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2부) 목차

1화 300

2화 이런 수사관은 처음이지? 놀랬다면 미안해.

3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4화 다키스트아워(Darkest hour)

 

 

 

영화 다키스트아워 포스터(2017년작)

 

 

제4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

 

2019년 3월 안산에서 부동산 사기 사건이 터졌다.

 

공인중개사가 집주인에게는 월세라고 하고 세입자에게는 전세라고 한 뒤 전세금을 가로챈 사건이다. 피해자가 100명이 넘었다. 경기남부지방청은 부동산 중개업자를 구속했다.

 

김헌기 2부장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문제가 아니다. 유사한 범죄가 있을 거 아냐. 전세금을 유용한 놈이 한두 명이겠냐. 피해자는 젊은 직장인이나 학생들이고 다들 전세금을 엄마, 아빠가 해줬거나 은행 대출해서 마련한 것이잖아. 이건 확대 수사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겠느냐?”

 

“구청과 협조해서 부동산중개업자를 조사하겠습니다.”

 

김헌기는 이것을 도랑 막고 물을 퍼내 고기를 잡는 ‘막고 푸기’식 수사라고 했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그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해? 모든 부동산 중개업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경찰이 조사하겠다면 부동산 중개업에서 가만히 있겠냐? 들고일어나지. 대다수는 선량한 중개업자인데 몇 놈 일탈한 놈 잡겠다고 이 잡듯이 뒤져? 그 몇 개 찾으려고 그 많은 수사력을 동원해?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신고를 받는 거야. 신고를 들어오면 수사를 하면 돼 우리는 신고하라고 대대적으로 홍보만 하면 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대학가와 오피스텔에 ‘부동산 사기 집중신고기간 운영’이라고 홍보 펼침막을 걸었다.

 

신고를 유도하면 범죄 싹을 자르면서 예방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이런 감각은 어떻게 생길까?

 

김헌기는 영화 <다키스트 아워 Darkest hour>에서 처칠 부인이 남편을 위로한 대사를 인용했다.

 

“그 마음의 갈등이 지금 당신을 이렇게 단련시킨 거에요. 당신은 불완전하기에 강하고, 확신이 없기에 현명한 것이에요.”

 

영화 다키스트 아워 포스터(2017년작)

 

 

김헌기는 후배들에게 거듭 말했다. 어려운 과제를 받으면 고민과 갈등이 생기지만 그런 단련을 통해 감각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어쩌면 국민이 흘리는 피와 눈물에 땀과 노력으로 답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김헌기는 2015년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인천지방경찰청 제2부장으로 근무한다. 인천지역 수사와 112 상황실을 담당한다.

 

그해 김헌기 책상에는 상황보고서가 쌓였다. 상황실에서 전날 발생한 범죄 목록을 작성해 내부망에 전파한다. 김헌기가 출근하기 전 이미 부속실장이 이를 인쇄해서 갖다 놓는다.

 

2015년 10월 2일, 인천에서 남자가 전 여자친구를 살해 한 뒤 오피스텔에서 투신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살해된 여성은 이미 그전에 두 차례 112 신고를 했었다. 당일은 남녀가 심하게 다툰다는 이웃주민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고 이미 살해된 상태였다.

 

김헌기는 이 사건에서 경찰 대응에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데이트 폭력 대응 기획은 이처럼 상황보고서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상황보고서에서 매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범죄가 있었다. 바로 1997년 대만에서 시작해 2006년 한국으로 건너온 ‘보이스피싱’이다.

 

속여서 돈을 가로채는 방법은 시대와 환경에 맞춰 계속 교묘해졌다.

 

당시 보이스피싱을 예방 방법을 고민하던 김헌기는 은행이 경찰에 신고하는 방법을 착안했다. 피해자가 은행에 가서 거액으로 현금을 찾을 때 은행직원이 경찰에 신고를 해주는 방법이다.

