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2011년 4월 11일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서울에서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몇 달 전 강남에 작은 사무실을 빌려 시민사회단체 간판을 달았다. 대한민국 특정 연령층의 권익향상을 내용으로 하는 단체였다. 그 연령층에 화두가 되는 질문지를 국회의원 후보자에게 보냈다. 질문지는 수도권 대학에서 관련 전공 분야 교수들을 참여시켜서 만들었는데 프로젝트를 원하는 교수를 모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질문지를 발송하면 후보자는 선거운동 때문에 바빠서 주로 정책 담당 비서관에게 전화를 계속한다. 이 시민단체는 지역구가 없이 비례대표로 당선된 국회의원은 제외했다. 오직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자들에게 응답을 받아냈다.

 

후속 작업은 언론플레이였다. 이를 위해서는 평소 중앙언론 기자들과 유대관계를 맺어둬야 한다. 설문에 응답한 후보 가운데 일부는 국회의원에 당선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낸 답변을 모아 언론에 공표한다.

 


 

이번에는 부산의 움직임을 보자.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방분권 실현을 위한 부산시민회의라는 단체가 출범했다. 부산 시민단체들을 비롯해 정관계, 예총, 민예총 직능단체, 약사회, 변호사회, 노무사회 등을 망라해 이름을 올렸다. 부산시민회의는 부산지역 총선 후보자에게 10가지 시민의제를 만들어 발송했다.

 

그 의제에 대한 공약 채택 여부를 물었다. 부산 사상구에 출마한 문재인, 손수조를 포함하여 지역구 18곳에 출마한 60명이 넘는 후보자에게 약속을 받았다. 지방분권형헌법개정,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 폐지, 지역정당 설립 등 지역정치결사 자유권 확대보장 등이 눈에 띈다.

 

 

 

지방분권형 헌법 개정이란 프랑스가 2003년 3월 17일 지방분권 개헌안 통과시켜 헌법 1조를 ‘프랑스는 지방분권형 국가이다’라고 바꿨던 것처럼 우리도 지방자치단체의 고유 법률과 재정 독립을 추진하고 지역을 헌법상 기구로 격상하자는 것이다. 부산시민회의는 이런 취지에 동감한 국회의원 후보자 답변을 각 언론기관에 배포했다. 모두 부산지역 후보자였기에 대부분 부산일보를 비롯한 지역 언론에서 보도가 나갔다.

 

여기까지는 서울이나 부산이나 다름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부산시민회의는 국회의원 당선자에 대한 점검 단계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선 국면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에 있던 시민단체는 움직임이 더욱 분주해졌다. 바로 신문 창간으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답변을 받아낸 국회의원들에게 창간 축사를 부탁했다. 처음에는 새누리당 의원 8명, 민주통합당 의원 2명이 축사를 보냈다. 단체 대표는 민주통합당 비서관에게 전화했다.

 

“새누리당은 8명인데 민주통합당은 2명밖에 참여 안 하셨네요. 이 연령층 표를 버리는 건가요? 앞으로 대선도 있는데!”

 

그렇게 여야 게임을 붙이자 축사를 보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수는 12명이 됐다. 대표는 다시 새누리당 정책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주통합당은 이렇게 적극적인데 지금 당신들 당에서는 뭐 하는 건가요?”

 

그렇게 시소게임으로 가면 조직이 커진다고 했다.

 

 


이 작업으로 대표는 양당 의원 25명씩 모두 50명에게 축사를 받아냈다. 이 단체 회원 수는 축사 수보다 적다고 했다. 대표는 국회의원 축사가 광고와 정기구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기구독은 각 지역구에 있는 계도지 예산에서 충당될 것이다.

 

지역 언론은 지역단위에서 행정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 역할을 한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계도지 예산이 가장 많은 지역은 서울이다. 계도지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 정권에 유리한 여론 조성을 위해 정부가 구매해 지역 통·반장들에게 제공하던 신문을 말한다.

 

경상남도는 0원인데 반해, (2015년 기준) 서울 25개 구청이 중앙·지역지 등을 포함해 구독하는 신문 대금은 연간 130억 규모이다.

 

이렇게 된 것은 서울시도 홍보만 있지 제대로 된 지역 언론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시민단체 대표에게 조중동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대표는 권력유착 체계는 비슷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조중동은 방향성이 ‘편파적’이지만 자신들은 단지 권력과 가까이할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역에서 어떤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일까?

 

지역에서 유지들은 늘 끈끈한 관계망을 이룬다. 이 가운데 소위 콧방귀를 좀 뀌는 사람들 일부가 구의원, 시의원, 국회의원으로 간다. 지역 작동원리가 서울이라고 다를 게 없다.

 


서울 지역 활동가들 견해는 비슷했다. 지역 단위로 갈수록 ‘당 이외에 뭐가 다를까?’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런데 진화론에서 등장하는 ‘종’처럼 지역 유지나 토호 또한 실체가 있는 개념일까? 이런 유지를 연구하는 학자로 지수걸 교수가 있다. 그가 1992년 공주대학교에 부임했을 때 누구나 인정하는 A급 유지에게 공주 유지가 총 몇 명인지 물었다.

 

“한 백여 명 되지.”

지수걸 교수는 유지가 무슨 명패라도 있나 싶었다. 하지만 얼마 후 명패를 발견하게 됐다.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내무부가 매년 발간한 <도세일반>이라는 책자에는 충남도내 유력자와 자산가 숫자가 기록돼 있다. 1998년 공주시가 발행한 ‘도지사 순방 시 초청계획’에도 초대 인사 명단이 수록돼 있다.

 

서울에서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법원 지원장 등이 새로 지역에 부임하면 지역 유지들과 만찬회를 연다. 친목 활동을 하다가 임기가 끝나 떠날 때에는 이들에게 전별금을 받기도 한다. 이런 네트워크는 모두 중앙정부가 필요해 만든 것이다.

 

이 집단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일제강점기 지역 유지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에는 지역 양반 사족 집단, 고려시대는 호족과 연결된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 왔지만 늘 존재했던 것이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이승만 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교회에서 유력한 유지를 배출하기 시작한다. 이른 시기에 교회가 자리 잡아 학교, 영아원, 병원 등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힘을 키워나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유지가 아닌 경우에 힘을 키워나가는 활동 방식을 살펴본다.

 

 

한-칠레 FTA 관련하여 2003년 6월 농민회 고속도로 봉쇄 투쟁 때로 돌아가 보자.

 

농민들은 다양한 고속도로 봉쇄 활동을 했고 그 결과 경남에서는 117명이 입건됐다. 출석 통보서를 받은 농민들은 당황했고 김순재에게 처신을 묻는 전화는 빗발쳤다. 김순재는 경남경찰청 정보과장을 만나러 갔다.

 

정보과장은 의자에 앉는 김순재를 본척만척했다.

 

“내가 과장님을 징계해서 해직시킬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옷을 왜 벗어?”

 

 

 

“노무현 대통령 아버지 선산이 김해 진영에 있는데 우리 집에서 오토바이 타고 10분이면 가는 거 알지예? 오늘 저녁 그 맷동(산소)을 파고예. 내가 팠다는 증거를 남기면 경찰이 나 잡으러 올 거 아인교. 와 팠노카면 과장님이 파든지 말든지 니 알아서 해라 했다고 고래 진술하거니 누가 죽는지 보자. 내 3년 살면 될 거 아이가.”

 

김순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김 처장 와 그라노?”

 

정보과장은 김순재를 달랬다. 결국 조사받는 사람 수를 줄이는 것으로 합의했다.

 


 

농민 입건 문제는 그렇게 처리했지만 한-칠레 FTA 문제는 그대로였다. 그 해 12월 한나라당 박관용 국회의장이 고 김윤환 전 의원의 빈소를 찾았다. 그곳에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처리를 비공개 투표로 강행할 뜻을 내비쳤다.

 

김순재는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정보를 모으고자 전국농민회 총 연맹 정보망을 활용했다.

 

곧 한나라당 대표였던 최병렬의 아버지 산소가 진주에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남해군 농민회에서는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 부모님 묘소가 남해에 있다고 알려왔다. 한나라당 주요 인사였던 안상수는 선산이 함안이었다.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이강두 선산은 거창이었고 국회의장 박관용 선산은 충청도에 있었다. 한-칠레 FTA 통과에 힘을 미칠만한 인사들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파악되자 김순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제목은 ‘한-칠레 FTA 통과시키면 파뿐다’였다. 이 내용은 지역 언론을 통해 유통됐다. 하지만 정보 생산 과정에서 활용한 유통망보다 지역 언론 유통망은 허약했다.

 

2004년 2월 16일 한 칠레 FTA가 국회 비준을 받는다. 농민 출신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없는 현실에서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절감했다. 이는 농민들의 ‘정치세력화’로 나타났다. 농민회 출신들이 도전장을 내밀기 시작했다.

 

강기갑은 17대 총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를 받아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강기갑과 함께 활동했던 김순재는 2010년 2월 창원 동읍 조합장에 당선됐다.

 

지역 헤게모니가 공고한 지역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킹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필요로 했다.

 

(다음 8화 김순재 네트워킹)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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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6화 대구도 항구다.

 

 

1983년 진주 경상대학교에 입학한 김순재는 운동권을 맴돌았다. 낙농학을 전공한 그는 종종 진주와 가까운 사천에 사는 강기갑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농사를 짓다 1976년부터 한국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해왔다.

 

김순재 또한 졸업하고 나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만들어진 전국농민회에 합류했다. 2003년경에는 경남 농민회 사무처장을 맡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일주일 전, 칠레 라고스 대통령을 불러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년 뒤인 1947년 미국이 주도한 무역 체제가 '관세와 무역에 관한 협정(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이다. 여기서 농산물까지 포함한 게 '세계무역기구(WTO·World Trade Organization)' 체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여러 나라에 동의를 얻자니 협상 속도가 지지부진해 국가별 협정으로 접근한 게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 제도다. 문제 발단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이었다.

 

2003년 5월, 김순재는 서울에서 열린 전국총연맹 상임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한-칠레 FTA로 농가 피해가 예상되어 농민들이 크게 반발할 때였다. 당시 전국총연맹 상임집행위원회는 한-칠레 FTA를 막는 투쟁 방법으로 '고속도로 봉쇄'를 선택했다. 결행 날짜는 6월 20일로 정했다.

 

 


 

 

그날 밤 김순재는 창원으로 돌아오며 고민에 빠졌다.

 

"갱남에 고속도로가 밸시리 많다카네."

 

충남은 서해안고속도로, 전남은 호남고속도로, 경북은 경부고속도로만 막으면 됐다. 하지만 경남은 남해고속도로, 88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막아야 했다.

 

 

 

김순재는 돌아오자마자 경남지역 시군농민회 사무국장들을 긴급 소집했다.

 

"고속도로 봉쇄로 결정 났다. 막는 방법은 내가 이야기하겠다."

 

먼저 진주농민회 사무국장을 쳐다봤다.

 

"일단 진주 사무국장! 니는 무조건 남해고속도로를 다 틀어막아라. 진주 니네는 다른 데 지원도 없다."

 

진주는 정읍·나주 등과 함께 농민회에서 '1급지'로 분류하는 곳이다. 그만큼 농민회원수가 많았다.

 

"거창·산청·하동·남해·합천은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틀어막아라. 수단과 방법 강구해서!"

 

88고속도로까지 막을 여력은 없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88고속도로는 차가 별로 안 다니니까 고마 놔두삐라. 김해·창원·고성·의령·함안 모두 구마고속도로로 간다!"

 

시·군농민회 사무국장들은 각기 분주하게 계획을 짰다. 계획 중에는 고속도로에 인접한 국도 가드레일을 풀어 차를 올리는 방법도 있었다. 6월 20일 예정대로 각자 맡은 고속도로로 달려가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경남경찰청 정보과장이 대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김순재는 거절했다. 총연맹에서 결의한 이상 협상할 여지는 없었다. 정보과장은 안타깝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전국에 막은 데가 없는데 경남만 다 틀어막는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김순재는 도연맹 사무처에 전화해 상황 확인을 부탁했다. 한 군데도 막은 곳이 없었다.

 

충남 당진에서는 이미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렸고 경북은 사전 차단돼 꼼짝하지 못했다. 경남은 자체적으로 판단해 마무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충남 당진에서 연행된 농민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해산하겠다는 제안을 경찰에 전했다. 당연히 경남 경찰 손이 충남에 미칠 수는 없었다.

 

며칠 뒤 고속도로 봉쇄 투쟁 사건으로 전국에서 130명이 입건됐다. 이 가운데 117명은 경남농민회 회원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덥수룩한 수염을 휘날리는 경남농민회 의장 강기갑을 비롯해 김순재도 연행됐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그 많은 고속도로를 일시적으로 봉쇄한 경남 농민회 저력은 어디서 오는가? 경남은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연대문화가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정치·경제 정책이 낳은 결과물이다. 경남에 고속도로가 많다는 것은 노동자들도 많다는 의미다.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 핵심은 '최소 투자와 최대 수익'이었다. 이는 당연히 노동자 희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산·창원지역은 1986년 6월 민주화 투쟁보다 1988년 노동자 대투쟁이 더 격렬했던 지역이었다. 당시 마산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집회를 했고 창원공단 노동자들은 정부가 투입한 백골단에 맞섰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중심에는 마산·창원노동자연대(마창노련)이 있었다. 전노협 핵심은 영남권과 수도권이었다. 국토 서쪽은 광주 아시아자동차를 비롯해 일부 업체만 전노협에 참여했다.

