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제복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차명계좌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조현오를 향해 언론은 '공감능력'을 지적했다. 인간 감정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지 않고서야 '차명계좌 발언'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조현오 주변 사람도 공감능력 부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 '외통수' 기질 덕에 역대 경찰청장 가운데 청와대를 향해 가장 강한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1990년 경찰이 되고 여러 사람에게 지시를 받아야 했다. 경찰청장이 청와대 수석 등 지휘계통이 아닌 사람들에게 지시받아야 하는 법적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마디 하면 통상 경찰청장을 거쳐 경찰 조직으로 하달됐다. 2010년 8월 30일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지휘권부터 바로잡고자 했다. 직원에게 전달되는 것은 오직 경찰청장 지시뿐이었다.

 

경찰청장 지휘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사권이다.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맹형규와 행안위원장이던 안경률은 인사에 일체 간섭이 없었다. 참여정부 시절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김두관도 인사에 개입하지 않았다 자신했다. 

 

 

MB는 어땠을까. 조현오는 MB도 지휘권에 간섭이 없었다며 고마워했다. 조현오는 2년에 걸쳐 경찰 고위급 인사를 단행했다. 그는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인사를 단행했다고 자부한다. 하나씩 살펴보자.

 


 

2010년 치안정감(9월 7일), 치안감(12월 2일), 경무관(12월 3일) 인사를 단행하는 시점에 조현오는 여야 의원 10여 명에게 인사청탁을 받았다. 그때마다 조현오는 청탁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했고, 대부분 의원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전화를 끊었다. 경찰 고위직 인사는 청와대 정무수석과, 비서실장, 민정수석, 인사비서관과 경찰청장이 논의한다.

 

민정수석은 승진자 적격 여부를 검증했다. 보통 민정수석은 검찰과 연락할 일이 많기에 검찰 출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검찰 눈 밖에 난 경찰은 승진하기 어려운 구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민정수석에 맞서 경찰청장은 어떻게 인사 주도권을 쥘 수 있을까. 조현오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당시 민정수석은 권재진이었다. 그는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후보자 적격 여부를 따졌는데 조현오가 이렇게 말했다.

 

"경찰청장 지휘권은 인사권인데 그것도 제대로 행사 못 한다면 차라리 그만두겠습니다."

 

조현오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인사를 했다. 이때 인사에서 나타난 특징을 보자. 조현오는 2010년 인사를 시작으로 경무관 자리는 서울 총경 몫이라는 관행을 바꾼다. 이 같은 관행이 생긴 배경에는 '서울 치안이 곧 대한민국 치안'이라는 서울 중심 사고가 있다.

 

하지만 부산과 경기에서 지휘관 생활을 한 조현오는 치안 활동이 공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2010년에는 부산총경과 광주 총경, 2011년에는 경기도에서 오래 근무한 총경이 경무관으로 승진한다. 그들은 조현오가 지방청장이던 시절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해낼 만큼 업무역량이 탁월했다.

 

그러나 경무관 경쟁에 밀린 사람들에게는 조현오가 자기 사람을 챙기는 것으로 보였을 테다. 조현오는 '자기 사람 챙긴다'는 시선을 경찰 개혁 차원에서 발탁 인사였다고 주장했다. 그 사람들 중 일부가 나중에 친해졌을 뿐이며 꽤 많은 사람이 조현오가 감옥에 있을 때 면회를 오지 않았다고 했다.

 


 

2011년 초, 민정수석인 권재진과 코리아나 호텔 중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권재진은 2010년 인사에 자기 의견이 반영되지 않아서 꽤 불쾌해 했다. 그런데 인사가 끝나고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가 불거진다.

 

권재진은 당시 "검찰이 차명계좌 사건을 수사 중인데 조 청장이 수사권 관련해서 그렇게 강하게 발언해도 되느냐"라고 물었다. 조현오는 언성을 높여 받아쳤다고 한다. 물론 조현오는 그런 분위기에서도 코스 요리를 모두 끝까지 먹기는 했다.

 

 

이후 '조현오는 통제되지 않는 사람이다', '조현오는 또라이다' 같은 소문이 나돌았다. 조현오는 이런 소문을 애써 막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이 경찰청장 지휘권 발휘에 도움이 됐다. 누구도 조현오를 건들지 않았다. 외부 청탁 전화도 뚝 끊겼다.

 

 


 

2011년 연말 두 번째 경찰 고위직 인사 내용을 보자. 이때 민정수석은 정진영이다. 당시 정진영은 승진 후보자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비롯해 각종 자료를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부동산 투기', '검찰 수사 중', '위장전입' 등을 언급하며 조현오가 낸 인사 안을 반대했다. 이때 조현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민정 자료 못 믿겠다."

 

정진영은 발끈하며 "민정수석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조현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민정수석실 자료에 직접 당한 피해자 아닌가요? 민정수석실에서 조현오가 조폭 행동대장과 의형제 맺어 유흥업소에 10억 투자하고 월 2500만 원씩 배당받았다고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했잖습니까?"

 

조현오는 원래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이때 '수사권의 상징'인 황운하가 경무관으로 승진한다. 또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가 눈에 띈다. 바로 2010년 승진한 경무관 김성근(58년생)이 1년 만에 치안감으로 승진한 것이다. 아무리 공정하다고 해도 이런 파격 인사는 자기 사람만 확실하게 챙긴다는 여론을 만들 수밖에 없다. 물론 조현오는 김성근과 처음부터 잘 알던 사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조현오가 김성근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경남지방경찰청 경비과장으로 있을 때다. 당시는 IMF 직후 현대자동차 사태로 노사관계가 악화하면서 경남지방경찰청도 나름대로 경비대책 준비단계에 들어갔다. 경비계장이 제출한 대책안을 본 조현오는 ‘경찰에 이런 인재가 있었나’ 싶었다고 한다. 문서 작성 능력이 돋보였던 경비계장이 바로 김성근이다. 김성근은 간부후보 35기로 입문해 경찰청 정보분실팀장을 지냈다.

 

정보와 경비는 밀접하다. 경비작전을 세울 때 집회 참가자 경로와 방어 중점 포인트를 찍으면 그만큼 부대 배치 등 경비 단계가 수월해진다. 조현오는 경남지방경찰청에 있을 때 김성근과 저녁을 먹으며 경험담을 나누곤 했다. 김성근은 일반인이 경험할 수 없는 인적 네트워크를 정보국 경험을 통해 꿰고 있었다.

 

김성근과 다시 만난 것은 2006년 12월 조현오가 경비국장이 됐을 때다. 경비국에는 경비과, 경호과, 항공과가 있다. 조현오는 경호과장으로 김성근을 요청했다. 다음은 당시 경비국에 근무한 한 직원이 들려 준 얘기다.


 

2007년 3월 12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조현오 출연이 예정돼 있었다. 주제는 'FTA 반대 시위, 또다시 과잉진압 논란'이었다. 경비과 담당 직원이 작가에게 질문을 미리 받아 답변을 준비했다. 3월 12일 출연 시각이 다가오자 경비과 담당 직원은 경비국장실에서 조현오 옆에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김성근이 경비국장실에 들어왔다. 김성근은 라디오를 허리춤에 차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어폰이 빠지지 않도록 볼에 테이프도 붙였다. 손석희가 조현오와 연결을 예고했다.

 

"경찰청의 조현오 경비국장을 연결하겠습니다. 여보세요."

 

"네, 경찰청 경비국장 조현오입니다."

 

(중략)

 

"그렇다 하더라도 집 떠나는 사람부터 막은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으냐는 지적인데요."

 

"저희 경찰에서는 경찰관 직무집행법 6조 범죄의 예방과 제지라는 그 근거 규정에 따라서 불법집회 참가하려는 시위대를 출발지에서 상경 차단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몇조라고 말씀하셨지요?"

 

"경찰관 직무집행법 6조의 범죄의 예방과 제지에 관한 규정 하고요…."

 

조현오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김성근은 손석희가 질문을 할 때마다 답을 적은 메모를 건네려 했다. 당시 이를 지켜본 직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경호과장이 경비과 업무로 준비해 오는 걸 보니 제가 담당자인데 부끄럽더라고요. 자기 일도 아닌데. 경비과장도 안 하는데…."

 

2010년 1월 조현오가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됐을 때 김성근은 정보1과장을 맡았다. 정보1과장은 집회나 시위 예상 정보를 파악해 대비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연초부터 농민회, 노동계가 그해 11월 11일에 있을 G20 행사 저지 조짐을 보인다는 정보가 올라왔다. 서울은 2008년 촛불집회 경험이 있어 서울 도심에 집회를 막았다. 2010년 조현오는 집회를 허용하는 쪽으로 나갔다. 이렇게 통제하면 연말에 더 폭발한다며 청와대를 설득했다.

 

조현오는 농민계와 노동계 대표도 직접 만나 설득했다. 당시 조현오 행보에 서울청장이 할 일이냐는 논란이 분분했다고 한다. 5월 12일 서울경찰청은 서울 청계광장에서 시중보다 싼 값에 판매하는 '우리 농산물 홍보 행사'를 마련한다. 경찰악대도 행사에 동원됐다. 경찰이 농민연합과 우리 농산물 홍보 협약을 맺고 직거래 구입에 나섰다. 2014년 쌀 시장 전면 개방 문제로 서울 도심에서 농민들이 집회를 벌였다. 9월 농민 대표들이 서울에서 집회를 하기 전 서울청장 구은수와 식사 자리를 했다. 이때 농민 대표로 참석한 사람이 "나는 조현오와 같은 함안 조 씨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2010년 8월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됐다. 경무관 승진 인사에 앞서 경찰청, 서울청 총경을 대상으로 성과에 따른 상위 30% 명단을 공개했다. 김성근도 포함돼 있었다. 경무관 인사를 단행하면서 조현오는 김성근을 서울청 정보관리부장에 배치한다. 경찰청 정보분실팀장, 서울청 정보과장 등 정보 중요 보직을 맡아 능력 검증과 더불어 조직 장악이 가능했다.

 

앞으로 조현오가 경찰 개혁을 비롯한 수사권 문제로 청와대를 설득해야 할 텐데 서울청 정보과장 출신이면 그런 인맥을 갖게 된다. 또 서울청도 경찰청처럼 정보분실을 두고 있다.

 

정보 형사는 정부기관, 사회단체, 지역별 담당 구역을 정하고 배치해 정보를 수집한다. 2012년 '안철수 사찰 논란'이 일었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이 안철수 뒷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사찰 논란'이라는 타이틀로 공격했다. 이런 논란에 대해 전직 경찰 정보과 출신들 생각은 달랐다. 경찰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관이다. 즉 경찰 정보 수집은 집회나 시위 관련 정보로 한정하는 게 목적에 어울린다. 그런데 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2조(직무의 범위)에는 '치안(public safety) 정보의 수집·작성 및 배포'를 수행한다고 나온다. 그래서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치안이나 정보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정보 수집 목적과 활용도다. 경찰은 당연히 위 규정을 확장해서 해석하려 할 것이고 언론은 축소해서 볼 것이다. 경찰 정보과 출신은 경찰이 전반적인 정보 업무를 모두 취급하는 한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다.

 

조현오는 2011년 김성근을 치안감으로 승진시키고 정보국장에 임명했다. 네티즌은 정권에 잘 보인 대가라고 했다.

