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제7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경찰을 취재한 시기는 2013년쯤이다.

 

처음 취재 방향을 정하기 전까지 온라인에서 경찰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정보를 쌓기 시작했다.

 

경찰 조직에 아는 게 없는 나에게는 언론이 말을 옮긴 경찰부터 접촉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가장 유명한 것은 조현오 청장이었지만 조현오는 관심 밖 인물이었다. 언론이 전하는 인상도 대부분 좋지 않았다.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진압하면서 몽둥이로 노동자를 두들기는 장면에서 앞뒤 맥락이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인 조현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진보언론이 다룬 기사도 한몫했다.

 

채수창이 성과주의를 비판한 기자회견을 비롯해 2009년부터 경찰 내부망에 글을 올려 징계를 받은 경찰들 사연을 내보냈다.

 

대부분 징계받은 시기와 관할을 따지지도 않고 원인으로 조현오를 지목했다.

 


 

오히려 자기 신분과 이름을 밝히고 활동하는 다른 경찰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들에게는 나름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있었다.

 

1980년대 군사정권 후 사회 분위기가 민주적으로 바뀌면서 언론자유도 한결 보장받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하지만 이 분위기를 타고 경찰을 향해 갑질하는 기자들이 허위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인터넷이 발달하는 1998년부터 허위 기사에 반박하는 글을 올리는 경찰이 전국에서 등장한다.

 

그중에 내가 만난 이가 경찰 황운하, 황정인 등이다. 취재란 늘 그렇듯이 온라인에서 모은 풍문과 어설픈 추측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황운하는 2013년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경무관이었다. 경무관 계급정년은 6년이며, 통상 4년 이내에 치안감 승진을 노린다.

 

황운하. 중도일보 인용

 

당시 황운하는 경무관 2년 차로 수사연수원장이었고 아직 망한 단계가 아닌 만큼 절실함도 없었다.

 

주변에 언론계 인맥이 풍부해 굳이 나와 작업할 이유도 없었다.

 

필자는 보기에는 아주 외향적이고 밝은 성격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아주 슬프고 우울함을 많이 가진 사람이다. 헤어질 때 황운하는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말했고 서운함을 느꼈다.

 


 

두 번째로 황정인을 만났을 때 경찰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더 관심이 갔다.

 

내부통신망에 상부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징계를 당하자 ‘표적 감찰’을 주장하던 경찰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황정인도 거침없이 상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한겨레기사 캡쳐

 

 

황정인은 자기도 허위사실이나 명예훼손에 걸리는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고 했다.

 

황정인 글 쓰기 비법은 양극단을 짚는 것이다.

 

황정인이 조현오를 비판하는 글을 쓸 때는 ‘조현오 청장이 헌법정신을 중시 여긴다’는 점을 드높이면서 시작한다. 비판에 칭찬을 덧붙인다는 것이다.

 

그에게 조현오가 진짜 헌법정신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평소 국관회의에서 헌법 준수를 자주 강조한다고 했다.

 


 

이런 황정인도 감찰을 받을 뻔했다.

 

2011년 6월 8일 반값 등록금 집회를 옹호하는 글을 올렸는데 당시 그는 경찰청 수사구조개혁 팀장이었다. 물론 그는 징계를 피했다.

 

황정인 말을 그대로 옮긴다.

 

황정인이 블로그에 쓴 글은 많은 언론이 인용했다. 오전 국관회의에 참석했는데 감찰부서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노컷뉴스 인용

 

쫄면서 앉아 있는데 조현오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더니 황정인부터 찾았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은 글 썼던데!”

 

이 한마디로 감찰은 없던 일이 됐다. 황정인은 조현오 카리스마를 직접 겪었다.

 

황정인과 대화하면서 조현오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상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모른다는 것을 확인할 때 관심은 높아지는 법이다. 언론이 띄운 인물을 만나고 나니 취재 대상이 확고하게 정해졌다.

 

바로 조현오 전 청장이다.

 


 

조현오는 2012년 4월 5일 퇴직했다. 2013년 가을 고 노무현 대통령 사자명예훼손으로 구속된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에게 황정인 씨 덕에 호감을 얻게 됐다고 털어놨다.

 


 

만날 일이 없다던 황운하는 그 후로 해마다 만났다.

 

경무관 4년 차이던 2015년에 우연히 만났다. 당시 대전지방경찰청 부장이었다. 여전히 승진 희망이 있었는지 절실함은 그다지 없어 보였다.

 

헤어질 때 황운하는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황운하는 2016년 경무관 5년 차에 경찰대 교수부장으로 갔다. 그때부터 위로를 빙자한 밥과 술로 자주 접촉했다.