 

이는 훗날 영호남 간에 지역발전에서 극심한 불균형을 초래했다.

 


 

마창노련을 낳은 지역답게 마산·창원에는 독특한 연대 문화가 있다. 광주MBC는 2012년 총파업 때 지역 민주노총과 처음 교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산 MBC(현 MBC경남)는 지역 노동계와 정기적으로 교류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민주노동당 사무국장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지역에서 보수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경남신문>도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 지부로 꾸준하게 활동한다. 서울로 치자면, <조선일보> 기자들이 민주노총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모양새다. 서울에서는 상상이 잘 안 되는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지역 언론이 논조와 관계없이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이다. 그 이유는 마산·창원지역에서 노동이 언론에서 다루는 주요 소재이기 때문이다.

 

또 학계에서도 이 분야 연구자들 활동이 활발해 지역사회에서 늘 엮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소수인 한 회사의 직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회사가 노조원에게 부당한 징계를 하면 노조원은 지방노동위원회로 달려갈 것이다. 거기 구성원들은 대학원 지도교수부터 시작하여 모두 안면 있는 지역 사람들로, 직간접적으로 민주노총과 관련될 확률이 크다는 점이다. 경남에서는 민주노총이 농민회만이 아니라 각 지역시민사회 단체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돼 긴밀히 움직인다.

 


 

또한 경남은 고속도로만이 아니라 친일파도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지역 출신 유명 근현대 인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인물들은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삶이 불거지며 논란을 낳게 된다. 지역 출신 근현대 인물 재조명 사업이 느닷없이 친일 문제에 대한 검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마산시는 1999년 8월 이은상·조두남 기념관 건립 계획을 발표했는데, 경남은 이은상·조두남 기념관 건립사업뿐만 이나라, 진주 남인수, 통영 유치환, 창원 이원수까지 친일 행적이 있는 문화·예술인에 대한 기념사업을 반대했고 대부분 관철했다.

 


 

그런데 전북 고창은 다른 지역에서는 시민단체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갈등이 한참 진행 중이던 2000년이 넘어서야 시작종이 울렸다. 이유가 무엇일까? 전북 고창 출신 시인 서정주가 다른 친일파들보다 장수했기 때문이다.

 

 

2000년 12월 24일 시인 서정주 사망 소식이 메인 뉴스를 장식했다. 이듬해 2001년 11월 3일 서정주 고향인 전북 고창군에서 '미당 시문학관'이 개관한다.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대표는 익산 남성여중 체육교사 최재흔 씨였다.

 

2002년 11월 고창군이 '미당 시문학제'를 개최하려고 하자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를 비롯한 사회단체들이 군청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2002년 10월 21일 <전북일보>에는 '미당 시문학제 취소'라는 기사가 소개됐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미당 서정주는 문화 권력이었다. 그해 <중앙일보>는 '미당문학상'을 만들었다. 또 동국대학교에서 고창으로 문학기행을 오기 시작했다. '미당 시문학제'는 그렇게 이어졌다. 이 행사가 열릴 때면 미당 시문학관 입구에는 '차라리 일장기를 걸어라'라는 펼침막이 걸렸고, "시만 잘 쓰면 민족 반역죄도 용서받을 수 있느냐!"는 구호를 외쳤다.

 

결국 2004년 고창군은 미당 시문학관에 서정주가 남긴 친일작품까지 전시하기로 하며 반대 목소리를 높인 단체들과 합의한다. 친일 작품은 문학관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방에 걸렸다.

 

최재흔 씨가 이런 활동을 하며 가장 어려운 부분은 "왜 외지인이 우리 행사에 관여하냐?"는 말을 들을 때였다. 그는 그 지역 내 언론과 시민단체 등 중간집단의 호응이 없으면, 정당성을 입증받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창 지역에서 어떤 사람들이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와 연대했을까?

 

고창지역에는 경남처럼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은 빈약하지만, 유족회 회원들은 풍부하다. 서정주가 1943년 경 조선 사람들에게 대동아전쟁 참가를 독려하고 찬양하는 홍보담당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최재흔 씨는 반대 활동에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 고창지부와 고창 지역신문사가 연대한 점이 첫 번째 성공요인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바로 2001년 12월 개통된 서해안고속도로 덕이었다. 최재흔씨는 전북 익산 남성여중 체육교사였다. 사안이 발생하면 군수를 만나야 하고, 유족회와 모임을 가져야 한다. 한 해에 적어도 20번은 익산과 고창을 왕복해야 한다. 미당 서정주가 타계한 그 해에 개통된 서해안 고속도로 덕분에 전북 익산에서 고창까지 1시간 40분이면 갈 수 있게 됐다.

 

 

대체 영호남 간의 극심한 지역발전 불균형은 어느 정도인가?

 

이런 불균형 때문에 한 도시는 다른 도시와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한 KBS 기자는 2010년 10월 22일 목포방송국으로 출근하면서 본 광경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당일 전라남도는 영암에서 첫 F1 레이스를 개최했다. 목포 시내에서 영산강 하굿둑을 지나 경기장으로 가는 길은 하나다. 그는 집 앞에 있는 작은 빵집에서 매일 빵을 먹고 출근했다. 그런데 F1레이스 기간 내내 영국 BBC 스텝과 F1 레이싱 팀인 레드불 스텝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동네 빵을 싹쓸이했다.

 

"자네, 레드불팀 빵 먹는 거 봤는감?"

 

빵집 주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영암군에 있는 경기장 근처에는 숙소와 식당 등 이들을 수용할 만한 기반시설이 없었다. 사람들은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목포로 몰렸다. 밤이면 모든 술집에서 외국인들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기가 끝나면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도로가 감당하지 못하면서 영산강 하굿둑에서 목포까지 4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F1 경기장 주변 인프라와 도로 사정이 차츰 나아져갔다. 2012년 남해안고속도로 영암-순천 노선이 개통됐다. 순천에서 목포까지 2시간 걸리던 게 한 시간으로 줄었다. 이런 곳이 많다. 2005년에는 포항-대구 고속도로가 개통됐다. 대구에서 포항까지 40분 거리로 단축된 것이다.

 


 

필자는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대표였던 최재흔 씨에게 친일잔재청산 운동을 왜 그리 열심히 하는지 물었다. 그는 '정체성 회복'이라고 답했다. 중간집단은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공간이 중심이 돼 활동을 한다.

 

2005년 대구-포항 고속도로 개통에 맞춰 대구MBC에서는 '대구도 항구다'라는 리포터가 나오기도 했다. 자기만의 시각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우리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서울 중앙발 시각은 단연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KTX로 3시간이면 갈 수 있을 만큼 작다. 우리나라는 아파트라는 거주 문화, 마트와 백화점이라는 소비문화가 어디든지 같다. 이런 시대에 지역성이라는 담론이 크게 제기될 것이 있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중에 여러 가지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펼쳤다. 참여정부가 추진한 큰 정책으로 행정수도와 공공기관 이전을 꼽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정책에 온 힘을 기울인 이유가 뭘까. 공간이 사고를 지배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 대통령이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역대 대통령은 모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김해 봉하마을에서 태어나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변호사 활동을 했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에게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지역 간 권력 배분이나 기회 균등이 확보돼야만 한다는 절실함이 있었다. 다른 정치인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친구 문재인 대통령은 어떠할까.

 

(다음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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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케어해줘. 연재 순서.

⦁제1화. 보험성뇌물의결말 (폭로자 김학성 시선)

⦁제2화. 제말이그말입니다 (김학성 동업자 한수찬 시선)

⦁제3화. 앞뒤좌우완벽하게 (김학성 구치소 동료 오강수 시선)

⦁제4화. 부친사망일의진실 (김학성 전 사업 파트너. 이문재 시선)

⦁제5화. 난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변호사 시선)

⦁제6화. 대검케어가최고야. (작가 시선)

 

 

 

 

 

 

 

 

 

<김형준 '스폰서 검사' 사건 재판 추적기>  제5화 난 초등학생이었다. - 박수종 변호사 시선

 

 

 

나는 박수종 변호사다. 김형준은 2006년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할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 나는 검찰에 몸담았다가 2007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2016년 3월 김형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업하는 고등학교 친구가 있는데 법적분쟁에 휘말릴 것 같다. 네가 만나보고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줬으면 좋겠다.”

 

김형준은 김학성을 30년 지기 제일 친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4월 2일 법무법인 처음 상담실에서 김학성을 처음 만났다. 김학성은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

 

2010년 자신이 구속됐을 때 내가 상대편 고소 대리인이었다고 했다. 물론 내가 사임하면서 다른 변호사가 선임되고 김학성이 구속됐기 때문에 별 악감정은 없다고 생각했다.

 

김학성은 당시 구속이 억울했다며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김학성이 설명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1) 김학성은 동창생 한수찬을 데려다가 사업을 했는데 한수찬이 무리하게 사업을 벌여 회사가 파탄 났다.

 

2) 자금 부족으로 물품을 공급하지 못해 거래처에서 압류가 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3) 압류를 당하지 않고자 김학성은 회사 돈을 빼돌린다.

 

4) 한수찬은 그렇게 사고를 치고 회사 장부를 빼내 피해자들에게 넘긴다.

 

5) 김학성이 김형준에게 순수하게 1500만 원을 빌려줬는데, 실수로 회사 장부에 ‘김형준 대여금’으로 메모했다.

 


 

김학성은 한수찬이 피해업체들과 결탁하여 이 메모를 빌미로 돈을 받아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김형준과 엮어 사건을 크게 만들겠다며 협박했다고 한다. 김학성은 순수하게 우정으로 빌려준 돈이 마치 비리처럼 보도되거나 검찰 내부에 이 내용이 알려져 김형준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김학성은 한수찬이 김형준을 공격하려 하지만 온몸을 다해서 막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김학성은 회사 돈이 나갈 때 결재서류에 서명했기 때문에 자기도 책임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신 한수찬도 자기가 잘못한 만큼 책임져야 한다며 같이 처벌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상담 중에 김학성에게 곤란한 상황도 확인됐다. 먼저 서부지검이 접수한 김학성이 피의자인 고소가 3건이었다. 김학성은 각 사건이 경찰서로 갔다가 다시 검찰로 송치되고 기소되는 과정을 불안해했다.

 

상대는 서부지검 주임검사를 겨냥해 같은 대학 출신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만큼 피해 업체는 절박했고 이들이 김학성에 대해 미리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은 컸다. 김학성은 서부지검에서 조사받는 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 발로 뛰는 김희란 변호사 블로그 사진 인용

나는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김학성 주거지 관할은 고양지청이었다. 고양지청이 나서서 이 사건을 모두 이송받아 수사하면 이런 문제가 모두 풀릴 것으로 판단했다.

 

고양지청 부장검사가 나와 연수원 동기고 김형준과 친분도 있으니 사건 진행이 잘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김학성에게 합의한 피해업체가 있으면 고소를 부탁하라고 제안했다.

 

통상적으로 합의한 업체가 피의자를 고소하는 일은 없다. 김학성은 한 거래업체에 합의금 4000만 원을 건네고 고양지청에 자신을 고소하라고 부탁했다. 4월 22일 김학성에 대한 고소장이 고양지청에 들어간다. 이른바 ‘셀프 고소’이다. 셀프 고소는 김학성 사건을 일괄 기소해 빨리 처리하는 게 목적이었다.

 


 

4월 20일 김형준은 나에게 김학성에게 빌린 1500만 원을 반환해달라고 부탁했다. 돌이켜보면 계좌로 흔적을 남기기에는 찜찜하고 현금으로 돌려주자니 증인이 필요해 나에게 부탁한 듯하다.

 

나는 그냥 돈을 돌려주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날 김학성에게 전화했다.

 

“형준이가 돈을 돌려주라고 하니 만납시다.”

 

4월 25일 법무법인 처음 회의실 테이블 위에 현금 1500만 원을 올려놓고 분명히 얘기했다.

 

“형준이가 돌려주라는 돈이다.”

 

김학성은 오히려 나를 변호인으로 선임하고 싶다며 1500만 원을 선임료로 내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나를 도와달라. 억울하게 당하고 싶지 않다.”

 

김학성은 선임료가 적은 듯하다며 100만~200만 원 더 챙겨드리겠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구두합의가 됐다. 선임계약서는 5월 2일 작성했다.

 


 

셀프 고소는 결국 실패했다. 서부지검 주임검사가 사건 이송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김학성은 6월 20일 서부지검 첫 조사를 받고 나서, 이튿날 고양지청 담당자에게 서부지검으로 사건을 이송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전화를 받는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당시 김학성이 김형준에게 거칠게 항의했다고 한다.

 

김학성 태도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나는 상담 과정에서 김학성에게 합의가 최선이라고 전제했다. 적은 금액이라도 합의를 먼저 해 피해자 규모를 줄일 것을 당부했다. 김학성도 이 조언을 받아들여 합의를 진행했다.

 

고소하기 위해 합의한 게 아니라 합의한 피해자 가운데 한두 명에게 고소를 부탁하라 했다.

 

셀프 고소가 실패하자 김학성 태도는 돌변한다. 지금까지 진행 과정을 놓고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우선 김형준이 반환한 돈으로 나에게 변호사 선임료를 준 부분부터 김학성 설명은 다르다.

