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제복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암투

 

2011년 6월 20일 아침 조현오는 청와대에서 급한 호출을 받는다. 청와대 조정회의에 출석하라는 것이었다. 조현오는 수행자 없이 청와대에 갔다. 회의에는 대통령실장 임태희, 민정수석 권재진, 법무부장관 이귀남, 검찰총장 김준규 등이 참석했다.

 

김준규는 검찰총장을 하면서 큰 위기를 두 번 맞는다. 2010년 4월 MBC 수첩>이 ‘검사와 스폰서’를 방영한다. 부산에 한 건설업자가 25년 동안 검사에게 금품과 향응, 성접대 등을 제공한 내용이었다. ‘스폰서 검사’ 파문으로 김준규는 대국민 사과에 이어 자체 개혁안을 발표한다. 개혁안 가운데 하나가 비리 검사를 수사하는 ‘특임검사제’ 도입이었다.

 

이 특임검사가 임용된 첫 사건이 바로 2010년 11월 ‘그랜저 검사’ 사건이다. 한 건설업자가 검사에게 사건을 부탁하면서 승용차 구입비를 대납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위기가 바로 청와대 조정회의였을 테다. ‘형사소송법 196조’를 개정하고자 국정 운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날 열린 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평검사회의는 검찰 근간을 흔드는 긴급 현안이 있을 때마다 열린다. 2003년 참여정부가 검찰 출신이 아닌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할 때도 평검사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법률 개정은 검사 작성 조서가 지닌 증거 능력을 제한하는 쪽으로 진행됐다. 검찰이 자백만 받으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컸다. 하지만, 검찰은 평검사회의를 열어 반발하며 형사소송법 312조를 지켜낸다.

 

 

법률 개정은 국회의원 입법, 정부 제출 등 다양한 통로로 이뤄진다. 형사소송법 196조 법률 개정 논의는 2010년 2월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가 시작했다. 그해 10월 법원과 검찰 제도 개혁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으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압수수색을 진행한다. 검찰을 향한 정치권 반감은 깊어졌다.

 

사법제도개혁특위는 특별소위원회를 구성해 2011년 3월 10일 여야 합의안을 발표한다. 주요 개혁안으로 경찰수사권 독립이 있었다. 이 발표는 검찰 출신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이 주도한다. 검찰 출신이 경찰을 돕는 상황이지만, 조직 입장에서는 검찰과 경찰이 붙는 모양새가 됐다. 세력이 막강한 검찰에 맞대응하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다. 경찰 안에서는 차라리 수사권 독립을 차기 대선 공약에 집어넣는 게 낫다는 계산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현오 생각은 달랐다.

 


 

본격적으로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변경을 위한 특별소위원회가 가동됐다. 경찰과 검찰이 벌이는 신경전은 언론을 탔다. 조현오는 5월 26일 전국 지방청장 화상회의에서 총경 이상 간부에게 “직을 건다는 자세로 임하라”라고 말했다.

 

김준규 검찰총장이 주재한 검사장급 이상 간부회의에서 즉각 반응했다. 대검 차장인 박용석은 “조직을 위해 직을 건다는 것은 조폭이나 하는 말”이라고 받아쳤다.

 

5월 31일 검사인 윤대해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경찰 수사개시권 명문화와 관련해 깊은 우려와 분노를 금할 수 없다”라고 적었다. 그동안 특별소위원회 단위에서 논의가 진행됐지만 조문 합의안은 나오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동료 의원 반대가 심하다. 그 배후에는 법원과 검찰이 있다. 국회의원을 조종하고 협박하고….”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작업은 총리실로 넘어간다. 총리실에서 검찰과 경찰 수사권 조정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경찰은 수사구조개혁 팀원이, 검찰은 검사들이 참석했는데 윤대해 검사도 눈에 띄었다.

 

논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6월 19일 서울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개시권 명문화 반대 분위기를 조성한다.

 

6월 20일 청와대에 국정운영자들이 모였다. 6월 14일 대통령 이명박은 총리실이 적극적으로 조정에 나설 것을 지시한다. 이명박은 “경찰이 법적 근거도 없이 수사하는 현실을 개선하라”라고 말했다. 김준규는 평검사회의 견해를 되풀이했다.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은 결코 고칠 수 없으며 경찰 수사개시권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정회의를 마친 조현오는 경찰청으로 돌아와 말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BH(청와대) 최종 합의안에 서명하고 왔다.”