 

인천지방경찰청 2부장 시절에는 인천지역에만 적용했다. 하지만 곧 생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피해자에게 은행 직원과 경찰이 한통속이라며 믿지 못하게 유도한 것이다. 김헌기는 다른 공략법을 찾아야 했다. 결론은 휴대전화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다른 사람과 연락하지 못하도록 휴대전화를 켜놓고 있게 유도한다. 다짜고짜 휴대전화를 뒤졌다가는 민원이 발생한다. 개인 역량이 아니라 조직 시스템으로 걸러야 한다. 김헌기는 간단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경찰이 먼저 시민에게 보이스피싱과 관련해 현금 인출하려는 게 아닌가 반드시 질문한다. 아니라고 대답해도 휴대전화가 통화 중이면 보이스피싱 피해자로 짐작할 수 있다.

 

이듬해 김헌기는 본청 수사기획관이 되면서 이 체계를 전국에 적용했다.

 

강신명 경찰청장(왼쪽), 진웅섭 금융감독원장 사진=금감원

 

지금이라도 경찰청에 보이스피싱 전담부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김헌기는 부정적이다. 보이스피싱 지휘부는 대부분 중국에 있다. 잡아봤자 보병들, 즉 인출책과 송금책이 계속 나타나니 끝이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김헌기 식 해법은 이렇다.

 

“코로나 19 관련해서 국무총리가 대책본부장이 되잖아요. 보이스피싱도 총리가 대책본부장이 돼 끌고 가야 해요. 중국 공안과 공조하는 것도 경찰 혼자보다 외교부가 함께 나서야 더 효과적이고. 금융과 통신 제도를 고쳐야 해요. 안전과 편의는 반비례 관계인데 우리는 편의 위주로 가지요. 금융제도나 통신제도가 편한 대로만 가니까 보이스피싱에게 당해요. 클릭 한 번에 1억씩 날라 가는 게 말이 되나요?”

 

김헌기는 정부가 보이스피싱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본다. 반격 작전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문재인 정부는 국정원 댓글 작업과 2012년 국정원 댓글 사건 경찰 중간발표를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래서인지 적폐 청산이 댓글 분야에 집중됐다. 그리고 당시 수사에 참여한 김헌기는 문재인 정부 들어 수사부서와 멀어진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전보다 시위집회에 관한 폭넓은 자유가 주어졌다. 정부 철학이 집회시위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면 경찰도 그에 코드를 맞추게 돼 있다.

 

2018년 9월 8일 인천에서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인천 퀴어축제가 열렸고 한편에서는 퀴어 반대축제가 열렸다.

 

2018.09.08.MBC뉴스데스크 방송 캡처

 

반대측에서 집회를 하지 못하도록 전날부터 무대 단상을 점거하자 결국 경찰이 불법행위로 인한 업무방해로 체포했다. 김헌기가 인천지방경찰청 제3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다.

 

경찰청에서는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런 의미처럼 보인다.

 

‘무대를 점거한 우리 꽃다운 청년들이 왜 피를 흘리게 해야 하느냐. 불법행위를 해도 집회시위 자유를 누려야 할 너무 소중한 우리 국민이다.’

 

아주 심각한 불법행위가 아니면 체포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채증해서 사후에 처리를 하라는 식이다. 물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고 체포를 하겠는가.

 

그 용의자가 모 단체 깃발 주변에서 뱅뱅 맴돌아준다는 보장도 없다. 현장에서 이런 지침은 ‘하지 말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김헌기는 조직 내 지원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민주노총 세가 커졌다. 그리고 기사들이 쏟아졌다.

 

-<건설경기 한파도 무섭지만 건설노조가 더 무섭다.>(2019.5.7.조선일보)

-<노조 등쌀에 치여 더 힘들다.>(2019.4.19. 동아일보)

-<날 풀리자 도진 건설노조 횡포, 크레인 또 날 세웠다.>(한국경제. 2020.3.18.)

