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2부) 목차

1화 300

2화 이런 수사관은 처음이지? 놀랬다면 미안해.

3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4화 다키스트아워(Darkest hour)

 

 

 

영화 다키스트아워 포스터(2017년작)

 

 

제4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

 

2019년 3월 안산에서 부동산 사기 사건이 터졌다.

 

공인중개사가 집주인에게는 월세라고 하고 세입자에게는 전세라고 한 뒤 전세금을 가로챈 사건이다. 피해자가 100명이 넘었다. 경기남부지방청은 부동산 중개업자를 구속했다.

 

김헌기 2부장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문제가 아니다. 유사한 범죄가 있을 거 아냐. 전세금을 유용한 놈이 한두 명이겠냐. 피해자는 젊은 직장인이나 학생들이고 다들 전세금을 엄마, 아빠가 해줬거나 은행 대출해서 마련한 것이잖아. 이건 확대 수사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겠느냐?”

 

“구청과 협조해서 부동산중개업자를 조사하겠습니다.”

 

김헌기는 이것을 도랑 막고 물을 퍼내 고기를 잡는 ‘막고 푸기’식 수사라고 했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그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해? 모든 부동산 중개업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경찰이 조사하겠다면 부동산 중개업에서 가만히 있겠냐? 들고일어나지. 대다수는 선량한 중개업자인데 몇 놈 일탈한 놈 잡겠다고 이 잡듯이 뒤져? 그 몇 개 찾으려고 그 많은 수사력을 동원해?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신고를 받는 거야. 신고를 들어오면 수사를 하면 돼 우리는 신고하라고 대대적으로 홍보만 하면 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대학가와 오피스텔에 ‘부동산 사기 집중신고기간 운영’이라고 홍보 펼침막을 걸었다.

 

신고를 유도하면 범죄 싹을 자르면서 예방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이런 감각은 어떻게 생길까?

 

김헌기는 영화 <다키스트 아워 Darkest hour>에서 처칠 부인이 남편을 위로한 대사를 인용했다.

 

“그 마음의 갈등이 지금 당신을 이렇게 단련시킨 거에요. 당신은 불완전하기에 강하고, 확신이 없기에 현명한 것이에요.”

 

영화 다키스트 아워 포스터(2017년작)

 

 

김헌기는 후배들에게 거듭 말했다. 어려운 과제를 받으면 고민과 갈등이 생기지만 그런 단련을 통해 감각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어쩌면 국민이 흘리는 피와 눈물에 땀과 노력으로 답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김헌기는 2015년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인천지방경찰청 제2부장으로 근무한다. 인천지역 수사와 112 상황실을 담당한다.

 

그해 김헌기 책상에는 상황보고서가 쌓였다. 상황실에서 전날 발생한 범죄 목록을 작성해 내부망에 전파한다. 김헌기가 출근하기 전 이미 부속실장이 이를 인쇄해서 갖다 놓는다.

 

2015년 10월 2일, 인천에서 남자가 전 여자친구를 살해 한 뒤 오피스텔에서 투신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살해된 여성은 이미 그전에 두 차례 112 신고를 했었다. 당일은 남녀가 심하게 다툰다는 이웃주민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고 이미 살해된 상태였다.

 

김헌기는 이 사건에서 경찰 대응에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데이트 폭력 대응 기획은 이처럼 상황보고서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상황보고서에서 매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범죄가 있었다. 바로 1997년 대만에서 시작해 2006년 한국으로 건너온 ‘보이스피싱’이다.

 

속여서 돈을 가로채는 방법은 시대와 환경에 맞춰 계속 교묘해졌다.

 

당시 보이스피싱을 예방 방법을 고민하던 김헌기는 은행이 경찰에 신고하는 방법을 착안했다. 피해자가 은행에 가서 거액으로 현금을 찾을 때 은행직원이 경찰에 신고를 해주는 방법이다.

 

인천지방경찰청 2부장 시절에는 인천지역에만 적용했다. 하지만 곧 생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피해자에게 은행 직원과 경찰이 한통속이라며 믿지 못하게 유도한 것이다. 김헌기는 다른 공략법을 찾아야 했다. 결론은 휴대전화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다른 사람과 연락하지 못하도록 휴대전화를 켜놓고 있게 유도한다. 다짜고짜 휴대전화를 뒤졌다가는 민원이 발생한다. 개인 역량이 아니라 조직 시스템으로 걸러야 한다. 김헌기는 간단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경찰이 먼저 시민에게 보이스피싱과 관련해 현금 인출하려는 게 아닌가 반드시 질문한다. 아니라고 대답해도 휴대전화가 통화 중이면 보이스피싱 피해자로 짐작할 수 있다.

 

이듬해 김헌기는 본청 수사기획관이 되면서 이 체계를 전국에 적용했다.

 

강신명 경찰청장(왼쪽), 진웅섭 금융감독원장 사진=금감원

 

지금이라도 경찰청에 보이스피싱 전담부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김헌기는 부정적이다. 보이스피싱 지휘부는 대부분 중국에 있다. 잡아봤자 보병들, 즉 인출책과 송금책이 계속 나타나니 끝이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김헌기 식 해법은 이렇다.

 

“코로나 19 관련해서 국무총리가 대책본부장이 되잖아요. 보이스피싱도 총리가 대책본부장이 돼 끌고 가야 해요. 중국 공안과 공조하는 것도 경찰 혼자보다 외교부가 함께 나서야 더 효과적이고. 금융과 통신 제도를 고쳐야 해요. 안전과 편의는 반비례 관계인데 우리는 편의 위주로 가지요. 금융제도나 통신제도가 편한 대로만 가니까 보이스피싱에게 당해요. 클릭 한 번에 1억씩 날라 가는 게 말이 되나요?”

 

김헌기는 정부가 보이스피싱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본다. 반격 작전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문재인 정부는 국정원 댓글 작업과 2012년 국정원 댓글 사건 경찰 중간발표를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래서인지 적폐 청산이 댓글 분야에 집중됐다. 그리고 당시 수사에 참여한 김헌기는 문재인 정부 들어 수사부서와 멀어진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전보다 시위집회에 관한 폭넓은 자유가 주어졌다. 정부 철학이 집회시위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면 경찰도 그에 코드를 맞추게 돼 있다.

 

2018년 9월 8일 인천에서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인천 퀴어축제가 열렸고 한편에서는 퀴어 반대축제가 열렸다.

 

2018.09.08.MBC뉴스데스크 방송 캡처

 

반대측에서 집회를 하지 못하도록 전날부터 무대 단상을 점거하자 결국 경찰이 불법행위로 인한 업무방해로 체포했다. 김헌기가 인천지방경찰청 제3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다.

 

경찰청에서는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런 의미처럼 보인다.

 

‘무대를 점거한 우리 꽃다운 청년들이 왜 피를 흘리게 해야 하느냐. 불법행위를 해도 집회시위 자유를 누려야 할 너무 소중한 우리 국민이다.’

 

아주 심각한 불법행위가 아니면 체포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채증해서 사후에 처리를 하라는 식이다. 물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고 체포를 하겠는가.

 

그 용의자가 모 단체 깃발 주변에서 뱅뱅 맴돌아준다는 보장도 없다. 현장에서 이런 지침은 ‘하지 말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김헌기는 조직 내 지원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민주노총 세가 커졌다. 그리고 기사들이 쏟아졌다.

 

-<건설경기 한파도 무섭지만 건설노조가 더 무섭다.>(2019.5.7.조선일보)

-<노조 등쌀에 치여 더 힘들다.>(2019.4.19. 동아일보)

-<날 풀리자 도진 건설노조 횡포, 크레인 또 날 세웠다.>(한국경제. 2020.3.18.)

 

건설노조 조직체계는 지역본부-지대-분회로 이어진다. 군대에서 대대-중대-소대와 같은 개념이다.

 

기사 내용은 비슷하다. “우리 노조원 써라”는 요구를 안 들어주면 출입구 앞에서 공사를 못하도록 집회를 하거나 노동청에 신고를 한다. 못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다면 건설 현장에 안전조치 소홀로 지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구를 안 들어주면 "모델하우스 오픈 첫날 그 앞에서 확성기를 틀고 시위하겠다."는 것이다. 귀가 찢어지는 확성기를 단 승합차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단결투쟁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런데도 업체들은 고소고발을 하지 못한다. 건설노조가 전국 조직이므로 집중 타깃을 삼을까 봐 겁내는 것이다.

 

“악질적인 무법 행위가 도를 넘었다”며 급기야 건설노조를 처벌해달라는 국민청원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민노총 측은 "정당한 노동운동이었다"는 주장이고 경찰도 이미 정상적으로 집회 신고를 했기에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2019년 김헌기가 경기남부지방경찰청 2부장 시절이다.

 

화물연대 소속 기사들이 농협물류센터에서 자신들과 계약하지 않자 화물연대 소속이 아닌 기사들 차량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2019.04.20. MBC뉴스투데이 방송 캡처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거나 돌멩이가 날아와 차량 앞 문에 금이 갈 지경이었다.

 

 

여러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자 당시 김헌기 2부장은 회의석상에서 단발성 불법행위보다 이걸 조종하는 지휘부를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휘부는 호응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치인과 여론은 독일과 협상을 원했다. 김헌기는 혼자 전쟁을 외치는 처칠 신세였다. 좌절감만 깊어졌다.

 


 

 

2020년 경무관 6년 차 마지막 해가 됐다. 김헌기는 다시 고향 같은 인천지방경찰청 1부장으로 돌아왔다.

 

여기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건설현장 인근에서 신고되는 집회 대부분이 민주노총에게 함락된 것처럼 느껴진다.

 

20년 전 그는 결코 불법행위에 굴복하지 않았다. 수사2계장 시절, 경제팀 직원들과 간담회 자리였다. 직원들 하소연이 쏟아졌다. 재건축 재개발 관련 조합, 컨설팅 업체, 비상대책위원회 등 사이 고소고발 사건 때문에 다른 일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김헌기는 경제팀은 일반 선량한 사람들의 고소사건에 집중해야 하며, 자기네 이권 때문에 경찰 수사력을 낭비하는 게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김헌기 수사2계장 지시가 떨어졌다.

 

“각 경찰서 재건축 재개발 사건 고소고발 사건 다 줘봐.”

 

인천지방경찰청 수사 2계로 고소고발 사건들이 모아졌다. 전체 사건을 놓고 보면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시공사에 문제가 있고 어떤 이권 때문에 문제를 삼는 것이 분석이 된다. 악취가 심하게 나는 부분은 수사 2계가 칼을 들이댔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촛불 탄핵 정국 이후 시대는 김헌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듯 보인다.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출근할 때마다 생각한다.

 

‘오늘은 어떤 나를 보여줘야 할까.’

 

김헌기는 상상한다. 인천지하철 1호선을 타고 시민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건이 터졌다. 2020년 4월 20일 인천 동구 한 신축 아파트 건설 현장 안전교육장 앞에서 한국노총 소속 노동자와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 현장 노동자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 충돌로 10여 명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2020년 4월 27일 경인일보는 <‘도 넘는’ 공사장 일감 다툼... 치안 강화 ‘두 팔 걷은’ 경찰>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경찰이 집회 과정에서 업무방해 등 불법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침이라는 내용이다.