 

조현오는 196조 조항에 ‘경찰의 수사개시와 진행권’을 확보했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가 합의한 내용에는 ‘경찰은 모든 수사에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는 조항도 있었다. 게다가 검사 지휘에 관한 사항은 ‘법무부령’으로 정하기로 했다. 조현오는 ‘모든 수사’에 경찰 내사가 포함되지 않고 법무부령 제정도 경찰과 합의하기로 국정운영자와 약속했다고 내세웠다. 조현오는 그 약속을 실제 믿었다. 하지만, 경찰은 ‘순진한 발상’이라며 비난했다.

 


 

합의안을 발표한 이튿날인 6월 21일 검찰 반응에 경찰 내부 분위기가 격앙됐다. 대검 기획조정부장 홍만표는 “조 청장 주장대로라면 구두합의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후 국무조정회의에 참석한 대통령실장 임태희, 안전행정부장관 맹형규, 법무부장관 이귀남은 국회에서 내사는 수사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확인해준다. 국회도 청와대 조정안에 나온 ‘모든 수사’에 대한 해석을 제한한다. 민주당 의원인 박지원은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모든’을 삭제하고 검사 지휘는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 근거가 돼야 한다는 게 여야 공통의견이라고 밝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찰청 나름대로 애쓴 결과였다.

 

6월 30일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법무부령’은 ‘대통령령’으로 바뀌었다. 검찰은 잇달아 자리에서 물러나며 개정안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대검 기획조정부장 홍만표를 비롯한 검사장들이 먼저 물러났다. 검찰총장인 김준규도 사표를 냈다. 후임 검찰총장이 바로 한상대다.

 

 

한상대 검찰총장에게 경찰과 ‘대통령령’을 만드는 작업을 맡겨졌다. 그 해 12월 27일 대통령령이 시행되기까지 검찰에 비난 여론은 계속됐다. ‘벤츠 여검사’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11월 30일 이창재 안산지청장을 특임검사로 임명했다. ‘그랜저 검사’ 이후 2번째다.

 

여검사 A씨는 모 변호사 부탁을 받고 다른 검사에게 사건을 청탁한 의혹이 있었다. A씨는 내연관계였던 모 변호사에게 벤츠 승용차 등을 받아 ‘벤츠 여검사’로 불렸다. “국산차는 이제 저리 가라”라는 비난이 인터넷을 달궜다. 여검사 A씨는 12월 7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된다.

 


 

이듬해 검찰수사가 시작된다. 2012년 2월 28일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가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경찰청 정보국장으로 국회의원 설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날 검찰은 한나라당 의원 주성영을 ‘성매매 의혹’으로 소환 통보한다.

 

주성영은 사법개혁을 주도한 자신에게 검찰이 앙갚음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현오가 4월 퇴임하자 검찰 조사가 시작됐다.

 


 

조현오는 경찰청장 재직 당시 경찰청 범죄정보과와 지능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검찰로서는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경찰에 ‘김광준 검사’ 사건이 걸려든다. 한 기자는 ‘김광준 검사 사건’을 두고 “유사 이래 경찰이 검찰을 향해 날린 최고의 빙엿”으로 표현했다.

 

이 사건은 2008년 12월 9일 금융다단계를 하던 조희팔이 회사 돈을 챙겨 중국으로 밀항한 데서 시작된다. 당시 투자자가 3만여 명 피해액은 4조 원 정도로 추정됐다. 오래전부터 금융감독원이 유사수신행위를 포착하고 수사당국에 정보를 줬으나 수사에 진척이 없었다. 오히려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수사당국과 조희팔 사이 유착관계였다. 뇌물 혐의로 수많은 경찰이 사법처리됐고, 조희팔을 비호하는 세력으로 권력층 이름이 나돌기 시작했다.

 

수사는 두 갈래로 진행됐다. 중국에 있는 조희팔을 잡아들이는 것과 조희팔이 국내에 숨겨둔 자금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범죄정보과에서 조희팔 관련 정보를 넘겨받아 수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검사 김광준이었다. 서울고검 검사인 김광준의 차명계좌를 발견한 것이다. 자금줄은 조희팔 측근이었다.

 

김광준은 중앙지검 특수3부장 검사였다. 특수부는 청와대가 맡긴 사건을 담당하는데 당시 환경재단 최열을 수사하고 있었다. 당시 최열은 MB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사업에 걸림돌이었다. 여론은 당연히 ‘표적 수사’를 의심했다. 검찰은 최열과 주변인 계좌를 샅샅이 뒤졌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최열은 주변에 차명계좌가 뭔지 묻곤 했다. 그런데 오히려 김광준이 차명계좌로 검은돈을 받았다는 정황을 경찰이 포착한 것이다.

