, 전교조 충남지부, 전국농민회 충남도연맹 등 30여 개 시민단체를 관리하는 대전충남연합 조직부장을 맡는다. 몇 년 뒤 '접속'은 충남 지역신문으로 이어진다.

 



③ 관계

충청남도에 두루 뻗은 차령산맥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런 지형은 마을 공동체 의식을 키운다. 특히 '리아스식 해안'으로 유명한 태안군은 불가사리 모양 지형이 특색이다. 이곳에서 지역신문은 마을 소식을 접하는 매개체로 유용했다. 이 지역 신문은 대부분 <한겨레> 창간 이후에 생겼다.


<당진시대> <태안신문> <홍성신문> <뉴스서천> <예산무한정보> <충남시사> 등 형편이 제각각인 충남지역 21개 지역신문들은 협회를 꾸렸다. 그리고 1998년 대전에 주재기자를 두기로 결정한다.

대전은 도청·교육청·도의회 등 충남지역 주요 행정기관이 밀집된 곳이다. 하지만 당진, 서천, 태안 등에 있는 지역신문사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대전으로 취재를 오는 것이 물리적으로 버거웠다.

협회는 원하는 취재를 대전에 거주하는 기자에게 부탁해 기사를 공유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협회는 이 같은 고민을 지역 시민단체와 공유하며 적임자를 찾았다. 그렇게 찾아낸 이가 심규상이었다.

심규상은 시민단체 업무가 끝나는 오후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작성한 기사는 21개 신문사에 팩스로 전송했다. 충남도청에 대한 비판 기사는 월요일에 발행하는 지역신문에 먼저 게재됐다. 그런데 같은 기사가 협회에 소속된 신문에 게재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각자 신문 발행주기에 따라 한 번 출고된 기사는 길면 2개월 뒤에도 게재되곤 했다.

공무원들 사이에서 비판 기사가 한 번 게재되기 시작하면 끝날 줄 모른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규상이 출고한 기사 대부분은 다른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이었다. 도지사 지시가 이행되지 않았다거나, 상급기관이 도청에 지적한 문제점 등이 심규상이 주로 다룬 소재였다.

심규상은 기사 쓰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시민단체에서 내는 보도자료를 기사로 작성해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다. '모든 시민은 기자'라고 선언하며 지난 2000년 출범한 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가입해 활동했다.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오마이뉴스>는 성장세를 탔다. 이때 대전참여연대를 비롯한 13개 시민사회단체가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를 창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연합뉴스>가 초창기 했던 것처럼 <오마이뉴스> 안에 '지역판'을 넣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오마이뉴스> 사이트에 '대전충남' 카테고리가 생긴다. 2004년 심규상은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주재기자를 제안받는다.

네트워킹이 없었다면 지역판도 없었다


심규상 혼자 대전, 충남을 모두 취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규상은 시작부터 네트워킹을 짜들어갔다.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취재와 기사 작성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가입하게 한다.

지역신문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중복 게재를 허용하는 <오마이뉴스> 정책은 이럴 때 장점으로 작용한다. 심규상은 주재기자로 활동하면서 풀뿌리 지역신문 기자들과 성심성의껏 소통하며 관계를 형성했다. 이때부터 '연락 체계'를 가동한다.

시·군별로 1·2연락처를 정하고 어떤 사안이 생길 때 제1연락처에게 취재를 부탁하는 형식이다. 1연락처가 사건을 챙길 수 없으면 제2연락처에게 전화한다. 취재 내용은 곧 정보가 됐고 시스템은 자리매김했다.


 

2004년 1월 27일 MBC 은 '친일파는 살아있다'를 방영한다. 사회적으로 과거사 문제가 불거졌다. <뉴스서천> 대표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대표인 양수철에게 한 가지 제보가 들어온다. 충남 예산 충의사 현판을 박정희가 썼다는 내용이었다.

1967년 건립한 충의사 본전에는 윤봉길 의사 영정이 봉안돼 있다. 현판은 박정희가 윤 의사 의거일에 맞춰 1968년 4월 29일에 내걸었다. 양수철은 2005년 3월 1일 새벽, 박정희가 쓴 현판을 직접 철거하기 위해 충의사로 갔다. 그러면서 심규상에게 취재를 부탁했다.

