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제복 12화. 조현오의 조직 장악 비결은 '감찰'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장으로 취임하면서 첫 지휘관 생활을 했다. 울산은 팽창하는 도시로 교통사고와 강력 사건이 잦았다. 사건·사고를 줄이고자 조현오가 주목한 곳은 검문소였다. 검문소에서 인적사항을 미리 노출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조현오는 검문소를 직접 챙겼다. 자리를 비운 직원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청문감사관이 나섰다.

 

청문감사관은 일선 경찰서에서 감찰과 감사를 총괄하는 보직이다. 감사 대상은 행정적인 일상 업무다. 감찰 대상은 현장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행위가 된다. 즉 개인 행위와 관련한 비위는 감찰 영역이다. 단, 사무감사 중 발견된 계약관계 등으로 말미암은 배임이나 횡령 같은 비위는 감사에서 처리한다. 물론 지휘관이 상황에 따라 감사 쪽 업무라도 감찰 부서를 활용하는 일은 자주 있다.

 

조현오는 새벽에 파출소를 순시했다. 당시 관용 차량은 의경이 운전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관내 지리를 익힐 겸 의경을 옆에 태우고 직접 운전했다. 차량 이동 중 무전으로 112신고가 접수되면 현장으로 바로 차를 돌려 초동조치를 확인했다.

 

 

 

업무를 세심하게 챙기자 서울종암경찰서장 시절 직원들은 조현오를 ‘조순경’이라고 부르곤 했다. 조현오는 경찰서 과장들에게 주어진 감독순시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울산남부서장 시절 하루는 전국 일제검문검색이 진행됐는데 조현오는 과장에게 현장에서 직원 근무를 지켜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나이가 한참 어린 과장 한 명이 근무한 것처럼 거짓말했다. 조현오는 과장을 다그쳤다.

 

“지방청에 보고해서 징계받을래? 아니면 일주일 동안 교통외근과 근무복 입고 심야음주운전단속 할래?”

 

과장은 현장 단속을 택했다. 과장이 도로에서 현장 단속을 하자 다른 직원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조현오는 2006년 경찰청 감사관을 지낸다. 감사관 아래로 감찰과장과 감사과장을 뒀다. 당시 감사과에 순경 출신으로 강직하며 다부지게 일을 잘하는 직원이 있었다. 2008년 조현오가 치안감으로 승진하여 부산지방경찰청이 됐을 때 그 직원은 은퇴를 몇 년 앞둔 총경이었다. 조현오는 2009년 그에게 경기청 청문감사담당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부탁을 받는 순간 ‘일을 많이 시킬 텐데…’라는 생각이 스쳤다고 한다.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방청에서 경무과 기획계는 치안 수요에 맞게 인력을 배정하는 일을 한다. 경찰관 전출은 경무과 인사계 업무다. 조현오는 당시 경기지역 경찰에게 업주와 통화를 금지했다. 이를 위반하면 징계를 내리겠다고 강조했다. 감찰은 업주와 통화한 경찰에 대해 1~3단계 등급을 정해 전보 조치했다. 또 첩보를 바탕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경찰은 다른 경찰서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진술서와 근거를 남겨 항의가 들어오면 사유를 밝혔다.

 

생활안전과 업무에도 감찰 기능이 섞였다. 조현오는 경기청에서 성과주의를 내세웠다. 하지만, 성과주의는 과잉 단속 부작용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폐단을 막는 일도 감찰에서 맡았다.

 

조현오가 경기청으로 오기 전, 2009년 1월 평택 쌍용자동차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간다. 쌍용자동차 운명은 법원과 채권단 손으로 넘어갔다. 4월 사측이 발표한 구조조정안은 전체 인력의 37%를 해고하는 것인데, 희망 퇴직서를 제출하지 않은 976명을 정리 해고한다. 5월 22일부터 쌍용차 노조는 평택 공장을 점거해 파업을 시작했다.

 

6월 25~26일 정리해고에서 벗어난 직원과 임직원 3000여 명이 공장 안에 진입하여 노조와 충돌하며 부상자가 속출한다. 대규모 경찰병력이 투입돼 양쪽이 접촉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사측을 비롯해 누구도 공장 안팎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도록 했다. 수십 개 중대가 교대로 근무했다.

 

경비국 처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사전에 기강을 잡는 것이다.

 

오랜 기간 경비 근무를 하면 음주, 졸음 같은 사고가 생기기 마련이다. 쌍용자동차 사태 때는 그런 사고가 없었는데 그만큼 조직이 장악됐다고 볼 수 있다. 밤마다 무전으로 근무 확인을 점검하는 것도 감찰이 맡은 일이었다. 여기에 국정감사보고서까지 조현오는 청무감사담당관에 넘겼다. 조현오가 끌어들인 총경은 모든 일 처리가 야무졌다.

 

이듬해 조현오는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된다. 조현오는 총경에게 1년만 더 함께 일하자고 부탁한다. 당시 그는 은퇴를 앞두고 있어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조현오가 서울에서도 ‘성과주의’를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묵묵하게 뒷받침한 총경 덕이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밀어붙였을 듯한 조현오도 경찰청장이 될 때까지 참았던 것도 있다. 경찰 문화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보통 사람 시각에서 기본적인 것들이 경찰 조직 안에서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일할 때와 쉴 때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 관할 경찰서장은 휴일이 없었다. 서울종로경찰서장은 북한산을 앞에 두고도 등산 한 번 하기 쉽지 않았다.

 

 

업무에 소홀하다는 질책을 받을까 걱정했다. 승진에 불이익을 받을까 싶어 휴가를 가지 못하는 직원도 많았다. 대부분 직원은 정시에 퇴근하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조현오는 감찰을 풀어 정시 퇴근 문화를 정착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청장 시절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당시 경찰청장 지휘방침과는 달라 경찰청 감찰 등을 통해 간섭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청문감사담당관은 열심히 했지만, 인사권을 가진 경찰청에서 견제를 받아 본인 희망과 관계없이 2010년 경찰대학 교육과정으로 발령 난다. 경무관이 되는 필수 과정이었지만 은퇴를 고작 1년 남짓 앞둔 총경에게는 불필요했다.

 


 

2010년 8월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통상 청장이 바뀌면 중요 보직은 자기 뜻을 잘 파악하는 사람으로 채우기 마련이다. 정기인사 때 교체하는 보직 가운데 청장이 중요시하는 자리는 인사·감찰·경무·정보과장 등이다. 조현오는 감찰과장을 비롯해 주요 과장을 바꾸지 않았다. 업무역량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참모 중에는 청장이 지시하면 대답만 하고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름대로 이해관계를 따지기 때문이다. 조현오는 청장이 되기 전부터 지방청이 하달한 공문을 읽지도 않고 넘어가는 직원을 수없이 봤다. 청장 지시를 적극적으로 따르게 하려면 자극이 필요했다. 조직에서 감찰은 효과 좋은 침 같은 역할을 한다.

 

 

감찰은 언론 보도에 대응하기도 한다. 2011년 4월 20일 광화문 사거리를 비롯해 서울시내 11개 교차로에 별다른 홍보 없이 3색 신호등이 작동했다. 5월 7일 3색 신호등이 설치된 서울시청 앞 교차로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언론은 신호 체계를 지적했다. 문제 파악을 위해 교통과에 감찰 직원이 투입됐다.

 

물론 잘 돌아가는 기능까지 감찰을 동원해 관리하지는 않았다. 조현오는 해당 기능 보고를 바탕으로 정보 기능도 동원해 사실을 교차 확인했다. 다만, 해당 기능 국장이나 과장이 청장 지시에 미온적이라면 여유롭게 기다려 주는 일은 없었다. 경비과에서 발생한 전의경 가혹 행위 관련 지시가 대표적이다. 이럴 경우는 가차 없이 감찰을 동원했다.

 


 

10월 21일 길병원 조폭 난투극 사건을 이튿날 SBS가 보도한다. 인천시 구월동 길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폭력조직끼리 유혈 난투극이 벌어진 사건이다. SBS는 당시 현장에 시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강력반 형사 5명이 있었지만 유혈 난투극을 막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시민은 경찰의 허술한 초동 대응으로 두 시간 넘게 불안에 떨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조현오는 방송을 접하고 바로 감찰과장에게 전화했다. 본청 감찰팀이 바로 출동해 최초 112신고를 접수한 시점부터 사무실 CCTV를 면밀하게 살폈다. 감찰 조사가 모두 끝난 23일 인천남동경찰서장이 직위 해제됐다. 남동서 형사과장, 강력3팀장, 상황실장, 지구대 순찰팀장 등도 중징계됐다. 조현오는 “조폭 겁내는 경찰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그러자 26일 현장에 출동했던 강력3팀장이 조폭 앞에서 비굴하지 않았다며 경찰 내부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이 글은 온라인에서 급속하게 퍼졌다. 조현오가 제대로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괜히 엄한 경찰만 잡았다는 댓글이 달렸다. 원인은 자신에게 있으면서 남 탓하며 징계만 하는 청장이라는 사설까지 나왔다. 조현오는 결국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대한 징계를 거둔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다음 13화-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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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암투

 

2011년 6월 20일 아침 조현오는 청와대에서 급한 호출을 받는다. 청와대 조정회의에 출석하라는 것이었다. 조현오는 수행자 없이 청와대에 갔다. 회의에는 대통령실장 임태희, 민정수석 권재진, 법무부장관 이귀남, 검찰총장 김준규 등이 참석했다.

 

김준규는 검찰총장을 하면서 큰 위기를 두 번 맞는다. 2010년 4월 MBC 수첩>이 ‘검사와 스폰서’를 방영한다. 부산에 한 건설업자가 25년 동안 검사에게 금품과 향응, 성접대 등을 제공한 내용이었다. ‘스폰서 검사’ 파문으로 김준규는 대국민 사과에 이어 자체 개혁안을 발표한다. 개혁안 가운데 하나가 비리 검사를 수사하는 ‘특임검사제’ 도입이었다.

