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3화 최병성 목사

 


심규상 기자가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마지막 두 단어는 긍정과 공명이다. 공명은 강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퍼지는 현상이다. 관계에서 공명은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 사람과 함께하려는 것을 말한다.

긍정적인 요소가 공명을 일으킨다는 주장은 심규상 기자만 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칭찬, 유머, 희망 같은 긍정적인 요소를 지역에 투영하고자 노력하는 대표적인 지역신문이 <원주투데이>다.

특히 <원주투데이>가 진행한 '1004 운동'은 인상적이다. 원주시는 '모든 시민이 천사'라는 전제로 1004원 기부 운동을 펼친다. <원주투데이>는 기부자 명단은 매주 신문 광고란에 공개한다. 1004 운동은 기부가 주는 즐거움을 깨닫게 하는 선순환 구조로 유지된다.

 


심규상 기자가 대전·충남지역 시민기자를 움직이는 힘도 여기서 나왔다. <오마이뉴스>는 시민기자들이 자신의 사는 이야기를 뉴스로 송고할 수 있다. 심규상 기자는 결혼기념일 내용이면 전화로 축하했고, 누가 아프다면 위로했다. 관계 속에서 힘을 북돋우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박대용 <뉴스타파> 기자도 긍정과 공명 현상을 잘 이해한다. 박대용 기자는 SNS를 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느끼는 촉이 생겼다고 했다. 사람들은 좋은 정보나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내용을 제공하니 구독자가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심규상 기자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노력이 결과적으로 나를 위하는 것이며 집단으로 보면 '공익 추구'라고 했다. 하부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중앙집권적 사회구조 속에서 심규상이 제시하는 네트워킹은 특별하다. 예를 들어보자.

 


2012년 12월 대전에 있던 충남도청이 내포 신도시로 옮겨졌다. 새 청사가 생기면서 기자실이 도마에 올랐다. 일부 언론사 출입기자들이 기자실 독점을 선언했다. 심규상 기자는 다시 네트워킹을 가동한다.

우선 <오마이뉴스>에 이 문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올린다. "충남도청 새 청사 기자실은 독점-폐쇄형", "볼썽사나운 세종시청 기자실 자리다툼"이 게재됐다. 충남 지역신문도 이 기사를 그대로 게재하면서 연대했다.

충남 지역언론은 달마다 간담회를 하거나 하반기에 연수모임을 한다. 이때 심규상 기자도 모임에 참석해 고민을 듣는다. 서로에게 에너지를 꾸준히 보내는 노력은 결국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심규상 기자가 가동하는 네트워킹은 에너지를 자기중심으로 빨아들이는 게 아니다. 주변부를 강화하는 방식이다.

 



이는 MB 정부 시절 4대강 투쟁에서도 빛을 발했다.

최병성과 친구들, 네트워킹으로 4대강 사업 저격하다

 


최병성 목사는 4대강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친 블로거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유명하다. 4대강 사업은 전국에 걸친 문제였기에 투쟁을 함께 할 연결망이 필요했다.

최병성 목사는 그 연결망을 통해 자료를 입수했다. 그중 하나가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이 1983년 4월 연천군에 댐 건설 허가를 신청하면서 댐으로 인한 홍수 피해를 모두 책임지겠다고 쓴 각서다.

하지만 연천댐은 1996년 7월 31일, 경기 북부지역 폭우로 한 차례 무너졌고, 1999년 8월에 다시 붕괴된 후, 결국 철거됐다. 당시 지역주민들은 이 각서를 근거로, 현대건설로부터 보상을 받고자 했으나, 현대건설 측은 홍수 피해가 천재지변이라 주장하고 나섰다.

이 각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4대강 건설을 한다'는 명목을 비판하기 적절한 자료였다. 강에 모아둔 많은 물이 오히려 거대한 물폭탄이 되어 4대강 지역에 홍수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관련기사: '이명박 사장' 각서 쓴 연천댐도 2번 붕괴 4대강 사업 강행하면 더 큰 "물폭탄 재앙") 이 자료는 경기도 연천지역언론인 <연천닷컴>에서 제공했다.


