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제복 20화.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

 

조현오는 경찰청장에서 물러난 지 4개월이 지난 시점에 국회 통지를 받는다. 2012년 9월 2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조현오를 쌍용자동차 청문회 증인으로 지목한다. 주변에서는 출석하지 말라며 만류했다. 말린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년 전인 2009년 4월 8일 쌍용자동차 사측은 2646명을 구조 조정하는 안을 발표했다. 사측은 희망 퇴직서를 내지 않은 976명을 정리 해고한다. 이 가운데 600여 명이 옥쇄파업에 참가한다.

 

2009년 8월 6일 파업 77일 만에 쌍용차 노사는 '쌍용자동차 회생을 위한 노사 합의서'를 내놓으며 극적으로 합의한다. 정리해고자 절반을 무급휴직자로 하되 1년이 지나면 생산 물량에 따라 순환 근무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후 회사는 휴직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구조조정 이후 자살한 노동자와 가족 수가 22명이었다. 이 같은 노사합의 이행 과정을 확인하는 것은 고용노동부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현오가 증인으로 출석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게 뻔하다는 게 주변 걱정이었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루는 언론 논조도 달라졌다. 그동안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을 '과잉진압 논란'으로 다뤘던 언론도 '과잉진압'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MBC 898회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청문회는 예상대로 조현오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조현오를 향해 사망한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에게 사죄하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정신과 박사인 정혜신은 방송과 청문회 등에서 쌍용차 희생자 발생 원인 가운데 하나로 경찰특공대 진압을 꼽았다. 당시 하에서는 헬기가 최루액을 쏟아부었다. 경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긴장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당시 쌍용자동차 사건에 투입된 정보과 형사에게 물었다. 옥상에서 저항하는 노동자를 움츠러들게 할 방법이 최루액 투하밖에 없었을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화가 가장 중요하지요. 경찰은 어떻게든 대화로 풀려고 노력했어요."

 

경찰 역할은 사회 안정이다. 경찰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노사 갈등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지역에 오래 근무한 경찰은 노동자와 서로 잘 아는 사이기도 하다.

 


 

1986년 출범한 쌍용차는 1998년 대우그룹이 인수했지만 대우그룹이 몰락하면서 1999년 함께 워크아웃됐다. 쌍용자동차 주인이 바뀌는 시점에 노사 갈등은 증폭됐다. 2004년 중국 상하이차가 쌍용자동차를 사들이자 노조는 이에 반발하며 부분·전면 파업을 했다. 쌍용자동차 경영이 나아질 기미가 없던 2008년 말에는 대주주인 상하이차가 '먹튀'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쌍용자동차 노조는 12월 5일 한상균을 10대 지부장으로 선출한다. 정보과는 '정리해고 박살'을 구호로 걸고 지부장이 된 한상균을 평소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판단했다.

 

2009년 1월 9일 상하이차는 인수 4년 만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법정관리 신청을 하며 경영권을 포기한다. 2월 6일 기업회생절차가 시작되면서 사측은 핵심 정책으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인다. 곧 정리해고자가 발표됐다. 부분파업을 벌이던 쌍용자동차 노조는 5월 22일부터 옥쇄파업을 시작했다. 이후 약 두 달 동안 정보과 형사가 조현오에게 받은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대화를 붙여서 빨리 해결하는 것이 최상이다."

 

노사 견해차는 너무 컸다. 정리해고 통보와 옥쇄파업이 맞섰고 사측은 대화 의지가 부족했다. 6월 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직원 3000여 명이 회사를 가동하겠다며 사내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공장 안에 있던 농성 노동자와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경찰력 6개 부대를 투입해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사 양측을 갈라놓았다. 당일 MBC 뉴스 보도는 이렇다.

 

“경찰은 27개 중대 2000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헬기까지 띄워 감시하고 있지만, 쌍용차 직원들 간 격한 충돌에도 개입하지 않고 주변 통제만 하고 있습니다.”

 

사측은 경기지방경찰청에 방문해 "우리 회사에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며 항의하면서 공장 진압을 재촉했다. 조현오는 공장 외곽에 경찰을 배치해 사측은 물론 그 누구도 공장을 출입할 수 없게 했다. 사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사측은 네트워크를 동원해 공권력이 뒷짐을 지고 있다며 경기지방경찰청을 압박했다. 조현오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2의 용산사태'를 언급하며 버텼다.

 

 

 

실제로 평택 쌍용자동차 도장 2공장 믹싱룸에는 인화물질이 가득했다. 자칫 폭발이라도 일으키면 대참사를 각오해야 했다.

 

정보과 형사들은 물밑에서 해고 노동자와 접촉했다. 정보과 형사는 당시 해고노동자에게 최루액 때문에 고통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노동자에게 가장 큰 관심은 '협상'이었다. 정보과 형사들은 노조 입장을 회사에 전했다. 성의를 보이지 않는 사측을 압박하고 대화장으로 끌어냈다. 다음은 경찰이 주선한 교섭 일지다. 이 모든 사항은 조현오 지시로 이뤄졌다.

 

- 5월 28일 : 경기청 정보분실장이 쌍용차 노조 한상균 지부장을 접촉하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노조 측은 기존의 ‘총고용보장’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무급휴직 안 등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다며 사측이 협상에 나서 줄 것을 촉구

 

- 6월 15일 : 경기청 정보계장과 담당정보관이 사측 박영태 사장과 노조 한상균 지부장을 쌍용차 본관 1층에서 접촉. 6월 17일 박영태 사장과 한상균 지부장이 단독 협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주선.

 

- 7월 8일 : 경기청 정보계장과 정보관 1명이 공장 내 노조사무실을 방문. 노조사무실에서 한상균 지부장을 접촉. 기존 ‘총고용 보장’ 주장에서 한발 물러나 현실성 있는 대화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회사 측이 교섭 주선 거부.

 

- 7월 중순부터는 경찰중재로 물밑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노조가 기존 입장을 철회하지 않음.

 

조현오도 직접 사측에 안을 제시했다. 정보계장을 통해 노조에도 의견을 전했다. 조현오 제안은 '독일식 일자리 나누기'였다. 각자 월급을 줄여 모두 껴안고 가자는 것이다. 노사는 모두 조현오 제안을 거절했다고 했다. 사측은 생산 효율성을 들어 반대했다. 해고 대상자가 아닌 노동자는 월급이 깎이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해고 노동자는 완전고용을 주장했다.

 

조현오는 2012년 7월 8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노사 양측을 중재하면서 잡셰어링으로 접근했는데 양쪽 다 씨도 안 먹혔다"라고 말했다.

 

7월 30일부터 8월 2일까지 교섭이 이어졌다. 사측은 정리해고자 가운데 40%만 구제하겠다는 안을 제시한다. 노조는 이 제안도 거부한다. 8월 2일 협상이 결렬되자 정보과 형사는 눈앞이 깜깜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이날 상황에 대한 노조 측 증언이 다르다. 2012년 9월 20일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한상균 지부장 말이다.

 

“우리 조합원이 모두 아는 상태에서 8월 1일 자 교섭을 정말 끝장 교섭이라고 하면서 진행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에 실질적으로 정리해고를 회피할 방법들에 대해서 근접했던, 그야말로 그래서 우리 모두 정말 아픔이 있었지만 원만히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디인지는 모르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그것들이 어느 순간 깡그리 무시되는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공권력 투입만 없었다면 노사 간 타협이 됐을 것”이라는 한상균 지부장 주장에 대해서 조현오는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강하게 받아쳤다.

 

반면 정보과 형사는 “지부장이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한상균 지부장의 고뇌를 잘 알고 있었다. 쌍용자동차는 1차 협력업체 255개, 2·3차 협력업체 1900여 개로 딸린 노동자만 약 10만여 명이었다.

 

만약 파업이 이어지면 협력업체 수만 명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경파들은 ‘완전 고용’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고를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 대상일 것은 자명했다. 당시 정보과는 강경파는 한상균 지부장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보고했다.

 

경찰은 합의점을 찾으려면 공권력으로 압박하여 강경파 입지를 좁히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도장 공장 폭파 위협’ 강경파 움직임도 정보보고로 올라왔다. 게다가 쌍용자동차 협력업체가 하나씩 부도 처리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공권력 행사를 마냥 미룰 수만은 없었다.

 


 

경찰은 8월 4일 작전을 시작했다. 12개 부대와 특공대 4개 대대를 동원해 폐수처리장 옥상을 장악했다. 5일 새벽이 되자 서울 등 타지역 부대가 속속 도착했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다. 작전 직전에 경찰청장인 강희락이 “위험하니까 작전하지 마라”라고 지시했다. 이미 인력과 장비를 모두 갖춘 상태였다. 충분히 작전 가능하다는 현장 판단이 있었다. 조현오는 청와대를 설득했다. 그리고 강희락에게 다시 작전지시를 받는다.

 

그런데 지방경찰청장이 경찰청장 지시를 무시한 것은 항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청문회에서 의원인 심상정은 “이게 어느 나라 위계질서냐”며 “강희락 경찰청장이 투입하지 말라고 했는데 조현오 청장이 찍어 눌러서 1시간 만에 지시를 번복하게 한 것 아니냐”라고 질책했다. 조현오는 이 대목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고했다.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 논리라면 부당한 지시는 언제나 따라야 하느냐? 공무원 세계에서는 상사 지시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그 상급자에게 이의신청이란 것을 할 수가 있다.”

 

8월 5일 경찰은 도장2공장을 제외하고 모두 장악했다. 당시 정보과 형사들은 노동자와 접촉할 때마다 경찰이 인화물질이 가장 많은 도장2공장 안에 들어오는 일은 없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태가 벌어지면 어느 문으로 나가면 된다는 말도 전했다. 8월 5일 조현오는 6일까지 나오면 선처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물리적, 심리적 압박에 못 이겨 노조는 8월 6일 사측과 합의했다.

 

조현오는 이듬해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영전했다. 그리고 2010년 8월 23일 경찰청장 인사청문회에서 “2009년 쌍용차 사태 해결로 10만여 명의 생존권을 지켜내고 국가경제의 피해를 최소화시킨 데 많은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쌍용차 진압작전이 끝나고 나서 수많은 사람이 전화로 찬사를 보냈다. 조현오는 칭찬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에 담긴 사회적 의미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진압으로 모든 완성차 업체 임금은 한 번에 동결됐다. 완성차 업체 노동자들은 파업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금속노조 전체 판은 그렇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2009년 10월 창원 대림자동차 노조가 무너졌다. 2010년 2월 경주에 있는 발레오만도 노조도 와해했다. 발레오만도는 직원 923명 중 621명이 조합원이었고 비정규직이 없다는 게 자랑이었던 업체였다. 그런데 취임 때부터 위기감을 조장하던 새 대표이사는 느닷없이 직장폐쇄를 강행했다. 노동조합 사무실도 용역을 투입해 출입을 막았다. 경주지역 금속노조는 연대파업을 벌였으나 노조 핵심 간부들은 바로 구속됐다.

 

2010년 6월 구미 KEC 여성 기숙사에 용역이 투입된다. 경주 발레오만도에 투입됐던 그 용역이었다. 그해 8월 대구 상신브레이크, 2011년 3월 광주 금호타이어까지 노동조합 파괴는 이어진다. 경찰과 검찰은 물론 노동부도 뒷짐을 지고 모른 척했다. 그리고 2개월 뒤인 5월 충남 아산에 있는 유성기업 차례가 됐다. 2012년 7월에는 안산 SJM 노조 농성장에 용역 깡패들이 들어왔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은 ‘야만의 새벽’이라는 제목으로 이 내용을 보도했다.

 

 

 

같은 달 퇴직한 조현오는 <도전과 혁신>이란 제목으로 출판기념회를 한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1층이었다. 책에서 조현오는 여전히 업적 중 하나로 쌍용차 진압작전을 내세웠다. 출판기념회 현장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화환이 가득했다. ‘부산고등학교’ 동문이 보낸 화환과 MB 정부 시절 또 다른 공적이었던 어청수가 보낸 화환이 눈에 띄었다. 필자는 잠시 둘러보고는 서울시청까지 걸어갔다.