 

이 특임검사가 임용된 첫 사건이 바로 2010년 11월 ‘그랜저 검사’ 사건이다. 한 건설업자가 검사에게 사건을 부탁하면서 승용차 구입비를 대납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위기가 바로 청와대 조정회의였을 테다. ‘형사소송법 196조’를 개정하고자 국정 운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날 열린 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평검사회의는 검찰 근간을 흔드는 긴급 현안이 있을 때마다 열린다. 2003년 참여정부가 검찰 출신이 아닌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할 때도 평검사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법률 개정은 검사 작성 조서가 지닌 증거 능력을 제한하는 쪽으로 진행됐다. 검찰이 자백만 받으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컸다. 하지만, 검찰은 평검사회의를 열어 반발하며 형사소송법 312조를 지켜낸다.

 

 

법률 개정은 국회의원 입법, 정부 제출 등 다양한 통로로 이뤄진다. 형사소송법 196조 법률 개정 논의는 2010년 2월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가 시작했다. 그해 10월 법원과 검찰 제도 개혁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으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압수수색을 진행한다. 검찰을 향한 정치권 반감은 깊어졌다.

 

사법제도개혁특위는 특별소위원회를 구성해 2011년 3월 10일 여야 합의안을 발표한다. 주요 개혁안으로 경찰수사권 독립이 있었다. 이 발표는 검찰 출신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이 주도한다. 검찰 출신이 경찰을 돕는 상황이지만, 조직 입장에서는 검찰과 경찰이 붙는 모양새가 됐다. 세력이 막강한 검찰에 맞대응하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다. 경찰 안에서는 차라리 수사권 독립을 차기 대선 공약에 집어넣는 게 낫다는 계산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현오 생각은 달랐다.

 


 

본격적으로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변경을 위한 특별소위원회가 가동됐다. 경찰과 검찰이 벌이는 신경전은 언론을 탔다. 조현오는 5월 26일 전국 지방청장 화상회의에서 총경 이상 간부에게 “직을 건다는 자세로 임하라”라고 말했다.

 

김준규 검찰총장이 주재한 검사장급 이상 간부회의에서 즉각 반응했다. 대검 차장인 박용석은 “조직을 위해 직을 건다는 것은 조폭이나 하는 말”이라고 받아쳤다.

 

5월 31일 검사인 윤대해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경찰 수사개시권 명문화와 관련해 깊은 우려와 분노를 금할 수 없다”라고 적었다. 그동안 특별소위원회 단위에서 논의가 진행됐지만 조문 합의안은 나오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동료 의원 반대가 심하다. 그 배후에는 법원과 검찰이 있다. 국회의원을 조종하고 협박하고….”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작업은 총리실로 넘어간다. 총리실에서 검찰과 경찰 수사권 조정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경찰은 수사구조개혁 팀원이, 검찰은 검사들이 참석했는데 윤대해 검사도 눈에 띄었다.

 

논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6월 19일 서울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개시권 명문화 반대 분위기를 조성한다.

 

6월 20일 청와대에 국정운영자들이 모였다. 6월 14일 대통령 이명박은 총리실이 적극적으로 조정에 나설 것을 지시한다. 이명박은 “경찰이 법적 근거도 없이 수사하는 현실을 개선하라”라고 말했다. 김준규는 평검사회의 견해를 되풀이했다.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은 결코 고칠 수 없으며 경찰 수사개시권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정회의를 마친 조현오는 경찰청으로 돌아와 말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BH(청와대) 최종 합의안에 서명하고 왔다.”

 

조현오는 196조 조항에 ‘경찰의 수사개시와 진행권’을 확보했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가 합의한 내용에는 ‘경찰은 모든 수사에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는 조항도 있었다. 게다가 검사 지휘에 관한 사항은 ‘법무부령’으로 정하기로 했다. 조현오는 ‘모든 수사’에 경찰 내사가 포함되지 않고 법무부령 제정도 경찰과 합의하기로 국정운영자와 약속했다고 내세웠다. 조현오는 그 약속을 실제 믿었다. 하지만, 경찰은 ‘순진한 발상’이라며 비난했다.

 


 

합의안을 발표한 이튿날인 6월 21일 검찰 반응에 경찰 내부 분위기가 격앙됐다. 대검 기획조정부장 홍만표는 “조 청장 주장대로라면 구두합의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후 국무조정회의에 참석한 대통령실장 임태희, 안전행정부장관 맹형규, 법무부장관 이귀남은 국회에서 내사는 수사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확인해준다. 국회도 청와대 조정안에 나온 ‘모든 수사’에 대한 해석을 제한한다. 민주당 의원인 박지원은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모든’을 삭제하고 검사 지휘는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 근거가 돼야 한다는 게 여야 공통의견이라고 밝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찰청 나름대로 애쓴 결과였다.

 

6월 30일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법무부령’은 ‘대통령령’으로 바뀌었다. 검찰은 잇달아 자리에서 물러나며 개정안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대검 기획조정부장 홍만표를 비롯한 검사장들이 먼저 물러났다. 검찰총장인 김준규도 사표를 냈다. 후임 검찰총장이 바로 한상대다.

 

 

한상대 검찰총장에게 경찰과 ‘대통령령’을 만드는 작업을 맡겨졌다. 그 해 12월 27일 대통령령이 시행되기까지 검찰에 비난 여론은 계속됐다. ‘벤츠 여검사’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11월 30일 이창재 안산지청장을 특임검사로 임명했다. ‘그랜저 검사’ 이후 2번째다.

 

여검사 A씨는 모 변호사 부탁을 받고 다른 검사에게 사건을 청탁한 의혹이 있었다. A씨는 내연관계였던 모 변호사에게 벤츠 승용차 등을 받아 ‘벤츠 여검사’로 불렸다. “국산차는 이제 저리 가라”라는 비난이 인터넷을 달궜다. 여검사 A씨는 12월 7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된다.

 


 

이듬해 검찰수사가 시작된다. 2012년 2월 28일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가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경찰청 정보국장으로 국회의원 설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날 검찰은 한나라당 의원 주성영을 ‘성매매 의혹’으로 소환 통보한다.

 

주성영은 사법개혁을 주도한 자신에게 검찰이 앙갚음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현오가 4월 퇴임하자 검찰 조사가 시작됐다.

 


 

조현오는 경찰청장 재직 당시 경찰청 범죄정보과와 지능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검찰로서는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경찰에 ‘김광준 검사’ 사건이 걸려든다. 한 기자는 ‘김광준 검사 사건’을 두고 “유사 이래 경찰이 검찰을 향해 날린 최고의 빙엿”으로 표현했다.

 

이 사건은 2008년 12월 9일 금융다단계를 하던 조희팔이 회사 돈을 챙겨 중국으로 밀항한 데서 시작된다. 당시 투자자가 3만여 명 피해액은 4조 원 정도로 추정됐다. 오래전부터 금융감독원이 유사수신행위를 포착하고 수사당국에 정보를 줬으나 수사에 진척이 없었다. 오히려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수사당국과 조희팔 사이 유착관계였다. 뇌물 혐의로 수많은 경찰이 사법처리됐고, 조희팔을 비호하는 세력으로 권력층 이름이 나돌기 시작했다.

 

수사는 두 갈래로 진행됐다. 중국에 있는 조희팔을 잡아들이는 것과 조희팔이 국내에 숨겨둔 자금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범죄정보과에서 조희팔 관련 정보를 넘겨받아 수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검사 김광준이었다. 서울고검 검사인 김광준의 차명계좌를 발견한 것이다. 자금줄은 조희팔 측근이었다.

 

김광준은 중앙지검 특수3부장 검사였다. 특수부는 청와대가 맡긴 사건을 담당하는데 당시 환경재단 최열을 수사하고 있었다. 당시 최열은 MB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사업에 걸림돌이었다. 여론은 당연히 ‘표적 수사’를 의심했다. 검찰은 최열과 주변인 계좌를 샅샅이 뒤졌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최열은 주변에 차명계좌가 뭔지 묻곤 했다. 그런데 오히려 김광준이 차명계좌로 검은돈을 받았다는 정황을 경찰이 포착한 것이다.

 

경찰이 김광준을 조사했다는 사실은 11월 8일 보도된다. 당시 검찰총장 한상대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검 중수부장인 최재경이 이미 보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상대는 김광준 검사와 통화해 사정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11월 8일 일부 매체 기자가 김광준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 김광준은 중수부장인 최재경에게 기자 대응 요령을 묻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최재경은 강하고 단호하게 실명을 보도하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대처할 것을 조언한다. 이튿날 한상대는 경찰 반발에도 특임검사 카드를 꺼낸다.

 

황운하는 당시 특임검사인 김수창이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는 점은 동의했다. 당시 검찰은 경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찰이 김광준 사건 조사 과정에서 소홀한 부분이 있다면 경찰이 파고들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11월 중순 서울 동부지검 성추문 검사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동부지검에서 실무수습 중이던 검사가 여성 피의자를 검사실로 불러 성관계를 한 것이다.

 

검사인 윤대해는 24일 내부 게시판에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기소배심제, 검찰 직접 수사 자제, 상설특검도입 같은 검찰 개혁안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은 모두 대검 지침으로 가능했다. 지침으로 가능한 일을 개혁안이라고 들고 나왔으니 한쪽에서는 ‘위장 개혁’이라는 빈정거림이 불거졌다. 끓는 기름에 불을 붙인 것은 윤대해가 동료에게 보내려던 문자메시지였다.

 

‘○○아. 대해다... 내가 올린 글이 벌써 뉴스에 나오고 있구나.... 우선 어떤 방안이든 검찰이 조용히 있다가 총장님이 발표하는 방식은 그 진정성이 의심받는다... 내가 올린 개혁방안도 사실 별거 아니고 우리 검찰에 불리할 것도 별로 없다..... 언론에서 그런 평검사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고 이후 일선 청에서 평검사회의를 개최하고 서울중앙은 극적인 방식으로 평검사 회의를 개최하고.... 이런 분위기 속에 총장님이 큰 결단을 하는 모양으로 가야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받은 이는 언론사 기자였다. 예정된 서울중앙지검 평검사 회의는 이 사건 여파로 취소된다.