 

김학성은 내가 김형준 변호인이지 김학성 변호인은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김형준이 나에게 활동비로 1500만 원을 줬다가 이후 자기 문제가 사건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학성 사건 진행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고, 셀프 고소도 필요하니 선임계약서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김형준을 도와주려고 한다면 왜 돈을 받겠는가. 그냥 도와주면 될 텐데 말이다. 나는 당시 김형준이 뇌물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김형준은 2014년 서울남부지검 합수단장을 지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뇌물 받기 좋은 자리다.

 

그리고 내가 아는 김형준 주변에는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득실 하다. 아쉬운 소리 안 하면서 사는 김형준이 김학성에게 1500만 원을 빌렸다기에 진짜 허물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 머릿속에 ‘사건’이란 것이 없었기에 사건 파악할 내용도 없었다.

 

나는 법정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도대체 왜 김학성 씨가 저를 선임 안 했는데 변호인을 하며, 선임계약서를 왜 작성하며, 선임료를 왜 법무법인 처음에다 입금을 하겠으며. 거기에 입금하면 그 돈은 제 돈이 아니에요. 법무법인 처음 돈이에요. 거기서 제 몫이 얼마 되지도 않아요.”

 

당시 나는 법무법인 처음을 나와서 다른 로펌으로 가려했다. 이미 6월 말 이전에 나가기로 확정했다. 어차피 법무법인 처음에 소속된 상황에서 선임계가 제출되고 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나에게는 손해였다. 

 


 

김학성이 대체 김형준에게 무엇을 원했을까? 김학성은 김형준에게 긴급체포를 면하게 해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김형준이 수사팀에 언질을 줘서 긴급체포를 막았으면 했다.

 

사실 나와 상담하면서도 김학성은 이해하기 어려운 주문을 했다.

 

“구속은 감수하겠지만 긴급체포는 안 된다.”

 

김학성은 구속된 적이 있다. 당연히 변호사를 쓴 경험도 있다. 그렇다면 변호사인 나와 검사인 김형준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많은 거래업체에 피해를 주고 구속을 피할 수 있겠는가. 김학성은 기소 단계에서 어차피 구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았다. 셀프 고소로 수사 관할을 변경해도 사안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셀프 고소는 사건을 일괄 기소해 빨리 처리하고 싶어 택한 방법이었다. 물론 일괄 기소되면 형을 덜 받기도 한다.

 

당시 김학성은 주변 정리에 시간이 필요하다며 긴급체포를 피하려 했다. 내가 보기에는 김학성에게 시간이 꽤 많았다.

 

4월 초부터 나와 상담하면서 사건 규모와 내용을 알게 되자 김학성은 구속될 각오가 됐다고 말했다. 구속에 대비할 시간은 충분했는데 왜 사건이 임박해서 긴급체포만 안 된다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김학성이 긴급체포당할 가능성이 희박했다는 점이다.

 

수사기관에 계속 출석해 조사받는 사람을 긴급 체포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검찰도 고소 사건에 소환 조사하다가 영장을 치더라도 사전 영장을 치므로 긴급체포라는 게 거의 없다. 그러니까 김형준이 긴급체포 문제로 수사팀에 따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김학성은 나에게 100% 확신하느냐고 되물었다. 물론 권한이 없는 내가 100%를 말할 수는 없었다.

 


 

셀프 고소가 실패하자 김학성은 나에게 변호사비를 토해내도록 했다. 변호사가 선임비를 돌려주는 일은 분명히 있다. 의뢰인 처지에서 변호사가 불구속을 약속했는데 구속영장이 청구되면 특히 그렇다. 그러나 김학성은 단 한 번도 불구속을 부탁한 적이 없다.

 

김학성 목적은 불구속이 아니었다. 즉, 김학성은 나에게 변호사 선임료를 돌려달라고 할 권한이 없다. 변호사 선임료가 법무법인 처음으로 입금됐기에 반환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김학성은 6월 17일 김형준에게 문자를 보낸다.

 

‘연락이 없어 실망이다. 어쩔 수 없이 문자 보낸다. 난 진짜 친구라 생각했는데 긴말하기 싫다. 박 변호사가 내게 해 준 말들 일련의 과정을 보면 니가 날 도와줄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나도 알아봤고. 나는 지금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다. 이제 내가 할 것은 내 가족이 그나마 살 수 있는 돈을 최대한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해서 보내준 천오백만 원은 아래 계좌로 오늘 6시까지 송금하거라. 내 집사람 신한은행 000. 누구든 보내기만 하거라. 이것으로 너와 나는 정리하자. 너에게 피해가 없도록 처리할 테니 걱정 말고. 박 변호사는 네가 알아서 정리하거라... 더 실망하게 하지 말고’.

 

이어서 나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변호사님 저는 이제 삶에 대한 미련도 없습니다. 형준이에게 제가 보낸 돈 보내라 문자 보냅니다. 형준이랑 통화하세요. 그간 감사했습니다’.

 

오후 6시까지 돈이 들어오지 않자 김학성은 다시 김형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준아 너 연락도 없고 입금된 것도 없다. 내가 빌려준 돈도 못 받으니 병신이구나. 오케이. 알았다. 변제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내가 알아서 할게 나쁜 새끼’.

 

그날 저녁 김형준이 내게 전화했다. 김형준은 김학성에게 받은 문자 내용을 설명하며 1500만 원을 돌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발로 뛰는 김희란 변호사 블로그 사진 인용

 

김학성은 6월 20일 서부지검 첫 조사를 받는 날 아침에 받아갔다.

 

김학성은 먼저 장부에 적시한 ‘김형준 대여금 1500만 원’을 변호사 비용이었다고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김학성은 나를 잘랐다.

 

나는 최소한 돈을 돌려줬으니 여기서 해방됐다고 생각했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박수종 변호사

 


 

그런데 뜬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이후에도 김학성에게 계속 문자를 받게 된 것이다. 변호사에게 수임료를 되받아간 사람이 해당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으며 불쾌했다.

 

그렇다고 김학성에게 내 감정을 담아 왜 연락하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문자를 받을 때마다 ‘고생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같은 형식적인 답만 했다. 당시에는 왜 나에게 문자를 보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7월 7일 받은 문자 내용은 황당하고 뜬금없었다.

 

‘변호사님 저는 형준이와 전에 문자 주고받은 휴대폰도 다 해지하고 다 없앴습니다’.

 

김학성은 예측불허였다.

 

8월 16일 서부지검은 김학성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법원은 8월 19일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 소식을 듣고 김학성이 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할 것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긴급체포만은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학성은 출석하지 않았고 9월 5일 긴급 체포됐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내가 김형준에게 다급한 연락을 받은 것은 9월 1일이었는데 그날은 김학성에 대한 영장실질심사가 있는 날이었다. 김형준은 <한겨레> 기자가 김학성 문제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는 김학성 회사 고문변호사를 만나 기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고문 변호사는 김학성에게 연락했는데 이때 금액을 말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다. 내 기억은 다르다. 나는 김형준에게 전해 들은 금액을 이야기했다. 김형준은 자기 명의로 내 계좌에서 일단 2000만 원을 김학성에게 보내도록 부탁했다.

 

그날 저녁 나는 지인들과 술을 마셨다.

 

 

중간에 메신저를 확인하니 김학성이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형준이가 자기에게 진심으로 사과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사과가 없어서 본인이 이렇게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김학성은 나에게 김형준이 사과하면 자기가 모두 해결하겠다고 했다. 나는 김형준에게 그 메시지를 전했지만 사과를 요구하는 김학성 메시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김형준도 당시 어떻게든 김학성을 달랠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김형준이 나에게 전한 사과 메시지를 다시 김학성에게 전했다.

 


 

9월 2일 언론은 ‘스폰서 검사’ 취재를 시작했다. 대검찰청 감찰본부도 김형준에 대한 감찰에 들어갔다. 이날 저녁 김학성에게 계속 메시지를 받았다.

 


●  낼 연락해서 모든 자료가 담겨 있는 제 핸드폰 자체를 넘겨드릴게요. 그리고 저는 진술서를 써서 한겨레 등에 보내겠습니다. 제가 다 안고 가겠습니다. 다만 중간에 넘길 때 저도 살아야 하니 돈 더 준비하세요.

 

제가 내일 연락하고 사람 보낼 테니 핸드폰 챙기세요.

 

● 저 믿으시고 내일 연락할 테니 일요일에 핸드폰 받으세요.


 

여기서 김학성이 “돈 준비하라”는 이야기가 나온 배경을 설명해야겠다.

 

당시 김학성은 한겨레 기자가 자기 후배라고 했다.

 

마치 얼마든지 기사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도가 일부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너무 선정적으로 보도되지 않도록 협조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김학성은 우리가 자신과 거래를 하려 했다며 기자에게 증거가 될 만한 자료를 넘겼다.

 

9월 6일 김학성이 김형준의 스폰서였다고 폭로하는 보도가 나왔다. 보도에서 김학성은 한겨레에 한 달에 두세 번은 김형준에게 술을 샀다고 했다. 술자리가 끝나면 100만~200만 원씩 용돈을 줬다는 내용도 있었다.

 

일이 커지자 대검찰청은 김형준과 유착관계를 확인하고자 나도 훑고 지나갔다. 김학성은 그간 일방적으로 보낸 문자를 내가 사건 은폐와 증거 인멸에 가담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정작 내가 증거 인멸에 가담한 문자나 통화 녹음이 있었다면 벌써 제출했을 것이다. 나는 증거인멸교사로 조사받은 적도 없다.

 


 

나중에 김학성을 수사한 서부지검 담당검사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귀신에 홀린 듯했다. 내가 김학성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김학성은 서부지검 담당검사가 자기를 앉혀놓고 (한수찬에게 들은 것을 토대로) 한 시간 동안 김형준에 대해 추궁했다고 했다. 그런데 주임검사 얘기로는 김학성이 김형준과 나눈 문자를 슬쩍 드러내며 오히려 관계를 언급했다고 한다.

 

만약 김학성이 나를 계속 선임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내가 변호를 계속 맡았다면 나와 김형준에게 서로 다르게 얘기한 부분이 들통 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나를 자른 게 아닌가 싶었다.

 

지금까지 나는 ‘30년 지기’ 같은 말에 휩쓸려 김학성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 자신이 한심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후배 검사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검사와 변호사를 거치며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나는 이렇게 고백했다.

 

“지금 보면 김학성은 대학생 정도고요. 저와 김형준은 초등학생 정도 되는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화 - 대검 케어가 최고야-작가 시선)

 


☞ 뉴스타파가 공개한 김형준-김학성 간 전화통화 풀버전을 다시 들어보세요.

 

 

youtu.be/X9piphorVn4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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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5화 강릉의 위키리크스 <하이강릉>

 


지난 2008년 6월 10일 촛불집회 기간 서울 광화문에 인파가 모여들었다.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김 기자는 촛불집회 이야기를 하다가 탁자 위로 <시사IN> 38호를 쓱 내밀었다. <시사IN> 표지에는 '시위, 너를 비틀어주마. 촛불과 디지털의 만남 지상 생중계'라고 적혀 있었다.

 

김 기자는 내게 정희상 기자가 쓴 "송병준 후손 행적 추적했더니…"라는 기사를 펼쳐보라고 했다.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 송돈호가 '친일재산환수특별법' 위헌소송을 냈다는 내용이었다.

"요즘처럼 이슈가 넘치는 때, 이렇게 억수로 재미없는 기사를 쓰는 게 바로 정희상 기자야."

 

 


 

정희상 기자를 소개하고 시작하자. 1964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외대를 졸업했다. 월간 <말>에서 일하다가 1992년 <시사저널>로 옮겼고 현재는 <시사IN>에 몸담고 있다. 1989년 한국전쟁 전후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월간 <말>을 통해 폭로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분노'였다. 1992년 8월 29일 <시사저널> 커버스토리 '이완용 후손 땅 찾기 연쇄 소송'처럼 정희상 기자는 취재 소재를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서 찾았다. 가끔 지역 문제를 취재할 때도 있으나 중앙 이슈가 압도적이라 단편에 머무를 때가 대부분이다.

 

2011년 여름 강릉에서 제보가 들어왔다. 강릉 시내에서 시장 최명희, 국회의원 권성동, 친척인 권은동 등 한나라당 소속 지역 세력이 토호들과 유착돼 지역 내 이권 잔치를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7월 23일 <시사IN> 201호에 "강릉은 '무법천지' 썩은 내 진동해도 검찰은 솜방망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는 "견제 임무를 맡아야 할 검찰조차 뿌리 깊은 유착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뿌리 깊은 강릉 지역 토착비리 구조는 감사원과 대검 등 중앙정부 차원에서 특단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했다.

 

단편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 기사 한 편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기사에 거론된 지역 국회의원 권성동과 친척 권은동이 언론보도금지보도가처분(2011카합○○) 신청과 손해배상(2011가합○○) 청구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8월 4일 기사에 거론된 강릉 최명희 시장도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떳떳하다"라고 포문을 열며 강릉시는 8월 11일 손해배상(2011가합○○)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추가 보도를 위한 후속 취재가 이어졌다.

 

이 소송들이 정희상 기자를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강원도 지역신문이 <시사IN> 기사를 받아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신문들은 최명희 시장이 <시사IN>을 고발했다는 뉴스와 기자회견을 열어서 해명하는 내용을 실었을 뿐이다.