 

그때 필자가 쓴 글이 바로 <풍운아 황운하>다.

 

일 년 후 경찰 조직을 나가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자 지나간 경찰 생활을 정리한 글을 쓰고 싶다며 필자에게 상담했다. 나 또한 조직에서 망해가는 황운하를 위로해주고자 시작된 글 작업이었다.

 

 

 

어쩌다가 황운하가 이렇게 추락하게 됐을까?

 

황운하를 처음 중용한 경찰청장은 허준영이다.

 

 

 

2005년 참여정부 시절이다. 총경이던 황운하를 경찰청 수사구조개혁 팀장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수사구조개혁팀 계장은 민갑룡이었다. 경찰 측 자문 위원 중에는 조국 서울대 교수가 있었다.

 

이후 황운하를 중용한 이가 조현오다. 2011년 경무관으로 승진을 시켜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내정했다.

 

 

조현오가 물러나자 박근혜 정부에서 황운하는 수사와 관련 없는 부서를 떠돌았고 권력형 수사는 막힌다. 더불어 인사도 망가졌다.

 

황운하는 탄식하곤 했다.

 

“조 청장님이었다면 이렇게 조직이 망가지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됐다. 경찰 수사권 조정에 유리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황운하는 치안감으로 승진하며 울산지방경찰청장으로 부임한다.

 

민갑룡 경찰청장 내정자. ytn인용

 

민갑룡은 민정수석 조국이 강력하게 추천해 경찰청장이 됐다.

 

(☞조국과 친분 묻자…민갑룡 “청문회에서 말하겠다”)

 

적폐청산은 국정과제였다. 민정수석 조국은 적폐 청산 콘트롤 타워를 자처했다.

 


 

2018년 봄, 경찰청에 댓글 관련 특별수사팀이 설치됐다.

 

경찰 조직 안에서는 이 수사를 곱지 않게 보는 눈이 있었다. 하지만 적폐 청산 명분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울산지방청장 황운하에게 나는 민감한 부분을 대놓고 찔렀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우리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물론 경찰청 내부망에 자신을 드러내고 비판한 경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글은 조현오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경찰 댓글 특별수사팀은 이 글을 조현오 구속영장청구 명분으로 활용했다.

 

경찰청 특별수사팀은 조현오가 친한 경찰을 동원해 조직 내 여론 조작을 한다고 주장했다.

 

 

조현오는 2018년 10월 5일 구속됐다.

 


 

구속 기간 경찰청 국정감사가 열렸다. 경찰청장 민갑룡을 향한 국회의원 질문이 쏟아졌다.

 

야당 소식인 윤재옥 의원이 물었다.

 

윤재옥 의원과 민갑룡 경찰청장.시사포커스tv인용

 

 

윤재옥 위원: “청장으로서 전직 경찰총수를 경찰이 수사해서 최초로 구속시킨 사건이라고 보도됐는데 소회나 입장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경찰청장 민갑룡: “법과 원칙에 따라 행위에 따라 엄정하게 수사하고 처리해나가겠습니다.”

 

 


 

 

이재정 의원(여당)은 시사저널 단독 기사를 띄웠다. (☞  조현오 입장문 "직무범위 벗어난 지시는 전혀 없었다" )

 

 

 

조현오 입장문을 담은 인터뷰 내용이었다.

 

이재정 위원: “(여기에) 민갑룡 청장을 운운했습니다. ‘민갑룡 청장이 이러한 수사 가이드라인에 항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찰청장의 의지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대목이다. " 하면서 뻔뻔한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증거가 현격한데요....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다고 이야기하고 경찰청장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문에 몇 번이나 언급을 하는데 경찰청장님한테 뭐 소통된 게 있습니까? 이것 보는 경찰청장님 입장은 어떻습니까?"

 

민갑룡은 이 질의에 “그 분은 그분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즉 그 생각은 조현오 ‘당신의 것(Yours)’일 뿐이다.

 

그런데 이채익 위원은 이러한 민 청장 답변을 ‘당신 자신의 것(Yourself)’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채익 의원과 민갑룡 경찰청장.연합뉴스 인용

 

이채익 위원 : “울산 남구갑 이채익 위원입니다. 오늘 오전 존경하신 윤재옥 위원의 질의에 민갑룡 경찰청장의 답변을 들으면서 본 위원은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오늘 위원들의 각종 질의에는 그토록 신중하고 애매모호한 답변을 하던 청장이 경찰청의 대선배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구속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하고 정확한 답변을 했습니다. “법치국가에서 죄를 지었으면 구속은 당연하다. 또한 모든 것은 법과 원칙에 따라 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만약 조현오 청장이 무죄가 되면 오늘 이 답변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경찰청장 민갑룡 : 수사 과정을 통해서 불법이 있다는 걸 규정을 했고요. 현재 영장실질심사 과정까지 거쳐서 법원에서도 그렇게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답변을 드린 겁니다.

