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제복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부하를 다루는 방식

 

조현오에게 현장검증 3차 장소는 청담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다. 길게 나 있는 복도 양편에 모든 공간이 룸으로 돼 있다. 조현오도 출소 후 이곳이 궁금해 처음 와봤다고 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수백 명이 면회를 왔고 대부분 경찰이었다.

 

조현오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향해 '자기 사람 잘 챙긴다'는 비판을 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걸핏하면 "경찰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얼핏 보면 규칙과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자기 사람 챙기면서 겉으로만 대의를 외친 듯하다.

 


 

실제 한국 경찰 정체성에 관심을 보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었다. 2005년 허준영은 한국 경찰 주체성을 파고들면서 수사권 독립을 강하게 외쳤다. 한국 경찰 마크로 참수리를 쓴 게 이때다. 그동안 한국 경찰 상징은 미국 흰머리 독수리였다. 게다가 참수리는 독수리와 달리 죽은 시체를 건들지 않는다. 이게 당시 경찰이 상징을 독수리에서 참수리로 바꾼 이유였다.

 

 

 

허준영에 이어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된다. 두 번째 외무고시 출신이다. 조현오는 회의시간에 경찰이 왜 존재하는지를 자주 물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보자.

 


 

2011년 12월 20일 대구에서 한 중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유서에는 그동안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학교 폭력으로 말미암은 자살이 잇달아 터지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됐다.

 

보통 이런 사건이 터지면 교육 당국이 대책을 세우고 경찰도 대책에 맞춘 대응 방안을 내놓곤 한다. 하지만, 조현오는 학교폭력 문제는 경찰이 주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러자 사회적으로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교권 침해를 비롯해 학교 폭력 해결 주체는 교사, 학생, 부모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더 큰 목소리를 냈다.

 

부정적인 것은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일선 경찰서에 올라오는 불만 중에는 주취자 신고를 112로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주취자, 노숙자 등에 대한 조치는 지방자치단체 몫이다. 경찰은 '범법행위'가 발생해야 나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조현오는 한국 경찰 구조가 이런 사고 방식을 만들어냈다고 판단했다.

 


 

조현오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 있다. "한국 경찰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한탄이었다. 한국에서는 경비작전은 국방부, 수사는 검찰, 정보는 국가정보원, 경호는 경호실에서 주도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경찰은 눈치를 보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을 하기 마련이다.

 

조현오는 "경찰이 왜 존재하냐"고 물었다. 자살하는 아이들 인권은 누가 지킬 것인지 따졌다.

 

교사가 성인 조직과 연계된 일진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조현오는 경찰청에 학교폭력전담TF팀을 만들어 대책을 만들도록 했다. TF조직은 행정학상 비정규 조직이다. 어느 한 기능이 담당하기 부적절하거나 일정 기간 특정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경우 TF조직을 만든다.

 

경찰청은 전국에 퍼져 있는 정보망을 통해 학교폭력 현장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경찰청 종합대책은 2012년 1월 26일, 정부 종합대책이 2월 7일에 나왔다. 조현오는 16개 지방청에 다니며 토론회 등으로 학교 폭력 문제를 중요 이슈로 만들었다. 경찰은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가 따라오도록 수레바퀴를 돌리는 동력을 만들었다. 경찰이 앞장서자 학교폭력 피해경험률이 2012년 초반 9.5%에서 2013년 하반기에는 1.8%까지 떨어진다.

 

 

경찰청에 여성청소년과가 생긴 것은 2005년이다. 그해 부산청장이던 어청수는 여성청소년과 업무로 학교전담경찰관(스쿨폴리스)을 운영한다. 하지만, 한 경찰이 맡는 학교 수가 너무 많아 세심한 관리는 버거웠다.

 

조현오는 스쿨폴리스 인력 확충과 동시에 학교폭력예방상담사 교육을 통해 스쿨폴리스가 학교폭력 문제에 전문성을 갖추도록 했다.

 

조현오는 일진 불량서클 해체만큼 선도에도 신경을 썼다. 제대로 훈방조치가 되는지 학교폭력점검대응반이 이를 점검했다. 2012년 경찰서부터 여성청소년과가 신설됐고, 2013년에는 각 지방청에도 여성청소년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13년 서울청장인 김용판이 서울경찰 100여 명을 스쿨폴리스로 전환했다. 여성청소년 업무가 발전하면서 경찰 인력자원이 몰리기 시작했다. 경찰 치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물꼬를 튼 것이 조현오다.

