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제3화. 참여정부가 댓글에 빠진 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2018년 8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경찰 댓글 공작 사건으로 조현오 청장 시절 국장 급부터 구속영장 청구를 할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다.

 

그 명단에는 2016년 퇴임한 정용선도 포함됐다. 

 

정용선에게 전화해 대비하라고 알려줬다. 정용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이렇게 툭 내뱉었다.

 

“내가 뭘 했는데요?”

 

문재인 정부 들어 군, 기무사 등에서 특별수사팀이 설치되고 수사 방식이 비슷하다는 것을 귀띔했다.

 

 

특히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 구속은 정당성을 갖추는 중요한 모양새다. 구속영장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게 여론전도 펼친다. 경찰 댓글 사건에서도 이런 방식이 되풀이됐다.

 


 

정용선은 한참 생각하더니 경찰 조사 때 제출한 자료가 있다고 말했다. 17쪽에 달하는 내용이다. 오랫동안 정보·기획 부서에서 근무하면서 알던 경찰청 업무 내용을 떠올리며 혼자 작성했다. 

 

정용선. 연합뉴스 인용

 

물론 경찰 사이버 대응 요령도 포함됐다.

 


 

필자는 이 내용을 검찰 출신 변호사에게 보내 검토해달라고 했다. 철저한 검찰주의자인 그 변호사는 문서를 읽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떤 법조인도 이렇게 보고서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너무나 탁월하다.”

 

훗날 법정에서 재판장도 정용선에게 보고서를 잘 봤다고 덧붙였다.

 


 

정용선 보고서는 큰 제목, 소제목, 숫자 배치, 당구장 표시를 적절히 사용하여 노무현 정권부터 현재까지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 보고서가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던 까닭은 정용선 씨가 그 업무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용선 씨 업무를 되짚어보자.

 


 

경찰 조직은 창설 이후 주요 일간지와 방송 기사를 살펴서 경찰 관련 기사를 챙겨 확인했다.

 

 

경찰 언론 대응 방법은 다른 정부 기관과 같다. 정부 각 부처는 허위보도나 왜곡 주장을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나 반론보도 청구로 대응했다. 물론 보도자료 배포, 공식 브리핑(문자나 메일 전달 포함)은 기본이다. 이걸  공식 대응이라고 한다. 

 

국가기관 사이버 대응은 2000년쯤 김대중 정부 시절 인터넷 발달과 시작됐다. 그러면서 사이버상 허위 주장과 허위사실도 등장했다. 이는 오늘날 ‘가짜 뉴스’로 개념화된다.

 

영상역사관 인용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부터 언론 공식 대응 방법으로 새로운 대응이 도입된다. 바로 댓글 게재다. 대상은 ‘국정브리핑’에 올린 언론보도였고 댓글 실적을 부처 평가에 반영했다.

 

정용선은 그 당시 충격을 받은 언론들이 기사를 쏟아냈던 것을 기억했다..

 


1.동아일보“BH(청와대) 지시사항이다. 매일 댓글 달라"(2006.4.6.)

2. 동아일보 (사설) 언론 공격 ‘댓글 달기’ 경쟁시키는 청와대(2004.4.6.)

3. 프레시안 노 대통령 “<국정브리핑> 댓글 달아라 ” 지시 논란(2006.04.06.)

4. 연합뉴스. <홍보처‘언론보도에 부처 의견달기’ 공문 발송 (2006.4.6.)

5. Views&News:국정홍보처,‘댓글 지시 달기’ 파문

6. 데일리안 : 노무현 정부,‘ 전 공무원의 댓글 요원화’? (2006.4.6.)

(현재 네이버상에 제목은 검색되나 기사 내용은 삭제된 상태)

7. 문화일보 : 정부 각 부처별 언론보도에 ‘댓글’ 독려(2006.4.6.)

8. 노컷뉴스“공무원들, 언론 보도에 꼭 댓글 달아라”(2006.4.6.)

9. 동아일보: 공무원들 “댓글 잘 달면 출세”... 온라인 국정운영 실태(2006.4.7.)

10. 노컷뉴스. 공무원 “댓글 달기... 달라면 달아야죠.”(2006.4.7.)

11. 세계일보 : “언론보도에 부처 댓글 달아라... 평가에 반영”(2006.4.7.)

12. SBS: 국정홍보처 ”댓글로 언론보도 대응하라”(2006.4.6.)

 


 

경찰도 정부 방침을 따라간다. 이것은 경찰청 정보2과 업무였고 2006년 정보2과장은 정용선이었다.

 

정용선. 뉴스1 인용

 

13만 명을 거느린 경찰청 업무는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반복 업무는 대부분 관행적으로 이뤄진다.

 

우선 사이버 이슈에 대응하려면 인터넷상에 어떤 경찰 관련 내용이 떠도는지 파악해야 한다.

 

sbs 인용

 

정보2과는 수집된 사이버 이슈를 기능과 관할에 맞게 통보한다. 물대포 내용은 경비과, 삼색 신호등 내용은 교통과, 서울 사건은 서울청으로 통보할 것이다.

 

이 사이버 이슈를 통보받은 해당 기능이나 해당 지방청 또는 경찰서는 사실 확인을 거친 뒤 대응 여부와 수단을 결정했다.

 

뉴시스 인용

 


 

이 업무가 더 중요하게 자리매김한 계기가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다.

 

김주완 블로그 제공

 

광우병 사태는 이명박 정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2008년 6월 청와대는 인터넷을 담당하는 국민소통비서관을 신설했다. 또 부처별 대변인실마다 소관 업무에 대한 인터넷 대응을 강조하고 평가했다.

 

이에 경찰청 정보국도 사이버 정보만 전담하는 정보관 2명을 배치했고 사이버 치안정보를 수집·작성·배포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용선은 정보2과장에서 기획조정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획조정담당관은 조선시대 왕명을 하달하는 도승지와 비슷하다. 과장 중 서열 1번으로 국관회의에서 경찰청장 지시 사항을 정리해 전국 경찰에게 배포한다.

 

2009년 강희락 경찰청장 내정자와 정용선 본청 과장. 매일건설신문 인용.

 

2009년 강희락 경찰청장이 내정됐다. 강희락은 2010년 1월 정용선을 경무관으로 승진시켜 정보심의관으로 삼았다.

 

오마이뉴스 인용

46세인 정용선은 언제나 동기보다 2~3계급 승진이 빨랐다. 경찰청에는 50대 과장이 즐비하다. 정용선은 각별히 처신에 신경 썼다.

 

2010년 8월 강희락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현오가 청장으로 취임했다.

 

강희락(좌)-조현오(우).시사저널 인용.

 

정용선은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아 지방청 근무를 희망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업무능력이 탁월한 정용선에게 남아달라고 부탁한다.

 

조현오는 2011년 정용선을 치안감 승진 명단에 넣는다.

 

조현오 경찰청장 시절 정용선(좌). 뉴시스 인용

 

정용선은 이처럼 어느 청장이 오든 항상 인정받고 승진했다.

 

강신명 청장 시절 정용선(우) 수사국장. 일요서울 인용

 

직장인이라면 그 비법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정용선은 두 가지를 꼽았다. 보고할 때 멍청하게 보이지 말고 상사 기분을 맞출 것!

 


 

경찰청은 청장 주재 회의를 8시 30분에 시작한다. 그전까지 경찰청장은 과장들 보고를 받는다. 보고할 사람이 두 명 정도 남으면 비서실은 정보심의관에게 전화를 한다. 