 

검사들은 오히려 총장 집무실로 몰려가 사퇴를 촉구했다. 한상대가 중수부장인 최재경을 감찰한 게 발단이었다. 한상대는 김광준과 최재경이 주고받은 문자 내용을 문제 삼는다. 한상대는 검찰 위기를 중수부 폐지 카드로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최재경은 반대파였다. 결국, 한상대는 2012년 11월 30일 최재경을 손보려다 축출당하는 모양새로 사표를 냈다. 하지만, 한상대는 자기 임기 동안 검사가 경찰서에 출두해 조사받는 것은 막았다.

 

‘카톡’

 

스마트폰 카카오톡에 한 여성 사진이 올라왔다. 성추문 검사 사건 피해 당사자였고 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 추적 결과 검사 10명을 포한한 검찰 수사관이 해당 전산망에 접속한 게 확인됐다. 검찰도 더는 여론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해 마지막 날, 현직 검사가 최초로 경찰서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는다.

 

 

경찰 구성원이 검경 관계를 다시 인식한 계기는 형사소송법 법률 개정보다 검찰과 경찰이 다투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찰 조직에서 조현오가 추진해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황운하는 어떤 견해를 드러냈을까. 그는 2011년 6월 20일 조현오가 청와대 합의안에 서명을 했을 때도, 경찰이 만족하지 못하는 대통령령을 만든 직후에도 조현오 퇴진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런 황운하에게 왜 이택순 퇴진은 요구해놓고 조현오는 그냥 두느냐는 질문을 하는 이도 있었다.

 

“조현오는 최선을 다해 진일보한 조정안을 만들려는 과정에서 문제가 비롯됐고 내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의견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나가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경찰은 황운하 발언 배경에는 조현오식 조직 관리법이 있다고 했다. 조현오는 조직 내 비판 세력을 항상 곁에 둬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그러면서 비판 세력 상당수를 자기편으로 돌아서도록 했다. 황운하 기용도 결국 조현오식 ‘포퓰리즘’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분석은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파퓰리즘 전략으로 조직을 장악했다는 조현오가 정작 경찰 직원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다음 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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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조현오는 서울구치소 안에서 이경백과 마주쳤다. 구속된 김광준 검사도 거기 있었다. 조현오 구속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 중에 황운하도 있다. 그는 경찰 안에서 ‘수사권의 상징’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경백, 김광준과 관련이 깊다.

 


 

황운하는 경찰대 1기 출신으로 1985년 입문했다. 2003년 용산경찰서 형사과장일 때 경찰이 검찰 비리를 직접 수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른바 법조브로커 ‘오달이’ 사건이다. 수사는 체포, 압수수색 등 강제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인신구속, 압수, 수색에는 반드시 법원 영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찰은 법원에 영장을 신청할 수 없다. 반드시 검찰 힘을 빌려야 한다.

 

수사권 핵심은 경찰이 피의자를 구속하거나 증거물을 압수하기 위해 영장청구권을 갖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황운하가 신청한 ‘오달이’ 계좌 추적 영장을 수차례 기각했다.

 

2005년 경찰청장인 허준영은 황운하를 경찰청 수사권개혁팀장으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이 공약했던 경찰수사권은 국회 입법화 과정에서 지지부진했다. 그동안 경찰이 부당함에 스스로 맞서야 한다는 주문도 불거졌다.

 

황운하는 2005년 전국 경찰에 공문을 보낸다. 공문에는 검찰과 잘못된 관행을 14개 항목으로 정리하고 앞으로 거부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중에는 ‘검사 면전 인치 요구 거부’도 있었다. 공문은 수사구조개혁팀장 이름으로 뿌렸다. 청장인 허준영에게 보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공문을 받고 일선에서 나설 사람이었다. 누가 총대를 멜 것인가.

 

충남지방경찰청 소속 경감 한 명이 시발점이 됐다. 대전지방검찰청이 전화로 긴급체포한 용의자를 데려오라고 하자 거부한 것이다. 경감은 피의자 인적사항에 검찰 관련자가 눈에 띌 때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마침 경찰청에서 온 공문도 힘이 됐다. 검사 요구를 거부한 그는 검찰에 직무유기 등으로 기소됐고 재판에 넘겨졌다.

 

2006년 9월 5일 대전서부경찰서 서장이 두 번째였다. 그는 2006년 이택순이 경찰청장으로 부임하면서 경찰청 수사권개혁팀장에서 대전서부경찰서 서장으로 자리를 옮긴 황운하였다. 그는 다시 경찰·검찰 사이 갈등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좌천된다.

 

 

2007년 4월 한화 회장인 김승연이 보폭 폭행을 저지른다. 이후 한화 고문과 경찰청장인 이택순이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고, 이택순은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맡기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황운하는 경찰 내부 게시판에 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고 다시 징계를 당했다.

 


 

2010년 대전지방경찰청 생활안전과장이던 황운하를 서울청 형사과장으로 발탁한 이는 조현오였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자 황운하를 경무관으로 승진 인사하고 경찰청 수사기획관에 전진 배치한다.

 

수사기획관은 수사국이 맡는 중요 사건에 대해 수사 업무를 챙기는 자리였다. 당시 대검찰청도 중수부장이 수사기획관을 거느렸다. 경찰청 수사기획관은 지능수사대와 범죄정보과 등을 지휘한다. 모두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면서 만든 새로운 기능이다. 조현오는 검찰 중수부와 범죄정보과 역할을 맡을 부서가 경찰에도 있어야 서로 감시·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능범죄수사대는 고위공무원 비리, 경제사범과 같은 대형 사건을 인지해 직접 수사한다. 범죄정보과 역시 검사 등 비리 공직자 범죄 정보를 캐내고자 만든 기구다.

 


 

황운하가 수사기획관으로 처음 맡은 사건이 이른바 ‘디도스 사건’이다. ‘디도스 사건’은 2011년 10월 26일 보궐선거 당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와 서울시장 후보 박원순 홈페이지가 사이버테러를 당한 사건이다. 사건 당일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에서 수사에 들어갔다. <나꼼수>는 10월 29일 26회 방송에서 이 내용을 짚었다. 선관위 홈페이지 전체가 마비된 것이 아니라 일부 메뉴만 작동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단순 사이버테러가 아니라 선관위 내부자 공모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경찰은 12월 1일 디도스 공격을 한 강 씨와 일당 3명, 이를 지시한 공현민을 검거했다. 공현민은 한나라당 국회의원 최구식의 수행비서관이었다. 형사소송법을 보면 경찰은 피의자 구속 열흘 안에 사건을 검찰에 송치해야 한다. 이쯤이면 누구나 예상하는 앞날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는 경찰과 검찰이 ‘수사권 조정’을 놓고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경찰 수사 허점을 놓칠 리 없었다.

 

 

선거 부정 관련 사건은 여야가 날카롭게 맞설 수밖에 없고 언론도 중요하게 다루는 사안이었다. 만약 경찰 수사 결과가 각종 의혹을 잠재울 만큼 명확하지 않으면 야당은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요구한다.

 

경찰은 2011년 12월 6일 국회의장인 박희태의 전 비서 김태경을 소환한다. 공현민과 김태경은 분명히 돈거래가 있었다. 사건 발생 전에 1000만 원, 사건 발생 후 9000만 원 등 모두 1억 원이 오갔다. 김태경은 사건 관련성을 모두 부인했다. 경찰은 사건 이후 오간 9000만 원은 범죄와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사건 직전에 건넨 1000만 원은 충분히 의심을 살만 했다. 그러나 공모 증거가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황운하는 이를 ‘대가성’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이제 수사 결과를 발표해야 한다. 민감한 사안 이인만큼 누구를 비호한다는 인상을 줘도 안 된다.

 

황운하는 12월 9일 자신감 있게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시간제한이 있었던 점을 상기하거나 미흡한 부분은 검찰 수사에 넘기는 출구 같은 것을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다.

 

“공 씨 단독범행이며 우발적인 사건입니다.”

 

이 발표가 나가자 여론은 경찰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한다고 몰아붙였다. 경찰과 다른 검찰 판단도 축소·은폐 비난 여론을 부추겼다. 검찰로 사건이 송치되자 서울중앙지검은 첨단범죄수사2부를 주축으로 40여 명이 참여하는 수사팀을 꾸린다. 검찰은 2011년 12월 30일 박희태의 전 비서인 김태경을 구속한다. 당시 <나꼼수>는 32회 방송에서 이 내용을 언급하며 경찰 수사를 비판한다.

 

“검찰이 특별수사팀을 꾸렸을 때 이미 뭔가 잡은 것이 있다. 1억은 검찰이 거둔 쾌거.”

 

하지만, 황운하가 예상한대로 검찰이 기소한 김태경은 2013년 3월 29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그때는 사건에 대한 관심이 이미 사라진 시기였다.

 

당시 언론은 12월 16일 조현오가 준비한 기자간담회를 주목했다. 보도를 보면 조현오가 기자간담회에서 함께 앉은 황운하를 질책했다고 나온다. 조현오가 배후를 거론하며 단독범행이 아닐 가능성을 열어두려 하자 황운하는 경찰 수사가 옳다고 받아친다. 조현오는 “가만 좀 있어봐라”며 황운하를 면박했다. 이를 언론은 ‘극단적 언쟁’, ‘적전 분열 양상’ 등으로 정리했다.

 

조현오와 황운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당시 경찰 조직 안에서는 황운하를 인사 조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미숙한 발표가 조직에 너무 큰 부담을 줬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도 조현오는 황운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황운하는 자신이 발표한 수사 내용 근거를 더 설명하려는 듯했다. 길게 얘기해봤자 부작용이 더 커질 듯했고 조현오는 말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여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오히려 화살은 조현오를 겨누기 시작했다. 조현오가 경찰 수사 발표 전인 12월 7일 청와대 정무수석인 김효재와 나눈 두 차례 전화통화를 문제 삼은 것이다. 경찰은 행정안전부 소속이고 행정안전부는 정무수석 소속이므로 김효재가 조현오에게 전화한 게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기가 문제였다. 당장 청와대가 돈거래 부분을 발표하지 못하도록 압박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청와대 압력을 받은 조현오가 황운하에게 지시했고 막판에 혼자 살겠다고 황운하에게 모든 책임을 씌웠다는 해석이 나왔다. <나꼼수> 32회 방송 내용이다.