 

경찰이 김광준을 조사했다는 사실은 11월 8일 보도된다. 당시 검찰총장 한상대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검 중수부장인 최재경이 이미 보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상대는 김광준 검사와 통화해 사정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11월 8일 일부 매체 기자가 김광준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 김광준은 중수부장인 최재경에게 기자 대응 요령을 묻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최재경은 강하고 단호하게 실명을 보도하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대처할 것을 조언한다. 이튿날 한상대는 경찰 반발에도 특임검사 카드를 꺼낸다.

 

황운하는 당시 특임검사인 김수창이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는 점은 동의했다. 당시 검찰은 경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찰이 김광준 사건 조사 과정에서 소홀한 부분이 있다면 경찰이 파고들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11월 중순 서울 동부지검 성추문 검사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동부지검에서 실무수습 중이던 검사가 여성 피의자를 검사실로 불러 성관계를 한 것이다.

 

검사인 윤대해는 24일 내부 게시판에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기소배심제, 검찰 직접 수사 자제, 상설특검도입 같은 검찰 개혁안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은 모두 대검 지침으로 가능했다. 지침으로 가능한 일을 개혁안이라고 들고 나왔으니 한쪽에서는 ‘위장 개혁’이라는 빈정거림이 불거졌다. 끓는 기름에 불을 붙인 것은 윤대해가 동료에게 보내려던 문자메시지였다.

 

‘○○아. 대해다... 내가 올린 글이 벌써 뉴스에 나오고 있구나.... 우선 어떤 방안이든 검찰이 조용히 있다가 총장님이 발표하는 방식은 그 진정성이 의심받는다... 내가 올린 개혁방안도 사실 별거 아니고 우리 검찰에 불리할 것도 별로 없다..... 언론에서 그런 평검사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고 이후 일선 청에서 평검사회의를 개최하고 서울중앙은 극적인 방식으로 평검사 회의를 개최하고.... 이런 분위기 속에 총장님이 큰 결단을 하는 모양으로 가야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받은 이는 언론사 기자였다. 예정된 서울중앙지검 평검사 회의는 이 사건 여파로 취소된다.

 

검사들은 오히려 총장 집무실로 몰려가 사퇴를 촉구했다. 한상대가 중수부장인 최재경을 감찰한 게 발단이었다. 한상대는 김광준과 최재경이 주고받은 문자 내용을 문제 삼는다. 한상대는 검찰 위기를 중수부 폐지 카드로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최재경은 반대파였다. 결국, 한상대는 2012년 11월 30일 최재경을 손보려다 축출당하는 모양새로 사표를 냈다. 하지만, 한상대는 자기 임기 동안 검사가 경찰서에 출두해 조사받는 것은 막았다.

 

‘카톡’

 

스마트폰 카카오톡에 한 여성 사진이 올라왔다. 성추문 검사 사건 피해 당사자였고 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 추적 결과 검사 10명을 포한한 검찰 수사관이 해당 전산망에 접속한 게 확인됐다. 검찰도 더는 여론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해 마지막 날, 현직 검사가 최초로 경찰서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는다.

 

 

경찰 구성원이 검경 관계를 다시 인식한 계기는 형사소송법 법률 개정보다 검찰과 경찰이 다투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찰 조직에서 조현오가 추진해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황운하는 어떤 견해를 드러냈을까. 그는 2011년 6월 20일 조현오가 청와대 합의안에 서명을 했을 때도, 경찰이 만족하지 못하는 대통령령을 만든 직후에도 조현오 퇴진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런 황운하에게 왜 이택순 퇴진은 요구해놓고 조현오는 그냥 두느냐는 질문을 하는 이도 있었다.

 

“조현오는 최선을 다해 진일보한 조정안을 만들려는 과정에서 문제가 비롯됐고 내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의견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나가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경찰은 황운하 발언 배경에는 조현오식 조직 관리법이 있다고 했다. 조현오는 조직 내 비판 세력을 항상 곁에 둬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그러면서 비판 세력 상당수를 자기편으로 돌아서도록 했다. 황운하 기용도 결국 조현오식 ‘포퓰리즘’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분석은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파퓰리즘 전략으로 조직을 장악했다는 조현오가 정작 경찰 직원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다음 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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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풍운아 황운하 마지막 화. 백 한 번째 프로포즈

 

1983년 경찰대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황운하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입실 시각은 오후 6시. 친구들과 헤어진 황운하는 6시가 약간 지나 학교에 도착했다. 황운하를 부른 지도관은 흡연과 음주 여부도 확인했다. 황운하는 모두 인정했다. 오히려 당황한 지도관이 되물었다.