 

서울시청 근처 덕수궁 앞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설치한 시위 천막이 눈에 띄었다. 쌍용차 희생자 추모와 더불어 정리해고 문제를 외치고 있었다. 길가에 주차한 경찰버스가 그 앞을 가렸다. 그날 밤 SNS에는 눈 한쪽이 멍든 조현오가 표지인 책 <도전과 혁신> 사진이 욕설과 함께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다.

 


 

조현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경찰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왜 늘 국민과 부딪힐까? 연재 시작에 밝혔듯이 그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제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도전과 혁신> 책에는 없는 내용이다.

 

조현오는 1955년생이다. 전쟁 중에 몸을 다친 군인을 ‘상이군인’이라고 한다. 전쟁 후 상이군인은 국가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몇몇은 일반 서민에게 돈을 달라며 행패를 부리곤 했다. 조현오 부모 가게에도 상이군인이 찾아와 물건을 걷어차며 행패를 부렸다고 했다. 그때는 조현오가 3살이 채 안 됐는데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였다. 조현오는 상이군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사지군인 씨팔, 자지야, 보지야.”

 

 

 

그러자 어머니는 막내아들 입을 황급히 틀어막고 방문을 닫았다. 60년대는 모두 가난했다. 조현오는 형편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다가 2년 늦게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돈이 없어 산을 넘어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1969년에 개봉한 <천년호>를 단체 관람했다. 하얀 소복을 입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귀신이 날아다녔다. 영화가 끝나 집으로 갈 때는 이미 밤늦은 시각이었다. 인적 없는 산길 숲 속에는 영화처럼 연못도 있었고 달빛도 비쳤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저 멀리 진짜 머리를 풀어헤치고 흰 옷을 입은 천년호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학생 조현오는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천년호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한 손에 돌을 들었다. 그리고 천년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에 칭칭 감겨 도는 비닐이었다.

 


 

조현오는 무인 기질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어머니 교육까지 더해졌다. 어머니는 조현오가 어릴 적부터 “남자는 용맹이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 어려운 시절 조현오 모친은 배급을 받으려 줄을 설 때 새치기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조현오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은 ‘정직’이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이 훌륭했다며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칭찬을 받았는데, 사회적 상황이 변했다고 잘못이 되는 것을 조현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청문회 불참으로 ‘불똥’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현오는 천년호도 피하지 않던 청소년이었다.

 

조현오는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 건으로 문재인 등에게 고소를 당했다. 당시 문재인은 고소취하 조건으로 ‘헛소리’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했다. 단순한 조현오는 사태를 크게 만들었다. 막강한 정보력을 갖춘 임경묵에게 들은 이야기를 ‘헛소리’라고 볼 수는 없다 판단한 것이다. 조현오는 결국 사자 명예훼손 건으로 기소됐고 재판부는 조현오가 지어내서 한 말이라고 판단했다. 세상은 조현오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거짓말을 가장 싫어했던 조현오는 거짓말쟁이로 전락한 상황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2015년 5월 건설업자 정모 씨에게 5000만 원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일었고 이제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제는 그를 버티게 했던 ‘청렴’이라는 한 축마저 무너질 판이다.

 

 

그럼에도 그는 울지 않았다. 조현오는 눈물이 지닌 의미를 ‘굴복’과 ‘나약함’이라고 답하곤 했다. 한참 있다가 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울어본 적은 있다고 덧붙였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물었다. 조현오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첫사랑 차였을 때. 자기는 학교 못 가고, 나는 좋은 데 가니까 여자가 안 만난다고.”

“영화 ‘닥터 지바고’ 마지막 장면에서.”

“내 첫 경찰 보직인,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시절에 직원들과 너무 정이 들어서 헤어질 때.”

 

경찰서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경찰 이야기로 돌아갔다. ‘치안상황’으로 주제가 옮겨갔다. 요즘 사람들은 상이군인이 행패를 부리던 상황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범죄와의 전쟁’이 벌어지던 1990년대 시절도 잊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불과 20년 전 상황인데도 말이다. 한국 치안이 매우 안정된 편인 것은 경찰 노력 덕이라고 했다. 아래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 경찰 후배들을 위해서 ‘전과자’가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출세욕을 위해 산 것처럼 보이는 그는 ‘나는 지휘관으로서 상황마다 판단을 잘해야 한다’는 다짐을 거듭했다고 했다. 조현오가 이런 생각을 한 계기 중 하나는 쌍용자동차 진압작전이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터는 23만여 평이다. 8월 4~5일 진압작전을 개시할 때 그는 헬기에서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도장1공장과 조립공장 옥상을 확보하는 과정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을 전개했다. 조현오는 상공에서 무전으로 작전에 동원된 모든 부대를 지휘했다. 조현오는 아래 이야기를 하면서 몇 번이나 목이 메곤 했다.

 

“헬기 위에서 내 명령 하나에 위험한 작전구역으로 들어가는 경찰대원들을 봤을 때….”

 

 

 

 

-The End-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구겨진 제복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조현오가 경찰에 입문한 1990년에는 전국에 집회·시위가 많았다. 1990년 1월 22일 대통령 노태우와 민주당 총재 김영삼, 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3당 합당을 선언하며 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생긴다. 전국에서는 3당 합당 반대 시위가 잇달았다. 부산도 마찬가지였다. 조현오는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었지만 시위가 열릴 때마다 경비를 담당했다. 부산대학교 옛 정문이 조현오 담당 구역이었다.

 

조현오는 당시 전·의경이 불편한 군화를 신는 것이 이상했다. 집회·시위를 관리하려면 움직이기 편한 운동화가 더 낫지 않느냐고 물었다. 주변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냥 경찰청에서 주는 거 입고 먹고 할 것이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당시 경찰 경비 복장은 대나무 진압복과 방석모, 알루미늄 방패였다. 방석모는 1963년 미제 군용 헬멧이다. 헬멧에 얼굴을 보호하는 철망을 붙였고 머리 뒷부분에 보호덮개를 붙였다. 1996년 눈 부위만 철망 대신 투명판으로 바꿨으나 쓰기에 여전히 무거웠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경찰이 사용하는 알루미늄 방패는 시위자에게 위협적이었다. 경찰청도 이를 개선하고자 휘어지면서 방어 기능을 할 수 있는 소재로 방패를 개발하려 했다. 하지만 부품 생산부터 시작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2006년이 되자 '안전방패'가 출시됐다. 청장은 이택순이었고 조현오는 감사관을 할 때였다. 그런데 국회의원 정두언이 안전방패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신제품은 본체와 손잡이를 나사 두 개로 연결해서 고정했다. 그런데 일정한 압력을 주자 손잡이가 분리됐다. 정두언은 불량을 지적하며 국정감사에서 유착 의혹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뉴스가 나오자 방패 개발을 담당했던 직원을 대상으로 경찰청 자체 감사가 시작됐다. 개발 과정에서 유착이 없더라도 사소한 실수가 지적돼 물의를 일으키면 경찰 위신이 떨어질 게 뻔했다. 이것만으로 인사 조치나 문책이 따르는 사안이었다. 이런 감찰 결과는 경찰청장에게 보고된다. 청장도 실무에서 올라온 의견에 이견이 없으면 결제할 것이다.

 

보고 계통이라는 게 이렇다. 경찰청장에게 보고는 실무 책임자인 과장(총경) 몫이다. 업무를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청장 처지에서도 계급 차이가 나는 과장에게 지시하는 게 편한 면이 있다. 그런데 이택순에게 보고서를 들고 나타난 이는 감사관인 조현오였다.

 

조현오는 비리가 없는데 문책을 하면 누가 적극적으로 장비 개발에 나서겠느냐고 되물었다. 정두언을 설득하는 것도 책임지겠다고 했다.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조현오는 정두언에게 조사 결과 문제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안전 방패는 나사를 2개에서 3개로 늘려 약점을 없앴고 지금도 잘 쓰고 있다.

 


 

2007년 경비국장이 된 조현오는 전·의경을 포함한 경찰관 부상자 통계를 접한다. 2005년 893명, 2006년 817명이었다. 조현오가 경찰이 되고 17년이 지났지만 장비는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조현오는 장비 개발을 서둘렀다. 경찰청 장비과에서 맡는 일이지만 모든 장비를 개발하도록 맡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통 경비·교통 분야는 장비를 자체 개발하는 편이다.

 

2008년 프랑스에서 접한 진압복을 참고한 신형 진압복 보급에 매진했다. 또 전·의경이 신는 군화를 운동화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2007년 10월에는 신형 방석모를 개발했다. 철망을 모두 제거한 자리에는 투명 플라스틱판을 부착했다. 그래도 조현오가 보기에는 부족했다. 여름철 집회·시위를 관리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장비였다. 조현오는 방석모 안에 소형 선풍기를 설치하든, 냉매를 부착하든 아이디어를 내라고 재촉했다.

 

살수차를 본격적으로 보급한 것도 이 시기다. 살수차는 생산은 예전부터 했지만 현장에 투입하지는 못했다. 살수차 투입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한 경찰은 집회·시위 관리에서 조현오가 아주 질색하는 장면 두 가지를 꼽았다. 먼저 현장 폴리스라인에 여경을 배치하는 것이다. 집회·시위 참석자가 움츠러들게 해야 하는데 여성을 내세우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뭘까.

 

"명박산성? 조현오는 그런 거 안 좋아해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을 아주 싫어하지요. 막아놓고 기다릴 게 아니라 그 단계로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쪽이에요."

 

 

 

물론 집회·시위를 관리할 때 시민과 경찰이 모두 다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경찰이 집회 참석자를 상대로 무리하게 대응한다는 비판은 언론이 단골로 다루는 내용이었다. 조직 상부를 비롯해 청와대에서 나오는 검거 지시에 맞추려면 변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서로 피해를 줄이면서 검거할 방법으로 개발한 게 채증이다. 조현오는 경비국장을 하면서 채증 장비와 인원을 대폭 늘린다.

 

조현오는 직원에게 안전하게 시위자를 검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물을 던지면 시위자가 잡히는 그물을 개발해보라고 한 것이다. <수호지>를 읽다가 떠오른 생각이라는데 당시 지시를 받은 직원은 무모한 아이디어에 당황했다고 한다. 그물이 서로 피해 없이 시위 참가자를 검거하는 방법으로는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경찰봉을 잘못 휘둘러도 폭력으로 규정하는 분위기에서 그물망으로 시위자를 검거하는 방법이 용납될 리가 없었다. 당시 기자실에서 기자와 얘기하는 것을 즐겼던 조현오는 장비 개발 이야기도 꺼냈다. 그 직원은 조현오가 그물망 이야기를 불쑥 꺼내자 “이건 아이디어다, 스케치하는 차원이다, 절대 개발하지 않는다, 계획에 없다”며 뒷말을 막느라 혼을 뺐다.

 

조현오는 이런 아이디어도 냈다. 2007년 <황우화>(장예모 감독)가 개봉됐다. 황제(주윤발)를 몰아내고자 황후(공리)와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내용이었다. 영화 후반부 모든 것을 꿰뚫었던 황제는 반란군이 궁 안으로 쳐들어오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차벽으로 진입을 막고 화살로 반란군을 몰살한다. 이 영화를 본 조현오는 바로 집회 현장에 적용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온 게 '차벽 트럭'이다.

 

 

스위치를 켜면 트럭에 접혀 있던 방호벽이 작동하면서 폭 8.6미터, 높이 4.1미터 '이동식 장벽'으로 변신한다. 이 방호벽은 쇠 파이프나 대형 망치로 내리쳐도 손상이 없었다.

 

조현오 경비국장 시절, 2007년 연말, 대통령 선거를 치뤘다. 당선자는 이명박이었다. 이명박은 노동자보다 기업 이익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금속노조 전체 판을 예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시작이 쌍용자동차 사태다. 2009년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이 된다. 2009년 5월 22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총고용 보장, 정리해고 불가와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정상화 등을 요구하며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경찰과 해고 노동자 양쪽 모두 총역량을 쏟아부었다. 우선 노동자부터 살펴보자.

