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5화 강릉의 위키리크스 <하이강릉>

 


지난 2008년 6월 10일 촛불집회 기간 서울 광화문에 인파가 모여들었다.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김 기자는 촛불집회 이야기를 하다가 탁자 위로 <시사IN> 38호를 쓱 내밀었다. <시사IN> 표지에는 '시위, 너를 비틀어주마. 촛불과 디지털의 만남 지상 생중계'라고 적혀 있었다.

 

김 기자는 내게 정희상 기자가 쓴 "송병준 후손 행적 추적했더니…"라는 기사를 펼쳐보라고 했다.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 송돈호가 '친일재산환수특별법' 위헌소송을 냈다는 내용이었다.

"요즘처럼 이슈가 넘치는 때, 이렇게 억수로 재미없는 기사를 쓰는 게 바로 정희상 기자야."

 

 


 

정희상 기자를 소개하고 시작하자. 1964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외대를 졸업했다. 월간 <말>에서 일하다가 1992년 <시사저널>로 옮겼고 현재는 <시사IN>에 몸담고 있다. 1989년 한국전쟁 전후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월간 <말>을 통해 폭로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분노'였다. 1992년 8월 29일 <시사저널> 커버스토리 '이완용 후손 땅 찾기 연쇄 소송'처럼 정희상 기자는 취재 소재를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서 찾았다. 가끔 지역 문제를 취재할 때도 있으나 중앙 이슈가 압도적이라 단편에 머무를 때가 대부분이다.

 

2011년 여름 강릉에서 제보가 들어왔다. 강릉 시내에서 시장 최명희, 국회의원 권성동, 친척인 권은동 등 한나라당 소속 지역 세력이 토호들과 유착돼 지역 내 이권 잔치를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7월 23일 <시사IN> 201호에 "강릉은 '무법천지' 썩은 내 진동해도 검찰은 솜방망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는 "견제 임무를 맡아야 할 검찰조차 뿌리 깊은 유착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뿌리 깊은 강릉 지역 토착비리 구조는 감사원과 대검 등 중앙정부 차원에서 특단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했다.

 

단편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 기사 한 편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기사에 거론된 지역 국회의원 권성동과 친척 권은동이 언론보도금지보도가처분(2011카합○○) 신청과 손해배상(2011가합○○) 청구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8월 4일 기사에 거론된 강릉 최명희 시장도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떳떳하다"라고 포문을 열며 강릉시는 8월 11일 손해배상(2011가합○○)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추가 보도를 위한 후속 취재가 이어졌다.

 

이 소송들이 정희상 기자를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강원도 지역신문이 <시사IN> 기사를 받아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신문들은 최명희 시장이 <시사IN>을 고발했다는 뉴스와 기자회견을 열어서 해명하는 내용을 실었을 뿐이다.

정희상 기자는 자신이 취재한 내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지역 기자가 있으면 연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강원도 지역신문에서 근무했던 한 기자는 사회부 밑바닥인 경찰서부터 시작해 4년을 근무했지만 박봉으로 서울 무가지 매체로 옮겼다. 강원도 한 신문은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유출된 사람이 1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강원도나 충북과 같은 작은 시장에서 취재력이 받쳐주는 선임 기자는 어떨까? 취재만 잘하는 기자는 회사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 회사 이익에 보탬이 되는 광고 영업 능력이 우선이다. 지역이 보수적인 곳은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지방의원, 사업가 모두 권력으로 묶인다. 사업가들이 군수를 비판하는 신문에 광고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강원도 언론사 지면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즐겨 쓰는 '성공적 마무리', '희망', '확충' 같은 보도자료 용어가 난무한다.

정희상 기자는 강릉에 아주 희한한 사이트를 발견한다. <하이강릉>이라는 인터넷신문이었다. <하이강릉>을 소개한 기사를 본 정희상 기자는 <하이강릉>을 '강릉의 위키리크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위키리크스'를 소개하고 지나가자.

2006년에 설립한 위키리크스를 우리 언론은 '폭로 전문 사이트'라고 소개하곤 한다. 위키리크스는 2010년 4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비디오를 하나 공개하며 존재를 알렸다. 미국 아파치 헬기가 민간인을 살상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였다. 전 세계 180여 개국에 있는 해외공관 289여 곳과 미 국무부가 주고받은 25만여 건의 외교문서를 2011년 8월 31일과 9월 1일 사이 모조리 사이트에 올리면서 역사상 최고라 할 수 있는 폭로가 시작됐다.

'강릉의 위키리크스'인 <하이강릉>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하이강릉> 운영자는 강릉에서 자영업을 하는 김남권 씨다. 2005년 12월 20일 <하이강릉>을 오픈한 김남권 씨는 강릉시의원에게 메일을 보냈다. 공약 진행상황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응답이 없으면 해당 시의원 사진에 큰 글씨로 '거부'라는 마크를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하이강릉>은 어떻게 태동한 것일까?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샌지가 컴퓨터 프로그래머 일을 했던 것처럼 김남권씨는 선거 기간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선거 이면을 알게 됐다. 국회의원이나 시장 공약은 언론에서 중간 점검을 하지만 시의원은 선거가 끝나면 확인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남권씨는 시의원 공약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2년이 지난 2008년 4월 1일 <하이강릉>은 시의원들 답변을 게시하면서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2011년 8월 <하이강릉>을 통해 지역을 발칵 뒤집은 폭로가 시작됐다.

 

이 폭로가 시작되자 지역 국회의원 권성동과 친척 권은동은 <하이강릉>을 상대로 '언론보도금지보도가처분(2011카합)○○)을 제기했고 로펌 변호사 4명을 내세워서 손해배상(2011가합○○) 소송을 제기했다.