최병성 목사는 연결망을 조직화 하는 과정에서 아쉬운 점을 발견한다.

"지금은 감각적인 시대잖아요. 아름다운 강이 파괴되는 현장을 사진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사람들이 사진을 찍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단체도 있었다. 최병성 목사는 먼저 부산지역 환경단체인 '습지와 새들의 친구'를 꼽았다. 이 단체 회원들은 2010년부터 패러글라이딩을 타며 공중에서 사진을 찍었다. <시사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 매체에서 4대강 사업을 비판하고자 낸 사진 대부분은 이 단체에서 제공했다. 2010년 금호강과 낙동강 합류지에 내려온 검은 흙탕물 사진, 2012년 강에 녹조가 퍼진 사진 등이 모두 이 단체 작품이다.


최병성 목사는 '습지와 새들의 친구'가 보인 열정을 높게 평가했다.

"낙동강 하구 새들을 관찰한 경험 덕에 생명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있어요. 그래서 분노했고 이 분노를 제대로 드러내는 방법을 찾으려는 열정이 있지요."

이와 더불어 최병성 목사는 정수근 대구환경연합 사무국장과 충남 공주에 있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김종술을 열정 있는 활동가로 꼽았다. 어떤 요소들이 이들을 4대강 사업 문제에 매달리게 만들었나? 부산, 대구, 공주 이 지역에서 네트워킹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 부분을 짚어보자.

 

 


 


최병성 네트워크의 핵심, 카메라

 

▲ 탐조 활동 중인 습지와 새들의 친구

도로를 닦는 토건사업 대부분은 관급공사다. 관급공사는 현금 확보에 가장 유리한 사업이다. 그리고 관급공사 인·허가권은 대부분 시·군 자치단체장 몫이다. 대구 MBC는 2004년 신년 보도특집 '도로 공화국'에서 재원 배분이 항만이나 철도가 아닌 도로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현실을 드러낸 바 있다. 이런 개발을 가장 비판하는 목소리는 환경단체에서 나왔다.

1993년 부산에서는 낙동강 하구를 가로지르는 을숙도대교 사업이 추진됐다. 사업이 발표되자 환경단체들이 반발했다. 하굿둑이나 낙동강대교가 있는데 굳이 자연을 파괴하면서 을숙도대교를 건설할 이유가 없다고 맞섰다.

이 과정에서 환경단체들은 개발논리에 맞서려면 더 치밀한 연구·조사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2000년 결성된 '습지와 새들의 친구'는 그런 고민이 낳은 단체였다. 2002년부터 이들은 매월 낙동강 하구를 탐사하며 철새 사진을 찍었다.

식생 변화나 지형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사진이었다. 이 같은 활동 경력은 4대강 사업 반대 활동에서도 빛을 발한다.

'습지와 새들의 친구' 결성 배경은 부산지역 난개발이었다. 부산과 가까운 경남 양산시는 2003년 3월 스님 지율이 단식 투쟁으로 맞섰다.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공사 노선 변경과 환경영향평가 재실시를 요구한 것이었다.

 



이제 대구로 가보자. 훗날 대구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하는 정수근은 2005년 대구를 대표하는 앞산에서 진행하는 터널공사를 반대하는 움직임을 주도했다. 대구가 교통이 열악한 지역이 아니라는 게 반대 이유였다.

경남 양산시에 살던 스님 지율도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2008년 연말부터 낙동강 답사를 시작한 것이다. 천성산 도롱뇽 투쟁이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4대강 개발이 진행될 낙동강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로 이때 정수근은 낙동강을 답사하는 스님 지율을 만나게 됐다.

 

▲ 출처 프레시안


지율은 큰 카메라를 둘러매고 다녔다.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하면서 낙동강 사진을 찍었다. 정수근은 지율을 차에 태워 낙동강을 함께 다녔다. 지율은 사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4대강 사업 전후 사진을 찍어 비교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2011년 대구환경녹색연합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정수근은 블로그에 대구 주변 낙동강 사진을 올렸다.