 

건설노조 조직체계는 지역본부-지대-분회로 이어진다. 군대에서 대대-중대-소대와 같은 개념이다.

 

기사 내용은 비슷하다. “우리 노조원 써라”는 요구를 안 들어주면 출입구 앞에서 공사를 못하도록 집회를 하거나 노동청에 신고를 한다. 못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다면 건설 현장에 안전조치 소홀로 지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구를 안 들어주면 "모델하우스 오픈 첫날 그 앞에서 확성기를 틀고 시위하겠다."는 것이다. 귀가 찢어지는 확성기를 단 승합차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단결투쟁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런데도 업체들은 고소고발을 하지 못한다. 건설노조가 전국 조직이므로 집중 타깃을 삼을까 봐 겁내는 것이다.

 

“악질적인 무법 행위가 도를 넘었다”며 급기야 건설노조를 처벌해달라는 국민청원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민노총 측은 "정당한 노동운동이었다"는 주장이고 경찰도 이미 정상적으로 집회 신고를 했기에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2019년 김헌기가 경기남부지방경찰청 2부장 시절이다.

 

화물연대 소속 기사들이 농협물류센터에서 자신들과 계약하지 않자 화물연대 소속이 아닌 기사들 차량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2019.04.20. MBC뉴스투데이 방송 캡처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거나 돌멩이가 날아와 차량 앞 문에 금이 갈 지경이었다.

 

 

여러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자 당시 김헌기 2부장은 회의석상에서 단발성 불법행위보다 이걸 조종하는 지휘부를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휘부는 호응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치인과 여론은 독일과 협상을 원했다. 김헌기는 혼자 전쟁을 외치는 처칠 신세였다. 좌절감만 깊어졌다.

 


 

 

2020년 경무관 6년 차 마지막 해가 됐다. 김헌기는 다시 고향 같은 인천지방경찰청 1부장으로 돌아왔다.

 

여기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건설현장 인근에서 신고되는 집회 대부분이 민주노총에게 함락된 것처럼 느껴진다.

 

20년 전 그는 결코 불법행위에 굴복하지 않았다. 수사2계장 시절, 경제팀 직원들과 간담회 자리였다. 직원들 하소연이 쏟아졌다. 재건축 재개발 관련 조합, 컨설팅 업체, 비상대책위원회 등 사이 고소고발 사건 때문에 다른 일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김헌기는 경제팀은 일반 선량한 사람들의 고소사건에 집중해야 하며, 자기네 이권 때문에 경찰 수사력을 낭비하는 게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김헌기 수사2계장 지시가 떨어졌다.

 

“각 경찰서 재건축 재개발 사건 고소고발 사건 다 줘봐.”

 

인천지방경찰청 수사 2계로 고소고발 사건들이 모아졌다. 전체 사건을 놓고 보면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시공사에 문제가 있고 어떤 이권 때문에 문제를 삼는 것이 분석이 된다. 악취가 심하게 나는 부분은 수사 2계가 칼을 들이댔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촛불 탄핵 정국 이후 시대는 김헌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듯 보인다.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출근할 때마다 생각한다.

 

‘오늘은 어떤 나를 보여줘야 할까.’

 

김헌기는 상상한다. 인천지하철 1호선을 타고 시민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건이 터졌다. 2020년 4월 20일 인천 동구 한 신축 아파트 건설 현장 안전교육장 앞에서 한국노총 소속 노동자와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 현장 노동자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 충돌로 10여 명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2020년 4월 27일 경인일보는 <‘도 넘는’ 공사장 일감 다툼... 치안 강화 ‘두 팔 걷은’ 경찰>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경찰이 집회 과정에서 업무방해 등 불법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침이라는 내용이다.

 

기사를 보면 인천지방경찰청은 최근 일선 5개 경찰서 경비, 정보, 수사 과장들과 건설현장에서 잇따라 발생하는 폭력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 회의 장면을 상상해본다.