 

이채익 위원 : 구속은 됐지만 아직까지 확정되지는 않았잖아요.
경찰청장 민갑룡 : 예 그렇습니다.
이채익 위원 : 그런데 경찰청장이 그렇게...
경찰청장 민갑룡 : 현재까지 사법적인 판단까지 거친...

 

이채익 위원 : “경찰청장이 이런 답변을 그렇게 예단해서 미리 얘기할 수 있어요? 내가 1998년도부터 2000년도까지 울산 남구 구청장을 할 때 조현오 청장이 당시 남부경찰서장을 했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조현오 청장을 두둔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 이후에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전화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만났던 조현오 청장은 국가관이 뚜렷하고 공과 사가 분명한, 너무 공과 사가 분명해서 불편할 정도로 제가 봤을 때는 참경찰상이다, 그렇지만 대민 관계에 좀 더 유연성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할 정도로 너무 국가관이 뚜렷한 경찰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다 보니까 조현오 청장도 이제 영어의 신세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모셨던 전 경찰청장이 경찰의 손에 의해서 구치소에 들어가고 구치가 되고 최초로 경찰청에 의해서 구속된 전 청장에 대해서 구속은 당연하다. 법과 원칙에 따라 했으니까 아무 문제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민갑룡은 이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 민갑룡이 느꼈을 두려움은 어느 정도였을까? 아마 민갑룡은 나에게 자기를 아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민갑룡 경찰청장 ytn인용

 

 

그렇다면 자신은 누군가처럼 직을 걸고 맞설 그런 용기가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고 스치듯 말했던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민갑룡 쌍둥이인가? 2013년이다.

 


 

조현오도 그 시절 순탄하지 못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2013년 가을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4년 봄 그를 면회했다. 조현오는 감옥에 있을 때부터 필자에게 후배 경찰을 소개해줬다.

 

조현오는 가장 먼저 소개해주고 싶은 이가 있다며 경찰 조직 ‘넘버 원’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름을 들었는데 촌스럽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민갑룡”

 

(마지막 화. 생활의 발견.)

 
 

 

P.S) 위 제목은 홍상수 감독 영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차용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제5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 리브스'였어!

 

"와! 끝내준다"

 

키아누 리브스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 <스트리트 킹>(2008년)을 본 소감이다. LA경찰국이 배경인 이 영화는 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조직을 보여준다. LA수사국 완더 서장은 권력지향적이고 동료 경찰들도 범죄에 가담하며 이권을 챙긴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것은 키아누 리브스뿐이다.

 

현실에도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다. 2012년 국정원 댓글 경찰 수사 과정에서 윗선 개입을 폭로한 권은희 씨다. '권은희 고립되다'(2013.9.18. 오마이뉴스) 기사처럼 조직에서 그녀는 키아누 리브스와 같은 처지였다. 법정에 나온 당시 수서경찰서장, 사이버팀장, 지능범죄수사팀장은 권은희 과장과 견해가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권은희 씨 용기와 결단에 박수를 보냈고 진보 언론과 민주당 정치인들은  그녀를 '광주의 딸'로 칭했다.

 

이번 장은 주인공 김헌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김헌기 수사 인생 굴곡을 살펴보려면 국정원 댓글 경찰 수사 이해가 있어야 하겠다.

 


 

필자는 이 사건이 한참 지나고 한 경찰 간부를 만났다.

 

"저 모르세요? 나 텔레비전에 많이 나왔는데."

 

2012년 서울지방경찰청 수서경찰서장이던 그는 권은희 씨 상급자였다. 그해 12월 16일 서울청 지시로 대선을 사흘 앞두고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한 중간발표를 했다. 언론은 그 공로로 그가 경무관 승진을 했다고 보도한다.

 

그는 승진에 눈이 멀어서 권은희 씨와 다른 주장을 했을까? 그런데 이야기를 할수록 그는 부패한 완더 서장처럼 벽 안에 돈을 감추고 부패한 부하 뒤를 봐주는 그런 인물과 거리가 멀었다.