 


 

한 경찰은 조현오가 이슈가 생기면 문제 근본을 건드리는 데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경찰과 같은 계급 조직에 이 같은 문제 해결 방식과 호불호가 강한 성격이 결합하자 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현오가 물었다.

 

"경무과, 수사과, 정보과, 보안과 이런 것은 뭐 때문에 나눕니까?"

 

궁극적으로 경찰업무를 잘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어느 조직이나 칸막이 행정이 될수록 일이 바로 가기 어렵다. 다른 경찰 간부 역시 칸막이 행정에 대한 문제의식은 조현오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달랐다.

 


 

다른 이들은 칸막이 행정은 책임 문제만 정확하게 선을 긋고 종합적인 의견을 모아 일을 추진하면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울산남부서장을 할 때는 업무 분담과 상관없이 수사과장을 불렀다. 살인사건 현장은 보통 형사과장이 책임을 진다. 사건 원인 파악부터 대책 마련은 정보과와 경비과가 맡는다. 하지만, 조현오는 수사과장을 불러냈다.

 

물론 시간이 촉박한 사안이라면 가장 업무역량이 뛰어난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업무 능력이 부족한 직원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경찰 간부들은 일을 주기 전에 사람 능력에 따라 방향을 정하기도 하며,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에게는 간단한 일을 하나 맡겨놓고 어려운 일을 맡길 때 간단한 일을 핑계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조현오는 어땠을까.

 

고시계장 시절 조현오는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을 처음에는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나 불성실한 업무 태도와 실수가 되풀이되면 조현오는 아예 결제 라인에서 뺐다. 면박과 무안을 주는 정도는 보통보다 강했다.

 

울산남부서장일 때 조현오는 아침마다 참모회의를 열었다. 과장에게 업무 관련 질문을 했다. 질문은 알고 던지기도 했고 논리적으로 궁금하면 물어보기도 했다. 막힘없이 답하는 것은 업무를 잘 챙긴다는 뜻이다.

 

보통 서장들은 대답을 잘 못하는 과장에게 다음부터 잘하라고 넘기고 나서 담당 계장에게 내용을 확인한다. 반면 조현오는 과장에게 들어오지 말라 하고 계장을 보내라 했다. 이 광경을 본 직원은 '권위적 리더십의 전형'이라고 했다.

 

'조현오 방식'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찰은 계급 조직인만큼 수평 질서와 수직 질서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사회는 보고, 의전, 모양새, 형식 등을 유난히 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관직은 사유물이 아닌 만큼 업무를 모른다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직원들은 첫인상부터 '독일병정' 같은 조현오가 업무 역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리니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직원은 사람 좋은 것도 필요 없고 공무원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게 조현오 철학이라고 말했다.

 

 

 

 

서울종암경찰서장 시절에도 업무에는 칸막이가 없었다.

 

교인 헌금으로 지은 한 교회가 있었다. 목사가 명의를 자기 앞으로 돌려놓으면서 일반 신도와 목사 쪽 신도가 충돌했다. 주말에 양측에서 서로 예배를 보겠다며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런 일은 경비과장이 대책을 세우고 진압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형사계장에게 권한을 전폭적으로 위임했다. 형사계장이 경비과 전의경 100여 명과 정보과, 형사과 인원을 이끌고 지휘했다.

 

조현오는 지방청장이 돼서도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은 ‘없는 사람’ 취급했다. 대부분 지방청장은 참모인 과장을 의식해 무난하게 결제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조현오는 경비 지휘를 할 때조차 정보과장에게 작전을 맡겼다.

 


 

조현오 이미지 형성에 가장 영향을 미친 시기는 경찰청장 때다. 조현오는 인사정의, 부패척결 등을 내세우며 '7대 개혁과제'를 내놓았고 전담 TF팀을 구성했다. 한 고위간부는 TF팀이 해당 과에서부터 낮은 단계 협의가 이뤄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나온 내용을 국장이 청장에게 보고하는 체계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개혁’을 원했다. 하지만 계급이 높아질수록 변화를 싫어하는 성향을 보인다. 경찰이라는 계급조직 하에서 눈치 안 보고 개혁을 밀어붙일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적임자를 TF팀장 자리에 앉혔다. 조현오는 국장이 결제한 보고서가 맘에 안 들면 TF팀과 협의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조현오가 경찰 조직 질서를 수평과 수직 모두 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장 결제를 받은 보고서를 검토할 TF팀장 직위가 경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호불호가 강한 조현오 성격도 한몫을 했다.

 

관리자 한마디는 격려든 질책이든 조직 안에서 더 큰 의미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조직 안에서 불만이 번지기 시작했다. 경찰청 국장(치안감)이나 부장(경무관)에게서 나오는 한마디는 힘이 실려 더욱 퍼졌다.