강릉시 또한 변호사 3명을 내세워서 손해배상(2011가합○○)소송을 제기했고 권은동은 또 다른 손해배상(2011가합○○)을 청구했다. 물론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하는 것도 포함됐다. 이들이 제기한 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피고 김남권은 같은 달 19일 이 사건 기사를 <시사IN>에서 가져와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신문 하이강릉의 '쟁점토론'란에 게재하였습니다."

즉, 김남권 씨가 <시사IN> 기사를 '펌질'했다는 것이다. 김남권 씨는 그동안 스스로 편집국장이라고 불렀다. 편집국장이 하는 일은 강릉과 관련된 사회와 정치 분야 기사들을 펌질하여 사이트 올리는 것이었다. 기사 중요도에 따라 배치하는 것도 편집국장 권한이다. 기사 출처는 <강원도민일보>, <강원일보>, <강릉MBC>, <강릉KBS>, 같은 지역 언론이었다. '

기자들은 강릉시민이 <하이강릉>을 자주 방문해 뉴스가 확대 재생산되는 효과를 봤기 때문에 저작권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방문객이 동일한 뉴스라도 하이강릉을 찾는 두 번째 이유는 기사에 달린 댓글 구경 때문이었다.

 

<하이강릉>은 중앙에서만 시끄러울 그런 기사를 지역으로 유통했다. 지역 토호들이 김남권 씨 <시사IN> 펌질을 문제 삼으면서 그는 언론중재위원회에 드나들게 됐다. 어딜 가든 판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김남권 씨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하이강릉>이라는 데가 뭔데... 국회의원과 시장 양쪽에서 변호사를 달아서 이렇게 해오는지... 여기 언론사가 큽니까?"
"저 혼자 합니다."

 

"그럼 이 언론사 유지비가 어디서 나옵니까?"
"도메인비와 웹호스팅 비용 연 5만 원입니다."

 

 



법정을 다니고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김남권 씨는 정희상 기자와 수시로 통화했다. 압박이 심한 글은 지워야 할지도 물었다. 곧 후속취재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정희상 기자는 성량이 매우 컸다. 김남권씨는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에 수염이 덮여있을 듯한 풍채를 떠올렸다. 그런데 강릉에 온 정희상 기자는 키가 작고 배가 나온 동네 아저씨 모습이었다. 정 기자는 하루를 훑고 갔다. 취재를 설렁설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술도 엄청 마셨다. 하지만 며칠 뒤 기사 내용은 작은 부분까지 정확했다.

강릉시가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이듬해인, 2012년 2월 9일 기각됐다. <강릉MBC>는 '강릉시, 시사IN·하이강릉 명예훼손 소송 패소'라는 뉴스를 내보냈다. 그리고 국회의원 권성동과 친척 권은동은 2012년 4월 18일 소취하서를 제출했다.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일까.

정희상 기자는 박원순과 경쟁하던 서울시장 후보였던 나경원에 대해 2011년 10월 20일 '나경원, 억대 피부클리닉 출입 논란' 기사를 올렸다. 월세 250만 원을 내는 박원순 후보를 향해 서민시장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던 나경원 후보가 강남 지역에서 초호화급으로 분류되는 피부 클리닉에 상시 출입했다는 사실을 취재한 것이었다.

 

이 기사는 포털에 톱으로 뜨면서 일파만파가 됐고 나경원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다. 나경원 후보가 무너지는 걸 보면서 권성동 의원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아무 조건 없이 소를 취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김남권 씨가 한 일은 <시사IN> 기사 '펌질'이었다. 그 펌질은 강릉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강릉시민들이 서점에나 전시되어 있는 <시사IN> 잡지를 굳이 사서 보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스마트폰이 보급되지 않은 시기라 네이버 '뉴스캐스트'에 걸린 뉴스라도 퍼지기 힘들었다. 게다가 강릉 인구 22만 명은 서울처럼 밀집한 인구가 아니라 분산된 형태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는 인터넷이 닿지 않기도 한다.

 

인터넷이 되더라도 문맹인구가 있어서 방송사가 가장 좋은 유통 수단이다. 공간은 정보채널만이 아니라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가 발생했다. 용산 재개발 과정에서 원래 세입자들이 받은 보상금으로는 도저히 다른 곳에서 가게를 열 수 없었다. 세입자들은 거칠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강제진압을 지휘한 김석기 경찰청장은 2012년 총선 때 경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용산 유가족들은 김석기 후보를 따라다니며 사퇴를 요구했다.

 

이를 바라보는 경주시민들 눈길은 차가웠다. 당선 가능성도 없는데 왜 왔느냐, 용산 문제는 용산에서 해결하라 같은 핀잔이 나오곤 했다. 서울에서 '용산참사'를 보도한 중앙언론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본 대구 <뉴스민> 천용길 기자는 재개발 문제를 보는 관점에서 서울 사람과 경주 사람이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주는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개발 경험이 거의 없는 곳이다.

 

땅 소유자들은 재산권을 행사하고 싶지만 건물 고도제한 등에 걸려 한계가 있다. 세입자 사정 또한 다르다. 서울보다 전세·월세 자금 부담이 적어 세입자들이 나가더라도 갈 곳이 있다. 강제철거 문제에 대해 서울 사람들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지역에서 강제철거 문제를 인권 문제로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담론으로 뭐가 있을까. 천용길 기자는 이렇게 제안했다.