심규상은 현장까지 2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판단했다. 바로 예산지역 제1연락처에게 취재를 맡겼다. 그는 전교조 충남지부 회원이었다. 이날 <오마이뉴스>에 "박정희 친필 더 이상은 못 참아" 삼일절에 세 조각 난 충의사 현판이라는 기사가 게재됐다. 양수철 씨는 실형 6개 월을 선고받았다. 그가 대표로 있던 <뉴스서천>에는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화기를 들면 욕설이 쏟아졌다.

반면 과거사 청산의 일환이라며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사건이 알려진 후 예산군청 홈페이지는 각각 복원과 교체를 주장하는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의견으로 들끓었다. 한 달여 후 예산군은 박정희의 친필을 그대로 복원한 현판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내걸었다.

이 사건을 통해 충남 지역신문은 <오마이뉴스>와 기사 네트워킹이 시너지를 발휘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급한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올리면 댓글을 통해 반응을 보고 다시 보충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사는 객관성을 더욱 갖췄다. 이러한 협업은 2년 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도 빛을 발했다.

이런 네트워킹 구성은 <오마이뉴스> 본사가 요구한 게 아니었다. 심규상은 언론으로 지역을 바꾸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규상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즉 '긍정'과 '공명'이 네트워킹에서 핵심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다음 3화는 최병성 네트워킹입니다.)

 

 

※ 2016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글입니다.

 


 

서형작가 다른 연재물 ☞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서형작가 다른 연재물 ☞ 풍운아 황운하

 

서형작가 다른 연재물 ☞ 구겨진 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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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1화 나의 네트워킹

 

 

한 출판사에 초대받아 직원들과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출판사는 '나는 왜 진보(보수)가 되었나'를 주제로 인터뷰한 내용을 엮어 책을 내고자 했다. 내부 회의에서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 수 있는 작가로 내가 거론됐나 보다. 고마운 평가였다.

 

또 진보와 보수는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눠 생각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관심 밖이 됐다. 대신 그 자리를 '네트워킹'이라는 주제가 채웠다.

사회 구성원은 누구나 네트워킹을 한다. 돈을 빌리고, 어울려 놀고, 일을 맡기고 모두 네트워킹이다. 시민단체가 정부를 상대로 현안에 대한 연대 성명을 내는 것도 이른바 '사회적 네트워킹'이다.


내 첫 작품인 <부러진 화살>은 2007년 1월 발생한 '석궁 사건'이 배경이다. 당시 이 사건이 터지자 인권운동사랑방, 구속노동자후원회, 교수노동조합 등 단체들이 모였다. 이후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 단체들은 모였다.

이들을 지켜보면서 생긴 의문은 '확장성'이었다.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같은 소셜네트워크 (Social Network Service) 기반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확장성을 보장한다. 이런 네트워킹 기반은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운동이 확장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이는 기술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문제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어느 순간 네트워킹을 한정하는 게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매트릭스> 주인공 네오처럼 삶에서 불쑥 의문은 들지만 우리가 얼마나 갇혀서 생각하는지는 스스로 알 길이 없다. 네오도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을 삼키고서야 진실을 마주하게 됐다. 나는 이 글이 독자에게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석궁 사건'의 숨겨진 이야기

▲ 1인 시위 중인 강내희 교수

 

이야기는 네트워킹에 눈을 뜨게 된 경험부터 시작한다. 2008년 6월 석궁 사건 항소심이 기각되자 원고 쪽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당시 민교협 원로였던 김세균 교수는 선고하는 날까지 대법원 앞에서 교수들이 릴레이 1인 시위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점심때 한 시간 정도 피켓을 들다가 가는 일이었지만, 먼 지역에 있는 교수에게는 하루를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잘 이어지던 1인 시위는 17일째에 고비를 맞는다.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로 모든 이슈가 몰리던 때였다. 시위에 동참할 교수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울지역 교수 1000명에게 연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교수 두 명에게 답장을 받았다.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답변을 읽고 생각했다. 이런 고민은 처음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제안할 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바로 동참할까?'

특정 사안에 대한 관심이 높다면 동참이 쉬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모든 분야에 관심을 두지 못한다. 답은 김세균 교수에게 있었다. 당시 17일 동안 시위를 끌고 온 것은 김세균 교수 인맥이었다.