 

 

조현오는 이듬해 TF팀장도 총경으로 승진시킨다. 조직 내 비판 세력은 이 역시 조현오가 챙긴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조현오에게 중요한 것은 업무 적합성이었다. 보직에는 그 업무에 맞는 사람을 앉혀놓으려 했다.

 

황운하를 경무관을 승진시키고 나서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배치한 것도 한 예다. 수사 기획관은 그 자리가 주는 무게로 봐서는 경무관 3년 차 정도가 어울리는 자리라고 보통 생각한다. 조현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경찰이기 때문에 그 업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현오가 좋아하는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 업무 역량 뛰어난 사람이었고 인사권을 쥐자 그런 사람들을 그 자리에 꽂았다.

 

그렇다면, 조현오가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업무역량이 얼마나 뛰어난 것일까?

 

먼저 2010년 정보국장을 지낸 이철규를 보자. 그는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자 충북청장에서 정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11년 말 조현오 체제에서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조현오와 3차 현장검증을 한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이 바로 이철규와 깊게 얽힌 곳이기도 하다.

 

(다음 16화-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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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한 참여정부 인사는 경찰청장 시절 조현오 행동을 ‘또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2011년 7월 21일 조현오가 해군기지 경비 문제로 제주를 방문했다. 조현오는 강정마을 관내 서귀포경찰서를 방문해 제주 해군기지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하는 불법행위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지시했다. 당연히 MB 눈에 들려는 행동으로 해석됐다. 서울지방경찰청장 시절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도 마찬가지다.

 

조현오는 언제부터 정치적 행보에 능했을까. ‘불법행위 엄단’ 발언은 울산남부서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관용차량을 의경이 운전했는데 교통신호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현오는 비상 상황이 아니라면 교통법규를 철저하게 지킬 것을 주문했다. 지시를 어기면 법규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했다.

 

2006년 12월 1일 경비국장으로 승진하면서 이 같은 특징은 도드라진다. 당시 한미FTA 집회를 비롯해 각종 시위가 줄을 이었다. 조현오는 집회 현장에서 불법행위자 검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접한다. 조현오는 실무자를 다그쳤다.

 

“왜 법대로 안 하느냐?”

“그렇게 못합니다.”

 

“왜 못하냐?”

“시위대와 경찰이 엉키면 사고가 납니다.”

 

“왜 사고가 나냐?”

“집회·시위 관리를 전·의경이 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집회·시위는 사회적 갈등이 폭발해서 생긴다. 그동안 집회·시위 관리 주체는 20대 초반인 전·의경이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대치한 전의경을 국가 권력으로 보고 공격적으로 모욕을 주곤 한다. 자극을 받은 전·의경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채 진압에 들어가면 사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게 무리한 추적이다. 진압 상황에서 시위대가 경찰을 피해 도망가면 일단 법 위반 행위가 시정된 것으로 보면 된다. 무리하게 끝까지 쫓아가 검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감정 통제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진압대는 방어용 방패를 공격적으로 쓰기도 한다.


조현오의 근본적 사고

 

2005년 허준영이 경찰청장일 때 한미FTA 반대 집회 중에 농민 2명이 사망한다. 조현오는 법대로 조치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고민한 끝에 전·의경 폐지를 해결책으로 내놓는다. 조현오에게 집회·시위 관리 모델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직업 경찰관 부대가 집회·시위를 관리한다. 대략 100개 중대로 중대마다 250명 정도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버스, 승합차, 자동차로 이동하며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나는 집회·시위를 관리한다.

 

조현오는 전·의경 폐지를 주장했고 이를 대체할 경찰 인력 협상을 기획재정부와 진행한다. 하지만, 2008년 ‘촛불집회’가 터지면서 전·의경 폐지 불가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현오가 경비국장을 하던 시절 기자들은 예정된 집회·시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묻곤 했다. 조현오는 “불법행위는 엄단하겠다”라고 답했고, 기자들은 “이번 주 족족 잡아들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2011년 7월 21일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해군기지 경비 문제로 제주를 방문했다. 조현오는 강정마을 관내 서귀포경찰서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하는 불법행위에 단호하게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한 매체를 통해 서귀포경찰서 밖에 있던 주민도 실시간으로 이 정보를 접했다. 흥분한 주민은 조현오가 탄 버스를 에워싸며 이동을 막았다. 7분 정도 흘러서야 버스는 움직일 수 있었다.