 

조현오는 왜 김성근을 초고속 승진시킨 것일까. 경찰청 정보과는 보통 사무실에서 정보를 분석한다. 하지만 정보국장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정보국장은 자기가 직접 움직이기도 하지만 전국에 정보관을 동원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당시 조현오는 경찰관 시간 외 근무수당과 사건 수사비 현실화 문제에 매진했다. 사건 수사비는 범죄를 수사하고 범인을 추적하고 검거할 때까지 들어가는 경비를 말한다. 수사가 부족해 유류비, 통신비 등을 형사 개인에게 부담하라는 것은 국민에게 삥을 뜯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조현오는 수사 중 드는 비용을 모두 해결해줘야 반듯한 경찰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예산 확보를 위해서는 해당 부서가 논리를 마련하고 실무협의를 통해 진행하고 정보는 입장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보국 업무 범위는 포괄적이다.

 

당시 조현오는 '수사권 조정'이라는 다른 목표가 있었다. 그러려면 정보국장은 법률 개정 등을 위해 여야 중진을 만나야 한다. 한나라당은 황우여(47년생), 민주당은 박지원(42년생)이 원내대표였다. 1961년생 경찰대 1기 출신은 한국 나이로는 52세였다. 조현오는 여야 중진을 만나려면 나이가 좀 더 있는 간부후보 출신들이 낫다 판단했다.

 

경찰청장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여야 중진과 관계도 원만해야 했다. 조현오는 김성근에게서 이러한 자질이 돋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경무관이던 김성근을 승진시켜 정보국장으로 발령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현오는 김성근과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다. 바로 2007년 경비국장 때 청와대 경호실과 맞부딪힌 일이었다.

 

(다음 18화-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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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2005년 1월 27일 경찰청장 허준영은 조현오를 경무관으로 승진시켜 경찰청 외사관리관으로 발령 낸다. 외사관리관실은 1과에서 3과까지 있다. 외사1과는 외사기획 국제협력, 2과는 외사정보, 3과는 외사수사로 나뉜다. 허준영은 2월 3일 총경 인사를 단행하며 외사1과장 자리를 잠시 비워두라고 지시한다. 그 자리는 2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와 법정투쟁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는 총경 몫이라고 했다. 그 총경이 이철규였다.

 


 

강원도 출신인 이철규는 1981년 간부 후보 29기 출신으로 입학, 졸업을 수석으로 장식한 인재였다. 하지만 경찰 공직 생활은 자괴감과 함께 출발했다. 나이 든 경찰간부들이 젊은 검사를 모시는 모습을 접했고, 검찰은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힘든 요구를 하며 경찰을 통제했다. 1997년 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때 이철규는 혜화경찰서 정보과장이었다.

 

경정 신분인 이철규는 정권인수위원회에 파견된다. 당시 김대중이 내세운 공약 중에는 '경찰 수사 독자성 보장'도 있었다. 경찰청이 ‘경찰수사의 독자성 보장’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는 걸 검찰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경찰 지휘부가 과거와 달리 강력하게 추진하자, 얼마 후 경찰청 정보국장인 박희원과 특수수사과장인 박정원이 검찰에 구속된다. 경찰은 '수사권독립 요구에 대한 표적수사'라고 반발했으나 추진동력은 이내 소멸됐다.

 


 

이철규는 1998년 총경으로 승진했고, 2002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안산경찰서장에서 자리를 옮겨 분당경찰서 서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즈음 참여정부가 법무부 장관으로 강금실을 임명하자 검찰은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2003년 3월 9일 평검사들은 대통령 노무현과 공개토론에서 맞짱을 떴다. 그리고 검찰총장 김각영은 그날 대통령 비난 성명을 내고 사퇴한다.

 

3월 17일 검찰은 '권력형 비리 전담 수사기구'를 신설을 발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30일 분당경찰서장 이철규가 수뢰혐의로 구속된다. 2001년 안산서장 때 공사 비리 관련 진정이 들어온 사건을 2000만 원을 받고 무마했다는 혐의였다. 검찰은 뇌물을 주었다는 심 모씨 진술 말고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심 씨는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다. 당시 서울대병원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경찰서장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허위자백을 강요받고 2번 졸도하면서 사람을 못 알아보는 증상이 재발하였다'.

 

 

이처럼 검찰에서 허위자백만 받아내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참여정부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통해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하지만, 검찰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형사소송법 개정은 흐지부지됐다.

 


 

이철규는 2005년 5월 10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을 받고 사흘 뒤 경찰청 외사1과장으로 복귀한다. 당시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몇 가지 과제를 맡겼다. 그중에 하나가 외사관리관실을 외사국으로 승격시키고 20명인 해외 주재관을 50명으로 증원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주재관은 계급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경찰 계급은 전 세계가 비슷하다. 계급에 대한 존중도 마찬가지다. 직급이 있는 경찰이 외국으로 나가야 그 나라에서 직급이 있는 경찰을 만날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만큼 쉽게 풀 수 있다는 것이다.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가 김선일 씨를 살해하면서 해외 교민과 여행객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외국민보호'처럼 문서에나 채울 논리가 아니다. 바로 결정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이다. 외사국 증원 1차 관문은 ‘외교부 영사국’이었다. 외교부가 필요성을 동의해야 행정자치부, 기획재정부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 행정자치부는 공무원 정원을 결정하며 기획재정부는 예산을 편성한다. 물론 행정자치부와 기획재정부 역시 만만찮다. 두 부처 모두 습관적인 칼질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철규 과장은 조현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훗날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철규처럼 못한다"고 회상했다. 조현오는 이철규가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마당발'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이철규를 곁에서 지켜본 직원들은 그가 중앙부처를 드나들면서 관련 공무원 설득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한 공무원 아버지가 경주에 산다는 얘기를 들은 이철규는 그 지역 서장에게 따로 부탁했다. 그러면 서장은 공무원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이 경찰을 위해 애써 주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또 이철규는 또 부모님이 일찍 사망해 형에게 키워졌다는 기재부 공무원 얘기도 듣는다. 마침 그 형은 경찰공무원이고, 기재부 공무원은 전경 출신이었다. 이철규는 기재부 담당공무원이 전경으로 근무했던 부대장 신상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 부대장과 함께 찾아가 설득하기도 했다.

 

조현오는 허준영이 이철규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철규는 상관이 원하는 부분을 해결 할 줄 알았다. 허준영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외교관 출신이 느끼는 갈증이 있었다. 어느 날 이철규가 허준영에게 말했다.

 

"앨빈 토플러가 한국에 왔는데 경찰청으로 방문하도록 할 테니 한 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경찰청에 외빈이 오는 일은 많지가 않다. 리언 러포트 사령관이 허준영을 용산 미국기지에 공식 초청한 것에 대한 답례로 경찰청이 리언 러포트 사령관을 초대한 적은 있었다. 조현오는 리언 러포트 사령관 앞에서 PPT 화면을 가리키며 경찰업무를 영어로 브리핑했다.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앨빈 토플러 부부가 경찰청에 오니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앨빈 토플러는 이미 8일 동안 한국 방문 일정을 빽빽하게 짜 놓았다. 하지만, 이철규는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앨빈 토플러가 출국 직전 경찰청을 방문하도록 일정을 변경시켰다.

 

 

2005년 9월 중국 북경에서 허준영과 중국 공안부장 저우융캉이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3일 앞두고 중국이 일방적으로 회담 일정을 변경했다. 공안부장이 바쁘니 공안부 상무부부장을 만나라는 것이다. 연유를 알아보니 일정 탓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기관에서 중국 측에 한국 경찰청장은 차관급이라 중국의 부총리급인 공안부장이 직접 대화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고 훼방을 놓았다는 말이 나돌았다.

 

한국은 경찰청이 행정자치부 소속이다. 법무부 장관이 지휘하는 검찰총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지만, 경찰청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허준영과 조현오는 중국에 구걸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면담은 이뤄져야 했다. 주한중국대사를 통해 중국 공안에 항의를 전하도록 했고 비공식 라인으로 등소평 장남인 덩푸팡과 접촉했다. 이철규는 덩푸팡을 잘 아는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허준영은 한국 경찰청장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공안부장과 회담하고 공안부 주관으로 조어대에서 만찬을 한다.

 

조어대는 금나라 장종 황제가 낚시를 즐겼다는 곳으로 지금은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외국 국빈 공식 연회장이다. 허준영은 또 그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인터폴 국제회의에서 대표 발표를 한다. 그때 허준영을 수행한 조현오는 2010년 8월 경찰청장이 됐다.

 


 

그동안 이철규는 경무관으로 승진해 강원도 차장 등을 지냈고, 2010년 초 치안감으로 승진해 충북청장으로 있었다. 조현오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열정과 여야를 설득할 수 있는 정보국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충북청장이던 이철규를 정보국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2011년 6월 경찰의 수사개시, 진행권을 보장한 형사소송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

 

2011년 초 검경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을 무렵 부산저축은행을 비롯한 여러 저축은행들이 한꺼번에 영업정지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대로 된 심사 과정 없이 부동산 등 위험 부담이 큰 사업에 무분별한 대출을 해주다가 부실채권을 떠안으면서 사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관련 기관 감독이 소홀해 이 같은 부실을 키웠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조현오는 정보국장에게 진상 파악을 지시했다. 국회는 저축은행 사태 의혹을 파헤치겠다며 '저축은행 국정조사특위'를 구성했다. 국세청, 감사원 등 기관장들이 불려 나왔다. 경찰도 예외일 수 없었다. 보통 국회의원이 다그치면 기관장은 저자세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오히려 검찰 수사지휘를 문제 삼았다.

 

"2005년 10월 부산저축은행에서 발생한 575억 원 규모 부당 대출을 수사했는데 경찰은 관련자 8명을 전원 구속 의견으로 보냈지만 검찰이 1명만 구속의견으로 송치하도록 했다. 또 2007년 12월에도 검찰은 보해저축은행 부당대출 건을 불기소하라고 수사지휘를 했다."

 

저축은행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2011년 9월 18일 제일, 프라임, 에이스, 토마토, 파랑새 등 저축은행들이 잇달아 영업정지를 당한다. 여론은 빠르게 악화했다. 검찰은 9월 22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을 꾸린다. 그리고 10월 14일 제일저축은행 회장인 유동천을 구속 기소한다.

 

유동천은 강원도 출신으로 이철규 고향 중, 고교 선배였다. 검찰은 파랑새저축은행 대표, 토마토저축은행 대주주, 에이스은행 차주, 프라임 저축은행 대표 등을 잇달아 잡아들인다. 이철규는 11월 11일 치안정감인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2월 말, 검찰은 유동천에게 4000만 원을 받고 경찰 수사를 무마한 혐의로 이철규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한다. 이철규는 3월 1일 구속됐다. 2012년 10월 19일 1심 법원은 이철규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검찰은 바로 항소했다. 이철규는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13년 초, 검찰청 출입기자에게 연락을 받는다.

 

“이철규 청장님 혹시 (강원도) 원주 별장에 가본 적 있습니까?”

 

기자는 검찰청 기자실에 검사가 들어와 먼저 말을 꺼냈다고 했다. 강원도 원주별장 성접대 사건은 2013년 1월에 시작됐다. 김학의 당시 법무부 차관이 건설업자 윤중천 소유인 원주 별장에서 성접대를 받았는데 이를 촬영한 동영상이 있다는 첩보를 경찰이 입수한 것이다. 바로 조현오가 만든 경찰청 범죄정보과였다.