 

경찰 조직 구성원 대부분이 동의하는 조직 특징이 있다. 경찰은 기무사나 국정원과 달리 개방된 조직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사불란해도 검찰처럼 구성원끼리 의리 개념이 강하지 않다. 문재인 정권에서 드러난 것처럼 경찰은 다른 조직보다 적폐 청산에 앞장섰으며 스스로 특별수사팀을 설치해 상급자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경찰이 해야 할 적폐 청산으로 아예 거론되지 않는 사건이 있다. 바로 디도스 사건 수사와 국정원 댓글 사건 경찰 수사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부실 수사를 지적했던 거센 목소리가 문재인 정권 들어 잦아들었다. 경찰 수사가 잘못됐다면 진실을 밝히기 더 없는 기회를 맞았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2012년 12월 19일 대선을 앞둔 11일 저녁 7시쯤 서울지방경찰청 관할 수서경찰서 도곡지구대로 신고가 들어온다. '국정원 선거 댓글사건' 서막이다. 민주당은 12일 용의자 김 씨와 김 씨가 소속된 국정원 심리전단 단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수서경찰서에 고발했다. 김 씨가 제출한 PC와 노트북은 서울청 분석팀이 조사했다. 당시 수서경찰서 디지털 분석 역량이 부족해 서울청이 디지털 포렌식을 맡았다. 이 작업은 경찰청 연구관도 파견돼 거들었다. 당시 수서경찰서가 서울청에 요청한 키워드는 이렇다.

 

강금실, 검찰개혁, 공약, 군대, 군복무, 굿판, 김대중, 김두관, 김어준, 납세, 네거티브, 노동자, 노무현, 단일화, 대선, 명품 안경, 명품 의자, 바른손, 사람사는세상, 선거, 선거사무실, 이은미, 종교평화법, 연설, 진선미, 테마주, 호남, 힐링캠프, 협력, 열쇠, 동계올림픽, DMZ, 사람, 수임료, 사랑채, 나라사랑, 네이버…

 

단어 하나를 분석하면 6시간 정도 걸린다. 서울청은 신속한 수사를 내세워 수서경찰서가 요청한 키워드 100개 가운데 대선과 관련 있는 단어 4개(문재인, 박근혜, 새누리당, 민주통합당)만 추려 조사를 진행한다. 이 결과를 김용판 서울청장이 수서경찰서장에게 명령해 16일에 선거 전, 중간발표했다.

 

"댓글 단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통령 후보 관련 수사는 통상 선거 전에 발표를 해왔다. 2002년 이회창 대표 아들 병역비리 사건을 터트린 김대엽 사건이 있었다. 검찰은 병풍수사결과를 선거 전 발표했다. 2007년 말, 이명박 후보와 관련된 BBK수사결과도 선거 전에 발표했다.

 

국정원 댓글 경찰 수사 문제는 중간발표와 최종 발표가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키워드를 확장해 분석한 최종 수사결과 발표는 선거가 끝나고 2013년 1월 31일 발표된다.

 

"정치적 성향 댓글을 49개 달았다."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경찰이 수사결과를 조작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2013년 4월 18일 검찰이 윤석열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을 팀장으로 특별수사팀이 구성했다. 그리고 이틀 후, 권은희 수사과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 수사 윗선 개입'을 폭로하면서 수사결과 조작설에 힘이 실렸다.

 

"서울청에서 분석 키워드를 4개로 줄였다."

"경찰청에서 수사팀에 전화를 걸어 수사에 압력을 넣었다."

"경찰청 고위간부가 수차례 전화해 '불법선거운동' 혐의를 떠올리게 하는 용어를 흘리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그 후로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모든 게 착착 맞아떨어졌다. 윤석열 팀장이 이끄는 검찰특별수사팀이 권은희 과장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바로 서울청에서 분석관들끼리 대화가 담긴 CCTV 영상이다.

 

당시 서울청은 공정성을 보장하고자 분석실에서 조사 과정을 24시간 녹화했다. CCTV 분량은 모두 127시간이다.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영상에서 한 직원은 "노다지다. 노다지…"라고 말하고, 다른 직원은 "언제 다 보냐고, 왜 자꾸 나와"라고 투덜거린다. "닉네임을 찾았다"며 손뼉 치고 "고기 사 달라"는 말도 나온다.