 

기사를 보면 인천지방경찰청은 최근 일선 5개 경찰서 경비, 정보, 수사 과장들과 건설현장에서 잇따라 발생하는 폭력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 회의 장면을 상상해본다.

 

회의석상에서 ‘타협은 없다’고 질러대는 한 사람이 보인다. 일장 연설이 끝나자 일선 과장들은 속 시원한 표정을 짓는다. 마침내 회의석 정중앙에 앉아 있던 인천경찰청장이 흰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는다.  

 

 

 

 

- 2부 The End -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1부)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2부) 목차

1화 300

2화 이런 수사관은 처음이지? 놀랬다면 미안해.

3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4화 다키스트아워(Darkest hour)

 

 

제3화. 더 기버(The giver) : 기억전달자.

 

 

더 기버, 기억전달자 영화 포스터.2014년작

 

 

경찰에서 나름 실력 있다는 수사관들은 대부분 서로 만나기 마련이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2011년 말 경찰청 내에 범죄정보과와 지능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김헌기 지능범죄수사과장이 지능범죄수사대를 지휘했다. 지능범죄수사대는 고위공무원 비리, 경제사범과 같은 대형사건을 인지해 수사한다.

 

당시 뽀로로(2화)를 포함한 전국에서 실력 있는 수사관들이 다 모여들었다. 이들은 지능범죄에서 가장 높은 단계 수사를 맡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뇌물 사건이다.

 

SBS 방송 캡처.2019.11.23

 

“공무원 뇌물사건 검거에 얼마나 큰 노력과 투지가 들어가는지 일반인은 잘 모르지요. 뇌물인데 돈 주고받은 증거가 어디 있어요? 공무원에게?”

 

 


 

김헌기가 수사2계장이던 시절은 공무원 뇌물 사건이나 기업 횡령, 주가 조작 같은 사건은 검찰 전유물이었다. 당시 자금추적 영장 신청서를 제대로 작성하거나 영장을 받아 집행할 수 있는 경찰은 드물었다. 자금 추적은 지능수사에서 기본이지만 생소한 금융용어와 자료 압수 개념이 어렵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수사관 중에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저는 은행 직원에게 물어봤어요. 이런 내용을 압수하고자 하는데 영장에 어떤 내용을 기재해야 하느냐? 그리고 가끔 검찰 기록이 우연히 하달될 때가 있어요. 그런 게 내려오면 보면 메모하고, 그런 게 쌓인 거지요.”

 

수사관 경험과 지식을 보편화하려면 자금추적 실무 매뉴얼이 필요했다. 이를 만들려는 수사관도 있었다.

 

“제가 테스크포스팀 꾸려서 자금추적 실무 매뉴얼을 만들 테니 윗분들에게 인원 조금만 해달라고 해도 관심 있는 분이 없었어요. 그런 게 아쉬워요.”

 

이 수사관은 2012년 김헌기 지능수사과장을 만나고 자금추적 매뉴얼을 만들게 됐다.

 

 

물론 김헌기에게 이 일을 맡기며 예산을 주는 이는 없었다. 어떤 이는 고위간부가 치적을 내세우기 가장 좋은 방법이 매뉴얼 편찬이라고 했다. 김헌기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수사관이 모든 분야에 능통할 수 없다. 판사도 전문 분야에 감정인 제도를 둔다. 검찰은 회계 추적, 자금추적 시, 증권사나 세무사 직원과 함께 수사한다.

 

경찰은 회계사 세무서에 주고 조언을 받아서 수사를 진행했다. 이 경우 자문비용이 부담이고 수사기밀유지 보장도 어려웠다. 경찰 회계·자금추적은 한계에 부딪혔다.

 

조현오 청장은 지능범죄수사대를 만들어 그 중 한 개 팀을 자금추적수사팀으로 운영했지만 실패했다.

 

“수사관 처지에서는 자금추적이 남 뒤치다꺼리나 하는 거잖아. 자기도 모양새 나는 수사를 하고 싶지. 생색이 안 나고 의욕도 없고 남에게 자료 제공하는 것은 빛이 안 나잖아.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현실에서 적용이 안 되면 실패거든.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지. 그래서 결론은 매뉴얼이라도 만들자.”

 

김헌기는 자금추적 매뉴얼 편찬 팀에게 당부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지 마라. 시작이 반이다. 첫 작품을 만드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증보판을 내는데 훨씬 쉽다 ”

 

이 일에 관여한 수사관은 다음 증보판에는 주가조작, 외국계좌 이용한 자금세탁, 몰수보전 등을 넣고자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관심을 보이는 지휘관을 만나지 못했다.

 


 

2014년 강력범죄수사과장이던 김헌기는 전국 주요 사건을 살펴봤다. 검거 해결에 가장 주요한 방법은 CCTV 수사였다. 하지만 CCTV를 활용한 수사 역량은 지역마다, 개인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이 역량을 일정 수준으로 보편화해야 했다.

 

YTN방송캡처

 

김헌기는 전국 CCTV 고수를 불러 모아 매뉴얼 작성을 진행했다. 이들은 범인이 특정되지 않은 형사 사건을 비롯해 고난도 사건을 해결하며 역량을 축적했다. 나중에 강호순이 범인으로 밝혀진 2007년 1월 7일 경기서남부 부녀자 실종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매뉴얼에 대한 현장 평가는 어떨까? 일선경찰서 한 형사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매뉴얼 잘 만들었지. 그런데 직원들이 잘 안 보는 게 문제야.”

 

형사과장은 본청 노력을 충분히 알았다. 각 직원에게 매뉴얼도 전달했다. 문제는 활용도가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형사과장 결론은 이렇다.

 

“현장에서 매뉴얼을 활용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형사과장이 매일 업무 중에 맞닥트린 현실은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컴퓨터 내부망으로 결재가 이뤄진다.

 

직원들 서류를 중간 팀장들이 한 번 결재하고 형사과장에게 올라간다. 서류를 보면 갑갑함이 밀려왔다. 범죄사실 작성만 봐도 수사관 내공이 보인다. 피의자는 3명인데 범죄사실에는 2명밖에 안 보이는 일도 있다. 그러면 해당 수사관을 불러 묻는다.

 

“한 명은 어디 갔니?”

 

결재 중간 단계에서 거름망 역할을 해야 할 팀장 역량이 약하다는 것을 느꼈다. 퇴직과 가까워질수록 블록체인이나 최신 신용카드 판례, 최신 사이버 사건에 관한 관심은 현격히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사 현장에서 고민이 시작됐다. 뒤늦은 공부를 할 때 이런 매뉴얼이 큰 도움이 됐다. 물론 수사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갖추려는 일선 과장들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2013년 인천지역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수사과장 기억이다.

 

23명이 있어야 할 경제팀 인원이 17명뿐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경력이 1년 정도여서 현장에서 역량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내부망으로 수사서류를 결재할 때마다 현실이 갑갑했다. 그래서 이 수사과장은 일주일에 한 번 팀원을 모아 두 시간 정도 강의했다. 따로 책이 없었고 부딪히는 범죄 유형별로 설명했다.

 

“민원인이 고소장을 들고 왔다 할 때 맨 먼저 어떤 것부터 체크해야 하나?”

 

 

그는 칠판에 ‘1) 죄명, 2) 피해 날짜, 3) 공소시효 계산’이라고 쓰고 설명했다.

 

“일단 제일 먼저 죄명부터 본다. 피해자는 사기를 당했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횡령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파악해라. 두 번째 피해 입은 날짜다. 그걸 모르고 고소장 쓰는 사람이 많다. 마지막으로 공소시효를 계산해야 한다. 가령 모욕죄는 공소시효가 5년이다. 하지만 고소 시간은 6개월 이내다. 이게 지나서 오는 사람도 많다.”

 

수사과장은 이 형식적인 조건 세 가지를 모두 통과해야 조사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 총론이고 전산으로 결제하면서 서류를 보고 작성자를 다시 불러서 강의했다. 직원이 이해하지 못해 한 시간 넘게 걸린 사건도 있다.

 

수사과장은 어느날 밤늦게 울고 있는 직원을 봤다. 가정에서도 늦게 들어온다고 이해를 못한다고 했다.

 

경제팀은 밀려오는 사건은 많고, 왜 사건을 빨리 처리하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상부에, 밖에서는 민원인에게 시달린다. 지능수사는 수사관이 성과를 내면 특진도 하고 보상도 따랐다. 이 같은 환경 차이는 경제팀 이탈로 나타났다.

 

경제팀 인원 조정과 배치 등 행정 업무는 경찰청 수사국이 맡는다. 하지만 2012년 김헌기가 경찰청 지능수사과장일 때는 다들 자기 업무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당시 김헌기는 이러다가 망한다며 문제를 제기했지만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경찰서 일선 수사과장은 할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아질 기미가 없던 2015년 어느날 전화가 왔다. 김헌기 인천지방경찰청 2부장이었다. 김헌기는 경무관으로 승진하고 2015년 인천지방경찰청으로 왔다.

 

 

 

 

“거기 경찰서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내가 이것을 개선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2015년 김헌기가 인천2부장으로 오자 자신이 부임한 인천에서라도 조직 체질 개선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김헌기는 인천지방경찰청장 결재를 받아 속도감 있게 밀고 나갔다. 당직을 없애고 평가제도를 바꿨다.

 

 

김헌기는 2015년 12월 경찰청 수사기획관이 된다. 경찰청 지능수사대와 범죄정보과 등을 지휘하면서 수사국이 맡은 중요 사건에 수사 업무를 챙기는 자리였다. 김헌기는 수사기획관이 되자 강신명 경찰청장 승인을 받아 전국 경제팀 활성화를 더 요란하게 밀고 나갔다.

 

무전취식 사건은 경제팀이 아닌 형사팀에서 처리하도록 했다. 경제팀은 원래 양반처럼 조사하고 형사들은 강절도 등 험한 수사를 많이 해서 무전취식범을 잘 다룬다는 시각도 있다. 한 형사과장은 힘든 사건은 모조리 형사에게 넘긴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경찰 내부망에도 형사는 왜 챙겨주지 않느냐는 글이 올라왔다.

 

공공의적 영화 포스터

 

‘행정 달인’ 김헌기는 개혁에 앞서 반대 세력을 고려한 대안을 생각한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욕하지 못하도록 구상한 것은 뭘까? 형사들은 욕하기에 앞서 ‘김헌기 잘한 점’이라고 반문하더니 바로 답했다.

 

“나는 데이트 폭력!”

 

 

(계속해서 마지막 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1부)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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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2부) 목차

1화 300

2화 이런 수사관은 처음이지? 놀랬다면 미안해.

3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4화 다키스트아워(Darkest hour)

 

 

 

 

제2화. 이런 수사관은 처음이지? 놀랬다면 미안해.

 

 

자이언트펭TV 방송 캡처.

 

 

 

 

K 경감에게 경찰 후배들이 찾아왔다.