정희상 기자는 자신이 취재한 내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지역 기자가 있으면 연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강원도 지역신문에서 근무했던 한 기자는 사회부 밑바닥인 경찰서부터 시작해 4년을 근무했지만 박봉으로 서울 무가지 매체로 옮겼다. 강원도 한 신문은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유출된 사람이 1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강원도나 충북과 같은 작은 시장에서 취재력이 받쳐주는 선임 기자는 어떨까? 취재만 잘하는 기자는 회사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 회사 이익에 보탬이 되는 광고 영업 능력이 우선이다. 지역이 보수적인 곳은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지방의원, 사업가 모두 권력으로 묶인다. 사업가들이 군수를 비판하는 신문에 광고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강원도 언론사 지면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즐겨 쓰는 '성공적 마무리', '희망', '확충' 같은 보도자료 용어가 난무한다.

정희상 기자는 강릉에 아주 희한한 사이트를 발견한다. <하이강릉>이라는 인터넷신문이었다. <하이강릉>을 소개한 기사를 본 정희상 기자는 <하이강릉>을 '강릉의 위키리크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위키리크스'를 소개하고 지나가자.

2006년에 설립한 위키리크스를 우리 언론은 '폭로 전문 사이트'라고 소개하곤 한다. 위키리크스는 2010년 4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비디오를 하나 공개하며 존재를 알렸다. 미국 아파치 헬기가 민간인을 살상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였다. 전 세계 180여 개국에 있는 해외공관 289여 곳과 미 국무부가 주고받은 25만여 건의 외교문서를 2011년 8월 31일과 9월 1일 사이 모조리 사이트에 올리면서 역사상 최고라 할 수 있는 폭로가 시작됐다.

'강릉의 위키리크스'인 <하이강릉>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하이강릉> 운영자는 강릉에서 자영업을 하는 김남권 씨다. 2005년 12월 20일 <하이강릉>을 오픈한 김남권 씨는 강릉시의원에게 메일을 보냈다. 공약 진행상황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응답이 없으면 해당 시의원 사진에 큰 글씨로 '거부'라는 마크를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하이강릉>은 어떻게 태동한 것일까?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샌지가 컴퓨터 프로그래머 일을 했던 것처럼 김남권씨는 선거 기간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선거 이면을 알게 됐다. 국회의원이나 시장 공약은 언론에서 중간 점검을 하지만 시의원은 선거가 끝나면 확인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남권씨는 시의원 공약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2년이 지난 2008년 4월 1일 <하이강릉>은 시의원들 답변을 게시하면서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2011년 8월 <하이강릉>을 통해 지역을 발칵 뒤집은 폭로가 시작됐다.

 

이 폭로가 시작되자 지역 국회의원 권성동과 친척 권은동은 <하이강릉>을 상대로 '언론보도금지보도가처분(2011카합)○○)을 제기했고 로펌 변호사 4명을 내세워서 손해배상(2011가합○○) 소송을 제기했다.

강릉시 또한 변호사 3명을 내세워서 손해배상(2011가합○○)소송을 제기했고 권은동은 또 다른 손해배상(2011가합○○)을 청구했다. 물론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하는 것도 포함됐다. 이들이 제기한 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피고 김남권은 같은 달 19일 이 사건 기사를 <시사IN>에서 가져와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신문 하이강릉의 '쟁점토론'란에 게재하였습니다."

즉, 김남권 씨가 <시사IN> 기사를 '펌질'했다는 것이다. 김남권 씨는 그동안 스스로 편집국장이라고 불렀다. 편집국장이 하는 일은 강릉과 관련된 사회와 정치 분야 기사들을 펌질하여 사이트 올리는 것이었다. 기사 중요도에 따라 배치하는 것도 편집국장 권한이다. 기사 출처는 <강원도민일보>, <강원일보>, <강릉MBC>, <강릉KBS>, 같은 지역 언론이었다. '

기자들은 강릉시민이 <하이강릉>을 자주 방문해 뉴스가 확대 재생산되는 효과를 봤기 때문에 저작권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방문객이 동일한 뉴스라도 하이강릉을 찾는 두 번째 이유는 기사에 달린 댓글 구경 때문이었다.

 

<하이강릉>은 중앙에서만 시끄러울 그런 기사를 지역으로 유통했다. 지역 토호들이 김남권 씨 <시사IN> 펌질을 문제 삼으면서 그는 언론중재위원회에 드나들게 됐다. 어딜 가든 판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김남권 씨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하이강릉>이라는 데가 뭔데... 국회의원과 시장 양쪽에서 변호사를 달아서 이렇게 해오는지... 여기 언론사가 큽니까?"
"저 혼자 합니다."

 

"그럼 이 언론사 유지비가 어디서 나옵니까?"
"도메인비와 웹호스팅 비용 연 5만 원입니다."

 

 



법정을 다니고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김남권 씨는 정희상 기자와 수시로 통화했다. 압박이 심한 글은 지워야 할지도 물었다. 곧 후속취재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정희상 기자는 성량이 매우 컸다. 김남권씨는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에 수염이 덮여있을 듯한 풍채를 떠올렸다. 그런데 강릉에 온 정희상 기자는 키가 작고 배가 나온 동네 아저씨 모습이었다. 정 기자는 하루를 훑고 갔다. 취재를 설렁설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술도 엄청 마셨다. 하지만 며칠 뒤 기사 내용은 작은 부분까지 정확했다.

강릉시가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이듬해인, 2012년 2월 9일 기각됐다. <강릉MBC>는 '강릉시, 시사IN·하이강릉 명예훼손 소송 패소'라는 뉴스를 내보냈다. 그리고 국회의원 권성동과 친척 권은동은 2012년 4월 18일 소취하서를 제출했다.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일까.

정희상 기자는 박원순과 경쟁하던 서울시장 후보였던 나경원에 대해 2011년 10월 20일 '나경원, 억대 피부클리닉 출입 논란' 기사를 올렸다. 월세 250만 원을 내는 박원순 후보를 향해 서민시장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던 나경원 후보가 강남 지역에서 초호화급으로 분류되는 피부 클리닉에 상시 출입했다는 사실을 취재한 것이었다.

 

이 기사는 포털에 톱으로 뜨면서 일파만파가 됐고 나경원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다. 나경원 후보가 무너지는 걸 보면서 권성동 의원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아무 조건 없이 소를 취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김남권 씨가 한 일은 <시사IN> 기사 '펌질'이었다. 그 펌질은 강릉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강릉시민들이 서점에나 전시되어 있는 <시사IN> 잡지를 굳이 사서 보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스마트폰이 보급되지 않은 시기라 네이버 '뉴스캐스트'에 걸린 뉴스라도 퍼지기 힘들었다. 게다가 강릉 인구 22만 명은 서울처럼 밀집한 인구가 아니라 분산된 형태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는 인터넷이 닿지 않기도 한다.

 

인터넷이 되더라도 문맹인구가 있어서 방송사가 가장 좋은 유통 수단이다. 공간은 정보채널만이 아니라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가 발생했다. 용산 재개발 과정에서 원래 세입자들이 받은 보상금으로는 도저히 다른 곳에서 가게를 열 수 없었다. 세입자들은 거칠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강제진압을 지휘한 김석기 경찰청장은 2012년 총선 때 경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용산 유가족들은 김석기 후보를 따라다니며 사퇴를 요구했다.

 

이를 바라보는 경주시민들 눈길은 차가웠다. 당선 가능성도 없는데 왜 왔느냐, 용산 문제는 용산에서 해결하라 같은 핀잔이 나오곤 했다. 서울에서 '용산참사'를 보도한 중앙언론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본 대구 <뉴스민> 천용길 기자는 재개발 문제를 보는 관점에서 서울 사람과 경주 사람이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주는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개발 경험이 거의 없는 곳이다.

 

땅 소유자들은 재산권을 행사하고 싶지만 건물 고도제한 등에 걸려 한계가 있다. 세입자 사정 또한 다르다. 서울보다 전세·월세 자금 부담이 적어 세입자들이 나가더라도 갈 곳이 있다. 강제철거 문제에 대해 서울 사람들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지역에서 강제철거 문제를 인권 문제로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담론으로 뭐가 있을까. 천용길 기자는 이렇게 제안했다.

"대구만 해도 세계육상 선수권대회를 위해서 동대구와 멀지 않은 감나무골에 쪽방촌과 비슷한 곳이 있는데 그곳을 안 보이도록 철거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지역에서 용산 철거 문제를 납득시키는 것보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구체적인 삶을 예로 들면 공감을 끌어내기가 더 쉽지요. 그 사람들 목소리를 담아내면서 우리 지역 문제와 용산참사가 다른 문제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또 다른 예가 있다. 2011년 하반기에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가 한국사회를 요동쳤다. 2011년 10월 YTN <이슈 앤 피플>에서 도가니 열풍으로 작가 공지영을 인터뷰했다. 사회자가 책을 쓴 계기를 묻자 공지영은 이렇게 답한다.

"오래된 일인데 쇠고기 때문에 촛불시위가 불이 붙던 때 우연히 신문 한 귀퉁이에 재판 스케치 기사를 읽었어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이상한 사건이더군요. 취재가 시작됐지요. 대부분 자료로 사건을 접했어요. 판결문도 있고…. 정말 있을 수 없다고 느꼈고 어떻게 이런 걸 아는 분들은 가만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많았어요.  (도가니라는 제목은) 이 사건을 취재했을 때 처음 느꼈던 것이 그거였어요. 어떻게 이렇게 집단적으로 이상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집단적으로 이렇게 눈감을 수 있을까? 이것은 한 명의 이성도 없이 전체가 이상한 것에 휩싸여버린 도가니 같은 상황이 아닐까 해서…."

공지영은 <도가니> 관련 각종 인터뷰에서 대부분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인터넷에는 광주·전남 지역 언론 기자들이 토호들과 결탁된 사이비라고 말하는 누리꾼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정작 광주 언론인들은 억울했다. 공지영이 본 스케치 기사를 쓴 <한겨레> 인턴 기자에게 청각장애인 관련 재판이 있다고 가보라고 권유한 것도 그들이었다. <광주드림>이나 광주 <시민의 소리> 등 언론사는 초기부터 뒤지지 않을 만큼 꾸준히 보도를 했다고 자부했다.

그들은 비리가 이렇게 불거질 동안 지역은 가만히 있었다는 시선이 답답했다. 광주KBS는 2011년 영화를 통해 국민적 관심이 쏠리자 해당 사건 관련 테이프를 찾으려고 보관소를 찾았다. 10년 전 비디오테이프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취재 분량도 상당했다. 그렇다면 당시 사건은 광주·전남 지역민에게 제대로 보도됐을까.

전라도의 낙후성은 매체 환경에서도 드러난다. 청산도, 보길도 같은 완도군 부속 도서는 난청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제주도 뉴스만 나왔다. <광주일보>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완도군 부속 도서에 사는 사람은 제주 지역뉴스 양대 산맥인 감귤 시세와 관광객 수를 확인하는 데 익숙했다.


섬은 광주·전남지역 신문도 배달하기 부담스러운 지역이다. 광주·전남지역 사람은 지역 언론이 아닌 중앙언론을 통해 인화학교 사건을 알게 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이들이 광주·전남 매체에서 이 사건을 보도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물론 우리나라도 서울과 지역을 연계하는 전국 네트워킹 체제를 제법 갖췄다. 언론계에서는 MBC문화방송이 대표적이다. 이런 네트워킹 체제를 가진 MBC는 파업 투쟁에서도 효과적이다. MBC 파업투쟁은 결국 정부를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농민회 투쟁과 비슷하다.  균형발전과 투쟁력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계속해서 살펴보자.   

 

(다음 제6화 대구도 항구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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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촌에서 쪼끄만 신문사 다닌다고 서울 사람들이 내를 무시하는데…"

2008년 초 그가 처음 나에게 한 말이다. 겨울 광화문 근처, 누가 문을 열면 바깥 한기가 안으로 들이닥치는 술집이었다. 그는 민간인 학살 관련 각종 세미나로 서울에 온다고 했다. 얼굴은 검었고 광대뼈 아래로 살이 움푹 패어 들어갔다. 끊임없이 피워대는 담배를 잡은 손마디는 투박했다. 그는 자신이 서울 사람들에게 무시당한 일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서울 사람들이 그에게 준 상처는 무엇이었을까.


 

이름은 김주완. 그는 1964년 남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학교에서 용모 검사를 한다기에 하얘지기 위해서 씻다가 살결이 상하기도 했다. 청소년 시절은 부산에서 보냈다. 1979년 고등학교 시절은 팝송에 빠져 지냈다. 긴 파마머리가 찰랑거리는 레드 제플린 멤버들을 직접 그려 벽에 붙여두었다. 부산 MBC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 엽서를 보내 경품도 종종 받았다.

1983년 김주완은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진주는 서부경남 중심지로 남강이 도시를 관통하여 흐른다.

▲ 진주 남강. ⓒ 서형


진주는 경남을 대표하는 교육도시이기도 하다. 경상대를 비롯해 연암공전, 진주교대, 진주농업전문대, 진주전문대 등이 있었다. 규모는 경상대가 가장 컸고, 그만큼 운동권 학생도 많았다.

김주완도 집회에 항상 참여했다. 당시 학교 안에서는 운동권 학생과 비운동권 학생들 사이 갈등이 빈번했다. 비운동권 학생 중에는 운동권 학생을 견제하려고 폭력서클을 조직하는 이들도 있었다.