 

조현오는 제주를 떠나기 전 서귀포에 있는 한 횟집을 들렀다. 제주경찰청장인 신용선을 비롯해 제주지방청 참모들이 모였다. 조현오는 식사 전에 이번 불법사태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경찰청장 한마디에 제주지방청 참모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제대로 회를 먹는 사람은 조현오뿐이었다.

 

 

 

사람들은 서귀포경찰서에서 조현오 발언은 청와대를 의식한 것으로 봤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자 차명계좌 발언을 했고 이런 발언으로 MB 눈에 들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모양이라는 분석도 뒤따랐다. 하지만, 이 같은 단정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시기 조현오가 청와대와 마찰을 빚는다는 보도도 눈에 띄기 때문이다. 조현오가 서울청장이던 2010년 2월 국제범죄수사대가 창설됐는데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국회예산정책처가 발간한 ‘2014 회계연도 재정사업 성과 평가’ 보고서를 보면 2015년 4월 기준 지역경찰(지구대·파출소 근무 인력)은 정원(4만 5490명)보다 1705명이 적다. 반면, 경찰청과 경찰서 근무 인력은 정원(6만 5579명)보다 848명이 많다. 이 통계를 접한 언론은 민생안전 현장 일선을 책임지는 지구대·파출소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고 질타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부족한 일선 경찰서 인력을 더 줄여서 지방청 인력을 늘리는 방향으로 구조를 조정한 이가 조현오다. 국제범죄수사대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1991년 조현오가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당시 대공과장)이던 때부터 시작한다.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은 조현오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보직이기도 하다. 보안과는 이른바 간첩을 잡는 곳이다. 그리고 경찰서 보안과에는 외사를 담당하는 직원들도 소속돼 있다. 아침마다 보안과 직원은 보안 및 외사첩보를 작성했다. 보고서 출처는 노조 소식지나 신문 등이었다.

 

일본 야쿠자, 중국 삼합회, 외국 조직폭력단, 인신매매단, 간첩 등을 막고 검거하려면 일선 경찰서에 배치된 1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는 불가능했다. 첩보를 입수한다고 바로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조현오는 경찰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방청 인력이 많고 파출소 지구대 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국회에서 경찰 지휘부를 압박하는 단골 메뉴였다. 그러다 보니 경찰도 비난을 의식해 한 발씩 나가지 못했다.

 

권한을 갖게 된 조현오는 2009년 경기지방경찰청부터 조직을 개편했다. 안산 등 외국인 밀집 지역에서 활동하는 외국 조폭 등을 관리하려면 경찰서 단위 외사 인력으로는 대처에 한계가 있었다.

 

각 경찰서에서 첩보를 담당하는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모두 지방청으로 불러들여 경기지방경찰청 외사계를 만들었다. 통상 ‘외사분실’이라고 부른다. 실무를 맡은 계장(경정) 중에 총경 승진자를 배출하도록 하면 동기부여가 된다. 승진 의욕이 있는 유능하고 젊은 직원도 선발된 외사경찰이 활동하면서 효과가 나타났다.

 


 

청와대와 마찰 빚은 까닭

 

이듬해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계장급이 대장을 맡는 국제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은 조현오 행보 때문에 난처했다. 민정수석실은 검찰을 앞세워 외국인 범죄를 대처할 계획이었다. 2009년 10월 청와대 민정수석실 주도로 ‘외국인 조직범죄 합동수사본부’가 출범했다. 그런데 경찰이 먼저 치고 나간 모양새였다. 민정수석실이 경찰청장 강희락에게 경고성 전화를 했다는 보도가 나갔다. 물론 이후 이야기는 없다.

 

 

민정수석실은 바로 조현오에게 전화해 질책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경찰청 허가를 받으면 지방청에 계 단위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다고 받아쳤다. 질책성 전화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돼서도 눈치를 보지 않는 행보를 이어갔다. 경찰 인사에 주도권을 쥐었고 검찰과 맞서기도 했다. 민정수석은 차명계좌 발언 수사를 언급하며 조현오를 압박했다. 조현오는 이에 언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과연 조현오 행동과 발언 배경에는 MB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까. 사람들은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될 욕심으로 치밀하게 계산해 ‘차명계좌 발언’을 했다고 여긴다. 차명계좌 발언에 대해 한 전직 참모는 계획적이라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고 무심코 나왔다면 조직 안에서 파워가 커지다 보니 거리낄 것이 없어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고 짐작했다.

 

연재 시작부터 밝힌 대로 조현오 행위를 선의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우선 조현오가 경찰청장 시절 터진 ‘함바 비리’ 사건에 대처한 방법을 살펴보겠다.