 

회의석상에서 ‘타협은 없다’고 질러대는 한 사람이 보인다. 일장 연설이 끝나자 일선 과장들은 속 시원한 표정을 짓는다. 마침내 회의석 정중앙에 앉아 있던 인천경찰청장이 흰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는다.  

 

 

 

 

- 2부 The End -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1부)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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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2부) 목차

1화 300

2화 이런 수사관은 처음이지? 놀랬다면 미안해.

3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4화 다키스트아워(Darkest hour)

 

 

제3화. 더 기버(The giver) : 기억전달자.

 

 

더 기버, 기억전달자 영화 포스터.2014년작

 

 

경찰에서 나름 실력 있다는 수사관들은 대부분 서로 만나기 마련이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2011년 말 경찰청 내에 범죄정보과와 지능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김헌기 지능범죄수사과장이 지능범죄수사대를 지휘했다. 지능범죄수사대는 고위공무원 비리, 경제사범과 같은 대형사건을 인지해 수사한다.

 

당시 뽀로로(2화)를 포함한 전국에서 실력 있는 수사관들이 다 모여들었다. 이들은 지능범죄에서 가장 높은 단계 수사를 맡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뇌물 사건이다.

 

SBS 방송 캡처.2019.11.23

 

“공무원 뇌물사건 검거에 얼마나 큰 노력과 투지가 들어가는지 일반인은 잘 모르지요. 뇌물인데 돈 주고받은 증거가 어디 있어요? 공무원에게?”

 

 


 

김헌기가 수사2계장이던 시절은 공무원 뇌물 사건이나 기업 횡령, 주가 조작 같은 사건은 검찰 전유물이었다. 당시 자금추적 영장 신청서를 제대로 작성하거나 영장을 받아 집행할 수 있는 경찰은 드물었다. 자금 추적은 지능수사에서 기본이지만 생소한 금융용어와 자료 압수 개념이 어렵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수사관 중에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저는 은행 직원에게 물어봤어요. 이런 내용을 압수하고자 하는데 영장에 어떤 내용을 기재해야 하느냐? 그리고 가끔 검찰 기록이 우연히 하달될 때가 있어요. 그런 게 내려오면 보면 메모하고, 그런 게 쌓인 거지요.”

 

수사관 경험과 지식을 보편화하려면 자금추적 실무 매뉴얼이 필요했다. 이를 만들려는 수사관도 있었다.

 

“제가 테스크포스팀 꾸려서 자금추적 실무 매뉴얼을 만들 테니 윗분들에게 인원 조금만 해달라고 해도 관심 있는 분이 없었어요. 그런 게 아쉬워요.”

 

이 수사관은 2012년 김헌기 지능수사과장을 만나고 자금추적 매뉴얼을 만들게 됐다.

 

 

물론 김헌기에게 이 일을 맡기며 예산을 주는 이는 없었다. 어떤 이는 고위간부가 치적을 내세우기 가장 좋은 방법이 매뉴얼 편찬이라고 했다. 김헌기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수사관이 모든 분야에 능통할 수 없다. 판사도 전문 분야에 감정인 제도를 둔다. 검찰은 회계 추적, 자금추적 시, 증권사나 세무사 직원과 함께 수사한다.

 

경찰은 회계사 세무서에 주고 조언을 받아서 수사를 진행했다. 이 경우 자문비용이 부담이고 수사기밀유지 보장도 어려웠다. 경찰 회계·자금추적은 한계에 부딪혔다.

 

조현오 청장은 지능범죄수사대를 만들어 그 중 한 개 팀을 자금추적수사팀으로 운영했지만 실패했다.

 

“수사관 처지에서는 자금추적이 남 뒤치다꺼리나 하는 거잖아. 자기도 모양새 나는 수사를 하고 싶지. 생색이 안 나고 의욕도 없고 남에게 자료 제공하는 것은 빛이 안 나잖아.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현실에서 적용이 안 되면 실패거든.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지. 그래서 결론은 매뉴얼이라도 만들자.”

