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2012년은 선거가 많았다. 4월 11일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 12월 19일 대선을 앞두고 있었다.

 

선거 기간에는 현수막 훼손이나 선거운동 방해 같은 일로 고소나 고발이 잦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과는 선거 관련 사건 수사를 총괄한다. 당시 경찰청 지능범죄수사과장(현 수사과장)은 총경 김헌기다.

 

대선 일주일 전 '국정원 댓글 사건'이 터졌다. 사건 발생 초기에는 사안이 급박해 김헌기 과장이 수사를 지휘했다. 그는 곧 국장에게 건의했다.

 

"국장님, 신고 내용이 인터넷 댓글을 단다는 것입니다. 단체로, 댓글부대가 댓글을 단다는 것입니다. 사이버 선거운동 아닙니까? 이것은 사이버 쪽 업무지 저희 업무가 아닙니다. 우리가 초기에 출동해 어쩔 수 없이 했지만 이제부터 전문성 있는 사이버에서 사건 업무를 전부 맡아서 해야 합니다."

 

그러자 담당 과장이 자기들 업무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국장도 김헌기 과장이 맡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사안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누구 업무를 따지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김헌기 과장은 국장에게 다시 건의했다.

 

"좋습니다. 그럼 수사를 하다가 댓글이 나오면 이건 사이버에서 해야 합니다."

 

12월 13일 서울지방경찰청 증거분석팀은 김 씨 노트북 등을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댓글이 나왔다. 김헌기 과장은 다시 국장에게 건의했다.

 

"댓글 나왔으니까 사이버가 맡으십시오."

 

그러자 담당 과장이 엉뚱한 얘기를 했다.

 

"지금까지 지능에서 다 했는데 일관성 있게 다 하셔야지요."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서울청은 여론과 검찰에 초토화됐다. 경찰청 댓글 수사 업무 담당자는 2013년 국회 국정조사와 안전행정위원회에 불려 다니며 면박을 당했다. 당시 이성한 경찰청장은 국회의원들에게 '이상한' 청장으로 불리는 수모도 당했다.

 

경찰 간부들이 검찰이 제시한 분석실 CCTV가 사실과 다르다며 열심히 설명했지만 야당(민주당) 의원들로부터 검찰 수사 결과에 반항한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해 말, 고위직 인사가 진행됐다. 동기생 강신명은 치안정감인 서울지방청장으로 갔다. 강신명은 서울청 경무부장과 대통령실 치안비서관실 코스를 밟아서 승진이 빨랐다. 동기생 송무빈은 그해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김헌기는 2014년 1월 경찰청 강력범죄수사과장(현재 형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력범죄, 폭력, 마약, 조직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정부는 사건 원인으로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을 지목했다. 4월 20일 유병언 검거를 위한 인천지검 특별수사팀이 구성됐고 경찰청에 검거 협조공문이 온다. 그러면 이 공문을 담당부서가 접수해 처리해야 한다. 당시 유병언 죄명은 '업무상 횡령'이다. 보통 특수부에서 온 업무상 횡령 범죄는 지능범죄과장이 담당한다. 하지만 정작 지능범죄수사과장 다른 얘기를 했다.

 

"검거 관련은 형사과지요."

 

김헌기는 국장 앞인데도 정색을 하고 언성을 높였다.

 

"이 사람아!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죄명 별로 협조해야지. 너희들이 해야지 왜 형사과에 미루려고 해? 이건 검찰 강력부가 아니잖아. 검찰 특수부야! 그리고 죄명도 업무상 횡령! 그런데 왜 우리 형사에서 해?"

 

순간 회의실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이후 회의마다 지능범죄과장은 국장에게 유병언 추적 관련 보고를 했다. 국장은 그때마다 김헌기 형사과장을 계속 쳐다봤다. 눈빛이 보내는 의미는 하나였다. 결국 김헌기는 국장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유병언 검거는 실패했다. 6월 12일 전남 송치재 휴게소에서 2.5km 떨어진 매실밭에서 변사체가 발견된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이 심하게 부패한 상태였다. 그는 유병언이었다.

 

최재경 인천지검장에 이어 이성한 경찰청장까지 부실 수사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박근혜 정권은 이성한 청장 후임으로 강신명을 임명했다.