4대강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친 최병성 목사도 그랬다. 2000년 초반 강원도 영월 서강 근처에 쓰레기 매립장이 생기는 것을 반대하면서 서강을 돌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언론에 제공하면서 꾸준히 이슈를 만들어 매립장 계획을 백지화시켰다. 2007년 4대강 사업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 습관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제 금강이 파괴되는 과정을 사진으로 남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김종술로 넘어가 보자. 전라도 장성 출신인 그는 충남 공주에 살고 있다. 김종술은 공주에서 <백제신문>이라는 지역신문을 할 때 심규상을 만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가입했다.

그가 쓴 가장 유명한 기사 시리즈 중 하나는 '금강 물고기 떼죽음 13일간의 기록'이었다. 4대강 사업으로 금강에서 60만 마리가 넘는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고 이를 관찰한 것이다.

금강에서 물고기가 죽기 시작한 것은 2012년 10월 18일이었다. 김종술은 10월 21일부터 취재를 시작했고, 심규상 기자와 보도 방향을 의논했다. <오마이뉴스>에 "금강서 136cm 초대형 메기도 죽었다"는 기사가 떴을 때는 심규상은 김종술에게 메기 사진을 저작권 주장 없이 모든 언론에 제공하자고 제안한다. 10월 26일 이후 방송과 <한겨레>, <경향신문> 등에 이 사진이 보도된다.

▲ 대형 메기의 죽음-김종술 제공


보다시피 네트워킹은 어느 순간 중앙이 요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지속적으로 그 공간 안에서 사람들 간 교류와 성장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축척된 지역 에너지가 중앙과 결합하면서 폭발력이 생긴다. 선순환 구조를 갖추려면 반드시 중앙 에너지는 다시 하방으로 흘러들어 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 정치·경제·문화 등을 지배하는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바로 '중앙집권적 체제'이다. 이러한 순환 구조에 대한 개념은 약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나의 네트워킹이 얼마나 선순환적인 흐름을 갖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됐다. 우선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즐길 줄 몰랐다는 생각이 앞섰다. 사법피해자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어느 순간 황폐해진다는 느낌만 더했다. 하지만 사법피해자는 사법개혁 과정에서 첨병이 되는 귀한 차원이다. 심규상 기자를 보면서 인맥이 공공성을 갖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회에서 알게 된 사람은 개인 소유가 아니라 사회 소유였다. 마침 그 시점에 '정보공개청구강의'를 하러 다니는 박대용 기자를 알게 됐다. 박대용 기자는 사법피해자에게 정보공개청구 방법을 강의하고자 했다.

곧 서울에 있는 지역 MBC 노조 숙소를 빌려서 강의를 진행했다. 이후 '정보 비대칭성'을 극복하고자, 사법피해자를 위해 법원에 탄원서를 냈던 언론인에게 재능기부를 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이강택 KBS PD가 강의했다. 한 사법피해자가 물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왜 뉴스에 안 나오나요?"
"중앙집권주의라서 그렇지요."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시스템


자기가 사는 공간이나 주변에 관심을 두고 문제가 생기면 언론에 널리 알리고 해결하기에 지금같은 중앙집권적 시스템은 버겁다. 언론이 서울 발 목소리만 담아내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변화를 만들려면 좋은 기사만 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잘 유통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지역 목소리를 담을 수 있었던 <오마이뉴스> 시스템이 몰고 온 영향은 크다.

 


 

또 다른 조짐이 있다.

2003년 네이버가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개인이 콘텐츠를 생산하는 영역이 부쩍 넓어진다. 미디어 산업은 생산과 유통을 구분해야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블로그는 생산 수단이며 뒤에 등장하는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콘텐츠를 유통하는 역할을 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등장하기 전 미디어다음은 시사성이 짙은 블로그 콘텐츠를 한 곳에 모아 유통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2004년 통신원 제도로 시작한 작은 게시판은 2005년 '블로거 뉴스'(나중에 '다음뷰')로 발전한다.