 

김헌기는 자금추적 매뉴얼 편찬 팀에게 당부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지 마라. 시작이 반이다. 첫 작품을 만드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증보판을 내는데 훨씬 쉽다 ”

 

이 일에 관여한 수사관은 다음 증보판에는 주가조작, 외국계좌 이용한 자금세탁, 몰수보전 등을 넣고자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관심을 보이는 지휘관을 만나지 못했다.

 


 

2014년 강력범죄수사과장이던 김헌기는 전국 주요 사건을 살펴봤다. 검거 해결에 가장 주요한 방법은 CCTV 수사였다. 하지만 CCTV를 활용한 수사 역량은 지역마다, 개인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이 역량을 일정 수준으로 보편화해야 했다.

 

YTN방송캡처

 

김헌기는 전국 CCTV 고수를 불러 모아 매뉴얼 작성을 진행했다. 이들은 범인이 특정되지 않은 형사 사건을 비롯해 고난도 사건을 해결하며 역량을 축적했다. 나중에 강호순이 범인으로 밝혀진 2007년 1월 7일 경기서남부 부녀자 실종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매뉴얼에 대한 현장 평가는 어떨까? 일선경찰서 한 형사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매뉴얼 잘 만들었지. 그런데 직원들이 잘 안 보는 게 문제야.”

 

형사과장은 본청 노력을 충분히 알았다. 각 직원에게 매뉴얼도 전달했다. 문제는 활용도가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형사과장 결론은 이렇다.

 

“현장에서 매뉴얼을 활용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형사과장이 매일 업무 중에 맞닥트린 현실은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컴퓨터 내부망으로 결재가 이뤄진다.

 

직원들 서류를 중간 팀장들이 한 번 결재하고 형사과장에게 올라간다. 서류를 보면 갑갑함이 밀려왔다. 범죄사실 작성만 봐도 수사관 내공이 보인다. 피의자는 3명인데 범죄사실에는 2명밖에 안 보이는 일도 있다. 그러면 해당 수사관을 불러 묻는다.

 

“한 명은 어디 갔니?”

 

결재 중간 단계에서 거름망 역할을 해야 할 팀장 역량이 약하다는 것을 느꼈다. 퇴직과 가까워질수록 블록체인이나 최신 신용카드 판례, 최신 사이버 사건에 관한 관심은 현격히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사 현장에서 고민이 시작됐다. 뒤늦은 공부를 할 때 이런 매뉴얼이 큰 도움이 됐다. 물론 수사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갖추려는 일선 과장들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2013년 인천지역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수사과장 기억이다.

 

23명이 있어야 할 경제팀 인원이 17명뿐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경력이 1년 정도여서 현장에서 역량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내부망으로 수사서류를 결재할 때마다 현실이 갑갑했다. 그래서 이 수사과장은 일주일에 한 번 팀원을 모아 두 시간 정도 강의했다. 따로 책이 없었고 부딪히는 범죄 유형별로 설명했다.

 

“민원인이 고소장을 들고 왔다 할 때 맨 먼저 어떤 것부터 체크해야 하나?”

 

 

그는 칠판에 ‘1) 죄명, 2) 피해 날짜, 3) 공소시효 계산’이라고 쓰고 설명했다.

 

“일단 제일 먼저 죄명부터 본다. 피해자는 사기를 당했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횡령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파악해라. 두 번째 피해 입은 날짜다. 그걸 모르고 고소장 쓰는 사람이 많다. 마지막으로 공소시효를 계산해야 한다. 가령 모욕죄는 공소시효가 5년이다. 하지만 고소 시간은 6개월 이내다. 이게 지나서 오는 사람도 많다.”