 

범죄정보과가 수집한 정보는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특수수사과, 각 지방경찰청 수사과 등에 이첩돼 내사 또는 수사로 이어지게 된다. 김광준 검사 비리 사건에 이어 두 번째였다.

 

박근혜 정부 초대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은 3월 21일 사퇴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카카오톡과 트위터에 성접대 리스트가 나돌았다. 김학의 전 법무차관을 비롯해 실명 10명이 적혀 있었다. 리스트에는 대한민국 마당발인 이철규도 모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건설업자 윤중천이었다.

 

리스트 10명 중 4명은 모두 강원도에서 근무했던 경찰 전직 수뇌부급들이었다. 네티즌들은 성접대 명단 중 다수를 차지하는 경찰을 비난했다. 이철규처럼 강원지방경찰청 차장을 지냈던 허준영은 “사실이면 할복자살하겠다”라고 받아쳤다.

 

이철규는 이를 유포한 네티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정보국장 출신인 이철규가 보기에 이러한 명단은 네티즌이 유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에게 쏠리는 비난을 경찰에 돌려서 초점을 흐리게 하려는 것으로 판단됐다. 경찰은 리스트를 최초 생산한 사람은 못 찾아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다.

 

검찰은 성접대 동영상 속 인물을 특정하지도 못했다. 검찰은 동영상 화질이 좋지 않아 알아볼 수가 없다며 김학의 등을 무혐의 처분한다. 얼마 뒤에 원주 별장 성접대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이 나서서 성폭력 혐의로 김학의를 고소했지만 검찰은 김학의를 다시 무혐의 처분한다.

 

2013년 10월 31일 대법원은 제일저축은행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 이철규에 대해 무죄를 확정한다. 하지만 이 뉴스는 ‘원주 별장 성 접대 리스트’에 묻힌다. 법원은 제일저축은행 회장인 유동천이 한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의심스러운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2008년 서울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에서 조현오, 이철규와 식사를 했다는 부분이 있다. 2008년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이었는데, 통상 자기 관할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다. 조현오는 이철규에게 2008년 서울에 온 적이 없다는 확인서를 하나 써준다.

 

 

 

하지만 조현오는 유동천보다 더한 ‘대한민국 거짓말쟁이’로 전락했다.

 


 

조현오는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해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이던 임경묵에게 그 내용을 들었다고 지목했다. 하지만 임경묵은 재판에 나와서 조현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임경묵이 한 진술을 받아들여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을 지어낸 것으로 판단했다. 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서울구치소에 재구속됐다. 조현오 재판에 참석했던 전직 형사과장은 판결에 유감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노인네들이 만나면 무슨 이야기 하겠어요? 학교 다닐 때 영어단어 외우던 이야기를 하겠어요? 시국 이야기만 합니다. 그거 해야 재미있고. 임경묵 씨가 서울청장을 만나려면 그 이상 정보가 있어야 대화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개연성을 고려해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조현오는 지휘관 시절 관할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부산청장 시절에는 서울로 온 적이 없었고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도 서울 땅을 밟은 적이 없다고 했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주변 사람들은 차기 경찰청장이 되려면 서울에서 권력층을 만나야 한다며 조현오에게 서울 방문을 권했지만 원칙을 지켰다고 했다. 조현오가 서울지방청장이 돼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임경묵이다.

 

 

자기 정보력을 화려한 언변으로 펼쳐놓는 사람을 늘 봤다면 허풍과 과장을 솎아낼 감각이 있을 테지만 초보자 조현오는 마냥 귀가 솔깃했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을 모조리 기억에 새기고자 했다. 이와 비슷한 감탄은 1998년 경남지방청 경비과장 시절에도 있었다.

 

(다음 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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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부하를 다루는 방식

 

조현오에게 현장검증 3차 장소는 청담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다. 길게 나 있는 복도 양편에 모든 공간이 룸으로 돼 있다. 조현오도 출소 후 이곳이 궁금해 처음 와봤다고 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수백 명이 면회를 왔고 대부분 경찰이었다.

 

조현오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향해 '자기 사람 잘 챙긴다'는 비판을 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걸핏하면 "경찰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얼핏 보면 규칙과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자기 사람 챙기면서 겉으로만 대의를 외친 듯하다.

 


 

실제 한국 경찰 정체성에 관심을 보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었다. 2005년 허준영은 한국 경찰 주체성을 파고들면서 수사권 독립을 강하게 외쳤다. 한국 경찰 마크로 참수리를 쓴 게 이때다. 그동안 한국 경찰 상징은 미국 흰머리 독수리였다. 게다가 참수리는 독수리와 달리 죽은 시체를 건들지 않는다. 이게 당시 경찰이 상징을 독수리에서 참수리로 바꾼 이유였다.

 

 

 

허준영에 이어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된다. 두 번째 외무고시 출신이다. 조현오는 회의시간에 경찰이 왜 존재하는지를 자주 물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보자.

 


 

2011년 12월 20일 대구에서 한 중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유서에는 그동안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학교 폭력으로 말미암은 자살이 잇달아 터지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됐다.

 

보통 이런 사건이 터지면 교육 당국이 대책을 세우고 경찰도 대책에 맞춘 대응 방안을 내놓곤 한다. 하지만, 조현오는 학교폭력 문제는 경찰이 주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러자 사회적으로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교권 침해를 비롯해 학교 폭력 해결 주체는 교사, 학생, 부모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더 큰 목소리를 냈다.

 

부정적인 것은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일선 경찰서에 올라오는 불만 중에는 주취자 신고를 112로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주취자, 노숙자 등에 대한 조치는 지방자치단체 몫이다. 경찰은 '범법행위'가 발생해야 나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조현오는 한국 경찰 구조가 이런 사고 방식을 만들어냈다고 판단했다.

 


 

조현오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 있다. "한국 경찰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한탄이었다. 한국에서는 경비작전은 국방부, 수사는 검찰, 정보는 국가정보원, 경호는 경호실에서 주도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경찰은 눈치를 보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을 하기 마련이다.

 

조현오는 "경찰이 왜 존재하냐"고 물었다. 자살하는 아이들 인권은 누가 지킬 것인지 따졌다.

 

교사가 성인 조직과 연계된 일진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조현오는 경찰청에 학교폭력전담TF팀을 만들어 대책을 만들도록 했다. TF조직은 행정학상 비정규 조직이다. 어느 한 기능이 담당하기 부적절하거나 일정 기간 특정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경우 TF조직을 만든다.

 

경찰청은 전국에 퍼져 있는 정보망을 통해 학교폭력 현장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경찰청 종합대책은 2012년 1월 26일, 정부 종합대책이 2월 7일에 나왔다. 조현오는 16개 지방청에 다니며 토론회 등으로 학교 폭력 문제를 중요 이슈로 만들었다. 경찰은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가 따라오도록 수레바퀴를 돌리는 동력을 만들었다. 경찰이 앞장서자 학교폭력 피해경험률이 2012년 초반 9.5%에서 2013년 하반기에는 1.8%까지 떨어진다.

 

 

경찰청에 여성청소년과가 생긴 것은 2005년이다. 그해 부산청장이던 어청수는 여성청소년과 업무로 학교전담경찰관(스쿨폴리스)을 운영한다. 하지만, 한 경찰이 맡는 학교 수가 너무 많아 세심한 관리는 버거웠다.

 

조현오는 스쿨폴리스 인력 확충과 동시에 학교폭력예방상담사 교육을 통해 스쿨폴리스가 학교폭력 문제에 전문성을 갖추도록 했다.

 

조현오는 일진 불량서클 해체만큼 선도에도 신경을 썼다. 제대로 훈방조치가 되는지 학교폭력점검대응반이 이를 점검했다. 2012년 경찰서부터 여성청소년과가 신설됐고, 2013년에는 각 지방청에도 여성청소년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13년 서울청장인 김용판이 서울경찰 100여 명을 스쿨폴리스로 전환했다. 여성청소년 업무가 발전하면서 경찰 인력자원이 몰리기 시작했다. 경찰 치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물꼬를 튼 것이 조현오다.

 


 

한 경찰은 조현오가 이슈가 생기면 문제 근본을 건드리는 데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경찰과 같은 계급 조직에 이 같은 문제 해결 방식과 호불호가 강한 성격이 결합하자 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현오가 물었다.

 

"경무과, 수사과, 정보과, 보안과 이런 것은 뭐 때문에 나눕니까?"

 

궁극적으로 경찰업무를 잘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어느 조직이나 칸막이 행정이 될수록 일이 바로 가기 어렵다. 다른 경찰 간부 역시 칸막이 행정에 대한 문제의식은 조현오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달랐다.

 


 

다른 이들은 칸막이 행정은 책임 문제만 정확하게 선을 긋고 종합적인 의견을 모아 일을 추진하면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울산남부서장을 할 때는 업무 분담과 상관없이 수사과장을 불렀다. 살인사건 현장은 보통 형사과장이 책임을 진다. 사건 원인 파악부터 대책 마련은 정보과와 경비과가 맡는다. 하지만, 조현오는 수사과장을 불러냈다.

 

물론 시간이 촉박한 사안이라면 가장 업무역량이 뛰어난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업무 능력이 부족한 직원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경찰 간부들은 일을 주기 전에 사람 능력에 따라 방향을 정하기도 하며,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에게는 간단한 일을 하나 맡겨놓고 어려운 일을 맡길 때 간단한 일을 핑계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조현오는 어땠을까.

 

고시계장 시절 조현오는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을 처음에는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나 불성실한 업무 태도와 실수가 되풀이되면 조현오는 아예 결제 라인에서 뺐다. 면박과 무안을 주는 정도는 보통보다 강했다.

 

울산남부서장일 때 조현오는 아침마다 참모회의를 열었다. 과장에게 업무 관련 질문을 했다. 질문은 알고 던지기도 했고 논리적으로 궁금하면 물어보기도 했다. 막힘없이 답하는 것은 업무를 잘 챙긴다는 뜻이다.

 

보통 서장들은 대답을 잘 못하는 과장에게 다음부터 잘하라고 넘기고 나서 담당 계장에게 내용을 확인한다. 반면 조현오는 과장에게 들어오지 말라 하고 계장을 보내라 했다. 이 광경을 본 직원은 '권위적 리더십의 전형'이라고 했다.

 

'조현오 방식'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찰은 계급 조직인만큼 수평 질서와 수직 질서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사회는 보고, 의전, 모양새, 형식 등을 유난히 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관직은 사유물이 아닌 만큼 업무를 모른다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직원들은 첫인상부터 '독일병정' 같은 조현오가 업무 역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리니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직원은 사람 좋은 것도 필요 없고 공무원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게 조현오 철학이라고 말했다.

 

 

 

 

서울종암경찰서장 시절에도 업무에는 칸막이가 없었다.

 

교인 헌금으로 지은 한 교회가 있었다. 목사가 명의를 자기 앞으로 돌려놓으면서 일반 신도와 목사 쪽 신도가 충돌했다. 주말에 양측에서 서로 예배를 보겠다며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런 일은 경비과장이 대책을 세우고 진압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형사계장에게 권한을 전폭적으로 위임했다. 형사계장이 경비과 전의경 100여 명과 정보과, 형사과 인원을 이끌고 지휘했다.

 

조현오는 지방청장이 돼서도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은 ‘없는 사람’ 취급했다. 대부분 지방청장은 참모인 과장을 의식해 무난하게 결제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조현오는 경비 지휘를 할 때조차 정보과장에게 작전을 맡겼다.