 

금속노조는 핵심사업장인 쌍용차 지부를 지원하는 투쟁에 들어간다. 1998년 현대자동차 사태, 2001년 대우자동차 사태를 거치면서 학습한 게 있었다. 현대자동차 사태는 강성 투쟁으로 사측을 압박해 정리해고 인원을 줄일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우자동차가 공권력에 밀린 원인은 도장 공장을 점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됐다. 쌍용차 지부에는 모든 투쟁 전술이 전수됐다. 쌍용차 노조는 2009년 5월 21일 총파업 선언, 22일부터 공장 점거 농성에 들어갔고 8월 6일까지 77일 동안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 쪽을 보자. 경찰은 2005년 오산 철거민 망루 시위에 대응하면서 배운 게 있었다. 농성이 54일 동안 진행되면서 철거민은 옥상에서 경찰을 향해 새총을 쏘고 골프공을 날렸다. 그러자 경찰도 똑같이 새총을 만들어 철거민을 향해 쐈다. 한 소대장은 골프채를 갖고 와서 철거민이 던진 골프공을 놓고 샷을 했다. 그 일로 소대장은 승진하지 못한다. 법이 규정한 장비를 쓰지 않으면 승진이 막힌다는 사실이 경찰 조직에 각인됐다.

 

2009년 1월 19일 용산사태가 벌어졌다. 망루 시위 하루 만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됐고 철거민 5명과 경찰관 한 명이 사망했다. 경찰 작전이 무리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경찰은 작전을 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명분과 여론을 등에 업는 게 중요했다.

 

쌍용차 노동자는 경찰과 대치하면서 볼트총을 쏘고 화염병을 던졌다. 경찰은 불법행위로 규정했지만 여론은 '밥그릇 지키고자 하는 행동'이라며 동정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경찰 지휘부는 경찰이 피해를 당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노동자에게 최루액을 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인체에 유해하다', '한 해 소비량 90%를 쏟아부었다'며 비판했다. 경찰은 최루액은 경찰관 직무집행법 장비 관련 규정에 근거한 장비이며 그해에는 최루액을 쏠 다른 시위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경찰도 지키고 작전 수행에도 효과적이며 언론 비판도 피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했다. 첫 장비가 바로 조현오가 ‘트로이목마’에서 착안한 '방패막'이었다. 방패막은 상단은 투명판, 하단은 철판을 부착하고 방패 아래에 바퀴를 부착해 이동할 수 있었다. 경찰은 볼트총과 화염병 공격에도 방패막을 움직이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장비만으로 안전한 집회·시위 관리가 가능하지는 않았다. 전·의경도 시위자가 휘두르는 쇠 파이프에 대응하다 보면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다. 경찰봉으로 시위자를 때리고 발로 밟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현장에서는 무엇보다 부대원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중요했다. 경비국장 시절 조현오는 집회·시위 현장에서 지휘관을 소대원 앞에 세웠다. 부대원 30명 정도는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조현오는 부대 운영을 계속 고민했다. 1997년 한양대 한총련 사태 때 경험에서도 얻은 게 있었다. 조현오는 당시 고립된 부대를 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조현오는 부대장을 모아놓고 따라오라 지시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니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게다가 현장에 도착하니 고립된 부대가 없었다. 혼자 실컷 돌만 맞은 조현오는 부대장들에 지방청에 보고하겠다며 화를 냈다. 물론 말뿐이었다. 부대장 처지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에서 부대가 모였는데 현장에서 만난 부대장과 격대장은 처음 보는 사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충성심이 생기기는 어려웠다. 조현오는 경비국장 시절 격대장과 단위 부대장은 서로 신뢰하는 사람을 묶어 부대 배치를 하도록 했다.

 

부대 사이 의사소통도 중요했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무선망을 복수로 운영한다. 한총련 사태 때 고립은 결국 단일 회선에서 무선을 남발하며 소통이 막힌 게 원인이었다. 조현오는 총경이 사용하는 망은 따로 운영했다.

 

이렇게 축적된 경험은 쌍용차 진압작전에 총투입됐다. 조현오는 1998년 현대자동차 사태도 겪었다. 여기에 2006년 평택 미군기지 이전 작전에 투입됐던 참모도 뒤를 받쳤다. 계획을 세울 때 현장을 답사해 거리 계산, 도로 상황 파악, 이동 방법, 차단 방법, 장애 요인 등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쌍용차는 워낙 공장이 크고 공간도 복잡해 더 많은 분석과 판단이 필요했다.

 

(다음 20화. 최종화-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구겨진 제복 18화. 대통령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경호는 어디서 하나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대통령 경호실이 떠오른다. 그러나 경호 개념이 처음 나온 것은 1949년 내무부 훈령 제25조(경호 규정)다. 1945년 해방 이후 경호는 내무부 직속기관이었던 경찰 몫이었다. 청와대 경비와 대통령 경호 업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대통령 직속기관인 경호실을 만든다. 대통령 직속 경호실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나라에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하지만 경호실은 미국도 우리와 비슷하지 않으냐고 주장했다.

 

과연 미국이 한국 경호실과 닮은 경우일까? 미국 예를 살펴보자. 미국 대통령 경호는 미연방 보안업무(United States Secret Service)가 맡는다. USSS는 원래 대통령 직속 조직이 아니었다. 19세기 남북전쟁 때 주마다 화폐가 달라 위조지폐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했다. 화폐 위조범을 잡는 연방경찰 필요성은 점점 높아졌다. USSS는 위조지폐를 단속하고자 1865년 재무부 산하에 만든 조직이다. 그리고 1901년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대통령 경호 업무를 맡게 된다.

 

 

 

USSS는 수사와 경호를 겸한다. 대통령이 바뀌면 이전에 경호팀은 수사로 돌아가고 다시 경호팀을 꾸리는 구조다. 경호 업무는 정권과 함께 순환한다. 클린턴을 경호했던 사람이 부시에게 고자질할 가능성을 굳이 남길 이유가 없다.

 

또 순환하지 않는 조직에는 기득권이 생긴다. 경호실장이 업무 영역을 넘어 권력 구조에서 정점이 될 수도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차지철이 대표적인 경우다. 정권 이인자로 군림해 군과 경찰 인사에 개입하고 국회까지 친위세력을 심어 정권을 농단하다 비극을 불렀다.

 

최근 사례를 보자. 대통령 퇴임 후 거주할 사저를 사들이는 것은 대통령 비서실 업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때는 경호처장인 김인종이 사저 매입 업무를 도맡았다. 경호처장 힘이 정점을 찍었던 셈이다.

 

미국경호팀 현장근무요원은 45세 이상이 없다. 그런데 한국은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2000년 김대중 정권 시절 경호실법 개정으로 경호실 직원 정년이 보장된다. 그러자 내부적으로 인사적체와 고령화 문제가 불거졌다. 젊은 인재를 뽑으려면 조직 확대가 필요하다. 조직이 확대되려면 업무가 그만큼 늘어야 했다. 마침 기회가 왔다. 2006년 5월 20일 한나라당 대표인 박근혜가 선거 유세 중 피습을 당했다. 국회는 여야 없이 '중요 정치인'도 경호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대통령을 제외한 인사 경호는 경찰이 담당했다. 전국 지방청과 경찰서 인력을 활용하고, 경호 행사는 관할 서장이 책임지고, 서 단위를 넘는 경비는 지방청 경비과장이 지원한다. 경찰청 경호과장은 지방청과 경찰서 사이에서 조율과 협력을 맡는다.

 

그런데 대통령 경호실법을 고쳐서 대통경 경호실이 대통령선거 후보, 국무총리, 국가 주요 인사에 대한 경호를 맡도록 법안 개정 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관심은 대선 주자 경호 주체에 쏠렸다. 한나라당 의원인 김정훈이 발의한 '요인 경호법'에서 경호 주체는 경찰이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의원인 강성종은 '대통령 경호실법 개정안'으로 대통령 경호실 편을 들었다. 이러면 경찰과 경호실 관계는 수사에서 검찰과 경찰 관계가 되는 것이다. 외국에서 수상이 한국에 오면 경찰은 경호실을 뒷바라지하는 모양새였다. 경찰은 울화통이 터졌으나 경호실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경호실은 경찰청 경비국 인사에도 개입했다.

 


 

2006년 12월 4일 조현오가 경비국장으로 취임한다. 현재 경찰청 경비국은 경비과, 경호과, 항공과와 대테러 업무를 다루는 위기관리센터로 나뉜다. 그중 경호실은 경호과장 인사에 개입하고자 했다. 조현오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이 상황을 경호실과 갈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인사 개입 자체가 부당한 것이었다. 조현오는 경호실, 검찰뿐 아니라 국가정보원과도 부딪혔다.

 

2010년 12월 평창동계올림픽유치단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대회 유치 신청서를 냈다. 신청서에는 행사 안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담겼다. 안전관리 통제본부를 설치하고 안전대책위원회 위원장과 본부장은 국무총리와 경찰청장이 맡도록 했다.

 

보통 안전 문제는 경찰 조직이 컨트롤타워를 맡는 게 국제적인 관례였다. 테러가 발생하면 상황을 통제하고 폭발물을 처리하는 현장 조치는 기본적으로 경찰이 책임진다. 아울러 경비, 교통 관리, 화재 예방, 재난·재해 발생 시 구조·구급 활동까지 경찰 업무에 들어간다.

 

하지만 국정원은 '북한 위협'과 '테러 방지'를 앞세워 자기 조직이 총괄하겠다고 나섰다. 법적으로 대테러 업무를 맡는 기관은 국정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러에 예민한 미국도 중앙정보국(CIA)이 국제경기대회 안전을 총괄하지는 않는다. 조현오는 이렇게 반발했다.

 

"그런 식으로 경찰 지휘하려고 하지 말고 경찰을 내줄 테니 가져가라."

 

국정원이 '북한 위협'이나 '테러'에 별로 반응하지 않던 때도 있었다. 2007년 말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이명박, 민주당 후보는 정동영이었다. 북한은 방송으로 보수 꼴통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여러 번 전했다. 북한은 오직 이명박만 공격했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북한은 이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에게 늘 이런 공격을 했다. 북한이 선거에 개입하려면 어떤 방법을 쓸까.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전쟁이 있겠지만 이는 군대가 맡을 영역이다. 폭발물 테러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방법에는 극소수 인원이 동원될 것이다. 조현오가 또 나섰다.

 

 

조현오는 대선 후보 경호인력을 늘렸고 경찰특공대도 투입했다. 또 선거 유세 장소 외곽 건물 옥상에는 저격수를 배치했다. 북한을 향한 위용 과시 목적으로 장갑차를 배치하기도 했다.

 


 

대통령 당선자는 이명박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경호실을 차관급인 경호처로 낮췄다. 2013년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경호처장을 장관급인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승격했다.

 

2014년 제정한 '평창겨울올림픽 지원에 관한 법률과 시행령'은 안전 총괄자가 국정원장으로 돼 있다. 2014년 인천아시아경기대회, 2015년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안전 관리 주체는 국정원이다. 경찰은 국정원 지휘에 따라야 한다.

 


 

조직에서 권한과 자긍심은 비례한다. 조현오는 어릴 적부터 경찰을 동경했고, 잘 나가던 외무부 생활을 접고 경찰로 옮겼다. 하지만 경찰 구성원도 조현오만큼 경찰 조직원으로서 자긍심이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로 살기에는 여러 가지 환경이 열악했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 시간 외 수당, 수사비 등을 정비해 제대로 된 환경을 갖춰주고자 했다.

 

성과를 외부에 선전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장자연 사건 수사는 경찰이 완벽하게 해냈고 쌍용차 진압 작전도 경찰이 변수 없이 잘했다고 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은 국민정서와 멀었다. 장자연 사건은 장자연 사망으로 경찰 수사 한계를 인정해야 했고 쌍용차 진압 작전도 경찰특공대에게 몽둥이 세례를 당한 해고 노동자에게 유감을 표하며 고개 숙여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 거론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비판도 일었다.