 

수사과장은 이 형식적인 조건 세 가지를 모두 통과해야 조사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 총론이고 전산으로 결제하면서 서류를 보고 작성자를 다시 불러서 강의했다. 직원이 이해하지 못해 한 시간 넘게 걸린 사건도 있다.

 

수사과장은 어느날 밤늦게 울고 있는 직원을 봤다. 가정에서도 늦게 들어온다고 이해를 못한다고 했다.

 

경제팀은 밀려오는 사건은 많고, 왜 사건을 빨리 처리하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상부에, 밖에서는 민원인에게 시달린다. 지능수사는 수사관이 성과를 내면 특진도 하고 보상도 따랐다. 이 같은 환경 차이는 경제팀 이탈로 나타났다.

 

경제팀 인원 조정과 배치 등 행정 업무는 경찰청 수사국이 맡는다. 하지만 2012년 김헌기가 경찰청 지능수사과장일 때는 다들 자기 업무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당시 김헌기는 이러다가 망한다며 문제를 제기했지만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경찰서 일선 수사과장은 할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아질 기미가 없던 2015년 어느날 전화가 왔다. 김헌기 인천지방경찰청 2부장이었다. 김헌기는 경무관으로 승진하고 2015년 인천지방경찰청으로 왔다.

 

 

 

 

“거기 경찰서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내가 이것을 개선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2015년 김헌기가 인천2부장으로 오자 자신이 부임한 인천에서라도 조직 체질 개선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김헌기는 인천지방경찰청장 결재를 받아 속도감 있게 밀고 나갔다. 당직을 없애고 평가제도를 바꿨다.

 

 

김헌기는 2015년 12월 경찰청 수사기획관이 된다. 경찰청 지능수사대와 범죄정보과 등을 지휘하면서 수사국이 맡은 중요 사건에 수사 업무를 챙기는 자리였다. 김헌기는 수사기획관이 되자 강신명 경찰청장 승인을 받아 전국 경제팀 활성화를 더 요란하게 밀고 나갔다.

 

무전취식 사건은 경제팀이 아닌 형사팀에서 처리하도록 했다. 경제팀은 원래 양반처럼 조사하고 형사들은 강절도 등 험한 수사를 많이 해서 무전취식범을 잘 다룬다는 시각도 있다. 한 형사과장은 힘든 사건은 모조리 형사에게 넘긴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경찰 내부망에도 형사는 왜 챙겨주지 않느냐는 글이 올라왔다.

 

공공의적 영화 포스터

 

‘행정 달인’ 김헌기는 개혁에 앞서 반대 세력을 고려한 대안을 생각한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욕하지 못하도록 구상한 것은 뭘까? 형사들은 욕하기에 앞서 ‘김헌기 잘한 점’이라고 반문하더니 바로 답했다.

 

“나는 데이트 폭력!”

 

 

(계속해서 마지막 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1부)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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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나는 <구겨진 제복>(조현오), <풍운아 황운하>(황운하)에 이어 다시 경찰 한 명을 만난다. 주인공 이름은 김헌기다. 황운하와 김헌기는 경찰대 선후배 사이다. 2011년 조현오 경찰청장 시절 김헌기는 지능범죄 수사과장이었고 황운하 수사기획관은 직속 상사였다.

 

황운하는 자신이 ‘검경수사권 역사’라고 자부할 만큼 치열하게 살았다. 황운하 활약은 여러 차례 언론이 다뤘으며 숱하게 화제가 됐다. 반면 김헌기는 철저한 실무형이다. 나는 김헌기 수사 인생을 담은 매뉴얼을 만들어 후배 경찰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2020년 1월 13일 국회는 검경수사권 조정안을 처리했다. 경찰 수사 재량이 더 확대했다. 그 후 경찰청은 ‘수사 역량 강화’를 목표로 많은 정책을 내놓았다. 특히 실무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을 키워야 했다. 이 글은 앞으로 경찰이 당면한 과제, 수사역량 상향평준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유능한 선배 인생에서 자극을 받는 것도 하나의 동기부여가 된다. 물론 이러한 대의명분이 이 글을 쓰게 된 유일한 원동력은 아니다.