 

“지금 올라오십시오.”

 

정보심의관실은 10층에 있고 경찰청장실은 9층이다. 보고 시간이 임박할 즈음 직원이 ‘사이버이슈 보고’를 마무리해서 가져온다.

 

정용선은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내용을 한 번 훑어본다.  하지만 정용선은 청장 보고 시 ‘사이버동향보고서’에 대해 중점적으로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청장 관심사는 주요 사건이었지 사이버이슈가 아니었다.

 

주요 사건은 신문 1면이나 9시 뉴스에 나오는 정도 사안을 말한다.

 

만약 모 경찰서 초동 조치가 미흡했다는 뉴스가 전날 밤 9시 뉴스에 나왔다면 이미 전날 본청 감찰과에서 총출동한 상태다.

 

 

 

이 내용은 정용선이 청장에게 보고하기 전에 이미 해당 업무 과장이 보고를 마쳤다. 즉 해당 기능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조치가 이뤄진 상황이다.

 

정용선은 이미 보고가 돼 알고 있는 사안을 절대 경찰청장 앞에서 주절주절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태도가 멍청해 보인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이버이슈는 왜 중점적으로 보고하지 않았을까. 크지 않은 사이버이슈에 대해서는 각 기능별로 큰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정용선이 다른 기능에 관련된 사이버이슈를 보고했다 치자. 그렇다면 그 기능 국장이나 과장이 정용선에게 일을 크게 만들었다며 비난할 것이다.

 

“보고 안 해도 되는 것까지 보고해서 사람 힘들게 한다.”

 

또한 이러한 보고 내용은 대부분 경찰 조직에 좋지 않은 사안이다. 경찰청장 처지에서 기분 좋을 리 없다. 이처럼 보고 과정에서 상사 기분을 맞추는 것은 기본이다. 수석이 괜히 수석이 아닌 것이다. 

 

정용선은 보고를 마치고 '주요 사이버 이슈 보고서'는 시간 있을 때 읽어보라며 다른 보고서와 함께 책상에 두곤 했다.

 


 

정용선은 2016년 경기지방경찰청장을 마지막으로 퇴임했다.

 

정용선 경기지방경찰청장. 뉴스1 인용

 

정용선은 그간 업무와 국관회의 지시사항을  종합해볼 때, 경찰 조직은 경찰 신분을 밝히고 대응하는 ‘공식 대응’이 기조였다고 인식했다. 이게 정용선이 작성한  17페이지 보고서 핵심이다. 

 


하지만 2018년 경찰청 특별수사팀은 조현오 청장 재직 시절 경찰이 신분을 숨기고 댓글 공작을 펼쳤다며 수사했다.

 

당시 서울청에서 어떤 이슈에 댓글을 달았는지를 알 수 있는 '이슈 대응 목록'과 그에 따른 댓글 작업 보고서를 찾아냈고 그것을 언론에 흘렸다.

 

 

이는 정용선 기억과 다르다.  혹시 정용선 씨가 미처 놓친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경찰청은 매일 보고서가 물밀듯 들어온다. 지방청에서 보내는 자료들 중에는 사이버 대응 과정에서 어떤 직원이 어떤 내용으로 댓글을 달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보고서도 분명 있다.  정용선은 이러한 지방청 자료를 신경 써서 살펴보지 않았다.

 

정용선은 왜 이런 자료를 거들떠보지 않았을까? 정용선은 정보심의관 시절 하루에 봤던 보고서 분량이 적어도 500페이지 이상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늘 상 시스템에 의해 들어오는 지방청 자료는 관심이 떨어진다.


그렇더라도 ‘댓글 공작’을 펼쳤다는 특별수사팀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


 

정용선은 경찰 정보통이지만 경찰청 수사국장을 지냈고 지방청 수사과장도 거쳤다.

 

특별수사팀 수사기록은 정용선이 볼 수 없다. 그러나 단서가 있다.

 

특별수사팀이 언론에 흘린 서울청이 작성한 '이슈 대응 목록'이다. 이 목록으로 어떤 이슈에 대응했는지와 대응한 날짜를 파악할 수 있다.

 

 

정용선은 대응한 날짜 전후로 각 언론사 인터넷 사이트에서 기사를 찾았고 그곳에 경찰관이 올린 글을 일일이 찾아내기 시작했다.

 

정용선은 경찰관이 자기 실명 또는 자기 직책을 밝히고 쓴 것을 계속해서 찾아냈다. 90여 건 정도였다. 이는 정용선 기억과 일치한다.

 

하지만 정용선은 더 이상 찾아내지 못했다.

 

2010년 경찰서와 지방청마다 언론 대응을 했기에 당시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올린 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13년 전후로 경찰서마다 자체 운영하던 홈페이지가 지방청으로 통합되고 지방청 홈페이지도 본청 홈페이지로 통합됐다.

 

즉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

 


 

그렇다면 대체 익명 댓글은 어떻게 된 것인가. 정용선은 재판에 넘겨진 후에 수사 기록을 모두 받아 살펴봤다. 진실은 기록에 있었다.

 

수사기관이 포털사에서 확보한 댓글 등은 30만 개였다. 기소한 댓글은 그중 4%인 1만 2000여 개다.

 

정용선은 수사 기록을 보고 지금까지 경찰이 공식 대응을 했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렇다면 왜 익명 댓글로 활동하게 된 것인가. 특별수사팀도 이 업무를 담당한 본청 계장 직원, 실무자에게 확인했다. 정보과에 속한 직원들 상당수 진술이 수사기록으로 남아 있다.

 

드림필드11 블로그 인용

그 후 필자가 정용선을 만난 것은 재판을 앞둔 법정 복도였다.

 

그동안 수사기록을 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긴 흔적이 보였다. 그는 몹시 의외라는 표정으로 낮게 속삭였다.

 

“어떻게 여경들이 오히려 당차고 진술을 똑 부러지게 하고...”

 

(다음 제4화, 여경은 경찰의 미래다.)

 
 
 
 

 

P.S) 위 제목은 홍상수 감독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차용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6화 대구도 항구다.

 

 

1983년 진주 경상대학교에 입학한 김순재는 운동권을 맴돌았다. 낙농학을 전공한 그는 종종 진주와 가까운 사천에 사는 강기갑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농사를 짓다 1976년부터 한국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해왔다.

 

김순재 또한 졸업하고 나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만들어진 전국농민회에 합류했다. 2003년경에는 경남 농민회 사무처장을 맡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일주일 전, 칠레 라고스 대통령을 불러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년 뒤인 1947년 미국이 주도한 무역 체제가 '관세와 무역에 관한 협정(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이다. 여기서 농산물까지 포함한 게 '세계무역기구(WTO·World Trade Organization)' 체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여러 나라에 동의를 얻자니 협상 속도가 지지부진해 국가별 협정으로 접근한 게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 제도다. 문제 발단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이었다.

 

2003년 5월, 김순재는 서울에서 열린 전국총연맹 상임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한-칠레 FTA로 농가 피해가 예상되어 농민들이 크게 반발할 때였다. 당시 전국총연맹 상임집행위원회는 한-칠레 FTA를 막는 투쟁 방법으로 '고속도로 봉쇄'를 선택했다. 결행 날짜는 6월 20일로 정했다.

 

 


 

 

그날 밤 김순재는 창원으로 돌아오며 고민에 빠졌다.

 

"갱남에 고속도로가 밸시리 많다카네."