 

"큰 사건 많이 했다는데 그리고 잘 썼다고 하는데 이런 걸 잘하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나요?"

 

"나는 문장력이 없다. 수사기록을 작성할 때 상대방이 알아먹기 쉽게 쓰려고만 했다. 문장이 후지더라도 글을 보는 사람이 헷갈리지 않게 빨리 이해하는 방향이었다. 예를 들어 '내일 같이 갈 사람이 있어요.'라고 쓰면 내가 '내일 누군가를 데리고 오겠다'는 말도 되지만 상대에게 '한 명 데리고 올 수 있냐'는 의미도 있다. 나는 절대로 이런 말은 안 쓴다. 수사기록 양이 많아지면 내용 정립이 안 된다. 상대방이 쉽게 이해하고 기억하게 하는 것이 내 목표다."

 

말이 쉽다. K 경감(이하 펭수)이 경찰 입문 후 수사 내공을 연마하는 과정을 더 살펴봐야겠다.

 


 

 (이하 지명과 인명은 모두 가명처리)

 


 

펭수는 90년대 후반 순경으로 입문했다. 첫 수사 근무는 2000년 빙하경찰서 조사계다. 오늘날 경제팀으로 여기에는 피해를 호소하며 회복을 요구하는 고소·고발·진정·탄원 등 4가지 형태 소가 들어온다. 사람을 불러 조서를 작성하는데 교육이 따로 없다. 시민이 실전 연습 상대고 헌법 판례를 많이 찾아보는 방법뿐이었다.

 


 

펭수는 2005~2014년 서울 참치경찰서 지능팀에 근무했다. 이곳은 EBS사장을 뽑는 방통위원장을 내정하는 청와대가 있는 관할 경찰서다. 펭수는 선배 중에 기가 막히게 조서를 쓰는 뽀로로를 만난다.

 

막내인 펭수는 뽀로로가 쓴 서류를 자주 살펴봤다.

 

자이언트펭TV방송 캡처

 

그를 닮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실력에 닿지 않았다. 결국 따라가기를 포기하자 펭수 스타일이 나오기 시작했다.

 

펭수가 반한 뽀로로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뽀로로는 뽀롱 경찰서 경제팀에서 조사를 배웠다. 신입 교육은 조장이 맡는다. 조장은 처음에는 간단한 고발장을 맡겼다. 도로법, 과적행위, 향토예비군설치법 등을 위반한 내용이다.

 

다음에는 고소장을 맡기며 물었다. 적용해야 할 죄, 핵심적인 증거, 증거 수집 방법, 조사 대상 선정 등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내용을 바탕으로 '범죄사실'을 작성하라고 요구한다. '범죄사실'은 법 위반 내용을 6하 원칙에 맞게 쓴 것으로 검찰이 쓰는 공소장에 해당한다.

 

민원인이 낸 고소장을 보면 자기가 당한 게 사기인지 횡령인지 배임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처벌을 요구한다.

 

뽀로로는 법 적용 능력을 갖추고자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출퇴근 시간마다 형법, 형사소송법, 행정법 등을 읽었다.

 

암기 과정에서 뽀로로 나름대로 분류법이 있다. '바퀴 달린 것' 기본법은 자동차관리법과 도로법이다. 거기서 파생된 법이 도로교통법, 도로교통 특례법이다. 여성이 등장하는 사건은 대개 형법에 해당한다.

 

물론 법을 암기해 법을 적용할 줄 안다고 끝이 아니다. 이를테면 사기사건은 한층 복잡하다.

 

"사장님, 돈을 빌려가서 왜 안 갚았어요?"

"회사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갚았어요. 사기 칠 의도가 아니었어요."

 

회사 형편은 회계장부에 나타난다. 회사 재무제표에서 재무상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회계장부에는 재무제표를 구성하는 세부 항목이 있다. 뽀로로는 이런 세부 항목을 포털을 검색하며 공부하면서 전산회계 2급 자격증까지 땄다.

 


 

회사 장부를 읽어내면서 뽀로로는 회사가 저지르는 횡령 범죄를 잡아낼 수 있었다. 횡령은 경제사범 수사에서 핵심인 자본시장법 위반으로 가는 길목이다.

 

뽀로로가 설명하는 흐름은 이렇다.

 

"200억 회사 돈 먹었어. ➀ 횡령했으면 소득이 생겼겠지. 그럼 세금을 안 낼 거 아냐. 그럼 ➁ 조세범 처벌 위반이지. 회사에서 돈을 빼먹으면서 장부를 분식했을 거 아네요. 그럼 ➂ 분식회계지. 그다음에 숨기기 위해서 장부를 가짜로 썼을 거 아네요. ➃ 공인회계사법 위반이지. 그리고 회사 장부를 검사하는 회계사들이 있어요. 그 회계사를 속였잖아요. ➄ 외부감사에 관한법 위반이지. 회사는 감사보고서를 공시를 해요. 공시를 하면 허위공시가 되지. 일반인이 그 공시된 내용을 보고 주식을 사잖아요. ➅ 자본시장법 위반이지."

 

뽀로로는 이 과정을 모두 범죄 사실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지능범죄 수사요원이라고 강조했다.

 

뽀로로는 서울참치경찰서 지능팀에서 신입 펭수를 만났고 가르침을 줬다. 하지만 아무리 따라 하려 해도 펭수는 뽀로로가 될 수 없었다.

 

펭수와 뽀로로는 성향이 달랐다. 뽀로로는 꼼꼼하고 매사 조심스럽지만 펭수는 성실하면서 낙천가다.

 

 

술 한 잔 하면 유치환 시인이 쓴 <깃발>을 읊을 줄 아는 낭만가다.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하지만, 그가 8년 동안 있었던 서울참치경찰서 지능팀은 치열한 곳이었다. 집회시위사범은 지능팀 업무다. 이 경찰서는 집회시위사범을 다른 경찰서보다 많이 다룬다.

 

집회 시위 조사를 하다 보면 큰 골격 안에 다양한 변주가 발생한다. 펭수는 집회에서 이상행동을 하는 이들을 많이 봤다. 특히 깃발은 대중을 흥분시킨다.

 

영화 라스트캐슬 포스터(2001년)

 

 

한 암컷 물범은 자신이 신었던 날카로운 하이힐 굽으로 경찰관을 때렸다. 어떤 수컷 북극곰은 한 손에는 콜라를 든 채 자가용을 타고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 돌진했다.

 

출처 : 자이언트펭TV방송 캡처

 

펭수는 집회시위 조사는 일반 다른 강력사건과 성격이 다르다고 했다. 살인사건은 사건 발생 날 정점을 이루고 범인을 잡은 후에는 급격하게 떨어진다. 하지만 집회시위 범죄는 살인사건과 반대다. 초기에 미미하게 시작되나 끝날 때 정점을 이룬다.

 


 

펭수는 그 후 남극경찰서 지능팀에서 근무했다. 펭수는 공룡친구 단체가 주도한 집회시위 대형 불법 사건들을 맡았는데, 사실 처음부터 펭수 담당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둘리 위원장이 저지른 아주 미미한 현행법 위반 건이 남극경찰서에 이첩되기 시작한다.

 

유투브. 선넘는둘리(무빌락) 영상 캡처

 

집회 관련 법규를 살펴보자. 도로교통법, 집회시위에 관한법률. 형법에 일반교통방해죄. 폭행, 상해, 공무집행방해가 있다. 공무집행방해를 하면서 다치게 하면 공무집행방해치상, 여럿이 하면 특수가 붙어서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이 된다.

 

 

펭수는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국밥 먹을 때 맛있다, 맛없다로 평가 하지 여기에 들어간 소금 괜찮은데, 설탕 괜찮은데 하지는 않잖아요. 판결을 할 때는 제일 주가 되는 것을 보니까 죄명을 다 붙여도 큰 의미는 없어요."

 

출처 : 자이언트 펭TV 방송 캡처

 

후배들은 골치 아픈 사건 배당 처리를 펭수에게 부탁했다. 이 후배에게 하나 받고 다른 후배에게 하나 받으면서 사건은 쌓였고, 쌓이면서 커졌다. 펭수는 검찰에  둘리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피의자 처지에서 둘리가 영장 내용을 읽으면 이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읽기 전) 내가 뭐 때문에 구속되고 지랄이야? (읽은 후)아! 씨발, 다 내가 한 이야기네'.

 

가령 이런 거다. 백남기 씨는 2015년 11월 14일부터 2016년 9월 24일까지 중태 상태였다.

 

백 씨가 중태 상태일 때 둘리가 시위대들에게 투쟁을 촉구하며 물대포를 맞은 백남기 농민이 죽었다고 외친 말까지 찾아낸 것이다.

 

실제로 공룡친구 단체 측에서는 둘리 선고형량에 대해서 문제는 삼았지만 영장 청구 내용이나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 표현에 대해서 문제 삼은 것을 들은 기억은 없다.

 

펭수 수사는 성실함이 기반이다. 둘리와 관련된 관련자들 회의록 내용, 언론 인터뷰, 조직 기관지 내용을 모두 찾아냈다. 이런 자료는 오래전부터 집회를 구상하고 계획한 근거가 됐다.

 


 

펭수는 집회에서 폭력집회로 변질시키는 사람들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명으로 치면 약하지만 죄질이 좋지 않다고 했다. 물건 하나 살 때도 품질을 보듯 법도 마찬가지다.

 

출처:자이언트 펭TV 방송 캡처

 

구속 여부는 죄명이 아니라 죄질로 결정된다. 한 가지 예를 보자.

 

"공룡친구 단체원 도우너가 마스크를 쓰고 경찰버스에다가 줄을 묶어놓고 빠져요.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어놓으면 잡아당기라고 권유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다 잡아당겨요. 그러면 결국 엉뚱한 사람들이 벌금을 내는 거예요. 10명이면 3000만 원이예요! 그럼 처음에 경찰버스에 줄 묶어놓고 빠진 사람들을 잡아야지요."

 

그 수많은 인파가 북적이는 집회 현장에서 어떻게 그들을 찾아냈을까. 펭수는 집회 채증사진과 동영상이 담긴 CD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공룡친구 단체 경기도지부'라고 적힌 깃발 부근에서 도우너가 맴돌았다.

 

 

출처. 민중의소리

 

펭수는 중얼거렸다.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그 깃발 앞쪽에 주로 서 있다면 직책을 맡을 가능성이 컸다. 다음에는 그 지역 신문을 검색해 직책이 소개된 도우너 사진을 찾아냈다.

 

나는 펭수에게 당시 김헌기 수사기획관뿐만 아니라 경찰청 계장들 사이에서도 펭수 실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평을 전해줬다. 펭수는 수사에서 무엇보다 공정성을 가장 중시한다고 했다. 그에게 공정성 하면 떠오르는 이가 누구인지 물었다.

 

펭수는 강부영 판사(사법연수원 32기)를 언급했다.

 

SBS방송캡처.2017.6.19.

 

강부영 판사는 2017년 서울중앙지법 영장담당 판사로 검찰이 최서연(최순실)과 공모관계로 신청한 정유라 구속영장 청구를 두 차례 기각했다.