 

 

필자가 취재를 시작한 시기는 2006년이다. 노래방 사장들 피해 사례를 블로그에 올린 게 출발점이다. 손님이 노래방에 몰래 술을 가지고 와서 마시다가 적발돼도 업주가 처벌받는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법 사각을 노린 부작용이 생긴다. 노래방을 골라 돈을 뜯고 무전취식하는 사람, 자기가 소개하는 도우미를 쓰지 않는다고 신고하는 사람도 있다. 노래방 업주는 도우미를 쓰는 위법행위 때문에 금품을 갈취당해도 신고를 꺼렸다.

 

이런 상황을 언론에 제보해도 보도하는 매체는 많지 않았다. 노래방 사장들은 블로그를 기반으로 취재 활동을 했던 나에게 연락했다. 뜻있는 노래방 사장들은 법 개정만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고 자비를 털어 신문을 창간했다. 하지만 유흥주점 로비를 뚫고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몇 년 후 이 문제를 해결한 이가 김헌기다.

 

김헌기는 2014년 본청 강력과장이 되자 신고 활성화를 위해 노래방 업주는 처벌을 면해주는 ‘피해자 면책제도’를 만들었다. 강신명 경찰청장이 취임하고 ‘동네 조폭 특별단속기간’을 정해 동네 조폭들을 입건했다.

 

지금 생각해도 경찰이 진작 해결했어야 할 일이다. 경찰이라면 누구나 민생범죄 문제를 고민해야 하고 해결하는 게 당연하다. 특별히 칭송받을 일까지는 아니다. 필자가 김헌기를 취재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가 2018년 인천지방경찰청 3부장으로 재직할 때다.

 


 

3부장은 크게 정보과와 보안과를 아우른다. 그런데 얼마 후 112 상황실을 관리하는 2부장 소관에서 사건이 터진다. 인천 송도신도시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서 한 여성이 고급 승용차를 세워놓고 가로막는 일이 벌어졌다. 아파트 주차위반 단속에 항의하겠다고 다른 차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당연히 112 신고가 접수됐다. 그러나 출동한 경찰은 몇 시간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사유지라 주차위반 단속도 아니고 견인대상도 아니지요. 차량 압수는 재산권 침해 때문에 어렵고요.”

 

그러자 주민들이 차주를 비난하는 내용을 적은 포스트잇을 차량에 닥지닥지 붙이기 시작했다.

 

▲ YTN뉴스 방송 캡쳐

 

주민들은 합심하여 차량을 옆으로 옮겨 놨다. 이 사건은 외국까지 크게 대서특필됐다. 김헌기는 이 사건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 경찰관들을 지휘하는 체계가 있다. 경찰서 112 상황실과 상급기관인 지방경찰청 상황실 조직으로 올라간다. 김헌기는 지방청 회의에서 시스템 문제를 지적했다.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상황에서 현장 경찰에게 뭔가 지침을 줘야 할 거 아닙니까. 선제적으로 지원을 해줘야지, 경찰 조직이 이래서 되겠습니까. 경찰서와 지방청 조직은 대체 뭐하는 조직이냐 이거지요.”

 

112 상황실은 김헌기 소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칠 수도 없었다. 이듬해 2019년 봄, 계속해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참모로 내정됐다. 다행스럽게도 2부장이었다. 김헌기는 여기로 오자마자 112 코칭 시스템을 바로 시행했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다양한 현장을 접한다. 거기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애매하면 종합상황실에서 코칭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이 전국으로 확대될 것을 확신했다.

 

사명감과 열정이 돋보이는 사례다. 물론 이 정도 소명의식은 다른 경찰 간부에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김헌기와 다른 경찰들 사이 차이가 더 명확하게 보인다. 그 차이가 ‘김헌기 수사 인생 매뉴얼’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다. 이런 경험이 있었다.