집회가 벌어질 때면 교내로 진입하는 경찰에 맞서기 위해 조직한 사수대가 가장 앞줄에 섰다. 전남대 '오월대', 조선대 '녹두대' 등 학교마다 사수대에 독특한 이름을 붙였다. 경상대는 인근에 지리산이 있어서 '지리산 결사대'라고 지었다.

한편 1991년 4월 26일에는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살해됐다. 그리고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분신이 잇달았다. 노태우 정권은 궁지로 몰렸다. 학생운동의 기세를 꺾을 계기가 필요했다. 1991년 10월 10일 '지리산 결사대' 사건이 적당한 기회가 됐다.

이날은 진주전문대학(현 한국국제대) 학생회장 선거 날이었다. 진주·충무지역 총학생회협의회는 이 학교 운동권 후보의 요청으로 부정선거 및 선거 폭력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경상대 학생 40여 명을 진주전문대로 보냈다. 개표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강의실에 대기 중이던 학생들은 패배가 확실해진 비운동권 측 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무차별 폭행당했다.

하지만 뒤늦게 출동한 경찰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서 발표했다. 비운동권에게 습격당한 경상대 학생들을 전대협의 사주를 받고 결성된 극렬운동권으로 조작해 언론에 발표했다. 지역 언론을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이 사실 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경찰의 일방적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관련기사: '지리산 결사대사건' 재조사 필요하다)

 

▲ 지리대 결사대 조작보도

 


이 사건으로 학생 19명이 기소됐다. 폭력 및 집시법 위반 혐의였다. 학생들은 부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 도움을 청했다. 이 사건을 맡은 변호사가 문재인이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한 실상은 <한겨레>와 <부산일보>가 보도했다.

하지만 창간 초기였던 <한겨레>는 여전히 유통망이 약했다. 김주완도 자신이 근무하는 지역신문에 기사를 썼지만 사건 진상은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유통 파워를 체감한다. 그리고 고민 끝에 마산에 있는 지역 일간지 수습기자로 자리를 옮긴다.

 



중앙 언론의 '특종 도둑질'에 네트워킹으로 맞서다

김주완이 지역일간지 기자로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1997년 훈 할머니 고향 찾기 관련 보도다. 훈 할머니는 1997년까지 캄보디아에 살았는데 <한국일보>가 초청해 고향과 혈육 찾기에 나섰다.

이 과정에 대부분 언론이 따라붙었다. 한국어를 잊은 훈 할머니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단어 중에는 '진동'이 있었다. 김주완은 훈 할머니가 말한 '진동'을 마산 진동으로 확신하고 집중 취재했다. 옥편과 1리터짜리 환타를 들고 면사무소 호적등본 보관 창고에 앉아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인근 동네를 돌면서 노인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수소문했다.

1997년 6월 18일 김주완이 쓴 기사는 "훈 할머니 가족 찾았다"라는 제목으로 1면에 게재됐다. 그런데 그는 1997년 훈 할머니 고향 찾기 보도에서 보인 중앙매체들의 모습에서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대부분 자신들이 취재한 것처럼 말하더라는 것이다.

 

중앙에서 당한 무시는 김주완을 화나게 했다. 그 분노는 콘텐츠 생산은 물론 콘텐츠 유통까지 고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김주완은 2008년 봄이 되면서 바빠졌다. 블로그를 시작했다며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덩달아 자랑도 많아졌다. 그가 쓴 글은 다음 베스트 뉴스 첫 화면에 노출됐다.

김주완은 블로그라는 새로운 콘텐츠 생산 도구를 발견했고 더불어 이를 유통하는 전략에 대한 감각도 생겼다. 김주완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서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쓴 글은 이미 위력을 발휘했다. 소위 시사 분야 '파워 블로거'가 된 것이다.

거대 언론사들이 정보를 독점했던 때와 견주면 1인 미디어 등장 이후 공론장에 다양한 목소리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 다양성은 사회적 의제 설정 기능을 할 수 있을 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의제 설정은 이슈를 선택하고 거르는 작업을 거쳐 늘 주목받을 수 있어야 한다. 주목을 받을 통로를 만드는 것, 그게 저널리즘에 입각한 조직화 작업이다.

김주완은 '갱상도 블로거'를 조직해 인터넷에서 지역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그는 어떻게 '갱상도 블로거' 모임을 운영했을까. 그는 먼저 가까운 지인에게 권유하기 시작했다. 지역신문에 제보하는 것보다 블로그 활동이 훨씬 파급력이 좋다고 선전했다. 듣는 사람이 귀찮게 여길 정도였다.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함께 했던 박만순도 그중 한 명이다. 김주완은 기사를 쓰게 하고 출고된 기사를 다듬고 제목도 뽑아줬다. 박만순이 쓴 "한국에서 하나뿐인 경찰관 공덕비"라는 기사 제목도 김주완 작품이었다. 김주완은 박만순에게 '다음 블로거 뉴스' 머리에 노출된 것을 보게 하면서 위력을 느끼도록 했다.

김주완을 시작으로 <충청투데이> 홍미애, <중부매일> 김정미 등이 블로거 조직화에 열을 올렸다.

경남지역 블로거 모임인 '갱상도 블로그'와 충남 블로거 모임인 '따블뉴스' 등이 이런 고민을 통해 만들어졌다. 특히 김정미 기자가 지역에 쏟아부은 노력은 헌신적이었다. 청주 <중부매일> 기자인 김정미는 2009년 '충청도 블로그'라는 메타블로그를 구축하면서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SNS 강의를 진행했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 <충청투데이> 홍미애 기자 영향이었다.

 



2012년 말까지 김정미 기자에게 강의를 들은 수강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사무처장인 김용직도 교육을 통해 SNS 가능성을 알게 됐다.

SNS 네트워킹, 파업현장에도 활기를


이명박 정부 등장은 금속노조 전체판 정리를 예고했다. 2009년 8월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옥쇄파업이 경찰에 진압되면서 완성차 업체 노동자들은 파업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2009년 10월 창원 대림자동차 노조가 무너졌고, 2010년 2월 경주에 있는 발레오만도 노조도 와해했다. 경주지역 금속노조는 연대파업을 벌였으나 노조 핵심 간부들이 바로 구속됐다. 2010년 6월 구미 KEC에서는 여성 기숙사에까지 사측이 고용한 용역이 투입돼 부분 파업에 돌입한 조합원들을 끌어냈다. 그해 8월 대구 상신브레이크, 2011년 3월 광주 금호타이어까지 노동조합 탄압이 이어졌다.

그리고 두 달 후, 5월 18일 유성기업 사태가 벌어졌다. "밤에는 잠 좀 자자"며 주야 맞교대를 주간연속 2교대제(8시간 근무)로 바꾸자는 게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였다. 이날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회사는 직장폐쇄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사측은 용역을 고용해 조합원들의 출입을 막고 폭력을 행사했다.

직장폐쇄 이후 들어온 용역을 몰아내고 조합원이 다시 공장을 점거한 게 19일이었다. 이날 유성기업의 원청인 현대자동차의 총괄이사가 공장 안에 있는 차를 꺼내 달라며 키를 건넨다. 키를 받은 조합원은 그의 자동차 조수석에 있는 노란 봉투를 발견한다.

봉투에는 40페이지에 이르는 '노조 파괴 시나리오'가 있었다. 불법파업 유도 후 직장폐쇄 그리고 용역 동원, 공장 봉쇄와 폭력 유발로 공권력 투입, 결국은 노조 파괴까지 이르는 내용이었다. 조합원은 이 모든 내용을 캠코더에 담았다. 노조는 또 용역 차량도 발견했다. 차량 안에는 뇌물 리스트가 적힌 수첩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5월 30일 KBS라디오 주례연설에서 유성기업 사태를 거론하며 "연봉 7000만 원을 받는 근로자들의 불법파업"이라고 못 박았다. 거대 언론은 이 말을 그대로 받아썼다.

김용직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사무처장은 블로그에 "유성기업 용역깡패 동원 노조원 13명 차로 밀어붙여", "유성기업 사태의 배후 현대자동차(?)", "유성기업이 불법파업이라 공권력을 투입한다고?" 같은 글을 올렸다. 그가 쓴 글은 <중부매일> 지면에 실렸고, 트위터로 끊임없이 리트윗 됐다. 김용직을 자신의 '리스트'에 올리는 트위터 사용자들이 많아졌다. 유성기업 투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김용직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훗날 유성기업 조합원 500명은 직장폐쇄로 인근 논밭 하우스 안에서 살았다. 식사 반찬은 고추장과 김치가 전부였다. 조합원들은 후식으로 달달한 커피가 먹고 싶다는 넋두리를 하곤 했다. 김용직은 SNS를 통해 커피믹스를 후원받는 방법을 생각하고 별 기대 없이 시도한다.

일주일이 지나자 하우스에 택배 차량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커피를 비롯해 생수, 쌀, 감자 같은 식재료가 쌓였다. 유성기업 조합원은 SNS 위력을 체감하게 된다.

 



유성기업 조합원들은 대구KEC, 경주 발레오만도 같은 기업의 노조원들이 자신들처럼 SNS를 활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경주 발레오만도 조합원에게 왜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를 이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지역에서 잘 안 보는 매체"라고 답했다. 물론 이들이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포항MBC처럼 평소 익숙한 매체에만 한정됐다.

네트워킹만 활발했어도 '김형태 당선'은 막았을 텐데...

대구에서 활동하는 한 블로거는 2011년 7월 창원시가 개최한 전국 파워 블로거 간담회에 참석했다. 당시 창원시는 SNS로 간담회를 생중계했다. 이 대구 블로거는 박완수 창원시장은 만나봤지만 대구시장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지역 정치색으로 따지면 대구와 다를 바 없는 경남에서 이 같은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한 부산지역 신문사 기자가 경남에 발령을 받은 첫날 창원상공회의소를 찾았다. 창원상공회의소에서 그는 60대 대의원들이 행사 기획을 하면서 K-POP 가수 초청을 고민하는 모습을 본다.

"큰 기업이나 공단이 드문 부산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지요. 창원에 젊은 사람들이 많으니 60대가 행사를 기획해도 젊은 사람 수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나 봐요."


창원은 대구와 달리 공장과 기업이 밀집된 지역이다. 전국에서 몰려온 젊은 층이 인구 구성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블로그를 비롯한 SNS는 누가 할까. 제주를 사례로 살펴보자. 제주는 자연 풍광과 올레길 열풍으로 젊은 층 유입이 늘어나는 곳이다. 제주에서 SNS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주민이다. 제주 토박이들은 이미 연결망이 탄탄하기 때문에 SNS를 활용할 이유가 별로 없다.

2012년 4월 11일 19대 총선에서 경북 포항에 출마한 새누리당 후보 김형태가 제수씨 성폭행 미수 논란에도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새누리당 강세 지역이라는 설명만으로 납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한겨레> 기사 "새누리 김형태 후보 제수씨 성폭행 시도 파문…'성누리 끝판왕'"이 트위터를 통해 끝없이 확산되며 김형태 낙선을 예고했다. 하지만 김 후보는 당선됐다.


포항시민 대부분은 4·11 총선이 끝나고 '제수씨 성폭행 미수 논란'이 불거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포항지역에서 활동하는 한 기자는 시민들이 정보를 접할 시간이 촉박했다고 지적했다. 성추문 의혹이 제기된 것은 총선 3일 전이었다. 이날 김형태 후보의 제수인 최아무개 씨가 포항에 있는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 자리에는 대구·경북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매일신문>을 비롯한 언론사들과 포항MBC를 포함한 방송사들이 참석했다.

다음날 지역언론이 이 소식을 전했지만, 포항은 수도권과 달리 SNS 영향력이 약했다. 정보가 퍼지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더뎠다. 김형태 당선 소식이 전해지자 온라인에는 그 지역구 유권자를 비난하는 글들이 도배됐다.

이와 같은 편견 어린 중앙발 시각은 지역 주민에 대한 경멸과 무시로 이어진다. 즉, 네트워킹을 한정 짓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서울 지식인들은 교양과 학식이 넘쳤다. 사회 양극화, 노동자 문제, 경제민주화, 복지·교육 등을 언급할 때마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더 진보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들도 서울 밖 세상에 대한 생각은 비슷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우리나라는 KTX로 3시간이면 땅 끝까지 가는 좁은 땅덩어리를 가졌다."
"우리나라는 어디나 마트와 백화점이 소비문화의 중심이다."
"어디든지 아파트라는 거주문화가 비슷하다."
"이런 시대에 지역성과 지역담론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방기자들은 사이비이며 지역 토호다."

이러한 서울 중심의 시각은 전국으로 퍼진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밝혔지만 우리가 얼마나 갇혀서 생각하는지 스스로 알 길은 없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길을 따라서 전국을 떠나보기로 한다.

 

(다음 제5화 강릉의 위키리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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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케어해줘. 연재 순서.

⦁제1화. 보험성뇌물의결말 (폭로자 김학성 시선)

⦁제2화. 제말이그말입니다 (김학성 동업자 한수찬 시선)

⦁제3화. 앞뒤좌우완벽하게 (김학성 구치소 동료 오강수 시선)

⦁제4화. 부친사망일의진실 (김학성 전 사업 파트너. 이문재 시선)

⦁제5화. 난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변호사 시선)

⦁제6화. 대검케어가최고야. (작가 시선)

 

 

 

 

 

 

 

<김형준 '스폰서 검사' 사건 재판 추적기> 제3화. 앞뒤좌우 완벽하게 - 오강수 시선.