 

 

그 해 송무빈은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본부장으로 발령 났다. 2016년부터는 서울지방경찰청 경비부장을 맡았다. 서울청 경비부장은 그래서 1~2년 내로 승진이 보장되는 자리였다. 노동 강도가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2015년은 세월호 1주년 추모 집회부터 연말까지 집회가 끊이지 않았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까지는 탄핵 관련 촛불집회 관리를 했다. 다시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19대 대선 경호·경비 등을 송무빈 경비부장이 담당했다.

 

당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조국 서울대 교수는 4년 전 문재인 후보가 집권했다면 나라가 이렇게 됐겠느냐며 유세를 펼쳤다.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송무빈 업무성과는 계속해서 최우수(S) 등급이었다. 그 사이 경찰청장은 강신명에서 이철성, 그리고 민갑룡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승진 소식은 없었다.

 

2018년 4월 송무빈은 업무 과로로 한쪽 귀가 아프기 시작했다. 송무빈 부장은 민갑룡 청장에게 승진시켜줄 게 아니면 다른 보직으로 보내달라고 말했다. 요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치안감 승진에서도 제외됐다.

 

송무빈 부장은 11월 29일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청와대가 치안감 승진에 밀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자신에게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백남기 농민 사태' 책임을 물었다고 주장했다. 송무빈 부장은 기자회견 직후 사의를 밝혔다.

 

물론 김헌기도 치안감으로 승진하지 못했다. 어떤 조직에서든 누구든 자기에게 불똥이 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대부분 그런 상황을 피하려 애쓰며 그러는 게 현명하다. 얽히는 게 없으면 인사에 불이익을 당할 일도 없다.

 

왜 김헌기에게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는 일을 피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짧게 말했다. 남은 경찰 인생도 충실히 채워서 명예롭게 퇴직을 하겠다고 밝혔다.

 

김헌기 경찰 인생은 경찰 지능수사 그 자체다.  그러나 2015년 경찰청 수사기획관 이후로 김헌기 보직은 수사를 자주 접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경찰 입직 후 지능수사에 다가가기도 순탄치 않았다.

 


 

어릴 적 순경이던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가족도 전국 각지를 떠돌았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살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979년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경찰대가 생긴다더라. 너는 무조건 경찰대를 들어가라."

 

김헌기는 1982년 경찰대 2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경찰대는 군사학교 같았다. 1기 선배들이 주는 단체기합은 고단함을 더했다. 부모님을 생각하며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경찰대를 졸업하면 군 복무 대신 기동대 생활을 했다. 집회 현장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민과 마주한 채 날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시민에게 욕먹을 때마다 경찰대를 왜 입학했나 자괴감이 들었다.

 

 

경찰대 출신은 경위에서 시작한다. 김헌기는 경감이 돼서도 경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침 8시에 출근해 하루 12시간 대기하는 게 일상이었다. 아무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아 갈등이 많았다.

 

 

1993년 4월 구로경찰서 방범계장으로 발령받았다.

 

방범계장은 지금은 생활안전계장에 해당한다. 주 업무는 순찰을 돌며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다. 구로는 광명과 부천 경계로 강남순환도로와 내부순환도로가 지나간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 탓에 도둑과 강도가 들끓었다. 순찰로 범죄를 예방할 수는 없었다. 가장 좋은 범죄 예방법은 형사계가 도둑과 절도를 잡는 것이다. 하지만, 서장은 김헌기를 무조건 질책했다.

 

이듬해 서장이 바뀌었다. 김헌기는 새로운 서장에게 고충을 털어놨다. 경찰대학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근무 이력을 나열하며 경비와 생활안전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저는 정말 수사를 하고 싶습니다. 서장님 저를 수사부서에 보내주십시오."

 

"너는 무조건 한 우물만 파! 경비만 계속 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이무영 경찰청장은 경찰 수사역량을 높일 목적으로 조사간부제도를 기획했다. 경찰서에 고소·고발·진정·탄원 형태로 피해 내용이 접수되면 경제팀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불러 신문조서를 만든다. 수사는 조서를 만드는 능력이 기본이다. 상대 진술을 듣고 진술을 종합하는 능력, 증거를 수집하는 능력 그리고 결론을 내기까지 상당한 수사역량이 필요하다.