 

"내가 최서연(최순실) 이해해주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는데, 엄마가 대통령에게 말만 하면 다 되는 사람인데 고등학생 딸과 공모를 했겠어요? 고등학생 정도면 부모와 공모할 이유가 없어요. 그냥 딸을 데리고만 다닌 거예요. '너 여기 앉아 있어라. 그리고 좀 있다가 끝나고 나와라'. 부모들이 다 그런다고요. 공모하려면 자식이 서른 살 정도는 돼야지. 그런데 검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몇 차례 기각하는데 저 판사 대단하다, 저 판사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지요."

 

(다음 제3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1부)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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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2부) 목차

1화 300

2화 이런 수사관은 처음이지? 놀랬다면 미안해.

3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4화 다키스트아워(Darkest hour)

 

 

 

제1화. 300 (hunki hot scene.19금)

 

 

영화 300 포스터(2007년작)

 

 


 

한 경찰관이 공소시효가 지난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는 1990년대 초 순경으로 들어와 지구대 근무를 했다. 그곳에서 무전취식 상습범을 만난다. 업주들 피해액이 300만 원에 달했다. 신고를 받고 나가면 업주 대다수가 돈 받는 것은 포기한 채 제발 데려만 가달라고 사정했다.

 

출동한 경찰은 무전취식범에게 술 깨면 돈을 갚으라며 훈계하고 내보내는데, 그날 밤 같은 사람이 다른 식당에서 또 무전취식을 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그렇게 춥지 않을 시기였다.

 

새벽 한 시쯤 함께 출동한 선임은 뭔가 뾰족한 수가 있는 듯했다. 그는 무전취식범을 순찰차에 태워 수 킬로미터 떨어진 불빛도 없는 공터로 갔다. 그에게 순찰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그 이후는 영화 <킬빌> 한 장면 같았다. 그는 무덤에서 기어 나와 흙먼지 날리며 돌아온 우마 서먼처럼 밤새 걸어 지구대를 찾아왔다. 무전취식범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경찰관이 나를 아무도 없는 데 놔두고 갔다!”

 

이 순경은 지구대를 마치고 경제팀으로 들어갔다.

 

경제팀 당직 단골은 무전취식범이었다.

 

 

무전취식 중 지구대 훈방에서 끝나지 않고 조사가 필요한 때도 있다. 죄명이 ‘사기’이므로 경찰서 경제팀 당직 직원이 수사해야 한다.

 

야간에 무전취식이 한 명 들어오면 대부분 취한 상태라 술이 깰 때까지 사무실에 앉힌다. 시비를 걸거나 바지를 벗으려고 하는 것 같은 난동으로 사무실은 엉망이 됐다.

 

이 순경은 경제팀 근무가 끝나자 바로 지능수사로 넘어갔다.

 


 

그 후 실력을 인정받아 인천지방경찰청 수사2계로 들어왔다. 당시 수사2계장은 김헌기였다.

 

 

 

수사2계 직원들은 첩보수집 능력도 남달랐다.

 

그 때문에 수사2계 직원들은 김헌기 계장에게 동료 M을 내보내 달라고 하소연했다. M은 특이하게 직원들 행동을 살피고 일정을 본인 수첩에 일일이 적는 버릇이 있었다. 직원들은 불편해서 같이 근무를 못하겠다며 아우성이었다.

 

좋은 상사가 되고 싶었던 김헌기는 직원M을 불러 면담을 했다.

 

“나에게 약속을 해. 앞으로 선배들과 잘 화합하면서 수사를 잘할 것 같으면 그냥 있게 할 것이고.”

 

직원 M은 약속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얼마 안가 김헌기 계장은 지역 언론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가 됐다. 직원 M이 제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김헌기는 이때부터 개혁에 대한 주관이 생긴다.

 

김헌기 개혁론 300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개혁에는 항상 저항세력이 생긴다. 개혁의 성패는 저항세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검토가 끝난 다음에 개혁해야지. 그걸 준비하지 않으면 개혁 실패뿐만 아니라 본인도 골로 간다.>

 

이러한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김헌기는 2008년 3월 서천경찰서장 시절, 성공적인 개혁을 이끌어냈다.

 


 

2007년 12월 태안 기름유출사고는 그 피해가 서천을 거쳐 전라남도 신안까지 미쳤다. 정부는 당시 어업을 하는 주민에게 보상했다. 김헌기는 서천서장으로 부임하면서 사건 보고를 받았다.

 

다른 지역에 사는 노인을 그 동네에 사는 것처럼 꾸며 보상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허위 보상을 주도한 이는 마을 이장이었다. 이미 전임 서장 시절 진정서가 들어왔지만, 수사 진척이 없었다.

 

경찰서에서 노인들은 불러도 잘 못 듣는 척했다. 큰 소리로 할아버지를 부르면 강압수사를 했다고 민원을 넣었다. 그 배후 역시 이장이었다. 김헌기는 기록을 검토하고 나서 결심했다.

 

“서천 그 이장은 용납 못 하지. 불쌍한 노인들을 부추겨서 민원 일으키고 수사관 곤란하게 만들고. 법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다.”

 

서천경찰서 홈페이지 <오시는 길>캡쳐

 

수사가 더딘 이유는 좁은 지역이다 보니 대부분 연결돼 있기 때문이었다. 조사받은 노인과 경찰서 직원이 친인척이기도 했다. 그 지역 출신 수사진은 대대적으로 물갈이했다. 서천 출신이 아닌 수사관에게 사건을 맡겼다. 그리고 김헌기 서장과 둘이서 수사를 진행했다.

 

본격적으로 수사하자 서천경찰서 정문 앞에서 할아버지들 수십 명이 집회를 시작했다. 집회주최측은 ‘300명 추산’으로 집계했다. 결국, 이장은 구속됐다. 그 후에 서천은 아주 조용해졌다고 한다.

 

김헌기는 당시 개혁 대상이 된 계장과 수사관들이 큰 불만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비결은 무엇일까? 김헌기는 자신은 행정을 공부했다고 강조했다.

 

“반드시 반대세력이 나온다. 반대세력에 대한 대안과 처리, 보완 없이 행정개혁 못 한다. 이걸 제대로 못 하면 본인이 골로 간다.”

 

조직 변화 방식에 대한 주관이 뚜렷했던 김헌기는 개혁 대상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나는 본인 희망 보직을 쓰라고 했어요. 가고 싶은 데 90%는 가게 해줬지. 그러니 말이 없어.”

 

당시 직원들에게 분위기를 물었다. 뒤에서 서장 욕을 많이 했다고 한다.

 


 

행정에 자신 있던 김헌기는 2015년 12월 경찰청 수사기획관이 된다.

 

김헌기는 오랫동안 수사를 하면서 검사실 모델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사는 집단지성이다. 여러 사람이 협의해서 가장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게 수사며 지금 경찰처럼 혼자 수사하면 수사력과 전문성 두 가지 다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헌기는 소팀제 운영방식을 도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현장 직원들 반대가 거셌다.

 

팀장을 늘리면 수사는 안 하고 결재하는 팀장이 늘어나 결국 수사관에게 배당되는 사건만 늘어난다고 우려했다. 현실적으로 그만큼 지휘할 만한 역량을 가진 팀장이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누구보다 김헌기가 잘 알았다. 김헌기는 계장, 과장 시절부터 큰 사건을 맡으면 피의자 신문조서를 모조리 검토했다. 300건은 족히 넘을 것이다.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2014년 경찰청 강력범죄 수사과장(현재 형사과장) 시절, 안산 아내 암매장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남편이 아내를 살인하고 암매장 한 사건이다.

 

당시 뉴스에서는 남편이 가정폭력으로 불구속 수사를 받는 중에 아내를 살해한 것으로 보도했다.

 

SBS보도캡쳐(2014.11.19)

 

김헌기는 경찰이 어떻게 조사했는지 궁금했다. 김헌기는 기록부터 확인했다. 경찰청 내부망에서 수사 기록이나 피해자,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아볼 수 있었다. 피해자 신문조서를 보자 의문이 바로 해결됐다.

 

-어디 맞았나요?

-◯월 ◯일 ◯◯에서 핸드폰으로 한 대 맞았습니다. 끝.

 

가정폭력은 대체로 반복적이고 상습적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피해자에게 과거 피해 경험과 남편 성향 등을 확인해야 한다. 입체적, 종합적으로 수사했다면 피의자는 분명히 구속감이었다. 그랬다면 피해자 신변도 보호됐을 것이다.

 

김헌기는 2016년 경찰청 수사기획관 시절 전국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특히 피의자 신문조서는 빠짐없이 검토했다. 한 수사관은 김헌기 손을 거치면 기존 수사기록은 '쑥식이 판'이 된다고 했다. 난장판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2016년 1월 부천 초등생 토막 유기사건이 벌어졌다. 목사 부부가 입양한 아이를 살해하고 토막 내서 냉장고에 수년간 보관한 사건이다. 김헌기는 지방청 형사과장에게 전화로 지시했다.

 

“가장 우수한 조사원을 투입해라.”

 

범인을 잡는 형사들은 보통 실력이 출중하다. 하지만 당사자 조사는 또 다른 재능이 필요하다. 아동학대에서 쟁점은 ‘폭행치사’로 보느냐 고의성 있는 ‘살인’으로 보느냐이다.

 

즉, 학대 과정에서 이런다고 죽기까지 하겠느냐고 생각했다면 폭행치사가 된다.

 

이렇게 때리면 아이가 죽을 수도 있지만 너무 속을 썩이니 죽어도 할 수 없다는 마음이 있었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해당한다.

 

가해자는 대부분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살인 의혹이 짙다면 경찰도 그쪽에 맞춰 수사하게 된다.

 

수사기록에서 미필적 고의에 대한 정황과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평소 피해자 이야기, 컴퓨터 검색, 주고받은 문자 등 정황을 보고 그 사람 의사를 경찰이 밝혀내는 것이다.

 

김헌기는 수사기록을 보고 미필적 고의에 의한 구속요건을 충족했는지 살피면서 미심쩍은 부분을 지적했다.

 

노컷V방송캡쳐(2016.1.21)

 

이렇게 수사를 모두 끝내면 수사결과에 대한 수사관 판단과 의견이 나올 것이다. 수사에 대한 종합작품으로 이게 바로 수사결과보고서다. 사실관계를 설명하며 법률적 판단이라는 핵심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작성된다.

 

수사가 미진하거나 법률적 지식이 부족하면 수사결과보고서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김헌기는 한 시국사건 수사결과보고서를 검토하게 됐다. 작성자는 ◯◯경찰서 지능수사과 K경감이었다.

 

시국사건은 공안사건처럼 수사보고서나 수사서류를 작성하는 게 일반 사건과 다르다. 적용 법률도 특별법이고 필체나 용어 사용이 녹록지 않다.

 

김헌기 수사기획관은 당시 K경감 실력을 '손댈 곳이 없다'고 평가했다. 김헌기가 경험한 수사관 300명 중 최고였다.

 

(계속해서 제2화. 이런 수사관은 처음이지? 놀랬다면 미안해)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1부) 목차.