 


 

조현오 이미지 형성에 가장 영향을 미친 시기는 경찰청장 때다. 조현오는 인사정의, 부패척결 등을 내세우며 '7대 개혁과제'를 내놓았고 전담 TF팀을 구성했다. 한 고위간부는 TF팀이 해당 과에서부터 낮은 단계 협의가 이뤄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나온 내용을 국장이 청장에게 보고하는 체계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개혁’을 원했다. 하지만 계급이 높아질수록 변화를 싫어하는 성향을 보인다. 경찰이라는 계급조직 하에서 눈치 안 보고 개혁을 밀어붙일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적임자를 TF팀장 자리에 앉혔다. 조현오는 국장이 결제한 보고서가 맘에 안 들면 TF팀과 협의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조현오가 경찰 조직 질서를 수평과 수직 모두 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장 결제를 받은 보고서를 검토할 TF팀장 직위가 경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호불호가 강한 조현오 성격도 한몫을 했다.

 

관리자 한마디는 격려든 질책이든 조직 안에서 더 큰 의미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조직 안에서 불만이 번지기 시작했다. 경찰청 국장(치안감)이나 부장(경무관)에게서 나오는 한마디는 힘이 실려 더욱 퍼졌다.

 

 

조현오는 이듬해 TF팀장도 총경으로 승진시킨다. 조직 내 비판 세력은 이 역시 조현오가 챙긴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조현오에게 중요한 것은 업무 적합성이었다. 보직에는 그 업무에 맞는 사람을 앉혀놓으려 했다.

 

황운하를 경무관을 승진시키고 나서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배치한 것도 한 예다. 수사 기획관은 그 자리가 주는 무게로 봐서는 경무관 3년 차 정도가 어울리는 자리라고 보통 생각한다. 조현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경찰이기 때문에 그 업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현오가 좋아하는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 업무 역량 뛰어난 사람이었고 인사권을 쥐자 그런 사람들을 그 자리에 꽂았다.

 

그렇다면, 조현오가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업무역량이 얼마나 뛰어난 것일까?

 

먼저 2010년 정보국장을 지낸 이철규를 보자. 그는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자 충북청장에서 정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11년 말 조현오 체제에서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조현오와 3차 현장검증을 한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이 바로 이철규와 깊게 얽힌 곳이기도 하다.

 

(다음 16화-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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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한 참여정부 인사는 경찰청장 시절 조현오 행동을 ‘또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2011년 7월 21일 조현오가 해군기지 경비 문제로 제주를 방문했다. 조현오는 강정마을 관내 서귀포경찰서를 방문해 제주 해군기지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하는 불법행위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지시했다. 당연히 MB 눈에 들려는 행동으로 해석됐다. 서울지방경찰청장 시절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도 마찬가지다.

 

조현오는 언제부터 정치적 행보에 능했을까. ‘불법행위 엄단’ 발언은 울산남부서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관용차량을 의경이 운전했는데 교통신호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현오는 비상 상황이 아니라면 교통법규를 철저하게 지킬 것을 주문했다. 지시를 어기면 법규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했다.

 

2006년 12월 1일 경비국장으로 승진하면서 이 같은 특징은 도드라진다. 당시 한미FTA 집회를 비롯해 각종 시위가 줄을 이었다. 조현오는 집회 현장에서 불법행위자 검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접한다. 조현오는 실무자를 다그쳤다.

 

“왜 법대로 안 하느냐?”

“그렇게 못합니다.”

 

“왜 못하냐?”

“시위대와 경찰이 엉키면 사고가 납니다.”

 

“왜 사고가 나냐?”

“집회·시위 관리를 전·의경이 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집회·시위는 사회적 갈등이 폭발해서 생긴다. 그동안 집회·시위 관리 주체는 20대 초반인 전·의경이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대치한 전의경을 국가 권력으로 보고 공격적으로 모욕을 주곤 한다. 자극을 받은 전·의경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채 진압에 들어가면 사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게 무리한 추적이다. 진압 상황에서 시위대가 경찰을 피해 도망가면 일단 법 위반 행위가 시정된 것으로 보면 된다. 무리하게 끝까지 쫓아가 검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감정 통제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진압대는 방어용 방패를 공격적으로 쓰기도 한다.


조현오의 근본적 사고

 

2005년 허준영이 경찰청장일 때 한미FTA 반대 집회 중에 농민 2명이 사망한다. 조현오는 법대로 조치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고민한 끝에 전·의경 폐지를 해결책으로 내놓는다. 조현오에게 집회·시위 관리 모델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직업 경찰관 부대가 집회·시위를 관리한다. 대략 100개 중대로 중대마다 250명 정도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버스, 승합차, 자동차로 이동하며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나는 집회·시위를 관리한다.

 

조현오는 전·의경 폐지를 주장했고 이를 대체할 경찰 인력 협상을 기획재정부와 진행한다. 하지만, 2008년 ‘촛불집회’가 터지면서 전·의경 폐지 불가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현오가 경비국장을 하던 시절 기자들은 예정된 집회·시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묻곤 했다. 조현오는 “불법행위는 엄단하겠다”라고 답했고, 기자들은 “이번 주 족족 잡아들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2011년 7월 21일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해군기지 경비 문제로 제주를 방문했다. 조현오는 강정마을 관내 서귀포경찰서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하는 불법행위에 단호하게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한 매체를 통해 서귀포경찰서 밖에 있던 주민도 실시간으로 이 정보를 접했다. 흥분한 주민은 조현오가 탄 버스를 에워싸며 이동을 막았다. 7분 정도 흘러서야 버스는 움직일 수 있었다.

 

조현오는 제주를 떠나기 전 서귀포에 있는 한 횟집을 들렀다. 제주경찰청장인 신용선을 비롯해 제주지방청 참모들이 모였다. 조현오는 식사 전에 이번 불법사태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경찰청장 한마디에 제주지방청 참모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제대로 회를 먹는 사람은 조현오뿐이었다.

 

 

 

사람들은 서귀포경찰서에서 조현오 발언은 청와대를 의식한 것으로 봤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자 차명계좌 발언을 했고 이런 발언으로 MB 눈에 들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모양이라는 분석도 뒤따랐다. 하지만, 이 같은 단정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시기 조현오가 청와대와 마찰을 빚는다는 보도도 눈에 띄기 때문이다. 조현오가 서울청장이던 2010년 2월 국제범죄수사대가 창설됐는데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국회예산정책처가 발간한 ‘2014 회계연도 재정사업 성과 평가’ 보고서를 보면 2015년 4월 기준 지역경찰(지구대·파출소 근무 인력)은 정원(4만 5490명)보다 1705명이 적다. 반면, 경찰청과 경찰서 근무 인력은 정원(6만 5579명)보다 848명이 많다. 이 통계를 접한 언론은 민생안전 현장 일선을 책임지는 지구대·파출소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고 질타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부족한 일선 경찰서 인력을 더 줄여서 지방청 인력을 늘리는 방향으로 구조를 조정한 이가 조현오다. 국제범죄수사대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1991년 조현오가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당시 대공과장)이던 때부터 시작한다.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은 조현오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보직이기도 하다. 보안과는 이른바 간첩을 잡는 곳이다. 그리고 경찰서 보안과에는 외사를 담당하는 직원들도 소속돼 있다. 아침마다 보안과 직원은 보안 및 외사첩보를 작성했다. 보고서 출처는 노조 소식지나 신문 등이었다.

 

일본 야쿠자, 중국 삼합회, 외국 조직폭력단, 인신매매단, 간첩 등을 막고 검거하려면 일선 경찰서에 배치된 1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는 불가능했다. 첩보를 입수한다고 바로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조현오는 경찰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방청 인력이 많고 파출소 지구대 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국회에서 경찰 지휘부를 압박하는 단골 메뉴였다. 그러다 보니 경찰도 비난을 의식해 한 발씩 나가지 못했다.

 

권한을 갖게 된 조현오는 2009년 경기지방경찰청부터 조직을 개편했다. 안산 등 외국인 밀집 지역에서 활동하는 외국 조폭 등을 관리하려면 경찰서 단위 외사 인력으로는 대처에 한계가 있었다.

 

각 경찰서에서 첩보를 담당하는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모두 지방청으로 불러들여 경기지방경찰청 외사계를 만들었다. 통상 ‘외사분실’이라고 부른다. 실무를 맡은 계장(경정) 중에 총경 승진자를 배출하도록 하면 동기부여가 된다. 승진 의욕이 있는 유능하고 젊은 직원도 선발된 외사경찰이 활동하면서 효과가 나타났다.

 


 

청와대와 마찰 빚은 까닭

 

이듬해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계장급이 대장을 맡는 국제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은 조현오 행보 때문에 난처했다. 민정수석실은 검찰을 앞세워 외국인 범죄를 대처할 계획이었다. 2009년 10월 청와대 민정수석실 주도로 ‘외국인 조직범죄 합동수사본부’가 출범했다. 그런데 경찰이 먼저 치고 나간 모양새였다. 민정수석실이 경찰청장 강희락에게 경고성 전화를 했다는 보도가 나갔다. 물론 이후 이야기는 없다.

 

 

민정수석실은 바로 조현오에게 전화해 질책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경찰청 허가를 받으면 지방청에 계 단위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다고 받아쳤다. 질책성 전화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돼서도 눈치를 보지 않는 행보를 이어갔다. 경찰 인사에 주도권을 쥐었고 검찰과 맞서기도 했다. 민정수석은 차명계좌 발언 수사를 언급하며 조현오를 압박했다. 조현오는 이에 언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과연 조현오 행동과 발언 배경에는 MB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까. 사람들은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될 욕심으로 치밀하게 계산해 ‘차명계좌 발언’을 했다고 여긴다. 차명계좌 발언에 대해 한 전직 참모는 계획적이라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고 무심코 나왔다면 조직 안에서 파워가 커지다 보니 거리낄 것이 없어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고 짐작했다.

 

연재 시작부터 밝힌 대로 조현오 행위를 선의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우선 조현오가 경찰청장 시절 터진 ‘함바 비리’ 사건에 대처한 방법을 살펴보겠다.

 

건설현장에 있는 식당을 ‘함바집’이라고 부른다. 유상봉은 함바집 운영권과 인사 청탁 명목으로 전임 경찰청장인 강희락을 비롯해 고위 공무원에게 금품을 건넨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2010년 말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함바 비리에 전·현직 경찰 간부가 대거 엮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총경 급 연루자가 상당수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 지휘부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전직 간부들은 보통 검찰 수사를 지켜보든지 조용히 정보나 감찰을 동원해 내부적으로 진상 파악을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조현오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조현오는 총경 이상 간부 560명에게 자진신고를 지시했다. 유상봉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만났는지, 금품·향응을 받은 적이 있는지 등을 적어 내라고 했다. 자진신고를 하면 최대한 선처하지만 검찰 수사나 보도를 통해 연루 사실이 밝혀지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가혹하고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은 수사와 구형을 담당하는 검찰이 보기에 황당했다.