 

“왜 이렇게 다 인정하느냐?”

“거짓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술·담배를 하다 적발된 경찰대 학생에게는 퇴교조치가 내려졌다. 황운하는 그를 아낀 한 교수 덕에 구제받을 수 있었다. 황운하는 경찰대 생활에 몰입이 어려웠다. 스스로 자신이 경찰 조직에 있어야 할 동기를 찾아야 했다. 졸업 즈음 자신이 경찰에 있어야 할 이유로 찾은 게 경찰 조직 숙원 해결이었다. 그중 하나가 수사권 독립이다. 이 정도 구조 변화를 꾀하려면 형사소송법 체제를 바꿔야 한다.

 

황운하는 경찰 조직에서 경정 직급인 형사과장 시절, 형사들에게 수사국장이 되어 이러한 큰 틀을 바꾸는데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경정에서 총경, 그리고 경무관을 거쳐서 치안감으로 승진해야 수사국장이라는 보직을 받을 수 있다.

 


 

황운하에게 2002년 총경 승진 기회가 찾아온다. 2001년 한 경찰대 동기가 서울청 홍보계장을 지냈다. 총경 승진 1순위라 인기가 많은 보직이었다. 그 동기는 총경으로 승진하면서 자기 후임으로 황운하를 추천했다. 당시 동기는 두터운 경찰청장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황운하를 밀어주는 것은 가능했다.

 

황운하는 이렇게 거절했다.

 

"기자들 상대는 체질에도 안 맞고, 일선 형사과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만약 황운하가 서울청 홍보계장으로 갔다면 2002년에 총경 승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운하는 일선 형사과장을 택했다. 그리고 2004년 강남서 형사과장 시절 경찰 수뇌부에 찍혀 직위해제를 당했다. 집에서 놀다가 소청심사로 강동서 생활안전과장으로 복직됐다.

 

주변에서는 황운하 총경 승진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우선 승진 가능성이 높은 보직이 아니었다. 심사 기준에는 근무 기간도 포함된다. 황운하가 복직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그 짧은 기간을 가지고 심사받아 승진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그 경찰대 동기는 집에서 놀고 있는 황운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지금 최기문 청장하고 있어. 너는 모르는 채 하고 여기로 와. 그럼 내가 인사시킬 테니까 여기 와.”

 

물론 황운하는 가지 않았다. 그 시절에 황운하를 챙겨준 동기생은 그 친구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 박종희는 경찰청장 최기문에게 황운하 직위해제 문제를 따진다. 언론사와 갈등을 해소하려는 무리한 징계라고 지적했다.

 

경찰청장이 국정감사 지적을 받는 상황에서 최기문 청장이 황운하에게 호의적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한 참모가 경찰청장에게 “황운하를 승진 안 시키면 경찰 역사에 두고두고 오점을 남기는 경찰청장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황운하는 총경 승진 후, 2005년 수사구조개혁팀장을 맡으면서, 수사권 독립은 '수사 구조'를 개혁하는 시도라는 걸 알리고자 했다. 지금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사람들은 지금 구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눈앞에 제시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검찰이 부패하다고요? 경찰도 부패하잖아요. 검찰이 부당한 지시를 하듯 경찰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릴 수도 있잖아요.”

 

그걸 보여주는 사건은 언제나 존재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2006년 한화그룹 회장 보복폭행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수사권 독립 토대로 삼으려 했다. 경찰이 재벌 회장을 구속한 첫 사례였고 마무리도 깔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후 늑장수사와 은폐 의혹으로 이런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남대문서장이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될 때까지 현장에 나간 형사들을 철수해 수사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대문서장이 수사를 지연시킨 것은 눈앞에 명백히 드러난 상황이다. 현장에 나간 형사들을 철수해 수사를 막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사가 수사를 지휘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다.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에 앞서 문제점을 먼저 드러내야 한다면 검찰 권력 독점은 바꾸기 어렵다. 애초에 오류를 드러낼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를 바꾸고자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섰던 이는 조현오 청장이었다. 2009년 서울지방경찰청장이던 조현오는 황운하에게 서울청 형사과장 자리를 제안한다.

 

조현오 청장은 ‘조파면’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내부 비리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조현오 생각은 이랬다. “경찰 부패를 도려내면 국민이 경찰을 지지할 것이고 그런 여론을 바탕으로 수사권을 가져올 거야.”

 

조현오 청장이 업주 접촉 지시를 어긴 직원을 숙청하듯 날려버려도, 경찰은 ‘비리 경찰’ 이미지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이경백 사건이 단적인 예였다.