"대구만 해도 세계육상 선수권대회를 위해서 동대구와 멀지 않은 감나무골에 쪽방촌과 비슷한 곳이 있는데 그곳을 안 보이도록 철거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지역에서 용산 철거 문제를 납득시키는 것보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구체적인 삶을 예로 들면 공감을 끌어내기가 더 쉽지요. 그 사람들 목소리를 담아내면서 우리 지역 문제와 용산참사가 다른 문제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또 다른 예가 있다. 2011년 하반기에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가 한국사회를 요동쳤다. 2011년 10월 YTN <이슈 앤 피플>에서 도가니 열풍으로 작가 공지영을 인터뷰했다. 사회자가 책을 쓴 계기를 묻자 공지영은 이렇게 답한다.

"오래된 일인데 쇠고기 때문에 촛불시위가 불이 붙던 때 우연히 신문 한 귀퉁이에 재판 스케치 기사를 읽었어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이상한 사건이더군요. 취재가 시작됐지요. 대부분 자료로 사건을 접했어요. 판결문도 있고…. 정말 있을 수 없다고 느꼈고 어떻게 이런 걸 아는 분들은 가만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많았어요.  (도가니라는 제목은) 이 사건을 취재했을 때 처음 느꼈던 것이 그거였어요. 어떻게 이렇게 집단적으로 이상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집단적으로 이렇게 눈감을 수 있을까? 이것은 한 명의 이성도 없이 전체가 이상한 것에 휩싸여버린 도가니 같은 상황이 아닐까 해서…."

공지영은 <도가니> 관련 각종 인터뷰에서 대부분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인터넷에는 광주·전남 지역 언론 기자들이 토호들과 결탁된 사이비라고 말하는 누리꾼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정작 광주 언론인들은 억울했다. 공지영이 본 스케치 기사를 쓴 <한겨레> 인턴 기자에게 청각장애인 관련 재판이 있다고 가보라고 권유한 것도 그들이었다. <광주드림>이나 광주 <시민의 소리> 등 언론사는 초기부터 뒤지지 않을 만큼 꾸준히 보도를 했다고 자부했다.

그들은 비리가 이렇게 불거질 동안 지역은 가만히 있었다는 시선이 답답했다. 광주KBS는 2011년 영화를 통해 국민적 관심이 쏠리자 해당 사건 관련 테이프를 찾으려고 보관소를 찾았다. 10년 전 비디오테이프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취재 분량도 상당했다. 그렇다면 당시 사건은 광주·전남 지역민에게 제대로 보도됐을까.

전라도의 낙후성은 매체 환경에서도 드러난다. 청산도, 보길도 같은 완도군 부속 도서는 난청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제주도 뉴스만 나왔다. <광주일보>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완도군 부속 도서에 사는 사람은 제주 지역뉴스 양대 산맥인 감귤 시세와 관광객 수를 확인하는 데 익숙했다.


섬은 광주·전남지역 신문도 배달하기 부담스러운 지역이다. 광주·전남지역 사람은 지역 언론이 아닌 중앙언론을 통해 인화학교 사건을 알게 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이들이 광주·전남 매체에서 이 사건을 보도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물론 우리나라도 서울과 지역을 연계하는 전국 네트워킹 체제를 제법 갖췄다. 언론계에서는 MBC문화방송이 대표적이다. 이런 네트워킹 체제를 가진 MBC는 파업 투쟁에서도 효과적이다. MBC 파업투쟁은 결국 정부를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농민회 투쟁과 비슷하다.  균형발전과 투쟁력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계속해서 살펴보자.   

 

(다음 제6화 대구도 항구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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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경찰청장까지)

 

 

외사 수사과(당시 외사3과)는 인터폴에 보내는 공문을 담당한다. 외국으로 도망간 피의자 범죄 내용은 외사과로 들어온다. 외사과 직원은 영어로 사건 개요를 작성해 피의자가 도망간 국가로 보낸다. 조현오가 외사3과장일 때 좋은 소식이 들렸다. 2004년 4월 선배인 허준영이 경찰청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허준영은 2005년 1월 경무관 인사를 단행했다. 조현오도 인사 대상이었다. 경무관이 되면 보통 지방청 차장급으로 출발한다. 당시 경무관 ‘3대 보직’은 정보심의관, 외사관리관, 감사관이었다. 여기에 서울청 경무부장과 정보관리부장까지를 ‘5대 보직’이라고 한다.

 

조현오는 외사관리관이 됐다. 관리관, 심의관, 기획관 등 ‘관’이 붙는 직책은 기관 고유 업무가 아닌 기관장 보좌 역할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당시는 업무성격과 관계없이 주로 ‘국’은 치안감이 ‘관’급 부서는 경무관이 맡는 식으로 구분됐다.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몇 가지 과제를 맡겼다. 외사국 승격과 더불어 주재관 인원수를 30명 늘리라고 지시했다. 당시 교통관리관실도 교통국으로 승격하고자 애썼다. 먼저 움직인 교통관리관실을 제치고 외사관리관실이 승격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거니와 모양새도 나빴다. 주재관 인원을 갑자기 30명이나 늘리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조현오는 모두 해낸다. 2006년 외사관리관실은 외사국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정작 일을 시킨 허준영은 그 전에 경찰청장에서 물러난다. 2005년 11월 15일 여의도에서 한미FTA 반대 집회 중 농민 두 명이 사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2006년 2월 10일 이택순이 경찰청장으로 취임한다. 이택순은 조현오에게 ‘감사관’을 맡기고자 했다. 감사관은 감사·감찰 업무를 맡는다. 주변 압력을 견뎌내야 하고 뒷거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택순은 신중하게 적임자를 수소문했고 조현오를 선택한다.