1인 시위가 이어지는 동안 매일 시위에 나선 교수와 얘기를 했는데 정작 '석궁 사건' 당사자인 김명호 교수와 친한 사람은 없었다. 평소 존경하는 김세균 교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세균 교수(왼쪽)

이처럼 상대가 나를 좋아하면 연대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음 고민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것인지로 넘어갔다. 경청, 존중, 이해 같은 덕목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사람들을 만나는 태도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석궁 사건'을 거치면서 깨달은 것은 이 정도다.

 



'석궁 사건'을 계기로 2009년 서민들이 벌이는 소송 전쟁으로 관심사가 넘어갔다. 이는 두 번째 작품 <법과 싸우는 사람들> 배경이 됐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이 주제에 매달렸는데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당시 취재원은 임정자(1943년생)씨다. 힘은 없지만 신념 하나는 강한 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은 현실에서 파멸로 향하는 기차였다. 힘없는 그녀가 강하게 부딪히는 상대는 현실에서 힘을 쥔 사람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A는 법을 어겨도 검찰에 가면 벌금 백만 원에 그쳤고, 그걸 또 정식재판청구를 하여 법원에 가면 무죄를 받았다. 그 판결문을 다시 지상파 뉴스가 받아주며 A의 기세를 높였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시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검찰이 항소한 상태였다. 나는 언론사를 찾아다녔는데, 기사 거리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언론은 서울대 출신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범한 억울한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론과 연대는 기대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확인한 네트워킹의 위력

이 상황에서 법원에 제대로 된 판결을 해달라는 신호를 보낼 방법은 뭘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터 5부까지 부장검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말도 안 되는 사안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검사님! 부패검사의 실력을 보여줍시다'라고 썼다.

그랬더니 검찰이 반응을 했다. A의 항소심에 내가 보낸 편지를 추송서(재판과 관련된 일체의 추가 서류)로 제출한 것이다.

 


내가 검찰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검찰은 이를 추송서로 법원에 넘겼다.

 

 

 


결국 A는 항소심에서 50만 원 벌금형을 받았다.

세상에 '악의 축'은 없었다. 사안에 따라서 누구와도 네트워킹이 가능했다. 그걸 더욱 절감하게 된 계기가 영화 <부러진 화살>이다. 당시 저작권 문제로 나는 마음 고생이 심했다.

사법부를 비판하는 영화인데, 영화사와 갈등을 못 풀어 이 문제를 법원으로 끌고 간다면 나는 대중에게 욕먹게 돼 있었다. 밤새 고민하다가 법조계 관련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미 책 <부러진 화살>을 읽어본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유리한 답변을 했는데, 그들 중에는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판사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답변을 모아서 영화사에 보냈다.

 



2011년에는 다른 일도 많았다. 2011년 6월 <법과 싸우는 사람들> 주인공 임정자씨가 법정 구속됐다. 신념 하나로 살아온 그는 재판장 앞에서도 절대 굽히지 않았다. 무거운 형량이 선고됐다.

당시 임씨는 사선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인은 구치소 접견에서 임 씨 신념을 이해해줬지만, 임씨는 그를 해임했다. 왜 그랬을까? 막상 변호인이 쓴 항소이유서 내용이 딴 판이었기 때문이다. 항소이유서에는 임정자 씨가 구치소 내에서 반성하고 있고,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 가득했다. 사법피해자 경험을 들으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실 대다수 사람은 감형을 받으려면 선처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을까? 나는 당시 임정자씨가 신념을 지키면서 집행유예로 나올 방법을 고민했다. 통상 법원은 여론에 민감하다고 한다. 그래서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언론인들 탄원서를 모아서 왕창 집어넣었다.


탄원서 내용에는 '잘못했다'는 구절이 들어 있지 않았다. 연로한 사람을 감옥에 두는 건 가혹하니 다른 방안을 강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임정자 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2012년 여름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몹시 지쳤다. 약 5년간 피해자들만 만나다 보니, 더는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 해 동안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서 대한민국 네트워킹 대가들을 만나게 된다. 우선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주재 기자인 심규상을 소개한다.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다음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  2016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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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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