 

충남은 서해안고속도로, 전남은 호남고속도로, 경북은 경부고속도로만 막으면 됐다. 하지만 경남은 남해고속도로, 88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막아야 했다.

 

 

 

김순재는 돌아오자마자 경남지역 시군농민회 사무국장들을 긴급 소집했다.

 

"고속도로 봉쇄로 결정 났다. 막는 방법은 내가 이야기하겠다."

 

먼저 진주농민회 사무국장을 쳐다봤다.

 

"일단 진주 사무국장! 니는 무조건 남해고속도로를 다 틀어막아라. 진주 니네는 다른 데 지원도 없다."

 

진주는 정읍·나주 등과 함께 농민회에서 '1급지'로 분류하는 곳이다. 그만큼 농민회원수가 많았다.

 

"거창·산청·하동·남해·합천은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틀어막아라. 수단과 방법 강구해서!"

 

88고속도로까지 막을 여력은 없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88고속도로는 차가 별로 안 다니니까 고마 놔두삐라. 김해·창원·고성·의령·함안 모두 구마고속도로로 간다!"

 

시·군농민회 사무국장들은 각기 분주하게 계획을 짰다. 계획 중에는 고속도로에 인접한 국도 가드레일을 풀어 차를 올리는 방법도 있었다. 6월 20일 예정대로 각자 맡은 고속도로로 달려가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경남경찰청 정보과장이 대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김순재는 거절했다. 총연맹에서 결의한 이상 협상할 여지는 없었다. 정보과장은 안타깝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전국에 막은 데가 없는데 경남만 다 틀어막는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김순재는 도연맹 사무처에 전화해 상황 확인을 부탁했다. 한 군데도 막은 곳이 없었다.

 

충남 당진에서는 이미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렸고 경북은 사전 차단돼 꼼짝하지 못했다. 경남은 자체적으로 판단해 마무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충남 당진에서 연행된 농민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해산하겠다는 제안을 경찰에 전했다. 당연히 경남 경찰 손이 충남에 미칠 수는 없었다.

 

며칠 뒤 고속도로 봉쇄 투쟁 사건으로 전국에서 130명이 입건됐다. 이 가운데 117명은 경남농민회 회원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덥수룩한 수염을 휘날리는 경남농민회 의장 강기갑을 비롯해 김순재도 연행됐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그 많은 고속도로를 일시적으로 봉쇄한 경남 농민회 저력은 어디서 오는가? 경남은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연대문화가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정치·경제 정책이 낳은 결과물이다. 경남에 고속도로가 많다는 것은 노동자들도 많다는 의미다.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 핵심은 '최소 투자와 최대 수익'이었다. 이는 당연히 노동자 희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산·창원지역은 1986년 6월 민주화 투쟁보다 1988년 노동자 대투쟁이 더 격렬했던 지역이었다. 당시 마산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집회를 했고 창원공단 노동자들은 정부가 투입한 백골단에 맞섰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중심에는 마산·창원노동자연대(마창노련)이 있었다. 전노협 핵심은 영남권과 수도권이었다. 국토 서쪽은 광주 아시아자동차를 비롯해 일부 업체만 전노협에 참여했다.

 

이는 훗날 영호남 간에 지역발전에서 극심한 불균형을 초래했다.

 


 

마창노련을 낳은 지역답게 마산·창원에는 독특한 연대 문화가 있다. 광주MBC는 2012년 총파업 때 지역 민주노총과 처음 교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산 MBC(현 MBC경남)는 지역 노동계와 정기적으로 교류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민주노동당 사무국장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지역에서 보수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경남신문>도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 지부로 꾸준하게 활동한다. 서울로 치자면, <조선일보> 기자들이 민주노총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모양새다. 서울에서는 상상이 잘 안 되는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지역 언론이 논조와 관계없이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이다. 그 이유는 마산·창원지역에서 노동이 언론에서 다루는 주요 소재이기 때문이다.

 

또 학계에서도 이 분야 연구자들 활동이 활발해 지역사회에서 늘 엮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소수인 한 회사의 직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회사가 노조원에게 부당한 징계를 하면 노조원은 지방노동위원회로 달려갈 것이다. 거기 구성원들은 대학원 지도교수부터 시작하여 모두 안면 있는 지역 사람들로, 직간접적으로 민주노총과 관련될 확률이 크다는 점이다. 경남에서는 민주노총이 농민회만이 아니라 각 지역시민사회 단체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돼 긴밀히 움직인다.

 


 

또한 경남은 고속도로만이 아니라 친일파도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지역 출신 유명 근현대 인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인물들은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삶이 불거지며 논란을 낳게 된다. 지역 출신 근현대 인물 재조명 사업이 느닷없이 친일 문제에 대한 검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마산시는 1999년 8월 이은상·조두남 기념관 건립 계획을 발표했는데, 경남은 이은상·조두남 기념관 건립사업뿐만 이나라, 진주 남인수, 통영 유치환, 창원 이원수까지 친일 행적이 있는 문화·예술인에 대한 기념사업을 반대했고 대부분 관철했다.

 


 

그런데 전북 고창은 다른 지역에서는 시민단체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갈등이 한참 진행 중이던 2000년이 넘어서야 시작종이 울렸다. 이유가 무엇일까? 전북 고창 출신 시인 서정주가 다른 친일파들보다 장수했기 때문이다.

 

 

2000년 12월 24일 시인 서정주 사망 소식이 메인 뉴스를 장식했다. 이듬해 2001년 11월 3일 서정주 고향인 전북 고창군에서 '미당 시문학관'이 개관한다.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대표는 익산 남성여중 체육교사 최재흔 씨였다.

 

2002년 11월 고창군이 '미당 시문학제'를 개최하려고 하자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를 비롯한 사회단체들이 군청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2002년 10월 21일 <전북일보>에는 '미당 시문학제 취소'라는 기사가 소개됐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미당 서정주는 문화 권력이었다. 그해 <중앙일보>는 '미당문학상'을 만들었다. 또 동국대학교에서 고창으로 문학기행을 오기 시작했다. '미당 시문학제'는 그렇게 이어졌다. 이 행사가 열릴 때면 미당 시문학관 입구에는 '차라리 일장기를 걸어라'라는 펼침막이 걸렸고, "시만 잘 쓰면 민족 반역죄도 용서받을 수 있느냐!"는 구호를 외쳤다.

 

결국 2004년 고창군은 미당 시문학관에 서정주가 남긴 친일작품까지 전시하기로 하며 반대 목소리를 높인 단체들과 합의한다. 친일 작품은 문학관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방에 걸렸다.

 

최재흔 씨가 이런 활동을 하며 가장 어려운 부분은 "왜 외지인이 우리 행사에 관여하냐?"는 말을 들을 때였다. 그는 그 지역 내 언론과 시민단체 등 중간집단의 호응이 없으면, 정당성을 입증받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창 지역에서 어떤 사람들이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와 연대했을까?

 

고창지역에는 경남처럼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은 빈약하지만, 유족회 회원들은 풍부하다. 서정주가 1943년 경 조선 사람들에게 대동아전쟁 참가를 독려하고 찬양하는 홍보담당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최재흔 씨는 반대 활동에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 고창지부와 고창 지역신문사가 연대한 점이 첫 번째 성공요인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바로 2001년 12월 개통된 서해안고속도로 덕이었다. 최재흔씨는 전북 익산 남성여중 체육교사였다. 사안이 발생하면 군수를 만나야 하고, 유족회와 모임을 가져야 한다. 한 해에 적어도 20번은 익산과 고창을 왕복해야 한다. 미당 서정주가 타계한 그 해에 개통된 서해안 고속도로 덕분에 전북 익산에서 고창까지 1시간 40분이면 갈 수 있게 됐다.