제1화 만국의 운전자여 단결하라.

제2화 분노는 나의 것

제3화 미스터 계장들

제4화 윤재옥 의원이 키아누리브스였어!

제5화 송무빈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6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제7화 김헌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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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케어해줘. 연재 순서.

⦁제1화. 보험성뇌물의결말 (폭로자 김학성 시선)

⦁제2화. 제말이그말입니다 (김학성 동업자 한수찬 시선)

⦁제3화. 앞뒤좌우완벽하게 (김학성 구치소 동료 오강수 시선)

⦁제4화. 부친사망일의진실 (김학성 전 사업 파트너. 이문재 시선)

⦁제5화. 난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변호사 시선)

⦁제6화. 대검케어가최고야. (작가 시선)

 

 

 

 

 

 

 

나를 케어해줘 마지막 화, 대검 케어가 최고야(작가 시선)

 

 

2016년 9월 초 김학성이 오랫동안 김형준 검사 스폰서 노릇을 했다는 뉴스가 도배됐다. 나도 보도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꽤 많은 수감자를 접하고 취재했다. 그중 김형준을 특별하게 기억한다.

 

김학성이 스폰서 노릇을 했다는 폭로로 김형준은 2016년 10월 구속됐다.

 

나는 김형준에게 편지를 보냈다. 대부분 고위직 출신 수감자들은 편지를 받았다고 바로 답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편지를 보낸 이가 지인도 아니다. 그런데 김형준은 바로 답장했다. 뭘 믿고 내용도 절절한 편지를 보냈는지 오히려 의아했다.

 

 

 

그러나 재판을 보면서 이해 되기 시작했다.


 

검찰은 당시 김학성과 김형준 사이 메신저와 통신 기록을 모두 확보했다. 통화 기록만 봐도 하루 동선은 파악된다. 주고받은 메시지와 통화 내용을 비교하면 특정 날짜에 서로 만났는지 정도는 확인된다.

 

변호인은 이를 근거로 현금수수는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김학성은 자신과 오강수를 김형준이 부장검사실로 불러 편의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이 부분도 검토했다. 김학성은 김형준 외에도 다른 검사들에게 더 자주 불려 다녔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학성이 범죄 정보를 제공하면서 재벌과 정치인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시했기 때문이다.

 

김형준도 김학성이 제공한 범죄 정보가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김학성이 출소하고 나서도 김형준은 범죄 정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자 계속 문자를 보냈다.

 


 

변호인은 증거인멸 부분도 따졌다. 당시 채권자들은 김학성 휴대전화 번호를 알았다. 김학성도 채권자에게 협박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김학성은 이 휴대전화를 해지하고 초기화해 동생에게 건넸다.

 

동생이 보면 곤란한 사진과 문자 때문에 초기화한 게 아닐까. 업무용 다이어리도 자기 횡령 사건 관련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없애놓고 김형준 지시로 없앴다고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형준 변호인이 하나씩 따진 내용은 모두 받아 적었다. 그렇게 모은 내용이 수백 쪽 분량이다.

 

그런데 피고인 신문이 시작되자 김학성은 허위진술을 했다며 말을 바꾼다. 오히려 대검 수사팀이 사건을 무리하게 수사했다고 질타했다. 검사들은 당황했다. 김학성 발언이다.

 

“2016년 9월 검찰이 자신을 구속시키는 이유가 김형준 검사의 비위를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강했다. 나는 김형준을 향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때마침 대검 수사팀 의도가 느껴졌고 그에 맞춰 진술했다.”

 

1심 재판 선고가 나왔다. 검찰과 피고인 측 모두 항소했고 항소심이 열렸다.

 

김학성은 검찰 수사 때 진술이 진실이었다고 말을 또 바꿨다. 김학성은 왜 진술을 계속 번복했을까.

 


 

먼저 1심 재판 막바지에 그동안 검찰 진술이 거짓이었다고 말한 배경부터 보자.

 

김학성이 설명한 상황은 이렇다.

 


 

1심 재판이 열리는 날 법정대기실에서 만난 김형준은 울면서 진술 번복을 사정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본 교도관이 김형준을 제지하지 않았다. 단지 김학성을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태워 보냈을 뿐이다.

 

1심 재판 진행 중에도 김형준은 재판부 시선을 피해 김학성에게 말을 걸었다. 살려달라며 이번에 유죄를 받으면 죽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목을 매는 시늉까지 했다. 친구를 다시는 배신하지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다고 한다.

 


 

김학성 주장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1심 재판에서 수의복장을 한 김형준과 김학성은 변호인 좌석 뒤쪽에 앉았다. 김학성 말처럼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서로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한 친구가 말을 걸면 다른 친구는 귀를 가까이 대고 듣는 모습도 보였다. 방청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형준 친척 중 한 명은 속이 터진다고 했다.

 

김형준은 직접 증인신문을 하다가 이 대목에서 울먹거리기도 했다.

 

“사적인 문제 때문에 정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30년 된 고교 친구한테 급전을 빌렸는데...”

 

흐느끼는 김형준을 보며 김학성은 마음이 움직였을까. 김학성은 1심에서 재판장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30년 지기 친구 부탁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심 재판이 끝나자 대검찰청은 김학성을 다시 소환하게 된다.

 

항소심 재판에서 다시 검찰 증인으로 나온 김학성은 확고하게 오직 사실만을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김학성은 형사사건에 얽히면 도움을 얻고자 김형준에게 보험을 든다는 생각으로 술을 샀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항소심에서도 이 진술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김형준을 너무 자주 만나서 볼 때마다 그런 의도를 깔지는 않았겠지만 어떤 문제가 생기면 형준이가 자리를 걸고 나를 도울 것이라는 기대가 없었다면 술을 샀겠느냐고 되물었다.

 

김학성은 왜 다시 진술을 번복 한 것일까?

 

1심 선고가 나오고 항소심까지 김학성에게 시간이 제법 있었다. 김학성은 재판 기록을 받아 다시 살펴봤다. 김학성은 재판 기록을 거듭 읽을수록 김형준이 친구였다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무슨 내용 때문이었을까.

 

김형준은 1심에서 김학성이 허위진술을 하게 해 놓고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김학성이 허위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함으로써 수사 초점을 피고인(김형준)에게 맞춰서 김학성에 대한 검찰의 수사방향을 흐리게 하고, 김학성이 수사에 협조하는 것 같은 외관을 만든 다음에 구형량에 이득을 보고자 함이었다.”

 

김학성은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학성이 언론에 폭로하면서 당시 서울서부지검 수사팀도 감찰조사 대상이 됐다. 김학성에 대한 횡령사건 수사는 더욱 엄정하게 진행됐고 선처를 기대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 발로 뛰는 김희란 변호사 블로그 사진 인용

 

그러나 김형준 측 변호인 생각은 달랐던 듯하다. 1심 재판이 끝나자 김학성이 대검찰청에 다시 불려 나가게 된 부분을 공략했다.

 

몇 번 소환됐는지, 검찰 조서를 작성했는지, 대화 내용은 무엇인지 세밀하게 따졌다.

 

김학성은 평소 주변 사람에게 오강수를 ‘케어한다’, 김형준을 ‘케어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되고 나서 한 지인을 접견했을 때도 김학성은 ‘케어’라는 말을 썼다.

 

“서부지검과 대검은 틀려. 서부지검은 나를 죽이려고 하고 대검은 나를 케어해준단 말이야.”

 

김형준 측 변호인이 ‘케어’ 뜻을 묻자 김학성이 답했다.

 

“서부지검이 보기에 저는 일방적인 피고인이고, 대검은 뇌물공여자로서 공여자 진술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중요하고 아무래도 서부지검처럼 저를 막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검찰 증인으로 증인석에 선 김학성을 바라보는 김형준 시선도 분명히 1심 때와 달랐다. 마치 부장검사 시절 자기와 상관없는 사건 보고를 받는 듯한 그런 무덤덤함이 묻어 나왔다.

 

2심 재판부는 김형준에게 집행유예를 선사했다. 김형준은 기자들에게 소회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모함을 걷어낸 법원에 경의를 표한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나를 케어해줘> 원고는 그대로 묵혀뒀다. 법원이 판단을 내린 사건인데 굳이 들출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각자 자기 인생을 충실하게 살기를 바랐다.

 

2019년 하반기부터 박수종 변호사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뉴스타파>는 박수종 변호사 비리 의혹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 뉴스타파 방송화면 캡처

 

박수종은 법정에서 2015년 당시 여러가지 금융범죄 혐의로 금융위원회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그중 한 건을 대검에 의뢰했고 사건은 서울남부지검으로 이첩됐다.

 

당시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수단장이 김형준이었다.  박수종 변호사는 이 자리가 대한민국에서 뇌물 받기 가장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김형준이 (김학성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생각한 적이 1초도 없었어요. 그리고 제 머릿속에는 김형준이 뇌물을 받으면 남부지검 합수단장 할 때, 10억~20억 원을 받지 1500만 원을 왜 받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박수종은 법정에 나와 김형준을 두둔했다. 2016년 검찰에게 도피중인 김학성 소재를 이야기해 긴급체포가 되게 한 것도 박수종으로 드러났다.

 


 

김형준과 박수종 관계에 의혹이 짙어져갔다.

 

 

▲ 뉴스파타 방송 화면 캡처

 

<뉴스타파>는 구치소에 있는 김학성과 접촉해 그가 말하는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전했다.

 


(김학성) “김앤장에도 너랑 친한 변호사들 많은데 왜 옷 벗은 지 10년이나 된 박수종을 자꾸 전면에 내세워 일처리를 하자고 하냐?”

 

(김형준) “걔 주식도 많이 돌리고 함께 엮인 게 있으니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어. 내 말 들어.”

 

(김학성) “무슨 주식을 돌리는데?”

 

(김형준) “주식 해서 돈 좀 만졌는데 문제가 있거든. 지금은 내 말 들을 수밖에 없어. 근데 이런 일 처리는 베스트야.”

 


 

법정에서는 들어보지 않았던 내용이다. 2019년 10월 25일 <뉴스타파>는 김학성과 김형준이 통화한 내용을 편집 없이 모두 공개했다. 그 통화 내용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 통화 내용 중 김학성이 ‘셀프 고소’ 작전이 실패하자 김형준에게 항의하는 부분이 있다.

 

이때 김학성은 김형준에게 "박수종이 네 말을 잘 듣는다고 했잖아!"라며 화내지 않는다. 김형준도 김학성에게 “박수종은 제삼자이며 지 아쉬운 게 뭐가 있겠어”라 “자기 아이디어 차원에서 그렇게 말했는데 지가 틀렸다고 해서 손해 보는 게 뭐가 있겠어”라며 설명했을 뿐이다.

 


 

2020년 2월 6일 누군가 카톡으로 기사를 보냈다.

 

학성이 또 김형준을 뇌물 의혹으로 고발한 내용이다. 김학성은 박수종 변호사가 김형준에게 뇌물 4000만 원을 건넸다고 주장했다. 서울남부지검 검사들과 주가 조작 전문가가 얽힌 검은 커넥션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이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이 순간 자신이 데리고 있던 검사들까지 한 묶음으로 매도되는 상황을 마주하는 김형준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재판에서 김형준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다는 게 드러났지만 방송은 여전히 폭로자 진술에 무게를 둔다.