 

검찰은 김용판 서울청장이 댓글이 나온 것을 알면서도 수서경찰서장을 시켜서 허위수사발표를 하게 했다며 직권남용으로 기소했다. 결과는 어땠나. 김용판은 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다. 검찰은 다시 권은희를 위증죄로 기소한다. 권은희 역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시기 뉴스를 검색하면 두 가지 주장만 판친다. 권은희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김용판을 무죄 선고한 법원은 '썩은 것'이다. 김용판 주장을 인정하는 이들에게 권은희 폭로는 '원맨쇼'다. 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그래도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우리 사회에 있었다. 2013년 7월 25일 제317회 임시국회에서 '국가정보원댓글의혹사건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조사'가 그런 사례일 것이다. 당시 야당(민주당) 의원은 검찰이 확보한 서울청 분석실 CCTV 영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이를 근거로 이성한 경찰청장과 이 사건 경찰 관계자들에게 허위수사를 질책했다.

 

이 가운데 당시 여당(새누리당) 소속인 윤재옥 의원 발언이 눈에 띈다. 윤재옥 의원은 경찰대 1기 출신이고 경기지방경찰청을 지냈다. 윤 의원은 검찰이 제시한 CCTV 127시간을 분석해 검찰 수사결과와 전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어떤 것은 빼버리고 또 자기 논리를 더 부각하기 위해서 장면의 구체적 설명을 다르게 표현하기도 하고....(중략).... 그리고 '싹 갈아 버려' 이런 것도 지금 이 부분만 부각하고 앞뒤 내용은 싹 다 빼버렸어요."

 

검찰이 전체 맥락을 무시하고 부분 부분 편집하고 짜깁기 해 증거를 조작한 것처럼 호도했다는 것이다. 윤석열이 이끄는 중앙지검 특별수사팀 작품이었다. 윤재옥 의원은 이 사건에서 검찰이 특별수사팀을 꾸려서 수사를 했듯이 왜 서울청은 그렇게 못했는지 질타했다.

 

2018년 '버닝썬 사건'을 보자. 관할은 강남경찰서지만 서울청 광역수사대가 처리했다. 서울청 수사능력이 더 우수하고 수사 인력도 훨씬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얼마나 큰 사건입니까. 사실은 정말 경찰에 몇 년에 한 번 생길까 말까 한 큰 사건이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지방청에서 수사를 장악해 가지고 수사를 해야 되지 디지털 분석만 해 가지고 내려보내고 또 나머지 수사는 일선서에 맡기고… 어렵고 힘든 일은 자꾸 밑으로 내려보내서 책임지라고 하고 문제 생기면 뒤로 숨고 이런 상급기관이나 상급자 모습이… (이하 생략)"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선거에서 진 쪽은 수사결과에 승복하기 어렵다. 선거에 진 쪽은 경찰 부실수사로 몰아갈 것이고 검찰은 경찰 수사가 미진한 부분을 찾으려 애쓸 것이다.

 

 

조현오 청장 시절, 2011년 경찰이 수사한 디도스 사건이 그랬다. 결국 경찰 수사 축소 은폐 의혹으로 특검까지 갔다. 선거 관련 수사 담당자들은 특검이나 검찰 특별수사팀, 국회 조사위, 국정감사 등에 불려 나가게 돼 있다. 즉 서울청에서 직접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챙기지 못한 이유는 한 줄로 정리된다.

 

“똥물 튀길까 봐.”

 

그래서 수서경찰서가 맡은 사건을 누구도 손을 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재옥 의원은 이 지점에서 갈등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일선 서에 수사 책임을 맡기고 디지털증거분석이라든지 이런 부분을 지방청에서 하다 보니까 이게 일선 서하고 수사를 지휘해야 될 지방청이 마치 서로 대등한 관계인 양 수사 관련해서 계속 서로 의견 일치가 안 되고 또 이런 과정이다 노출되고…"

 

윤재옥 의원은 권은희 씨 행동도 과했다고 평가했다.

 

"수서 수사과장이 제가 알기에는 사이버수사 경험이 많은 분이 아니에요. 사법시험 출신이라서 법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중략)… 일선 서 수사과장 개인이 이 수사를 전부 자기가 판단한 대로, 자기 생각대로 수사를 끌고 가려고 하고 또 그것을 초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좀 수사지휘를 했는데, 거기에 반발하니까 전부 다… 뭐 잘못도 이야기하면 구설에 오르내리고 물의가 야기되니까 전부 뒤로 빠져 버리고 이런 현상이 생겼지 않습니까."

 

당시 권은희 수사과장에게 수사지휘 관련 윗선은 경찰서장, 서울청, 경찰청이다.