 

공권력을 향한 국민정서는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다. 집회가 불법사태로 번지면 경찰은 진압할 수밖에 없다. 경찰 진압을 충돌이라고 하고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영미법계에서는 없는 일이다. 영미법계는 공권력이 무척 센 편이며 법에 대한 도전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 대륙법계는 상대적으로 공권력이 약하다. 그렇더라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 시위는 강도가 약한 편이다. 2011년 유럽에서 시위 현장을 목격한 한 경찰은 프랑스 시위 강도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했다. 우리처럼 조직적이지는 않지만 경찰에게 돌을 던지거나 시위 현장에 총기가 등장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2005년 프랑스에서는 이민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전국적으로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시위자들은 자동차와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고 경찰을 공격하기도 했다. 당시 내무부장관인 사르코지는 강경하게 대처했다. 진압 과정에서 최루탄을 발사했고 경찰 진압도 적극적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불거지는 경찰을 향한 비판 역시 우리와 비슷하다. 법 준수보다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는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 시민을 때리는 것보다 시민이 경찰을 때리는 게 훨씬 건강한 사회 아닌가요? 인권이 진전된 것이지요."

 

하지만 경찰을 지휘하는 조현오 생각은 달랐다. 그는 두 가지를 항상 강조했다. 공권력이 절대 밀리면 안 되고 경찰과 시민 모두 다쳐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2007년 경비국장이던 조현오는 경비과장으로 장전배를 요청한다. 장전배는 조현오가 부산동부경찰서 형사과장으로 있을 때 같은 경찰서에서 경비과장을 했다. 일을 다부지게 잘했고 추진력이 좋았다. 장전배는 2010년 치안감 승진 명단에도 포함됐다.

 

조현오는 장전배에게 2008년부터 신형 진압복을 보급하도록 지시한다. 신형 진압복은 프랑스 경찰관 기동대 보호복을 참고했다. 두께가 4밀리미터인 플라스틱 보호대를 두꺼운 섬유로 옷처럼 이어 붙여서 가슴, 어깨, 팔, 무릎을 보호하도록 한 것이다. 가슴 보호대는 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

 

그전까지 경찰이 입었던 것은 대나무 진압복이었다. 두꺼운 솜옷 사이에 대나무 조각을 넣어 만든 것이었다. 이 진압복을 입은 경찰은 모양새는 둘째 치고 쇠 파이프를 견딜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조현오도 경찰이 되고 이 대나무 진압복을 입었다.

 


 

1997년 5월 31일 한양대에서 한총련 사태가 벌어졌다. 출범식에 참가하려는 학생이 전날부터 전국에서 모였다. 경비를 담당할 경찰 중대(부대)도 전국에서 모였다. 전의경 중대 인원은 150명 정도였다. 각 중대는 경감이 통솔했고 3~4개 중대를 격대장이 맡았다. 조현오는 격대장이었다.

 

경찰은 한양대 주변에 전의경 53개 중대 6400여 명을 배치해 학생 출입을 차단했다. 학생들은 출입을 막는 경찰에게 화염병과 돌을 던지고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포위된 부대도 있었다. 조현오가 한양대 전철역에 고립된 부대를 구출하라고 지시했다. 조현오는 부대원들에게 이렇게 외치며 앞장섰다.

 

“나를 따르라!”

 

전철역사 사방에서 화염병과 돌이 날라 왔다. 목적지에 도착한 조현오가 뒤를 돌아보자 끝까지 따라온 이들이 없었다.

 

 

 

경찰서에 돌아온 조현오는 진압복을 하나씩 벗었다.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2005년 경찰청장인 허준영은 경찰 직원을 유럽에 보냈다. 프랑스 경찰관 기동대 보호복은 접한 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보호복을 입고 맞았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보호복은 ‘로보캅’ 그 자체였다.

 

 

(다음 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구겨진 제복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차명계좌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조현오를 향해 언론은 '공감능력'을 지적했다. 인간 감정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지 않고서야 '차명계좌 발언'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조현오 주변 사람도 공감능력 부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 '외통수' 기질 덕에 역대 경찰청장 가운데 청와대를 향해 가장 강한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1990년 경찰이 되고 여러 사람에게 지시를 받아야 했다. 경찰청장이 청와대 수석 등 지휘계통이 아닌 사람들에게 지시받아야 하는 법적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마디 하면 통상 경찰청장을 거쳐 경찰 조직으로 하달됐다. 2010년 8월 30일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지휘권부터 바로잡고자 했다. 직원에게 전달되는 것은 오직 경찰청장 지시뿐이었다.

 

경찰청장 지휘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사권이다.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맹형규와 행안위원장이던 안경률은 인사에 일체 간섭이 없었다. 참여정부 시절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김두관도 인사에 개입하지 않았다 자신했다. 

 

 

MB는 어땠을까. 조현오는 MB도 지휘권에 간섭이 없었다며 고마워했다. 조현오는 2년에 걸쳐 경찰 고위급 인사를 단행했다. 그는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인사를 단행했다고 자부한다. 하나씩 살펴보자.

 


 

2010년 치안정감(9월 7일), 치안감(12월 2일), 경무관(12월 3일) 인사를 단행하는 시점에 조현오는 여야 의원 10여 명에게 인사청탁을 받았다. 그때마다 조현오는 청탁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했고, 대부분 의원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전화를 끊었다. 경찰 고위직 인사는 청와대 정무수석과, 비서실장, 민정수석, 인사비서관과 경찰청장이 논의한다.

 

민정수석은 승진자 적격 여부를 검증했다. 보통 민정수석은 검찰과 연락할 일이 많기에 검찰 출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검찰 눈 밖에 난 경찰은 승진하기 어려운 구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민정수석에 맞서 경찰청장은 어떻게 인사 주도권을 쥘 수 있을까. 조현오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당시 민정수석은 권재진이었다. 그는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후보자 적격 여부를 따졌는데 조현오가 이렇게 말했다.

 

"경찰청장 지휘권은 인사권인데 그것도 제대로 행사 못 한다면 차라리 그만두겠습니다."

 

조현오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인사를 했다. 이때 인사에서 나타난 특징을 보자. 조현오는 2010년 인사를 시작으로 경무관 자리는 서울 총경 몫이라는 관행을 바꾼다. 이 같은 관행이 생긴 배경에는 '서울 치안이 곧 대한민국 치안'이라는 서울 중심 사고가 있다.

 

하지만 부산과 경기에서 지휘관 생활을 한 조현오는 치안 활동이 공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2010년에는 부산총경과 광주 총경, 2011년에는 경기도에서 오래 근무한 총경이 경무관으로 승진한다. 그들은 조현오가 지방청장이던 시절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해낼 만큼 업무역량이 탁월했다.

 

그러나 경무관 경쟁에 밀린 사람들에게는 조현오가 자기 사람을 챙기는 것으로 보였을 테다. 조현오는 '자기 사람 챙긴다'는 시선을 경찰 개혁 차원에서 발탁 인사였다고 주장했다. 그 사람들 중 일부가 나중에 친해졌을 뿐이며 꽤 많은 사람이 조현오가 감옥에 있을 때 면회를 오지 않았다고 했다.

 


 

2011년 초, 민정수석인 권재진과 코리아나 호텔 중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권재진은 2010년 인사에 자기 의견이 반영되지 않아서 꽤 불쾌해 했다. 그런데 인사가 끝나고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가 불거진다.

 

권재진은 당시 "검찰이 차명계좌 사건을 수사 중인데 조 청장이 수사권 관련해서 그렇게 강하게 발언해도 되느냐"라고 물었다. 조현오는 언성을 높여 받아쳤다고 한다. 물론 조현오는 그런 분위기에서도 코스 요리를 모두 끝까지 먹기는 했다.

 

 

이후 '조현오는 통제되지 않는 사람이다', '조현오는 또라이다' 같은 소문이 나돌았다. 조현오는 이런 소문을 애써 막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이 경찰청장 지휘권 발휘에 도움이 됐다. 누구도 조현오를 건들지 않았다. 외부 청탁 전화도 뚝 끊겼다.

 

 


 

2011년 연말 두 번째 경찰 고위직 인사 내용을 보자. 이때 민정수석은 정진영이다. 당시 정진영은 승진 후보자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비롯해 각종 자료를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부동산 투기', '검찰 수사 중', '위장전입' 등을 언급하며 조현오가 낸 인사 안을 반대했다. 이때 조현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민정 자료 못 믿겠다."

 

정진영은 발끈하며 "민정수석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조현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민정수석실 자료에 직접 당한 피해자 아닌가요? 민정수석실에서 조현오가 조폭 행동대장과 의형제 맺어 유흥업소에 10억 투자하고 월 2500만 원씩 배당받았다고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했잖습니까?"

 

조현오는 원래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이때 '수사권의 상징'인 황운하가 경무관으로 승진한다. 또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가 눈에 띈다. 바로 2010년 승진한 경무관 김성근(58년생)이 1년 만에 치안감으로 승진한 것이다. 아무리 공정하다고 해도 이런 파격 인사는 자기 사람만 확실하게 챙긴다는 여론을 만들 수밖에 없다. 물론 조현오는 김성근과 처음부터 잘 알던 사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조현오가 김성근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경남지방경찰청 경비과장으로 있을 때다. 당시는 IMF 직후 현대자동차 사태로 노사관계가 악화하면서 경남지방경찰청도 나름대로 경비대책 준비단계에 들어갔다. 경비계장이 제출한 대책안을 본 조현오는 ‘경찰에 이런 인재가 있었나’ 싶었다고 한다. 문서 작성 능력이 돋보였던 경비계장이 바로 김성근이다. 김성근은 간부후보 35기로 입문해 경찰청 정보분실팀장을 지냈다.

 

정보와 경비는 밀접하다. 경비작전을 세울 때 집회 참가자 경로와 방어 중점 포인트를 찍으면 그만큼 부대 배치 등 경비 단계가 수월해진다. 조현오는 경남지방경찰청에 있을 때 김성근과 저녁을 먹으며 경험담을 나누곤 했다. 김성근은 일반인이 경험할 수 없는 인적 네트워크를 정보국 경험을 통해 꿰고 있었다.

 

김성근과 다시 만난 것은 2006년 12월 조현오가 경비국장이 됐을 때다. 경비국에는 경비과, 경호과, 항공과가 있다. 조현오는 경호과장으로 김성근을 요청했다. 다음은 당시 경비국에 근무한 한 직원이 들려 준 얘기다.


 

2007년 3월 12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조현오 출연이 예정돼 있었다. 주제는 'FTA 반대 시위, 또다시 과잉진압 논란'이었다. 경비과 담당 직원이 작가에게 질문을 미리 받아 답변을 준비했다. 3월 12일 출연 시각이 다가오자 경비과 담당 직원은 경비국장실에서 조현오 옆에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김성근이 경비국장실에 들어왔다. 김성근은 라디오를 허리춤에 차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어폰이 빠지지 않도록 볼에 테이프도 붙였다. 손석희가 조현오와 연결을 예고했다.

 

"경찰청의 조현오 경비국장을 연결하겠습니다. 여보세요."

 

"네, 경찰청 경비국장 조현오입니다."

 

(중략)

 

"그렇다 하더라도 집 떠나는 사람부터 막은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으냐는 지적인데요."

 

"저희 경찰에서는 경찰관 직무집행법 6조 범죄의 예방과 제지라는 그 근거 규정에 따라서 불법집회 참가하려는 시위대를 출발지에서 상경 차단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몇조라고 말씀하셨지요?"

 

"경찰관 직무집행법 6조의 범죄의 예방과 제지에 관한 규정 하고요…."

 

조현오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김성근은 손석희가 질문을 할 때마다 답을 적은 메모를 건네려 했다. 당시 이를 지켜본 직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경호과장이 경비과 업무로 준비해 오는 걸 보니 제가 담당자인데 부끄럽더라고요. 자기 일도 아닌데. 경비과장도 안 하는데…."

 

2010년 1월 조현오가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됐을 때 김성근은 정보1과장을 맡았다. 정보1과장은 집회나 시위 예상 정보를 파악해 대비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연초부터 농민회, 노동계가 그해 11월 11일에 있을 G20 행사 저지 조짐을 보인다는 정보가 올라왔다. 서울은 2008년 촛불집회 경험이 있어 서울 도심에 집회를 막았다. 2010년 조현오는 집회를 허용하는 쪽으로 나갔다. 이렇게 통제하면 연말에 더 폭발한다며 청와대를 설득했다.