 

1994년 3월부터 젊은 간부를 대상으로 조사계(현 경제팀) 수사관 교육이 진행된다는 공문이 각 경찰서에 하달됐다. 그렇게 육성한 간부를 방배·서초·강남·송파·강동 등 강남권에 배치하는 게 목적이었다. 김헌기는 무조건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김헌기가 경제팀 수사관 교육을 신청했다는 소식에 서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너에게 무조건 한 우물을 파라고 했는데 넌 왜 안절부절못해서 경력도 없는 놈이 교육 신청한다고 되겠어!"

 

얼마 후 김헌기는 희망대로 수사연수원으로 교육발령이 났다. 그는 서장 면박을 곱씹으며 각오를 다졌다.

 

김헌기는 1994년 7월 서초경찰서 조사계장으로 발령 났다. 김헌기 밑에 조사계 직원은 40명이었다. 이 가운데 절반이 교육을 함께 받은 경찰대 후배였다. 그중에 W가 있었다. 조사계장은 사건 배당과 결재를 맡았다. 김헌기는 결재하기 전에 모든 기록을 읽었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노란 포스트잇에 적어 기록에 붙였다.

 

서초경찰서는 1994년 9월 지존파 일당 검거,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 등으로 떠들썩했지만 조사계 직원들은 기록에 파묻힌 채 치열하게 세월을 보냈다. 김헌기는 그렇게 태풍 중심에서 4년을 보냈다.

 

1998년 경정으로 승진을 하여 2003년 인천지방경찰청 수사2계장이 됐다. 오늘날 지능범죄수사대장에 해당되며 인지·기획수사를 하는 곳이다. 원인까지 따져 뿌리 채 뽑는 수사, 몸통을 찾는 수사를 한다.

 

그동안 수사2계장이 되고자 경찰청 로비에 수없이 드나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을 희망자를 생각하면 김헌기에게 큰 기회다.

 

그때부터 총경 승진 전까지 5년 6개월 동안 수사2계장으로 활약했다.

 

김헌기는 처음에 2개 반을 운영했다. 총직원은 10명이다. 수사2계 수사관들은 그 지역에서 나름 베테랑들이다. 이런 수사2계 직원들과 호흡을 맞춘 결과 수사2계가 빛을 발하자 부임하는 인천지방경찰청장들은 임시편제로 정원을 확대했다. 4개 반에 직원은 20명까지 늘어났다. P도 수사2계로 발탁됐다. 수사2계 사무실은 바로 옆에 있는 강력계 공간 벽을 밀어내면서 확장됐다.

 

(다음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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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풍운아 황운하 마지막 화. 백 한 번째 프로포즈

 

1983년 경찰대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황운하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입실 시각은 오후 6시. 친구들과 헤어진 황운하는 6시가 약간 지나 학교에 도착했다. 황운하를 부른 지도관은 흡연과 음주 여부도 확인했다. 황운하는 모두 인정했다. 오히려 당황한 지도관이 되물었다.

 

“왜 이렇게 다 인정하느냐?”

“거짓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술·담배를 하다 적발된 경찰대 학생에게는 퇴교조치가 내려졌다. 황운하는 그를 아낀 한 교수 덕에 구제받을 수 있었다. 황운하는 경찰대 생활에 몰입이 어려웠다. 스스로 자신이 경찰 조직에 있어야 할 동기를 찾아야 했다. 졸업 즈음 자신이 경찰에 있어야 할 이유로 찾은 게 경찰 조직 숙원 해결이었다. 그중 하나가 수사권 독립이다. 이 정도 구조 변화를 꾀하려면 형사소송법 체제를 바꿔야 한다.

 

황운하는 경찰 조직에서 경정 직급인 형사과장 시절, 형사들에게 수사국장이 되어 이러한 큰 틀을 바꾸는데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경정에서 총경, 그리고 경무관을 거쳐서 치안감으로 승진해야 수사국장이라는 보직을 받을 수 있다.

 


 

황운하에게 2002년 총경 승진 기회가 찾아온다. 2001년 한 경찰대 동기가 서울청 홍보계장을 지냈다. 총경 승진 1순위라 인기가 많은 보직이었다. 그 동기는 총경으로 승진하면서 자기 후임으로 황운하를 추천했다. 당시 동기는 두터운 경찰청장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황운하를 밀어주는 것은 가능했다.

 

황운하는 이렇게 거절했다.

 

"기자들 상대는 체질에도 안 맞고, 일선 형사과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만약 황운하가 서울청 홍보계장으로 갔다면 2002년에 총경 승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운하는 일선 형사과장을 택했다. 그리고 2004년 강남서 형사과장 시절 경찰 수뇌부에 찍혀 직위해제를 당했다. 집에서 놀다가 소청심사로 강동서 생활안전과장으로 복직됐다.