 

우선 첫 번째, 당시 수서경찰서장은 회의석상에서 수사 방향을 논의하고 결론을 내려 지시하는 식으로 유도했다. 이런 수사지휘 방식은 빌미를 줄 여지가 없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더 윗선 경찰청은 어떨까. 당시 경찰청 모 담당과장은 큰 사건이 나면 일선 경찰서에 전화를 자주 하는 사람이다. 실무자와 통화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중간 단계를 거쳐 보고받으면 시간이 걸리며 그 과정에서 사실이 왜곡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국정원 댓글 사건 관련하여 수서경찰서와 통화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주변에서 함부로 전화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압력 행사한다는 말 듣게 된다고. 그래서 전화 안 했어요. 권은희 과장이 나에게 건의가 와서 한 번 통화했을 뿐 나는 직접 한 번 안 했고."

 

이제 남은 것은 서울청 전화. 당시 김용판 서울청장이 권은희 과장에게 직접 전화한 사실이 도마에 올랐다. '지방청장 수사지휘권' 부분이 논란이 된다. 김용판 청장을 기소한 검찰은 형사소송법을 근거로 청장은 사법경찰관이 아니기 때문에 수사지휘권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찰 조직 내 의견은 다르다.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24조를 보면 경찰은 상관의 지휘를 받아 직무를 수행한다고 나와 있다. 즉, 지방청장도 구체적인 사건 수사와 관련된 지휘 감독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경찰들은 권은희 씨가 언론에 폭로한 내용은 사실관계는 전부 맞다고 했다. 단지 받아들이는 차이, 해석 차이라고 했다.  당시 권은희 씨 입장에서는 압력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권은희 사건 이후로 경찰 조직 내부에서는 서면수사지휘 필요성이 확대됐다. 수사과정에서 상하급자 사이에 이견이 발생한 사항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면 수사지휘 책임 소재가 명확해진다.

 


 

2016년 서면수사지휘 방식을 확대 추진한 이는 현 민갑룡 경찰청장이다. 민 청장은 경찰대 4기로 기획 계통에 잔뼈가 굵은 대표적인 시스템 주의자다.

 

과거 민갑룡 경무관이 캐나다에 유학을 갔을 당시, 그에게 영화 <스트리트 킹>을 거론하며 키아누 리브스와 같은 멋진 형사가 없는지 물었는데 문자로 여러 가지 시스템 문제를 지적한 답장을 받았다.

 

청와대는 민갑룡을 경찰 개혁 적임자로 보고 2018년 7월 24일 경찰청장에 임명했다. 이어 11월 29일 치안감 인사가 진행됐다. 그날 오랜만에 서울청에 있는 지인에게 전화했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안에 난리가 났어! 송무빈 부장이 기자 회견한다고 기자실로 갔어."

 

(다음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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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제3화. 미스터 계장들

 

2011년 12월 22일 김헌기는 경찰청(이하 본청) 지능범죄 수사과장이 됐다. 직속 계장이 보고했다.

 

“조현오 청장님께서 그 의경 사망 사건에 대해서 독회를 하신답니다.”

 

2011년 7월 말 의정부 동두천에서 의경이 사람을 구하려다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다. 그 후로 이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가 진행됐다. 경찰청장이 배석한 상태에서 주무담당과장이 단상에 올라가 사건을 보고한다. 그 후에 쟁점을 두고 서로 토론하는 것을 독회라고 한다. 김헌기는 본청 경험이 없어 ‘독회’ 뜻을 몰랐다. 하지만 담당 계장은 김헌기 과장이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료를 챙겨주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자 옆에 앉은 강신명 수사국장이 발표하라며 김헌기를 툭툭 쳤다. 당연히 매끄럽게 될 리가 없었다. 조현오 청장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소리쳤다.

 

“과장 내려가. 담당자 올라오라고 해!”

 

김헌기는 본청 생활을 그렇게 시작했다. 만약 경찰종합학교장을 했던 김석기가 2009년 경찰청장이 됐다면 본청 경험을 일찍, 좀 더 수월하게 했을 것이다.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석기는 2009년 용산참사로 2월 10일 물러났다. 김석기는 경찰청장 내정자 기간 경찰 인사를 단행했다. 그때 조현오를 치안정감으로 승진시켜 경기지방경찰청장에 내정한다.

 

이 둘은 이택순 청장이 엄청 괴롭혔던 대상이다. 김석기는 본청에서 이택순 청장을 매일 마주하는 조현오를 위로하면서 수사권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자 몇 가지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수사국은 수사국장(치안감) 아래에 새롭게 수사기획관(경무관)을 뒀다. 그 밑에 지능범죄수사대와 범죄정보과를 신설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담당할 수사구조개혁팀은 경무관이 단장인 수사구조개혁단으로 크게 몸집을 키웠다.