 

조현오는 농민계와 노동계 대표도 직접 만나 설득했다. 당시 조현오 행보에 서울청장이 할 일이냐는 논란이 분분했다고 한다. 5월 12일 서울경찰청은 서울 청계광장에서 시중보다 싼 값에 판매하는 '우리 농산물 홍보 행사'를 마련한다. 경찰악대도 행사에 동원됐다. 경찰이 농민연합과 우리 농산물 홍보 협약을 맺고 직거래 구입에 나섰다. 2014년 쌀 시장 전면 개방 문제로 서울 도심에서 농민들이 집회를 벌였다. 9월 농민 대표들이 서울에서 집회를 하기 전 서울청장 구은수와 식사 자리를 했다. 이때 농민 대표로 참석한 사람이 "나는 조현오와 같은 함안 조 씨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2010년 8월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됐다. 경무관 승진 인사에 앞서 경찰청, 서울청 총경을 대상으로 성과에 따른 상위 30% 명단을 공개했다. 김성근도 포함돼 있었다. 경무관 인사를 단행하면서 조현오는 김성근을 서울청 정보관리부장에 배치한다. 경찰청 정보분실팀장, 서울청 정보과장 등 정보 중요 보직을 맡아 능력 검증과 더불어 조직 장악이 가능했다.

 

앞으로 조현오가 경찰 개혁을 비롯한 수사권 문제로 청와대를 설득해야 할 텐데 서울청 정보과장 출신이면 그런 인맥을 갖게 된다. 또 서울청도 경찰청처럼 정보분실을 두고 있다.

 

정보 형사는 정부기관, 사회단체, 지역별 담당 구역을 정하고 배치해 정보를 수집한다. 2012년 '안철수 사찰 논란'이 일었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이 안철수 뒷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사찰 논란'이라는 타이틀로 공격했다. 이런 논란에 대해 전직 경찰 정보과 출신들 생각은 달랐다. 경찰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관이다. 즉 경찰 정보 수집은 집회나 시위 관련 정보로 한정하는 게 목적에 어울린다. 그런데 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2조(직무의 범위)에는 '치안(public safety) 정보의 수집·작성 및 배포'를 수행한다고 나온다. 그래서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치안이나 정보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정보 수집 목적과 활용도다. 경찰은 당연히 위 규정을 확장해서 해석하려 할 것이고 언론은 축소해서 볼 것이다. 경찰 정보과 출신은 경찰이 전반적인 정보 업무를 모두 취급하는 한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다.

 

조현오는 2011년 김성근을 치안감으로 승진시키고 정보국장에 임명했다. 네티즌은 정권에 잘 보인 대가라고 했다.

 

조현오는 왜 김성근을 초고속 승진시킨 것일까. 경찰청 정보과는 보통 사무실에서 정보를 분석한다. 하지만 정보국장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정보국장은 자기가 직접 움직이기도 하지만 전국에 정보관을 동원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당시 조현오는 경찰관 시간 외 근무수당과 사건 수사비 현실화 문제에 매진했다. 사건 수사비는 범죄를 수사하고 범인을 추적하고 검거할 때까지 들어가는 경비를 말한다. 수사가 부족해 유류비, 통신비 등을 형사 개인에게 부담하라는 것은 국민에게 삥을 뜯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조현오는 수사 중 드는 비용을 모두 해결해줘야 반듯한 경찰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예산 확보를 위해서는 해당 부서가 논리를 마련하고 실무협의를 통해 진행하고 정보는 입장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보국 업무 범위는 포괄적이다.

 

당시 조현오는 '수사권 조정'이라는 다른 목표가 있었다. 그러려면 정보국장은 법률 개정 등을 위해 여야 중진을 만나야 한다. 한나라당은 황우여(47년생), 민주당은 박지원(42년생)이 원내대표였다. 1961년생 경찰대 1기 출신은 한국 나이로는 52세였다. 조현오는 여야 중진을 만나려면 나이가 좀 더 있는 간부후보 출신들이 낫다 판단했다.

 

경찰청장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여야 중진과 관계도 원만해야 했다. 조현오는 김성근에게서 이러한 자질이 돋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경무관이던 김성근을 승진시켜 정보국장으로 발령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현오는 김성근과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다. 바로 2007년 경비국장 때 청와대 경호실과 맞부딪힌 일이었다.

 

(다음 18화-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구겨진 제복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2005년 1월 27일 경찰청장 허준영은 조현오를 경무관으로 승진시켜 경찰청 외사관리관으로 발령 낸다. 외사관리관실은 1과에서 3과까지 있다. 외사1과는 외사기획 국제협력, 2과는 외사정보, 3과는 외사수사로 나뉜다. 허준영은 2월 3일 총경 인사를 단행하며 외사1과장 자리를 잠시 비워두라고 지시한다. 그 자리는 2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와 법정투쟁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는 총경 몫이라고 했다. 그 총경이 이철규였다.

 


 

강원도 출신인 이철규는 1981년 간부 후보 29기 출신으로 입학, 졸업을 수석으로 장식한 인재였다. 하지만 경찰 공직 생활은 자괴감과 함께 출발했다. 나이 든 경찰간부들이 젊은 검사를 모시는 모습을 접했고, 검찰은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힘든 요구를 하며 경찰을 통제했다. 1997년 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때 이철규는 혜화경찰서 정보과장이었다.

 

경정 신분인 이철규는 정권인수위원회에 파견된다. 당시 김대중이 내세운 공약 중에는 '경찰 수사 독자성 보장'도 있었다. 경찰청이 ‘경찰수사의 독자성 보장’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는 걸 검찰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경찰 지휘부가 과거와 달리 강력하게 추진하자, 얼마 후 경찰청 정보국장인 박희원과 특수수사과장인 박정원이 검찰에 구속된다. 경찰은 '수사권독립 요구에 대한 표적수사'라고 반발했으나 추진동력은 이내 소멸됐다.

 


 

이철규는 1998년 총경으로 승진했고, 2002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안산경찰서장에서 자리를 옮겨 분당경찰서 서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즈음 참여정부가 법무부 장관으로 강금실을 임명하자 검찰은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2003년 3월 9일 평검사들은 대통령 노무현과 공개토론에서 맞짱을 떴다. 그리고 검찰총장 김각영은 그날 대통령 비난 성명을 내고 사퇴한다.

 

3월 17일 검찰은 '권력형 비리 전담 수사기구'를 신설을 발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30일 분당경찰서장 이철규가 수뢰혐의로 구속된다. 2001년 안산서장 때 공사 비리 관련 진정이 들어온 사건을 2000만 원을 받고 무마했다는 혐의였다. 검찰은 뇌물을 주었다는 심 모씨 진술 말고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심 씨는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다. 당시 서울대병원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경찰서장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허위자백을 강요받고 2번 졸도하면서 사람을 못 알아보는 증상이 재발하였다'.

 

 

이처럼 검찰에서 허위자백만 받아내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참여정부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통해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하지만, 검찰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형사소송법 개정은 흐지부지됐다.

 


 

이철규는 2005년 5월 10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을 받고 사흘 뒤 경찰청 외사1과장으로 복귀한다. 당시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몇 가지 과제를 맡겼다. 그중에 하나가 외사관리관실을 외사국으로 승격시키고 20명인 해외 주재관을 50명으로 증원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주재관은 계급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경찰 계급은 전 세계가 비슷하다. 계급에 대한 존중도 마찬가지다. 직급이 있는 경찰이 외국으로 나가야 그 나라에서 직급이 있는 경찰을 만날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만큼 쉽게 풀 수 있다는 것이다.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가 김선일 씨를 살해하면서 해외 교민과 여행객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외국민보호'처럼 문서에나 채울 논리가 아니다. 바로 결정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이다. 외사국 증원 1차 관문은 ‘외교부 영사국’이었다. 외교부가 필요성을 동의해야 행정자치부, 기획재정부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 행정자치부는 공무원 정원을 결정하며 기획재정부는 예산을 편성한다. 물론 행정자치부와 기획재정부 역시 만만찮다. 두 부처 모두 습관적인 칼질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철규 과장은 조현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훗날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철규처럼 못한다"고 회상했다. 조현오는 이철규가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마당발'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이철규를 곁에서 지켜본 직원들은 그가 중앙부처를 드나들면서 관련 공무원 설득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한 공무원 아버지가 경주에 산다는 얘기를 들은 이철규는 그 지역 서장에게 따로 부탁했다. 그러면 서장은 공무원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이 경찰을 위해 애써 주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또 이철규는 또 부모님이 일찍 사망해 형에게 키워졌다는 기재부 공무원 얘기도 듣는다. 마침 그 형은 경찰공무원이고, 기재부 공무원은 전경 출신이었다. 이철규는 기재부 담당공무원이 전경으로 근무했던 부대장 신상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 부대장과 함께 찾아가 설득하기도 했다.

 

조현오는 허준영이 이철규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철규는 상관이 원하는 부분을 해결 할 줄 알았다. 허준영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외교관 출신이 느끼는 갈증이 있었다. 어느 날 이철규가 허준영에게 말했다.

 

"앨빈 토플러가 한국에 왔는데 경찰청으로 방문하도록 할 테니 한 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경찰청에 외빈이 오는 일은 많지가 않다. 리언 러포트 사령관이 허준영을 용산 미국기지에 공식 초청한 것에 대한 답례로 경찰청이 리언 러포트 사령관을 초대한 적은 있었다. 조현오는 리언 러포트 사령관 앞에서 PPT 화면을 가리키며 경찰업무를 영어로 브리핑했다.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앨빈 토플러 부부가 경찰청에 오니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앨빈 토플러는 이미 8일 동안 한국 방문 일정을 빽빽하게 짜 놓았다. 하지만, 이철규는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앨빈 토플러가 출국 직전 경찰청을 방문하도록 일정을 변경시켰다.

 

 

2005년 9월 중국 북경에서 허준영과 중국 공안부장 저우융캉이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3일 앞두고 중국이 일방적으로 회담 일정을 변경했다. 공안부장이 바쁘니 공안부 상무부부장을 만나라는 것이다. 연유를 알아보니 일정 탓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기관에서 중국 측에 한국 경찰청장은 차관급이라 중국의 부총리급인 공안부장이 직접 대화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고 훼방을 놓았다는 말이 나돌았다.

 

한국은 경찰청이 행정자치부 소속이다. 법무부 장관이 지휘하는 검찰총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지만, 경찰청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허준영과 조현오는 중국에 구걸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면담은 이뤄져야 했다. 주한중국대사를 통해 중국 공안에 항의를 전하도록 했고 비공식 라인으로 등소평 장남인 덩푸팡과 접촉했다. 이철규는 덩푸팡을 잘 아는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허준영은 한국 경찰청장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공안부장과 회담하고 공안부 주관으로 조어대에서 만찬을 한다.

 

조어대는 금나라 장종 황제가 낚시를 즐겼다는 곳으로 지금은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외국 국빈 공식 연회장이다. 허준영은 또 그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인터폴 국제회의에서 대표 발표를 한다. 그때 허준영을 수행한 조현오는 2010년 8월 경찰청장이 됐다.

 


 

그동안 이철규는 경무관으로 승진해 강원도 차장 등을 지냈고, 2010년 초 치안감으로 승진해 충북청장으로 있었다. 조현오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열정과 여야를 설득할 수 있는 정보국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충북청장이던 이철규를 정보국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2011년 6월 경찰의 수사개시, 진행권을 보장한 형사소송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

 

2011년 초 검경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을 무렵 부산저축은행을 비롯한 여러 저축은행들이 한꺼번에 영업정지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대로 된 심사 과정 없이 부동산 등 위험 부담이 큰 사업에 무분별한 대출을 해주다가 부실채권을 떠안으면서 사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관련 기관 감독이 소홀해 이 같은 부실을 키웠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조현오는 정보국장에게 진상 파악을 지시했다. 국회는 저축은행 사태 의혹을 파헤치겠다며 '저축은행 국정조사특위'를 구성했다. 국세청, 감사원 등 기관장들이 불려 나왔다. 경찰도 예외일 수 없었다. 보통 국회의원이 다그치면 기관장은 저자세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오히려 검찰 수사지휘를 문제 삼았다.

 

"2005년 10월 부산저축은행에서 발생한 575억 원 규모 부당 대출을 수사했는데 경찰은 관련자 8명을 전원 구속 의견으로 보냈지만 검찰이 1명만 구속의견으로 송치하도록 했다. 또 2007년 12월에도 검찰은 보해저축은행 부당대출 건을 불기소하라고 수사지휘를 했다."