 

2006년 말 조현오는 치안감으로 승진한다. 보직은 경비국장이었다. 2007년 4월 한화 회장인 김승연이 보복 폭행을 저질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5월 한화 고문과 이택순이 통화한 사실이 드러난다. 경찰청장 로비 의혹이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이택순은 자기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맡길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다. 경찰청장이 경찰 치부에 대한 수사를 검찰에게 맡긴다는 건 조직 안에서 용납되기 어려웠다. 경찰대 1기 출신인 황운하 총경은 경찰 내부 게시판에 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고 징계를 당했다.

 

경찰 내부 논의체인 전국지휘관 회의에서도 같은 의견이 나왔다. 전국지휘관 회의에는 지방청장, 국관, 본청 직속 기관장 등이 참석한다. 치안감 급은 대부분 참석한다고 보면 된다. 이 회의에서 이택순에게 퇴진을 권한 사람은 네 명이었고 그중 한 명이 조현오였다.

 

하지만, 네 명 가운데 이택순과 매일 마주치는 사람은 조현오뿐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근무지가 서울 밖이었다. 이택순은 조현오를 ‘시저를 찌른 브루투스’라고 빗대며 섭섭함을 드러냈다.

 

 

경찰청 직원은 청장 눈치 때문에 조현오를 멀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현오를 다독인 사람은 종합경찰학교장 김석기였다. 적어도 김석기는 조현오를 인정했다.

 

2008년 2월 11일 어청수 경찰청장이 취임한다.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보직을 옮긴다. 그해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집회가 열린다. 광화문 집회가 길어지면서 전국 전·의경 200개 중대가 집회에 투입된다. 청와대 바로 앞인 내자동 로터리가 뚫리자 어청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청수는 7월 22일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김석기에게 맡긴다.

 

2009년 1월 18일 서울지방경찰청장인 김석기는 차기 경찰청장으로 내정됐다. 김석기는 1월 29일 어청수가 퇴임하자 청장 역할을 맡는다. 공식 임명은 되지 않았지만 경찰청 수장 자리를 비워둘 수 없었다. 김석기는 치안정감 명단에 조현오를 넣는다.

 

<서울지방경찰청장 주상용. 경찰대학장 김정식, 경찰청 차장 이길범. 경기지방경찰청장 조현오>

 

하지만, 김석기는 2월 10일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한 달 뒤에 사퇴하면서 경찰청장에 오르지 못했다. 다음 청장 후보군에 눈길이 쏠렸고 조현오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그러나 치안정감이 되고 갓 일주일을 넘긴 조현오는 준비되지 않았다.

 


 

2009년 2월 15일 새 경찰청장에 해경청장인 강희락이 임명된다. 이후 조현오는 강희락 청장에게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쌍용자동차 노조 진압으로 청와대 인정을 받았다. ‘용산참사’처럼 사망자 없이 정리했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조현오는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임명된다.

 

조현오는 당시 서울청장 자리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 경비통이 필요했다. 2010년 11월 11일 G20 서울정상회의를 앞두고 경찰은 요인 보호를 위한 시뮬레이션을 끝없이 반복한다. 그 책임자가 조현오였다.

 

2010년 8월 9일 조현오는 청와대 측으로부터 경찰청장으로 내정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인사청문회를 앞둔 8월 14일, KBS는 5개월 전 조현오가 서울경찰청 기동대 지휘관 내부 강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를 언급했다고 보도한다. 8월 18일 변호사 곽상언(노무현 전 대통령 사위)은 ‘사자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한다.

 

경찰 안에서는 조현오가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조현오 사퇴를 요구하는 야당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조현오는 8월 30일 청와대에서 경찰청장 임명장을 받는다.

 

조현오에게 ‘빽’은 자신을 인정하고 등용한 상사였다. 하지만, 조현오가 자신을 인정한 상사 힘만 빌려 경찰청장이 될 수는 없었다. 역시 ‘관운’이 받쳐줘야 한다. 그렇다면, 그 ‘관운’이라는 게 과연 뭘까.

 


 

허준영, 김석기가 자신을 아낀 것처럼 조현오도 ‘차기 경찰청장’ 후보를 키우고자 했다. 조현오는 2011년 11월 능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차기 경찰청장 후보들을 치안정감으로 전진 배치했다. 그는 그 치안정감 중에서 경찰청장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종준 경찰청 차장, 이강덕 서울지방경찰청장, 이철규 경기지방경찰청장, 강경량 경찰대학장, 서천호 부산지방경찰청장>

 

조현오가 기대했던 미래 청장들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경찰청 차장인 박종준은 2011년 12월 말 사퇴한다. 2012년 총선 출마를 위해서였다. 이철규(간부후보 29기)는 2012년 2월 29일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 건으로 구속된다.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귀는 할 수 없었다. 이철규가 구속되면서 경기지방경찰청장은 서천호가 맡는다. 하지만, 불과 1개월 뒤에 ‘오원춘 사건’이 터졌다. 조현오는 이 사건 책임을 지고 4월 9일 기자회견을 열어 사퇴 뜻을 밝혔다. 하지만, 서천호에게 ‘오원춘 사건’은 악재로 작용했고 그 역시 경찰대학장으로 경력을 마감한다. 이강덕, 강경량 모두 경찰청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조현오가 자진사퇴를 했다면 봉하 쪽에서 차명계좌 발언을 더 문제 삼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누구보다 경찰청장이 되고 싶었다. 인사청문회에 나선 조현오는 의원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존경하는 위원님, 저에게 경찰청장이라는 중책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하여 경찰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겠습니다.”

 

참모는 지휘관과 달리 자기 색을 드러낼 수 없다. 조현오가 참모시절 건의를 하면 경찰청장들은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며 한 가지 충고를 덧붙였다.