 

 

“경찰이 수사를 잘 해놓고 마지막 발표를 하는 데 있어서 망가지고 있습니다.”(주진우)

“조현오 청장 때문이야. 청와대에서 오더가 왔어도 조현오 청장이 막았어야지.”(김어준)

 

그러나 황운하 예상대로 검찰 수사도 경찰과 차이가 없었다. 2012년 3월 26일 디도스 특검이 출범한다. 특검보 3명과 파견검사 10명을 비롯해 100여 명이 특검에 참여했다. 특검도 윗선이 수사 과정에 개입했는지 파악하고자 4월 19일 사이버테러대응센터 직원 2명을 불러 조사했다. 그리고 5월 21일 수사국장 강신명과 수사기획관 황운하, 마지막으로 5월 23일 조현오를 불러 조사한다.

 

조사 순서에는 의도가 있다. 우선 수사진을 조사한 내용은 상급자를 캐는 데 활용된다. 조사는 계단식으로 진행됐지만 언론이 원하는 건더기는 나오지 않았다. 특검은 2012년 6월 21일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먼저 김효재를 불구속 기소했다. 수사 상황을 국회의원인 최구식에게 알려줬다는 혐의였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의혹 무마용’, ‘혈세 낭비’라는 비난이 특검을 향했다.

 

당시 사건 관계자는 여전히 디도스 사건을 ‘공현민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단독범행’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당시 <나꼼수>가 의혹을 제기한 근거가 됐던 증언들은 어떻게 봐야할까? 일반적으로 수사 담당자는 ‘진술’보다 과학을 우선했다. 예를 들어보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물속으로 가라앉은 후에도 탑승한 학생에게 전화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하지만, 경찰이 통신기록을 조회한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전 세모그룹 회장인 유병언이 변사체로 발견된 시점을 둘러싼 의혹도 떠올려보자. 유병언 변사체가 6월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발견됐다는 진술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경찰 수사를 불신하는 목소리는 높아졌다. 하지만, 경찰은 전산으로 남은 112 신고 시각과 사건 처리 기록을 바탕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디도스 사건에서 <나꼼수>가 선거관리위원회 내부 공모 의혹을 제기한 근거가 된 진술을 보자. 이용자는 인터넷으로 홈페이지 서버에 접속한다. 화면에서 늘 같은 부분은 홈페이지 서버에 저장돼 있고, 바뀌는 부분은 데이터베이스 서버에서 가져와 화면에 표시된다. 당시 <나꼼수>는 디도스 공격 중에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화면 일부(데이터베이스 서버에서 가져오는 ‘투표소 정보’ 부분)만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누군가 홈페이지 서버와 데이터베이스 서버 연결을 차단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가 분석한 결과는 홈페이지 서버와 데이터베이스 서버 사이 통신은 정상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검찰수사와 특검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됐다.

 

<나꼼수>가 ‘선관위 내부 공모’를 의심한 것은 일부 화면은 보이고 일부 화면은 보이지 않았다는 진술이 ‘진실’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경찰이 말하는 과학수사를 바탕으로 검토하면 거꾸로 그런 진술이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공현민을 비롯해 몇 명이 모여 벌인 일이 여야 정쟁, 종편 출연 같은 변수를 맞으며 순식간에 정국에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황운하에게는 권력을 비호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경찰 수사에서 윗선으로 지목된 박희태, 최구식 모두 디도스 사건과 관련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황운하조차도 생각한 그림이 아니었다. 황운하가 첩보를 입수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수사가 바로 ‘김광준 검사’ 사건이다.

 

(다음 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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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인사정의 실현, 전·의경 가혹행위 근절, 경찰과 업주 통화 금지, 성과주의 등 개혁과제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전국으로 확대했다. 조직 정비에 해당하는 일이다. 물론 경찰청장 업무가 안으로 향하는 조직 정비만 있는 게 아니다. 밖으로는 조직 처지를 적절하게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경찰은 밖으로 견해를 드러낼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내무부 직속기관이었던 경찰이 독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은 것은 1991년 경찰청으로 승격되면 서다. 이때부터 경찰은 치안에 대해 자율권을 보장받는다. 경찰 조직 위상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수사권이다. 조현오는 수사권에 대해 어떤 견해를 밝혔고 대응했을까. 그보다 먼저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기 전까지 경찰과 검찰 관계는 어땠을까.

 


 

젊고 자부심 강한 경찰대 출신 수사과장이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피의자는 검찰 출신이었고 피해자는 일반 서민이었다. 경찰은 구속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담당 검사는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것을 지시했다. 수사과장이 거부하자 부장검사가 불렀다. 연륜이 풍부한 형사팀장이 걱정이 돼 수사과장과 부장검사실로 동행했다.

 

당시 형사소송법 제196조(사법경찰관리) 제1항에는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었다. 부장검사는 수사과장에게 반성문 제출을 요구하며 ‘잘못’이라는 문구를 넣도록 지시했다. 부장검사와 수사과장 사이에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사팀장은 점점 불안해졌다.

 

경찰에 대한 검찰 특권 중에는 일반적인 수사 지휘권과 더불어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구속하는 유치장에 대한 감찰권이 있다. 만약 경찰이 검찰 눈 밖에 나면 유치장 감찰을 핑계로 경찰서에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형사팀장이 나섰다.

 

“부장님. 우리 과장님은 수사가 처음입니다. 비록 과장이지만 수사를 잘 모르십니다. 제가 반성문을 쓰겠습니다.”

“그럼 과장 대신 팀장이 쓸 겁니까?”

“네. 쓰겠습니다. 과장님 나가게 해주십시오.”

 

수사과장이 나가고 부장검사와 단둘이 남게 된 팀장은 살며시 물었다.

 

“부장님. 도대체 이게 왜 필요합니까?”

“주임검사가 반성문을 못 받아왔으니 내가 받아놓아야 다른 검사에게 ‘이런 것도 못 받는 너희들이 무슨 검사냐’라고 질타할 때 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릴게요. 검사들에게는 사경(사법경찰관) 불러다가 혼냈더니 잘못했다고 말하더라고 교육하면 되잖아요.”

 


 

조현오는 1990년 경찰서 과장으로 입문했다. 하루는 검사와 면담 약속을 했다. 그렇게 검찰청으로 찾아간 조현오를 검사는 방 밖에서 한 시간 기다리게 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갔더니 검사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반면 유치장 감찰을 온 검사는 수사과장 자리에 앉았다. 수사과장 중에는 당연한 듯 자리를 내주는 이도 있었다. 한 경찰은 ‘형사소송법 망령’이라고 한탄했다.

 

경찰과 검찰은 서로 다른 기관이지만 검사는 경찰에게 협의 공문 없이 지시했다.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보고 싶으면 경찰서로 오면 된다. 하지만, 검찰은 굳이 경찰에게 피의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이를 ‘피의자 신병인치’라고 한다. 경찰은 검찰이 지원을 요구할 때마다 업무를 제쳐두고 가야 했다. 검찰에 파견된 경찰은 검사가 미행이나 단속을 지시하면 수행하는 일을 맡았다.

 

형사과장이던 조현오는 검찰과 부딪히기보다는 자기 일에 신경 쓰자는 쪽이었다. 권위적인 모습으로 따지면 경찰 조직도 검찰과 다를 바 없었다. 경찰서 생활안전과장도 일선 파출소에 가면 파출소장 자리에 앉는 일이 허다했다.

 


 

경기지방경찰청 시절 조현오에게 참모 역할을 하는 형사과장이 이런 질문을 했다.

 

“오락실 업주와 물 한 잔도 마시지 말라는 등 강경 조치를 펴는 이유가 뭡니까?”

 

“경찰 부패를 도려내면 국민이 경찰을 지지할 것이고 그런 여론을 바탕으로 수사권을 가져올 거야.”

 

형사과장 생각은 달랐다. 경찰 조직에 힘을 실을 방법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직 부패를 도려내는 것보다 첩보가 들어오는 큰 사건에 바로 달려들어 국민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사권 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1999년 DJ 정부 때다. 그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며 행동으로 옮긴 이는 황운하였다. 서울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이던 황운하는 검찰에 파견된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렸다.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를 고려하면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반란이었다. 그 후 집중 논의 끝에 경찰청장 김광식은 검찰에 파견된 전국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린다.

 

그 후에 검찰은 정보국장인 박희원을 수사했다. 이후 경찰청장을 지낸 이무영, 이팔호, 최기문은 수사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다음 경찰청장이 외교관 시절부터 조어 능력이 탁월했던 허준영이다. 허준영은 경찰청에 수사권 문제만 전담하는 ‘수사구조개혁팀’을 만든다. 허준영이 하는 말은 종종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지구 상에 없는 게 두 가지, 다케시마와 대한민국 경찰 수사권.”

 

“지금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권검책경(權檢責警), 권한은 검찰에 있고 책임은 경찰이 진다인데, 이제는 권경책경(權警責警), 즉 수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경찰이 질 테니까 그에 따른 권한도 경찰에 줘야 한다.”

 

2005년 9월 8일 허준영은 한 손님이 청장실로 오는데 외사관리관 조현오에게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청장실로 들어온 손님은 세계적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와 그의 아내였다. 허준영은 유창한 영어로 “한국 경찰 최대 현안이 수사권 조정”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찰에게 수사권이 없다는 말에 앨빈 토플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라고 답했다.