 

주변에서는 황운하 총경 승진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우선 승진 가능성이 높은 보직이 아니었다. 심사 기준에는 근무 기간도 포함된다. 황운하가 복직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그 짧은 기간을 가지고 심사받아 승진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그 경찰대 동기는 집에서 놀고 있는 황운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지금 최기문 청장하고 있어. 너는 모르는 채 하고 여기로 와. 그럼 내가 인사시킬 테니까 여기 와.”

 

물론 황운하는 가지 않았다. 그 시절에 황운하를 챙겨준 동기생은 그 친구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 박종희는 경찰청장 최기문에게 황운하 직위해제 문제를 따진다. 언론사와 갈등을 해소하려는 무리한 징계라고 지적했다.

 

경찰청장이 국정감사 지적을 받는 상황에서 최기문 청장이 황운하에게 호의적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한 참모가 경찰청장에게 “황운하를 승진 안 시키면 경찰 역사에 두고두고 오점을 남기는 경찰청장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황운하는 총경 승진 후, 2005년 수사구조개혁팀장을 맡으면서, 수사권 독립은 '수사 구조'를 개혁하는 시도라는 걸 알리고자 했다. 지금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사람들은 지금 구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눈앞에 제시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검찰이 부패하다고요? 경찰도 부패하잖아요. 검찰이 부당한 지시를 하듯 경찰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릴 수도 있잖아요.”

 

그걸 보여주는 사건은 언제나 존재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2006년 한화그룹 회장 보복폭행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수사권 독립 토대로 삼으려 했다. 경찰이 재벌 회장을 구속한 첫 사례였고 마무리도 깔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후 늑장수사와 은폐 의혹으로 이런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남대문서장이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될 때까지 현장에 나간 형사들을 철수해 수사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대문서장이 수사를 지연시킨 것은 눈앞에 명백히 드러난 상황이다. 현장에 나간 형사들을 철수해 수사를 막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사가 수사를 지휘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다.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에 앞서 문제점을 먼저 드러내야 한다면 검찰 권력 독점은 바꾸기 어렵다. 애초에 오류를 드러낼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를 바꾸고자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섰던 이는 조현오 청장이었다. 2009년 서울지방경찰청장이던 조현오는 황운하에게 서울청 형사과장 자리를 제안한다.

 

조현오 청장은 ‘조파면’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내부 비리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조현오 생각은 이랬다. “경찰 부패를 도려내면 국민이 경찰을 지지할 것이고 그런 여론을 바탕으로 수사권을 가져올 거야.”

 

조현오 청장이 업주 접촉 지시를 어긴 직원을 숙청하듯 날려버려도, 경찰은 ‘비리 경찰’ 이미지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이경백 사건이 단적인 예였다.

 

2010년 6월 황운하가 구속한 이경백은 곧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경백은 1심 판결 전까지 자신과 유착한 경찰을 불지 않았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자신과 유착된 경찰을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경백은 2012년 7월 17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

 

서울 중앙지검 강력부는 2012년 3월 말부터 이경백과 유착한 현직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18명이 옷을 벗었다. ‘이경백 부실 수사’ 여론이 일자 조현오 경찰청장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반면, 조현오는 경찰청장 시절에 ‘황운하를 승진시킨 것’을 가장 잘 한 일로 여긴다고 했다.

 

조현오는 2011년 말 황운하를 경무관으로 승진시킬 때 청와대 민정수석이 강하게 반대했다고 했다.

 

통상 경찰 고위직 인사는 청와대 정무수석과 비서실장, 민정수석, 인사비서관과 경찰청장이 논의한다. 민정수석은 승진자 적격 여부를 검증한다. 보통 민정수석은 검찰과 접촉이 잦아 검찰 출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그래서 경찰은 검찰 눈 밖에 나면 승진하기 어렵다.

 

황운하가 승진하려면 배짱 두둑한 상사가 받쳐 줘야 했다. 황운하는 2011년 경무관으로 승진했고 수사기획관이 됐다. 2002년부터 황운하가 힘들 때 도와주려 했던 경찰대 동기 친구는 앞서 2009년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2011년 베이징 주재관을 지냈다.