 

2010년 김학성은 특가법위반, 사기 등으로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때 구치소에서 오강수를 알게 됐다. 오강수는 불법 다단계로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는 자금관리를 여비서에게 맡겼다.

 

 

김학성은 당시 합의금으로 거액이 필요했는데 오강수가 그 부분을 도와줬다. 김학성은 UN에 파견 나간 김형준이 돌아오면 출소 후 구명활동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2011년 9월 대검찰청 제2범죄정보담당관으로 복귀한 김형준은 김학성을 소환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범죄정보 제공이었다. 김형준은 나중에 문제 되지 않도록 대비할 필요가 있다며 요식행위로 뭐라도 하나 써낼 것을 주문했다. 김학성은 A4용지에 허위사실을 작성해 건네면서 친구인 그에게 고마움과 뿌듯함을 느꼈다. 이 검사 친구는 앞으로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학성은 총 9회에 걸쳐 대검찰청 제2범죄정보담당관실에 소환됐다.

 

아침에 가면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김형준과 이야기했다. 김형준이 보고 때문에 사무실에서 나가면 김학성은 아이패드를 만지거나 스포츠 방송을 보기도 했다.

 

▲ SBS ESPN 방송 화면 캡처

 

전화도 자유롭게 썼다. 그렇게 있다가 오후 4시쯤 다시 구치소로 돌아왔다. 김학성은 김형준에게 금전적 지원은 받은 오강수를 소개하며 그도 함께 소환해달라 부탁했다. 김형준은 김학성을 소환할 때 두 차례 오강수도 불렀다.  그 자리에서 김학성은 오강수를 잘 부탁한다며 거듭 부탁했다. 김형준은 가석방 등 김학성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다.

 

2012년 5월 6일 출소한 김학성은 오강수가 가석방될 수 있도록 돕고자 움직였다. 오강수는 가석방 대가로 금전적 도움을 제안하기도 했다.

 


 

출소하고 나서 김형준과 시작한 술자리는 6~7월에 집중됐다. 누가 봐도 향응일 수밖에 없는 접대였다. 당시 출소 직후인 만큼 별다른 수입원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술값을 낼 능력이 없어 지인 A 씨가 대신 내주기도 했다. A 씨는 나중에 법정에서 당시 술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김형준이 검사이다 보니 나중에라도 도움을 받고자 계속 접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유가 없을 때도 어쨌든 저에게 술을 먹으면서 제가 계산할 수 있게 같이 술자리를 마련한다는 자체를 봤을 때는 나중에 도움을 받겠다는 이유밖에 안 됩니다.”

 

김학성은 매달 오강수를 면회했는데 당시 오강수는 무척 곤란한 상황이었다. 2012년 6월 여비서가 자금을 횡령한 것이다.

 

오강수는 김형준에게 여비서 횡령 사건을 부탁했다. 오강수 측근은 문자를 보내며 사건 처리를 독촉했으나 김학성 집안에 복잡한 일이 있었다. 부친이 위독했던 것이다.

 

12월 14일 김형준을 만나려 했던 당일,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김형준은 만사 제치고 오겠다 했으나 거절했고 부친 유언대로 가족장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KK게임즈를 하면서 오강수를 만날 기회가 더 없어졌다. 여기까지가 김학성 진술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오강수 씨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 이름은 오강수. 나는 유사수신범행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 말 구치소에서 김학성을 알게 됐다. 함께 지내다 보면 서로 자기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 마련이다. 나는 밖에 여비서를 두고 불법다단계로 번 돈을 관리한다고 말했다. 김학성은 당시 사기죄로 구속 재판 중이었다.

 

김학성은 검사인 김형준과 친구라고 했다. 김형준이 검사가 된 직후부터 접대도 하고 용돈도 주면서 스폰서 역할을 하며 관리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런데 김형준이 UN으로 파견되는 바람에 수사 과정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김학성은 김형준이 자기 안부를 묻는 이메일 내용을 보여주며 관계를 자랑했다. 둘 사이가 가깝다는 확신이 들었다.

 

당시 나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형량이 상당히 남았기에 가석방을 받을 요건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 처지에서 검찰에 범죄정보 제공으로 공적을 쌓다보면 가석방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솔깃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검찰이 매력을 느낄만한 정보가 없었다.

 

반면 김학성에게는 굵직한 범죄정보가 제법 있다고 했다. 자기 계좌에서 수십억이 나간 흔적들을 보여줬다. 김형준 장인인 국회의원 박희태 씨에게 건넨 정치자금이 30억 원 정도 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 채널A 방송 화면 캡처

 

어느 날 김학성은 종이 한 장에 대기업 비자금 뇌물 사건, 판검사 뇌물 사건, 경찰·국세청 공무원 뇌물 사건을 적어서 보여줬다.

 

“나에게 이런 사건들이 있으니 김형준이 UN에서 돌아오면 형님이 가석방 받거나 최소한 교도소에서 편하게 지내도록 조치해주겠다”

 

김학성은 김형준만 UN에서 돌아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수차례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제가 재판을 받는 사건에 대한 합의금을 지원해 달라.”

 

나는 여비서를 시켜서 김학성에게 합의금 수억 원을 전달하도록 했다. 2011년 김형준이 대검찰청 범죄정보2담당관으로 복귀했다. 나와 김학성은 2011년부터 2012년까지 김형준이 근무하는 대검찰청에 두 차례 소환됐다. 부장검사 사무실에서 김학성은 존칭도 쓰지 않은 채 김형준을 ‘김 부장’이라고 불렀다. 김학성은 김형준과 친구인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김형준은 별 말없이 업무적인 이야기를 했다. 김형준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김학성이 나에게 말을 꺼냈다.

 

“김형준 부장이 형님을 위해 가석방을 알아봐주는 중이니까 김 부장에게 직접 들어보세요.”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 김형준이 나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외국에는 플리바게닝 제도, 즉 범죄정보제공과 관련된 가석방 제도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제도가 없습니다. 다만 수감자가 자기가 아는 고급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에는 향후 가석방에 가점 요인으로 작용하는 제도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설명을 들으면서 김학성에게 믿음이 갔다. 김형준 설명은 제대로 된 범죄정보를 제공하면 가석방을 신속하게 받도록 힘 써주겠다는 취지로 들렸다. 김형준은 고급 범죄정보 제공에 협조를 구했다. 나도 김형준에게 제공할 정보를 하나 준비했다.

 

오강수가 모 국회의원에게 향응과 함께 현금 500만 원을 줬다’.

 

김형준은 ‘좀 약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전히 나는 김학성 지시에 따랐을 뿐이었다. 소환 전에 김학성은 내게 편지를 보내 얘깃거리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날 들어보고 필요하다면 아주 간단히 김 부장 앞으로 진술서 쓸 겁니다. 모양새와 명분을 갖추기 위해서입니다. (사건화 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라도 흠 잡히지 않게 하는 조치입니다. (...) 누가 묻지도 않겠지만 혹시 흠이 있어서는 안 되는 주의이십니다. 뭘 하나 하더라도 앞뒤 좌우 완벽하게 하려 하십니다’.


 

 

김학성은 2012년 5월 6일 만기출소를 했다. 그 직후 내 비서를 시켜 김학성에게 1000만 원을 송금하도록 했다. 김학성이 가석방, 교도소 이감 등 내 수감생활 편의를 위해 움직여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김학성은 정기적으로 면회를 왔다. 그리고 김형준 이야기를 주로 했다.

 

“김형준과 맨날 술을 마신다. 용돈도 준다. 형님을 위해서 밖에서 엄청 애쓰고 있다.”

 

김학성에게 김형준을 만나면 잘 이야기해달라는 취지로 부탁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에는 내가 변호사법 위반, 사기 등으로 고소할까봐 면회를 충실히 왔던 것 같다. 나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학성 태도를 보면, 김학성이 김형준을 내세워 구치소에서 저와 한 돈거래에 대해서 문제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저도 실제로 김학성 친구가 김형준이라는 점 때문에 변호사법 위반 등으로 고소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2년 7월이 됐을 때 김형준에게 부탁할 일이 추가됐다. 내 여비서가 돈을 모두 들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나는 비서를 횡령으로 고소했고, 김형준이 이 사건을 잘 챙길 수 있도록 김학성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2012년 말 김학성 부친이 사망하면서 내 아쉬운 얘기만 할 수 없었다. 김학성이 면회 오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2015년으로 넘어가자 사업이 바쁘다며 면회 오지 않았다.

 


 

그래도 오강수 처지에서는 건넨 돈을 고급 범죄정보와 맞바꿨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오강수는 김학성이 건넨 고급 범죄정보를 손에 쥐었다. 오강수는 2010년 말부터 7년 동안 김학성이 종이에 써준 범죄정보 내용을 여러 장 복사해 서울중앙지검을 비롯한 여러 검찰청에 근무하는 검사들과 담당 수사관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정보를 바탕으로 실제 수사가 시작된 적은 없었다.

 

2017년 말 오강수가 재판 증인으로 나왔을 때 김형준 변호인은 그 이유를 알려줬다.

 

“저거 가짜라는 말 안 하던가요? 김학성은 다 거짓말로 썼대요.”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김학성이 오강수 구명활동을 위해 애를 쓴 것은 분명하다. 김학성은 오강수 구명을 위해서 김형준에게 돈을 건넸다고 말했다. 2012년 11월 15일에서 12월 14일 전으로 날짜도 특정 가능했다. 그 이후에 건넨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012년 12월 14일에는 김학성 부친이 돌아가셨고 두 친구는 한 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나왔다.

 

“김학성 부친 사망일은 2013년 10월 21일. 내 기억에.”

 

이 증언을 한 사람은 KK인터네셔널 대표이사였던 이문재다. 이문재도 김학성 소개로 김형준과 술자리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김학성은 왜 이 시점에 부친 사망이라는 카드를 꺼내야 했을까? 이제 이문재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음 4화- 부친사망일의 진실-이문재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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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케어해줘. 연재 순서.

⦁제1화. 보험성뇌물의결말 (폭로자 김학성 시선)

⦁제2화. 제말이그말입니다 (김학성 동업자 한수찬 시선)

⦁제3화. 앞뒤좌우완벽하게 (김학성 구치소 동료 오강수 시선)

⦁제4화. 부친사망일의진실 (김학성 전 사업 파트너. 이문재 시선)

⦁제5화. 난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변호사 시선)

⦁제6화. 대검케어가최고야. (작가 시선)

 

 

 

 

 

 

<김형준 스폰서 검사 사건 재판 추적기> 제2화 제 말이 그 말 입니다. (한수찬 시선)

 

 

나는 한수찬이다. 나와 김학성, 김형준은 고교 동창이다. 그러나 이들을 가까이할 기회가 없었다. 김형준은 총동문동창회에서 몇 번 보기만 했다. 보통 45~50명 정도 모이므로 김형준은 나를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김형준은 동창회에 잠시 있다가 밀린 업무 처리 때문에 검찰 차량을 타고 돌아갔다.

 


 

가까이서 김형준을 접한 것은 김학성 덕분이다. 내가 김학성과 얽힌 것은 2015년 1월부터다. 김학성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면서 나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권했다.

 

 

 

당시 김학성은 KK인터내셔널에 다니고 있었다. KK인터네셔널 대표이사 이문재가 경영을 못해 망할 것 같다며 회사 게임사업부만 빼내 새로운 법인을 설립할 것이라고 했다. 그게 바로 KK게임즈다.

 

이후 나는 KK게임즈 대표이사가 됐지만 등기만 했을 뿐 회사 전반적인 업무는 김학성이 총괄했다. 나도 김학성 지시대로 움직였다. 김학성이 단골 술집 여직원에게 빌려 준 돈을 회수하는 일도 했다.

 

KK게임즈는 중국 샤오밍 전자 제품을 국내 거래처에 판매하면서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김학성은 샤오밍 전자제품을 국내에서 가장 싸게 팔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국내 업체를 상대로 영업하고 계약하는 일을 담당했다. 국내 거래처에서 현금이 들어오자 매출은 늘었다. 덩달아 직원 회식도 잦았다. 결제는 언제나 김학성 몫이었다.

 

 

직원들 모두 김학성 인맥과 재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김학성은 처가 재산도 상당했다. 한 달에 두 번 용돈을 받는데 한 번에 2000만 원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 번은 회식 중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나왔다. 정치인 김무성이 나오자 김학성이 한마디 했다.

 

“아, 우리 6촌 형님.”

 

김학성은 김무성이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6촌 형님’이라고 불렀다. 직원들도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삼성 이재용, 신세계 정용진을 언급할 때도 항상 ‘형님’ 호칭을 썼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하루는 김학성이 내게 재벌 2세들과 9인회 모임이 있다며 동행을 권했다. 그런데 바로 김학성 일정이 바뀌었다. 모임이 파기됐고 김형준과 셋이 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평소 김학성은 김형준을 매우 가까운 사이로 내세웠다.

 

술집에서 보니 둘은 정말 친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대화에 깊이 끼어들지 못했던 나는 술 몇 잔 마시고 먼저 일어났다. 다음 날 김학성은 술값을 자신이 냈다고 말했다.