 

 

대체 영호남 간의 극심한 지역발전 불균형은 어느 정도인가?

 

이런 불균형 때문에 한 도시는 다른 도시와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한 KBS 기자는 2010년 10월 22일 목포방송국으로 출근하면서 본 광경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당일 전라남도는 영암에서 첫 F1 레이스를 개최했다. 목포 시내에서 영산강 하굿둑을 지나 경기장으로 가는 길은 하나다. 그는 집 앞에 있는 작은 빵집에서 매일 빵을 먹고 출근했다. 그런데 F1레이스 기간 내내 영국 BBC 스텝과 F1 레이싱 팀인 레드불 스텝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동네 빵을 싹쓸이했다.

 

"자네, 레드불팀 빵 먹는 거 봤는감?"

 

빵집 주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영암군에 있는 경기장 근처에는 숙소와 식당 등 이들을 수용할 만한 기반시설이 없었다. 사람들은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목포로 몰렸다. 밤이면 모든 술집에서 외국인들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기가 끝나면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도로가 감당하지 못하면서 영산강 하굿둑에서 목포까지 4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F1 경기장 주변 인프라와 도로 사정이 차츰 나아져갔다. 2012년 남해안고속도로 영암-순천 노선이 개통됐다. 순천에서 목포까지 2시간 걸리던 게 한 시간으로 줄었다. 이런 곳이 많다. 2005년에는 포항-대구 고속도로가 개통됐다. 대구에서 포항까지 40분 거리로 단축된 것이다.

 


 

필자는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대표였던 최재흔 씨에게 친일잔재청산 운동을 왜 그리 열심히 하는지 물었다. 그는 '정체성 회복'이라고 답했다. 중간집단은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공간이 중심이 돼 활동을 한다.

 

2005년 대구-포항 고속도로 개통에 맞춰 대구MBC에서는 '대구도 항구다'라는 리포터가 나오기도 했다. 자기만의 시각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우리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서울 중앙발 시각은 단연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KTX로 3시간이면 갈 수 있을 만큼 작다. 우리나라는 아파트라는 거주 문화, 마트와 백화점이라는 소비문화가 어디든지 같다. 이런 시대에 지역성이라는 담론이 크게 제기될 것이 있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중에 여러 가지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펼쳤다. 참여정부가 추진한 큰 정책으로 행정수도와 공공기관 이전을 꼽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정책에 온 힘을 기울인 이유가 뭘까. 공간이 사고를 지배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 대통령이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역대 대통령은 모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김해 봉하마을에서 태어나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변호사 활동을 했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에게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지역 간 권력 배분이나 기회 균등이 확보돼야만 한다는 절실함이 있었다. 다른 정치인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친구 문재인 대통령은 어떠할까.

 

(다음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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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2005년 1월 27일 경찰청장 허준영은 조현오를 경무관으로 승진시켜 경찰청 외사관리관으로 발령 낸다. 외사관리관실은 1과에서 3과까지 있다. 외사1과는 외사기획 국제협력, 2과는 외사정보, 3과는 외사수사로 나뉜다. 허준영은 2월 3일 총경 인사를 단행하며 외사1과장 자리를 잠시 비워두라고 지시한다. 그 자리는 2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와 법정투쟁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는 총경 몫이라고 했다. 그 총경이 이철규였다.

 


 

강원도 출신인 이철규는 1981년 간부 후보 29기 출신으로 입학, 졸업을 수석으로 장식한 인재였다. 하지만 경찰 공직 생활은 자괴감과 함께 출발했다. 나이 든 경찰간부들이 젊은 검사를 모시는 모습을 접했고, 검찰은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힘든 요구를 하며 경찰을 통제했다. 1997년 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때 이철규는 혜화경찰서 정보과장이었다.

 

경정 신분인 이철규는 정권인수위원회에 파견된다. 당시 김대중이 내세운 공약 중에는 '경찰 수사 독자성 보장'도 있었다. 경찰청이 ‘경찰수사의 독자성 보장’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는 걸 검찰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경찰 지휘부가 과거와 달리 강력하게 추진하자, 얼마 후 경찰청 정보국장인 박희원과 특수수사과장인 박정원이 검찰에 구속된다. 경찰은 '수사권독립 요구에 대한 표적수사'라고 반발했으나 추진동력은 이내 소멸됐다.

 


 

이철규는 1998년 총경으로 승진했고, 2002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안산경찰서장에서 자리를 옮겨 분당경찰서 서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즈음 참여정부가 법무부 장관으로 강금실을 임명하자 검찰은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2003년 3월 9일 평검사들은 대통령 노무현과 공개토론에서 맞짱을 떴다. 그리고 검찰총장 김각영은 그날 대통령 비난 성명을 내고 사퇴한다.

 

3월 17일 검찰은 '권력형 비리 전담 수사기구'를 신설을 발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30일 분당경찰서장 이철규가 수뢰혐의로 구속된다. 2001년 안산서장 때 공사 비리 관련 진정이 들어온 사건을 2000만 원을 받고 무마했다는 혐의였다. 검찰은 뇌물을 주었다는 심 모씨 진술 말고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심 씨는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다. 당시 서울대병원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경찰서장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허위자백을 강요받고 2번 졸도하면서 사람을 못 알아보는 증상이 재발하였다'.

 

 

이처럼 검찰에서 허위자백만 받아내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참여정부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통해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하지만, 검찰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형사소송법 개정은 흐지부지됐다.

 


 

이철규는 2005년 5월 10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을 받고 사흘 뒤 경찰청 외사1과장으로 복귀한다. 당시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몇 가지 과제를 맡겼다. 그중에 하나가 외사관리관실을 외사국으로 승격시키고 20명인 해외 주재관을 50명으로 증원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주재관은 계급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경찰 계급은 전 세계가 비슷하다. 계급에 대한 존중도 마찬가지다. 직급이 있는 경찰이 외국으로 나가야 그 나라에서 직급이 있는 경찰을 만날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만큼 쉽게 풀 수 있다는 것이다.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가 김선일 씨를 살해하면서 해외 교민과 여행객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외국민보호'처럼 문서에나 채울 논리가 아니다. 바로 결정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이다. 외사국 증원 1차 관문은 ‘외교부 영사국’이었다. 외교부가 필요성을 동의해야 행정자치부, 기획재정부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 행정자치부는 공무원 정원을 결정하며 기획재정부는 예산을 편성한다. 물론 행정자치부와 기획재정부 역시 만만찮다. 두 부처 모두 습관적인 칼질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철규 과장은 조현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훗날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철규처럼 못한다"고 회상했다. 조현오는 이철규가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마당발'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이철규를 곁에서 지켜본 직원들은 그가 중앙부처를 드나들면서 관련 공무원 설득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한 공무원 아버지가 경주에 산다는 얘기를 들은 이철규는 그 지역 서장에게 따로 부탁했다. 그러면 서장은 공무원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이 경찰을 위해 애써 주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또 이철규는 또 부모님이 일찍 사망해 형에게 키워졌다는 기재부 공무원 얘기도 듣는다. 마침 그 형은 경찰공무원이고, 기재부 공무원은 전경 출신이었다. 이철규는 기재부 담당공무원이 전경으로 근무했던 부대장 신상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 부대장과 함께 찾아가 설득하기도 했다.