 

김학성은 오래 전 입원한 적이 있다.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 김학성 씨 아내는 당시 문병 온 사람은 김형준 뿐이었다고 증언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고교 동창 30년 지기, 그 세월 안에는 경쟁, 애정, 시기, 질투 등 온갖 감정이 묵혀있다. 김형준에게는 여전히 큰 인생 숙제다. 그 문제를 푸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이 글을 쓴다.

 

 

 -The End-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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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케어해줘. 연재 순서.

⦁제1화. 보험성뇌물의결말 (폭로자 김학성 시선)

⦁제2화. 제말이그말입니다 (김학성 동업자 한수찬 시선)

⦁제3화. 앞뒤좌우완벽하게 (김학성 구치소 동료 오강수 시선)

⦁제4화. 부친사망일의진실 (김학성 전 사업 파트너. 이문재 시선)

⦁제5화. 난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변호사 시선)

⦁제6화. 대검케어가최고야. (작가 시선)

 

 

 

 

 

 

 

 

 

<김형준 '스폰서 검사' 사건 재판 추적기> 제4화. 부친 사망일의 진실 – 이문재 시선.

 

 

내 이름은 이문재다. 김학성과 나는 2000년쯤부터 돈거래를 했다. 김학성이 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김형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말만 하면 김형준이 불법 소프트웨어를 단속해주기 때문에 용산에서 내게 잘못 보이면 큰 일 난다. 내가 여기를 꽉 잡고 있다.”

 

 


 

김학성은 2012년 5월 출소하고 나서 나에게 투자를 요청했다. 이때도 김형준 이야기를 꺼냈다.

 

“김형준 검사가 한국에 있었으면 내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형준 검사가 외국에서 돌아와서 억울한 이야기를 듣고 해결해 줘서 나왔다.”

 

2012년 7월쯤 한 술자리에서 김형준을 소개받았다. 김학성이 김형준에게 고마워서 대접하는 자리 정도로 짐작했다. 물론 김학성은 검사 친구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테다.

 

나는 출소한 김학성과 사업을 함께 운영했다. 2012년 7월 ‘KK인터네셔널컨퍼런스’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나는 대표이사로서 투자와 차용을, 김학성은 사업을 도맡았다.

 

출소 직후 김학성은 사업자 이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나에게 사업자등록과 투자를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이 이것은 다 가지고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우리는 사업을 하겠다.”

 

회사를 설립하자 김학성에게 법인카드를 내줬다. 김형준과 술자리를 함께 할 때도 김학성은 술값을 법인카드로 계산했다. 불쾌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결국, 내 돈으로 술값을 계산하면서 온갖 생색은 김학성이 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김학성에게 술값을 법인카드로 결제하는 것은 자제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김학성은 나와 돈거래 중 일부가 김형준 뇌물로 흘러갔다고 했다.

 


 

나는 법정에서 김학성과 돈거래 부분을 증언해야 했다. 증언 당시 법정에서 장부를 공개했다. 빌려준 돈 사용처를 꼼꼼하게 적어둔 장부였다.

 

"김학성과 김학성 처 딸, 휴대폰 통신비, 쌀값, 병원비, 학원비, 아파트 관리비, 보험료, 생활비, 졸업비"

 

빌려준 내역이 계속 나열됐다.

 

"2013.4.15. 70만 원 김학성 부친 병원비, 2013.7.25. 54만 원 김학성 부친 간병비."

 

이어진 내 발언에 법정이 소란스러워졌다. 김학성은 분명 2012년 12월 14일 김형준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형준아. 아버님이 가셨다. 당신 유언대로 고향에서 조용히 장례 치르고 마지막 길 가신다. 나중에 보자. 통화하자’.

 

 

김학성은 생존해 있는 아버지를 왜 돌아가신 분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김학성이 이 문자를 보냈던 시기 정황을 보자.

 


 

2012년 5월 막 출소한 김학성은 생활비도 없었다. 하루는 연체된 카드대금청구서와 휴대전화 문자를 내(이문재)게 보여줬다. 강제집행이 예정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학성은 전 처 이름으로 카드를 사용했는데 반드시 막아야 한다며 통사정을 했다. 당시 나도 힘들었던 시기여서 돈이 없었다. 그래서 대출을 받아 2012년 10월 15일 김학성에게 1000만 원을 송금했다. 통장에는 마이너스 1155만 원이 찍혔다.

 

검찰 조사에서 김학성은 이렇게 빌린 1000만 원 중 500만 원을 오강수 가석방 청탁을 위해 김형준에게 줬다고 했다. 상상도 못 한 일이다. 1000만 원 용도는 당연히 연체된 카드 대금 결제였다.  물론 김학성은 재판에서 카드 연체 이유를 김형준 접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1000만 원을 빌린 김학성은 이틀 뒤 술집 통채를 빌려 생일파티를 열었다. 그 비용을 누가 지불했는지도 이 사건에서 쟁점이 됐다. 법정에서 김형준 쪽 변호인이 물었다.

 

“그런데 이틀 뒤, 2010년 10월 17일 김학성은 <업타운걸>이라는 술집을 빌려서 생일파티를 하였고 200만 원 정도 비용이 소요됐어요. 이문재 씨가 김학성을 위해서 마련해준 것으로, 결재도 이문재 씨가 하였다고 했는데 김학성 진술이 사실인가요?”

 

나는 사실이 아니라고 답했다.

 

 

 

이처럼 김학성은 출소 후에도 경제적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고급술집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  당연히 술값 독촉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김학성은 내게서 빌린 1000만 원 중 500만 원을  김형준에게 줬다고 했다. 장소와 날짜도 특정했다.  비긴어게인이라는 고급 술집에서 2012년 11월 15일에서 12월 14일 사이라고 진술했다.

 

재판에서 김형준 변호인 측은 이를 탄핵하기 시작했다.

 

우선 김학성은 2012년 11월 1일 ‘비긴어게인’에서 외상으로 술을 마셨다. 12월 14일에는 김형준과 바로 이 술집에서 만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비긴어게인 사장은 11월 13일부터 12월 12일까지 술값 결제를 독촉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기간 동안 김학성은 “언제 처리해주겠다”라는 답변을 하며 다른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당시는 오강수도 김학성에게 사람을 보내서 여비서 횡령 문제를 김형준에게 처리해 달라고 재촉하던 시기다.

 

2012년 12월 14일 오전 10시 김학성은 문자 메시지 하나를 받는다. 읽어보니 은행이 보낸 카드 연체 내용이었다. 그날 김학성은 김형준에게 부친 사망 사실을 전했다.

 

김형준 변호인들은 김학성 부친 기일이 언제인지 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명예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못 드립니다.”

 

급기야 재판장이 당시 “살아계셨는지 사망한 상태였는지 그 사실관계를 확인해”달라고 요구 했다. 김학성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상태”라고 짧게 답했다. 재판장은 “살아계신 상태였습니까?”라고 재차 물었다.

 


 

내(이문재) 기억에도 김학성 부친 사망일은 2013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2014년 7월 김학성은 나를 회사에서 쫓아냈다.

 

당시 김학성이 사업을 하면서 KK인터네셔널컨퍼런스가 거래처 문제로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됐다. 나는 대표이사였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김학성은 대표이사가 없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나에게 2015년 2월까지만 피해달라고 했다. 나중에 문제가 해결되면 내가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놓겠다고 했다.

 

그 사이 김학성이 KK게임즈를 만들었는데 나는 전혀 관여하지 못했다. 그래도 김학성을 사기죄로 고소하지 못했다. 김학성이 부장검사를 친구로 뒀다는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사업가에게 검사 친구는 어떤 의미일까?

 

김학성은 구속 기간 대검찰청에 소환돼 김형준이 성공한 모습을 봤다. 김학성은 2012년 5월 2일 만기 출소하고 열흘 뒤부터 2개월 동안 김형준을 10회 만났다.

 

김학성은 재판에서 부장검사 친구인 김형준에게 잘 보여 사업 재개 과정에서 도움을 받고 싶었던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시인했다. 김형준 주변에는 좋은 인맥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변에 부장검사 친구인 김형준 얘기를 자주 한 것도 투자를 끌어내려는 의도였다고 인정했다. 부장검사와 친구 관계를 유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출소 후 고교 동창생들 인맥 복원에도 도움이 됐다. 김형준은 동기들 중에 가장 우수한 친구였다. 그래서 동창생들은 형준이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자리에서 김학성은 김형준과 친근하게 통화하며 옆에 있는 동기를 바꿔주기도 했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2016년 9월 김학성이 오랫동안 김형준 스폰서 노릇을 하면서 수 억 원 여치 술도 사주고 돈도 줬다는 기사가 신문과 방송에 나왔다. 이 뉴스에 동창들 사이 전화통에 불이 났다. 한진우, 김형준. 김학성 모두 고교 동창이기 때문이다. 법정에도 동창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필자는 본의 아니게 김형준⦁김학성 동창들과 안면을 트게 됐다.

 


 

그중 대기업에 다니던 K가 증인으로 나왔다. K도 동창회에서 김학성을 알게 됐다. 김학성은 동창 K에게 사업 관련하여 K 인맥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K는 김학성이 평소에 술자리에서 계산하는 것을 많이 봤다. 김학성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선산과 주식이 있어 돈이 많다는 건 평소에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김학성이 김형준에게 뇌물로 술을 사줬는지 궁금했다. 동창 K는 김학성이 구속되자 면회를 갔다.

 

“네가 뇌물이라고 줬다는데 맞냐?”

“내가 5억 8000만 원 넘게 술을 사줬는데 형준이 생각해서 줄이고 줄여서 5800만 원이 된 것이다.”

 

김학성이 이렇게 큰 소리를 친 반면, 당시 김형준 검사는 공황 상태였으며 기억을 잘 못했다. 변호인들이 “사실이 뭐냐?”라고 물어보자 김형준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술 마신 것은 맞다. 그런데 둘이 간 적 없고 여러 명 있었다. 돈 받은 것은 없었다.”

 

김형준은 둘이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가보면 꼭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당황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체 진실이 무엇일까? 이제 김학성에게 다시 자세히 물어볼 차례다. 그런데 피고인 신문에서 김학성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재판장에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재판장님, 제가 위증했습니다.”

 

김학성은 공소장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며 사실대로 털어놓겠다고 나섰다. 내용은 이랬다.

 

김학성이 체포 될 당시 알코올 중독자처럼 매일 술을 마셨다. 그런 상태에서 긴급 체포돼 대검찰청에서 매일 새벽 2~3시까지 조사받았다. 검찰이 김형준 비위를 무마하고자 자기를 구속했다고 확신했다. 검찰과 김형준을 향한 적개심으로 가득했기에 대검찰청 특감팀 수사 의도에 맞춰 진술했다는 것이다.