 


 

2016년 2월 KK게임즈 사무실 근처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던 김학성은 이런 얘기도 했다.

 

“김형준이 여자랑 사랑에 빠졌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줬다.”

 

김학성은 김형준 뿐 아니라 고교 동창에게도 중국에 있는 큰 기업을 언급하며 회사 매출이 100억 원을 넘는다고 자랑했다. 모임에서는 항상 자신이 술값을 계산하려 했다. 동창들도 술값이 김학성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동창 모임을 연 술집이 자신이 투자해 설립했다며 반은 자기 것이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2015년 말부터 2016년 초까지 김학성은 회사 자랑에 끝이 없었다. 하지만, 나타나는 현상은 달랐다. 2015년 중반부터 거래업체에서 물품 납품 지연 항의가 들어왔다. 9월 들어 납품일자에 물품을 받지 못한 거래업체가 선수금 반환을 요구했다. 거래업체 대표가 사무실에 찾아와 항의하면 김학성은 자리를 피하면서 나에게 떠넘겼다.

 

2015년 12월부터 나는 거래업체 관계자와 회사 근처에서 만나며 계속 이야기했다.

 

번은 김학성에게 돈을 서둘러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김학성은 돈을 벌어야 갚는 것 아니냐며 오히려 영업을 독촉했다.

 

2016년 1월 납품이 장기간 지연되자 업체들 항의가 거세졌다. 김학성은 중국 명절 기간 공백 등을 내세우며 상황을 넘겼다. 2016년 2월 들어서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김학성에게 물품 입고 일정을 계속 물었다. 김학성은 중국 쪽 문제든 국내 통관 절차 문제든 항상 이유는 설명했다. 나는 그 해명을 거래 업체 관계자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김학성은 오히려 거래 업체에 끌려다니지 않는 당당한 영업을 강조했다.

 

“그 사람들이 매일 찾아와서 괴롭히면 업무방해로 고소해라. 뒤에서 형준이가 봐주는데 넌 왜 그리 겁이 많니?”

 

2016년 3월 14일 김학성은 다시 내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 형준이하고는 통화했다. 만일 일이 발생하면 서부지검에 업무방해등으로 형사 고소하고 처벌해버리자. 형준이가 나 건드리면 죽여버리자고 한다.

 

직원들도 회사가 어렵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직원들은 나중에라도 김학성이 회사에 자기 자금을 투여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학성 또한 자기 재산을 거론하며 일부만 대출받아도 해결된다고 큰소리쳤다.

 

실제 3월 중순부터 거래처 항의가 거세지자 김학성은 거래처 환불 문제를 개인 돈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대신 대표이사인 내가 일처리 잘못으로 회사에 피해를 입힌 모양새를 갖추자고 했다. 김학성은 이사회를 열어 형식적인 권한정지를 결의할 테니 잠시 피해 있으라고 했다.

 


 

3월 18일 KK게임즈 이사회가 열렸고 이후 나는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당시 나는 김학성이 잠시 사용하라며 건넨 휴대폰이 있었다. 휴대폰은 로그인이 된 상태였다. 나는 휴대폰으로 김학성 계정 이메일을 볼 수 있었다. 이메일에는 KK게임즈 회사 지출 및 자금 현황 보고서가 있었다. 그 자료를 열어본 순간 나는 김학성이 그려놓은 큰 그림을 알게 됐다.

 

그 보고서 거래업체에 납품이 지연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김학성은 국내에는 샤오밍 제품을 수입 가격보다 더 싸게 판매하도록 지시했다. 초기에는 외형적으로 회사 매출이 증가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오래 운영할 수 없다.

 

그러나 13~15개 거래업체에서 30억 원이 넘는 현금을 당길 수 있었다. 김학성은 이 가운데 20억 원 이상을 횡령해 유흥비로 썼다. 김학성은 이 모든 짓을 덮어 씌울 상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제안한 것도 큰 그림 안에 들어 있지 않았을까.

 

보고서를 보다가 ‘김형준 대여금’으로 두 군데 찍힌 항목이 눈에 띄었다. 2월 4일 500만 원, 3월 8일 1000만 원 등 총 1500만 원이 김형준에게 흘러갔다. 김학성이 김형준에게 돈을 해줬다는 말을 들은 게 2월 초였다. 그 내용을 서류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나는 3월 26일 이 자료를 들고 피해 규모가 가장 큰 업체인 아스트라를 찾아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는 아스트라에 김학성 고소를 위임했다. 아스트라는 법무법인 로얄에 일을 맡겼다. 일을 진행하면서 김형준 부분은 뺐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스트라는 단호했다.

 

4월 15일 아스트라와 나는 각각 서부지검에 김학성을 사기와 횡령으로 고소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학성은 자료를 회수하려 아스트라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니 돈을 갚으려면 선수금 더 내라.”

 

6월 3일 나는 서부지검에 출석해 고소인 조사를 받았다. 주임검사가 김형준과 관련된 부분을 물어봤다. 나는 김학성에게 들은 대로 간단하게 진술했다.

 

▲ 발로 뛰는 김희란 변호사 블로그 사진 인용

 

당시 김학성은 김형준 검사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식으로 소문을 냈다. 거래업체에서도 김학성이 뒤에 검찰이 있다는 이야기를 흘리고 다닌다고 했다. 급기야 김형준이 김학성을 위해 서부지검 검사들과 식사를 한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이 당시 나는 극도로 두려운 상태였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기자들에게 언론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했을 정도로 내 방어책이 필요했다.

 

내가 고소한 이 사건은 결국 두 동창생을 뇌물공여와 뇌물수수로 재판에 서게 했다. 그런데 각각 주장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김학성은 오랫동안 검사 친구 스폰서 노릇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김형준은 과장이라고 받아쳤다. 김형준은 ‘김형준 대여금’으로 표시된 1500만 원도 뇌물이 아니라 빌린 돈이며 갚았다고 주장했다. 둘 사이에 현금이 오간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이 사건을 차분하게 되짚었다.

 

김학성은 나에게 일시를 정해서 김형준과 함께 만나자고 한 적이 없었다. 늘 당일 갑자기 가자고 했다. 회사 직원들도 나처럼 갑자기 합석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혹시 우리 회사는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김형준 변호인은 김학성이 말하는 뇌물 부분이 거짓이며 향응 횟수도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나는 김형준 측 주장에 동감하며 회사 자료를 그쪽에 건네줬다. 증거자료 제출에 KK게임즈 회사 직원도 도왔다. 나는 법정에서 자료를 건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김학성은 몇 월 몇 일 몇 시에 김형준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날은 저랑 같이 있던 날이거든요. 그런데도 김형준을 만났다고 하니까.”

 

나는 김형준 변호인에게 김학성이 오랫동안 단골로 다니던 유흥주점 <달> 사장 장미희도 소개했다. 변호인은 장미희에게 장부를 제공받았다. 김학성이 술 마신 날짜와 액수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기에 김형준에게 유리한 자료들이었다. 변호인은 법정에서 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2016년 6월 김형준에게 빌려줬던 1500만 원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있다고 가족을 위해 최대한 마련해야 한다고 하면서까지 그 돈을 받아냅니다. 김학성이 술집 여직원에게도 법무팀 운운하며 돈을 회수할 정도인데 만약에 김학성이 김형준에게 뇌물로 건넨 다른 돈이 있다면 언급을 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변호인 말에 동의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내 기억에 김학성은 입이 무거운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나와 술을 마시다가 대리비 5만 원을 건넨 적이 있었는데 이튿날이면 직원들이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김학성도 가만있지 않았다. 변호인에게 자료를 넘겨준 것을 문제 삼아 나를 서부지검에 고소했다. 유흥주점 <달> 관할 기관에 장부 사본을 근거로 이 주점이 여성 접대부 등을 두고 영업한다고 고소했다. 종업원들이 팁을 받은 내용이 적힌 장부 한 장을 첨부해 종업원들 처벌을 요구했다.

 

물론 김학성은 KK게임즈 이전부터 김형준에게 향응과 뇌물을 제공했다고 했다. 교도소에서 만난 오강수 씨 구명활동을 위해서다.

 

당시 둘 사이 일은 나(한수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오강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음 제3화, 앞뒤좌우 완벽하게(오강수 시선)으로 이어집니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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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하반기부터 PD수첩과 뉴스파타는 <죄수와 검사> 시리즈를 방송했다. 특히 김형준 ‘스폰서’ 검사 사건을 재조명했다. 이 사건은 2016년 8월 <한겨레>에 30년 동안 김형준 스폰서 노릇을 했다는 고교 동창 김학성(가명) 폭로에서 비롯됐다. 2019년 PD수첩과 뉴스타파도 김학성 주장을 반영하여 이 사건을 방송했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이렇게 한쪽에서 김형준을 몰아붙이는 가운데 다른 쪽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법원은 2017년 8월 10일 김형준에게 집행유예를 선사한다. 공소사실 많은 내용들이 무죄가 됐기 때문이다. 김형준은 2020년 5월 15일 법무부를 상대로 한 징계부가금 취소 소송도 승소했다.

 

어떻게 된 상황일까. 진실은 뭘까. 궁금하지 않은가?

 

나는 서형이다. 당시 김형준 ‘스폰서 검사’ 재판을 모두 기록한 유일한 목격자다. 당시 기자들은 최순실 국정농단 재판에만 몰려다녔다. 이 재판 방청석에 기자는 없었다. 나는 재판에 나온 증인 시선으로 서술할 것이다. 언론에 실명이 나온 인물을 제외하고 모두 가명 처리한다. 이제 시작하겠다.

 

 


나를 케어해줘. 연재 순서.

⦁제1화. 보험성뇌물의결말 (폭로자 김학성 시선)

⦁제2화. 제말이그말입니다 (김학성 동업자 한수찬 시선)

⦁제3화. 앞뒤좌우완벽하게 (김학성 구치소 동료 오강수 시선)

⦁제4화. 부친사망일의진실 (김학성 전 사업 파트너. 이문재 시선)

⦁제5화. 난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변호사 시선)

⦁제6화. 대검케어가최고야. (작가 시선)

 

 

 

 

 

<김형준 스폰서 검사 사건 재판 추적기> 제1화 보험성 뇌물의 결말(김학성 시선)

 

내 이름은 김학성. 이 추악한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낸 당사자다. 중·고등학교 동창인 김형준은 30년 지기 친구다. 우리는 모두 대학 진학 후 고시를 준비했다. 나는 실패했지만 김형준은 합격했다. 검사가 된 김형준은 승승장구했고, 나는 사업을 시작했지만 굴곡을 몇 번 거쳤다.

 

사업하다가 법적 분쟁에 휘말려 실형을 살면 그 고통은 말할 수 없기에 ‘검사 친구’는 나름 절실했다. 지난 7년 동안 김형준이 요청한 술값은 죄다 결제했다. 김형준은 강력사범이 아닌 경제사범은 도와줄 힘이 있다고 장담하곤 했다.

 

내가 한겨레신문에 폭로한 이후, 검찰은 내 휴대폰을 복원했다. 검찰은 2012년 5월부터 2016년 3월까지 김형준에게 5835만 1300원을 향응 제공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3400만 원은 현금이었다. 전달 방법은 대부분 김형준이 벗어둔 양복 주머니에 넣어두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것을 ‘보험성 뇌물’이라고 표현한다.

 

 


 

이 이야기는 김형준 검사가 UN에 협력법무관으로 파견 나간 2010년부터 시작한다. 이 시기 나는 특가법위반, 사기 등으로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때 구치소에서 오강수를 알게 됐다.

 

오강수는 불법 다단계로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나는 당시 합의금으로 거액이 필요했는데 오강수가 그 부분을 도와줬다. 나는 UN에 파견 나간 김형준이 돌아오면 출소 후 구명활동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2012년 5월 6일 출소하고 나서 김형준과 시작한 술자리는 6~7월에 집중됐다. 누가 봐도 향응일 수밖에 없는 접대였다. 당시 출소 직후인 만큼 별다른 수입원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술값을 낼 능력이 없어 지인들이 대신 내줬다.

 

오강수도 김형준을 챙기라며 1000만 원을 건넸다. 오강수 구명활동은 내 집안에 복잡한 일이 터지면서 후순위로 밀려났다. 부친이 위독했던 것이다.

 

12월 14일 김형준을 만나려 했던 당일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김형준은 만사 제치고 오겠다 했으나 정중히 사양했다. 부친 유언대로 가족장으로 마무리했다. 그 이후 3년 동안 김형준과 술자리는 없었다.

 


 

김형준도 바쁜 시기였다. 2012년 인천지검 외사부장 시절에는 외국인학교 부정입학 사건이 터졌다. 2013년 7월 서울 중앙지검 외사부장 시절에는 전두환 추징금 특별환수팀장, 2015년 하반기에는 서울 남부지검 증권합동수사단장을 맡았다. 그해 말 김형준은 인사에서 밀려 예금보험공사로 파견된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나는 이 시기에 사업을 재개했다. 회사 이름은 ‘KK게임즈’이다. 이 시기 외국 출장을 다니면서 더 바빠졌고 오강수를 면회할 시간도 없었다.

 


 

내가 김형준을 다시 만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5월경이다. 당시 김형준은 술집 아가씨에게 빠져 있었다. 나는 김형준에게 수차례 헤어지라고 요구했지만, 김형준은 좀처럼 정리하지 못했다. 급기야 2015년 가을쯤 김형준은 아가씨를 케어해야겠다며 오피스텔 보증금과 생활지원금을 요구했다.