 


 

조현오의 경찰 사기 진작 방식

 

조현오 발언을 이해하려면 그가 지휘관이었다는 점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지휘관은 조직 구성원 사기 진작에도 책임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를 가나 분위기가 중요하다. 조직 구성원의 99.999%는 함바 비리 사건과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그 99.999%가 위축되고 자괴감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조현오는 지휘관이 손 놓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유상봉과 관련된 경찰이 극소수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관련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자 감찰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검찰에서 수사하는데 감찰까지 풀어서 구성원을 다시 조사하면 조직 사기가 추락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자수’를 지시한 것이다. 유상봉과 접촉을 인정한 경찰은 41명이었다. 유상봉에게 금품을 받은 경찰은 2명이었는데 내용물은 각각 와인과 홍어였다.

 

조현오가 지휘관이 된 2008년부터 조직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적은 3번 정도를 꼽을 수 있다. 2007년 12월 경기도 안양에서 발생한 혜진·예슬 양 사건이 터지고 경찰은 거센 비난을 받았다. 국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은 2008년 촛불집회였다.

 

2008년 부산청장이던 조현오는 경찰 사기 진작을 위해 밤새 범인 검거 소식이 들리면 아침마다 상과 상품을 들고 현장에 나갔다. 낮에도 검거 소식이 들리면 바로 전화하며 치하했다.

 

 


 

노무현 차명계좌 발언의 배경

 

조현오가 서울청장이던 2010년 고 노무현 대통령 사망 1주기를 앞두고 있었다. 경찰도 노무현 죽음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사망 1주기 즈음 열리는 집회 참여자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자기 일에 대한 정당성에 의심을 품기 마련이다. 이는 조직 내 사기 문제로 이어진다. 2011년 3월 서울청 2층 강당에서 조현오는 기동대 지휘관을 모아 교육을 진행했다.

 

내가 만난 한 전직 청장은 자기가 강의를 했다면 “막는 게 우리 숙명”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했다. 조현오는 5월부터 경찰 사기가 떨어진다면 그 분위기가 그해 11월에 있을 G20 서울정상회담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현오는 원고 없이 강의했다. 대한민국 경찰이 얼마나 유능했는지 계속 강조했다.

 

그러다 며칠 전에 어디선가 들은 내용이 떠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1주기 집회 참가자보다 이를 막는 경찰에게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뒷받침할 근거였다. 그리고 ‘차명 계좌’ 발언이 이어졌다. 조현오는 경찰도 뇌물 받으면 바로 파면당하고 형사입건당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휘관으로서 부대 사기 진작 노력을 아래와 같이 약속하며 강의를 마친다.

 

“여러분 사기 관리를 위해서 저도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근무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였고, 특히 전·의경 사기관리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억압하고 규정하는 이런 것은 안 하려고 그럽니다....(중략)... 다른 식으로라도 사기 관리를 어떻게 하면 더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그해 8월 조현오가 경찰청장으로 지명되자 암투가 시작됐다. 당시 강연을 찍은 동영상이 유출됐고 KBS가 이를 보도하면서 조현오는 ‘공공의 적’이 됐다. 2011년 말 문재인을 비롯한 친노 정치인들이 검찰청 앞에서 조현오를 처벌하라는 1인 시위를 벌였다. <나꼼수>도 왜 중앙지검 형사1부는 조현오를 부르지 않느냐며 성토했다.

 

당시 조현오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사회적 비난과 별개로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의성’과 ‘허위 인식성’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의성’은 보통 선거에서 후보자끼리 비방을 할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가 ‘노무현 차명계좌’ 이야기를 진짜로 믿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제 조현오와 마지막 현장검증 장소로 가보겠다. 바로 서울 청담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다.

 

(다음 15화-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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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2011년 10월 22일 오전 조현오는 전날 밤 인천 길병원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을 보고받는다. 장례식장 앞에서 조직폭력배끼리 단순 충돌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일 저녁 SBS 뉴스는 전혀 다른 영상을 내보냈다. 화면에서는 인천 조폭 130여 명이 도심 한복판에서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조현오는 허위·축소 보고를 받은 것이다.

 

격노한 조현오는 감찰과장에게 바로 전화했다. 경찰청 감찰팀은 인천남동경찰서 사무실 CCTV를 면밀하게 살폈다. 112 신고 접수가 되자 경찰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파악했다. 조사가 끝난 23일 인천남동경찰서장이 직위 해제됐다. 남동서 형사과장, 강력3팀장, 상황실장, 지구대 순찰팀장 등도 중징계를 받았다.

 

조현오는 “경찰이 조폭에게 위축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질책했다. 이에 현장에 출동한 강력3팀장이 반박하는 글을 내부 게시판에 올린 게 외부로 공개됐다.

 

‘저는 사무실에 있다가 상황실 연락을 받고 테이저건 등 장비를 챙겨 장례식장 앞에 도착했습니다. (중략) 저는 현장 책임자로서 동료 직원과 더불어 흉기를 소지한 범인을 제압하고 피해자를 구조 후송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하 생략)

 

경찰 주장은 이렇다. 상황실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했고 조폭이 집결하자 경고 방송을 보냈다. 형사 5명이 칼부림을 한 가해자를 제압했고 집결한 조폭과 대치했다. 칼에 찔린 피해자를 후송하고 사건 현장을 채증 했다. 그런데 SBS가 형사를 조폭으로 잘못 보도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에 경찰청 감찰팀이 반박했다. 경찰이 아무리 활약했다 해도 초동 대응 실패를 덮을 수 없다고 했다. 2011년 10월 21일 현장 상황은 어땠을까.

 


 

인천 폭력조직인 크라운파 조직원 부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빈소가 인천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이어 빈소에 인천 조직폭력배들이 문상을 오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신간석파 K 씨와 크라운파 L 씨가 만났다. L 씨가 K 씨를 향해 빈정거린 게 발단이었다. 각자 자기 조직원을 소집하면서 장례식장이 소란스러워졌다.

 

 

10시 18분 1차 112신고가 접수됐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장례식장 엘리베이터 앞에 몰려 있다는 내용이었다. 인천남동경찰서 강력반과 상황실이 동시에 신고를 접수했다. 조폭은 지구대 파출소 경찰은 겁을 내지 않는다. 조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경찰은 강력계 조폭 담당 형사다. 하지만, 최초 신고 당시 강력팀 형사는 출동하지 않았다. 현장에 먼저 도착한 쪽은 구월지구대 순찰차였다. 순찰차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며 그냥 사태를 지켜보기로 한다.

 

10시 51분 조폭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싸운다는 2·3차 신고가 들어온다. 순찰차가 추가로 도착했다. 지구대 순찰팀장은 조폭끼리 싸움에 지나치게 관여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 현장에서 순찰차 두 대가 철수한다.

 

11시 18분 조폭들이 싸우니 빨리 와 달라는 4차 신고가 접수된다. 11시 45분에 출동한 인천남동경찰서 형사 5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미 100여 명이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K 씨가 L 씨를 흉기로 찔렀고 형사들이 K 씨를 제압했다.

 

조현오는 사건 현장에 형사 5명만 있었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집단폭력 대처 매뉴얼에는 사건 발생 즉시 관할 서장에게 보고해 초기에 경찰을 집중 투입하여 전원 검거하도록 돼 있다. 출동 인원만으로 제압하기 어렵다면 상황실에 기동타격대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관할 경찰서 인력으로 진압이 어렵다면 지방청에 요청할 수도 있다.

 

지방청은 폭력계와 광역수사대를 운영한다. 폭력계는 폭력조직을 수사·관리하며, 광역수사대는 경찰서 2개 이상이 관련된 사건을 처리하고자 만든 것이다. 조현오는 활용 가능한 경찰력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 채 공권력이 무력한 모습을 보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대대적인 감찰이 진행됐다. 감찰 결과 강력3팀장은 형사과장에게 보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팀장이 과장에게 상황 보고를 했다면 맡은 임무는 다한 것이다. 강력3팀장에 대한 징계는 일단 거두게 된다.

 


 

조현오는 폭력조직과 전쟁을 선포한다. 조폭에게 인권은 고려하지 않겠다고 했고 조폭이 폭력을 행사하면 총기라도 과감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겨레>는 10월 30일 자 ‘조현오 경찰청장의 처신 경박하고 무책임했다’는 사설을 통해 조현오가 ‘조폭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여론을 의식한 조치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1990년대 형사과장 시절부터 총기 사용 발언을 했다.

 

조현오는 1990년 부산에서 경찰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은 해운대와 항만이 있다. 항만은 마약이 들어오는 통로이며 마약과 조폭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여름 치안 로드맵 중심에는 해운대가 있다.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에도 조폭은 있다. 부산 최대 폭력조직은 ‘칠성파’였다.

 

조현오가 형사과장이던 때도 ‘조직 폭력과 전쟁’은 한참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형사들 사이에는 총을 던져서 범인을 검거한다는 한탄이 떠돌았다. 검거 과정에서 총을 쏘면 손해배상과 감찰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칠성파 두목 이강한을 비롯해 간부급 조폭이 구속된다. 그렇다고 조직이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이강한은 1999년에 출소한다. 그 사이 신흥 조직인 ‘신20세기파’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칠성파와 영역 다툼이 본격화됐다. 유흥업소 등을 놓고 벌인 주도권 다툼은 1992년 7월 칠성파 조직원이 20세기파 간부를 살해하면서 불거졌다.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가 소재로 삼은 사건이다.

 

2006년 1월 신20세기파가 보복에 나섰다. 부산 내 반 칠성파 세력을 규합해 60여 명이 흉기를 들고 칠성파가 모인 부산 영락공원 장례식장에 난입했다.

 


 

이 사건 이후 2년이 흐른 2008년 조현오가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온다. 조현오는 경찰에게 조폭 검거 과정에서 위협을 느끼면 과감하게 쏘라고 지시한다. 일선 경찰에게는 놀라운 발언이었다. 한 경찰관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누가 책임지겠다고 하나요? 주변에 다 책임 안 지려는 사람들뿐인데….”

 

당시 이강한이 부산에 있는 한 호텔 사우나에서 목격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현오는 부산지역 사우나에 조폭 출입을 금지했다. 전신 문신은 일반 시민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어서 경범죄 처벌 사유가 됐다. 형사들은 목욕탕에서 나오는 조폭에게 5만 원 과태료 스티커를 건네며 사우나에 오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사우나에 조폭을 출입금지 하는 조치는 이전 부산 청장들도 했던 단속 방법이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총기 사용과 더불어 조직 자금줄을 추적해 차단한 것이다. 조폭은 오락실 수익금 상납금을 바탕으로 조직을 관리했다. 다른 자금 확보 방법으로는 백일잔치, 돌잔치, 환갑잔치, 고희연, 생일잔치 등을 활용했다.

 

 

 

잔치는 보통 호텔에서 열렸고 조폭은 관할 구역 영업소 사장에게 초대장을 돌렸다. 형사들은 하객을 대상으로 참석 경위와 강압 여부를 조사했다. 조현오는 조폭 행사는 경찰이 확실하게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

 

호텔에서 행사를 하더라도 민간인처럼 조용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 건장한 남자가 깍두기 머리에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매고 90도 각도로 절하는 모습은 위협적이었다. 조현오는 조폭들이 위력을 과시하면 공권력을 발휘했다.

 

행사에는 부산지방청 광역수사대, 강력수사계, 폭력수사계, 기동대, 관할 경찰서 강력팀 형사 등을 배치했다. 조현오는 조폭을 상대하면서 일선 경찰서, 지방경찰청 단위로 분산된 형사 인력으로 효율적인 관리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경찰 조직 내 최강 부대인 경찰 특공대를 호텔 행사장에 투입했다. 경찰특공대는 일선 경찰관들이 버거워하는 일들, 가령 조폭이 집단으로 흉기를 휴대해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 지방청장 허가를 받아 출동한다. 조현오 지시를 받고 출동한 특공대원은 어떤 일을 했을까.