 

“김수천 부장검사와 진경준 검사는 억 단위인데, 김형준과 저는 해봐야 몇 천만원이다. 금액을 올려야 한다. 다른 거 없느냐”

 

김학성은 검찰 압박을 고스란히 느꼈다고 했다. 피고인 신문에서 김학성이 자백한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  술 먹은 사실은 맞다. 향응접대는 아니다.

●  지금까지 김형준에게 17년 동안 구체적인 청탁 한 적 없다.

●  김형준에게 보낸 돈은 계좌로 보낸 500만 원과 1000만 원 이외는 없다.

●  증거인멸 관련해서 휴대폰 초기화는 박수종 변호사 지시다.

 

검찰과 변호인 모두 하필이면 1심 재판을 마무리하는 날 이런 자백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김학성은 이렇게 답했다.

 

“7월 9일 박수종 변호사가 와서 증언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형준이와 저는 박수종 변호사 농간에 놀아난 것입니다. 아마 형준이는 몰랐을 것입니다. 형준이도 박수종 변호사가 하자는 대로 했을 것입니다.”

 

▲ 뉴스타파 방송 화면 캡처. 오른쪽이 박수종 변호사

 

김학성은 박수종 변호사가 핸드폰 초기화를 지시했고 김형준과 자기 사이에 끼어서 사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제 박수종 변호사를 만나봐야겠다. 박수종은 검찰 출신이다. 김학성은 김형준이 그를 ‘형사사건의 베스트’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수종은 법정에 나와 정반대 증언을 한다. 박수종 증언 내용을 요약해보면 ‘형사사건 베스트’는 오히려 김학성이었다.

 

(다음 5화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박수종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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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제10화(최종화) MBC 파업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전라도 장흥 남포갯벌은 자연산 굴로 유명하다. 아침이면 굴을 채취하고자 장비를 챙겨 바지선을 타고 남포 갯벌로 향하는 아낙네로 붐빈다.

 

바닷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나면 본격적인 굴 따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갯벌에 발이 빠지고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험한 날씨를 감내해야 한다.

황 대표는 몇 해 전 겨울 남포 갯벌을 찾았다. 매서운 칼바람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한구석에 앉아 바닷물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황 대표는 할머니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추운데 뭐하러 나오셨어요! 이걸 해서 얼마나 번다고."
"난 이거밖에 없승게."

이곳 어머니들은 굴을 캐서 자식을 먹이고 입혔다. 굴을 따고 까서 그 알맹이를 추려내는 작업은 지난하다. 장성한 자식들은 고향을 떠나 각자 자기 앞가림을 하며 살 것이다.

 

어느덧 어머니는 노인이 됐다. 그 할머니가 지금 자식을 위하는 방법은 이렇게 굴을 보내주는 일이다. 아득한 시절부터 어머니들은 그랬다.

 


황풍년 대표는 지금 사는 사람이 자존감을 세우려면 그런 어머니들 이름과 삶을 기록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억의 중요성을 영화 <더 기버-기억전달자>에 나오는 기억전달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기억들은 과거로 치부할 게 아니라 미래를 결정짓지."
"과거 기억을 이용해 현재를 조언하는 거야. 모든 게 연결되어 균형을 이루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는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한다. '늘 같은 상태'로 기억을 통일했기 때문이다. 서로 사는 공간과 환경이 다른데 같은 기억만 존재한다는 것은 기억이 지워지고 조작됐다는 뜻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선, 그렇게 빼앗겼던 기억이 다시 돌아올 때 흑백이었던 배경이 모두 천연색으로 바뀐다.

 



사람에게 없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스스로 기억전달자가 되기로 했다. 경남 진주시 명석면에 살았던 홍순한(1921-2000년초)씨 인생을 그 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하나뿐인 면 단위 역사서 <명석면사> 덕이다. <명석면사> 근현대사 편을 보면 이 지역에서 좌익운동을 했던 홍순한 씨를 비중 있게 다룬다. <진주신문> 기자였던 김경현 씨가 1998년 취재와 집필을 맡아 완성했다.

 

 


'일제강점기 좌익운동'을 흔히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저항운동이라 일컫는데,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를 할 것이다. 이는 1917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러시아 혁명'에서 시작됐다.

 

'사람 사이의 평등'과 '외세에 대한 해방'은 조선인들을 사로잡았고, 1920년대는 지역 곳곳에 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 등이 생겨났다.

바로 이 시점인 1921년 홍순한은 진주군 명석면 계원리 홍지동에서 태어났다. 명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1942년 일본 대판공과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1942년 조선인 고학생 비밀결사이던 '통나무회'에서 활동하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해방 후 대학을 중퇴하고 1945년 9월 일본 도근현 재일본조선인연맹 사회부장을 지내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공부하던 자본주의 관련 일본어 책에는 '자본주의 모순이 뭘까?'라는 낙서가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1946년 귀국 후, 명석면 홍지동 애향청년회를 조직했다.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결성된 건국동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국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로 전환됐다. 나름 해방 공간에서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리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되는 등 혁명적 분위기를 낳았다. 그러나 해방 후 미 군정 통치가 시작됐고, 행정과 치안에 친일파를 재 등용했다.

그러자 그해 10월 미 군정에 반대하는 인민항쟁이 전국 곳곳에 터지기 시작했다. 홍순한 씨는 명석면에 있는 경찰서를 습격했고 이로 인해 진주형무소에서 1개월을 복역했다. 출소 후에는 명석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이듬해 6월 5일부터는 좌익 세력에게 전향 기회를 준다는 명분으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그리고 경찰을 시켜 좌익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키도록 했다. 당시 각 지역에 인원을 할당하여 좌익이 아닌 사람까지 강제적으로 가입시키는 분위기였지만 경찰은 홍순한 씨를 보도연맹 가입대상에서 제외했다.

 

홍순한 씨도 '경찰에게 뻔한 반공 교육을 받기 싫다'며 가입을 거절했지만 경찰도 홍 씨를 가입시켜봤자 전향할 사람이 아니라고 봤다. 오히려 반공교육을 받고 전향해야 할 보도연맹 회원을 다시 좌익 쪽으로 전향시킬 사람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여름 난리'로 불리는 전쟁이 터졌다.

 

국군과 경찰은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며 전국 각지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을 소집시켜 어디론가 데려가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북한 인민군은 물밀 듯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인민군과 북한 노동당은 각 지역에서 다시 새로운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우익인사들에 대한 숙청을 자행했다. 진양군 16개 면 중 하나인 명석면 또한 1950년 8월에 인민군이 점령한다. 이 지역 또한 새로운 인민위원회를 구성했고 명석면 행정권과 치안권을 행사할 새로운 면서기장으로 홍순한 씨를 추대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14일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졌고, 다시 국군이 반격하면서 빨치산을 모두 정리하려는 작전을 펼쳤다. 당시 국군 시각에서 홍순한 씨는 부역자였고 총살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순한 씨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홍순한씨가 마을을 너무나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대신 홍순한씨는 도민증을 빼앗기고 거주지가 제한됐다.

그 후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을 낳았고, 자유당 몰락과 함께 반공 정권에서 통제를 받던 좌익 세력도 한층 너그러워진 사회 분위기를 타고 선거에 출마를 하였다. 홍순한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홍순한 씨는 5.16이 터지면서 공민권이 박탈됐다. 요시찰 인물로 거주지가 제한됐다. 2대 중앙 정보부장 김형욱에게 사면장을 받은 후에야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홍순한은 사면되자, 바로 지역 사업에 착수했다. 어릴 적 일본 학교에서 배운 측량기술을 바탕으로 초등학교 근처 하천공사에 나선 것이다.

홍순한 씨의 아들은 아버지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60대 중반인 큰아들(52년생)에게 없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전해주기로 했다. 이 기억은 아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우선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래는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그의 시점으로 정리한 것이다.

 




1. 출생 전

우리 아버지 삶에 대해서 전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단편적인 이야기는 순간순간 들었지요. 집에는 일본 책이 많았어요. 책 속에 일본 여자와 찍은 사진을 본 적도 있고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해방된 후 고국으로 돌아와 소위 좋은데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 말하는 '좌파 물'이 들어서 고생 많이 했지요.

한국전쟁 전에 사람들 불러 들어서 오라 할 때 가면 총살시켰다 아입니까.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보도연맹 가지 말라 했는데, 아버지 말 들은 사람은 살았고. '오라 캐라' 해서 간 사람은 죽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좌익들 다 죽일 때인데 외가 시골집 보면 지붕 아래 비었거든요. 아버지는 경찰이 잡으러 올까 봐 천장 위에서 약 3년간 살았대요.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용공분자 찍혀서 고생 몇 년 하다가 잡으려고 더는 안 오고. 명예도 회복시켜줬어요. 내는 아버지가 존경스러운 것이 어쨌든 간에 시대를 살다 보면 그 당시 좌익공산주의 거기에 물든 사람은 거기가 좋으면 지리산 골짝으로 갔다가 북한으로 가는데,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거기에 계속 빠져서 그런 길로 간 게 아니라 일반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와서 생활하셨지요. 1952년에 제가 태어났어요.

 

 



2. 출생 후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기억이 많이 나요. 그때 우리 집은 농사짓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몇 달씩 나가서 측량 일을 했어요. 아버지가 일본에서 배운 측량기술로 갱남 지적도 도면 그리는 일을 했지요. 아버지는 갱남 안 돌아다닌 데가 없어요. 중학교 방학 때는 제가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지적도 도면에 번지를 쓰곤 했지요. 그때 마산도 가보고 거제도 와보고.

부친이 사면장을 받을 때는 제가 객지 생활을 했어요. 당시 <경남일보> 신문을 누가 갖다 주더군요. 사면됐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그 후에 아버지는 지역사회 일을 많이 하셨어요. 계원초등학교 앞에 개울이 있는데, 개울이 3개로 분리돼 물이 차면 차도 못 오고 아무것도 못 와요. 비가 오면 사람이 죽기도 해서 공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빨갱이 아들' 손가락질받은 적이 있는지를 묻자) 그런 적 한번 없습니다. 내가 고등학교를 진주시내로 다녔는데, 버스 타고 동네를 수십 개 거쳐 가거든요. 내가 기억하기에는 "누구 아들이냐?" 물어봐서 답하면, 다들 "아 그렇습니까?" 하고.

그런데 ○씨라고 있었어요. 사사건건 부딪혔어요. 부모님은 이야기 안 하는데, 살다 보면 혹시 적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지요. ○씨 아들은 저보다 한 살 많은데 학교도 같이 다니고, 마주쳐도 그런 이야기 안 해요. 서로 인사하지요. 사실 그 아들도 자기 아버지가 이야기를 안 하면 모르겠지요.

우리 부친은 그 지역에서 가장 똑똑하다 해서, 다들 물어보러 왔어요. 선거에 나가고 싶은 사람도 와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물어봤고, 예전에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될 때도, 평화통일 자문회의. 그거 할 사람도 와서 "내가 하면 되겠느냐?" 물어보러 오고, 옛날에는 촌에 차가 안 다녔을 때라 집 앞에 지프차가 오면 누가 인사하러 온 거죠. 경찰 서장이나 진양 군수가 바뀌면 인사하러 왔어요.