 

2010년 6월 황운하가 구속한 이경백은 곧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경백은 1심 판결 전까지 자신과 유착한 경찰을 불지 않았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자신과 유착된 경찰을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경백은 2012년 7월 17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

 

서울 중앙지검 강력부는 2012년 3월 말부터 이경백과 유착한 현직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18명이 옷을 벗었다. ‘이경백 부실 수사’ 여론이 일자 조현오 경찰청장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반면, 조현오는 경찰청장 시절에 ‘황운하를 승진시킨 것’을 가장 잘 한 일로 여긴다고 했다.

 

조현오는 2011년 말 황운하를 경무관으로 승진시킬 때 청와대 민정수석이 강하게 반대했다고 했다.

 

통상 경찰 고위직 인사는 청와대 정무수석과 비서실장, 민정수석, 인사비서관과 경찰청장이 논의한다. 민정수석은 승진자 적격 여부를 검증한다. 보통 민정수석은 검찰과 접촉이 잦아 검찰 출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그래서 경찰은 검찰 눈 밖에 나면 승진하기 어렵다.

 

황운하가 승진하려면 배짱 두둑한 상사가 받쳐 줘야 했다. 황운하는 2011년 경무관으로 승진했고 수사기획관이 됐다. 2002년부터 황운하가 힘들 때 도와주려 했던 경찰대 동기 친구는 앞서 2009년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2011년 베이징 주재관을 지냈다.

 

수사기획관 황운하가 범죄정보과에게 받았던 첫 보고는 베이징 주재관, 즉 경찰대 동기생이 저지른 범죄행각이었다. 2012년 3월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경무관 박병국에 대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옛 고마웠던 생각들이, 괴로움으로 번졌을 황운하 고통은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물러난 후, 황운하를 과감하게 기용한 상사는 없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과거 황운하가 수사했던 사건에 관계된 검사 일부가 박근혜 정권 핵심으로 포진됐다. 황운하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승진과는 더욱 멀어졌다.

 


 

2016년 황운하는 경찰대학교 교수부장이 됐다. 황운하가 경찰 생활을 시작한 지 29년째인 해이자, 경무관 5년 차였다. 경찰은 계급정년 제도가 있다. 승진을 못하면 경무관은 6년 차에 경찰 조직을 떠나야 한다. 황운하는 박근혜 정권과 경찰 인사에 대한 강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내 역할을 해야 경찰로서 존재해온 살아온 이유와 명분이 있는 것인데, 만약에 내 잘못으로 치안감 승진에서 밀려난다면 오케이지만. 우병우 민정수석이 훼방 놓고, 정치권 실세들이 치안감 자리를 땅따먹기 하듯이 하니까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 내가 그런 걸 바꿔보려고 살아왔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치안감으로 승진이 안 되니까 승질이 나지.”

 

치안감으로 승진이 되지 않아 불만을 쏟아낸다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 고위직에 있는 경찰대 후배는 그가 박근혜 정권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모습에 탄복했다.

 

"운하 형 대단해. 털어서 먼지 안 나나 봐.”

 

아직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조직에서 나가라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또한, 다가오는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운하는 2016년 4월, 경찰대학교로 출근하면서,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어 본 소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25년 전, 나도 경감 초임 시절에 경찰 선배들에게 도대체 뭐하느라 이렇게 형편없는 경찰 조직을 만들었냐며 당돌하게 따진 적이 있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은 경찰 조직에서 지금껏 실제로 별 이루어놓은 것이 없이 벌써 퇴직할 시점이 다가왔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럽다. 무엇보다도 앞으로도 별 이루어놓을 자신이 없는 것이 또 부끄럽고 또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내게 주어진 어쩌면 마지막 미션일 수도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나마 마음의 무거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를 비롯한 선배들의 실패사례를 후배들은 반복하지 않도록 올바르게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을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공격을 내가 받는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부끄럽다면 적어도 나보다 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을 것이지만 그대로 난 몹시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걸 아는 사람은 덜 부끄럽다지만 그대로 난 몹시 부끄러웠다." (출처 황운하 블로그. 2016년 4월 25일 쓴 ‘경찰대학에 출근하다’ 글 중에서)

 


 

에필로그

 

2017년 연말은 황운하 경찰 퇴직 예상 시점이었다. 그런 경우, 누구나 평생 몸 담았던 경찰 생활을 담은 자서전 한 권 정도는 소장하고 싶기 마련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게 될 황운하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서 필자가 써주고 싶다고 자청했다.