 

“나 혼자 잘 되려고 이러는 줄 아느냐?”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너는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다.”

 

조현오는 전임자 조언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경찰청장 해보니까 다 뻥이야.”

 

경찰 조직에서 가장 큰 권한인 인사권과 감찰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한 경찰은 조현오를 ‘황야의 무법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자기 하고 싶은 것은 원 없이 다 누렸다는 얘기다.

 

 

다음에는 조현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전·의경 가혹행위 근절’ 과정을 짚어보겠다.

 

(다음 5화-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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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경찰인재개발원(과거 경찰종합학교)은 경찰 공무원과 경찰간부 후보생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다. 김헌기가 경찰종합학교 교무과장으로 온 것은 2007년 7월이다. 송도 모 초등학교 유괴사건이 일어난 지 몇 달 후였다.

 

대전서부서장을 하고 있어야 할 황운하 선배(경찰대 1기)가 이미 총무과장으로 와 있었다. 당시 이택순 경찰청장이 황운하를 소위 날려버린 것이다.

 

황운하 총무과장은 사무실에서 많은 시간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업무를 포기한 듯 보였는데 그럴 만도 했다. 김헌기가 교무과장으로 왔을 때 경찰청이 황운하에 대한 징계 절차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황운하가 이택순 청장 퇴진 요구 글을 경찰청 게시판에 올렸기 때문이다.

 

사건 발단은 이렇다.

 

송도초등학교 유괴사건이 벌어진 2007년 3월,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이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보복 폭행한 사건도 벌어졌다.

 

폭행이 벌어진 날 112 신고가 접수돼 남대문 경찰서에서 출동하자 한화건설 고문이면서 전 경찰청장인 최기문은 전방위 로비에 나섰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시 경찰청장 이택순이 개입했는지 여부였다.

 

이택순은 결백을 주장하며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카드를 꺼낸다. 2007년 5월 경찰청 게시판에는 이택순 청장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왔다.

 

퇴진 요구는 황운하만이 아니었다. 전국지휘관 회의에서 고위간부(치안감) 다섯 명이 이택순에게 청장 사퇴를 건의했다.

 

 

그중 한 명이 당시 경찰종합학교장이던 김석기다. 이택순은 황운하를 징계한 것처럼 그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김석기는 더 이상 좌천될 자리가 없었다.

 

 

 

김헌기는 이런 유배지 같은 직장 분위기 속에서도 업무를 챙기기 시작했다. 김헌기 과장이 맨 처음 한 일은 교수 '군기잡기'다. 형식적으로 진행하던 교수평가제를 매달 진행했다. 하위 점수를 받은 교수는 학교장 앞에서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다.

 

인자한 미소를 띠는 김석기 학교장 옆에서 김헌기는 허리 꼿꼿한 자세로 앉아 뚫어지게 교수들을 쳐다보며 설명을 들었다. 게다가 김헌기 과장은 직접 형사들 수업시간에 들어갔다.

 

송도초등학교 어린이 유괴사건에서 경찰이 수사지휘를 잘못한 부분도 수업 시간에 짚었다. 자신과 관련된 내부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당시 범인을 잡은 형사에게도 전화했다.

 

이 형사는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했다.

 

“그때 김헌기 과장님이 신임 형사 교육에 인질사건 교육을 넣어야겠다면서 와서 교육시키라고 그랬어요. 이렇게 사회적으로 공분을 일으킨 큰 유괴나 인질 사건에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면서.”

 

이 형사는 현재 인천 일선 경찰서 형사과장이다. 그런데 그는 경찰이 이 사건에서 엉터리였다고 여기는 김헌기와 생각이 달랐다.

 

"당시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 범인이 공중전화로 전화할지 모르니까 길거리에서 빵과 김밥 먹으면서 3~4일 동안 잠 한 숨 안 자면서 움직였어요. 지금처럼 실시간 위치 추적하는 것도 아닌데 범인을 사흘 만에 잡은 것은 엄청 빨리 해결했다고 생각해요."

 

당시는 CCTV가 드물었고 실시간 위치추적 시스템은 없었다. 유괴범은 첫날 아이를 죽이고 공중전화로 녹음기를 틀어 아이 목소리를 들려줬다. 결과적으로 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아이는 이미 죽었다. 경찰 잘못으로만 몰아갈 수 있을까. 당시 범인을 잡은 형사 시각에서 2007년 3월 송도초등학교 어린이 유괴사건을 살펴보자.

 

 

<영화 그놈 목소리 2007년>

 

“이형호 어린이 유괴사건을 다룬 영화 <그놈 목소리>가 2007년 2월 1일에 나왔어요. 그런데 그 유괴범이 공중전화로 똑같이 흉내 냈어요. 공중전화 추적시스템을 설명하면... 유괴범이 공중전화로 전화를 해요. 그때 감청 중이니 전화국에 번호가 뜨지요. 그러면 그 전화번호를 형사지원팀에 무전으로 불러줘요. 그럼 어느 공중전화인지 다 나와요. 해당 공중전화 담당 형사를 보내지요.

 

유괴범은 인천, 부천, 시흥 등을 옮겨 다니면서 전화했어요. 유괴범이 돈가방을 어디로 들고 오라고 해서 가면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다른 부서 경찰들이 나타났지요. 당시 인천 경찰을 대부분 동원해서 모두 무전기를 듣고 있으니 다른 과에서 특진 욕심에 덤벼들곤 했지요.