 

 

 

당시 수사권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경찰청 차장인 최광식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최광식은 검찰 수사로 불명예 퇴진한다. 허준영도 퇴임하고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으나 때마침 선거법 위반으로 수사를 받으면서 공천을 받지 못한다. 이후 경찰청장인 이택순, 어청수, 강희락은 수사권에 대해 별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2010년 8월 30일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조현오 목표는 형사소송법 196조 개정이었다. 법을 개정하려면 국회의원 도움이 필요했다. 이 같은 작업은 경찰 모든 조직 부분에서 노력해야 했지만, 특히 정보 파트 역할이 중요했다. 경찰청과 서울지방경찰청은 모두 정보 분실을 운영한다. 정보 형사들을 정부기관, 사회단체, 지역별 담당구역을 정하고 배치해서 정보 수집 기능을 수행한다.

 

조현오는 충북청장이던 이철규를 2010년 9월 7일 정보국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2010년 12월 3일 서울청 정보과장인 김성근을 경무관으로 승진시키고 서울청 정보관리부장을 맡긴다.

 

 

비슷한 시기에 검찰 수사가 시작된다. 2010년 10월 5일 국회의원 11명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된다. 이른바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이다.

 

청목회(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는 2003년 결성된 단체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청원경찰이 회원인데, 이들은 처우 개선을 목표로 청원경찰법 개정안 통과를 추진했다. 회원이 낸 특별회비로 6억 5000만 원을 만들어 2008년 말부터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를 시작했다.

 

청목회 회원 가족과 친지 이름으로 진행한 ‘쪼개기 후원’을 통해 국회의원에게 전달된 돈은 500만~3000만 원 정도였다. 2009년 4월 발의된 청원경찰법 개정안은 2009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다.

 

검찰 수사에 여야 국회의원은 깊은 반감을 드러냈다. 당시 국회에서는 검찰이 국회의원을 옥죄려고 힘없는 사람들이 낸 소액 후원금까지 정치자금법으로 묶어서 건드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고 한다.

 

2011년 6월 30일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재석 의원 200명 가운데 찬성 175명, 반대 10명, 기권 15명이었다. 이 같은 압도적인 표차는 경찰청이 국회 내 반 검찰 정서 분위기를 잘 파고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형사소송법 개정안 내용을 보자.

 

형사소송법 196조 2항에 ‘사법경찰관은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인식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사실과 증거에 관하여 수사를 개시·진행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경찰도 수사 주체로 인정을 받았기에 수사에 들어가면 검사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

 

이 조항만 보자면 경찰에게 매우 유리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3항은 ‘사법경찰관리는 검사의 지휘가 있는 때에는 이에 따라야 한다.’ 고 나온다. 경찰에 수사개시권이 있더라도 검사 지휘를 따라야 하므로 경찰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현오는 3항에 ‘검사의 지휘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기 때문에 대통령령을 잘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도 3항에 크게 반발했다.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령과 법무부령 차이는 만드는 주체다. 대통령령은 대통령 주재로 각 부처 장관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만든다. 반면 법무부령은 법무부가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 검찰 입장에서는 법무부 장관은 통상적으로 검찰 출신이라 법무부령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현오는 ‘검사의 지휘에 관한 형사소송법 시행령(대통령령)’ 제정을 앞두고 다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협상 테이블에 나갈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전남 곡성서장인 장하연과 전북 정읍서장인 진교훈이 뽑혔다.

 

국무총리실 주재로 경찰과 검찰 측에서 대표들이 나와 논쟁이 시작됐다. 한쪽에서 문구를 수정하면 다른 한쪽에서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됐다. 경찰 쪽에서는 제2조(수사지휘의 원칙)에 ‘검사는 사법경찰관을 존중하고’라는 문구를 원하면 검찰은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제5조(수사지휘의 방식)로 넘어가자 경찰은 검사가 사건 지휘를 할 때는 서면 또는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검찰은 “긴급한 경우에는 전화나 구두로 지휘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경찰이 다시 “그렇게 전화나 구두 상으로 지휘할 때 다시 서면이나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는 방식으로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받아쳤다.

 

국무총리실은 경찰과 검찰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 강제 조정안을 내놓았고 대통령령은 12월 27일 시행됐다. 의욕적으로 진행한 법률 개정이었지만 경찰 조직 안에서 평가는 박했다.

 


 

2012년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첫 번째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였다. 혐의는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였다. 두 번째는 ‘룸살롱 황제’ 이경백이었다. 이경백은 1심 판결 전까지 자신과 유착한 경찰을 불지 않았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자신과 유착된 경찰을 불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2012년 3월 말부터 이경백과 유착한 현직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18명이 옷을 벗었다. ‘비리 경찰’ 뉴스가 언론을 장식했고, 이경백은 2012년 7월 17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

 

조현오는 퇴직하고 나서 차명계좌 발언으로 재판을 받았다. 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을 받고 서울구치소로 들어갔다.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사자 명예훼손죄’에서 8개월 실형이 타당한 양형인지 제기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조현오가 간 곳에는 이경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경백은 2013년 5월 11일 집행유예 기간에 불법 사설 카지노를 운영한 혐의로 구속됐다. 조현오는 구치소 안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 무작정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는데 조현오는 해고 노동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루는 면회 대기 중 옆에서 누군가 조현오를 불렀다. 고개를 돌렸더니 누군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김광준 검사입니다.”

 

(다음 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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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서울과 경기는 스케일이 다르다. 연쇄살인이나 토막살인 사건 같은 강력 사건이 아니라면 경기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미디어 관심을 끌기 어렵다. 반면, 서울에서는 작은 사건과 집회도 어떻게 엮이느냐에 따라 정치적 이슈로 발전하기도 한다.

 

조현오는 2010년 1월 8일 서울지방청장으로 부임한다. 조현오는 바로 역대 서울청장 리더십 분석·평가한 내용을 접한다. 직원 여론과 불만을 수렴해 정책을 추진한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조현오가 밝힌 소감은 이렇다.

 

“다 좋은데… 이렇게 가자니 시간이 어디 있냐?”

 

보통 참모를 비롯해 지휘관 임기는 1년이다. 외사관리관, 감사관, 경비국장, 부산청장, 경기지방청장 등 조현오가 거친 곳에서는 어김없이 직원들 곡소리가 났다.

 

 

처음 3개월 동안 새로운 틀을 짜고 나머지 기간 강하게 추진해 그 틀을 정착하는 게 조현오 방식이었다. 조현오가 조직에 심고자 한 틀은 당연히 ‘성과주의’였다

 


 

조현오는 인사 과정에서 주관적인 지휘관 평가를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통상 인사는 심사위원회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서울청장으로 취임한 조현오는 바로 승진하고 싶은 직원을 강당에 모이도록 했다. 경정·경감 승진 대상자 225명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7시간 남짓 면접이 이어졌다.

 

“자기가 승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봐라.”

 

조현오는 그 자리에서 담당 과장에게 면접한 직원마다 성과를 확인했다. 몇몇 직원은 승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약을 받기도 했다. 성과를 봤을 때 승진이 어려운 직원에게는 그 자리에서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면접에서 탈락이 확정된 직원은 ‘빽’을 쓸 기회조차 사라졌다.

 

당시 직원들이 가장 힘들었던 게 이 같은 인사 방식이었다. 조현오는 2~3개월에 한 번씩 성과 우수자를 내부에 공개해 승진 인사에 반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경쟁에 내몰린 직원들은 안팎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2014년 기준 부산은 경찰서가 15개, 경기도는 41개, 서울은 31개가 있다. 지역이 넓으면 지방청장이 일일이 챙길 수 없으므로 각 경찰서 서장이 치안을 책임져야 한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경찰서 단위로 평가를 진행했다. 성과가 좋은 경찰서는 혜택을 받았고 성적이 나쁜 경찰서는 집중감찰을 받았다. 조현오가 서울지방청을 맡은 시기에는 이 같은 평가 시스템이 무르익는 단계였다. 조현오는 평가 시스템을 적용하기 전에 개념을 구체화하고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서장들과 회의를 했다.

 

“방배경찰서는 치안 수요가 적은 곳인데, 우리는 성과를 많이 낼 수 없어요.”

“종로경찰서와 남대문경찰서는 경호와 행사가 빈번해 실적을 많이 올릴 수 없습니다.”

 

조현오는 불평·불만을 끝장토론, 공청회, 간담회로 돌파하고자 했다. 통상 서울지방청 직원은 2만 3000여 명, 경기지방청 직원은 2만여 명이다. 이 정도 규모면 아무리 청장이라도 직원 공감 없이 일을 추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선 경찰서 정도 규모면 서장이 직원을 마음먹은 대로 끌고 갈 수 있다. 실적을 내지 못하면 집중감찰 대상이 된다. 서장부터 일선 경찰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북경찰서장인 채수창도 이 같은 압박에 시달렸다. 조현오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채수창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도 실적주의에서 살아남으려고 제 직원이 검거 실적을 올리도록 굉장히 독려하고 채찍질을 했습니다.”

 

인사에 대한 불만과 성과주의로 말미암은 피로는 경찰 조직에 꾸준히 누적됐다. 2010년 6월 23일 서울 양천경찰서 소속 경찰관 4명이 구속된다. 피의자에게 고문·가혹행위를 했다는 혐의였다. 이 사건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는 2009년 8월에 시작된다. 조현오 인사청문회 위원인 정수성은 증인으로 참석한 채수창에게 이 점을 확인한다.

 

“증인은 양천경찰서 고문 의혹 사건에 조 청장 책임도 있다며 동반 사퇴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양천서 피의자 고문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생긴 일이고 조현오 내정자는 올해 1월 서울청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양천서 고문 사건과 조현오 실적주의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양천경찰서 고문 의혹 사건은 결과적으로 조현오식 성과주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통로가 된다.

 


 

역풍을 맞게 된 조현오에게 악재가 이어졌다. 강남 룸살롱 업주 유착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가출한 여학생 A양을 서초경찰서 실종팀이 성매매 업소에서 찾아내면서 시작된다. 가수 지망생인 A양은 미성년자였다. 업소 사장 이름은 이경백이었다. 웨이터 출신인 이경백은 2000년 북창동에서 룸살롱을 개업하고 강남 일대에서 유흥업소를 기업형으로 운영했다. ‘룸살롱 업계의 스티브 잡스’, ‘룸살롱의 황제’ 등으로 불리게 된 비결은 다방면에 비호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 단속반에 뇌물도 잘 바쳐야 했다.