 

조현오 청장 시절에는 연줄보다 해당 분야에 가장 유능한 인재를 뽑는 인사 흐름이 있었다. 강신명 수사국장은 지능범죄 수사과장에 김헌기를 추천했다. 김헌기는 인천지방청 수사 2계장 시절 안상수 굴비사건 수사로 각인됐다.

 

 

 

공무원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게 조현오 청장 소신이다. 일을 제대로 못하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당시 민갑룡 기획조정담당관은 조 청장이 가장 대접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도승지 역할이었고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대통령령을 정할 때 검찰과 실무협상에 나가기도 했다.

 

조현오 청장은 능력이 탁월하면 수직과 수평 질서를 흔들어도 중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황운하다. 조 청장이 민정수석 반대를 무릅쓰고 승진시켜 2011년 말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내정했다. 믿고 맡기면 일절 간섭하지 않고 외풍을 차단해주는 게 조현오 청장 방식이다. 수사국에 속한 지능범죄수사과(현 수사과), 강력범죄수사과(현 형사과), 수사구조개혁단 등 수사부서들은 모두 본청 5층에 있다.

 

경찰청 내에는 계장급 경정이 150여 명이 근무하고 총경 승진 할당량도 경찰청이 가장 많다. 수사국은 매년 계장 두 명 정도가 총경 승진을 한다. 승진에 유리한 보직들이 있다. 계장이 총경으로 승진 후 자리가 비면 수평이동을 할 우선권은 주로 같은 국이나 과 계장에게 주어진다. 당시 수사구조개혁단에는 김헌기가 예전에 함께 근무를 했던 W가 있었다. 김헌기 수사과장은 사무실 복도에서 W를 만나면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랑 같이 근무하는 계장으로 와야 해."

"네, 알겠습니다."

 

 


 

2013년은 이성한 경찰청장 시절이다.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 직전 국정원 댓글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국정원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인터넷에 게시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급기야 민주당 쪽에서 국정원 직원이 작업하는 오피스텔을 급습하고 경찰에 고발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선거 후 김헌기 수사과장도 이 사건으로 국회로 불러 다녔다. 직속 계장들은 따라다니며 뒤에 앉아 지켜봤다. 그 당시 계장 눈에 비친 김헌기는 어땠을까? 한 계장은 김헌기 과장에 대한 인상 깊은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경찰 수사는 정신없이 진행됐다. 김헌기 과장은 회의 때 검찰에서 공소제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수사할 시간(2개월)을 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선거법 공소시효는 6개월이다. 검찰은 사건 발생 6개월 내에 공소제기를 해야 한다.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알아도 수사에 집중하다 보면 모를 수가 있어요. 지혜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요?”

 

박근혜 정부는 불량식품 근절을 국정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정부시책에 경찰은 어느 정도 업무성과를 내야 했다. 불량식품 관련 법규는 식품위생법 위반 특별법이다. 특별법 업무 소관은 지능과가 맡는다.

 

본청 계장들 역할은 무엇일까?

 

계장들은 여러 가지 총괄 계획서를 작성한다. 계획서에는 단속 배경과 대상, 방법, 인력, 적용 법 조항 등이 들어간다. 불량식품 단속은 경찰도 생소해 소집교육도 시키고 매뉴얼도 제공한다. 이후 단속 사항이 올라오면 수사 지도를 한다. 성과를 언론에 홍보하는 것까지 본청이 관리한다.

 

동물 사료용 폐닭, 폐기용 돼지 부산물 등이 시중에 유통되다 경찰 수사에 적발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 업무를 관리했던 담당 직원은 당시에 순대와 통닭을 도저히 먹지 못했다고 했다. 원래 식품사범은 구청 소관업무다. 이게 경찰업무로 들어오자 일선 경찰은 불만을 드러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작용도 나타났다.

 

하루는 경찰청에 토종닭협회 전화가 걸려왔다. 야산에 닭을 삼삼오오 키우는데 그게 무허가라 경찰 단속을 받은 모양이다.

 

 

 

“경찰 때문에 서민경제가 다 죽는다.”

 

토종닭협회는 강경하게 나왔다. 경찰청이 있는 서대문 사거리에 2000명이 모여 생존권 투쟁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경찰청 앞에서 닭들이 파드닥거리며 휘젓고 다닐 모습이 그려졌다. 이미 언론도 경찰이 무분별하게 단속한다는 기사를 내고 있었다.

 

본청에서는 저인망식 수사 자제를 지시했지만 영세업자 기준을 분명하게 정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이처럼 실무에서 혼선이 있을 때 김헌기는 명확히 기준을 잡아준다. 함께 일했던 한 계장은 풍부한 수사업무 경험에서 생긴 감각이라고 설명했다.