 

경찰특공대는 조폭이 타고 온 차를 검문하기 시작했다. 차 안에 칼이나 야구방망이 같은 흉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경찰직무집행법에 따르면 도검류는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된 도검류에는 레이저로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다.

 

 

조현오는 다른 청장에게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언행이 있었다. 한 참여정부 인사는 경찰청장 시절 조현오 언행을 언급하며 ‘또라이’라고 비난했다. 2011년 1월 불거진 ‘함바 비리’ 사건에서 조현오가 취했던 방법도 이전 경찰청장들과는 전혀 달랐다.

 

(다음 14화-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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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12화. 조현오의 조직 장악 비결은 '감찰'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장으로 취임하면서 첫 지휘관 생활을 했다. 울산은 팽창하는 도시로 교통사고와 강력 사건이 잦았다. 사건·사고를 줄이고자 조현오가 주목한 곳은 검문소였다. 검문소에서 인적사항을 미리 노출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조현오는 검문소를 직접 챙겼다. 자리를 비운 직원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청문감사관이 나섰다.

 

청문감사관은 일선 경찰서에서 감찰과 감사를 총괄하는 보직이다. 감사 대상은 행정적인 일상 업무다. 감찰 대상은 현장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행위가 된다. 즉 개인 행위와 관련한 비위는 감찰 영역이다. 단, 사무감사 중 발견된 계약관계 등으로 말미암은 배임이나 횡령 같은 비위는 감사에서 처리한다. 물론 지휘관이 상황에 따라 감사 쪽 업무라도 감찰 부서를 활용하는 일은 자주 있다.

 

조현오는 새벽에 파출소를 순시했다. 당시 관용 차량은 의경이 운전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관내 지리를 익힐 겸 의경을 옆에 태우고 직접 운전했다. 차량 이동 중 무전으로 112신고가 접수되면 현장으로 바로 차를 돌려 초동조치를 확인했다.

 

 

 

업무를 세심하게 챙기자 서울종암경찰서장 시절 직원들은 조현오를 ‘조순경’이라고 부르곤 했다. 조현오는 경찰서 과장들에게 주어진 감독순시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울산남부서장 시절 하루는 전국 일제검문검색이 진행됐는데 조현오는 과장에게 현장에서 직원 근무를 지켜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나이가 한참 어린 과장 한 명이 근무한 것처럼 거짓말했다. 조현오는 과장을 다그쳤다.

 

“지방청에 보고해서 징계받을래? 아니면 일주일 동안 교통외근과 근무복 입고 심야음주운전단속 할래?”

 

과장은 현장 단속을 택했다. 과장이 도로에서 현장 단속을 하자 다른 직원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조현오는 2006년 경찰청 감사관을 지낸다. 감사관 아래로 감찰과장과 감사과장을 뒀다. 당시 감사과에 순경 출신으로 강직하며 다부지게 일을 잘하는 직원이 있었다. 2008년 조현오가 치안감으로 승진하여 부산지방경찰청이 됐을 때 그 직원은 은퇴를 몇 년 앞둔 총경이었다. 조현오는 2009년 그에게 경기청 청문감사담당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부탁을 받는 순간 ‘일을 많이 시킬 텐데…’라는 생각이 스쳤다고 한다.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방청에서 경무과 기획계는 치안 수요에 맞게 인력을 배정하는 일을 한다. 경찰관 전출은 경무과 인사계 업무다. 조현오는 당시 경기지역 경찰에게 업주와 통화를 금지했다. 이를 위반하면 징계를 내리겠다고 강조했다. 감찰은 업주와 통화한 경찰에 대해 1~3단계 등급을 정해 전보 조치했다. 또 첩보를 바탕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경찰은 다른 경찰서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진술서와 근거를 남겨 항의가 들어오면 사유를 밝혔다.

 

생활안전과 업무에도 감찰 기능이 섞였다. 조현오는 경기청에서 성과주의를 내세웠다. 하지만, 성과주의는 과잉 단속 부작용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폐단을 막는 일도 감찰에서 맡았다.

 

조현오가 경기청으로 오기 전, 2009년 1월 평택 쌍용자동차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간다. 쌍용자동차 운명은 법원과 채권단 손으로 넘어갔다. 4월 사측이 발표한 구조조정안은 전체 인력의 37%를 해고하는 것인데, 희망 퇴직서를 제출하지 않은 976명을 정리 해고한다. 5월 22일부터 쌍용차 노조는 평택 공장을 점거해 파업을 시작했다.

 

6월 25~26일 정리해고에서 벗어난 직원과 임직원 3000여 명이 공장 안에 진입하여 노조와 충돌하며 부상자가 속출한다. 대규모 경찰병력이 투입돼 양쪽이 접촉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사측을 비롯해 누구도 공장 안팎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도록 했다. 수십 개 중대가 교대로 근무했다.

 

경비국 처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사전에 기강을 잡는 것이다.

 

오랜 기간 경비 근무를 하면 음주, 졸음 같은 사고가 생기기 마련이다. 쌍용자동차 사태 때는 그런 사고가 없었는데 그만큼 조직이 장악됐다고 볼 수 있다. 밤마다 무전으로 근무 확인을 점검하는 것도 감찰이 맡은 일이었다. 여기에 국정감사보고서까지 조현오는 청무감사담당관에 넘겼다. 조현오가 끌어들인 총경은 모든 일 처리가 야무졌다.

 

이듬해 조현오는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된다. 조현오는 총경에게 1년만 더 함께 일하자고 부탁한다. 당시 그는 은퇴를 앞두고 있어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조현오가 서울에서도 ‘성과주의’를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묵묵하게 뒷받침한 총경 덕이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밀어붙였을 듯한 조현오도 경찰청장이 될 때까지 참았던 것도 있다. 경찰 문화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보통 사람 시각에서 기본적인 것들이 경찰 조직 안에서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일할 때와 쉴 때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 관할 경찰서장은 휴일이 없었다. 서울종로경찰서장은 북한산을 앞에 두고도 등산 한 번 하기 쉽지 않았다.

 

 

업무에 소홀하다는 질책을 받을까 걱정했다. 승진에 불이익을 받을까 싶어 휴가를 가지 못하는 직원도 많았다. 대부분 직원은 정시에 퇴근하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조현오는 감찰을 풀어 정시 퇴근 문화를 정착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청장 시절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당시 경찰청장 지휘방침과는 달라 경찰청 감찰 등을 통해 간섭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청문감사담당관은 열심히 했지만, 인사권을 가진 경찰청에서 견제를 받아 본인 희망과 관계없이 2010년 경찰대학 교육과정으로 발령 난다. 경무관이 되는 필수 과정이었지만 은퇴를 고작 1년 남짓 앞둔 총경에게는 불필요했다.

 


 

2010년 8월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통상 청장이 바뀌면 중요 보직은 자기 뜻을 잘 파악하는 사람으로 채우기 마련이다. 정기인사 때 교체하는 보직 가운데 청장이 중요시하는 자리는 인사·감찰·경무·정보과장 등이다. 조현오는 감찰과장을 비롯해 주요 과장을 바꾸지 않았다. 업무역량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참모 중에는 청장이 지시하면 대답만 하고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름대로 이해관계를 따지기 때문이다. 조현오는 청장이 되기 전부터 지방청이 하달한 공문을 읽지도 않고 넘어가는 직원을 수없이 봤다. 청장 지시를 적극적으로 따르게 하려면 자극이 필요했다. 조직에서 감찰은 효과 좋은 침 같은 역할을 한다.

 

 

감찰은 언론 보도에 대응하기도 한다. 2011년 4월 20일 광화문 사거리를 비롯해 서울시내 11개 교차로에 별다른 홍보 없이 3색 신호등이 작동했다. 5월 7일 3색 신호등이 설치된 서울시청 앞 교차로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언론은 신호 체계를 지적했다. 문제 파악을 위해 교통과에 감찰 직원이 투입됐다.

 

물론 잘 돌아가는 기능까지 감찰을 동원해 관리하지는 않았다. 조현오는 해당 기능 보고를 바탕으로 정보 기능도 동원해 사실을 교차 확인했다. 다만, 해당 기능 국장이나 과장이 청장 지시에 미온적이라면 여유롭게 기다려 주는 일은 없었다. 경비과에서 발생한 전의경 가혹 행위 관련 지시가 대표적이다. 이럴 경우는 가차 없이 감찰을 동원했다.

 


 

10월 21일 길병원 조폭 난투극 사건을 이튿날 SBS가 보도한다. 인천시 구월동 길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폭력조직끼리 유혈 난투극이 벌어진 사건이다. SBS는 당시 현장에 시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강력반 형사 5명이 있었지만 유혈 난투극을 막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시민은 경찰의 허술한 초동 대응으로 두 시간 넘게 불안에 떨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조현오는 방송을 접하고 바로 감찰과장에게 전화했다. 본청 감찰팀이 바로 출동해 최초 112신고를 접수한 시점부터 사무실 CCTV를 면밀하게 살폈다. 감찰 조사가 모두 끝난 23일 인천남동경찰서장이 직위 해제됐다. 남동서 형사과장, 강력3팀장, 상황실장, 지구대 순찰팀장 등도 중징계됐다. 조현오는 “조폭 겁내는 경찰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그러자 26일 현장에 출동했던 강력3팀장이 조폭 앞에서 비굴하지 않았다며 경찰 내부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이 글은 온라인에서 급속하게 퍼졌다. 조현오가 제대로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괜히 엄한 경찰만 잡았다는 댓글이 달렸다. 원인은 자신에게 있으면서 남 탓하며 징계만 하는 청장이라는 사설까지 나왔다. 조현오는 결국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대한 징계를 거둔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다음 13화-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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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암투

 

2011년 6월 20일 아침 조현오는 청와대에서 급한 호출을 받는다. 청와대 조정회의에 출석하라는 것이었다. 조현오는 수행자 없이 청와대에 갔다. 회의에는 대통령실장 임태희, 민정수석 권재진, 법무부장관 이귀남, 검찰총장 김준규 등이 참석했다.

 

김준규는 검찰총장을 하면서 큰 위기를 두 번 맞는다. 2010년 4월 MBC 수첩>이 ‘검사와 스폰서’를 방영한다. 부산에 한 건설업자가 25년 동안 검사에게 금품과 향응, 성접대 등을 제공한 내용이었다. ‘스폰서 검사’ 파문으로 김준규는 대국민 사과에 이어 자체 개혁안을 발표한다. 개혁안 가운데 하나가 비리 검사를 수사하는 ‘특임검사제’ 도입이었다.

 

이 특임검사가 임용된 첫 사건이 바로 2010년 11월 ‘그랜저 검사’ 사건이다. 한 건설업자가 검사에게 사건을 부탁하면서 승용차 구입비를 대납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위기가 바로 청와대 조정회의였을 테다. ‘형사소송법 196조’를 개정하고자 국정 운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날 열린 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평검사회의는 검찰 근간을 흔드는 긴급 현안이 있을 때마다 열린다. 2003년 참여정부가 검찰 출신이 아닌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할 때도 평검사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법률 개정은 검사 작성 조서가 지닌 증거 능력을 제한하는 쪽으로 진행됐다. 검찰이 자백만 받으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컸다. 하지만, 검찰은 평검사회의를 열어 반발하며 형사소송법 312조를 지켜낸다.