 

경찰 단속을 비롯한 유흥업계 정보는 이경백을 거쳤다. 2006년 한화 회장 김승연이 폭행을 저지른 것을 경찰에 흘린 것도 이경백이었다. 경찰은 이경백과 단단히 엉켰고 조직은 점차 곪아 들어갔다. 이경백을 수사한다는 것은 경찰 조직의 종기를 도려내는 일이었다. 그전에 경찰은 이미 이경백에게 농락당한 적도 있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혐의를 포착해 이경백을 수사하려 했을 때 그는 오히려 수사관이 접대받은 내용을 확보해 수사팀을 엎었다.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원래 미성년자 성매매 사건은 생활안전과 소관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형사과에 이 사건을 맡긴다. 당시 형사과장은 황운하 총경이었다.

 

통화기록 분석부터 시작했다. 이경백이 지난 1년 동안 휴대 전화 두 대로 통화한 기록은 몇 만 건이었다. 등록된 사람만 1500명이 넘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검찰과 적잖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검찰은 경찰이 긴급 체포한 이경백을 풀어줬는데, 수사를 이끈 황운하는 언론 브리핑에서 검사 실명을 거론하며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말한다.

 

 

이경백도 만만찮았다. 구속되면 그동안 바친 뇌물 내용을 모두 검찰에 불겠다며 맞섰다. 조현오는 오히려 이경백이 검찰에 뇌물 관련 내용을 불기를 기대했다. 검찰 수사이긴 하지만 경찰 비리를 도려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이경백과 통화 기록이 있는 경찰관 63명이 적발됐다. 조현오는 이미 취임할 때부터 업주 관계자와 공무 외에 전화 한 통, 물 한잔도 하지 말 것을 지시한 상태였다. 통화 내용을 소명하지 못한 경찰은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39명이 징계를 받았고 이 가운데 6명은 파면됐다.

 

“조현오가 범서방파 행동대장 출신과 의형제라더라.”

“조현오가 유흥업소에 10억 원을 투자해 월 2500만 원씩 배당금을 받는다.”

 

그즈음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조현오가 조폭과 의형제이며, 조현오 서울청장 비서실장도 연루됐다는 식으로 소문은 점점 덩치를 키웠다. 인터넷에서도 조현오가 강남 유흥가 조폭과 수십 차례 통화했다는 글이 돌았다. 민정수석실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조현오는 그를 옥죄는 의혹에 정면 대응하는 후속 조치를 발표했다.

 

“비서실장을 감찰해서 비위 사실이 있으면 엄하게 처벌할 것이고, 내 휴대전화 통화내역까지 모두 공개하겠다.”

 

조현오는 자신도 수사 대상에 넣었다. 서울청 수사부장인 박상용에게 자기 계좌열람동의서도 전달했다.

 

형사과장 황운하는 결국 이경백을 탈세와 성매매 혐의로 6월에 구속한다. 조현오는 이경백이 구속되고 두 달 후인 2010년 8월 경찰청장이 된다. 하지만, 이경백도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으며 유유히 빠져나온다.

 

(다음 9화 –조현오, 경검 수사권 조정 어떻게?)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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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2010년 6월 23일 서울 양천경찰서 경찰관 4명이 구속됐다. 이들은 피의자에게 자백을 받고자 가혹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수갑을 채워 팔을 꺾어 올리는 이른바 ‘날개 꺾기’ 같은 폭력을 행사했다는 게 사회적으로 충격을 줬다.

 

6월 29일 강북경찰서장인 채수창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무리한 성과주의가 양천경찰서 고문을 부추겼다며 서울청장인 조현오가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경찰청장인 강희락과 조현오는 불편한 사이였다. 하지만, 경찰 조직에서 하극상에 대한 대응은 단호했다. 강희락은 조현오 퇴진 요구를 기강 문란 행위로 규정하고 채수창을 직위 해제한다. 이후 채수창이 제기한 성과주의 비판은 일선 경찰서 직원도 공감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보직과 승진 인사 기준은 오직 성과’. 조현오가 내세운 ‘성과주의’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언론은 조현오가 MB 정부와 코드를 맞추려고 갑자기 실적 위주 평가를 도입한 것처럼 접근했다. 물론 MB 정부가 행정 효율성을 유난히 강조했고 ‘성과주의’는 그 방향을 잘 따른 방침처럼 보이기는 했다. 조현오는 그저 정부 기조를 잘 따랐을 뿐일까.

 


 

경찰 조직에서 실적에 집착하는 관행은 이전부터 있었다. 조현오가 형사과장일 때는 ‘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대부분 경찰서 형사과장실에는 각 팀별 실적을 표시하는 막대그래프가 걸려있었다. 당시 전체 수사 활동비로 지급하던 돈이 430만 원 정도였는데 조현오는 수사비 절반은 형사 수만큼 나눴고 나머지 절반은 한 달 동안 팀별 성과에 맞춰 지급했다.

 

 

 

조현오가 성과를 강조한 것은 울산남부서장 때부터 도드라진다. 경정 이하 인사는 시험과 심사로 승진을 결정한다. 심사는 경찰서장의 주관적인 판단과 ‘빽’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구조였다. 조현오는 심사 과정에서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고자 했다. 한 번은 승진 대상자를 모아놓고 이런 말도 했다.

 

“자신이 왜 승진해야 하는지 설명해봐라. 조직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자기 업무를 어떻게 열심히 했는지 증명해봐라.”

 

순위는 모두 보는 앞에서 성과를 중심으로 결정됐다.

 


 

조현오는 2003년 서울종암서장 때도 여전히 성과를 중시했다. 당시 종암서 형사과 실적은 서울지역 31개 경찰서 중 상위권이었다. 조현오는 형사과에 자주 들러 형사들을 격려하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조현오가 생활안전과장에게 서울종암서 관할 파출소 직원 200여 명을 대상으로 1년 동안 성과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검거 실적이 전혀 없는 직원이 70여 명이었다.

 

해마다 경찰청은 다양한 치안 관련 통계를 내놓는다. 범죄 발생을 월, 요일, 시각, 장소, 기상 등으로 구분해 통계를 낸다. 이는 치안 수요에 맞게 인력을 배치하는 참고 자료가 된다. 70여 명이 1년 동안 실적이 없다는 것은 인력 배정이 문제 거나 직원이 일을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게 조현오 판단이었다. 조현오는 형사계장에게 일주일 동안 재교육 운영을 지시했다. 소매치기 식별 요령부터 수배자 검거 방법까지 전반적인 교육이 진행됐다. 재교육 성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최근에도 경찰청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화가 있다. 2007년 조현오가 경비국장일 때 일이다. 이때도 승진 기준은 성과였고 순위는 공개한다는 게 인사 원칙이었다. 경비국 회의실에서 조현오는 참석자에게 ‘우리가 합의한 내용’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승진 순위를 밝혔다. 이 순번은 조현오가 보직 이동을 한 뒤에도 어김없이 지켜진다. 조현오가 떠났을 때 ‘빽’이 개입할 틈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조현오도 이를 의식했는지 이듬해 부산청장으로 옮기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순번을 어기는 사람은 내가 경찰청장이 되면 가만 안 두겠다.”

 


 

2008년 조현오는 부산청장으로 부임한다. 오랜 참모 생활을 마무리하고 지휘관으로서 이력이 시작됐다. 부산에서는 지금도 조현오를 두고 ‘추진력은 최고’라는 평가가 많다.

 

조현오는 오전 6시 30분쯤이면 출근했다. 간밤에 주요 수배자 검거 소식을 들으면 즉시 검거 직원이 있는 경찰서로 향했다. 조현오가 움직이면 지방청 인사계에서도 함께 움직였다.

 

 

 

부산지방청에서 가장 먼 부산강서경찰서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조현오는 언제나 8시 전에 도착해 공을 세운 경찰을 격려했다. 인사계에서 준비한 상과 상품도 함께 전달됐다. 낮에도 주요 검거 소식이 들리면 경찰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조현오는 경찰 사기를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2007년 말 혜진이, 예슬이 사건, 2008년 3월 일산 엘리베이터 초등학생 납치 미수 사건 등으로 경찰은 거센 비난을 받고 있었다.

 

2014년 기준으로 부산에는 경찰서 15개, 파출소 40개, 지구대가 50개 있다. 조현오는 치안 체계를 점검하고자 각 팀별로 실적 통계를 내라고 지시한다. 그 결과 최고 실적과 최저 실적 차이는 1224배나 됐다. 조현오는 당장 성과를 근거로 인력을 배정하고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내부 게시판에서는 성과주의를 향한 불만이 쏟아졌다. 조현오 역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토론하고 싶은 사람은 당장 다 와라. 결론 나올 때까지 토론하자. 내가 잘못했으면 깨끗이 거두겠다. 내가 맞으면 내 방침을 따라라.”

 

끝장 토론으로 불평·불만을 돌파하는 방식은 일선 경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듯하다. 최근에도 그 일화를 떠올리는 경찰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이 같은 대응을 두고 실적을 바탕으로 차기 경찰청장 자리를 노린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한 경찰 취재기자 생각은 달랐다.

 

“청장으로 와서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부류가 있어요. 그런 정책이 인기를 얻으면 차기로 가는 디딤돌이 되지요. 하지만,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자 다양한 정책을 통해 인기를 얻고자 하지는 않았어요. 그보다 자기 권한으로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겠다는 쪽이었지요.”

 

조현오는 권한이 커질수록 징계 수위도 높였다. 비리를 도려내겠다는 의지는 분명했다. 경찰 조직 안에서는 1985년부터 경찰대 출신들이 입문하면서 조직을 깨끗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이처럼 아래에서는 ‘경찰개혁의 첨병’이라는 자부심으로 뭉친 젊은 피가 수혈되고 있었고 위로는 모든 청장이 유착 근절을 부르짖었다.