블로거 뉴스를 대중이 인식한 계기는 '미디어몽구'(필명)가 만들었다. 미디어몽구는 2005년 뉴스에서 황우석 박사 입원 소식을 접한다. 황우석 박사가 입원한 서울대병원은 미디어몽구가 사는 동네와 가까웠다. 미디어몽구는 산책 삼아 병원으로 간다.

그리고 휴대전화로 병원 입구에 늘어선 방송 중계차를 찍어 블로그에 올렸다. 미디어몽구가 올린 동영상을 흥미롭게 여긴 다음 편집자는 이 콘텐츠를 첫 화면에 노출한다. 동영상 조회 기록은 10만 회를 넘긴다. 미디어몽구는 며칠 뒤 특종 상금으로 10만 원을 받았다. 포털이 제공한 유통 공간에서 블로거는 콘텐츠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이른바 '파워블로거'가 출연한 것이다. 그중 한 명이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기자다. 그는 처음 웹 개발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저질렀다. 블로그를 처음 만든 웹 개발자는 개인이 자유롭게 떠들다 보면 그 안에서 저절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완성할 것으로 기대했다.

따지고 보면 인터넷에서 지역성을 찾기는 어렵다. 국내에서 지역 담론은 그다지 응집력이 없다. 초창기 웹 설계자 역시 지역성을 고민하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사는 지역성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김주완은 '갱상도 블로거'라는 조직화를 통해 인터넷에서 지역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

그뿐 아니다. 2011년 말 사이판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 사이판을 관광하던 경상도 사람이 총격을 당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이가 없었다. 중앙매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김주완 기자는 인터넷에서 '동맹 블로거'를 조직해 이 사건을 이슈화했다.

김주완 기자는 이런 네트워킹을 어떻게 생각해낸 것일까? 김주완 기자 삶 속에서 네트워킹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4화-김주완 네트워킹)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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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2화 심규상 네트워킹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는 대전과 충남 지역을 담당한다. 심 기자가 네트워킹을 활용하는 방법을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을 통해 살펴보자.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홍콩 선적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 호'와 삼성물산 소속 '삼성 1호'가 충돌했다. 유조선 탱크에 있던 원유는 태안 해역으로 유출됐다. 신문웅 <태안신문> 편집국장은 해안에서 검은 기름이 육지를 삼킬 듯 밀려오는 모습을 보고 '절망'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됐다고 했다.

 

정부는 12월 11일 충남 태안군, 보령시, 서천군, 서산시, 홍성군, 당진군(현 당진시) 등 6개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현장에는 각 언론사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오마이뉴스>는 심규상 기자에게 취재팀장을 맡겼다. 심규상은 대전에서 태안으로 가야 했다. 대전~당진 고속도로는 2009년 개통됐다. 2007년 당시 대전에서 태안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거리였다. 심규상 기자는 사건이 발생하고 4개월 동안 태안에 세 번 갔다. 처음은 자원봉사자, 두 번째는 취재 중반 점검, 마지막은 격려 차원이었다.

하지만 당시 기사 생산 수는 <오마이뉴스>가 다른 매체를 압도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심규상 기자는 서산, 태안, 당진, 보령, 홍성 등에 있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활용했다.

각 지역 시민기자는 취재 요청에 헌신적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기 지역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하지만 애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이 있다. 결국 시간과 비용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심 기자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 비결이 궁금해 그에게 '네트워킹'을 주제로 강의를 요청했다. 2012년 겨울이었다.

 

 


이 다섯 단어만 기억하라


심 기자는 자기 삶을 풀어 네트워킹을 5개 단어로 정의했다. 운명, 접속, 관계, 긍정, 공명 등이다. 그는 삶 속에서 네트워킹을 구체화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 운명

심규상 기자는 충북 영동 두메산골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6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이를 맡을 사람이 없어 일을 하지 못하던 아버지가 교장에게 사정해 떠넘기다시피 입학을 밀어붙였다.