 

 

법률 개정은 국회의원 입법, 정부 제출 등 다양한 통로로 이뤄진다. 형사소송법 196조 법률 개정 논의는 2010년 2월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가 시작했다. 그해 10월 법원과 검찰 제도 개혁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으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압수수색을 진행한다. 검찰을 향한 정치권 반감은 깊어졌다.

 

사법제도개혁특위는 특별소위원회를 구성해 2011년 3월 10일 여야 합의안을 발표한다. 주요 개혁안으로 경찰수사권 독립이 있었다. 이 발표는 검찰 출신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이 주도한다. 검찰 출신이 경찰을 돕는 상황이지만, 조직 입장에서는 검찰과 경찰이 붙는 모양새가 됐다. 세력이 막강한 검찰에 맞대응하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다. 경찰 안에서는 차라리 수사권 독립을 차기 대선 공약에 집어넣는 게 낫다는 계산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현오 생각은 달랐다.

 


 

본격적으로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변경을 위한 특별소위원회가 가동됐다. 경찰과 검찰이 벌이는 신경전은 언론을 탔다. 조현오는 5월 26일 전국 지방청장 화상회의에서 총경 이상 간부에게 “직을 건다는 자세로 임하라”라고 말했다.

 

김준규 검찰총장이 주재한 검사장급 이상 간부회의에서 즉각 반응했다. 대검 차장인 박용석은 “조직을 위해 직을 건다는 것은 조폭이나 하는 말”이라고 받아쳤다.

 

5월 31일 검사인 윤대해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경찰 수사개시권 명문화와 관련해 깊은 우려와 분노를 금할 수 없다”라고 적었다. 그동안 특별소위원회 단위에서 논의가 진행됐지만 조문 합의안은 나오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동료 의원 반대가 심하다. 그 배후에는 법원과 검찰이 있다. 국회의원을 조종하고 협박하고….”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작업은 총리실로 넘어간다. 총리실에서 검찰과 경찰 수사권 조정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경찰은 수사구조개혁 팀원이, 검찰은 검사들이 참석했는데 윤대해 검사도 눈에 띄었다.

 

논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6월 19일 서울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개시권 명문화 반대 분위기를 조성한다.

 

6월 20일 청와대에 국정운영자들이 모였다. 6월 14일 대통령 이명박은 총리실이 적극적으로 조정에 나설 것을 지시한다. 이명박은 “경찰이 법적 근거도 없이 수사하는 현실을 개선하라”라고 말했다. 김준규는 평검사회의 견해를 되풀이했다.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은 결코 고칠 수 없으며 경찰 수사개시권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정회의를 마친 조현오는 경찰청으로 돌아와 말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BH(청와대) 최종 합의안에 서명하고 왔다.”

 

조현오는 196조 조항에 ‘경찰의 수사개시와 진행권’을 확보했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가 합의한 내용에는 ‘경찰은 모든 수사에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는 조항도 있었다. 게다가 검사 지휘에 관한 사항은 ‘법무부령’으로 정하기로 했다. 조현오는 ‘모든 수사’에 경찰 내사가 포함되지 않고 법무부령 제정도 경찰과 합의하기로 국정운영자와 약속했다고 내세웠다. 조현오는 그 약속을 실제 믿었다. 하지만, 경찰은 ‘순진한 발상’이라며 비난했다.

 


 

합의안을 발표한 이튿날인 6월 21일 검찰 반응에 경찰 내부 분위기가 격앙됐다. 대검 기획조정부장 홍만표는 “조 청장 주장대로라면 구두합의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후 국무조정회의에 참석한 대통령실장 임태희, 안전행정부장관 맹형규, 법무부장관 이귀남은 국회에서 내사는 수사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확인해준다. 국회도 청와대 조정안에 나온 ‘모든 수사’에 대한 해석을 제한한다. 민주당 의원인 박지원은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모든’을 삭제하고 검사 지휘는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 근거가 돼야 한다는 게 여야 공통의견이라고 밝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찰청 나름대로 애쓴 결과였다.

 

6월 30일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법무부령’은 ‘대통령령’으로 바뀌었다. 검찰은 잇달아 자리에서 물러나며 개정안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대검 기획조정부장 홍만표를 비롯한 검사장들이 먼저 물러났다. 검찰총장인 김준규도 사표를 냈다. 후임 검찰총장이 바로 한상대다.

 

 

한상대 검찰총장에게 경찰과 ‘대통령령’을 만드는 작업을 맡겨졌다. 그 해 12월 27일 대통령령이 시행되기까지 검찰에 비난 여론은 계속됐다. ‘벤츠 여검사’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11월 30일 이창재 안산지청장을 특임검사로 임명했다. ‘그랜저 검사’ 이후 2번째다.

 

여검사 A씨는 모 변호사 부탁을 받고 다른 검사에게 사건을 청탁한 의혹이 있었다. A씨는 내연관계였던 모 변호사에게 벤츠 승용차 등을 받아 ‘벤츠 여검사’로 불렸다. “국산차는 이제 저리 가라”라는 비난이 인터넷을 달궜다. 여검사 A씨는 12월 7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된다.

 


 

이듬해 검찰수사가 시작된다. 2012년 2월 28일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가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경찰청 정보국장으로 국회의원 설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날 검찰은 한나라당 의원 주성영을 ‘성매매 의혹’으로 소환 통보한다.

 

주성영은 사법개혁을 주도한 자신에게 검찰이 앙갚음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현오가 4월 퇴임하자 검찰 조사가 시작됐다.

 


 

조현오는 경찰청장 재직 당시 경찰청 범죄정보과와 지능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검찰로서는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경찰에 ‘김광준 검사’ 사건이 걸려든다. 한 기자는 ‘김광준 검사 사건’을 두고 “유사 이래 경찰이 검찰을 향해 날린 최고의 빙엿”으로 표현했다.

 

이 사건은 2008년 12월 9일 금융다단계를 하던 조희팔이 회사 돈을 챙겨 중국으로 밀항한 데서 시작된다. 당시 투자자가 3만여 명 피해액은 4조 원 정도로 추정됐다. 오래전부터 금융감독원이 유사수신행위를 포착하고 수사당국에 정보를 줬으나 수사에 진척이 없었다. 오히려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수사당국과 조희팔 사이 유착관계였다. 뇌물 혐의로 수많은 경찰이 사법처리됐고, 조희팔을 비호하는 세력으로 권력층 이름이 나돌기 시작했다.

 

수사는 두 갈래로 진행됐다. 중국에 있는 조희팔을 잡아들이는 것과 조희팔이 국내에 숨겨둔 자금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범죄정보과에서 조희팔 관련 정보를 넘겨받아 수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검사 김광준이었다. 서울고검 검사인 김광준의 차명계좌를 발견한 것이다. 자금줄은 조희팔 측근이었다.

 

김광준은 중앙지검 특수3부장 검사였다. 특수부는 청와대가 맡긴 사건을 담당하는데 당시 환경재단 최열을 수사하고 있었다. 당시 최열은 MB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사업에 걸림돌이었다. 여론은 당연히 ‘표적 수사’를 의심했다. 검찰은 최열과 주변인 계좌를 샅샅이 뒤졌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최열은 주변에 차명계좌가 뭔지 묻곤 했다. 그런데 오히려 김광준이 차명계좌로 검은돈을 받았다는 정황을 경찰이 포착한 것이다.

 

경찰이 김광준을 조사했다는 사실은 11월 8일 보도된다. 당시 검찰총장 한상대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검 중수부장인 최재경이 이미 보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상대는 김광준 검사와 통화해 사정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11월 8일 일부 매체 기자가 김광준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 김광준은 중수부장인 최재경에게 기자 대응 요령을 묻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최재경은 강하고 단호하게 실명을 보도하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대처할 것을 조언한다. 이튿날 한상대는 경찰 반발에도 특임검사 카드를 꺼낸다.

 

황운하는 당시 특임검사인 김수창이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는 점은 동의했다. 당시 검찰은 경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찰이 김광준 사건 조사 과정에서 소홀한 부분이 있다면 경찰이 파고들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11월 중순 서울 동부지검 성추문 검사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동부지검에서 실무수습 중이던 검사가 여성 피의자를 검사실로 불러 성관계를 한 것이다.

 

검사인 윤대해는 24일 내부 게시판에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기소배심제, 검찰 직접 수사 자제, 상설특검도입 같은 검찰 개혁안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은 모두 대검 지침으로 가능했다. 지침으로 가능한 일을 개혁안이라고 들고 나왔으니 한쪽에서는 ‘위장 개혁’이라는 빈정거림이 불거졌다. 끓는 기름에 불을 붙인 것은 윤대해가 동료에게 보내려던 문자메시지였다.

 

‘○○아. 대해다... 내가 올린 글이 벌써 뉴스에 나오고 있구나.... 우선 어떤 방안이든 검찰이 조용히 있다가 총장님이 발표하는 방식은 그 진정성이 의심받는다... 내가 올린 개혁방안도 사실 별거 아니고 우리 검찰에 불리할 것도 별로 없다..... 언론에서 그런 평검사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고 이후 일선 청에서 평검사회의를 개최하고 서울중앙은 극적인 방식으로 평검사 회의를 개최하고.... 이런 분위기 속에 총장님이 큰 결단을 하는 모양으로 가야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받은 이는 언론사 기자였다. 예정된 서울중앙지검 평검사 회의는 이 사건 여파로 취소된다.

 

검사들은 오히려 총장 집무실로 몰려가 사퇴를 촉구했다. 한상대가 중수부장인 최재경을 감찰한 게 발단이었다. 한상대는 김광준과 최재경이 주고받은 문자 내용을 문제 삼는다. 한상대는 검찰 위기를 중수부 폐지 카드로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최재경은 반대파였다. 결국, 한상대는 2012년 11월 30일 최재경을 손보려다 축출당하는 모양새로 사표를 냈다. 하지만, 한상대는 자기 임기 동안 검사가 경찰서에 출두해 조사받는 것은 막았다.

 

‘카톡’

 

스마트폰 카카오톡에 한 여성 사진이 올라왔다. 성추문 검사 사건 피해 당사자였고 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 추적 결과 검사 10명을 포한한 검찰 수사관이 해당 전산망에 접속한 게 확인됐다. 검찰도 더는 여론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해 마지막 날, 현직 검사가 최초로 경찰서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는다.

 

 

경찰 구성원이 검경 관계를 다시 인식한 계기는 형사소송법 법률 개정보다 검찰과 경찰이 다투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찰 조직에서 조현오가 추진해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황운하는 어떤 견해를 드러냈을까. 그는 2011년 6월 20일 조현오가 청와대 합의안에 서명을 했을 때도, 경찰이 만족하지 못하는 대통령령을 만든 직후에도 조현오 퇴진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런 황운하에게 왜 이택순 퇴진은 요구해놓고 조현오는 그냥 두느냐는 질문을 하는 이도 있었다.