 

조현오는 허준영이 이철규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철규는 상관이 원하는 부분을 해결 할 줄 알았다. 허준영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외교관 출신이 느끼는 갈증이 있었다. 어느 날 이철규가 허준영에게 말했다.

 

"앨빈 토플러가 한국에 왔는데 경찰청으로 방문하도록 할 테니 한 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경찰청에 외빈이 오는 일은 많지가 않다. 리언 러포트 사령관이 허준영을 용산 미국기지에 공식 초청한 것에 대한 답례로 경찰청이 리언 러포트 사령관을 초대한 적은 있었다. 조현오는 리언 러포트 사령관 앞에서 PPT 화면을 가리키며 경찰업무를 영어로 브리핑했다.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앨빈 토플러 부부가 경찰청에 오니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앨빈 토플러는 이미 8일 동안 한국 방문 일정을 빽빽하게 짜 놓았다. 하지만, 이철규는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앨빈 토플러가 출국 직전 경찰청을 방문하도록 일정을 변경시켰다.

 

 

2005년 9월 중국 북경에서 허준영과 중국 공안부장 저우융캉이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3일 앞두고 중국이 일방적으로 회담 일정을 변경했다. 공안부장이 바쁘니 공안부 상무부부장을 만나라는 것이다. 연유를 알아보니 일정 탓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기관에서 중국 측에 한국 경찰청장은 차관급이라 중국의 부총리급인 공안부장이 직접 대화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고 훼방을 놓았다는 말이 나돌았다.

 

한국은 경찰청이 행정자치부 소속이다. 법무부 장관이 지휘하는 검찰총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지만, 경찰청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허준영과 조현오는 중국에 구걸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면담은 이뤄져야 했다. 주한중국대사를 통해 중국 공안에 항의를 전하도록 했고 비공식 라인으로 등소평 장남인 덩푸팡과 접촉했다. 이철규는 덩푸팡을 잘 아는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허준영은 한국 경찰청장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공안부장과 회담하고 공안부 주관으로 조어대에서 만찬을 한다.

 

조어대는 금나라 장종 황제가 낚시를 즐겼다는 곳으로 지금은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외국 국빈 공식 연회장이다. 허준영은 또 그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인터폴 국제회의에서 대표 발표를 한다. 그때 허준영을 수행한 조현오는 2010년 8월 경찰청장이 됐다.

 


 

그동안 이철규는 경무관으로 승진해 강원도 차장 등을 지냈고, 2010년 초 치안감으로 승진해 충북청장으로 있었다. 조현오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열정과 여야를 설득할 수 있는 정보국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충북청장이던 이철규를 정보국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2011년 6월 경찰의 수사개시, 진행권을 보장한 형사소송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

 

2011년 초 검경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을 무렵 부산저축은행을 비롯한 여러 저축은행들이 한꺼번에 영업정지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대로 된 심사 과정 없이 부동산 등 위험 부담이 큰 사업에 무분별한 대출을 해주다가 부실채권을 떠안으면서 사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관련 기관 감독이 소홀해 이 같은 부실을 키웠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조현오는 정보국장에게 진상 파악을 지시했다. 국회는 저축은행 사태 의혹을 파헤치겠다며 '저축은행 국정조사특위'를 구성했다. 국세청, 감사원 등 기관장들이 불려 나왔다. 경찰도 예외일 수 없었다. 보통 국회의원이 다그치면 기관장은 저자세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오히려 검찰 수사지휘를 문제 삼았다.

 

"2005년 10월 부산저축은행에서 발생한 575억 원 규모 부당 대출을 수사했는데 경찰은 관련자 8명을 전원 구속 의견으로 보냈지만 검찰이 1명만 구속의견으로 송치하도록 했다. 또 2007년 12월에도 검찰은 보해저축은행 부당대출 건을 불기소하라고 수사지휘를 했다."

 

저축은행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2011년 9월 18일 제일, 프라임, 에이스, 토마토, 파랑새 등 저축은행들이 잇달아 영업정지를 당한다. 여론은 빠르게 악화했다. 검찰은 9월 22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을 꾸린다. 그리고 10월 14일 제일저축은행 회장인 유동천을 구속 기소한다.

 

유동천은 강원도 출신으로 이철규 고향 중, 고교 선배였다. 검찰은 파랑새저축은행 대표, 토마토저축은행 대주주, 에이스은행 차주, 프라임 저축은행 대표 등을 잇달아 잡아들인다. 이철규는 11월 11일 치안정감인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2월 말, 검찰은 유동천에게 4000만 원을 받고 경찰 수사를 무마한 혐의로 이철규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한다. 이철규는 3월 1일 구속됐다. 2012년 10월 19일 1심 법원은 이철규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검찰은 바로 항소했다. 이철규는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13년 초, 검찰청 출입기자에게 연락을 받는다.

 

“이철규 청장님 혹시 (강원도) 원주 별장에 가본 적 있습니까?”

 

기자는 검찰청 기자실에 검사가 들어와 먼저 말을 꺼냈다고 했다. 강원도 원주별장 성접대 사건은 2013년 1월에 시작됐다. 김학의 당시 법무부 차관이 건설업자 윤중천 소유인 원주 별장에서 성접대를 받았는데 이를 촬영한 동영상이 있다는 첩보를 경찰이 입수한 것이다. 바로 조현오가 만든 경찰청 범죄정보과였다.

 

범죄정보과가 수집한 정보는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특수수사과, 각 지방경찰청 수사과 등에 이첩돼 내사 또는 수사로 이어지게 된다. 김광준 검사 비리 사건에 이어 두 번째였다.

 

박근혜 정부 초대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은 3월 21일 사퇴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카카오톡과 트위터에 성접대 리스트가 나돌았다. 김학의 전 법무차관을 비롯해 실명 10명이 적혀 있었다. 리스트에는 대한민국 마당발인 이철규도 모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건설업자 윤중천이었다.

 

리스트 10명 중 4명은 모두 강원도에서 근무했던 경찰 전직 수뇌부급들이었다. 네티즌들은 성접대 명단 중 다수를 차지하는 경찰을 비난했다. 이철규처럼 강원지방경찰청 차장을 지냈던 허준영은 “사실이면 할복자살하겠다”라고 받아쳤다.

 

이철규는 이를 유포한 네티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정보국장 출신인 이철규가 보기에 이러한 명단은 네티즌이 유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에게 쏠리는 비난을 경찰에 돌려서 초점을 흐리게 하려는 것으로 판단됐다. 경찰은 리스트를 최초 생산한 사람은 못 찾아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다.

 

검찰은 성접대 동영상 속 인물을 특정하지도 못했다. 검찰은 동영상 화질이 좋지 않아 알아볼 수가 없다며 김학의 등을 무혐의 처분한다. 얼마 뒤에 원주 별장 성접대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이 나서서 성폭력 혐의로 김학의를 고소했지만 검찰은 김학의를 다시 무혐의 처분한다.

 

2013년 10월 31일 대법원은 제일저축은행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 이철규에 대해 무죄를 확정한다. 하지만 이 뉴스는 ‘원주 별장 성 접대 리스트’에 묻힌다. 법원은 제일저축은행 회장인 유동천이 한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의심스러운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2008년 서울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에서 조현오, 이철규와 식사를 했다는 부분이 있다. 2008년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이었는데, 통상 자기 관할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다. 조현오는 이철규에게 2008년 서울에 온 적이 없다는 확인서를 하나 써준다.