 

저축은행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2011년 9월 18일 제일, 프라임, 에이스, 토마토, 파랑새 등 저축은행들이 잇달아 영업정지를 당한다. 여론은 빠르게 악화했다. 검찰은 9월 22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을 꾸린다. 그리고 10월 14일 제일저축은행 회장인 유동천을 구속 기소한다.

 

유동천은 강원도 출신으로 이철규 고향 중, 고교 선배였다. 검찰은 파랑새저축은행 대표, 토마토저축은행 대주주, 에이스은행 차주, 프라임 저축은행 대표 등을 잇달아 잡아들인다. 이철규는 11월 11일 치안정감인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2월 말, 검찰은 유동천에게 4000만 원을 받고 경찰 수사를 무마한 혐의로 이철규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한다. 이철규는 3월 1일 구속됐다. 2012년 10월 19일 1심 법원은 이철규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검찰은 바로 항소했다. 이철규는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13년 초, 검찰청 출입기자에게 연락을 받는다.

 

“이철규 청장님 혹시 (강원도) 원주 별장에 가본 적 있습니까?”

 

기자는 검찰청 기자실에 검사가 들어와 먼저 말을 꺼냈다고 했다. 강원도 원주별장 성접대 사건은 2013년 1월에 시작됐다. 김학의 당시 법무부 차관이 건설업자 윤중천 소유인 원주 별장에서 성접대를 받았는데 이를 촬영한 동영상이 있다는 첩보를 경찰이 입수한 것이다. 바로 조현오가 만든 경찰청 범죄정보과였다.

 

범죄정보과가 수집한 정보는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특수수사과, 각 지방경찰청 수사과 등에 이첩돼 내사 또는 수사로 이어지게 된다. 김광준 검사 비리 사건에 이어 두 번째였다.

 

박근혜 정부 초대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은 3월 21일 사퇴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카카오톡과 트위터에 성접대 리스트가 나돌았다. 김학의 전 법무차관을 비롯해 실명 10명이 적혀 있었다. 리스트에는 대한민국 마당발인 이철규도 모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건설업자 윤중천이었다.

 

리스트 10명 중 4명은 모두 강원도에서 근무했던 경찰 전직 수뇌부급들이었다. 네티즌들은 성접대 명단 중 다수를 차지하는 경찰을 비난했다. 이철규처럼 강원지방경찰청 차장을 지냈던 허준영은 “사실이면 할복자살하겠다”라고 받아쳤다.

 

이철규는 이를 유포한 네티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정보국장 출신인 이철규가 보기에 이러한 명단은 네티즌이 유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에게 쏠리는 비난을 경찰에 돌려서 초점을 흐리게 하려는 것으로 판단됐다. 경찰은 리스트를 최초 생산한 사람은 못 찾아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다.

 

검찰은 성접대 동영상 속 인물을 특정하지도 못했다. 검찰은 동영상 화질이 좋지 않아 알아볼 수가 없다며 김학의 등을 무혐의 처분한다. 얼마 뒤에 원주 별장 성접대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이 나서서 성폭력 혐의로 김학의를 고소했지만 검찰은 김학의를 다시 무혐의 처분한다.

 

2013년 10월 31일 대법원은 제일저축은행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 이철규에 대해 무죄를 확정한다. 하지만 이 뉴스는 ‘원주 별장 성 접대 리스트’에 묻힌다. 법원은 제일저축은행 회장인 유동천이 한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의심스러운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2008년 서울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에서 조현오, 이철규와 식사를 했다는 부분이 있다. 2008년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이었는데, 통상 자기 관할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다. 조현오는 이철규에게 2008년 서울에 온 적이 없다는 확인서를 하나 써준다.

 

 

 

하지만 조현오는 유동천보다 더한 ‘대한민국 거짓말쟁이’로 전락했다.

 


 

조현오는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해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이던 임경묵에게 그 내용을 들었다고 지목했다. 하지만 임경묵은 재판에 나와서 조현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임경묵이 한 진술을 받아들여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을 지어낸 것으로 판단했다. 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서울구치소에 재구속됐다. 조현오 재판에 참석했던 전직 형사과장은 판결에 유감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노인네들이 만나면 무슨 이야기 하겠어요? 학교 다닐 때 영어단어 외우던 이야기를 하겠어요? 시국 이야기만 합니다. 그거 해야 재미있고. 임경묵 씨가 서울청장을 만나려면 그 이상 정보가 있어야 대화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개연성을 고려해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조현오는 지휘관 시절 관할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부산청장 시절에는 서울로 온 적이 없었고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도 서울 땅을 밟은 적이 없다고 했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주변 사람들은 차기 경찰청장이 되려면 서울에서 권력층을 만나야 한다며 조현오에게 서울 방문을 권했지만 원칙을 지켰다고 했다. 조현오가 서울지방청장이 돼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임경묵이다.

 

 

자기 정보력을 화려한 언변으로 펼쳐놓는 사람을 늘 봤다면 허풍과 과장을 솎아낼 감각이 있을 테지만 초보자 조현오는 마냥 귀가 솔깃했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을 모조리 기억에 새기고자 했다. 이와 비슷한 감탄은 1998년 경남지방청 경비과장 시절에도 있었다.

 

(다음 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구겨진 제복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부하를 다루는 방식

 

조현오에게 현장검증 3차 장소는 청담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다. 길게 나 있는 복도 양편에 모든 공간이 룸으로 돼 있다. 조현오도 출소 후 이곳이 궁금해 처음 와봤다고 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수백 명이 면회를 왔고 대부분 경찰이었다.

 

조현오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향해 '자기 사람 잘 챙긴다'는 비판을 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걸핏하면 "경찰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얼핏 보면 규칙과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자기 사람 챙기면서 겉으로만 대의를 외친 듯하다.

 


 

실제 한국 경찰 정체성에 관심을 보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었다. 2005년 허준영은 한국 경찰 주체성을 파고들면서 수사권 독립을 강하게 외쳤다. 한국 경찰 마크로 참수리를 쓴 게 이때다. 그동안 한국 경찰 상징은 미국 흰머리 독수리였다. 게다가 참수리는 독수리와 달리 죽은 시체를 건들지 않는다. 이게 당시 경찰이 상징을 독수리에서 참수리로 바꾼 이유였다.

 

 

 

허준영에 이어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된다. 두 번째 외무고시 출신이다. 조현오는 회의시간에 경찰이 왜 존재하는지를 자주 물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보자.

 


 

2011년 12월 20일 대구에서 한 중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유서에는 그동안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학교 폭력으로 말미암은 자살이 잇달아 터지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됐다.

 

보통 이런 사건이 터지면 교육 당국이 대책을 세우고 경찰도 대책에 맞춘 대응 방안을 내놓곤 한다. 하지만, 조현오는 학교폭력 문제는 경찰이 주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러자 사회적으로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교권 침해를 비롯해 학교 폭력 해결 주체는 교사, 학생, 부모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더 큰 목소리를 냈다.

 

부정적인 것은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일선 경찰서에 올라오는 불만 중에는 주취자 신고를 112로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주취자, 노숙자 등에 대한 조치는 지방자치단체 몫이다. 경찰은 '범법행위'가 발생해야 나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조현오는 한국 경찰 구조가 이런 사고 방식을 만들어냈다고 판단했다.

 


 

조현오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 있다. "한국 경찰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한탄이었다. 한국에서는 경비작전은 국방부, 수사는 검찰, 정보는 국가정보원, 경호는 경호실에서 주도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경찰은 눈치를 보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을 하기 마련이다.

 

조현오는 "경찰이 왜 존재하냐"고 물었다. 자살하는 아이들 인권은 누가 지킬 것인지 따졌다.

 

교사가 성인 조직과 연계된 일진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조현오는 경찰청에 학교폭력전담TF팀을 만들어 대책을 만들도록 했다. TF조직은 행정학상 비정규 조직이다. 어느 한 기능이 담당하기 부적절하거나 일정 기간 특정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경우 TF조직을 만든다.

 

경찰청은 전국에 퍼져 있는 정보망을 통해 학교폭력 현장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경찰청 종합대책은 2012년 1월 26일, 정부 종합대책이 2월 7일에 나왔다. 조현오는 16개 지방청에 다니며 토론회 등으로 학교 폭력 문제를 중요 이슈로 만들었다. 경찰은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가 따라오도록 수레바퀴를 돌리는 동력을 만들었다. 경찰이 앞장서자 학교폭력 피해경험률이 2012년 초반 9.5%에서 2013년 하반기에는 1.8%까지 떨어진다.

 

 

경찰청에 여성청소년과가 생긴 것은 2005년이다. 그해 부산청장이던 어청수는 여성청소년과 업무로 학교전담경찰관(스쿨폴리스)을 운영한다. 하지만, 한 경찰이 맡는 학교 수가 너무 많아 세심한 관리는 버거웠다.

 

조현오는 스쿨폴리스 인력 확충과 동시에 학교폭력예방상담사 교육을 통해 스쿨폴리스가 학교폭력 문제에 전문성을 갖추도록 했다.

 

조현오는 일진 불량서클 해체만큼 선도에도 신경을 썼다. 제대로 훈방조치가 되는지 학교폭력점검대응반이 이를 점검했다. 2012년 경찰서부터 여성청소년과가 신설됐고, 2013년에는 각 지방청에도 여성청소년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13년 서울청장인 김용판이 서울경찰 100여 명을 스쿨폴리스로 전환했다. 여성청소년 업무가 발전하면서 경찰 인력자원이 몰리기 시작했다. 경찰 치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물꼬를 튼 것이 조현오다.

 


 

한 경찰은 조현오가 이슈가 생기면 문제 근본을 건드리는 데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경찰과 같은 계급 조직에 이 같은 문제 해결 방식과 호불호가 강한 성격이 결합하자 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현오가 물었다.

 

"경무과, 수사과, 정보과, 보안과 이런 것은 뭐 때문에 나눕니까?"

 

궁극적으로 경찰업무를 잘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어느 조직이나 칸막이 행정이 될수록 일이 바로 가기 어렵다. 다른 경찰 간부 역시 칸막이 행정에 대한 문제의식은 조현오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달랐다.

 


 

다른 이들은 칸막이 행정은 책임 문제만 정확하게 선을 긋고 종합적인 의견을 모아 일을 추진하면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울산남부서장을 할 때는 업무 분담과 상관없이 수사과장을 불렀다. 살인사건 현장은 보통 형사과장이 책임을 진다. 사건 원인 파악부터 대책 마련은 정보과와 경비과가 맡는다. 하지만, 조현오는 수사과장을 불러냈다.

 

물론 시간이 촉박한 사안이라면 가장 업무역량이 뛰어난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업무 능력이 부족한 직원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경찰 간부들은 일을 주기 전에 사람 능력에 따라 방향을 정하기도 하며,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에게는 간단한 일을 하나 맡겨놓고 어려운 일을 맡길 때 간단한 일을 핑계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조현오는 어땠을까.

 

고시계장 시절 조현오는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을 처음에는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나 불성실한 업무 태도와 실수가 되풀이되면 조현오는 아예 결제 라인에서 뺐다. 면박과 무안을 주는 정도는 보통보다 강했다.

 

울산남부서장일 때 조현오는 아침마다 참모회의를 열었다. 과장에게 업무 관련 질문을 했다. 질문은 알고 던지기도 했고 논리적으로 궁금하면 물어보기도 했다. 막힘없이 답하는 것은 업무를 잘 챙긴다는 뜻이다.

 

보통 서장들은 대답을 잘 못하는 과장에게 다음부터 잘하라고 넘기고 나서 담당 계장에게 내용을 확인한다. 반면 조현오는 과장에게 들어오지 말라 하고 계장을 보내라 했다. 이 광경을 본 직원은 '권위적 리더십의 전형'이라고 했다.

 

'조현오 방식'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찰은 계급 조직인만큼 수평 질서와 수직 질서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사회는 보고, 의전, 모양새, 형식 등을 유난히 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관직은 사유물이 아닌 만큼 업무를 모른다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직원들은 첫인상부터 '독일병정' 같은 조현오가 업무 역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리니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직원은 사람 좋은 것도 필요 없고 공무원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게 조현오 철학이라고 말했다.