 

결국 유괴범을 잡은 결정적 단서는 7차 협박 전화였어요. 그곳은 당시 김헌기 수사과장님 사는 아파트 단지 근처였는데 제가 거기 공중전화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다 회수했고 그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가서 담배를 산 사람과 인상착의 등을 물었지요. 슈퍼 주인이 알려준 단서를 김헌기 수사과장에게 보고했습니다."

 

김헌기는 처지에 따라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전체적으로 시스템을 관리하는 쪽에서 이 사건을 보는 것이고 형사들은 추적하는 처지에서 고생한 게 가장 크겠지요."

 

그럼에도 김헌기는 송도초등학교 유괴사건 수사를 '쪽팔리다'며 박하게 평가했다. 그리고 수사본부에서 감청을 들으면서 유괴범 전화가 걸려오면 즉시 현장에 무전을 치면서 '개지랄' 떨었던 사흘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제야 모두 16번에 걸친 협박 전화에도 범인을 빨리 잡지 못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간 경찰은 개인역량에 좌우되는 조직이었다. 그러다보니 경험을 쌓기가 힘들고 평상시 실전형 현장 훈련, 즉 FTX(Field Traning Exercise)가 부재했던 것이다.

 

유괴사건은 매우 드물게 발생하지만 사회적 여파는 매우 크다. 그런데 경찰이 평상시에 이러한 사건을 가정하여 훈련을 받은 게 없다. 협박전화는 감청을 통해서 추적해야 한다.

 

감청영장을 받아와서 전화국에다가 감청기 설치하고 들어야 발신지를 추적할 수 있다. 감청영장은 신청 상황은 너무 급하기 때문에 재빨리 내준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요?"

 

영장 갖고 집행을 하니 엉뚱한 전화국이었다. 그래서 재영장신청을 해야 했다. 범인은 당시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범인이 어느 공중전화를 이용할지 모르기 때문에 당시 수사본부는 자료에 근거해서 인천 전 지역 공중전화에 경찰들을 잠복시켰다.

 

한 전철역 광장에 설치된 공중전화는 열 개인데 형사 10명이 배치됐다. 그런데 그 공중전화는 나란히 붙어 있는 상태였다.

 

공중전화가 이미 없어진 곳에도 형사는 배치됐다. 수사본부에서는 전화가 오면 감청을 해서 들었다. 번호가 뜨면 빨리 인상착의를 파악하라고 지시하려고 공중전화 담당 직원에게 무전을 친다. 무전을 받은 담당 직원은 밥 먹는 중이라고 보고했다.

 

 

범인은 계속 돈을 요구하는 전화를 했다. 한 지역 공영주차장에 현금을 갖다 놓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경찰이 따라붙으면 애를 죽이겠다고 경고했다.

 

수사본부는 형사를 택시기사로 변장시켰다. 택시 뒷좌석에도 형사가 드러누웠다. 피해자는 돈가방을 들고 접선지로 갔다. 나머지 경찰은 범인이 접근했다 도망갈 길목에 배치했다.

 

그런데 그곳을 지켜야 할 경찰들이 특진 욕심에 모두 공영주차장으로 몰려왔다. 김헌기 수사과장은 무전기에 대고 소리 질렀다.

 

"지금 뭐하는 거야! 빨리 원위치!"

 

유괴범은 사흘 만에 잡혔지만 이 모든 수사 과정은 김헌기 가슴에 시리게 남았다. 유괴사건, 인질 사건이 발생하면 아주 뛰어난 형사가 해결하면 다행이나 그렇지 못하면 사회적 여파가 너무 크다.

 

협상 요원이 있다면 유괴범이 전화할 때 옆에서 피해자에게 메모를 건네서 코치할 수 있다. 그런 시스템 필요성은 같은 시공간에서 우후죽순처럼 자랐다.

 

정신적 문제, 사회 불만, 충동 범죄, 보복 범죄 등 다양한 원인으로 형사 인질사건이 벌어졌다. 이런 사건들은 지역별로 빈번하게 벌어졌고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가는 남성이 담배 피며 욕설을 내뱉는 고등학생 머리를 툭 쳤다가 폭행죄로 불구속 입건되는 현실이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질극이 제대로 벌어지면서 장시간 대치하는 상황이 생기고 언론사가 몰려와 취재하면서 인질 대응 필요성이 부각됐다. 대표적인 게 2010년 7월 24일 서울 중랑구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결혼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여자 친구를 인질로 붙잡은 사건이다. 여자 친구 어머니는 흉기로 살해됐기에 사회적 여파가 컸다.

 

인질 대응 기구는 2014년 구체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체계 구축을 밀어붙일 지휘관도 나타났다. 바로 경찰청 강력범죄수사과장(현 형사과장) 김헌기다.

 

강력범죄, 폭력, 마약, 조직 관련 업무를 총괄하며 소관업무와 관련된 기사들을 예의 주시한다. 그 해 1월 23일 부정 승차하는 20대를 붙잡은 교사가 폭행 혐의로 체포되는 기사가 나왔다. 경찰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이런 크고 작은 폭행뉴스들은 그 해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에 침몰당한다. 바로 유병언 추적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는 비상시국으로 전환됐다. 김헌기 과장이 있는 강력범죄수사과는 주무부서였다.

 


2014년 7월 21일 저녁 김헌기 과장 사무실에 전화가 울렸다. 국과수 원장 서중석이었다.

 

6월 12일 전남 송치재 휴게소 인근 매실밭에서 심하게 부패된 시신이 발견됐는데, 서중석 원장은 이 변사체 유전자를 검사하니 유병언 씨로 보인다고 했다. 당시 경찰은 단순 변사사건으로 처리했다. 당연히 경찰청 보고는 없었다.