 

 

 

하지만 조현오는 유동천보다 더한 ‘대한민국 거짓말쟁이’로 전락했다.

 


 

조현오는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해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이던 임경묵에게 그 내용을 들었다고 지목했다. 하지만 임경묵은 재판에 나와서 조현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임경묵이 한 진술을 받아들여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을 지어낸 것으로 판단했다. 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서울구치소에 재구속됐다. 조현오 재판에 참석했던 전직 형사과장은 판결에 유감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노인네들이 만나면 무슨 이야기 하겠어요? 학교 다닐 때 영어단어 외우던 이야기를 하겠어요? 시국 이야기만 합니다. 그거 해야 재미있고. 임경묵 씨가 서울청장을 만나려면 그 이상 정보가 있어야 대화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개연성을 고려해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조현오는 지휘관 시절 관할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부산청장 시절에는 서울로 온 적이 없었고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도 서울 땅을 밟은 적이 없다고 했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주변 사람들은 차기 경찰청장이 되려면 서울에서 권력층을 만나야 한다며 조현오에게 서울 방문을 권했지만 원칙을 지켰다고 했다. 조현오가 서울지방청장이 돼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임경묵이다.

 

 

자기 정보력을 화려한 언변으로 펼쳐놓는 사람을 늘 봤다면 허풍과 과장을 솎아낼 감각이 있을 테지만 초보자 조현오는 마냥 귀가 솔깃했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을 모조리 기억에 새기고자 했다. 이와 비슷한 감탄은 1998년 경남지방청 경비과장 시절에도 있었다.

 

(다음 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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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조현오 전 청장(이하 호칭 생략)은 차명계좌 발언으로 많은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겼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소 후 2014년 말,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다녀왔다. 관련 기사에는 수행원이 3명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호의호식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2015년 2월 말, 조현오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수행원 정체를 밝혔다. 바로 그 수행원 가운데 한 명이 필자다.

 

조현오를 알게 된 것은 <나꼼수>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서다. <나꼼수>에서 다룬 조현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장자연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나꼼수 30회)’, ‘검경 수사권 조정을 검찰에 유리하게 한 장본인이고(나꼼수 31회)’, ‘디도스 수사에서 경찰 수사를 망친 장본인이며(나꼼수 32회)’, ‘경찰에 최시중 관련 첩보를 줬음에도 수사를 방해한 인물(봉주 2회)’이었다.

 

 

2013년 중반까지 조현오는 관심 밖 인물이었다. 당시 경찰을 취재 중이었고 한 형사에게 자신이 수사하던 사건을 윗선에서 덮으려던 일을 듣게 됐다. 그는 사직서를 준비하고 윗선에 들이댔다.

 

“만약 사건을 가져가면 사표를 내고 조현오 청장님을 찾아가겠습니다.”

 

사건을 묻으려던 시도는 한순간에 없던 일이 됐다. 형사에게 ‘경찰청장 조현오’는 어떤 상징이었을까.

 

“검찰과 붙었을 때 그만큼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이 흔치 않거든요. 위에 눈치 안 보고 내부 비리에는 굉장히 부정적이지요. 바로 날려버려요. 숙청하듯이.”

 

이어진 경찰 취재 과정에서 접한 조현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조 파면’이라는 별명을 거론하며 독재자로 보는 시선도 있었고 인사 문제에 대한 불만은 상당했다. 반면 긍정적인 평가는 그동안 <나꼼수>에서 접했던 조현오가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상반됐다.

 

“역대 경찰청장 중 허준영과 조현오를 존경해요. 아이러니한 것은 외무고시 출신들이 조직에 들어와서 비전을 줬다는 것이지요.”

 

“경찰 조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분이에요.”

 

“역대 청장 중 청와대와 관계에서 가장 강한 목소리를 냈어요. 검·경 수사권 다툼이 벌어질 때 자기에게 큰 타격이 올 수도 있어요. 통상적으로 검찰 조직은 자기 조직에 대항하거나 해를 입히면 반드시 보복합니다.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상대 힘을 빼지요. 대표적인 대상이 경찰 수장이고요. 차명계좌 고소 건 외에는 걸릴 게 없는 분이잖아요. 국민이 갖는 가장 큰 이미지는 차명계좌 발언이지만 큰 줄기는 바르게 하려고 노력했고 사명을 회피하는 사람은 아니지요.”

 

“카리스마 있어요. 추진력과 조직 장악력이 있고 가차 없지요. ‘조 파면’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조직 내 비리를 완전히 쓸어버리면 조직은 깨끗해질 것 아니에요?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조현오> 책 표지에 멍든 사진? 그것은 이제석 디자인인데, 그런 디자인 쓴 것에 대해 쿨하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보기에는 수구적이고 권위적일 것 같지만 생각이 대단히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이들은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으로 저평가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꼼수>가 제기한 내용이 과연 진실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사전조사를 마치면서 경찰을 주제로 글을 쓴다면 그건 ‘조현오’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조현오를 몹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연락처를 비롯해 그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조현오는 당시 ‘차명계좌 발언’으로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죄’로 기소돼 항소심 재판을 받았다. 이런 죄는 보통 양형이 벌금 100만 원 정도다. 항소심 재판에서 그는 차명계좌 발언 진원지로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 임 씨를 지목했지만, 임 씨는 부인했다. 2013년 9월 26일 그는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다시 구속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정보가 하나도 없는 것과 소재를 알고 있는 것은 큰 차이다. 서울구치소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내용은 특별할 게 없이 평소 생각하는 바를 적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편지를 받는 족족 찢었다고 한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이 과정에서 조현오는 누군가를 한 번 믿으면 그냥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언젠가 그에게 재판기록을 요청했을 때 주변에서는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기록을 조건 없이 보내줬다.

 

조현오는 2014년 5월 중순 만기 출소했다. 그에게 연락을 받고 만나기로 하면서 부탁한 것은 재판부가 하지 않았던 현장검증이었다. 그가 노 전 대통령 차명계좌 이야기를 들었다는 한 서울역 인근 호텔 식당을 현장으로 지목했다.

 

 


 

조현오는 서울청장으로 부임해 2010년 3월쯤 이 호텔 식당에서 임 씨를 만났다고 한다. 지금까지 언론은 임 씨를 MB와 독대할 수 있는 핵심 실세 가운데 한 명으로 묘사했다. 그만큼 정보력이 막강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 판결문은 당시 임 씨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 상황을 알 수 있는 지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임 씨가 조현오를 만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조현오가 임 씨를 만났다는 식당은 호텔 지하에 있는 고급 다다미방이다. 음식 값은 1인당 최하가 10만 원 선이다. 단아한 옷차림으로 머리를 깨끗이 뒤로 동여맨 아가씨들이 음식 시중을 든다. 조현오에게 임 씨에 대한 기억을 더듬도록 했다.

 

임 씨는 음식을 나르는 아가씨에게 ‘기프트 카드(Gift Card)’로 결제가 가능한지를 물었다고 한다. 아가씨는 결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임 씨는 카드 유효기간을 두고 아가씨와 한참을 이야기했다. 조현오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결제할지 고민하다가 예의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했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술이었다. 막강한 정보력이 있다는 사람이 자기 상품권 카드로 결제가 되는지도 모르는 식당에 서울지방청장을 불러냈다? 애초부터 불러낸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정도로 허술할까? 법정 진술도 이런 식이었다면 재판부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듯했다.