 

 

 

 

서울종암경찰서장 시절에도 업무에는 칸막이가 없었다.

 

교인 헌금으로 지은 한 교회가 있었다. 목사가 명의를 자기 앞으로 돌려놓으면서 일반 신도와 목사 쪽 신도가 충돌했다. 주말에 양측에서 서로 예배를 보겠다며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런 일은 경비과장이 대책을 세우고 진압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형사계장에게 권한을 전폭적으로 위임했다. 형사계장이 경비과 전의경 100여 명과 정보과, 형사과 인원을 이끌고 지휘했다.

 

조현오는 지방청장이 돼서도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은 ‘없는 사람’ 취급했다. 대부분 지방청장은 참모인 과장을 의식해 무난하게 결제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조현오는 경비 지휘를 할 때조차 정보과장에게 작전을 맡겼다.

 


 

조현오 이미지 형성에 가장 영향을 미친 시기는 경찰청장 때다. 조현오는 인사정의, 부패척결 등을 내세우며 '7대 개혁과제'를 내놓았고 전담 TF팀을 구성했다. 한 고위간부는 TF팀이 해당 과에서부터 낮은 단계 협의가 이뤄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나온 내용을 국장이 청장에게 보고하는 체계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개혁’을 원했다. 하지만 계급이 높아질수록 변화를 싫어하는 성향을 보인다. 경찰이라는 계급조직 하에서 눈치 안 보고 개혁을 밀어붙일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적임자를 TF팀장 자리에 앉혔다. 조현오는 국장이 결제한 보고서가 맘에 안 들면 TF팀과 협의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조현오가 경찰 조직 질서를 수평과 수직 모두 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장 결제를 받은 보고서를 검토할 TF팀장 직위가 경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호불호가 강한 조현오 성격도 한몫을 했다.

 

관리자 한마디는 격려든 질책이든 조직 안에서 더 큰 의미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조직 안에서 불만이 번지기 시작했다. 경찰청 국장(치안감)이나 부장(경무관)에게서 나오는 한마디는 힘이 실려 더욱 퍼졌다.

 

 

조현오는 이듬해 TF팀장도 총경으로 승진시킨다. 조직 내 비판 세력은 이 역시 조현오가 챙긴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조현오에게 중요한 것은 업무 적합성이었다. 보직에는 그 업무에 맞는 사람을 앉혀놓으려 했다.

 

황운하를 경무관을 승진시키고 나서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배치한 것도 한 예다. 수사 기획관은 그 자리가 주는 무게로 봐서는 경무관 3년 차 정도가 어울리는 자리라고 보통 생각한다. 조현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경찰이기 때문에 그 업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현오가 좋아하는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 업무 역량 뛰어난 사람이었고 인사권을 쥐자 그런 사람들을 그 자리에 꽂았다.

 

그렇다면, 조현오가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업무역량이 얼마나 뛰어난 것일까?

 

먼저 2010년 정보국장을 지낸 이철규를 보자. 그는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자 충북청장에서 정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11년 말 조현오 체제에서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조현오와 3차 현장검증을 한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이 바로 이철규와 깊게 얽힌 곳이기도 하다.

 

(다음 16화-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구겨진 제복 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한 참여정부 인사는 경찰청장 시절 조현오 행동을 ‘또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2011년 7월 21일 조현오가 해군기지 경비 문제로 제주를 방문했다. 조현오는 강정마을 관내 서귀포경찰서를 방문해 제주 해군기지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하는 불법행위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지시했다. 당연히 MB 눈에 들려는 행동으로 해석됐다. 서울지방경찰청장 시절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도 마찬가지다.

 

조현오는 언제부터 정치적 행보에 능했을까. ‘불법행위 엄단’ 발언은 울산남부서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관용차량을 의경이 운전했는데 교통신호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현오는 비상 상황이 아니라면 교통법규를 철저하게 지킬 것을 주문했다. 지시를 어기면 법규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했다.

 

2006년 12월 1일 경비국장으로 승진하면서 이 같은 특징은 도드라진다. 당시 한미FTA 집회를 비롯해 각종 시위가 줄을 이었다. 조현오는 집회 현장에서 불법행위자 검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접한다. 조현오는 실무자를 다그쳤다.

 

“왜 법대로 안 하느냐?”

“그렇게 못합니다.”

 

“왜 못하냐?”

“시위대와 경찰이 엉키면 사고가 납니다.”

 

“왜 사고가 나냐?”

“집회·시위 관리를 전·의경이 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집회·시위는 사회적 갈등이 폭발해서 생긴다. 그동안 집회·시위 관리 주체는 20대 초반인 전·의경이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대치한 전의경을 국가 권력으로 보고 공격적으로 모욕을 주곤 한다. 자극을 받은 전·의경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채 진압에 들어가면 사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게 무리한 추적이다. 진압 상황에서 시위대가 경찰을 피해 도망가면 일단 법 위반 행위가 시정된 것으로 보면 된다. 무리하게 끝까지 쫓아가 검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감정 통제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진압대는 방어용 방패를 공격적으로 쓰기도 한다.


조현오의 근본적 사고

 

2005년 허준영이 경찰청장일 때 한미FTA 반대 집회 중에 농민 2명이 사망한다. 조현오는 법대로 조치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고민한 끝에 전·의경 폐지를 해결책으로 내놓는다. 조현오에게 집회·시위 관리 모델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직업 경찰관 부대가 집회·시위를 관리한다. 대략 100개 중대로 중대마다 250명 정도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버스, 승합차, 자동차로 이동하며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나는 집회·시위를 관리한다.

 

조현오는 전·의경 폐지를 주장했고 이를 대체할 경찰 인력 협상을 기획재정부와 진행한다. 하지만, 2008년 ‘촛불집회’가 터지면서 전·의경 폐지 불가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현오가 경비국장을 하던 시절 기자들은 예정된 집회·시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묻곤 했다. 조현오는 “불법행위는 엄단하겠다”라고 답했고, 기자들은 “이번 주 족족 잡아들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2011년 7월 21일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해군기지 경비 문제로 제주를 방문했다. 조현오는 강정마을 관내 서귀포경찰서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하는 불법행위에 단호하게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한 매체를 통해 서귀포경찰서 밖에 있던 주민도 실시간으로 이 정보를 접했다. 흥분한 주민은 조현오가 탄 버스를 에워싸며 이동을 막았다. 7분 정도 흘러서야 버스는 움직일 수 있었다.

 

조현오는 제주를 떠나기 전 서귀포에 있는 한 횟집을 들렀다. 제주경찰청장인 신용선을 비롯해 제주지방청 참모들이 모였다. 조현오는 식사 전에 이번 불법사태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경찰청장 한마디에 제주지방청 참모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제대로 회를 먹는 사람은 조현오뿐이었다.

 

 

 

사람들은 서귀포경찰서에서 조현오 발언은 청와대를 의식한 것으로 봤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자 차명계좌 발언을 했고 이런 발언으로 MB 눈에 들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모양이라는 분석도 뒤따랐다. 하지만, 이 같은 단정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시기 조현오가 청와대와 마찰을 빚는다는 보도도 눈에 띄기 때문이다. 조현오가 서울청장이던 2010년 2월 국제범죄수사대가 창설됐는데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국회예산정책처가 발간한 ‘2014 회계연도 재정사업 성과 평가’ 보고서를 보면 2015년 4월 기준 지역경찰(지구대·파출소 근무 인력)은 정원(4만 5490명)보다 1705명이 적다. 반면, 경찰청과 경찰서 근무 인력은 정원(6만 5579명)보다 848명이 많다. 이 통계를 접한 언론은 민생안전 현장 일선을 책임지는 지구대·파출소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고 질타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부족한 일선 경찰서 인력을 더 줄여서 지방청 인력을 늘리는 방향으로 구조를 조정한 이가 조현오다. 국제범죄수사대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1991년 조현오가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당시 대공과장)이던 때부터 시작한다.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은 조현오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보직이기도 하다. 보안과는 이른바 간첩을 잡는 곳이다. 그리고 경찰서 보안과에는 외사를 담당하는 직원들도 소속돼 있다. 아침마다 보안과 직원은 보안 및 외사첩보를 작성했다. 보고서 출처는 노조 소식지나 신문 등이었다.

 

일본 야쿠자, 중국 삼합회, 외국 조직폭력단, 인신매매단, 간첩 등을 막고 검거하려면 일선 경찰서에 배치된 1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는 불가능했다. 첩보를 입수한다고 바로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조현오는 경찰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방청 인력이 많고 파출소 지구대 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국회에서 경찰 지휘부를 압박하는 단골 메뉴였다. 그러다 보니 경찰도 비난을 의식해 한 발씩 나가지 못했다.

 

권한을 갖게 된 조현오는 2009년 경기지방경찰청부터 조직을 개편했다. 안산 등 외국인 밀집 지역에서 활동하는 외국 조폭 등을 관리하려면 경찰서 단위 외사 인력으로는 대처에 한계가 있었다.

 

각 경찰서에서 첩보를 담당하는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모두 지방청으로 불러들여 경기지방경찰청 외사계를 만들었다. 통상 ‘외사분실’이라고 부른다. 실무를 맡은 계장(경정) 중에 총경 승진자를 배출하도록 하면 동기부여가 된다. 승진 의욕이 있는 유능하고 젊은 직원도 선발된 외사경찰이 활동하면서 효과가 나타났다.

 


 

청와대와 마찰 빚은 까닭

 

이듬해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계장급이 대장을 맡는 국제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은 조현오 행보 때문에 난처했다. 민정수석실은 검찰을 앞세워 외국인 범죄를 대처할 계획이었다. 2009년 10월 청와대 민정수석실 주도로 ‘외국인 조직범죄 합동수사본부’가 출범했다. 그런데 경찰이 먼저 치고 나간 모양새였다. 민정수석실이 경찰청장 강희락에게 경고성 전화를 했다는 보도가 나갔다. 물론 이후 이야기는 없다.

 

 

민정수석실은 바로 조현오에게 전화해 질책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경찰청 허가를 받으면 지방청에 계 단위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다고 받아쳤다. 질책성 전화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돼서도 눈치를 보지 않는 행보를 이어갔다. 경찰 인사에 주도권을 쥐었고 검찰과 맞서기도 했다. 민정수석은 차명계좌 발언 수사를 언급하며 조현오를 압박했다. 조현오는 이에 언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과연 조현오 행동과 발언 배경에는 MB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까. 사람들은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될 욕심으로 치밀하게 계산해 ‘차명계좌 발언’을 했다고 여긴다. 차명계좌 발언에 대해 한 전직 참모는 계획적이라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고 무심코 나왔다면 조직 안에서 파워가 커지다 보니 거리낄 것이 없어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고 짐작했다.

 

연재 시작부터 밝힌 대로 조현오 행위를 선의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우선 조현오가 경찰청장 시절 터진 ‘함바 비리’ 사건에 대처한 방법을 살펴보겠다.

 

건설현장에 있는 식당을 ‘함바집’이라고 부른다. 유상봉은 함바집 운영권과 인사 청탁 명목으로 전임 경찰청장인 강희락을 비롯해 고위 공무원에게 금품을 건넨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2010년 말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함바 비리에 전·현직 경찰 간부가 대거 엮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총경 급 연루자가 상당수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 지휘부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전직 간부들은 보통 검찰 수사를 지켜보든지 조용히 정보나 감찰을 동원해 내부적으로 진상 파악을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조현오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조현오는 총경 이상 간부 560명에게 자진신고를 지시했다. 유상봉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만났는지, 금품·향응을 받은 적이 있는지 등을 적어 내라고 했다. 자진신고를 하면 최대한 선처하지만 검찰 수사나 보도를 통해 연루 사실이 밝혀지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가혹하고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은 수사와 구형을 담당하는 검찰이 보기에 황당했다.