 

김영란법 매뉴얼을 만들 때 일화도 들려줬다.

 

당시 경찰 대응 방향을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다.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이 김영란법을 위반했다며 112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김헌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112 신고에 나가면 안 되는 거지. 나가면 안 되는 거야. 이게...”

 

김헌기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영란법의 약점은 국민들의 세세한 일상까지 법에 규정해버린 것이다. 선물부터 관혼상제. 일상생활과 밀접한 것을 법으로 규정했다. 그게 부패방지를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법에 의존하는 사회가 될수록 112 출동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또한 이건 현장에서 증거를 잡아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도 쉽지 않다.”

 

김헌기는 김영란법 신고 관련 대응 방향은 서면 신고를 받는 것으로 정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경찰은 112 신고에 출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헌기는 일선 서에 부담을 줄이고 명확한 지침을 내리고자 했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조현오 청장이 물러나면서 쫒겨났던 황운하는 그 해 여름, 경무관 6년 차에 기적같이 승진했다. 반면 김헌기는 원하던 보직과 멀어졌다. 수사연수원장으로 첫 부임하고 나서도 한동안 맥이 빠지고 마음이 우울했다.

 

어느 날 아침 9시 모르는 전화가 왔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을 고교 동창이라고 소개했다. 전화한 용건을 털어놨다.

 

“이웃집은 강아지 3마리를 키운다. 강아지는 다리가 짧고 험상궂게 생겼다. 자기 부인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는데 충격을 받아 출근도 못했다.”

 

이 대목에서 그 고교 동창은 강아지 사진을 김헌기에게 보냈다.

 

 

납작한 얼굴을 가진 새까만 강아지였다. 김헌기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교 동창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112 신고를 했는데 경찰이 와서는 이건 경찰에서 할 수 없는 것이라며 돌아갔다. 부인이 무서워하고 스트레스받는데 어떻게 경찰이 안 해주냐”

 

김헌기는 가슴에서 열불이 확 올라왔다. 겨우 진정하고 공동주택에서 애완견 키우는 건은 경찰이 처리할 수 없다고 답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꼼꼼하고 깔끔한 김헌기 방식이 아니었다. 김헌기는 인터넷을 검색해 고교 동창에게 오피스텔 관리회사 공동주택 관리규약과 대응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내용을 문자로 보냈다.

 


 

시간이 흘러 해가 또 바뀌었다. 2018년 민갑룡은 새로운 경찰청장이 됐다. 조국 민정수석이 추천했다고 한다. 조국은 이미 2005년 민갑룡 경정이 수사구조개혁팀 근무할 당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알았던 사이다. 민갑룡은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수사나 경비와 아닌 기획 계통으로 근무했고 지휘 경험이 없어 꼬투리 잡힐 게 그다지 없었다. 민갑룡 경찰청장 후보자는 무난하게 인사청문회를 통과했다.

 

경찰청은 연말이 되면 승진인사 발표한다. 경무관은 승진이 안 되면 6년째 그만둬야 한다. 2018년 송무빈 경무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아직 기간이 남았는데도 사의를 표명했을 때 누군가에게는 그 해를 기회로 여기고 은근히 기대했을 테다. 서로 가족처럼 생각해도 결국 한 명이라도 옷을 벗고 나가기를 바란다. 늘 승자는 소수다.

 

어느 날 김헌기는 전화를 받는다. 아끼던 본청 직원 J가 입원했다는 것이다.

 

김헌기는 본청에서 4년 동안 지능범죄 수사과장(현 수사과장), 강력범죄 수사과장(현 형사과장), 수사기획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계장을 경험했다. 김헌기가 수사과장일 때 계장으로 오라 했던 W는 형사과 계장으로 도망갔지만 이듬해 김헌기가 강력범죄 수사과장(현 형사과장)으로 가서 다시 만났다. W는 뚝심이 있고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면이 있다. 결국 W는 형사과에서 총경 승진을 했다.

 

반면 J는 우직하게 일만 했다. 병세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됐다. 그런데 입원하자니 인사를 앞두고 있어 주위 시선이 걸린 모양이었다. 승진에서 떨어지자 병이 더욱 깊어졌고 병원으로 실려 오게 됐다. 김헌기가 급히 병원을 찾아갔다. 병상에 누워 수혈하는 J를 보고 김헌기는 눈물을 흘렸다. 어느새 둘이 껴안고 엉엉 울었다.

 

“일만 시키고 내팽개치니까 조직이 원망스럽다.”

 

(다음 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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