 

조현오도 부패 경찰 척결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과격했다. 일반적으로 유착에 대한 징계는 ‘사후 조치’였다. 경찰이 업주에게 돈을 받은 게 나와야 징계로 이어졌다. 하지만, 조현오는 단속 대상자인 업주와 업무 외 전화를 아예 금지했다. 물 한 잔도 얻어먹지 말라는 지시를 어긴 경찰에게는 여지없이 징계가 떨어졌다.

 

 

이 같은 조치에 대해 한 기자가 내린 평가는 박했다. 단순 통화는 통신 자유에 해당하며 설사 지시를 어겨 징계를 하더라도 행위에 비례하는 문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현오가 징계한 직원 중 일부는 소청심판이나 행정소송을 거쳐 살아나기도 했다. 조현오가 내세운 ‘일벌백계’는 명료했지만 분명히 지나친 면도 있었다.

 

지방청장은 경정 이하 승진과 전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보통 경찰서 간 전보 인사는 인근 경찰서로 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성과를 기준으로 인력 배정을 진행한 조현오에게 관례는 관례일 뿐이었다. 해운대경찰서에서 강서경찰서로 옮기게 된 직원들 불만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해운대와 강서는 부산에서 경찰서 사이 거리가 가장 먼 곳으로 이동하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 2009년 경기지방청장으로 부임한 조현오는 징계 차원에서 평택에 근무하는 직원을 포천으로 보내기도 했다.

 


 

2010년 서울청장 때는 비리 온상으로 지목된 강남경찰서 수사팀을 뒤엎었다. 당시 강남 유흥업계가 단속을 돈으로 무마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조현오는 업주와 엮인 경찰을 서슴없이 징계하기 시작했다.

 

한 언론은 조현오가 차기 경찰청장 임명을 앞두고 ‘자기 관리’에 들어갔다고 분석했다. 강력한 내부 비리 척결로 청와대 관심을 끌고자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현오가 청와대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맞다. 민정수석실도 나름 움직이기 시작한 듯했다.

 

(다음 8화-조현오, ‘룸싸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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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공개

 

조현오는 2010년 1월 27일 서울청 참모회의에서 경정급 직원 이름 16명을 공개하면서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조현오는 “승진할 수 있는 보직으로 가고자 외부 인사 청탁을 한 경찰관”이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빽’을 통해 인사 청탁을 하면 명단을 공개하겠다던 경찰 간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한 사람은 조현오가 처음이었다.

 

 

경찰은 경위 계급이라 해도 정보 쪽 분야에서 일한다면 지역 국회의원을 비롯해 막강한 실세들과 인맥을 구축할 수 있다.

 

2014년 기준 전국 경찰 가운데 경정은 2171명이며 총경은 507명이다. 총경 승진이 안 된 경정은 14년 근무를 마치고 퇴직해야 한다. 이를 ‘계급정년’이라고 한다. 총경 이상 인사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지방청장은 경정 이하 인사권만 있는데 왜 지방청장에게 총경 인사 청탁이 들어올까?

 

총경 승진 과정을 살펴보자. 승진 1단계는 인사고과를 잘 받아야 한다. 업무 능력을 증명해야 승진 후보 대상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아무래도 업무 능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보직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보직 청탁이 생기는 이유다. 또 지방청장이 예상 밖 인물을 승진시키는 게 불가능하지도 않다. 지휘관이 평가 점수를 매길 때 특정인에게 최고 점수를 몰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현오는 경찰 생활을 시작하면서 인맥을 동원하면 경찰 기강이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자기 경험이 근거였다. 생활안전과장으로서 성과를 냈지만 형사과장으로 가지 못했던 조현오는 보안과장 시절 외부 인사 청탁으로 형사과장이 되면서 부조리를 느꼈다. 이 같은 관행을 막고자 들고 나온 방법이 외부 인사 청탁자 명단 공개였다.

 

조현오는 첫 보직인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시절 파출소장에게 청탁을 받곤 했다. 경위 이하 인사권은 경찰서장에게 있지만 생활안전과장(경정) 추천이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이다. 파출소장은 유흥업소가 밀집된 파출소로 가고 싶어 했다. 조현오는 이런 직원을 살짝 불러 무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울산남부서에서는 외부 인사 청탁 전화를 두 번 받았다. 조현오는 해당 직원에게 선택권을 강요했다. 옷을 벗든지 울산을 떠나 다른 경찰서에서 근무할 것인지 고르라고 했다. 조현오는 한 명은 다른 지역으로 보냈고 다른 한 명은 울산 내 다른 경찰서로 보냈다.

 

“직원 부인이 서장실로 찾아와서 남편과 함께 무릎 꿇고 빌더라. 아이를 등에 업은 부인이 애원하니까 차마 울산 밖으로 보내지 못했지.”

 


 

2008년 부산청장이 됐을 때도 외부 청탁을 받았다. 조현오는 해당 직원을 불러 혼내는 정도로 넘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기자들과 회식 중에 총경 승진 후보자 이야기가 나왔다. 기자들은 경찰관 한 명을 지목해 승진 가능성을 물었다. 조현오는 승진 연도가 늦다며 인사는 원칙과 공정성을 담보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들은 노무현 정부 때 승진한 총경을 거론하며 형평성을 따졌다. 누구는 이상득·이재오 등을 언급하며 ‘빽’을 거론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향신문>은 조현오 부산청장이 고위직 승진을 원하면 이재오·이상득 의원을 통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기자는 <경향신문> 기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조현오 청장 발언 취지는 ‘안 된다’는 뜻이었어요. 만약 문제 있는 발언이었다면 다른 기자들이 왜 후속 기사를 안 썼겠어요?”

 

부산에서 한 지인을 만났을 때 조현오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부산청장이던 조현오에게 술자리에서 인사 청탁을 했다. 조현오는 단호하게 거부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청탁을 거부하겠다면 자신을 밟고 지나가라며 출입구 앞에 드러눕고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아무 반응이 없어 살며시 눈을 뜨니 조현오가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안 됩니다.”

 

지인에게는 그 상황이 매우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2009년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이 된다. 이때부터 외부 인사 청탁이 들어오면 해당 과장을 참모회의에 불렀다. 참모회의 참석자는 20여 명이다. 조현오는 당사자를 세워놓고 다그치곤 했다.

 

“인사 청탁하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청장 지시가 잘못인가?”

“잘못 없습니다.”

“지시가 정당하면 왜 불복하느냐? 지시를 위반한 이유가 뭐냐?”

 

당시 직원들은 이를 ‘인민재판’, ‘자아비판’이라고 표현했다.

 

 

1년 뒤 조현오는 서울지방청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서울은 ‘빽’ 수준과 체급이 달랐다. 참모회의에서 직원을 불러 질책하는 정도로는 효과가 없었다. 작심하고 외부 인사 청탁을 한 경정 16명을 실명 공개했다. 한 경찰은 당시 실명 공개 파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방청장이 회의 중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언급하면 그날 지방청 화두는 그 사람이에요. 청장이 한 사람을 칭찬하면 승진 대상자라며 시끌시끌하지요. 청장은 누구를 딱 집어서 질책도 잘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받는 정신적 충격이 상당하니까요.”

 

조현오식 실명 공개는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실명을 공개하고 나서 조현오가 받은 충격도 상당했다.

 

“그렇게 실명을 공개했는데도 ‘빽’을 쓰는 사람이 있는 거야.”

 

조현오는 외부 인사 청탁을 한 경정을 참모회의에 불렀다. 서울청 참모회의 참석자 규모는 30~40명 정도다. 그 자리에서 조현오는 경정을 호되게 질책하며 몰아붙였다. 이후 조현오는 분위기가 잡혔다고 판단했다.

 


 

2010년 8월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경찰청장은 감찰권과 총경 이상 인사권을 행사한다. 외부 인사 청탁에 대한 자기 관점과 대응은 조직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됐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조현오는 스스로 최악이라고 할 만한 인사 청탁을 받게 된다. 인사 청탁 자체도 혐오스러운 것이었지만 하필 청탁한 외부인이 검찰 출신이었다. 당시는 수사권 조정 문제로 경찰과 검찰이 첨예하게 맞붙던 시기였다. 조현오는 당장 감찰 조사를 지시했다.

 

조현오는 경정급 외부 인사 청탁은 명단 공개로 대응했다. 경무관급 이상 인사 내막은 ‘경찰청장 지휘’에서 다룰 것이다. 지금까지 조현오에게 청탁을 했다는 외부 인사는 누굴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했다는 경찰은 MB 정부 시절 어떤 인물을 동원했을까. 조현오는 몇 명을 언급했지만 이들을 밝히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외부 인물 가운데 한 명은 MB 정부 때 언론에 자주 등장한 종교인이다. 그는 조현오가 ‘경찰청장 이너서클’에서 온갖 루머와 견제로 시달릴 때 두둔해줬다고 한다.

 

조현오가 ‘빽’을 공개하는 방식은 정당했을까? 동의하지 않는 시선이 많았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었다면 조현오가 선례를 만든 만큼 계속 이어지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면 굳이 명단을 공개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조현오는 왜 주변에 적을 만드는 방식을 택했을까.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장 시절 훗날 법조 브로커로 유명해진 K 씨를 알게 된다. K 씨는 어떤 회사와 관련된 사건 수사가 마무리되자 서장실을 찾아와 조현오에게 봉투를 건넸고 조현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K씨는 청렴한 조현오에게 호감을 보였다.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에서 거둔 성과와 상관없이 3급지인 사천경찰서장으로 발령받는다. 그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K 씨는 사천경찰서에 찾아와 조현오에게 원하는 보직을 물었다. 조현오는 원하는 보직을 말했지만 이뤄지지는 않았다. 조현오가 돈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후 조현오가 거친 보직은 썩 좋지 않았다.