 


 

조현오의 경찰 사기 진작 방식

 

조현오 발언을 이해하려면 그가 지휘관이었다는 점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지휘관은 조직 구성원 사기 진작에도 책임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를 가나 분위기가 중요하다. 조직 구성원의 99.999%는 함바 비리 사건과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그 99.999%가 위축되고 자괴감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조현오는 지휘관이 손 놓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유상봉과 관련된 경찰이 극소수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관련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자 감찰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검찰에서 수사하는데 감찰까지 풀어서 구성원을 다시 조사하면 조직 사기가 추락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자수’를 지시한 것이다. 유상봉과 접촉을 인정한 경찰은 41명이었다. 유상봉에게 금품을 받은 경찰은 2명이었는데 내용물은 각각 와인과 홍어였다.

 

조현오가 지휘관이 된 2008년부터 조직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적은 3번 정도를 꼽을 수 있다. 2007년 12월 경기도 안양에서 발생한 혜진·예슬 양 사건이 터지고 경찰은 거센 비난을 받았다. 국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은 2008년 촛불집회였다.

 

2008년 부산청장이던 조현오는 경찰 사기 진작을 위해 밤새 범인 검거 소식이 들리면 아침마다 상과 상품을 들고 현장에 나갔다. 낮에도 검거 소식이 들리면 바로 전화하며 치하했다.

 

 


 

노무현 차명계좌 발언의 배경

 

조현오가 서울청장이던 2010년 고 노무현 대통령 사망 1주기를 앞두고 있었다. 경찰도 노무현 죽음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사망 1주기 즈음 열리는 집회 참여자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자기 일에 대한 정당성에 의심을 품기 마련이다. 이는 조직 내 사기 문제로 이어진다. 2011년 3월 서울청 2층 강당에서 조현오는 기동대 지휘관을 모아 교육을 진행했다.

 

내가 만난 한 전직 청장은 자기가 강의를 했다면 “막는 게 우리 숙명”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했다. 조현오는 5월부터 경찰 사기가 떨어진다면 그 분위기가 그해 11월에 있을 G20 서울정상회담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현오는 원고 없이 강의했다. 대한민국 경찰이 얼마나 유능했는지 계속 강조했다.

 

그러다 며칠 전에 어디선가 들은 내용이 떠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1주기 집회 참가자보다 이를 막는 경찰에게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뒷받침할 근거였다. 그리고 ‘차명 계좌’ 발언이 이어졌다. 조현오는 경찰도 뇌물 받으면 바로 파면당하고 형사입건당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휘관으로서 부대 사기 진작 노력을 아래와 같이 약속하며 강의를 마친다.

 

“여러분 사기 관리를 위해서 저도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근무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였고, 특히 전·의경 사기관리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억압하고 규정하는 이런 것은 안 하려고 그럽니다....(중략)... 다른 식으로라도 사기 관리를 어떻게 하면 더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그해 8월 조현오가 경찰청장으로 지명되자 암투가 시작됐다. 당시 강연을 찍은 동영상이 유출됐고 KBS가 이를 보도하면서 조현오는 ‘공공의 적’이 됐다. 2011년 말 문재인을 비롯한 친노 정치인들이 검찰청 앞에서 조현오를 처벌하라는 1인 시위를 벌였다. <나꼼수>도 왜 중앙지검 형사1부는 조현오를 부르지 않느냐며 성토했다.

 

당시 조현오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사회적 비난과 별개로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의성’과 ‘허위 인식성’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의성’은 보통 선거에서 후보자끼리 비방을 할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가 ‘노무현 차명계좌’ 이야기를 진짜로 믿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제 조현오와 마지막 현장검증 장소로 가보겠다. 바로 서울 청담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다.

 

(다음 15화-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구겨진 제복 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2011년 10월 22일 오전 조현오는 전날 밤 인천 길병원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을 보고받는다. 장례식장 앞에서 조직폭력배끼리 단순 충돌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일 저녁 SBS 뉴스는 전혀 다른 영상을 내보냈다. 화면에서는 인천 조폭 130여 명이 도심 한복판에서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조현오는 허위·축소 보고를 받은 것이다.

 

격노한 조현오는 감찰과장에게 바로 전화했다. 경찰청 감찰팀은 인천남동경찰서 사무실 CCTV를 면밀하게 살폈다. 112 신고 접수가 되자 경찰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파악했다. 조사가 끝난 23일 인천남동경찰서장이 직위 해제됐다. 남동서 형사과장, 강력3팀장, 상황실장, 지구대 순찰팀장 등도 중징계를 받았다.

 

조현오는 “경찰이 조폭에게 위축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질책했다. 이에 현장에 출동한 강력3팀장이 반박하는 글을 내부 게시판에 올린 게 외부로 공개됐다.

 

‘저는 사무실에 있다가 상황실 연락을 받고 테이저건 등 장비를 챙겨 장례식장 앞에 도착했습니다. (중략) 저는 현장 책임자로서 동료 직원과 더불어 흉기를 소지한 범인을 제압하고 피해자를 구조 후송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하 생략)

 

경찰 주장은 이렇다. 상황실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했고 조폭이 집결하자 경고 방송을 보냈다. 형사 5명이 칼부림을 한 가해자를 제압했고 집결한 조폭과 대치했다. 칼에 찔린 피해자를 후송하고 사건 현장을 채증 했다. 그런데 SBS가 형사를 조폭으로 잘못 보도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에 경찰청 감찰팀이 반박했다. 경찰이 아무리 활약했다 해도 초동 대응 실패를 덮을 수 없다고 했다. 2011년 10월 21일 현장 상황은 어땠을까.

 


 

인천 폭력조직인 크라운파 조직원 부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빈소가 인천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이어 빈소에 인천 조직폭력배들이 문상을 오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신간석파 K 씨와 크라운파 L 씨가 만났다. L 씨가 K 씨를 향해 빈정거린 게 발단이었다. 각자 자기 조직원을 소집하면서 장례식장이 소란스러워졌다.

 

 

10시 18분 1차 112신고가 접수됐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장례식장 엘리베이터 앞에 몰려 있다는 내용이었다. 인천남동경찰서 강력반과 상황실이 동시에 신고를 접수했다. 조폭은 지구대 파출소 경찰은 겁을 내지 않는다. 조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경찰은 강력계 조폭 담당 형사다. 하지만, 최초 신고 당시 강력팀 형사는 출동하지 않았다. 현장에 먼저 도착한 쪽은 구월지구대 순찰차였다. 순찰차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며 그냥 사태를 지켜보기로 한다.

 

10시 51분 조폭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싸운다는 2·3차 신고가 들어온다. 순찰차가 추가로 도착했다. 지구대 순찰팀장은 조폭끼리 싸움에 지나치게 관여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 현장에서 순찰차 두 대가 철수한다.

 

11시 18분 조폭들이 싸우니 빨리 와 달라는 4차 신고가 접수된다. 11시 45분에 출동한 인천남동경찰서 형사 5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미 100여 명이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K 씨가 L 씨를 흉기로 찔렀고 형사들이 K 씨를 제압했다.

 

조현오는 사건 현장에 형사 5명만 있었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집단폭력 대처 매뉴얼에는 사건 발생 즉시 관할 서장에게 보고해 초기에 경찰을 집중 투입하여 전원 검거하도록 돼 있다. 출동 인원만으로 제압하기 어렵다면 상황실에 기동타격대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관할 경찰서 인력으로 진압이 어렵다면 지방청에 요청할 수도 있다.

 

지방청은 폭력계와 광역수사대를 운영한다. 폭력계는 폭력조직을 수사·관리하며, 광역수사대는 경찰서 2개 이상이 관련된 사건을 처리하고자 만든 것이다. 조현오는 활용 가능한 경찰력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 채 공권력이 무력한 모습을 보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대대적인 감찰이 진행됐다. 감찰 결과 강력3팀장은 형사과장에게 보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팀장이 과장에게 상황 보고를 했다면 맡은 임무는 다한 것이다. 강력3팀장에 대한 징계는 일단 거두게 된다.

 


 

조현오는 폭력조직과 전쟁을 선포한다. 조폭에게 인권은 고려하지 않겠다고 했고 조폭이 폭력을 행사하면 총기라도 과감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겨레>는 10월 30일 자 ‘조현오 경찰청장의 처신 경박하고 무책임했다’는 사설을 통해 조현오가 ‘조폭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여론을 의식한 조치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1990년대 형사과장 시절부터 총기 사용 발언을 했다.

 

조현오는 1990년 부산에서 경찰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은 해운대와 항만이 있다. 항만은 마약이 들어오는 통로이며 마약과 조폭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여름 치안 로드맵 중심에는 해운대가 있다.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에도 조폭은 있다. 부산 최대 폭력조직은 ‘칠성파’였다.

 

조현오가 형사과장이던 때도 ‘조직 폭력과 전쟁’은 한참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형사들 사이에는 총을 던져서 범인을 검거한다는 한탄이 떠돌았다. 검거 과정에서 총을 쏘면 손해배상과 감찰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칠성파 두목 이강한을 비롯해 간부급 조폭이 구속된다. 그렇다고 조직이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이강한은 1999년에 출소한다. 그 사이 신흥 조직인 ‘신20세기파’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칠성파와 영역 다툼이 본격화됐다. 유흥업소 등을 놓고 벌인 주도권 다툼은 1992년 7월 칠성파 조직원이 20세기파 간부를 살해하면서 불거졌다.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가 소재로 삼은 사건이다.

 

2006년 1월 신20세기파가 보복에 나섰다. 부산 내 반 칠성파 세력을 규합해 60여 명이 흉기를 들고 칠성파가 모인 부산 영락공원 장례식장에 난입했다.

 


 

이 사건 이후 2년이 흐른 2008년 조현오가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온다. 조현오는 경찰에게 조폭 검거 과정에서 위협을 느끼면 과감하게 쏘라고 지시한다. 일선 경찰에게는 놀라운 발언이었다. 한 경찰관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누가 책임지겠다고 하나요? 주변에 다 책임 안 지려는 사람들뿐인데….”

 

당시 이강한이 부산에 있는 한 호텔 사우나에서 목격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현오는 부산지역 사우나에 조폭 출입을 금지했다. 전신 문신은 일반 시민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어서 경범죄 처벌 사유가 됐다. 형사들은 목욕탕에서 나오는 조폭에게 5만 원 과태료 스티커를 건네며 사우나에 오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사우나에 조폭을 출입금지 하는 조치는 이전 부산 청장들도 했던 단속 방법이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총기 사용과 더불어 조직 자금줄을 추적해 차단한 것이다. 조폭은 오락실 수익금 상납금을 바탕으로 조직을 관리했다. 다른 자금 확보 방법으로는 백일잔치, 돌잔치, 환갑잔치, 고희연, 생일잔치 등을 활용했다.

 

 

 

잔치는 보통 호텔에서 열렸고 조폭은 관할 구역 영업소 사장에게 초대장을 돌렸다. 형사들은 하객을 대상으로 참석 경위와 강압 여부를 조사했다. 조현오는 조폭 행사는 경찰이 확실하게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

 

호텔에서 행사를 하더라도 민간인처럼 조용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 건장한 남자가 깍두기 머리에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매고 90도 각도로 절하는 모습은 위협적이었다. 조현오는 조폭들이 위력을 과시하면 공권력을 발휘했다.

 

행사에는 부산지방청 광역수사대, 강력수사계, 폭력수사계, 기동대, 관할 경찰서 강력팀 형사 등을 배치했다. 조현오는 조폭을 상대하면서 일선 경찰서, 지방경찰청 단위로 분산된 형사 인력으로 효율적인 관리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경찰 조직 내 최강 부대인 경찰 특공대를 호텔 행사장에 투입했다. 경찰특공대는 일선 경찰관들이 버거워하는 일들, 가령 조폭이 집단으로 흉기를 휴대해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 지방청장 허가를 받아 출동한다. 조현오 지시를 받고 출동한 특공대원은 어떤 일을 했을까.

 

경찰특공대는 조폭이 타고 온 차를 검문하기 시작했다. 차 안에 칼이나 야구방망이 같은 흉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경찰직무집행법에 따르면 도검류는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된 도검류에는 레이저로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다.

 

 

조현오는 다른 청장에게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언행이 있었다. 한 참여정부 인사는 경찰청장 시절 조현오 언행을 언급하며 ‘또라이’라고 비난했다. 2011년 1월 불거진 ‘함바 비리’ 사건에서 조현오가 취했던 방법도 이전 경찰청장들과는 전혀 달랐다.

 

(다음 14화-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