 

통상 뇌물을 송금하면 차명계좌를 이용한다. 하지만 매출 100억 원이 넘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너무 바쁜 나머지 회사 경리에게 KK게임즈 법인계좌를 쓰도록 했다. 1500만 원은 회사계좌로 2월 3일, 3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보냈다. 경리에게는 ‘김형준 대여금’이라고 적도록 지시했다. 이게 바로 발단이 됐다.

 

당시 KK게임즈 대표이사는 고교 동창인 한수찬였다. 게임 개발업체인 KK게임즈에 중국 샤오밍 전자제품 판매를 제안한 친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잘 나가던 KK게임즈는 한수찬이 무리한 경영을 하면서 거래업체들 항의가 잇따랐다. 한수찬은 업체를 고소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김형준과 좋은 방향으로 해보겠다며 한수찬을 달랬다.

 

2016년 3월 말 김형준에게 카톡으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도 최근에 머리 아픈 일이 생겨서... 우리 유통사업부 대표 한수찬이 업무상 배임횡령하고 잠적했다. "

 

 "뭔 소리야?? 우리 동기? 자네까지 문제되는 것은 없는 것이지?"

 

"나야 그렇지만 회사에 손실이 커. 38억이야. 업체에서 돈 받아먹고 그랬더라고."

 

한수찬은 이사회 결의로 대표직을 잃는다. 2016년 4월 한수찬은 내 핸드폰에 저장된 회사 지출 및 자금현황 보고 자료를 가져가 버렸다. 한수찬이 가져간 자료에 내가 ‘김형준 대여금’으로 적시한 1500만 원 내용도 있었다. 나는 거래업체를 찾아가 자료를 회수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으려 했으나 돌려받지 못했다.

 


 

4월 16일 서울에 있는 한 호텔 커피숍에서 김형준을 만나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한수찬이 나를 횡령으로 고소한 사건들이 서울서부지방검찰청에 있었다. 거기에는 김형준이 1500만 원을 횡령했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었다.

 

김형준은 변호사 박수종을 ‘형사사건 베스트’라며 만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박수종은 2010년 내가 구속됐을 때 고소인 측 대리인이었다. 또 나는 이미 선임한 변호사도 있었다.

 

김형준은 자신이 마련한 2000만 원을 박수종에게 건네며 일을 부탁했다. 자기 비리가 얽힌 만큼 그 일을 처리하는 명목이라고 생각했다.

 

▲ 뉴스탸퍄 방송 화면 캡처. 오른쪽이 박수종 변호사

박수종은 ‘셀프 고소’를 제안하며 자기 방식을 강요했다. ‘셀프 고소’는 서울서부지검에서 수사 중인 여러 형사사건을 고양지청으로 이송해 처리하려는 방법이다. 고양지청 차장검사가 김형준 동기라고 했다.

 

나는 피해 거래업체 가운데 한 곳을 물색해 합의금 4000만 원을 건네며 나를 고양지청에 고소하도록 부탁했다. 그 업체 사장은 내가 부르는 대로 고소장을 작성했다. 2016년 4월 22일 고양지청에 고소장을 접수하고 박수종에게 고소 내용을 문자로 보냈다. 김형준은 고소장이 접수되자 사건이 배당되기 전에 고양지청 차장검사실을 찾아갔다고 한다.

 

확인할 길은 없으나 이때부터 김형준은 자기 대신 박수종을 통해 연락하라고 했다. 나중에 수사 과정을 고려하면 부적절하다는 게 이유다. 그 후 김형준과 직접 연락할 수 없었다. 박수종은 변호사 선임계를 작성하자고 했다. 자기는 법무법인 처음 소속이므로 고양지청에서 일을 보려면 처음 명의로 고양지청에 정식 선임계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5월 2일 법무법인 처음과 변호인 선임서를 작성했다. 이후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 발로 뛰는 김희란 변호사 블로그 사진 인용

 

서울서부지검에 한수찬이 고소한 사건은 고소인 한수찬이 먼저 조사를 받고 나서 6월 20일 내가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될 예정이었다. 그전에 고양지청으로 이송돼야 했다. 김형준에게 수차례 전화했으나 답이 없었다. 6월 17일 김형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 연락이 없어 실망이다. 어쩔 수 없이 문자 보낸다. 난 진짜 친구라 생각했는데 긴말하기 싫다. 박 변호사가 내게 해준 말들 일련의 과정을 보면 니가 날 도와줄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나도 알아봤고. 나는 지금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다. 이제 내가 할 것은 내 가족이 그나마 살 수 있는 돈을 최대한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해서 보내 준 천오백만 원은 아래 계좌로 오늘 6시까지 송금하거라. 내 집사람 신한은행 아무개. 누구든 보내기만 하거라. 이것으로 너와 나는 정리하자. 박 변호사는 니가 알아서 정리하거라. 너에게 피해가 없도록 처리할 테니 더 실망하게 하지 말거라.

 

그리고 박수종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 변호사님 저는 이제 삶에 대한 미련도 없습니다. 형준이에게 제가 보낸 돈 보내라 문자 보냅니다. 형준이랑 통화하세요. 그간 감사했습니다.

 

김형준은 연락이 없었다. 6시까지 입금된 것도 없었다. 속상했고 6월 20일 예정된 조사가 두렵기도 했다. 판단이 서지 않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취기가 오르자 김형준에게 문자메시지를 다시 보냈다.

 

- 형준아 너 연락도 없고 입금된 것도 없다. 내가 빌려준 돈도 못 받으니 병신이구나. 오케이. 알았다. 변제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내가 알아서 할게. 나쁜 새끼

 

그랬더니 김형준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외국 출장 중이며 첫 조사가 있는 20일 귀국해 돈도 보내준다고 했다. 1500만 원은 박수종에게 처리하라고 이야기할 테니 따라주기 바란다고 했다. 통화가 끝나자 박수종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첫 조사를 받는 20일 오전에 1500만 원을 받기로 했다. 변호사 선임료를 돌려받는 모양새를 취하기로 했다. 왜 그랬을까?

 

한수찬이 나를 서부지검에 횡령으로 고소하면서 거기에는 김형준이 1500만 원을 횡령했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었다. 검찰이 나를 조사하면 이 내용을 확인할 게 분명했다. 이를 박수종에게 선임료를 준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박수종과 통화가 끝나자 김형준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 지금 박변 전화왔어. 월요일에 내 계좌로 보낸다는데 알았고, 형준아 다 내가 떠 앉고 갈 테니 그리 알아라.

 

그렇게 법무법인 처음에서 영수증을 작성하고 돈을 돌려받았다. 김형준에게 이야기한 대로 일처리 다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첫 검찰 조사에서 담당검사(박정의)는 한수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이 부분을 물어봤다. 나는 소주와 맥주 마신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배신감도 밀려왔다. 담당검사는 박수종에게 사건을 고양지청으로 이송해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송 사유가 고양지청으로 가야 내가 더 엄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정의 검사는 박수종이 나를 험담하며 다닌다고 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른 변호사를 선임했음에도 다 알아서 한다는 말만 믿고 3개월을 그냥 날린 셈이었다.

 

결국, ‘셀프 고소’는 실패했다. 서울서부지검 주임검사가 사건 이송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흘 뒤 고양지청 사건이 서부지검으로 이송된다는 문자가 왔다.

 

▲ 발로 뛰는 김희란 변호사 블로그 사진 인용

 

나는 김형준을 의심하며 불쾌한 심정을 표했다. 검찰 조직을 향한 적대감도 커졌다. 2010년 억울하게 구속당한 적도 있어 더욱 그랬다. 담당 검사는 이런 말도 했다.

 

“친구끼리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이고 여자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인데 뭐가 문제냐?”

 

6월 27일 김형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김형준 비위 내용을 담은 ‘수사검사 재배당민원요청서’ 사진도 첨부했다.

 

- 형준아 나 어차피 죽는 거 너무 화가 나서 박정의 검사에게 수사 안 받으련다. 지난 3개월간 나를 가지고 논 거고.

 

30년 지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김형준은 전화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 안 해서 그렇지 오죽하면 고양지청 차장 만나고 수차례 그거 어떻게 해보려고 하고 지금 서부서 그거 뭐야 주임검사 위에 있는 부장검사 따로 만나 친분도 만들어놓고 이래 저래 작업을 하고 있는데 너도 잘 알지만, 28기 부장검사 뭐야. 그 위에 부장. 내가 부장검사들과 자연스럽게 안면 트려고 다른 서부 부장들 다 불러서 밥 먹었어. 왜 그랬겠어? 내가 지금 할 일 없어 그랬겠어? 내 돈 써가면서? 그리고 주임검사도 마찬가지고, 내가 왜 서부 부장검사들 다 불러서 여의도에서 메리어트 호텔 식당까지 불러서 밥을 사 먹이면서 부장검사 한 명 때문에 1부장부터 공안부장, 관련된 부장 다 불러서 밥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주임검사도 얼마나 머리를 썼겠어? 불러서 밥 먹이고 그래야 하니까. 울산에 있는 친한 검사도 불러서 3-4명 엮어서 밥 먹이고 그거 왜 그러겠어?”

 

이렇게 나를 설득하면서 김형준은 휴대폰을 없애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 먼저 휴대폰을 없애라고 한 쪽은 박수종이었다. 휴대폰에는 그동안 김형준에게 향응을 제공했던 내용 등이 담겨져 있었다. 이 무렵 김형준을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얄팍한 기대는 있었다. 내 휴대폰 중 어떤 것은 박살 냈고, 어떤 것은 초기화 해 동생이 쓰도록 했다.

 

하지만 최소한 사실을 밝힐 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부 자료는 캡쳐해 새로 구입한 휴대폰으로 옮겼다. 그래서 김형준과 관련된 2015~2016년 자료 일부가 지금 이렇게 남았다. 당시 나는 서부지검 조사 강도가 높아 긴급체포될 수 있다는 걱정에 휩싸였다. 사업에 투자한 것을 회수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박수종도 긴급체포를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했다.

 

 

▲ 발로 뛰는 김희란 변호사 블로그 사진 인용

7월 26일 서부지검에서 두 번째 조사받는 날 김형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 형준아 너도 지치지? 나도 지친다. 박수종 변호사와 통화했는데 오늘 긴급체포 안 하는 것 백 프로 확신 못하고 검사가 사건을 중하게 받아서 구속은 피하기 어려울 거라 이야기했다. 그럼 나는 어쩔 수 없다. 니가 나를 최소한도 지켜주지 못하니 나는 오늘 들어가지 않을 거다. 저번에 보낸 문건과 증거자료 등등 대검에 보내고 언론에 배포할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 아무 아쉬움도 없다. 나는 모든 걸 다 잃고 간다. 너 초임검사 시절부터 지난 3월까지 너 술 사준 것만 해도 수억이다. 나는 그랬는데 너는 나를 왜 최소한도로 지켜주지 못하니? 앞으로 2주만 내게 더 시간이 있으면 되는데. 니가 오늘 긴급체포 없을 거라고 확신이 있으면 9시까지 걱정 말라고 연락 주라.

 

김형준은 전화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2차 조사를 받기 위해 서부지검에 출석했다. 무사히 조사를 마쳤고 긴급체포도 없었다.

 

대신 2016년 8월 16일 서부지검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8월 19일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8월 30일 1차 구속 피의자신문기일이 잡혔다. 예감했던 대로 김형준은 담당 검사와 협의해 나를 구속하는 조치를 택했다.

 

제 식구 감싸기가 이런 것이구나 싶으면서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구속 피의자신문기일인 30일 아침, 기자를 만나 자료를 모두 넘기며 인터뷰했다. 기자는 9월 5일 조간 기사로 시작해 모두 6회에 걸쳐 보도하기로 약속했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8월 30일 예정이었던 피의자신문기일은 9월 1일로 연기됐다. 당일 아침 예정 시각에 나는 출석하지 않았다. 대신 박수종에게 소회를 적어 문자로 보냈다.

 

- 형준이가 자기에게 진심으로 사과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사과가 없어서 본인이 이렇게 한 것이다.

 

그러자 박수종은 김형준에게 문자 메시지로 사과문을 받아 내게 전했다. 김형준은 추가 보도가 나오지 않게 도와달라고 했다. 이튿날 나는 박수종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 낼 연락해서 모든 자료가 담겨져 있는 제 핸드폰 자체를 넘겨드릴게요. 그리고 저는 진술서를 써서 한겨레 등에 보내겠습니다. 제가 다 안고 가겠습니다. 다만 중간에 넘길 때 저도 살아야 하니 돈 더 준비하세요.

 

박수종은 당일 2000만 원을 내게 송금했다. 나는 기자에게 이처럼 거래하고자 했던 사실까지 알려줬다. 이 추악한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후폭풍이 불어닥쳤다.

 

김학성을 고소했던 한수찬도 “김형준이 검사로서 김학성으로부터 향응 등을 제공받은 것은 아주 나쁜 일이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뉴스파타 방송 화면 캡처

김학성 사건을 수사했던 서부지검 수사라인들도 대검 감찰 대상이 됐고 김형준은 9월 29일 뇌물수수와 증거인멸교사로 기소됐다.

 

재판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한수찬이 태도를 바꿔서 김형준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수찬 시선으로 이 사건을 다시 본다.

 

 

(다음 2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 한수찬 시선)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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