중·고등학교는 전라북도 설천면으로 다녔는데 텃새에 시달리곤 했다. 가난한 부모는 담배 수확을 늘려 자식 학비를 마련하고자 했다. 심규상 기자는 1986년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 입학한다. 가난과 학교 생활 모두 그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② 접속

1986년은 양담배를 처음 수입한 해다. 대학생들은 '양담배 수입 개방 저지' 데모를 했다. 부모가 담배를 재배하는 심규상에게 양담배 문제는 곧 학비 문제였다. 데모에 참석한 심규상은 다른 학생에게 물었다.

"담배 농사 몇 단 지어요?"

그 학생 집은 담배를 키우지 않았다. 담배 농가를 대신해 싸운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심규상은 동료들에게 자기가 데모에 참여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심규상은 학생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 급기야 교도소까지 가게 된다.

1990년 노태우 정권은 김영삼·김종필과 함께 민자당을 만든다. 이른바 '3당 합당'이다. 당시 서울에 있는 민자당 중앙당을 점거한 대학생 중에는 심규상도 있었다. 재판 당일 아버지가 서울구치소를 찾아왔다.

"오늘 판사님 앞에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해라. 안 그러면 호적에서 빼낸다."

그날 방청석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법정에서 구호를 외치고 판사에게 대들다가 사지가 들려나가는 막내아들을 봤다. 심규상은 반성문을 쓰지 않아 안동교도소에서 2년 6개월 만에 만기 출소했다. 심규상은 복역 기간 매주 한 통씩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적었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1992년 여름, 부모님은 출소하는 아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심규상은 고향인 충청도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큰절을 올리는 아들을 외면한 채 집 밖으로 나갔다.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밀려들었다. 어머니가 밥상을 내밀었다. 상에는 수육 한 접시가 수북하게 올라 있었다. 무심히 대문 쪽을 바라본 심규상은 조금 전까지 뛰던 개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개를 잡았던 것이다. 심규상은 눈물을 삼키면서 수육을 먹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아들을 이해했다. 심규상 기자는 '접속'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1993년부터 심규상은 재야단체에서 활동한다. 전교조 대전지부, 전교조 충남지부, 전국농민회 충남도연맹 등 30여 개 시민단체를 관리하는 대전충남연합 조직부장을 맡는다. 몇 년 뒤 '접속'은 충남 지역신문으로 이어진다.

 



③ 관계

충청남도에 두루 뻗은 차령산맥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런 지형은 마을 공동체 의식을 키운다. 특히 '리아스식 해안'으로 유명한 태안군은 불가사리 모양 지형이 특색이다. 이곳에서 지역신문은 마을 소식을 접하는 매개체로 유용했다. 이 지역 신문은 대부분 <한겨레> 창간 이후에 생겼다.


<당진시대> <태안신문> <홍성신문> <뉴스서천> <예산무한정보> <충남시사> 등 형편이 제각각인 충남지역 21개 지역신문들은 협회를 꾸렸다. 그리고 1998년 대전에 주재기자를 두기로 결정한다.

대전은 도청·교육청·도의회 등 충남지역 주요 행정기관이 밀집된 곳이다. 하지만 당진, 서천, 태안 등에 있는 지역신문사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대전으로 취재를 오는 것이 물리적으로 버거웠다.

협회는 원하는 취재를 대전에 거주하는 기자에게 부탁해 기사를 공유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협회는 이 같은 고민을 지역 시민단체와 공유하며 적임자를 찾았다. 그렇게 찾아낸 이가 심규상이었다.

심규상은 시민단체 업무가 끝나는 오후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작성한 기사는 21개 신문사에 팩스로 전송했다. 충남도청에 대한 비판 기사는 월요일에 발행하는 지역신문에 먼저 게재됐다. 그런데 같은 기사가 협회에 소속된 신문에 게재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각자 신문 발행주기에 따라 한 번 출고된 기사는 길면 2개월 뒤에도 게재되곤 했다.