 

소식이 뜸하던 K 씨가 허준영이 경찰청장이 되자 연락이 왔다. K 씨는 경찰청 간부를 다 아는데 허준영만 모른다며 조현오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조현오는 알겠다고 답해놓고 허준영을 찾아가 오히려 K씨가 위험한 사람이니 가까이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며칠 뒤 K씨는 전화로 조현오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이후 연락이 끊긴 K 씨와 다시 연결된 것은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으로 감옥에 있을 때였다. K 씨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청렴한 사람을 판검사가 구속했다며 면회를 오겠다고 했다. 조현오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조현오는 K 씨가 사천경찰서로 찾아와 원하는 보직을 말하라고 했을 때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K 씨에게 기대려 했던 자신이 굴욕스러웠다. 이후 직급이 오를수록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사 기준 마련은 조현오에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외부 인사 청탁도 막고 주관적인 지휘관 평가도 뺀다면 승진 기준은 뭐가 돼야 할까. 조현오는 ‘성과’ 말고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다음 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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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조현오가 서울지방경찰청장에서 경찰청장으로 내정되어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던 시절, 한 전직 참모 증언이다.

 

당시는 양천경찰서 고문사건, 경찰 성과주의를 문제 삼은 채수창 서장 항명 파동, 노무현 차명계좌 발언 등으로 야당이 경찰 조직을 압박하던 때였다. 조직 안에서는 조현오가 더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조현오가 대뜸 물었다.

 

"전의경 구타 사고는 왜 안 없어지는 거지?"

 

참모는 조현오가 그렇게 몰린 상황에서 전의경 구타 문제를 고민하는 게 놀라웠다.

 


 

조현오가 첫 보직인 부산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일을 할 때부터 '전의경 가혹행위 금지'는 경찰청장 단골 지시 사항이었다.

 

 

 

 

전투경찰은 1961년 창설됐는데, 당시는 직업경찰이었다. 1971년부터 현역병으로 대체됐고 2013년 9월 폐지됐다. 의무경찰은 1982년 치안 업무를 보조하고자 만들었는데, 전경과 의경은 구분 없이 시위 진압에 동원됐다.

 

전경이 폐지되고 의경만 남으면서, 시위 진압을 담당하는 부대로 직업 경찰관으로 바뀌고 있다.

 

직업 경찰관을 100명 단위로 묶으면 경찰관 기동대가 된다. 기동대장은 경정이 맡는다. 전국에 경찰 부대는 51개 정도 운영한다.

 

의경 부대는 소대 3개를 묶어 중대 단위로 구성하는데 한 소대 인원이 30명 정도다. 2015년 기준으로 전국에 방범순찰대를 포함해서 200여 개 중대가 있는데 서울에서 운영하는 부대만 100개 정도 된다. 보통 중대장은 경감, 소대장은 경위가 맡는다. 경찰대 졸업자는 2년 동안 소대장을 맡는 것으로 병역을 해결한다.

 

소대장, 중대장 등은 지휘요원이다. 지휘요원은 평소 방범근무 때는 현장 상황을 점검한다. 집회나 시위가 벌어지면 진압을 지휘한다. 대기 상황일 때는 승진 공부에 매달리기도 한다.

 

숙소에서 대원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다. 그런데 당시 대원관리를 부대 선임에게 맡기는 지휘요원이 많았다. 선임은 조직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조현오가 부산동부서 형사과장 때는 경찰서 내 한 의경이 목을 매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20년 동안 가혹행위 때문에 자살하는 전의경 소식은 항상 들렸다.


 

조현오는 사천경찰서장 시절 가혹행위를 막고자 서장 판공비를 들여 영어책을 샀다.

 

 

경찰서 회의실에서 하루 한 시간씩 전의경을 모아놓고 영어 공부를 시켰다. 선임일수록 숙제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신참을 괴롭힐 시간이 줄었다.

 

2007년 조현오가 경비국장을 할 때는 '전의경 근무 총량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지방청과 일선 경찰서에서는 현장 상황을 앞세우며 이 같은 조치에 반발하기도 했다.

 

조현오는 경비국장을 거치고 부산과 경기, 서울에서 청장 자리에 올라서도 늘 지휘요원에게 부대 관리를 강조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관행을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현오는 인사권과 감찰권을 쥔 경찰청장에 오르면서 그 한계와 맞서기 시작한다.

 


 

2011년 1월 23일 강원도 307 전경대 부대원 6명이 집단 탈영한다. 구타와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조현오는 사건 발생 다음 날 강력한 조치를 단행했다.

 

"구타나 가혹행위가 구조적이고 고질적으로 이어져 온 부대는 해체하겠다."

 

강원도 307부대를 비롯해 가혹행위가 심한 부대는 모두 해체 수순을 밟았다. 2월 23일 <추적60분>은 이 같은 조치를 '보여주기 식', '무의미한 대책', '이벤트 성 홍보'라며 비판했다. 조현오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조현오는 조직이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충격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사건이 생길 때마다 보내는 정형화된 공문은 조직에 어떤 자극도 주지 못했다. '행정 처벌', '관리감독 강화', '적절한 징계' 같은 문구로 몇 페이지를 채운 공문은 조현오가 보기에는 그저 관행적인 것이었다.

 

전의경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주체는 경비부서였다. 하지만, 이 문제를 경비부서에 맡길 수는 없었다. 강원도 307부대 사건 다음 날, 조현오는 경찰청 감찰과장을 불러 감찰 직원을 전국 지방청에 풀라고 지시했다. 지방청 차원에서 은폐하고자 하는 시도를 미리 막으려는 조치였다. 조현오는 적절한 조치만 취하면 가혹행위는 발붙일 수 없다고 믿었다.

 

가혹행위는 입대 6개월 미만인 전의경에게 집중된다. 조현오는 6개월 미만 전의경 수천 명을 지방청 강당에 소집했다. 경찰청 감찰 직원은 가혹 행위 사례를 수집하며 현장에서 소원수리를 받았다. 가해자는 처벌할 것이며 피해자는 원하는 지역에 모두 보내겠다고 했다. 혼자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게 어색하다면 동기들과 묶어 보내겠다고 했다. 그렇게 전의경이 빠져나가 인원이 얼마 남지 않은 부대는 모두 해체 수순을 밟았다.

 

다음 조치는 복무점검단 구성이었다. 고참이 신참에게 일을 떠넘기지 못하게 한 만큼 이를 지휘요원이 책임지고 관리해야 했다. 복무점검단은 관리요원이 부대를 제대로 관리하는지 파악하는 일을 했다. 전의경 관리에 소홀한 직원에게는 징계가 떨어졌다.

 


 

징계는 형사 처벌과 다른 행정 처벌이다. 견책, 감봉, 정직, 강등, 해임, 파면까지 6가지 종류가 있다. 징계는 행위책임 또는 감독책임을 묻는 방식이다. 행위책임은 자기 잘못으로 벌어진 일인 만큼 후회, 반성, 모멸감이 상당하다. 전의경 가혹 행위 관련 징계는 대부분 감독책임이었다. 감독책임은 통상 행위책임보다는 처벌이 약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전의경 구타 가혹행위와 관련된 감독책임을 행위책임과 동등한 수준으로 형량을 매겼고 심지어 책임이 무거운 경우 ‘형사입건’까지도 시켰다.

 

사고를 은폐한 직원에게는 '파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징계를 받은 직원이 순식간에 170명을 넘어섰다.

 

경찰 조직에서 징계는 어떤 의미일까.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 건으로 실형 8개월이 확정되자 이 보도를 접한 한 경찰관은 "이런 새끼는 더 살아야 해"라며 적의를 드러냈다.

 

 

조현오에 대한 적의는 감독책임 징계에 대한 불만 위에 쌓인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전의경 감독책임 징계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때문에 당사자 입장에서는 가장 힘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씌우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당시 조현오는 모두에게 책임을 지울 기세였다. 가혹행위가 발생한 경찰서 서장은 직위해제였다. 직위해제는 우선 직무 수행을 못하도록 하는 조치로 대부분 직위해제는 바로 징계로 이어진다.

 

2011년 2월 인천남부경찰서 의경 한 명이 이메일로 'TV 시청을 못한다'는 민원을 조현오에게 보낸다. 조현오는 인천남부경찰서장을 바로 갈아치워 버린다. 당시 곳곳에서 치안 총책임자를 파리 목숨 취급한다는 불만이 불거졌다.

 

조현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만큼 가혹행위 역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했다. 조현오는 학교폭력을 주목했다.

 


 

2010년 12월 동국대 경찰행정학과에서 선배들이 후배들을 각목으로 구타한 사건이 벌어진다. 경찰 관련 학과에서 벌어지는 가혹행위는 고질적인 악습이었다.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한 학생 상당수는 경찰관이 된다. 조현오는 수사국장에게 사건 조사를 지시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학생 장래'를 거론하며 만류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강경하고 단호했다.

 

“그런 폭력적 성향을 가진 학생은 경찰 조직에 필요 없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의경 지원율이 20대 1로 급상승했다. 최근에는 의경 합격을 청탁하는 전화를 받는 이도 있다고 한다. 조현오는 당연히 이런 변화에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자부심과 별개로 인사청탁은 조현오가 가장 싫어하는 행위다. 그는 경찰 생활을 하면서 의경 보직에 대한 청탁을 종종 받았다. 하지만, 인사청탁은 가혹행위만큼 뿌리 뽑아야 할 악습이었다.

 

2007년 경비국장으로 부임한 조현오는 의경 보직 배정 방법을 이렇게 지시했다.

 

“의경들 군번 돌려!”

 

경비국장 권한으로 의경 보직 청탁 정도는 간단하게 막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경찰 인사 청탁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경찰청장은 통상 총경급 이상 고위직 인사권을 행사한다. 조현오는 조직 기강을 잡으려면 경찰청장이 인사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사가 외부 청탁에 휘둘리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어요? 윗사람에게 아첨은 기본이고, 외부 빽을 잡으려고 온갖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래서야 지휘권이 확립될 수 있겠어요?”

 

문제의식은 아주 타당하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조현오는 외부 인사 청탁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다음 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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