 

취재는 2016년 여름에 시작했다. 2016년 경찰 조직 내 황운하 관련 취재는 어려웠다. 황운하가 박근혜 정부와 경찰 수뇌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인사를 앞둔 고위직들은 그와 가깝다는 인상이 줄까 봐 취재를 꺼려했다. (바쁜 시간 쪼개서 취재에 응해준 분들께는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017년 초, 황운하는 수사구조개혁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무관 6년 차 임기를 그렇게 보냈다. 수사권 독립을 위해 멀리서 손 놓고 있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그 뒤로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2016년 연말,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열렸고 이듬해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황운하는 치안감으로 승진하여 울산지방청장으로 부임했다.

 

경력 30년 경찰 황운하가 경찰 조직 발전에 얼마나 보탬이 됐을까? 확신하기 어렵다. 그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호소력을 갖는다면, 그것은 수사권이라는 주제 안에서 보이는 통렬한 일관성 덕분일 것이다.

 

나 또한 황운하를 겪은 지금, 그가 한국사회에 끊임없이 던져온 '경찰 수사권 독립'이라는 프로포즈를 다시 장기적 과제로 밀어내며, 외면하는 주장을 하지는 못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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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 김대중은 프랑스 대혁명처럼 구체제에 대한 모순을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체제 모순 타파 가운데 하나가 경찰 수사권 독립이었다.

 

1999년 경찰청장 김광식은 수사권 독립 소신을 피력했다.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인 황운하는 오랫동안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형사 검찰 파견이었다. 정작 형사과 인력은 부족한데 경찰은 검찰 일을 거들었다. 검찰 파견 직원 관련 규정을 따르지 않는 편법 파견이었다. 파견 경찰을 철수하려면 서장 결재가 필요했다.

 

황운하는 파견 경찰 철수를 시도했다. 서장은 결제에 앞서 검찰 보복을 걱정했다. 그래도 조직에 대한 자존심은 있었다. 해보겠다고 나서는 황운하에게 힘을 보탰다. 황운하는 관련 규정을 바탕으로 '파견 경찰관 철수 복귀 협조 요청'이라는 공문을 서울중앙지검에 보냈다.

 

서울중앙지검은 반응이 없었다.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황운하는 파견 형사에게 복귀 시점을 알리면서 이를 어기면 징계하겠다고 통보했다. 형사들은 모두 예고한 시한에 맞춰 복귀했다. 황운하는 미리 방송 카메라를 불러 그 앞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이 내용은 9시 뉴스 첫 보도로 나간다.

 

1998년 검찰은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을 구속했다. 이어 1999년 경찰청 정보국장도 구속한다. 검찰이 경찰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에 맞춰 경찰이 의욕적으로 나선 수사권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황운하는 공고해 보이는 구체제 벽이 어느 순간 무너지게 돼 있다고 확신했다. 1999년 검찰 파견 경찰 철수 이후 황운하는 검찰 쪽 전화를 자주 받는다. 대부분 '두고 보자'는 내용이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경찰 수사권 독립에 호의적인 정부였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대북특검과 대선자금 수사로 요동쳤다. 황운하는 서울서부지방검찰청 수사 지휘를 받는 용산경찰서 형사과장이었다.

 

이 시기 황운하와 식사를 했던 서울지역 일간지 기자는 흥미로운 일을 접한다. 그 자리에는 한 변호사가 함께했다. 변호사는 황운하에게 괜히 일을 벌인다며 못마땅해했다. 대화에 호기심을 느낀 기자는 취재를 시작했다. 일개 경찰서 형사과장이 검찰 뒤를 캐는 전무후무한 일이 진행 중이었다. 시발점은 용산역이 주무대인 브로커 '오다리'에 대한 첩보다. 당시 오다리를 만난 형사가 전한 이야기다.

 

"처음에 용산경찰서에 가니까 오다리라는 친구가 접근을 했어. 지인이 나를 한 호텔 식당에 데리고 가더니 박 사장이라고 소개하는 거야. 그가 나에게 유능한 형사라고 익히 들었다며 친해보자네. 그때는 뭐하는 친구인지 몰랐거든. 그런데 내 앞에서 전화를 하더니 '김검, 박검' 그러면서 상대에게 야지 넣고 하는데 속으로 사기꾼인가 했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이었어! "

 

박 사장은 '오다리'로 불렸다. 다리 다섯 개는 '마당발'과 '잽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당시 역 주변에는 성매매집결지가 있었다. 용산역에도 윤락업소가 80여 곳 정도 있었다. 각종 불법영업으로 업주에게 문제가 생기면 오다리가 나섰다. 오다리는 변호사를 구해주면서 거액을 챙기곤 했다.