 

조현오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차명계좌’ 발언에 대해 서울지방청장 시절 내부 강의였을 뿐이고 허위 인식과 고의성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문제가 있다.

 

그는 당시 현직 서울지방경찰청장이었다. 일반 국민들로서는 그가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발언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고위직 공무원은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함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가 받은 판결이 부당한 면이 있다는 점을 짚어야겠다. 조현오는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는 징역 8개월로 감형됐다. 감형 이유는 경찰직 공무원으로서 끼친 사회적 공헌을 고려한 것이다.

 

경찰 안에서 조현오를 싫어하는 이도 동의하는 점이 있다. 그가 매우 청렴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도 있다. MB가 임명한 경찰총수이기 때문이다. 차명계좌 발언까지 했을 정도면 눈치 보기와 아부에도 능한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영화 라스트 캐슬(2001)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라스트 캐슬>에서 어원(로버트 레드포드) 장군은 교도소장에게 군 형무소 수감자를 대하는 태도가 왜 서로 다른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은 그들의 최악인 면을 바라보지만, 나는 최선의 면을 보고자 한다.”

 

1차 현장검증에서 조현오에게 ‘최선의 면’을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과 정치적 색채가 맞지 않다면 모두 부정적으로 색칠하는 오늘날 사회상에 대한 반발로 조현오를 다시 보게 됐다. 물론 조현오는 여러 정치적인 논란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 이 글은 분명히 선의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대상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작가가 책임을 져야 할 영역이다.

 


 

조현오와 첫 만남이 끝날 즈음 2차 현장검증을 제안했다. 장소는 서울시청 근처에 있는 코리아나호텔 중식당이었다. 이곳에서 조현오는 경찰청장 시절 당시 청와대 ◯◯ 수석과 언쟁이 있었다고 했다. 한 달 뒤에 조현오와 다시 만났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내는 식탁이 있는 방이었다.

 

그곳에서 청와대 ◯◯ 수석에게 어떤 일로 화를 냈는지 물었다. ◯◯ 수석이 “검찰에 차명계좌 사건이 수사 진행 중인데, 조청장이 수사권 관련해서 그렇게 강하게 발언해도 되는 건가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칠 때쯤 <나꼼수>에서 주진우 기자가 망쳤다고 주장한 사건이 떠올랐다.

 

“여기 왔으니 안 물어볼 수 없네요.”

 

코리아나호텔 사장은 방용훈이며,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과 형제이다. 2009년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있었던 ‘장자연 사건’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다음 제2화-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 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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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 김대중은 프랑스 대혁명처럼 구체제에 대한 모순을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체제 모순 타파 가운데 하나가 경찰 수사권 독립이었다.

 

1999년 경찰청장 김광식은 수사권 독립 소신을 피력했다.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인 황운하는 오랫동안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형사 검찰 파견이었다. 정작 형사과 인력은 부족한데 경찰은 검찰 일을 거들었다. 검찰 파견 직원 관련 규정을 따르지 않는 편법 파견이었다. 파견 경찰을 철수하려면 서장 결재가 필요했다.

 

황운하는 파견 경찰 철수를 시도했다. 서장은 결제에 앞서 검찰 보복을 걱정했다. 그래도 조직에 대한 자존심은 있었다. 해보겠다고 나서는 황운하에게 힘을 보탰다. 황운하는 관련 규정을 바탕으로 '파견 경찰관 철수 복귀 협조 요청'이라는 공문을 서울중앙지검에 보냈다.

 

서울중앙지검은 반응이 없었다.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황운하는 파견 형사에게 복귀 시점을 알리면서 이를 어기면 징계하겠다고 통보했다. 형사들은 모두 예고한 시한에 맞춰 복귀했다. 황운하는 미리 방송 카메라를 불러 그 앞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이 내용은 9시 뉴스 첫 보도로 나간다.

 

1998년 검찰은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을 구속했다. 이어 1999년 경찰청 정보국장도 구속한다. 검찰이 경찰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에 맞춰 경찰이 의욕적으로 나선 수사권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황운하는 공고해 보이는 구체제 벽이 어느 순간 무너지게 돼 있다고 확신했다. 1999년 검찰 파견 경찰 철수 이후 황운하는 검찰 쪽 전화를 자주 받는다. 대부분 '두고 보자'는 내용이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경찰 수사권 독립에 호의적인 정부였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대북특검과 대선자금 수사로 요동쳤다. 황운하는 서울서부지방검찰청 수사 지휘를 받는 용산경찰서 형사과장이었다.

 

이 시기 황운하와 식사를 했던 서울지역 일간지 기자는 흥미로운 일을 접한다. 그 자리에는 한 변호사가 함께했다. 변호사는 황운하에게 괜히 일을 벌인다며 못마땅해했다. 대화에 호기심을 느낀 기자는 취재를 시작했다. 일개 경찰서 형사과장이 검찰 뒤를 캐는 전무후무한 일이 진행 중이었다. 시발점은 용산역이 주무대인 브로커 '오다리'에 대한 첩보다. 당시 오다리를 만난 형사가 전한 이야기다.

 

"처음에 용산경찰서에 가니까 오다리라는 친구가 접근을 했어. 지인이 나를 한 호텔 식당에 데리고 가더니 박 사장이라고 소개하는 거야. 그가 나에게 유능한 형사라고 익히 들었다며 친해보자네. 그때는 뭐하는 친구인지 몰랐거든. 그런데 내 앞에서 전화를 하더니 '김검, 박검' 그러면서 상대에게 야지 넣고 하는데 속으로 사기꾼인가 했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이었어! "

 

박 사장은 '오다리'로 불렸다. 다리 다섯 개는 '마당발'과 '잽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당시 역 주변에는 성매매집결지가 있었다. 용산역에도 윤락업소가 80여 곳 정도 있었다. 각종 불법영업으로 업주에게 문제가 생기면 오다리가 나섰다. 오다리는 변호사를 구해주면서 거액을 챙기곤 했다.

 

오다리는 판검사와 친분을 과시했다. 물론 경찰도 유착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 경찰은 형사들이 잘못해 검찰에 불려 다니면 오다리가 나서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오다리에게 신세를 진 경찰이 제법 있었다. 황운하는 초기에 오다리를 수사할 적임자를 구하지 못했다. 마침 형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2001년 유명 연예인 마약 사건을 인지 수사한 젊고 유능한 형사였다. 2003년 3월 17일 진술서를 확보하고 오다리를 변호사법 위반으로 긴급 체포했다. 하지만, 구속영장을 검찰이 기각한다. 경찰은 오다리 사건 관련 영장을 다섯 번 신청한다. 압수영장 세 번, 구속영장 두 번이다. 검찰은 모두 기각한다. 언론은 '다섯 번 영장 기각'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오다리는 2003년 5월 27일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오다리 통화기록을 확보한다. 최근 3개월 동안 검사, 변호사, 판사 50여 명과 150통 이상 통화한 내용이었다. 절반 이상이 서울중앙지검 서부지청 검사들이었다. 6월 들어 대검은 현직 검사 22명을 상대로 감찰을 시작했다. 계좌추적에서 금품을 받은 것이 드러난 검사들은 법무부 검사징계위원회로 넘어갔다. 이 가운데 한 명은 법무부 소속으로 당시 법무부 장관인 강금실이 총애하는 인물이었다. 검사 징계위원장은 법무부 장관이다.