 

수사기획관 황운하가 범죄정보과에게 받았던 첫 보고는 베이징 주재관, 즉 경찰대 동기생이 저지른 범죄행각이었다. 2012년 3월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경무관 박병국에 대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옛 고마웠던 생각들이, 괴로움으로 번졌을 황운하 고통은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물러난 후, 황운하를 과감하게 기용한 상사는 없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과거 황운하가 수사했던 사건에 관계된 검사 일부가 박근혜 정권 핵심으로 포진됐다. 황운하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승진과는 더욱 멀어졌다.

 


 

2016년 황운하는 경찰대학교 교수부장이 됐다. 황운하가 경찰 생활을 시작한 지 29년째인 해이자, 경무관 5년 차였다. 경찰은 계급정년 제도가 있다. 승진을 못하면 경무관은 6년 차에 경찰 조직을 떠나야 한다. 황운하는 박근혜 정권과 경찰 인사에 대한 강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내 역할을 해야 경찰로서 존재해온 살아온 이유와 명분이 있는 것인데, 만약에 내 잘못으로 치안감 승진에서 밀려난다면 오케이지만. 우병우 민정수석이 훼방 놓고, 정치권 실세들이 치안감 자리를 땅따먹기 하듯이 하니까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 내가 그런 걸 바꿔보려고 살아왔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치안감으로 승진이 안 되니까 승질이 나지.”

 

치안감으로 승진이 되지 않아 불만을 쏟아낸다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 고위직에 있는 경찰대 후배는 그가 박근혜 정권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모습에 탄복했다.

 

"운하 형 대단해. 털어서 먼지 안 나나 봐.”

 

아직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조직에서 나가라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또한, 다가오는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운하는 2016년 4월, 경찰대학교로 출근하면서,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어 본 소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25년 전, 나도 경감 초임 시절에 경찰 선배들에게 도대체 뭐하느라 이렇게 형편없는 경찰 조직을 만들었냐며 당돌하게 따진 적이 있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은 경찰 조직에서 지금껏 실제로 별 이루어놓은 것이 없이 벌써 퇴직할 시점이 다가왔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럽다. 무엇보다도 앞으로도 별 이루어놓을 자신이 없는 것이 또 부끄럽고 또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내게 주어진 어쩌면 마지막 미션일 수도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나마 마음의 무거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를 비롯한 선배들의 실패사례를 후배들은 반복하지 않도록 올바르게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을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공격을 내가 받는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부끄럽다면 적어도 나보다 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을 것이지만 그대로 난 몹시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걸 아는 사람은 덜 부끄럽다지만 그대로 난 몹시 부끄러웠다." (출처 황운하 블로그. 2016년 4월 25일 쓴 ‘경찰대학에 출근하다’ 글 중에서)

 


 

에필로그

 

2017년 연말은 황운하 경찰 퇴직 예상 시점이었다. 그런 경우, 누구나 평생 몸 담았던 경찰 생활을 담은 자서전 한 권 정도는 소장하고 싶기 마련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게 될 황운하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서 필자가 써주고 싶다고 자청했다.

 

취재는 2016년 여름에 시작했다. 2016년 경찰 조직 내 황운하 관련 취재는 어려웠다. 황운하가 박근혜 정부와 경찰 수뇌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인사를 앞둔 고위직들은 그와 가깝다는 인상이 줄까 봐 취재를 꺼려했다. (바쁜 시간 쪼개서 취재에 응해준 분들께는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017년 초, 황운하는 수사구조개혁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무관 6년 차 임기를 그렇게 보냈다. 수사권 독립을 위해 멀리서 손 놓고 있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그 뒤로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2016년 연말,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열렸고 이듬해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황운하는 치안감으로 승진하여 울산지방청장으로 부임했다.

 

경력 30년 경찰 황운하가 경찰 조직 발전에 얼마나 보탬이 됐을까? 확신하기 어렵다. 그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호소력을 갖는다면, 그것은 수사권이라는 주제 안에서 보이는 통렬한 일관성 덕분일 것이다.

 

나 또한 황운하를 겪은 지금, 그가 한국사회에 끊임없이 던져온 '경찰 수사권 독립'이라는 프로포즈를 다시 장기적 과제로 밀어내며, 외면하는 주장을 하지는 못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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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조현오 전 청장(이하 호칭 생략)은 차명계좌 발언으로 많은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겼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소 후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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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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