 

오다리는 판검사와 친분을 과시했다. 물론 경찰도 유착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 경찰은 형사들이 잘못해 검찰에 불려 다니면 오다리가 나서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오다리에게 신세를 진 경찰이 제법 있었다. 황운하는 초기에 오다리를 수사할 적임자를 구하지 못했다. 마침 형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2001년 유명 연예인 마약 사건을 인지 수사한 젊고 유능한 형사였다. 2003년 3월 17일 진술서를 확보하고 오다리를 변호사법 위반으로 긴급 체포했다. 하지만, 구속영장을 검찰이 기각한다. 경찰은 오다리 사건 관련 영장을 다섯 번 신청한다. 압수영장 세 번, 구속영장 두 번이다. 검찰은 모두 기각한다. 언론은 '다섯 번 영장 기각'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오다리는 2003년 5월 27일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오다리 통화기록을 확보한다. 최근 3개월 동안 검사, 변호사, 판사 50여 명과 150통 이상 통화한 내용이었다. 절반 이상이 서울중앙지검 서부지청 검사들이었다. 6월 들어 대검은 현직 검사 22명을 상대로 감찰을 시작했다. 계좌추적에서 금품을 받은 것이 드러난 검사들은 법무부 검사징계위원회로 넘어갔다. 이 가운데 한 명은 법무부 소속으로 당시 법무부 장관인 강금실이 총애하는 인물이었다. 검사 징계위원장은 법무부 장관이다.

 

2003년 10월 4일 <경향신문>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끝내 자기 오기를 관철했다고 보도했다. 법무부 소속 검사는 무혐의로 벗어났고 이후 순탄한 길을 걸었다. 오다리 보도로 막상 피해를 입은 쪽은 강남경찰서 형사과장인 황운하였다. 총경 승진을 앞두고 직위해제당한 것이다.

 

언론과의 마찰이 징계 배경이었지만 2003년 6월 20일 <한국일보>는 "그간 자주 물의를 빚어 온 점 등도 감안됐다"는 고위 간부 말을 인용하면서 ‘'트러블메이커'에 대한 시범 징계 가능성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고 전했다.

 

황운하는 이후 소청심사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듬해 황운하는 총경으로 승진했다.

 


 

황운하를 중용한 첫 번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다. 외무고시 출신 허준영은 2005년 1월 취임했다. 그는 청문회에서부터 경찰 수사권 소신을 거듭 밝혔다.

 

수사권이 있는 검찰은 챔피언이었고 경찰은 도전자였다. 도전자는 계속 시합을 요구했고 챔피언은 웬만해서는 도전자를 피하려 했다. 2004년 9월부터 검·경 수사권 조정협의체 회의가 수차례 열렸다. 2005년 중반 국회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진행은 갈수록 지지부진했다. 참여정부는 검찰·경찰 중재, 국회 입법, 총리실 조정 등을 거치며 결론을 내려했지만 실패했다.

 

경찰청장 허준영은 수사구조개혁팀을 꾸려 황운하 총경을 팀장으로 불렀다. 황운하 행보는 다시 대외적인 충돌을 가져왔다. 황운하가 허준영에게 보고 없이 전결로 하달한 공문이 문제가 됐다. 모두 두 번이었는데 검찰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 공문은 검찰 강제인치 등 잘못된 관행을 거부하라는 지시였다.

 

수사지휘권을 앞세운 검찰이 저지르는 나쁜 관행 가운데 '피의자 면담제도'가 있다. 법원 영장실질심사제도를 흉내 낸 이 제도는 법적 근거가 없다. 만약 경찰이 긴급체포를 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을 때 검찰이 피의자를 면담하고 싶다면 화상통신을 하거나 검사가 경찰서로 찾아오면 된다. 법원이 피의자를 면담하는 제도인 영장실질심사도 피의자 신청이 없으면 할 수 없는데, 검찰은 경찰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피의자 뜻과 무관하게 검찰청으로 데려오게 했다. 기관이 다른데도 공문도 없었다. 경찰은 피의자를 검찰청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경찰서로 데려왔다.

 

황운하는 전국 경찰서에 '피의자 면담을 위한 검사면전 강제인치거부'를 내용으로 담은 공문을 하달한다. 충남지방경찰청과 강릉경찰서 두 곳이 검찰과 맞붙었다. 청와대도 황운하 행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청와대 공직기강 비서관실이 나서 허준영에게 인사조치를 요구했다. 허준영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 문제로 허준영과 청와대는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허준영은 왜 자신에게 보고도 없이 행동한 황운하를 오히려 감쌌을까? 한 경찰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내용은 청장에게 보고해도 그 누구도 보내라고 할 수 없어요. 거기서 황운하의 과단성이 나오는 거죠.”