공무원들 사이에서 비판 기사가 한 번 게재되기 시작하면 끝날 줄 모른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규상이 출고한 기사 대부분은 다른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이었다. 도지사 지시가 이행되지 않았다거나, 상급기관이 도청에 지적한 문제점 등이 심규상이 주로 다룬 소재였다.

심규상은 기사 쓰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시민단체에서 내는 보도자료를 기사로 작성해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다. '모든 시민은 기자'라고 선언하며 지난 2000년 출범한 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가입해 활동했다.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오마이뉴스>는 성장세를 탔다. 이때 대전참여연대를 비롯한 13개 시민사회단체가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를 창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연합뉴스>가 초창기 했던 것처럼 <오마이뉴스> 안에 '지역판'을 넣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오마이뉴스> 사이트에 '대전충남' 카테고리가 생긴다. 2004년 심규상은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주재기자를 제안받는다.

네트워킹이 없었다면 지역판도 없었다


심규상 혼자 대전, 충남을 모두 취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규상은 시작부터 네트워킹을 짜들어갔다.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취재와 기사 작성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가입하게 한다.

지역신문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중복 게재를 허용하는 <오마이뉴스> 정책은 이럴 때 장점으로 작용한다. 심규상은 주재기자로 활동하면서 풀뿌리 지역신문 기자들과 성심성의껏 소통하며 관계를 형성했다. 이때부터 '연락 체계'를 가동한다.

시·군별로 1·2연락처를 정하고 어떤 사안이 생길 때 제1연락처에게 취재를 부탁하는 형식이다. 1연락처가 사건을 챙길 수 없으면 제2연락처에게 전화한다. 취재 내용은 곧 정보가 됐고 시스템은 자리매김했다.


 

2004년 1월 27일 MBC 은 '친일파는 살아있다'를 방영한다. 사회적으로 과거사 문제가 불거졌다. <뉴스서천> 대표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대표인 양수철에게 한 가지 제보가 들어온다. 충남 예산 충의사 현판을 박정희가 썼다는 내용이었다.

1967년 건립한 충의사 본전에는 윤봉길 의사 영정이 봉안돼 있다. 현판은 박정희가 윤 의사 의거일에 맞춰 1968년 4월 29일에 내걸었다. 양수철은 2005년 3월 1일 새벽, 박정희가 쓴 현판을 직접 철거하기 위해 충의사로 갔다. 그러면서 심규상에게 취재를 부탁했다.

심규상은 현장까지 2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판단했다. 바로 예산지역 제1연락처에게 취재를 맡겼다. 그는 전교조 충남지부 회원이었다. 이날 <오마이뉴스>에 "박정희 친필 더 이상은 못 참아" 삼일절에 세 조각 난 충의사 현판이라는 기사가 게재됐다. 양수철 씨는 실형 6개 월을 선고받았다. 그가 대표로 있던 <뉴스서천>에는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화기를 들면 욕설이 쏟아졌다.

반면 과거사 청산의 일환이라며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사건이 알려진 후 예산군청 홈페이지는 각각 복원과 교체를 주장하는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의견으로 들끓었다. 한 달여 후 예산군은 박정희의 친필을 그대로 복원한 현판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내걸었다.

이 사건을 통해 충남 지역신문은 <오마이뉴스>와 기사 네트워킹이 시너지를 발휘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급한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올리면 댓글을 통해 반응을 보고 다시 보충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사는 객관성을 더욱 갖췄다. 이러한 협업은 2년 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도 빛을 발했다.

이런 네트워킹 구성은 <오마이뉴스> 본사가 요구한 게 아니었다. 심규상은 언론으로 지역을 바꾸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규상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즉 '긍정'과 '공명'이 네트워킹에서 핵심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다음 3화는 최병성 네트워킹입니다.)

 

 

※ 2016년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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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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