 


 

2020년 봄, 대학병원 주차장에서 후진 중에 뒤 차량 번호판을 툭 건드렸다. 뒤에 있는 차량 운전자 상태를 확인했다. 운전자는 중년 여성이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서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차량 엔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보험회사에 전화해 달라.”

 

보험회사 직원을 기다리는 동안 중년 여성은 이렇게 뒤로 차를 치면 차 엔진이 망가진다고 했다. 그 주장을 그냥 듣기만 했다. 도착한 보험회사 직원이 차 엔진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해주고 사건 접수는 취소됐다.

 

보험회사 직원이 떠나자 운전자는 다시 차량 문짝이 이상하다며 고쳐야겠다고 주장했다. 보험회사는 다시 그 여성에게 전화해 차 구조상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설명했다. 운전자는 공업사에 가서 차량 점검을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났다.

 

운전자에게 전화가 왔다. 차량 이야기는 전혀 없이 목이 너무 아파 엑스레이를 찍어야겠다며 보험회사에 대인 접수를 부탁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교통과 경찰에게 상담을 청했다. 대부분 의견은 같았다. ‘똥 밟은 셈 치라’는 것이다.

 

한 경찰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 도로에서 차량 접촉으로 상대에게 20만 원가량 차량 수선비를 물어줬는데 병원비로 350만 원을 청구했다며 누구인지도 말해줬다.

 

“우리 위층에 사는 여자야!”

 

내가 사는 지역 관할 서장은 경찰청(본청) 교통과에서 총경 승진을 했다. 그는 내가 주인이고 보험회사가 종이라며 주인이 종을 부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너 대리인이 누구야? 이런 일 하라고 비싼 보험 드는 것 아니야? 물론 너 보험료 약간은 올라가겠지만 보험회사 보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 너 그 여자 또 만날래?”

 

대다수 의견을 받아들여 대인접수를 했지만 찝찝했다. 2006년에 만난 노래방 업주도 금품갈취를 당하는 현실을 하소연하고 싶어서 나에게 취재를 요청했을 테다. 김헌기에게 전화했다. 사고 상황을 설명하니 며칠 전 인천 골목길 사고를 이야기해줬다.

 

한 운전자가 운전 중 차량 사이드미러에 부딪혔다. 상대방 차량 운전자는 현장에서는 괜찮다고 했다가 나중에 뺑소니 신고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나보다 더 나쁜 상황을 접하면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김헌기는 이야기를 끝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 교통사고 악성 피해자에 대한 경찰의 대비책! 그래서 국민이 교통사고 악성 피해자에게 시달리지 않게 내가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 교통사고 악성 피해자가 억지 주장할 때 경찰 대처를 보니 믿음이 간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겠네. 좋은 아이디어네. 오케이!”

 

가능성이 있는 계획일까?

 

“쉬운 것은 누구나 다 하지. 이건 기준이 모호하니까 잘 만들어야지. 나는 내가 백 프로 하려고 안 해요. 내가 시작의 반이야. 항상 그런 생각을 하지. 내가 다 하려고 하지 않아. 난 그런 능력 없어.”

 

김헌기는 담당 계장에게 교통사고 악성 피해자를 걸러내는 시스템을 만들어보자고 말했다. 그에게 받은 문자 메시지다.

 

‘인천에서 시작해보겠다. 나이롱 교통사고 피해자를 거르는 장치를 마련하겠다. 이런 나이롱 교통사고 피해자가 설치지 않도록 고민 또 고민해보겠다’

 

순간 영화 <와일드카드>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교통사고 악성 피해자들이 아무리 쇼하듯 뒹굴어도 김헌기 앞에서는 어림없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고 북쪽에는 60만 대군이 버티고 서있다.

 

(다음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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