 

허준영은 2005년 12월 WTO 쌀협상 비준반대 시위에서 농민 두 명이 사망하면서 경찰청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새로 청장으로 취임한 이택순은 황운하를 경찰청 밖으로 내보냈다.

 


 

황운하는 대전서부서장으로 가서도 '수열모'라는 모임을 만든다. '수사구조개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검찰이 주도하는 형사소송법 체제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깨우쳐야 했다. 그 지점에서 구체제 모순을 뒤바꾸는 에너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모임을 꾸리고 몇 달이 지난 2006년 9월 5일 대전서부서는 대전지검에서 온 전화를 받는다. 한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데려오게 했다. 대전서부서 직원은 수열모 모임에서 배운 내용이 생각나서 서장 황운하에게 바로 보고한다. 대전서부서는 검찰 요구를 거부하는 사유를 적어 공문으로 보냈다. 피의자를 면담하고 싶으면 검사가 경찰서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검사는 직접 경찰서로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9월 15일 검사가 다시 인치 요구를 했다. 황운하는 또 거절했다. 대전지역 언론은 당시 검·경 갈등을 '살얼음판', '초유의 신경전', '폭풍전야' 같은 표현으로 묘사했다.

 

검찰 안에서는 황운하를 겨냥해 절대 묵과할 수 없다며 '인권옹호직무명령불준수죄'로 기소하자는 의견이 쏟아졌다. 하지만, 종전 같은 기소처리는 없었다. 2006년 9월 26일 대전 CBS 정보보고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 본인이 희생양이 되겠다고 덤벼드는데 우리도 사실 겁난다.

 

검찰만 황운하가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경찰 수뇌부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이미 경찰청은 이런 문제를 검찰에 협조하기를 바랐다. 경찰청장 이택순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황운하를 소리 지르는 노점상에 빗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황운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택순은 9월 25일 황운하를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보낸다. 누가 봐도 문책성 인사였다. 황운하는 26일 이임식에서 검찰을 향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요, 사법개혁의 방해 세력이고, 강력한 인권침해 집단이다."

 

검찰개혁을 바라는 대다수가 공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들도 검찰개혁 방법으로 경찰 수사권에 힘을 보태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경찰이 중요한 순간마다 국민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한 예다.

 

게다가 국민은 경찰이 어떤 수사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경찰이 존재감을 알리려면 관심을 끌 수 있는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므로 대기업, 정치인 수사는 대부분 검찰 몫이다.

 

황운하는 형사과장 시절 마약사건을 중요하게 다뤘다. 검찰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수사해서 이목을 끌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연예인 마약 문제였다. 2007년 황운하가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 시절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사건이 터진다.

 


 

2007년 3월 8일 한화그룹 회장인 김승연이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직접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보복 폭행 사건'이다. 수사 결과도 깔끔했다. 일선 경찰서가 처음으로 재벌 회장을 구속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 초기 경찰이 은폐를 시도하면서 늑장수사를 한 사실이 밝혀진다. 이 과정에 한화 쪽 로비가 있었고, 전 경찰청장 최기문이 역할을 했다. 5월 25일 경찰청 감찰 이후 서울청장 사퇴와 서울청 수사부장, 형사과장, 남대문경찰서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경찰청장 이택순이 자기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일이 벌어진다. 경찰이 검찰에? 황운하는 5월 26일 이택순 퇴진을 요구한다. 일선에서는 경찰청장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경찰을 수사기관도 없는 조직으로 만들었다고 분개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같은 달 28일 경찰청에서 열린 전국경찰지휘부회의에서 국장급 일부가 사퇴를 건의했다. 이 모든 것은 조직 발전을 위한 충정으로 이해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가 이택순에게 힘을 보태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사퇴를 건의했던 국장 및 청장들은 인사 조치되거나 회의 때마다 면박을 당했다.

 

황운하에게는 중징계가 예고됐다. 8월 29일 경찰청 중앙징계위원회에 황운하가 소환됐다. 황운하가 차에서 내려 경찰청 정문으로 들어갔다. 황운하는 징계위원을 향해 징계받을 일을 한 게 없다고 반박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인용하기도 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당시 민중들이 변화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사건인데 그 구체제 모순에 맞선 사람들을 범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징계위원장이 황운하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야, 너무 세게 이야기하지 마! 무섭다고!”

 

 

(다음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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