 

“조현오는 최선을 다해 진일보한 조정안을 만들려는 과정에서 문제가 비롯됐고 내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의견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나가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경찰은 황운하 발언 배경에는 조현오식 조직 관리법이 있다고 했다. 조현오는 조직 내 비판 세력을 항상 곁에 둬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그러면서 비판 세력 상당수를 자기편으로 돌아서도록 했다. 황운하 기용도 결국 조현오식 ‘포퓰리즘’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분석은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파퓰리즘 전략으로 조직을 장악했다는 조현오가 정작 경찰 직원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다음 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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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인사정의 실현, 전·의경 가혹행위 근절, 경찰과 업주 통화 금지, 성과주의 등 개혁과제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전국으로 확대했다. 조직 정비에 해당하는 일이다. 물론 경찰청장 업무가 안으로 향하는 조직 정비만 있는 게 아니다. 밖으로는 조직 처지를 적절하게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경찰은 밖으로 견해를 드러낼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내무부 직속기관이었던 경찰이 독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은 것은 1991년 경찰청으로 승격되면 서다. 이때부터 경찰은 치안에 대해 자율권을 보장받는다. 경찰 조직 위상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수사권이다. 조현오는 수사권에 대해 어떤 견해를 밝혔고 대응했을까. 그보다 먼저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기 전까지 경찰과 검찰 관계는 어땠을까.

 


 

젊고 자부심 강한 경찰대 출신 수사과장이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피의자는 검찰 출신이었고 피해자는 일반 서민이었다. 경찰은 구속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담당 검사는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것을 지시했다. 수사과장이 거부하자 부장검사가 불렀다. 연륜이 풍부한 형사팀장이 걱정이 돼 수사과장과 부장검사실로 동행했다.

 

당시 형사소송법 제196조(사법경찰관리) 제1항에는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었다. 부장검사는 수사과장에게 반성문 제출을 요구하며 ‘잘못’이라는 문구를 넣도록 지시했다. 부장검사와 수사과장 사이에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사팀장은 점점 불안해졌다.

 

경찰에 대한 검찰 특권 중에는 일반적인 수사 지휘권과 더불어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구속하는 유치장에 대한 감찰권이 있다. 만약 경찰이 검찰 눈 밖에 나면 유치장 감찰을 핑계로 경찰서에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형사팀장이 나섰다.

 

“부장님. 우리 과장님은 수사가 처음입니다. 비록 과장이지만 수사를 잘 모르십니다. 제가 반성문을 쓰겠습니다.”

“그럼 과장 대신 팀장이 쓸 겁니까?”

“네. 쓰겠습니다. 과장님 나가게 해주십시오.”

 

수사과장이 나가고 부장검사와 단둘이 남게 된 팀장은 살며시 물었다.

 

“부장님. 도대체 이게 왜 필요합니까?”

“주임검사가 반성문을 못 받아왔으니 내가 받아놓아야 다른 검사에게 ‘이런 것도 못 받는 너희들이 무슨 검사냐’라고 질타할 때 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릴게요. 검사들에게는 사경(사법경찰관) 불러다가 혼냈더니 잘못했다고 말하더라고 교육하면 되잖아요.”

 


 

조현오는 1990년 경찰서 과장으로 입문했다. 하루는 검사와 면담 약속을 했다. 그렇게 검찰청으로 찾아간 조현오를 검사는 방 밖에서 한 시간 기다리게 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갔더니 검사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반면 유치장 감찰을 온 검사는 수사과장 자리에 앉았다. 수사과장 중에는 당연한 듯 자리를 내주는 이도 있었다. 한 경찰은 ‘형사소송법 망령’이라고 한탄했다.

 

경찰과 검찰은 서로 다른 기관이지만 검사는 경찰에게 협의 공문 없이 지시했다.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보고 싶으면 경찰서로 오면 된다. 하지만, 검찰은 굳이 경찰에게 피의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이를 ‘피의자 신병인치’라고 한다. 경찰은 검찰이 지원을 요구할 때마다 업무를 제쳐두고 가야 했다. 검찰에 파견된 경찰은 검사가 미행이나 단속을 지시하면 수행하는 일을 맡았다.

 

형사과장이던 조현오는 검찰과 부딪히기보다는 자기 일에 신경 쓰자는 쪽이었다. 권위적인 모습으로 따지면 경찰 조직도 검찰과 다를 바 없었다. 경찰서 생활안전과장도 일선 파출소에 가면 파출소장 자리에 앉는 일이 허다했다.

 


 

경기지방경찰청 시절 조현오에게 참모 역할을 하는 형사과장이 이런 질문을 했다.

 

“오락실 업주와 물 한 잔도 마시지 말라는 등 강경 조치를 펴는 이유가 뭡니까?”

 

“경찰 부패를 도려내면 국민이 경찰을 지지할 것이고 그런 여론을 바탕으로 수사권을 가져올 거야.”

 

형사과장 생각은 달랐다. 경찰 조직에 힘을 실을 방법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직 부패를 도려내는 것보다 첩보가 들어오는 큰 사건에 바로 달려들어 국민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사권 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1999년 DJ 정부 때다. 그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며 행동으로 옮긴 이는 황운하였다. 서울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이던 황운하는 검찰에 파견된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렸다.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를 고려하면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반란이었다. 그 후 집중 논의 끝에 경찰청장 김광식은 검찰에 파견된 전국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린다.

 

그 후에 검찰은 정보국장인 박희원을 수사했다. 이후 경찰청장을 지낸 이무영, 이팔호, 최기문은 수사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다음 경찰청장이 외교관 시절부터 조어 능력이 탁월했던 허준영이다. 허준영은 경찰청에 수사권 문제만 전담하는 ‘수사구조개혁팀’을 만든다. 허준영이 하는 말은 종종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지구 상에 없는 게 두 가지, 다케시마와 대한민국 경찰 수사권.”

 

“지금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권검책경(權檢責警), 권한은 검찰에 있고 책임은 경찰이 진다인데, 이제는 권경책경(權警責警), 즉 수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경찰이 질 테니까 그에 따른 권한도 경찰에 줘야 한다.”

 

2005년 9월 8일 허준영은 한 손님이 청장실로 오는데 외사관리관 조현오에게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청장실로 들어온 손님은 세계적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와 그의 아내였다. 허준영은 유창한 영어로 “한국 경찰 최대 현안이 수사권 조정”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찰에게 수사권이 없다는 말에 앨빈 토플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라고 답했다.

 

 

 

당시 수사권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경찰청 차장인 최광식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최광식은 검찰 수사로 불명예 퇴진한다. 허준영도 퇴임하고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으나 때마침 선거법 위반으로 수사를 받으면서 공천을 받지 못한다. 이후 경찰청장인 이택순, 어청수, 강희락은 수사권에 대해 별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2010년 8월 30일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조현오 목표는 형사소송법 196조 개정이었다. 법을 개정하려면 국회의원 도움이 필요했다. 이 같은 작업은 경찰 모든 조직 부분에서 노력해야 했지만, 특히 정보 파트 역할이 중요했다. 경찰청과 서울지방경찰청은 모두 정보 분실을 운영한다. 정보 형사들을 정부기관, 사회단체, 지역별 담당구역을 정하고 배치해서 정보 수집 기능을 수행한다.

 

조현오는 충북청장이던 이철규를 2010년 9월 7일 정보국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2010년 12월 3일 서울청 정보과장인 김성근을 경무관으로 승진시키고 서울청 정보관리부장을 맡긴다.

 

 

비슷한 시기에 검찰 수사가 시작된다. 2010년 10월 5일 국회의원 11명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된다. 이른바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이다.

 

청목회(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는 2003년 결성된 단체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청원경찰이 회원인데, 이들은 처우 개선을 목표로 청원경찰법 개정안 통과를 추진했다. 회원이 낸 특별회비로 6억 5000만 원을 만들어 2008년 말부터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를 시작했다.

 

청목회 회원 가족과 친지 이름으로 진행한 ‘쪼개기 후원’을 통해 국회의원에게 전달된 돈은 500만~3000만 원 정도였다. 2009년 4월 발의된 청원경찰법 개정안은 2009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다.

 

검찰 수사에 여야 국회의원은 깊은 반감을 드러냈다. 당시 국회에서는 검찰이 국회의원을 옥죄려고 힘없는 사람들이 낸 소액 후원금까지 정치자금법으로 묶어서 건드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고 한다.

 

2011년 6월 30일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재석 의원 200명 가운데 찬성 175명, 반대 10명, 기권 15명이었다. 이 같은 압도적인 표차는 경찰청이 국회 내 반 검찰 정서 분위기를 잘 파고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형사소송법 개정안 내용을 보자.

 

형사소송법 196조 2항에 ‘사법경찰관은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인식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사실과 증거에 관하여 수사를 개시·진행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경찰도 수사 주체로 인정을 받았기에 수사에 들어가면 검사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

 

이 조항만 보자면 경찰에게 매우 유리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3항은 ‘사법경찰관리는 검사의 지휘가 있는 때에는 이에 따라야 한다.’ 고 나온다. 경찰에 수사개시권이 있더라도 검사 지휘를 따라야 하므로 경찰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현오는 3항에 ‘검사의 지휘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기 때문에 대통령령을 잘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도 3항에 크게 반발했다.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령과 법무부령 차이는 만드는 주체다. 대통령령은 대통령 주재로 각 부처 장관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만든다. 반면 법무부령은 법무부가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 검찰 입장에서는 법무부 장관은 통상적으로 검찰 출신이라 법무부령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현오는 ‘검사의 지휘에 관한 형사소송법 시행령(대통령령)’ 제정을 앞두고 다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협상 테이블에 나갈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전남 곡성서장인 장하연과 전북 정읍서장인 진교훈이 뽑혔다.

 

국무총리실 주재로 경찰과 검찰 측에서 대표들이 나와 논쟁이 시작됐다. 한쪽에서 문구를 수정하면 다른 한쪽에서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됐다. 경찰 쪽에서는 제2조(수사지휘의 원칙)에 ‘검사는 사법경찰관을 존중하고’라는 문구를 원하면 검찰은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제5조(수사지휘의 방식)로 넘어가자 경찰은 검사가 사건 지휘를 할 때는 서면 또는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검찰은 “긴급한 경우에는 전화나 구두로 지휘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경찰이 다시 “그렇게 전화나 구두 상으로 지휘할 때 다시 서면이나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는 방식으로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받아쳤다.

 

국무총리실은 경찰과 검찰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 강제 조정안을 내놓았고 대통령령은 12월 27일 시행됐다. 의욕적으로 진행한 법률 개정이었지만 경찰 조직 안에서 평가는 박했다.

 


 

2012년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첫 번째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였다. 혐의는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였다. 두 번째는 ‘룸살롱 황제’ 이경백이었다. 이경백은 1심 판결 전까지 자신과 유착한 경찰을 불지 않았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자신과 유착된 경찰을 불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2012년 3월 말부터 이경백과 유착한 현직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18명이 옷을 벗었다. ‘비리 경찰’ 뉴스가 언론을 장식했고, 이경백은 2012년 7월 17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

 

조현오는 퇴직하고 나서 차명계좌 발언으로 재판을 받았다. 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을 받고 서울구치소로 들어갔다.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사자 명예훼손죄’에서 8개월 실형이 타당한 양형인지 제기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조현오가 간 곳에는 이경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경백은 2013년 5월 11일 집행유예 기간에 불법 사설 카지노를 운영한 혐의로 구속됐다. 조현오는 구치소 안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 무작정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는데 조현오는 해고 노동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루는 면회 대기 중 옆에서 누군가 조현오를 불렀다. 고개를 돌렸더니 누군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김광준 검사입니다.”

 

(다음 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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