 

2003년 10월 4일 <경향신문>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끝내 자기 오기를 관철했다고 보도했다. 법무부 소속 검사는 무혐의로 벗어났고 이후 순탄한 길을 걸었다. 오다리 보도로 막상 피해를 입은 쪽은 강남경찰서 형사과장인 황운하였다. 총경 승진을 앞두고 직위해제당한 것이다.

 

언론과의 마찰이 징계 배경이었지만 2003년 6월 20일 <한국일보>는 "그간 자주 물의를 빚어 온 점 등도 감안됐다"는 고위 간부 말을 인용하면서 ‘'트러블메이커'에 대한 시범 징계 가능성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고 전했다.

 

황운하는 이후 소청심사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듬해 황운하는 총경으로 승진했다.

 


 

황운하를 중용한 첫 번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다. 외무고시 출신 허준영은 2005년 1월 취임했다. 그는 청문회에서부터 경찰 수사권 소신을 거듭 밝혔다.

 

수사권이 있는 검찰은 챔피언이었고 경찰은 도전자였다. 도전자는 계속 시합을 요구했고 챔피언은 웬만해서는 도전자를 피하려 했다. 2004년 9월부터 검·경 수사권 조정협의체 회의가 수차례 열렸다. 2005년 중반 국회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진행은 갈수록 지지부진했다. 참여정부는 검찰·경찰 중재, 국회 입법, 총리실 조정 등을 거치며 결론을 내려했지만 실패했다.

 

경찰청장 허준영은 수사구조개혁팀을 꾸려 황운하 총경을 팀장으로 불렀다. 황운하 행보는 다시 대외적인 충돌을 가져왔다. 황운하가 허준영에게 보고 없이 전결로 하달한 공문이 문제가 됐다. 모두 두 번이었는데 검찰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 공문은 검찰 강제인치 등 잘못된 관행을 거부하라는 지시였다.

 

수사지휘권을 앞세운 검찰이 저지르는 나쁜 관행 가운데 '피의자 면담제도'가 있다. 법원 영장실질심사제도를 흉내 낸 이 제도는 법적 근거가 없다. 만약 경찰이 긴급체포를 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을 때 검찰이 피의자를 면담하고 싶다면 화상통신을 하거나 검사가 경찰서로 찾아오면 된다. 법원이 피의자를 면담하는 제도인 영장실질심사도 피의자 신청이 없으면 할 수 없는데, 검찰은 경찰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피의자 뜻과 무관하게 검찰청으로 데려오게 했다. 기관이 다른데도 공문도 없었다. 경찰은 피의자를 검찰청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경찰서로 데려왔다.

 

황운하는 전국 경찰서에 '피의자 면담을 위한 검사면전 강제인치거부'를 내용으로 담은 공문을 하달한다. 충남지방경찰청과 강릉경찰서 두 곳이 검찰과 맞붙었다. 청와대도 황운하 행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청와대 공직기강 비서관실이 나서 허준영에게 인사조치를 요구했다. 허준영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 문제로 허준영과 청와대는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허준영은 왜 자신에게 보고도 없이 행동한 황운하를 오히려 감쌌을까? 한 경찰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내용은 청장에게 보고해도 그 누구도 보내라고 할 수 없어요. 거기서 황운하의 과단성이 나오는 거죠.”

 

허준영은 2005년 12월 WTO 쌀협상 비준반대 시위에서 농민 두 명이 사망하면서 경찰청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새로 청장으로 취임한 이택순은 황운하를 경찰청 밖으로 내보냈다.

 


 

황운하는 대전서부서장으로 가서도 '수열모'라는 모임을 만든다. '수사구조개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검찰이 주도하는 형사소송법 체제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깨우쳐야 했다. 그 지점에서 구체제 모순을 뒤바꾸는 에너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모임을 꾸리고 몇 달이 지난 2006년 9월 5일 대전서부서는 대전지검에서 온 전화를 받는다. 한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데려오게 했다. 대전서부서 직원은 수열모 모임에서 배운 내용이 생각나서 서장 황운하에게 바로 보고한다. 대전서부서는 검찰 요구를 거부하는 사유를 적어 공문으로 보냈다. 피의자를 면담하고 싶으면 검사가 경찰서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검사는 직접 경찰서로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9월 15일 검사가 다시 인치 요구를 했다. 황운하는 또 거절했다. 대전지역 언론은 당시 검·경 갈등을 '살얼음판', '초유의 신경전', '폭풍전야' 같은 표현으로 묘사했다.

 

검찰 안에서는 황운하를 겨냥해 절대 묵과할 수 없다며 '인권옹호직무명령불준수죄'로 기소하자는 의견이 쏟아졌다. 하지만, 종전 같은 기소처리는 없었다. 2006년 9월 26일 대전 CBS 정보보고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 본인이 희생양이 되겠다고 덤벼드는데 우리도 사실 겁난다.

 

검찰만 황운하가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경찰 수뇌부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이미 경찰청은 이런 문제를 검찰에 협조하기를 바랐다. 경찰청장 이택순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황운하를 소리 지르는 노점상에 빗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황운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택순은 9월 25일 황운하를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보낸다. 누가 봐도 문책성 인사였다. 황운하는 26일 이임식에서 검찰을 향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요, 사법개혁의 방해 세력이고, 강력한 인권침해 집단이다."

 

검찰개혁을 바라는 대다수가 공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들도 검찰개혁 방법으로 경찰 수사권에 힘을 보태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경찰이 중요한 순간마다 국민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한 예다.

 

게다가 국민은 경찰이 어떤 수사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경찰이 존재감을 알리려면 관심을 끌 수 있는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므로 대기업, 정치인 수사는 대부분 검찰 몫이다.

 

황운하는 형사과장 시절 마약사건을 중요하게 다뤘다. 검찰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수사해서 이목을 끌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연예인 마약 문제였다. 2007년 황운하가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 시절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사건이 터진다.

 


 

2007년 3월 8일 한화그룹 회장인 김승연이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직접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보복 폭행 사건'이다. 수사 결과도 깔끔했다. 일선 경찰서가 처음으로 재벌 회장을 구속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 초기 경찰이 은폐를 시도하면서 늑장수사를 한 사실이 밝혀진다. 이 과정에 한화 쪽 로비가 있었고, 전 경찰청장 최기문이 역할을 했다. 5월 25일 경찰청 감찰 이후 서울청장 사퇴와 서울청 수사부장, 형사과장, 남대문경찰서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경찰청장 이택순이 자기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일이 벌어진다. 경찰이 검찰에? 황운하는 5월 26일 이택순 퇴진을 요구한다. 일선에서는 경찰청장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경찰을 수사기관도 없는 조직으로 만들었다고 분개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같은 달 28일 경찰청에서 열린 전국경찰지휘부회의에서 국장급 일부가 사퇴를 건의했다. 이 모든 것은 조직 발전을 위한 충정으로 이해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가 이택순에게 힘을 보태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사퇴를 건의했던 국장 및 청장들은 인사 조치되거나 회의 때마다 면박을 당했다.

 

황운하에게는 중징계가 예고됐다. 8월 29일 경찰청 중앙징계위원회에 황운하가 소환됐다. 황운하가 차에서 내려 경찰청 정문으로 들어갔다. 황운하는 징계위원을 향해 징계받을 일을 한 게 없다고 반박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인용하기도 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당시 민중들이 변화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사건인데 그 구체제 모순에 맞선 사람들을 범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징계위원장이 황운하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야, 너무 세게 이야기하지 마! 무섭다고!”

 

 

(다음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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