 

 


 


3. 사회주의와 진주 서부경남 정서의 만남

(부모님 금슬은 어땠는지?) 옛날에는 금슬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사는 거지요. 예전에 어머니가 마루에 아버지 밥상을 갖다 줬는데 밥이 설익어서, 아버지가 조그만 나무 상을 들어서 마당으로 던져버렸어요. 밥상과 그릇이 다 깨졌지요. 그래도 어머니는 밥상을 다시 차려서 갖다 줘야 했어요.

 

아버지가 일본 유학을 갔다 왔다 해도 유교사상은 안 바뀐 거죠. 내가 고등학교 될 때까지 엄마와 밥상을 같이 안 썼어요. 동네에 부부가 겸상하는 집 없었어요. 아버지와 저만 따로 밥 먹었어요. 나머지는 상 없이 먹었고요.

우리 마누라가 시집을 왔을 때, 동네에 아버지 4형제가 살았다는 거 아입니까. 새 애기가 시집오면 아침마다 큰 백부 둘째 백부 순으로 문안인사를 하거든요. 내가 1월 4일 결혼했으니 한겨울인데. 얼마나 춥겠습니까. 3일간 가니까 큰 백부가 "애야 됐다. 고만 와라" 하니까 그만했지요.

 

결혼해서 3년까지는 집에 가서 아버지를 보게 되면 마당이면 마당, 바로 그 자리에서 큰절을 해야 해요. 서부경남이 심하지요. 억수로 많이 예의 따지고요. 아버지는 큰아들인 제게는 억수로 엄했는데, 제가 군대 갔다 오니까 어른 대우를 해주더군요 같이 술 한 잔도 하시고.

아버지 환갑잔치를 제가 해 드렸어요. 시골집에서 동네 사람들 다 오게 해서. 아버지는 농사철 외에는 집안에 매이지 않고 각종 모임에 참석하셨어요. 그 당시 향교, 종친회도 가고, 진주문인들 모임에도 간 모양이에요. 돌아가시기 전에 나 보고 그러더라고. "비석문은 누구누구에게 부탁하면 써줄 것이다"라고.

90년 초에 아래채를 수리하시다가 낙상해서 골반을 다치셨어요. 진주의료원에서 응급조치했는데, 그 후로 10년 있다가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아침까지 말씀하시다가 낮 12시쯤 돼 돌아가셨지요. "아버지"라고 부르면 고개 끄덕끄덕하고.

(부친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묻자) 아버지가 나이가 들었을 때 또래들 모이면 서로 안 된 이야기를 한다 아입니까.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제일 행복하다. 내 앞에 먼저 자식이 죽었나, 마누라가 죽었나. 땅이 없어서 빌어먹으러 가나. 내는 하고 싶은 대로 살았고, 내가 제일 행복하다."

 



아래는 홍 씨 아들에게 <명석면사> 기록을 전해준 것이다.

 


- 부친이 4.19 후, 해방공간에서 선거에 출마한 적 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버지는 나간 적 없는 걸로 아는데요. 뭘 했습니까? 아버지 정치 이야기 거의 안 하셨는데… (기록을 보여주니까) 아…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선거운동을 어떻게 하면 이긴다. 이런 말을 해줬구나."

-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조직 활동을 하신 것은 아는지요? 일본 유학생 시절에 통나무회.
"아, 그때부터 했구나."

-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학교 선생님을 했는데 혹시 아세요?
"음…"

- 6.25 시절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면서기장 경력은?
"모르는데… 그런 경력들은 잘 모르는데…"

- 거주지 제한은?
"몇 년 제한됐습니까?"

아들은 <명석면사>에 적힌 아버지 기록을 읽고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지금 보니까 이렇게 아버지 스펙이 화려한지도 몰랐지만 이렇게 고생한지도 몰랐어요"

 

 

(다음 마지막 화 -  MBC 파업 네트워킹)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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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제10화(최종화) MBC 파업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크 종결자들>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김순재는 사람들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곤 했다.

"지금 자기 집에서 나락 농사짓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논에 나락을 심고 논농사 형상을 유지하면 정부가 직불금을 줍니까? 안 줍니까? 그런데 20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논에다 농사를 지으려고 물을 대면 뭘 냈나요? 수세를 냈지요. 농지위원회에서 물세를 받아갔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잘 살지 못하지요? 왜 그렇지요? 자기 삶이 만족하고 있나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농민은 왜 잘 살지 못할까? 1970년대 농활을 왔던 대학생들은 이 문제로 토론했다. 게을러서 못 산다는 의견도 있었다. 일을 하다가 간식을 먹는 농민을 보고 밥을 많이 먹어서 못 산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구조적 모순에서 원인을 찾는 이도 있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세웠다. '최소 투자와 최대 수익'이라는 핵심전략은 당연히 노동자 희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저임금 정책은 농촌정책까지 연계됐다.

당시 정부가 내건 농촌정책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증산'이다. 농민들은 정부가 정해주는 쌀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벼 품종을 선택했다. 농약과 비료 사용량이 덩달아 많아졌지만 철저하게 자부담이었다. 두 번째는 저곡가 정책이다. 노동자 임금을 높이기보다 쌀 가격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묶어 사회적 불만을 누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증산정책과 저곡가 정책은 농사를 지을수록 생활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1961년 박정희 정부는 농업협동조합법을 만든다. 지역별로 농민 조합원이 공동 대응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자치조직이 생긴다. 바로 농협이다. 각 지역에서 가장 큰 조직으로, 농협은 지역 네트워크로 따지면 최대 규모 민족은행이다.

하지만, 조직적인 네트워크로 농촌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선 것은 바로 농민회다. 1988년에 전국농민회가 조직됐다. 그즈음 대학을 마치고 고향인 경남 창원 동읍으로 돌아온 이가 있었다. 바로 김순재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보며 '대학 졸업해서 왜 여기 와 있지?'라고 생각했다.



김순재는 초창기 농민회에 가입하여 수세 징수 폐지 운동을 벌였다. 2000년 초, 쌀값 보장을 촉구하며 나락 적재 투쟁을 벌였다. 김순재는 창원농민회 사무국장에 이어 경남도연맹 사무처장을 맡았다. 사무처장은 살림을 책임지고 각 조직 사이 연대를 만들어내는 자리다.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국회의원 선산을 파분다고 협박해도 결국 한-칠레 FTA는 2004년 2월 16일, 국회 비준을 받는다. 농민들은 농민 출신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없는 현실에서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절감했다.

 

이는 농민들의 '정치세력화'로 나타났다. 농민회 출신들이 도전장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2004년 17대 총선에서 강기갑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강기갑과 함께 활동했던 김순재는 2010년 2월 농협 창원 동읍 조합장에 당선됐다. 지역 조합장 선거에 도전하여 실질적 모범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명도가 높지 않았다. 게다가 보수적인 동네에서 민주노동당 간판을 달고 현직 조합장을 이기는 게 과연 될지 의문이었다.




지역 헤게모니가 공고한 지역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킹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필요로 했다. 주변에서 김순재 선거운동을 돕겠다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선거운동 중반이 되자 힘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렇게 김순재가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서 상대방은 금품살포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김순재는 이런 불상사를 막으려고 한 가지 묘안을 낸다. 평소에 친하게 지낸 형들에게 농협으로 가서 수천만 원 대출 신청을 하도록 했다. 농협 직원이 물었다.

"왜 이리 많이 대출하십니까?"

"순재가 어디 쓸 건지 모르지만 빌려달라네."

동네에서는 '김순재가 총알을 수억 준비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김순재는 상대가 돈을 쓰면 자신은 더 많이 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게다가 자원봉사자들이 금품살포를 막으려고 '길목 감시조'가 됐다. 선거 나흘 전부터 현직 조합장 선거운동원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차를 대놓고 지켜보고 따라다녔다. 선거에서 표심을 잡는 방법 중 하나인 금품 살포 행위는 포착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인물 선거'로 이어졌다.

 


결국 김순재는 민주노동당 간판을 걸고 8표 차이로 2010년 창원 동읍 농협 조합장으로 당선됐다.

 


 

동읍 농민들 생활에는 당장 변화가 찾아왔다. 벼와 감을 생산하는 농가들이 한층 편해졌다는 게 공통된 여론이었다.

 

벼농사에 기본이 되는 모판 재배와 농약 치기는 농협에 신청만 하면 해결됐다. 벌레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감나무를 코팅하는 재료인 유황합제 제조 또한 농협이 책임졌다. 그간 유황합제 제조는 개인이 석회와 유황을 넣고 끓이다가 조금이라도 몸에 튀면 흉터가 생기는 등 갖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 같은 정책은 농민에게 호응을 얻었다. 창원 동읍 변화는 지역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같은 생활권인 대산면과 북면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동읍과 자기 지역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지역에서 김순재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하지만, 김순재는 조합장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2016년, '농민대통령'이라 불리는 농협중앙회 회장 선거에 도전한다. 현 상황에서 농협중앙회 개혁 없이는 지역 농협 변화에는 한계가 있고, 더 나아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농업협동조합 구조를 살펴보자.

조합원들이 출자하여 각 지역 농협을 세웠다. 그런데 각 지역 농협들이 서울에 있는 정부를 상대하기가 어렵기에, 각 지역농협이 출자하여 자회사인 농협중앙회를 세웠다. 즉, 농협중앙회는 지역농협을 돕고자 만들어진 자회사이며, 2선 조직이다.

그런데 지금 지역 풍경은 2선 조직이 장사하겠다고 1선 조직 구역을 침해한다. 한 길목에 농협은행(중앙)과 각 지역농협이 마주 보고 영업하는 것이다.

 


하지만, 힘이 한 곳으로 집중되면 그것은 선순환 구조 형태를 띠지 못한다. 힘을 가진 쪽이 싹쓸이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점포수에서는 지역 농협 수가 앞선다.

물론, 지역농협과 농협중앙회 관계도 예전과는 많이 변했다고 다들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역방송국보다는 서울방송국을 선호하는 것처럼, 농협도 '이왕이면 농협중앙회가 더 좋겠지'라며 쏠려버리면 지역은 없어진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2016년 1월 12일 농협중앙회장 선거가 다시 간선제 방식으로 치러졌다. 이날 참석한 농협중앙회 대의원과 농협중앙회장 등 선거인 289명의 표 중 김순재는 '5표'를 받았다. 김순재가 도전할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김순재가 과연 바꿀 수 있느냐는 의문을 표했다.

강기갑은 첫 발을 내딛지 않으면 두 번째, 세 번째를 내디딜 수 없다고 말했다. 비가 많이 올 때 가만 놔두면 빗물이 사방으로 흩어지지만 고랑만 살살 긁어주면 그 방향으로 빗물이 흘러가는 원리를 설명했다. 그렇게 빗장만 열어주면 거대한 물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김순재 도전 역시 거대한 물길의 빗장을 여는 첫 발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우리 역사에도 거대한 물결이 있었다. 학자들은 우리 역사에는 가장 위대한 저항운동이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일제강점기 좌익운동이다.

 

(다음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Posted by 상서로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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