 

건설현장에 있는 식당을 ‘함바집’이라고 부른다. 유상봉은 함바집 운영권과 인사 청탁 명목으로 전임 경찰청장인 강희락을 비롯해 고위 공무원에게 금품을 건넨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2010년 말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함바 비리에 전·현직 경찰 간부가 대거 엮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총경 급 연루자가 상당수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 지휘부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전직 간부들은 보통 검찰 수사를 지켜보든지 조용히 정보나 감찰을 동원해 내부적으로 진상 파악을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조현오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조현오는 총경 이상 간부 560명에게 자진신고를 지시했다. 유상봉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만났는지, 금품·향응을 받은 적이 있는지 등을 적어 내라고 했다. 자진신고를 하면 최대한 선처하지만 검찰 수사나 보도를 통해 연루 사실이 밝혀지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가혹하고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은 수사와 구형을 담당하는 검찰이 보기에 황당했다.

 


 

조현오의 경찰 사기 진작 방식

 

조현오 발언을 이해하려면 그가 지휘관이었다는 점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지휘관은 조직 구성원 사기 진작에도 책임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를 가나 분위기가 중요하다. 조직 구성원의 99.999%는 함바 비리 사건과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그 99.999%가 위축되고 자괴감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조현오는 지휘관이 손 놓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유상봉과 관련된 경찰이 극소수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관련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자 감찰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검찰에서 수사하는데 감찰까지 풀어서 구성원을 다시 조사하면 조직 사기가 추락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자수’를 지시한 것이다. 유상봉과 접촉을 인정한 경찰은 41명이었다. 유상봉에게 금품을 받은 경찰은 2명이었는데 내용물은 각각 와인과 홍어였다.

 

조현오가 지휘관이 된 2008년부터 조직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적은 3번 정도를 꼽을 수 있다. 2007년 12월 경기도 안양에서 발생한 혜진·예슬 양 사건이 터지고 경찰은 거센 비난을 받았다. 국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은 2008년 촛불집회였다.

 

2008년 부산청장이던 조현오는 경찰 사기 진작을 위해 밤새 범인 검거 소식이 들리면 아침마다 상과 상품을 들고 현장에 나갔다. 낮에도 검거 소식이 들리면 바로 전화하며 치하했다.

 

 


 

노무현 차명계좌 발언의 배경

 

조현오가 서울청장이던 2010년 고 노무현 대통령 사망 1주기를 앞두고 있었다. 경찰도 노무현 죽음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사망 1주기 즈음 열리는 집회 참여자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자기 일에 대한 정당성에 의심을 품기 마련이다. 이는 조직 내 사기 문제로 이어진다. 2011년 3월 서울청 2층 강당에서 조현오는 기동대 지휘관을 모아 교육을 진행했다.

 

내가 만난 한 전직 청장은 자기가 강의를 했다면 “막는 게 우리 숙명”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했다. 조현오는 5월부터 경찰 사기가 떨어진다면 그 분위기가 그해 11월에 있을 G20 서울정상회담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현오는 원고 없이 강의했다. 대한민국 경찰이 얼마나 유능했는지 계속 강조했다.

 

그러다 며칠 전에 어디선가 들은 내용이 떠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1주기 집회 참가자보다 이를 막는 경찰에게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뒷받침할 근거였다. 그리고 ‘차명 계좌’ 발언이 이어졌다. 조현오는 경찰도 뇌물 받으면 바로 파면당하고 형사입건당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휘관으로서 부대 사기 진작 노력을 아래와 같이 약속하며 강의를 마친다.

 

“여러분 사기 관리를 위해서 저도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근무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였고, 특히 전·의경 사기관리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억압하고 규정하는 이런 것은 안 하려고 그럽니다....(중략)... 다른 식으로라도 사기 관리를 어떻게 하면 더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그해 8월 조현오가 경찰청장으로 지명되자 암투가 시작됐다. 당시 강연을 찍은 동영상이 유출됐고 KBS가 이를 보도하면서 조현오는 ‘공공의 적’이 됐다. 2011년 말 문재인을 비롯한 친노 정치인들이 검찰청 앞에서 조현오를 처벌하라는 1인 시위를 벌였다. <나꼼수>도 왜 중앙지검 형사1부는 조현오를 부르지 않느냐며 성토했다.

 

당시 조현오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사회적 비난과 별개로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의성’과 ‘허위 인식성’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의성’은 보통 선거에서 후보자끼리 비방을 할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가 ‘노무현 차명계좌’ 이야기를 진짜로 믿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제 조현오와 마지막 현장검증 장소로 가보겠다. 바로 서울 청담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다.

 

(다음 15화-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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