 

김헌기와 서중석 사이에 DNA 결과를 보완할 수 있는 자료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이후 40일이 지난 7월 23일 DNA 확인을 거치고 유병언 시신으로 확정된다.

 

그때서야 검찰은 경찰과 정보공유를 하지 않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수사과정에서 잘못된 일이 있었다면 지휘관인 본인 책임”이라며 최재경 인천지검장에 이어 이성한 경찰청장도 부실 수사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2014년은 김헌기가 경무원 승진을 도전하는 해였다. 얼마 후 민정수석실에서 전화가 왔다. 인사검증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들려온 모양이다.

 

“김헌기 씨가 유병언 변사처리 업무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에게 그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성한 경찰청장이 그 책임을 지고 나갔지 않습니까?”

 

김헌기는 그에 견줄 만한 업무성과를 내세웠다. 특히 정당행위 체크리스트를 강조했다.


학생을 훈계하는 과정에서 어깨나 머리를 툭 친 것도 그간 폭행 혐의로 입건할 수 밖에 없었다. 피해자가 진단서까지 제출하는 상황에서 형사 개인이 법리적 반박과 더불어 커지는 수사 범위와 민원을 감당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이는 분명 사회통념에 배치되는 결과다. 경찰청 강력범죄수사과장인 김헌기는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풀고자 전문가를 모았다. 판례를 모두 뒤져서 정당행위 판단 항목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마침내 ‘정당행위 검토서’ 체크리스트가 완성됐다. 사건이 벌어지면 각 경찰서 형사과장이 위원회를 열어 정당행위 판단 항목에 해당하는지 살펴보고 검찰에 송치하도록 했다.

 

김헌기는 그동안 업무성과로도 승진을 자신했지만 확실한 굳히기가 필요했다.

2014년 12월 4일 팔달산 토막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등산로에서 한 등산객이 토막 난 시신이 담긴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경기지방경찰청에 수사본부를 차렸으나 일주일 동안 수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김헌기 과장은 범인 잡을 방법을 궁리했다. 그리고 뭔가 딱 떠올랐다.

 

김헌기는 11일 출근과 동시에 경찰청장에게 보고했다. 승인이 떨어지자 경찰 신고포상금 최고액 5000만 원을 언론에 알렸다. 범인은 12시간 만에 잡혔다.

 

당시 대다수 언론은 공개수사 전환을 ‘신의 한 수’라고 극찬했다. 김헌기 경무관 승진 인사 3일 전이었다.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제1부는 여기서 마칩니다.  2부는 2020년 가을에.)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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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2화. 장자연 사건

 

 

필자가 다시 조현오를 만난 곳은 서울시청 근처 코리아나 호텔 식당이었다. 이곳에서 조현오는 경찰청장 시절 당시 청와대 ◯◯ 수석과 언쟁이 있었다고 했다.

 

식사를 마칠 때쯤 <나꼼수>에서 주진우 기자가 망쳤다고 주장한 사건이 떠올랐다.

 

“여기 왔으니 안 물어볼 수 없네요.”

 

2009년 ‘장자연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수사를 지휘한 경기지방경찰청장이 바로 조현오다.

 


 

2009년 3월 7일 배우 장자연 씨가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검시 결과 타살 혐의점은 찾지 못했다. 경찰 결론은 ‘우울증’으로 말미암은 자살이었다.

 

연예인 자살로 마무리될 사건은 매니저 유장호 씨가 이른바 ‘장자연 문건’을 공개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문건은 소속사 대표 김 씨가 성접대를 강요한 정황을 드러냈다. 장자연 씨 유족은 매니저 유장호 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더불어 소속사 사장 김 씨 등도 고소했다.

 

조현오는 “경찰 자존심을 걸고 철저히 수사하겠다”라고 밝혔다. 자살로 매듭지은 사건을 재수사하기 위한 본부가 분당경찰서에 설치됐다. 실력이 출중한 경기지방경찰청 형사과장까지 투입됐다.

 

사람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문건에 나온 ‘조선일보 방 사장’이었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코리아나 호텔 방용훈 사장’, ‘스포츠조선 부사장 방성훈’ 등이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경찰 수사 과정에서 방 사장은 그저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성매매 혐의는 증명되지 않았고 당연히 처벌도 없었다. ‘부실 수사’라는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한 정치인은 ‘장자연 사건’ 진실을 은폐하는 주도자로 조현오를 지목했다. 조현오가 이 사건에서 주목했던 것은 뭘까.

 

“장자연 변사 사건 수사에서 핵심이 뭘까요?”

 

“자살이냐 타살이냐?”

 

“그렇지요. 타살 혐의가 없으면 경찰은 자살 동기까지 반드시 밝혀야 하는 부담은 없어요. 게다가 장자연 씨가 죽은 상황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가 혐의를 부인하면 진술 신빙성을 어떻게 밝혀내요?”

 

경찰은 국내 언론 보도 행태에 나름 불만이 있다. 경찰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을 극성스럽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찰이 장자연 사건 수사가 부실하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현 오니까 그 정도 밝혀낼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장자연 씨 소속사 대표 김 씨는 일본에 있었다. 김 씨는 이미 2008년 12월 일본으로 출국했고 사건이 터지자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용의자가 경기지방경찰청 관할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 씨를 어떻게 잡아들여야 할까.

 

결국, 일본 경찰 손을 빌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외국 경찰 힘을 빌리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방법으로 국제기구인 인터폴(Interpol)을 거치는 방법이다. 경찰청 외사국을 통하면 되는데 역시 시간을 제법 들여야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시간보다 더 큰 문제가 따로 있다. 어느 나라 경찰이든 우선순위는 자국 범죄다. 일본 경찰이 한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일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터폴로 수배가 들어온 범죄 사안이 살인이나 국제적 사기 혐의도 아니다. 김 씨에 대한 혐의 내용은 ‘강요와 상해’다. 일본 경찰이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시급한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

 

두 번째 방법이 바로 주재관을 통하는 것이다. 주재관으로 나간 한국 경찰이 평소 일본 경찰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이럴 때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사건 용의자를 빨리 검거할 수 있도록 일본 경찰 관심을 끄는 게 주재관 역할이다. 김 씨를 잡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2009년 3월 30일 경기지방경찰청은 외교부에 여권 반납 명령을 의뢰했다. 김 씨를 불법체류 신분으로 만들어 압박하는 것이다. 결국, 김 씨는 6월 24일 일본 도쿄에 있는 P호텔에서 붙잡힌다.

 

지휘관이 모든 내용을 꿰뚫고 지시하는 것과 아랫사람이 파악한 내용대로 끌려가는 것은 차이가 크다. ‘장자연 사건’은 전자였다. 지휘관이 외무고시 출신으로 외사경찰 업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무고시 출신이 무슨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경찰에 온 것일까?

 


 

조현오는 어릴 적부터 제복을 동경했다. 까만 경찰복을 입고 금테 두른 모자를 쓴 부산 동래경찰서 직원들이 무리를 지어 걸어가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당시 조현오가 고등학생 시절 즐겨 본 연재만화에서 경찰서 형사과장은 권력의 정점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가정 형편 때문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했다. 1981년 외무부 근무를 시작한 조현오는 그곳에서 선배인 허준영을 알게 된다. 88 올림픽을 계기로 경찰은 ‘국제화’를 위해 외무고시 출신을 수혈하고자 했다. 이때 조현오는 특채로 선발된다. 허준영은 그보다 앞서 경찰로 자리를 옮겼다.

 

경찰서 계급 구조는 ‘순경-경장-경사-경위-경감-경정-총경’이다. 고시 출신은 교육을 거쳐 경정으로 시작한다. 즉 형사과장, 생활안전과장, 경비과장 같은 참모 역할이다. 하지만, 지방청으로 가면 직급은 한 단계 낮아진다. 일선 지방청 계장급은 경정이다. 총경은 일선 경찰서에서는 ‘서장’이지만 지방청에서는 참모인 ‘과장’이 된다.

 

경찰대와 간부후보생 출신은 ‘경위’에서 시작한다. 조현오는 간부후보생 39기와 함께 교육을 받았다. 실습교육 장소는 부천경찰서였다. 부천경찰서 형사계장(경감)은 조직폭력배를 상대하다 무릎에 남은 흉터를 보여주곤 했다.

 

당시 조현오는 저런 멋진 형사보다 한 계급 위로 갈 수 있어 뿌듯했다. 19년 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부임한다. 조현오를 가르쳤던 형사계장은 장자연 사건에 투입된 경기지방경찰청 형사과장으로 만나게 된다.

 

조현오 첫 보직은 부산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었다. 직원들은 외무고시 출신 과장이 신기했다. 사실 경찰 입문 교육을 받을 때부터 고시 출신에 대한 대접은 남달랐다. 그리고 그 후로도 조직 내 출세 가도를 달렸다.

 

조현오는 자신이 좋아서 경찰을 선택한 만큼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경찰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조현오에 대한 직원들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렸다. 이 같은 평가는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이 한몫을 했다.

 

한 지방청에 근무하는 과장이 들려준 경험담이다. 이 과장은 조현오 청장과 일을 하면서 초반에 눈 밖에 났다.

 

“보고서를 들고 가니 왜 들어오느냐고 바로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계장과 광수대장을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내 보고는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지. 다른 두 명에게 보고를 받는데 너무 민망하고 부끄럽고….”

 

이후에도 조현오가 직원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장면은 종종 목격됐다.

 


 

반대로 서울구치소 수감 중에는 어쩌다 마주친 해고노동자들로부터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들었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운동시간에 무심코 지나가다가 조현오 어깨를 살짝 건들기라도 하면 그 사람에게 경고를 보내는 이가 있었다.

 

“운동시간에 젊은 사람이 다가와서 깍듯이 인사를 하더라고요. 같이 목욕하기 전에는 그냥 예의 바른 젊은이인 줄 알았지요.”

 

그는 조폭이었다.

 

역설적으로 조현오는 경찰 시절 조폭을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부산청장 시절 조폭이 공중목욕탕을 이용하는 것을 막았고 자금줄도 차단했다.

 

부산청장 시절 “조폭이 흉기를 들고 공격하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총으로 쏴버려라.”란 발언을 한 것도 그였다. 그런 그에게 조폭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현오 청장님을 제일 좋아하고요. 두 번째는 김석기 청장입니다.”

 

조현오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한참 생각하다 “화끈한 사람을 좋아하나”라며 되묻는 정도였다.

 

조현오는 경정으로 입문하여 20년 만에 경찰청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외무고시 출신이고 명석한 사람이다. 그를 결국 감옥으로 보낸 ‘차명계좌’ 발언도 우발적이라기보다 충분히 계산하고 한 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강할수록 고위직 인사의 능력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실력보다 눈치, 아부에 능해야 고위직을 차지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조현오 역시 그런 의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어떻게 경찰청장까지 올랐을까. 경정에서 치안총감까지 5개 관문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글쓴이 : 서형 seohyung224@gmail.com

 

(다음 3화-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구겨진 제복 목차

⦁제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제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제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제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제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제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제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제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제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제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제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제12화. 조현오의 조직 장악 비결은 '감찰'

⦁제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제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제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제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제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제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제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제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붙인 까닭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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